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
038.
“알고 계신 것 같군요. 거신족에 대해.”
내 말에 대해 라벤느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내놨다.
“거신족은 멸족한 존재야. 그 피를 이었다거나, 혼혈이라고 주장하는 이들 중에서 정말 거신족의 핏줄이라고 증명된 이는 하나도 없네.”
“하지만 달이 머무는 계곡에 있는 소가 거신족의 발자국이라는 설화. 분명히 존재하지 않습니까.”
나무 의사인 라이시에게 들은 설화였다.
라이시는 대군장을 돌보기 때문에 대군장이 말하는 예언뿐만 아니라, 옛이야기도 많이 알고 있었다.
그중 흥미로운 부분이 거신족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설화는 그저 꾸며진 이야기일 수도 있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거신족은 정체가 불분명해 실존마저 의심받는 종족이네..”
“존재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왜 사라진 지는 모르겠지만요.”
“그걸 어떻게 자네가 확신하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단언할 수 있다.
거신족은 있었다.
내가 서리얼을 즐기던 시절에 분명히 존재하던 종족이니까.
온갖 종족 선택과 커스터마이징 조절이 가능하던 서리얼에서도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없는 몇 안 되는 종족이기도 했다.
크기가 어마어마하고 신이한 힘을 가졌다는 설정이어서 게임에 등장해도 던전이나 특수 필드에서나 나왔는데, 그마저도 ‘신체의 일부’가 등장하는 수준이었다.
등장한 각 부위를 붙여서 거신 합체를 이루면 게임 터지는 거냐고 유저들끼리 농담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면 내가 하던 서리얼은 아주 먼 과거다.
그동안 마법과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과거의 신적인 존재였던 거신족의 흔적은 미미하게 전해지다 잊혀져가고 있었다.
그 중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는 설화를 이곳, 계룡 권역의 달이 머무는 계곡에서 듣게 된 것이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물으셨지만 마탑주님께서 납득할만한 답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거신족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지금의 거신족은 크고 힘이 강한 사람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거신족의 피가 섞였다고 말해도 자기 덩치와 힘에 자부심이 있구나 하고 넘어간다고.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나는 거신족 혼혈로 추정되는 이와 엮인 적이 있었다.
리벨리온의 진오.
그가 정말 거신족 혼혈인지, 그렇지 않으면 힘이 좋은 덩치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파라터스가 그를 죽여가면서까지 기계화 좀비로 만들고 싶어 할 정도였다.
그리고 예공방 생산기지 테러 때의 증언을 들어보면, 진오는 혼자서 외골격 수십 대를 고철로 만들었다고 한다.
입만 열면 ‘저희 아수라는 거신족에 뒤지지 않는 완력’ 어쩌고를 달고 사는 하르파고스도 직접 증언했다.
어떤 아수라가 와도 혼자서 이렇게 할 수는 없다고.
그래서 강화 약물이나 특수 장비를 사용하지 않았나 하고 추정했는데, 당시 경비원들은 약물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육안으로 보이는 장비는 없었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오로지 완력과 주먹만으로 방산 기업에서 생산한 외골격을 무더기로 박살 냈다는 소리.
“자네는 대군장의 뒤에 있는 인물이 거신족이라 생각하고 있는 건가?”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대군장에게 직접 다가갈 수 있는 사람에게 얻은 정보에 따르면, 근래 대군장의 근처에 가면을 쓴 남자가 하나 붙어있다고 합니다. 등장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대군장의 최측근들도 그의 존재는 잘 모른다고 하더군요.”
“자네에게 정보를 준 사람은 그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지? 최측근도 잘 모른다며.”
“제 정보원은 최측근 이상입니다.”
주치의면 측근 이상이지.
“하루 만에 그 정도의 정보원을 확보할 수가 있나?”
솔직히 이건 운이 많이 따랐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약간의 노력 여하와 많은 운이 도왔습니다.”
“한 마디를 안 지는 건 참······대단하구만. 계속해보게.”
대군장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알려지는 것을 몹시 꺼려서 진찰받을 때면 라이시를 빼고 다른 사람을 모두 물린다는데, 흡혈귀 회합 발표 직후에 합류한 가면 쓴 남자 하나는 동석을 허락한다고 한다.
예언의 내용도 그렇고 갑자기 대군장이 남자를 신뢰한다는 것으로 봐서 거신족이 아닐까 했는데, 라이시의 말로는 그리 크지 않은 평범한 덩치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거신족과의 연결고리가 아닐까 싶었다.
디즈가 라이시에게 나를 좋게 소개해줬고, 무엇보다 라이시가 대군장과 가면 쓴 남자의 행보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여기서 라이시의 정체와 내 추측을 제거한 뒤에 라벤느에게는 가면을 쓴 남자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했다.
홀린 듯 내 이야기에 빠져들던 라벤느가 정신을 차리고 내게 말했다.
