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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39화 (40/258)

039.

039.

위타천에게 선물 받아 차고 다니는 귀걸이, 정식 명칭은 개인용 스마트 통신 디바이스지만 안에는 온갖 기능이 내재되어 있다.

사진 촬영, 개인 인증 기능, 차량과 링크 시 네비게이션 기능, 팔찌나 시계와 같은 별도의 디바이스에 연결해서 원하는 이미지를 화상으로 띄워주는 기능 등등.

설명서를 대충 읽고 던져본지라 정확히 어떤 기능들이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제법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기능은 통역 기능이다.

세상이 이 지경까지 발전했는데도 언어의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강대한 패권국 없이 도시 권역 단위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디바이스 덕에 큰 불편함은 없다.

욕설, 사투리 등등의 미묘한 뉘앙스까지도 거의 완벽에 가깝게 표준화된 말로 바꿔 들려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디바이스의 단점 아닌 단점이 하나 있으니, 발성기관을 거쳐 나온 음파의 진동만을 언어 발화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나뭇가지의 떨림이나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조절해 의사를 표현하는 목인의 언어는 이 귀걸이로도 전혀 통역할 수 없었다.

#

솨아아아-

산뜻한 바람이 대군장의 잎새를 두드리며 지나가는 소리였다.

나는 지금 라이시의 뒤를 따라 대군장이 펼쳐놓은 장막의 안에서 대군장을 마주하고 있었다.

장막 밖에서 보이는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밖에서 보는 대군장의 모습은 오랜 기간 마을의 초입에 뿌리 박고 서서 사람들에게 큰 그늘을 제공해주는 거대한 느티나무 같았다.

그 줄기에서 뻗어 나와 위와 아래로 향하는 케이블과 전선은 마치 나무에서 원래 솟아나온 것마냥 위화감 없이 섞여들었고. 신비로움과 영험함마저 다가오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나뭇잎 사이로 얼핏 비치는 햇살 한줌을 마주하며 그 영험함에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떠오를 정도.

하지만 그것은 대군장이 보여주고 싶은 자기 모습이라 했던가.

가까이서 본 대군장은 줄기가 우람하지도, 가지가 성기지도, 나뭇잎이 빽빽하지도 않았다.

크기는 분명 컸지만, 응달에서 쓸쓸히 말라가는 나무의 모습이 저럴까.

빽빽한 케이블과 전선은 군데군데 피복이 벗겨져 안쪽의 금속 선들이 번쩍이고 있었으며, 노후된 슈퍼컴퓨터가 돌아가는 굉음이 간헐적으로 소리를 키웠다가 이내 잠잠해지곤 했다.

그것은 슈퍼컴퓨터를 안에 품은 예언자 목인이 아니라, 생명 유지 장치를 끌어안은 채 간신히 호흡하는 노인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이미 다음 대가 진즉 탄생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 이상하리만치 오래 버텨 오신 거죠.”

손이 닿기만 해도 떨어지는 대군장의 푸석한 껍질 한 겹을 벗기며 라이시가 말했다.

대군장은 아직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다는 듯, 다시 한번 가지를 떨었다.

라이시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나뭇잎도 몇 개 떨어질 정도였다.

라이시가 그런 대군장과 대화를 나눴다.

보기에는 라이시가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대화 내용은 분명히 상대가 있었다.

“또 그 소리세요? 대체 그 옛 주인이 누군데 그렇게 찾으시는 거예요. 그런 말씀은 저 가면 나중에 들어오실 분이랑 하시고, 앞에 계신 분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 땅에 발붙인 사람 중에 당신께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지만 콕 찝어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고 하신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대군장의 껍질을 쓰다듬은 라이시가 나를 한 번 보고 대군장에게 말했다.

“알파 씨에요. 하실 말씀 있으면 천천히 하셔도 돼요. 알파 씨에게는 제가 전해드릴게요.”

나뭇가지가 사르르 떨었다.

그 사이 사이로 통과하던 햇빛의 길이 뒤바뀌며 아래의 그림자를 이지러트렸다.

그것은 내게 하는 소리가 아니라 라이시에게 하는 말이었다.

“평소에는 예언의 앞부분만 힘주어 말하시더니, 오늘은 뒷부분도 말씀하시려나 보네요. 잠시만요. 제가 듣고 알려드릴게요.”

