072.
072.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요!”
우박처럼 쏟아지는 매서운 타박에 야스민 공은 말을 잃었다.
“대리인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의 신뢰는 어떻게 보증하죠?”
“그게 아니라······.”
야스민 공이 간신히 입을 열었으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이건 분명히 짚고 넘어갈 문제예요!”
야스민 공이 나를 향해 눈빛을 보냈다.
네가 화내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왜 얘가 이렇게 성내는지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내가 개입했다.
“저기······.”
“오메가 님은 가만 계세요!”
“네······.”
야스민 공에게 화를 내는 건 신시아였다.
내가 브리가드와 접촉했다는 소리를 듣고 단박에 나를 데리고 야스민 저택으로 와서 야스민 공에게 항의하고 있었다.
당사자인 나보다 더 열을 내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어째 스스로 흥분을 이기지 못해 이제 나도 잡아먹을 기세였다.
“오메가 님도 너무해요! 그렇게 위험한 자리에 가시는 거면 저한테 말 한마디 정도 해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의뢰도 아니었다면서요. 어쩜 사람이 그래요?”
“저도 그런 자리인 줄 몰랐어요. 그저 사기꾼 족친다고만 생각해서······.”
“이수련은 어디 있었는데요! 제가 없으면 걔라도 써먹었어야죠.”
야스민 공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신시아, 그분 이름을 그렇게 막 부르는 건 조금 그렇구나.”
야스민 가문은 네오-서울의 초창기에 터를 잡았지만, 이수련은 그 이전부터 이곳을 수호하던 일족이다.
비록 지금에 와서 그 역할은 다른 이들에게 넘겨줬다고 하지만 아는 사람들에게 이수련은 전설적인 존재라고 한다.
그러니 야스민 공이 보기에 신시아가 이수련이라고 이름을 막 부르거나, 심지어 걔라고 대충 부르는 것이 조금 불편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이수련은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앨리스가 이수련에게 물어봤더니 팀 오메가 멤버라 상관없다나?
사무실에서 보면 신시아가 이수련과 앨리스를 챙기는 언니 역할을 맡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게 반발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지금 중요해요, 아버지?”
야스민 공을 향하는 신시아의 붉디붉은 시선.
“그래, 중요하지는 않지.”
신시아가 펄펄 뛰며 열을 내놓은지라, 내가 뭐라 하기 참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브리가드라는 곳도 마도공학 유물과 제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고 추정하는 정도에 그쳤어요. 그것도 아주 얕은 정도로요. 야스민 공께서 일을 가볍게 처리하셨을 것 같지도 않고요.”
어쩌다 야스민 공을 두둔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지만, 이게 내 솔직한 감상이자 분석이었다.
마지막에 마데르노를 향해 툭 던진 말을 제외하면 나는 끝까지 관계가 없다는 자세를 견지했고, 그들도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내가 계속해서 반감을 보인 것도 크겠지만 일단은 그들도 정확한 증거 없이 추정만으로 움직였다고 생각한다.
추정만으로 두 명에게 퓨어화 수술을 시켜 내게 접근시키는 그 과감성 하나는 혀를 내두를 수준이긴 했지만······.
내 지원사격에 야스민 공의 얼굴이 살아났다.
옆에서 분열된 또 다른 야스민 공이 다가와 말했다.
“그래, 오메가의 말이 맞다. 내 일 처리가 그리 허술할 리 없지. 아니, 허술할 수가 없다는 쪽이 더 맞으려나.”
차분하고 이성적인 감정인 것 같았다.
뒤의 서재 2층에서 또다른 야스민 공이 훌쩍 뛰어내려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이참에 브리가드를 뭉개버리는 건 어때? 그놈들의 습격 때문에 유적지 탐사에 지원하는 용병단 씨가 말랐어. 위험하게 탐사단 호위를 하느니 브리가드에 협력하는 편이 더 쏠쏠하다는 말도 돈다더군.”
이쪽은 활발하고 진취적인 감정인 것 같고.
두 야스민 공은 서로 자기가 맞다면서 싸우기 시작했고, 신시아는 관처럼 생긴 야스민 공의 침대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머리에 장치를 쓴 야스민 공이 누워있었다.
“아버지! 적어도 본체로 맞이하실 줄 알았는데!”
그 말에 다른 야스민 공들이 침대로 와서 야스민 공에게 몸을 겹쳤다.
눈을 뜨고 머리 위의 장치를 벗은 야스민 공이 딸에게 말했다.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면 오히려 이걸 사용해야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변수와 위험 요소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기 위해 저걸 사용한다고 했으니까.
