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
040.
“왜 이러세요! 멈추세요!”
라이시의 애타는 외침이 대군장에게 닿았지만, 나를 향해 날아오는 뿌리의 속도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검을 꺼낼까?’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플람 수플레]
뿜어진 숨이 불의 벽이 되어 닿는 뿌리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러나 [플람 수플레]는 전방에 불의 벽을 세우는 스킬, 내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옆과 심지어 뒤에서도 땅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선빵을 아주 호되게 먹여주시네.”
손가락을 튕겼다.
[밀푀유Millefeuille]
종잇장 형태로 변한 불들이 내 주위를 맴돌면서 계속해서 땅에서 솟는 뿌리들을 태워 없앴다.
내 주위로 타버린 뿌리에서 만들어진 재가 겹겹이 쌓였다.
뿌리의 습격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발바닥에서 온몸으로 느껴지는 진동은 점점 심해졌다.
마침내.
쿠드드드-
대군장이 깊게 박혀있던 뿌리를 들고 일어섰다.
비록 점차 말라 가는 게 보일 정도로 우람하지는 않은 나무였지만, 뿌리를 뽑아 들고 땅 위에 서니 일반적인 사람에 비해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목인木人의 전신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왜 이러는지 알려주고 지랄하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질문 좀 했다고 사람을 이 꼴로 만드나?”
대군장의 몸이 가늘게 흔들렸다.
-너는 옛 주인의 도래를 방해할 존재. 네가 내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죽는 일은 없었을 터인데.
슈퍼 컴퓨터에서 굉음이 뿜어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대군장의 줄기 곳곳에 삐죽삐죽 솟아나 있던 케이블에 불이 들어왔다.
대군장의 거대한 발이 내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고속 이동]······?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엄청난 이명이 귀를 메웠다.
슈퍼컴퓨터의 잉잉대는 소음과 더불어 귀곡성이 섞인 끔찍한 소리가 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어 균형감각이 엉망이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 세운 뒤-
[청각 차단]
즉시 소리가 멈췄다.
주머니에서 씨앗을 하나 집어 던졌다.
[과잉 생장]
자라난 넝쿨의 끝이 땅에 박히는 것을 확인한 뒤
[경량화]
[챔질]
낚시줄에 딸려가는 물고기마냥, 나는 넝쿨에 매달려 딸려갔고, 그 덕에 대군장의 발에 밟혀 압사하는 꼴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대군장의 껍질이 바스락거렸다.
목인의 언어는 소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그가 의미하는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너는 이곳에서 죽어야 한다. 우리를 위해.
“나는 그럴 마음이 없는데.”
손에서 불덩이를 몇 개 만들어 대군장을 향해 던졌다.
하지만 대군장은 가지 몇 개를 움직이는 것으로 간단히 불덩이를 쳐내버렸다.
그런 시도는 몇 번이나 계속되었지만 번번히 막혀버렸다.
대군장은 나를 차근차근 몰아넣었다.
왼쪽으로 피하면 뿌리로 만들어낸 벽이 있었고, 그걸 태우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거대한 주먹이 날아오는 식이었다.
심지어 잠시 틈을 만들기 위해 [은신]을 사용했음에도 정확히 내가 있는 위치로 정령을 날려 보내기까지 했다.
예언자이기 이전에 샤먼이었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는지, 대군장의 주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정령이 차츰 많아지고 있었다.
‘뭐지? 마치 내 움직임을 예측하는 듯한······!’
대군장의 몸에서는 여전히 슈퍼컴퓨터의 굉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니, 굉음은 처음보다 더 커지고 있었다.
“저건가.”
내 행동을 예언, 혹은 예측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씨팔.”
숨을 골랐다.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거대한 목인을 올려다보았다.
대군장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의 발치에 있는 라이시에게 경고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대군장은 저를 죽이고 싶다고 그러네요. 근데 저는 쉽게 죽어줄 마음이 없어요. 그러니 피해 계세요.”
라이시는 갑자기 벌어진 일에 당황한 것 같으면서도 허겁지겁 나와 대군장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다.
이제 대군장에게 말했다.
“이것도 예측했냐?”
오른손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박동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고, 안쪽의 근육과 신경을 타고 다시 심장으로 내달렸다.
[앙플라메enflammer]
나는 이제 스스로 불이 된다.
대군장이 양손을 치켜들고 나를 찍어 내렸다.
그의 주위를 맴돌던 정령들이 나를 향해 해일처럼 쏟아져 내렸다.
발치에서는 대군장의 몸에서 뻗어 나온 뿌리가 당장이라도 나를 꿰어 버릴 것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앙플라메]
심장 박동이 거세지며 온몸이 뜨거워진다.
