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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67화 (68/258)

067.

067.

다행이다.

사형死刑이 아니라 사형師兄이었다.

죽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같은 스승 밑에서 먼저 제자가 된 이를 부르는 말이었군.

전자도 잘못되었지만, 후자도 한참이나 잘못된 것 같다.

남자의 이름은 헤일, 여자의 이름은 유키라는데 각각 내게는 사형과 사매師妹란다.

사매는 나보다 입문 시기가 늦은 여자 제자를 부르는 말이라나?

물론 이건 헤일과 유키, 둘의 주장이다.

태백 권역에 있는 검술 문파에서 파견되었다는 둘.

목적은 나를 찾는 것이란다.

“사제師弟는 태백 권역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 이해해. 요새 많이 발전되었다고 해도 태백 권역은 춥고 혹독한 땅이니까. 그리고 사부님의 성정도 그곳에 불어닥치는 삭풍 못지않게 냉혹했어.”

헤일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유키가 나를 향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지 한 장만 두고 우리를 떠난 건 너무해요, 사형!”

“그래, 그건 심했어. 네오-서울로 가서 뜻을 펼칠 거라니. 우리 같은 퓨어에게 어떻게 보면 태백 권역보다 여기 네오-서울이 더 위험한 곳이야.”

헤일의 말을 입에서 곱씹어 굴려보았다.

“우리 같은 퓨어······.”

“그래. 기억 상실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문파마저 잊은 건 아니겠지? 퓨어에게만 검술을 전수하는 문파, 퓨리오시티Puriosity 말이야.”

“두 분도 퓨어라는 말씀이지요?”

“맞아. 퓨어가 워낙 귀한 세상이라 사실상 일인전승이나 다름없는 문파였는데 제자가 셋이나 생겼다고 사부님이 좋아하셨지.”

헤일의 표정에 내가 과거를 떠올렸으면 하는 간절함이 비쳤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가능한, 최대한도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내는데 성공했다.

“죄송하지만 사고 이전의 기억은 완전히 없어져서요. 검술 같은 경우는 몸이 먼저 움직이는 건지 사용하는 데 지장은 없지만, 문파나 사형, 사매와 같은 분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 말에 유키의 눈에서 눈물이 송글송글 떨어졌다.

점심을 먹고 돌아와 얘기를 듣고 있던 앨리스가 휴지를 몇 장 뽑아 내게 주었다.

유키에게 건네주라는 제스처와 함께.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수련이 입을 열었다.

“정녕 그대들이······.”

쨍-

유키에게 휴지를 주기 위해 몸을 엉거주춤 일으키고 있던 내 몸에 부딪혀 테이블이 흔들렸고, 그 바람에 위에 있던 유리컵이 떨어져 깨졌다.

“이런. 제가 이렇게 덤벙댑니다.”

“사부님 밑에서 수련할 때도 오메가 사형은 지금처럼 덜렁거리곤 했어요. 비록 기억은 온전하지 못하지만 역시 우리가 아는 사형이 맞군요.”

유키의 말.

한편 컵이 엎어져 모두가 잠시 당황한 사이, 나는 이수련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목을 푸는 척하며 고개를 좌우로 까딱였다.

‘알아 들었으려나?’

눈이 동그래진 이수련이 재빠르게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리고 입가를 닦는 척하며 검지손가락을 펴 입에 지퍼를 채우는 동작을 했다.

‘눈치 빠른 건 여우네······아니 진짜 여우 종족이잖아?’

이수련은 내 의도를 파악한 것 같았다.

자리가 조금 정리되자 이들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태백 권역에 퓨어에게만 전승되는 검술 문파가 있고, 저는 그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네오-서울 행을 택했군요.”

“맞아요. 뭔가 떠오르시나요?”

“음······.”

모두의 눈이 내게 모여들었다.

앨리스마저 오일 샌드를 꺼낼 때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어지간히 궁금한 주제였나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나 생각나는 건 없어요.”

“하······.”

헤일이 유키의 긴 한숨을 나무랐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무슨 추태냐, 유키. 앞으로 못 만나리라 생각했던 사람을 만난 것이다. 사부님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게 될 수 있단 말이다.”

