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닷새 뒤.
벌컥-
라벤느의 집무실 문이 열렸다.
들어오는 사람은 당연히 라벤느.
성큼성큼 걸어서 자신의 책상에 앉은 라벤느가 책상 앞의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판을 잘 짰더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새 게임은 새 판에서 시작해야죠.”
“그 둘, 켄타우루스와 리자드맨. 라이시와 디즈라고 했나?”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자연주의 연합의 임시 대표들입니다. 그렇게 막 부르면 마탑주님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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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장 휘하의 인원들과 프로이데 마탑.
계룡 권역의 큰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집단이다.
대군장이 거신족의 재림이라는 명목하에 리벨리온으로의 합류를 도모했다는 것이 알려지고, 이러저러한 일의 결과로 몸통 대부분이 박살 난 채로 골골대고 있으니 계곡에 모인 사람들은 당황했다.
계곡 근처의 소뿐만 아니라 계곡, 나아가 계룡 권역 전체에서 대군장의 뜻에 조금이라도 동조했던 사람을 따지면 기실 수십만은 넘어갈 거다.
어쩌면 백만 단위가 될 수도 있겠지.
그중 절반 정도는 제대로 된 직업 없이 계룡 권역에서 수행이나 수련하는 사람들일 것이며, 그 중 또 일부는 허구한 날 축제와 약에 취해 사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이런 거대한 집단의 구심점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도 권역을 통째로 반사회적 집단에 넘기려 했다는 의혹을 가진 채로.
이대로면 내부적으로는 무정부상태나 분열 상태가 될 위험이 있었고, 만일 소식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타 도시 권역에서 계룡 권역을 넘볼 위험이 있었다.
흡혈귀 회합이 진행되는 중이라 외부 인원, 특히 방송사의 유입을 막은 라벤느의 판단 덕에 정보 전파를 늦출 수 있었다.
선견지명은 아니고 얻어 걸린 거다.
소셜 미디어로 소식이 알음알음 퍼져나갔지만 워낙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고 공신력 있는 보도가 나오지 않아 가짜뉴스 취급 받기도 했다.
내가 이런 일련의 결과를 의도하고 행동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해관계가 깊게 얽혀 있고 무엇보다 진오와 대판 싸웠기 때문에 몸을 감출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페테르를 비롯한 호위들의 도움을 받아 일단 계룡 권역에 있는 대군장 영향권의 붕괴를 막았다.
페테르는 계룡 권역의 공공 집행자들을 통솔해 치안과 사회시스템의 혼란을 막았으며, 구스타보 할아범과 로렌 아줌마는 각각 데리고 다니는 생물과 인형들을 계룡 권역 곳곳으로 보내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정보 공유를 도왔다.
여다함은······.
새로운 무기와 마법 개발에 쓸 수 있을 거라면서 ‘거신의 주먹’을 다시 보여달라고 내게 졸라대고 있었다.
그런 여다함을 떼어놓고, 나는 대군장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집단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정당도 이익단체도 아닌, 그저 자신이 딛고 살아가는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느슨한 연결고리이자, 예언이나 옛 주인에게 의지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일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의 연합체.
대군장이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인원이 계곡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며칠을 밤새워 토론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반목하고 이해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결성된 단체가 자연주의 연합이었다.
그리고 임시 대표로 라이시와 디즈가 뽑혔다.
라이시는 대군장과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대군장의 말에 넘어가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이들에게 위험성을 알려줬다는 이유로, 디즈는······나와 가장 관계가 깊은 인물이어서였다.
디즈의 선출에 반대가 없던 것은 아니다.
특히 볼드가 날아가면서 그 아래 있다가 똥을 뒤집어쓴 사람들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볼드를 살처분해야 한다는 소리도 왕왕 나왔을 정도.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여기에 페테르의 백린연막탄이 쏟아졌을 거라고 내가 지적하자 더 이상 큰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라이시와 디즈가 라벤느를 만나기 위해 프로이데 마탑을 찾아왔고, 마탑은 흡혈귀 회합이 진행되는 동안 또 다른 협상의 장이 마련되어 바쁜 분위기였다.