야스민 공이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내 손이 닿은 곳에서 자네 이름이 나올만한 곳은 없었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시 한번 점검하도록 하지. 의심이 가는 것은 아무래도 경매장과 사고 현장일 것 같군. 거기라면 자네가 유물을 만지는 능력이 있다는 건 몰라도 내 대리인이라는 걸 알기는 충분할 테니까.”
나 대신 신시아가 물었다.
“확실하신 거죠?”
“내가 입 밖으로 꺼낸 말 중에 확실하지 않은 게 있더냐?”
더는 얘기를 꺼내지 말라는 야스민 공의 의지에 신시아도 물러섰다.
“알죠. 흥분한 채로 얘기해서 죄송해요.”
“괜찮다. 원래 남편 걱정은 부인이 하는······.”
“아, 진짜! 그 얘기 하지 말랬죠! 누가 면전에서 그런 얘기를 하냐고요!”
신시아가 발을 쿵쿵 구르며 서재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니, 나는 그저······.”
멍청한 표정을 한 야스민 공에게 말했다.
“감히 조언 하나 하자면, 하지 말라는 건 안 하는 편이 좋아 보입니다.”
“자네 마음이 중요한 거 아니겠나?”
아직 미련이 남은 것 같은 야스민 공의 얼굴.
신시아에게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었다.
“서로 알아가는 단계입니다. 공께서 그렇게 부담을 주시면 저도······.”
일부러 말을 흐리자 야스민 공이 울상을 지은 채로 침대에 걸터앉아 옆에 놓인 유리 쇼케이스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야스민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나비가 습지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남자는 힘든 일이 있으면 자신만의 동굴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데, 저게 야스민 공의 동굴인 모양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빠져나와 젠이 기다리고 있는 지하의 체육관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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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승, 그 방탕한 자가 다시 네오-서울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끔찍합니다. 놈의 눈빛은 음란함을 뭉쳐놓은 것 같으며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 같이 천박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색승 얘기를 하니 보기 드물게 흥분하는 젠이었다.
그래, 멀쩡한 사람이 색승을 봐도 1분 이내에 극렬한 혐오감이 들던데 동자공을 익힌 젠이 보기엔 어떻겠나.
거기 끝을 잘라버렸다고 하니 젠은 뛸 듯이 기뻐했다.
“훌륭합니다. 이어 붙이거나 새로 생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 작자도 한 번 잃어보았으니 자중하겠지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놈이었어요.”
“이해합니다. 저도 색승을 패퇴시켰지만, 정신적 후유증으로 사흘을 앓아누웠습니다. 다만 의문점이 하나 생기는군요.”
“어떤 의문이죠?”
“색승은 기괴한 행실 때문에 저평가되고 있긴 합니다만 네오-서울의 많은 기인이사 중 보통 이상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무장을 갖춘 십 수명을 홀로 막아서서 전부 범하겠다고 선언하는 건 만용으로 하지 못 할 짓이다.
자신의 힘에 자신이 있어서 가능한 일.
비록 내가 변수로 작용해 물러나긴 했지만 말이다.
젠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자는 누구 밑에 몸을 의탁한 적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흔해빠진 지하조직에도 소속된 적이 없죠. 워낙 자유분방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어딘가에 속한다는 것이 힘든 것 같더군요. 그런데 스펙터와 함께 행동하고 있었고, 그 스펙터는 리벨리온을 불러오려 했죠. 리벨리온은······.”
“수연에게 지원받았다는 정황이 거의 확실하죠. 수연은 지금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고요.”
“맞습니다.”
“그 조직이 색승이라는 괴인까지 품을 정도의 역량을 지녔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수연이 그들의 머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배후가 있다는 건가요?”
“추측일 뿐입니다.”
“국제적인 범죄자를 몇 명이나 자기 아래 둘 정도의 인물······.”
“오메가 씨는 그들과 이미 몇 번이나 충돌했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씩 웃으면서 한 손에는 검을 전개하고, 다른 한 손에는 혈계조검술로 핏빛 검을 만들어냈다.
“제가 강해지면 조심할 필요도 없겠죠?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젠도 웃으며 소매에서 부채를 꺼내 들었다.
본격적인 대련이 시작되기 전, 젠이 내게 물었다.
“준비하는 건 잘 되어갑니까? 아직은 안정성이 부족해 보이던데요.”
“제 생각도 그래요. 너무 힘을 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힘을 빼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아십니까?”