한 번 더!
[앙플라메]
심장의 열기는 끝내 작은 불꽃을 피워낸다.
불꽃은 내 몸을 타고 흘러 마침내 나는 불 그 자체의 형상을 이룬다.
손이 움직이는 대로 불꽃이 일렁이며 따르니, 의지는 불꽃으로 피어나 향하는 것을 사윈다.
3중첩 [앙플라메]가 지속되는 1분 남짓, 나는 화염계 마법의 정수이자 위계를 초월한 화신의 영역에 이른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대군장의 손이 깍지를 낀 형태로 내 머리 위까지 다가와 있었다.
오른손을 들어 머리 위에 호를 그렸다.
[벌목]
화염의 도끼날이 아래에서 위로 치솟아 그대로 대군장의 팔목을 잘라냈다.
잘린 단면에서 불이 번져 오른다.
“보아하니 나를 싫어하는 것 같은데. 나는 이유를 모르겠거든? 그럼 내가 보기엔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거겠지?”
대군장은 팔이 잘린다는 것쯤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개의치 않고 정령들을 내게 밀어 보냈다.
정령들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밀푀유]
아까보다 훨씬 많은 불의 종이가 내 주위를 가득 메웠다.
충돌한 정령들은 한 줌 비명을 남기지 못하고 불과 함께 너울거리다 부스러져 흩어진다.
“이유 없는 미움은 좀 그러니까. 나를 좆같이 싫어하도록 만들어줄게.”
대군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벌목]
[가지치기]
[뒤섞기]
불의 형상으로 이루어진 장비들이 내게로 향하는 대군장의 일부를 잘라내고 베어냈으며, 순식간에 탄화된 그의 일부를 끼얹었다.
그는 나의 접근을 막으려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내 손짓과 눈짓으로 인해 주위에 쌓이는 재만 많아질 뿐이었다.
마침내 대군장 앞에 도달했을 때, 불타지 않고 대군장의 나뭇가지에 멀쩡하게 매달려 있는 나뭇잎은 이제 셀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끝났군.’
이 난리와 3중첩 [앙플라메]가 거의 동시에 끝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일렁이듯 넘실대듯 불꽃이 모습을 감췄다.
[앙플라메] 사용의 대가는 화염계 마법의 일주일 봉인.
3번이나 연달아 사용했으니 앞으로 3주 간은 추워 죽을 것 같아도 손끝에 불 하나 피워올리지 못한다.
몸 곳곳이 타들어 간 대군장에게 라이시가 달려와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눈물겨운 모습에 공감할 수 없었다.
짜증이라는 짜증이 다 솟아오른 상태였기 때문이다.
[청각 차단]을 해제하고 대군장에게 날 선 말을 내뱉었다.
“말해. 옛 주인이 거신족인지, 순수한 자는 뭔지, 왜 나를 공격한 건지, 이런 짓을 해서 당신들이 얻어 갈 건 뭔지.”
케이블이 가장 많이 뭉쳐 있는 곳 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제는 크기가 많이 줄어든 소음의 근원지.
아마 이곳에 슈퍼컴퓨터가 있을 것이다.
화염계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그 사실은 지금 나밖에 모른다.
협박으로는 부족함이 없겠지.
-결국 이렇게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인가······.
대군장이 알 수 없는 말을 흘리는 동안,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멈춰.”
돌아보니 가면을 쓴 남자였다.
가면 아래 그의 시선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마침 잘 왔다. 너한테도 궁금한 게 산더미거든.”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나와의 대화를 반기지 않는 것 같았다.
뒤춤으로 손을 가져가자 라이시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알파 씨! 그거······!”
라이시에게는 신경 쓰지 않은 채로 가면 쓴 남자에게 말했다.
“너, 거신족과는 무슨 관계냐. 그리고 여기 자빠진 장작이랑은 또 무슨 관계인지 다 말해. 이 질문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는데, 한 번만 더 물어보게 하면 너도 여기 눕고 싶다는 걸로 알아듣는다.”
“대군장이 없으면······!”
남자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가면을 젖히며 말했다.
“예언은 완벽할 수 없다고 하더니, 대군장은 이런 일도 예견했던 건가. 네가 그 순수한 자인가 보군.”
“대체 그 순수한 자는 뭐냐고. 설마 퓨어냐?”
가면 아래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절반 이상이 울긋불긋하게 변해 있었다.
화상의 흔적 같았다.
“그럴지도, 그렇지 않을 수도. 확실한 건 그쪽과 나 사이의 타협은 힘들 거라는 거 아니겠나?”
가면을 벗어던진 남자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대강 봐도 남자의 몸이 4m 가량을 넘어서자 라이시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거신족······. 옛 주인의 재림이······.”