그리고 라벤느의 얼굴을 보니 협상이 끝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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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머무는 계곡에 모인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을 걸세.”
“그럼요?”
“흡혈귀 회합의 종료를 함께 바라볼 증인이 되겠지. 물론 그전에 계곡 전체에 대대적인 청소와 정화를 해야겠지만. 그건 오늘 내일이면 될 일이야.”
흡혈귀들의 진입을 허용한다는 소리였다.
라벤느의 얼굴에 기분 좋은 피곤함이 묻어났다.
“훌륭한 결과야. 아마 앞으로도 이 정도로 성대하게 끝을 맺는 흡혈귀 회합은 다시 없겠지.”
“제 덕분이죠.”
나를 흘겨보던 라벤느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긴 하지. 게다가 대군장이 뒷전으로 밀린 것도 우리에겐 나쁘지 않을 일이고.”
“이득만 생각하시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프로이데 마탑은 계룡 권역의 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약물 중독자들의 재활에 더 많은 투자와 관심을 약속했다.
자연주의 연합의 인원들과 더 많은 교류와 협력을 약속하기도 했는데, 그 첫 번째 방안이 영원빙정에서 약초와 주술의 비율을 높인 신상품 개발이라고.
프로이데 마탑의 영향력이 더 늘어나긴 하겠지만, 협력하는 이들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가져갈 수 있을 테니 서로에게 나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한동안은 쉽지 않을 것 같군요.”
내 말에 라벤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새로운 집단이 탄생했지만, 대군장의 빈자리에서 오는 공백이 있을 테니까.”
새로운 체제는 필연적으로 크고 작은 소음을 동반한다.
그 틈을 노려 타 권역의 세력이 침투하거나, 내부에서 예상치 못한 갈등이 생겨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이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일 처리 방식도 좋았네. 정말로 대군장이 리벨리온의 지원을 받아 우리를 짓누르려 했으면······.”
“프로이데 마탑의 위신이 크게 깎였겠죠. 계룡 권역의 맹주를 자처하더니 숨어들어온 반사회적 세력도 알아채지 못했다느니 하면서요.”
“저번의 동화나 연극 얘기도 그렇고, 자네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걸 굳이 입 밖으로 내서 듣는 사람 불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군.”
피식 웃어주었다.
“듣는 사람이 불편하지, 말하는 사람이 불편한 건 아니잖아요?”
“뻔뻔스럽고로······.”
꼬았던 다리를 풀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 의뢰는 완료한 것 같으니 약속한 걸 좀 받아볼까요?”
“미리 준비해놓긴 했네만······.”
혀를 쯧쯧하고 찬 라벤느가 일어나 뒤에 있던 금고의 문을 열고 옹골찬 나무로 짜여진 작은 상자를 꺼내 내 앞으로 내밀었다.
“영원빙정 30년. 보증서도 있고, 들어오기 전 신시아에게 확인을 마쳤네. 신시아의 오라비인 레비가 폐관 수련에 들기 전에 몇 개나 먹는 걸 직접 봤을 테니 확실한 물건이지.”
솔직히 이상한 걸 주지 않을까 싶어서 걱정을 안 한 건 아닌데, 설마 흡혈귀도 속이고 가짜를 줄까 싶어서 믿어주기로 했다.
상자에 손을 뻗는데 라벤느가 뭔가 생각난 것처럼 내게 물었다.
“맞아! 그런데 알파는 누군가? 자연주의 연합의 임시 대표들이 계속 알파라는 사람 얘기를 하던데. 말만 들어서는 아주 엄청난 화염계 마법사 같더구만······.”
“글쎄요. 그 사람들이 그때 약이라도 거하게 하고 환각을 본 건 아닐까요. 아니면 리벨리온을 견제하기 위한 비밀 결사의 인물이라던가요.”
“그런가······.”
상자의 윗부분을 열자 약효를 흡수당해 하얗게 변해버린 약초 더미가 두텁게 쌓여있었다.
라벤느가 얼른 덧붙였다.