“뭐죠?”
젠이 부채를 가볍게 휘둘렀다.
부채가 멈춘 곳에서 북이 찢어지는 것 같은 끔찍한 소리와 함께 매의 형상을 한 번개가 휙 들이쳤다.
“우악!”
검을 교차해 막아내자 웃고 있던 젠이 말했다.
“잔뜩 구르면 힘은 절로 빠집니다. 시작하죠.”
대련할 때 보이는 젠의 웃음은 왠지 진짜로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무섭다.
억눌린 흡혈귀 도사의 욕망이 이상한 방향으로 발산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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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뒤, 고기 먹으러 오래서 앨리스와 함께 페룬 마탑에 갔다가 돌아오니 미뤄두었던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며 잠시 네오-서울을 떠났던 이수련이 돌아와 있었다.
왜 여기로 돌아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반가워하는 앨리스의 표정을 봐서 그냥 넘어간다.
둘이 놀게 놔두고 내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잠시 후 이수련이 쭈뼛대며 다가왔다.
“잠시 본좌와 얘기를 나눌 수 있겠느냐, 오메가.”
불안한 느낌이 스쳤다.
지금까지 이수련을 보며 알게 된 게 하나 있는데, 바로 자기 기분이 좋을 때는 낭군이라 부르면서 뭔가 잘못하거나 사고 친 것이 있으면 오메가라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다.
“또 뭐 했죠.”
“그런 것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얘기해봐요.”
“브리가드가 오메가를 만나기 위해 네오-서울까지 왔다고 들었다. 정말이냐?”
앨리스가 얘기해 준 건가?
“네.”
“브리가드는 마도공학을 맹신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다. 아주 거칠고 위험하지. 사이비 종교와도 같다.”
“그래 보이더라고요.”
어째 대화가 진행되지 않고 빙빙 도는 느낌이다.
야스민 공이 뭐라고 그랬더라?
경매나 사고 현장······.
잔뜩 움츠러든 이수련의 흰색 귀가 보였다.
“어?”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이수련이 흠칫했다.
“이수련 씨는 경매장에서도 있었고, 사고 현장에서도 있었죠.”
“그, 그렇다.”
이수련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본좌가 브리가드에게 오메가를 팔아넘긴 것은 아니다! 절대 아니다! 다만 오메가를 만나고 싶어 여기저기 알아본 것은 사실이니라. 그 과정에서 커머라시의 대리인이 오메가라는 것이 알려진 것이······아닐까······.”
범인을 찾은 것 같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수습은요.”
“본좌가 접촉한 곳에 일일이 확인 작업을 거치고 있느니라! 걱정 말거라!”
“이미 엎어진 물 앞에 서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 아무런 걱정도 안 들겠다. 그죠?”
내 말에 잠깐 기운을 찾았던 이수련의 귀가 축 내려왔다.
“본좌도 반성하고 있느니라.”
“접촉한 곳들. 알려줘요. 저도 따로 얘기해볼 테니까.”
“그, 그것은 안 된다. 계약이란 것이 있고, 신용이란 것이 있느니라.”
“그럼 제일 적극적으로 알려준 곳 하나.”
“그게 가장 힘든 일 아니더냐!”
일어서서 앨리스에게 말했다.
“총수님 가신다니까 문 좀 열어드리고, 후앙네 불러서 로봇 저거 재활용 쓰레기에 좀 버리라고 해 줘. 누가 가져가든 말든 모르겠다. 우리 사무실이 창고도 아니고 버릴 건 버려야지.”
“이리 매정하다니!”
“다시는 여기 안 오시겠단다!”
“잠깐! 잠깐만 시간을 다오! 본좌도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후다닥 뛰쳐나간 이수련은 사무실 밖에서 한참이나 통화를 하다 들어왔다.
몇 분 사이 얼굴에 피곤함이 그득그득 묻어있었다.
“법무팀과 얘기를 마쳤느니라. 얘기해도 얼추 수습될 것 같다는구나. 돈을 좀 쓰긴 해야겠다만은······.”
“그래서 어디냐구요.”
“가장 적극적이었던 곳은······.”
심호흡을 한 이수련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나는 바로 귀걸이를 조작해 통신을 연결했다.
“네, 타이린드. 저요. 일이 좀 생겨서 만나야 할 것 같은데, 시간 괜찮아요? 네. 그래요. 내일 보죠. 장소는······음······스냅샷이 하는 카지노 아시죠? 네, 거기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