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054.
번쩍-
유물 트레일러 위에 떠 있는 젠이 손을 휘두르자 몰래 접근하려던 놈의 바로 위에 번개가 한줄기 떨어졌다.
젠이 손을 뻗자 그의 손가락 끝에서 뻗어나간 바람이 트레일러 주위의 아스팔트를 뒤집으며 원을 그려냈다.
“원 안쪽으로 접근하면 사정 봐주지 않겠다.”
그렇게 말한 젠이 트레일러 위에서 둥실둥실 내가 있는 쪽으로 내려왔다.
“고생했습니다. 유물을 뺏겼다면 아버지가 가만 계시지 않았을 겁니다.”
“마도공학 유물에 한해서는 제가 야스민 공의 대리인이기도 하니까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난장판인 상황과 달리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젠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젠 씨 정도면 저놈들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은데, 왜 놔두신거죠?”
“능력 제한 법령이란 것이 있습니다. 일정 정도를 넘어선 사람들은 네오-서울 안쪽에서 자기 보호 이상으로 능력을 내보이면 안 됩니다. 이게 싫어 권역 경계를 떠돌거나, 아예 등록을 하지 않는 사람도 많지만.”
젠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아버지가 아버지다 보니 등록을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 둘의 시선이 자신을 이수련이라 소개한 구미호에게 닿았다.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서 아홉 개의 꼬리를 살랑이며 걷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로봇들이 다양한 진세를 형성하며 강도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럼 저 구미호는 어째서 저렇게 날뛰죠?”
어색한 웃음을 짓는 젠.
“저분이 제가 아는 분이 맞다면, 그런 법령 따위로 제약할 수 없는 분일 겁니다. 아마 아버지도 상대하기 버거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야스민 공도요? 퓨전 코퍼레이션이 그렇게 대단한 곳인가요?”
“야스민 가의 수장, 퓨전 코페레이션의 총수. 그런 직위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분은······.”
젠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구미호 소녀가 폴짝폴짝 뛰며 내 곁으로 달려왔다.
“번뇌퇴산······.”
몸을 훌쩍 날려 다시 트레일러 위로 올라가는 젠.
수련이 그런 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본좌가 너를 본 지도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구나.”
멀찍이 떨어진 젠이 답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아직도 그 쓸데없는 동자공을 익히고 있는 게냐? 꼬맹이?”
젠이 살짝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저는 꼬맹이가 아닙니다.”
“남녀간의 운우지락을 모르는 녀석이 꼬맹이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제법 치명타를 입었겠다 싶었는데, 젠은 부채를 펴들고 눈만을 내보인 채 웃고 있었다.
“총수께서 남녀 간의 일을 입에 자주 올리는 것은 그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원래 사람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덮기 위해 그 부분을 더욱 강하게 언급한다던데요.”
그러자 수련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감히 누가 본좌에 대해 그런 발칙한 소문을 흘리는가! 본좌는 오는 남자 안 막고, 가는 남자 안 붙잡느니라!”
“진실로 그렇습니까? 그런 것치고는 총수와 밤을 보냈다는 남자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그건 본좌가 모두 간을 꺼내어 먹어버렸기 때문이다!”
“예, 예. 그러시겠지요.”
씩씩대던 수련이 내 곁에서 젠을 향해 가슴을 쭉 펴고 말했다.
“설령 꼬맹이의 말이 맞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 본좌는 이제 오메가를 남편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젠의 냉혹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게 무슨······소리죠? 신시아는 어쩌고······?”
능력 제한 법령 얘기를 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젠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뇌전이 맺히는 것이 보였다.
맞으면 고대로 즉사라는 판단이 뇌리를 직격했다.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오늘 처음 봤어요.”
“그렇기에 더 좋은 것이다! 처음 본 자리에서 백년가약을 약속하는 거다! 자! 어서 본좌와 함께하겠다고 말하거라!”
돌아가는 꼴을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젠이 손가락에서 파직이던 번개를 없앴다.
하지만 가슴 서늘해지는 그의 경고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양다리는 아닌 것 같으니 지켜보겠습니다.”
내가 곤경을 겪고 있는 사이, 이곳에는 온갖 사설 집행자들이 몰려들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강도 패거리들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기 위해 트럭과 밴을 이용하는 상황, 사태가 급박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 커다란 트럭 한 대가 우리 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운전석에는 아까 용접기를 멘 트롤이 앉아 있는 걸로 봐서, 트럭을 이용해 트레일러를 밖으로 빼내려는 생각 같았다.
트롤이 꽥하고 소리쳤다.
“죽더라도 이건 포기 못하지!”