“만약 다른 곳에 판매할 생각이라면 우리가 재매입할 의사도 있네.”
그럴 거면 돈으로 달라고 했겠죠.
조심스레 약초를 걷어내니 어딘가 정돈되지 않은 것 같이 생긴 눈의 결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중에 거의 나오지도 않는 물건이지만 가장 최근 거래가의 1.3배 이상 더 쳐줄 생각이······.”
라벤느의 애타는 말을 무시하고 조심히 상자째로 들어 고개를 숙여 약초 더미 가운데의 영원빙정을 코에 닿을 듯 가져다 대고 숨을 들이켰다.
후우우-
차갑다 못해 에일듯한 영원빙정이 녹으며 내게 빨려 오는 것이 느껴졌다.
코끝에서 머물던 한기는 비강을 거쳐 이내 목으로 내려섰고 점점 속도를 붙이더니 순식간에 폐를 가득 채웠다.
청량감이라는 간단한 단어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호흡기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 줌도 놓치기 싫어 숨을 내쉬기가 싫을 정도였다.
그렇게 폐를 몇 바퀴나 감싸 안던 한기가 차츰 몸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아아-.”
마침내 참고 참았던 숨을 터트렸을 때, 당장이라도 어딘가에 빙결계 마법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칠 정도로 온몸에 힘이 가득했다.
“어땠나?”
라벤느가 내 곁에 와서 물었지만 나는 빙긋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답을 해주지 않았다.
“자네가 먹은 영원빙정은 나도 한 번 먹으려면 제자들과 원로들의 눈치를 봐가면서 먹어야 할 정도로 귀한 거란 말일세. 감상! 감상만이라도!”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나는 라벤느의 집무실을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틈에 손가락을 대고 아래로 내렸다.
순식간에 얼음이 만들어지며 문틈을 메웠다.
안에서 라벤느가 문을 붙잡고 용쓰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왜! 안 열려! 어이! 오메가! 감상이라도 말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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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의 물맛 참 좋더라고요.
네오-서울로 돌아가는 바이크 위, 귀걸이를 통해 신시아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고생한 보람이 있는 것 같아 다행이군요.”
-다른 분들도 굉장히 만족하셨어요. 농담조긴 했지만 프로이데 마탑이 있는 계룡 권역으로 회합 장소를 고정하자는 말도 나오더라니까요.
그렇게 되면 프로이데 마탑과 라벤느가 얻어갈 이득은 환산할 수 없이 거대할 것이다.
젠장.
40년이나 50년짜리로 받을걸.
-그런데 돌아가는 길은 별로 재미없네요.
여다함의 말로는 돌아가는 길이 더 험난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와 앨리스는 정말 드라이브를 하는 것처럼 여유롭게 바이크를 타고 있었다.
여다함과 일리아나가 각각 테오릭 경과 야스민 공을 만나기 위해 네오-서울행을 택했고, 페테르 역시 헤지르 대주교를 직접 한 번 만나야겠다면서 방향을 우리와 같은 쪽으로 잡은 덕이었다.
물론 이 결정은 급작스럽게 내려진 것이라 아펠블뤼텐 가와 히라솔 가의 대표인 레온과 마테우스가 극렬히 반대했다.
올 때도 늦게 와서 집중포화를 뚫고 도착했는데, 갈 때도 같은 꼴을 당하기는 싫다는 이유였다.
페테르의 네오-서울 행도 독단적인 결정이었기에 닐 아이리스가 당황했으나 ‘그럼 혼자 돌아가시던지.’ 하는 페테르의 발언에 닐은 네오-서울까지 동행한 뒤 디트로이트 권역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기로 얘기가 마무리됐다.
여튼, 레온과 마테우스의 반 애원 덕에 일단 각자의 길로 가는 척하다 네오-서울로 가는 사람들끼리 나중에 합류하는 것으로 얘기가 됐다.
최소한 얼마만이라도 적들의 화력 분산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지금.
왼쪽 멀리에서 구름 사이사이로 페테르의 외골격 흰 몸체가 비쳐 보였다.