“마지막 소원이라면 사부님이라는 분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앨리스의 질문에 헤일이 어려운 부탁이 될 것 같다는 말을 한 뒤, 자신들이 사무실에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같은 제자인 우리가 봐도 사부님이 사제에게 유달리 엄하게 대하시긴 했어. 하지만 사부님의 입장을 대변하자면, 사제에게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아직 눈이 빨갛게 부어오른 유키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연했다.

“저나 헤일 사형은 오메가 사형에 비하면 재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부끄러운 얘기지만 유키의 말을 부정하진 못하겠군. 사부님도 자네를 퓨리오시티의 차기 장문인으로 점찍었기에 그렇게 엄하게 대하셨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사제가 그렇게 떠나버리시니 마음에 병이 드셨어.”

“급속도로 노쇠하셨죠. 사부님도 퓨어시니 노화를 맞이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그렇게 빠르게······생기를 잃는 건 처음 봤어요.”

유키의 말에 침통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헤일.

“이제는 감각도 흐려지시는지 눈도 잘 보이지 않으시고 식사도 거의 하지 못하고 계시지. 그런 상태가 되셨는데도 사제가 떠나버리게 만든 사부님 자신에 대한 책망은 멈추지 않고 계셔.”

“오메가 사형의 소식이 태백 권역에까지 전해지고 나서 부쩍 수척해지셨어요. 사형을 만나고 싶어 하시는데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하셨던 것 같아요. 결국 저와 헤일 사형의 간곡한 설득으로 저희와 함께 네오-서울로 오셨어요. 복잡하다고 네오-서울은 말도 꺼내지 말라고 하셨던 분이요.”

헤일이 내게 머리를 숙였다.

“비록 기억나지 않는 과거라 해도 한 번만 부탁할게. 사부님과 만나주지 않겠어?”

“지금 네오-서울에 계신다고요.”

“맞아.”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부탁이었다.

죽은 사람의 부탁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의 부탁 정도는 쉽게 들어줄 수 있는 것 아니겠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수락하지는 않았다.

이들에게서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대신 저도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떤 부탁이지?”

“몸에 배어 자연스레 사용한다고 말씀은 드렸지만 제가 가진 검술의 원류源流가 궁금합니다. 퓨리오시티의 검술을 한번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유키의 얼굴에 잠깐, 아주 잠깐 근심이 스쳐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헤일은 순순히 수긍했다.

“그렇게 하지. 그게 실마리가 되어 사제가 기억을 찾을지도 모르니.”

“옥상에 작은 공간이 있습니다. 올라가시죠.”

내 말에 헤일도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지금 바로?”

“네. 쇠뿔도 단김에 빼라지 않습니까.”

나는 자리에 모인 이들을 건물 옥상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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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중요한 통신이라.”

모두를 옥상에 남겨둔 채, 나는 잠깐 안쪽으로 들어와 귀걸이를 터치했다.

-간만입니다. 잘 지내십니까?

예공방의 이사이자 아수라인 하르파고스였다.

“네. 그동안 연락을 잘 못 드렸군요.”

-괜찮습니다. 요새 바쁘신 건 여러 루트를 통해 전해 듣고 있었습니다. 오메가 님이 잘 나갈수록 저도 어깨에 힘이 실리고 있고요. 허허허.

예공방의 신형 무기 홍보 모델로 나를 추천한 사람이 하르파고스다.

그 일로 예공방 대림 생산 기지에 가게 되었으니 내 입장에서는 해결사로 이름을 날리게 된 발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후로도 홍보 모델은 고사했지만 개발 중인 근접 무기에 대한 자문역 정도로 역할을 바꿔서 꾸준히 예공방 측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쪽에서도 섭섭하지 않게 대우를 해주고 있기도 했다.

거의 항상 내가 안쪽에 받쳐 입고 다니는 티셔츠가 예공방의 특수 마공강 조끼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문의와 판매량이 큰 폭으로 늘었다는 소리도 전해 들었다.

대림 에어리어 26 구역의 폐교에서 사라질 때나, 흡혈귀 회합의 바이크 추격전 때도 입고 있었으니 소셜 미디어나 공중파 방송과 같은 미디어에서 어마어마하게 노출이 됐을 거다.

특수 마공강 티셔츠의 비싼 가격을 고려해도 예공방은 굉장히 저렴하게 홍보를 한 셈이 됐다.

하르파고스의 검덕후 기질이 만들어낸 놀라운 성과.

그러니 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하르파고스가 스스로 어깨에 힘이 실리고 있다고 할만했다.