젠이 트럭 위로 번개를 내리쳤으나 펑하고 터지는 소리가 몇 번 났을 뿐, 트럭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곤란하다는 목소리를 내는 젠.
“더 이상 힘을 쓰면 추후에 진술서를 쓰게 될 것 같아서 싫은데······.”
젠은 계속해서 나를 흘끔거렸다.
‘너는 등록 안 했으니 날뛰어도 괜찮지 않냐’라는 눈빛이다.
다시 한번 피로 대검을 만들어 내며 다짐했다.
“앨리스한테 말해서 보상 최대한도로 뜯어내라고 할 거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다.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보다 살짝 뒤로 뺀 채로 몸을 낮춘다.
호흡을 멈추고 정면을 응시하니 나를 향해 달려오는 트럭이 보인다.
운전석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트롤의 주름 하나하나까지도 눈에 맺힌다.
후우-
몸 안에 있던 숨이 한 톨도 남지 않게 호흡을 길게 뽑아내고 배에 힘을 주어 대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다.
손과 팔은 지탱할 뿐, 과하게 힘을 주지 않는다.
올려 든 왼팔과 오른팔 사이로,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목표를 향해-
대검을 그대로 내린다.
[만사재시 매사필종]이 쾌快를 담은 정수라면, 이것은 중重, 느리되 무거운 압력.
압력에 취해 세계가 일그러진다.
[취중실천지醉重失天地]
엄청난 속도로 달려드는 트럭과 길게 뽑힌 대검이 부딪히며 대검의 날이 빠른 속도로 부서진다.
부서지는 대검을 보완하기 위해 손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빨려나갔다.
[자연 회복]은 물론이고 [급속 회복]으로도 따라가기 아슬아슬한 속도.
머리가 핑 돌고, 다리가 휘청일 것 같다.
하지만 무거움은 흔들려서는 아니 된다.
비바람을 맞는 태산의 심정이 되어 영겁을 찰나와 같이, 찰나를 영겁처럼 견뎌낸다.
콰아아앙-
“후아아-.”
마침내 참았던 숨을 들이마시자, 그제야 반으로 잘려서 좌우로 처박힌 트럭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검을 던져 트롤이 잡고 있는 핸들을 틀게 하라는 소리였는데 이걸 이렇게······.”
얼이 빠진 젠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이어지는 수련의 높은 톤 목소리.
“이게 진정 퓨어가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란 말이더냐! 오메가 너는 진정으로 본좌의 계측을 뛰어넘는 존재로구나!”
한편, 도달한 박쥐 떼들은 수백은 족히 넘을 흡혈귀로 변해 로봇과 함께 강도 패거리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연극 무대에서 조명이 켜지듯 내 머리 위로 빛이 쫙 내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향하던 위타천의 전용기다.
옆에 내려앉은 전용기에서 곤란한 표정의 위타천이 나와 이쪽으로 곧장 다가왔다.
그리고 젠과 수련을 향해 말했다.
“아실 만큼 아시는 분들이 이게 다 뭡니까.”
“아버지 물건이 털리게 생겼는데 가만있으면 아들이 아니죠. 그리고 전 자기 방어만 했습니다.”
“일단은 그런 걸로 파악했습니다만,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협조하지요.”
그 사이, 위타천의 부관이 미간에 구멍이 난 채 움찔거리던 고양이 수인과 트럭 밑에 깔려서 사경을 헤매던 트롤에게 어레스트를 채우고 위타천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클리드와 보나, 맞는 것 같습니다.”
“긴급 회복 장치에 넣어서 목숨 붙여놓도록, 죽어도 죗값을 치르고 죽어야지.”
“예.”
네오-서울에서는 범죄자가 세포 한 점만 남기고 죽어도 그 세포를 증식시켜 실험에 쓴다고 할 정도로 죗값 추궁에 철저하다고 들었다.
위타천까지 왔으니 둘의 운명은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위타천의 시선이 수련에게 향했다.
어느새 수련은 반투명했던 바이저의 색을 새카맣게 변하게 해놓은 상태였다.
“네오-서울에 안 오신 지 상당히 되신 걸로 아는데 간만에 오셔서 한다는 게 이렇게 깽판 치는 겁니까?”
수련은 딴청을 피웠다.
“그래도 예전에 공공 집행자셨으면 후배 얼굴을 봐서라도 이런 짓은 좀 자제하셨어야죠.”
“그게 언젯적 일인데. 그때는 네오-서울이 아니라 한양이었느니라. 그리고 공공 집행자도 아니라 수호자라는 이름이었다. 본좌는 너희와 관계없다. 너희가 정통성 어쩌고 하며 멋대로 가져다 붙인 것이지.”