아래로는 백린연막탄이 마치 폭설처럼 쏟아지고 있었고, 가히 생지옥이라 할만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은.
-와하하하하. 만천화우! 만천화우! 만천화우다!
통신채널을 연결해놓은 덕에 여다함의 광기가 그대로 전해져왔다.
원격통제가 되는 장갑차 두 대를 몰래 공수해놓은 여다함은 신나게 포격을 쏟아붓고 있었다.
한 대 포격, 두 대 이동의 반복.
그러다 세 대가 동시에 변형을 시작했다.
엄청난 양의 미사일이 하늘에 뿌려지며 촘촘한 그물 모양을 만들어냈다.
-천라지망이다아아아아!
심지어 미사일 몇 개는 직접 마법을 통해 조종하는지 괴상한 움직임과 궤도를 보여주기까지.
자는 데 방해되니 조용히 좀 하라는 일리아나의 타박을 마지막으로 여다함 측의 통신이 끊겼다.
이렇게 미친 사람들이 앞장서서 주변 정리를 해주니 나와 신시아는 잔해들을 피해 운전만 하면 됐다.
신시아가 키득거렸다.
-재밌는 사람들 많이 알아가서 좋네요. 다음 회합에도 제가 참가하겠다고 해야겠어요.
“네······.”
건성으로 대답한 나는 계속해서 귀걸이를 이리저리 만지기에 바빴다.
“이상하네······. 왜 말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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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은 모두가 외근 나간 사무실에서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참을 데리고 티비 채널을 돌리기에 바빴다.
“아오! 중계되는 곳이 하나도 없냐. 백린이랑 여다함이 난리 친다는데. 그런 걸 중계 해야지! 오메가 형님도 오고 계실 텐데! 중계 헬기랑 드론이 다 터져나갔다는 게 말이야 방구야!”
한쪽 구석에서 얌전히 티비를 보고 있던 신참, 자코가 정현에게 물었다.
“오메가라는 해결사. 그렇게 대단한가요? 백린이랑 여다함 사이에서 언급될 정도로요?”
“냉정히 말해서 네임 밸류는 아직 좀 부족할지도 몰라. 근데 능력은 진짜야.”
“그래요?”
“우리 사장님이 자기가 사무실 차리고 만난 최고의 인맥이라고 그러잖아. 우리 사무실이 예공방 테러 때 들러리라도 서고, 내가 거기 지하에 내려갔다 온 게 전부 오메가 형님 덕이야.”
“우와······. 몰랐어요.”
“밖에다가는 말 잘 안 해. 너도 이제 우리 식구니까 알려주는 거야. 하여튼 그 이후로 사무실 형편이 좀 펴서 너도 새로 들이고 한 거 아니냐.”
“그분이 요 앞에 RW200 주인이시죠? 완전 멋있던데.”
“야. 형님은 그 오토바이보다 더 멋있어.”
“진짜요?”
“······.”
왠지 살짝 민망해진 정현은 괜시리 채널을 뒤적였다.
“죄다 몇 시간 전 영상이네. 이미 다들 도착했겠다!”
쾅-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정현이 벌떡 일어서서 문쪽을 향해 인상을 구겼다.
“어떤 놈이······형님! 잘 다녀오셨어요!”
들어오는 사람은 얼굴이 잔뜩 굳은 오메가였다.
급하게 들어왔는지 오메가의 얼굴에는 바이크 용 고글이 올라가 있었다.
정현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자코의 허리를 세워주며 말했다.
“자코, 인사해라. 해결사인 오메가 형님. 요새 유명하니까 이름이랑 얼굴은 알지? 형님 이쪽은 자코라고.”
“나중에. 나중에.”
오메가가 정현에게 급하게 물었다.
“앨리스 여기 왔었어?”
“네. 형님 계룡 권역 가신 동안 매일 왔죠. 어제도 한참 놀다가 갔는데. 그지? 자코 너랑도 인사했잖아.”
“네. 그런데 오늘은 안 오지 않았나요?”
다급한 오메가의 목소리가 적막한 사무실을 흔들었다.
“앨리스가 없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