그리고 그것은 예공방 내에서 상무인 수연의 입지를 줄일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수연은 야스민 공도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정체가 겹겹의 베일로 가린 인물.

하지만 예공방의 상무인만큼 회사 내부에서는 활동이 있을 것이고, 하르파고스에게 수연의 움직임에 신경 써달라는 말을 몇 번이고 당부했었다.

-수연 상무가 사임했습니다.

“그래요?”

-그간 장기휴가 상태였는데 오늘 회사 인트라넷에 사임했다고 떴더군요.

“어디로 이직한다 그런 말은 없었나요?”

-전혀요. 수완은 워낙 좋은 사람이라 오라는 곳은 많았을 거라 이직했다면 소문이 날만한데 마치 은퇴를 한 것처럼······아니, 은퇴를 해도 이렇게 조용하기는 힘들겁니다.

“예공방 사장과의 관계는 어떻던가요.”

예공방의 사장이 수연을 상무라는 자리에 앉혀 중용하는데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냐는 말을 하르파고스에게 슬쩍 흘렸었다.

-사장님이 특정 사업부를 수연 상무에게 밀어준 게 아니냐는 의혹이 사내 감사에서 제기됐습니다. 신형 무기 재고를 빼돌려 리벨리온의 무장을 도와준 것이 아니냐는 말도 있고요.

“혹시 예공방의 사장, 남자입니까?”

-네. 오우거 남성입니다.

“제 정보원에 의하면 수연 상무의 능력 중 남성을 유혹하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아주 강하게요.”

-믿을 수 있는 정보입니까?

차마 내가 직접 겪어봐서 안다고는 말 못하고, 확실한 정보라고만 하고 통신을 끊었다.

수연이 사라졌다.

그녀가 지원하던 진오는 계룡 권역에서 손목이 잘렸으며, 리벨리온의 렙틸리비아 장악은 실패했고, 그녀의 동료인 것으로 추정되는 색승과 스펙터는 각각 실종 및 억류 상태다.

위기감을 느낀걸까? 아니면 더 큰 걸 준비하기 위해 몸을 숙인 걸까.

찝찝한 기분을 털어내려 애쓰며 다시 옥상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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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마무리 한 건가?”

헤일의 물음.

“네. 됐습니다.”

“그럼 잘 보게.”

서로 마주보고 선 헤일과 유키가 각자의 뒤춤에서 칼자루를 꺼냈다.

그리고 둘의 손이 마치 타격하듯 독특한 방식으로 검파(劍把:검의 손잡이 아래에 부착한 장식물)를 휘감자 칼자루에서 검날이 위로 전개됐다.

내가 지닌 광자 튜닝한 전개형 기계식 검과 방식이 흡사했지만, 둘이 들고 있는 검의 날은 광자 튜닝되어 있지 않은, 평범한 날이었다.

“사형의 검에 대한 얘기를 듣고 놀랐어요. 그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구나 싶었죠. 역시 사형은 대단해요.”

유키의 말에 끄덕이며 긍정하는 헤일.

“그럼 보여주겠네. 퓨리오시티의 검술을.”

둘은 곧 검을 섞기 시작했다.

살기는 하나도 없는 대련 형식의 움직임.

퓨어에게만 전승되는 문파의 검술답게, 무리한 동작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기세만큼은 물 흐르듯 유려하고 때로는 불이 솟듯 맹렬했다.

“어디들 계셨나 했더니 다들 올라와 있었네요?”

뒤에서 신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낯선 사람 두 명이 검을 섞고 있는 걸 보고 살금살금 올라와 앨리스와 이수련에게 사정을 듣더니 곧 헤일과 유키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신시아가 말했다.

“오메가 님의 움직임과 놀랍도록 흡사하네요.”

“신시아 네가 봐도 그렇게 느껴지느냐? 본좌도 너와 같은 생각이구나.”

“제가 오메가 님 찍힌 영상이라는 영상은 전부 구해서 몇 번이나 돌려봤는데 틀림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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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일정이 있으니 당장 사부님을 만나러 가는 것은 힘들 것 같다,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시간을 내보겠다라는 말로 헤일과 유키에게 연락처를 받아 돌려보냈다.

그리고 이수련을 따로 불렀다.

“알아챘죠?”

“낭군도 눈치를 챈 것 같더구나.”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쟤들, 퓨어 아닌데 구라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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