그걸 보고 있던 내가 말했다.
“리벨리온을 이끄는 자의 얼굴에 화상자국이 있다고 하더군. 거신족 혼혈로 의심될 정도의 덩치와 힘을 가지고 있다고도 하고.”
“곧 죽을 놈에게 신상 정보를 듣게 되니 영광이군.”
“역시 그랬나. 진오.”
“대군장의 몸에서 내려와라. 너를 죽이려다가 대군장을 더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다.”
“리벨리온에 사람이 필요한가 보지? 대군장은 그 사람들을 네게 이끌 인물이고?”
리벨리온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인천 권역의 암흑가를 평정한 엘프의 몸에 문신이 가득하다거나, 서해 권역의 인공 섬 몇 개가 무장단체의 손에 넘어갔는데 그들이 쓰는 무기가 예공방의 무기로 보인다는 그런 종류의 소문이었다.
페룬 마탑이 대림 에어리어 26구역의 폐교를 중심으로 사회사업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인지 그들은 다른 영역으로 옮겨 간 것 같았다.
언젠가는 대림 에어리어에 돌아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다.
그런데 이렇게 계룡 권역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프로이데의 영원빙정을 노린 건가? 예공방 생산기지의 테러를 자행할 정도의 조직치고는 너무 소박한 것 같은데.”
진오가 이를 갈았다.
나는 계속해서 혼잣말에 가까운 도발을 자행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프로이데 마탑에 품고 있는 열등감과 부당함을 자극한 뒤에 자연스레 리벨리온으로 끌어들이려는 방법도 있겠군. 자신이 속한 사회에 불만이 있는 자들이라면 충동질하기 쉬울 테니까. 리벨리온이 엮여 있다고 생각하니 하나씩 풀려가네.”
“너, 뭐 하는 놈이냐.”
“부정하지는 않네?”
진오의 입이 열렸다.
“틀리지 않다. 열패감을 품고 있는 자들은 우리의 소중한 자원이지. 흡혈귀에 대한 반감 따위는 내가 알 바 아니다. 계룡 권역에서 프로이데의 영향력을 약화해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다시 네오-서울로······.”
그때, 정신 나간 거북이 수인이 다시 등장했다.
“흐흐헤헤. 물 너무 조앙. 헤헤헿.”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이의 예상치 못한 등장이기에 나, 진오, 대군장, 라이시 모두 얼어붙었다.
그렇게 우리 사이로 뛰어 들어온 거북이 수인은 진오를 보고 말했다.
“우와아아아. 엄청 크다아.”
그리고는 다시 칠렐레팔렐레 다른 곳으로 달려 나갔다.
거북이 수인이 달려간 곳에는 다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곳을 보고 있었다.
“여긴······대군장의 장막 안이라 허가받지 않은 사람들은 들어오지······!”
진오의 말이 이어질 때 쯤, 나는 한 발짝 옆으로 비켜섰다.
뒤 춤에서 떨어트린 검이 대군장의 몸, 정확히 말하면 슈퍼컴퓨터가 있을 만한 곳에 깊이 꽂혀있었다.
너무 깊이 꽂혀있어서 멀리서 보기에는 대군장의 몸에 칼자루가 하나 솟아있는 걸로만 보일지도 모르겠다.
멍청한 표정의 진오에게 간단히 알려주었다.
“장막은 슈퍼컴퓨터랑 정령들이 만들어내는 거라며? 그럼 이걸 멈추면 장막도 없어지겠다 싶더라고. 여기 모인 다른 사람들은 네 생각에 동의하나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모인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대군장님은 왜 저렇게 되신 거지?”
“위에 올라타 있는 저거, 라이시랑 또 누구야?”
“앞에 저거, 설마 거신족인가?”
“지금 그게 중요해? 리벨리온이래! 우리를 자기네 아래로 끌어들이려는 술수였다고!”
“대군장도 한 패였다는 거야?”
얼굴을 잔뜩 구긴 진오가 중얼거렸다.
“다시 묻는다. 누구냐.”
“PMC 소속 알파인데.”
“알파라. 편하게 죽게 두지는 않겠다.”
그가 도약하자 땅이 울렸다.
오른 어깨를 한 번 돌린 뒤, 뒤로 당겼다.
그리고 고개를 올려 들고, 떨어지는 진오를 향해 물었다.
“순수한 거신족을 본 적 있나?”
“······!”
“너는 거신족치고 너무 작아. 진짜 거신족은 주먹만 떼와도 너보다는 크다.”
어퍼컷을 날리듯 주먹을 뻗었다.
“보여주지.”
내 주먹이 대군장의 몸보다, 진오의 신체보다도 커다랗게 변해 진오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