“어쨌든 선배님 일족이 이곳을 보호하던 시절도 있었지 않습니까.”
“예전 일은 얘기해서 무엇하겠느냐.”
영 협조가 쉽지 않은 수련을 보고 부드득하는 소리가 들리게 이를 간 위타천이 이번에는 나를 향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자네를 만난 건 반갑지만 인사나 나눌 때는 아닌 것 같군.”
마도공학 유물 탈취 사건, 반으로 잘린 트럭이 가로막아 엉망이 된 도로. 사방으로 도망치는 강도 패거리와 그들을 쫓는 흡혈귀들.
위타천의 심기가 심히 불편해 보이니 일단 고개를 끄덕이려던 때, 수련이 내 옆으로 와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말하는 것이 꼭 본좌의 낭군과 안면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구나.”
위타천의 표정이 내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기괴한 표정으로 변한다.
“낭군? 자네 이 노괴랑······?”
“노괴라니! 본좌의 마음은 늘 청춘이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처음 봤어요.”
“어찌하여 낭군은 본좌에게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한단 말이냐! 비록 서로의 얼굴은 오늘 처음으로 마주했을지언정 본좌와 낭군은 깊은 정신적 유대가 있지 않느냐!”
일단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수련은 로봇들을 모두 헬기로 올려보냈다.
그 사이, 위타천이 내 어깨에 팔을 올리고 속닥거렸다.
“저 천둥벌거숭이 노괴가 자네 말은 좀 듣는 것 같으니, 날 좀 도와주게.”
위타천의 계획이 그럴듯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수련에게 접근한 위타천이 말했다.
“네오-서울 영공 이용 법령을 위반하신 거,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네오-서울은 기본적으로 굉장히 복잡한 도시 권역이기 때문에 지상으로부터 약 10m가 넘어가는 높이에서 이동할 수 있는 것은 미리 허가받은 탑승물이거나, 물자 수송선, 비행이나 활공이 가능한 종족 등으로 제한하고 있다.
아마도 수련은 막무가내로 헬기를 끌고 온 모양.
“본좌는 그런 법령 따위 모른다! 너도 알고 있을 것 아니더냐! 수호자의 지위를 포기하는 대신 우리 구미호 일족은 네오-서울의 모든 법령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절차가 이루어진 이후에 가능한 겁니다. 영동대교 진입로를 이 모양으로 뒤집어놓고 휑하니 사라져도 좋은 권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본좌는 그런 복잡한 말 모른다!”
“이러시면 강제적으로 모셔갈 수 밖에 없습니다.”
“네가? 감히 나를?”
위타천이 내게 눈짓했다.
손바닥을 수련에게 향한 채로 강하게 말했다.
“손!”
즉시 흰 털 달린 귀가 위로 서는 것과 동시에 수련의 양손이 내 손 위로 올라왔고, 위타천은 이때다 싶어 수련의 손에 어레스트를 채웠다.
수련이 몸을 뒤틀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풀어라! 당장 풀란 말이다!”
위타천이 귓등으로도 듣지 않자 수련은 젠을 걸고 넘어졌다.
“저 흡혈귀 꼬맹이는 왜 안 데려간단 말이냐! 이건 차별이다!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 아니 야스민의 돈이 그렇게도 좋더냐! 네오-서울의 정의는 어디로 간 것이냐!”
“이미 CCTV 돌려봤고, 소셜미디어에 뜬 것도 봤습니다. 젠 님은 애매하긴 하지만 자기 방어의 범위 안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요청하면 순순히 협조하실 분이기도 하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젠이 특유의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물론 수련에게서는 멀찍이 떨어진 채였다.
“물론이죠. 저희 야스민 가는 네오-서울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시는 공공 집행자들의 노고를 알고 있으니까요.”
상황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아서 택시라도 잡아타기 위해 걸어가려는데, 철컥하는 소리가 났다.
위타천이 내 손목에 건 어레스트였다.
“길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 혼자 빠지는 건 안 되지. 자네도 일단은 조사 대상이야. 실상은 저 노괴 달래기 용이지만. 협조 좀 부탁하겠네.”
내 손목에 걸린 어레스트를 본 수련이 잠잠해졌다.
“낭군도 같이 가는 것이냐? 진작 말을 하지. 본좌는 불만 없느니라.”
그리고 다가와 내 팔뚝에 뺨을 비비는 수련.
귀걸이가 있는 쪽의 어깨를 올려 간신히 채널을 맞췄다.
-사장님! 이거 뭐예요! 네오-서울 시청에서 통지왔어요! 사장님 긴급체포 당했다는데요?
“그렇게 됐다. 와서 나 좀 빼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