라이시가 손에서 몽글몽글한 기운을 만들어내서 대군장에게 가져다 댔다.

대군장의 말을 라이시가 전해주기 전, 내가 먼저 말했다.

“가장 순수한 자는 땅의 옛 주인을 지워내리니 그를 주의하라.”

바람이 멎었다.

살포시 귓가를 간질이던 나뭇잎 소리도, 고막을 긁는듯한 슈퍼컴퓨터의 굉음도 사그라들었다.

정적이 찾아왔다.

#

대군장은 자신의 이름을 잊었다.

일부러 잊으려 노력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주위에 머물렀다 사라져간 사람과 이름들을 하나씩 잊어가다보니 자신의 이름 또한 잊어버렸을 뿐이었다.

그렇게 긴 세월 살아온 목인 주위에 사람들이 모였고, 목인은 어느새 계룡 권역을 통솔하는 대군장이 되어 있었다.

책임감 때문에 슈퍼컴퓨터를 끌어안고 예언자의 운명을 받아들인 것이 언제인지도 역시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을 추앙하는 이들이 다른 권역의 복잡함과 난해함에 대해 토로할 때, 대군장은 그저 나뭇가지를 한 번 흔들어주고 말았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알 수 있지는 않았으니까.

어느 날 자신에게 찾아와 이 권역에 자리를 잡아도 되겠냐고 묻는 마법사 한 무리에게 대군장은 그러라고 했다.

땅의 옛 주인들이 떠난 뒤로 남은 곳은 많았으니까.

자신의 주위에 모인 사람이 대를 이어가며 마법사들과의 갈등을 마음속에 새길 때, 대군장은 미움을 품어 좋을 것은 없다 조언했다.

그가 오랜 시간 지켜온 바로는 그랬으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군장은 조금씩 지쳐갔다.

그럴 때마다 어릴 적 보았던 이 땅의 옛 주인들, 거신족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은 거대하고 자애로웠다.

늘 다른 이에게 그늘을 만들어주던 대군장에게 처음으로 그늘을 씌워준 것도 거신족이었다.

무더운 여름에 지쳐 대군장이 가지를 축 내리고 있으면, 거신족 중 자애로운 자들이 기운 내라며 일부러 스스로의 손가락에 상처를 내어 대군장에게 피를 한 모금 먹여주기도 했었다.

긴 생애 동안 다른 이들을 보호해온 대군장이 보호받는다고 느낀 때는 그때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강대한 종족조차 차츰 모습을 감추었다.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그들의 강대함은 다른 종족들이 보기에 큰 위협이라 모두가 단합해 거신족을 없앴다고 했다.

살아남은 거신족들은 몸집이 작은 거신족들 뿐, 그나마도 다른 종족들과 섞이며 그들은 계속 작아지고 있다고 했다.

대군장은 거신족은 그런 이들이 아니라는 걸 말하기 위해 온 몸을 애달프게 떨었지만, 그의 말을 이해하고 전해줄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거신족이 사라진 이후 남은 이들 간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권역에 터를 잡은 마법사들은 여전히 때가 되면 자신에게 인사를 오긴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서 찾아볼 수 있던 겸양과 존중은 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대군장인 자신에게도 그럴진대, 자신을 보고 모여든 다른 이들에게는 오죽했으랴.

그렇게 고된 나날이 이어질 때 쯤, 대군장의 몸속에서 간신히 기능을 이어가던 슈퍼컴퓨터가 예언을 하나 했다.

대군장은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예언일수도 있겠다고 직감했다.

-땅의 옛 주인이 돌아올 것이나 그는 흐려진 채일 것이라. 하지만 그와 함께 일어서면 되찾을 영광은 무궁하리라. 가장 순수한 자는 땅의 옛 주인을 지워내리니 그를 주의하라.-

뒤의 문장을 일부러 말해주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제 세상에 순수한 자가 남아 있지 않음을 대군장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들리지 않게 읊조렸을 뿐이다.

예언의 내용을 훼손할 수는 없기에.

그 무렵이었다.

자신이 어쩌면 거신족의 마지막 핏줄일수도 있다는 남자가 대군장을 찾아온 것은.

“나는 거신족의 마지막 후손이고, 이 땅에 뿌리내린 억압을 거두어 낼 것입니다.”

대군장이 만들어 낸 장막 앞에서 울려 퍼지는 가면 쓴 남자의 목소리.

믿지 않았다.

남자의 몸집은 그리 크지 않았다.

거신족은 대군장을 덮을 수 있을만큼 거대했었다.

하지만 흔들렸다.

모두 장난처럼 거신족의 이름을 입에 담는 시대에, 남자는 진실로 거신족을 입에 올렸다.

장막이 열리고, 남자가 대군장에게로 다가섰다.

가면을 벗어놓은 남자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보호하던 자들을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더 이상 그들이 무시 받지 않을 세상을 만들 겁니다. 멀고 험한 길이고, 많은 피와 희생이 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이 내 뜻을 따라줬으면 합니다.”

가면을 내려놓아 원래의 모습을 찾은 남자가 손에 상처를 내자 붉은 피가 후두둑하고 대군장의 뿌리께에 떨어졌다.

그 피에서, 대군장은 옛 주인의 재림을 실감했다.

주인께서 돌아오니 모든 것은 그의 뜻대로 행해졌다.

대군장은 프로이데 마탑에 대항하는 것이 위험한 일인줄 알면서도 사람들을 불러 모아 계곡을 점거했다.

어느새 이 일은 마법사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계룡 권역을 원주민들에게 돌려주자는 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원주민이 자신과 대군장인줄 알았지만, 대군장은 그것이 뜻할 수 있는 존재는 거신족뿐이라 확신했다.

거신족이 활보하며 자신을 지켜주는 세상.

늙고 지친 목인의 노곤함은 계속해서 과거의 기억을 향했다.

그러던 중, 넓게 펼쳐진 대군장의 기감에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모두가 더럽혀지고 섞여가는 세상에서 홀로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거신족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것 못지않게 거대하고 장엄했다.

예언은 옛 주인의 재림 뿐만 아니라 그의 대적자對敵者에 대해서도 경고했었다.

대군장은 대적자를 가까이 불러들였다.

그는 마치 몸속에서 별빛이 흘러넘치는 것 같아 대군장은 쉬이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예언의 순수한 자가 이 자다. 옛 주인의 재림은 이 자에 의해 뒤틀리리라. 그러니······.-

마음을 다잡기 위해 대군장이 다시 한번 예언을 읊조렸다.

그러자 대적자의 입이 열렸다.

“가장 순수한 자는 땅의 옛 주인을 지워내리니 그를 주의하라.”

아무런 능력도 보이지 않은 채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읽어내는 이가 있을 줄이야!

대군장은 마음을 먹었다.

-이 자를 여기서 죽여야 대업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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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인 언어 최상급]

서리얼에서 거신족은 선택이 불가능한 종족이었지만 목인은 플레이어블 종족이었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도 느리고 자유로이 활보할 수 있는 지역도 평원이나 숲으로 제한받는 종족을 골라서 플레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런 목인 중에서도 유저를 제외한 NPC만이 사용하던 목인 언어를 배운 사람이 나다.

왜?

이유 따윈 없다.

그 스킬이 거기 있었으니까.

그게 내가 게임을 하는 방식이었으니까.

내려앉은 침묵을 갈라낸 것은 라이시의 말.

“목인의 언어를 알고 계신 건가요? 저도 의미만 통할 뿐, 적확한 단어와 말로 번역한다고는 하기 어려운데······.”

“제가 하는 말은 대군장이 알아 듣는 거죠?”

“네. 일단은요.”

다시 말했다.

“가장 순수한 자는 땅의 옛 주인을 지워내리니 그를 주의하라. 이렇게 말한 거 아닙니까? 왜 뒷 내용은 숨겼으며, 순수한 자는 뭡니까?”

“알파 씨!”

라이시가 말렸으나 대군장 앞에까지 온 이상 나는 멈출 마음이 없었다.

“대체 나를 이곳에 들인 이유는 무엇이며, 흡혈귀들이 소에 오면 오염된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여길 점거해서 당신들이 얻는 이득은 뭡니까. 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옛 주인이라는 존재. 그건 거신······.”

쿠르르르-

작은 진동이 발끝에서 느껴졌다.

땅 위로 솟아오른 대군장의 뿌리 끝이 나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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