“그 남자는 누구지? 그리고 왜 회합을 망치려는 거고? 또, 이렇게 우리 프로이데를 적대해서 그 남자와 대군장이 얻을 수 있는 건 뭔가.”
긴장한 탓인지 라벤느의 호흡이 거칠었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첫날의 수확치고는 꽤 괜찮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나머지는 이제 저도 알아가야 합니다. 엿새 남았군요.”
#
다음 날, 디즈의 의심을 사지 않게 오전에는 그의 업무를 도와준 후에 아무리 봐도 곧 쓰러질 것 같은 ABT 연구소로 돌아왔다.
“볼드가 왜 저러지?”
디즈의 말에 파키케팔로사우루스를 보니 어제 고릴라와 오크를 던져둔 건초 더미 위에 머리를 박아대고 있었다.
볼드가 박치기를 할 때마다 건초 안에서 뭔가가 움찔거렸으나 디즈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디즈의 뒤를 따라 연구소로 들어가면서 볼드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올려세워 주었다.
꾸워어어어
더 열심히 박치기를 하는 볼드.
볼수록 하나 데리고 있으면 괜찮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볼드의 배설물을 치우기 위해 디즈가 방독면을 쓰고 작업복을 입은 채로 나오는 걸 보고서 마음을 돌렸다.
그걸 구경하고 있는 사이, 라이시가 찾아왔다.
“오늘도 뵙네요, 알파 씨.”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라이시는 지금 내게 매우 중요한 정보원이다.
밝게 맞았다.
“오늘도 식물들 돌보다 오셨나 봐요?”
“네. 제가 하는 일이 늘 같죠.”
“위쪽 분위기는 어떤가요?”
라이시가 한숨을 길게 뿜었다.
“후우······. 말도 못 하죠. 프로이데와 전쟁이라도 벌이려는 건지 원······. 그렇게 되면 다른 도시 권역이 계룡 권역을 넘볼 텐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저런······. 그런데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얻어갈 게 있나요?”
“프로이데에서 보관하거나 팔고 있는 영원빙정이 탐나는 거겠죠. 빙결계 마법사들에게 효과가 가장 좋다고는 하지만, 그 자체로도 좋은 영약인 건 분명하니까요. 프로이데에서는 영원빙정의 판매금액 일부를 분명히 계룡 권역에 재투자하고 있어요. 동식물 보호기금을 조성한다거나, 토템 제작 재료를 지원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그걸로는 성에 안 찬다는 거겠죠.”
그리고 민감한 문제를 하나 꺼냈다.
“대우 문제도 없지는 않겠죠?”
계룡 권역은 자연주의 권역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많은 주술사, 샤먼, 심령주의자, 드루이드 같은 이들이 모여 산다.
다른 도시에 이들과 같은 능력을 가진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발전된 권역으로 가면 좋은 일자리와 대우를 보장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계룡 권역에 모인 이들 중에는 그런 타 권역의 복잡함에 질리거나 적응하지 못해 이곳에 정착한 이들도 많았다.
기업이나 대학교의 연구원, 혹은 소규모 공방 같은 것을 꾸려 삶을 영위해나가기는 하지만 이들이 창출해내는 경제적 가치는 그리 크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기에 다른 도시에 있었다면 적당한 규모를 가진 많고 많은 기업체 중 하나 정도의 크기인 프로이데 마탑이 계룡 권역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상당한 지경.
계룡 권역이 차지하는 의미는 ‘다른 도시 권역 간의 완충지대’, ‘기계 문화가 주류인 다른 권역에 비해 생명 중심적인 면이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프로이데 마탑이 그곳에 존재해서’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자연스레 프로이데 마법사들은 스스로를 1등 시민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엄연히 말해 계룡 권역의 시장 격인 대군장부터가 자연주의자들에게 반신으로 모셔짐에도 불구하고.
‘마탑주가 말했지. 프로이데 마탑이 이곳에 자리 잡은 게 언제부터인지 모른다고.’
다르게 말하면 언제인지도 모를 정도로 길게 이어진 차별의식이 이 문제에 내재 되어 있는 것이다.
가면을 쓰고 대군장에게 접근한 남자는 그런 미묘한 열등감과 부당함을 건드린 것이 아닐까?
예언은 아주 조그만 기폭제일지도 모른다.
그 아래 가득 쌓여있는 갈등이라는 폭탄을 터트릴 기폭제.
조심스레 어려운 부탁을 꺼냈다.
“위에 올릴 보고서에 조금 더 상세한 상황과 정보를 담았으면 하는데, 혹시 라이시 씨와 디즈 씨께 동행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어렴풋하게나마 파악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제법 고민하던 둘이 내게 말했다.
“좋아요. 데려가 드릴게요. 하지만 절대로 소 주위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허리에 차고 있는 그 칼자루도 어떻게 하고요.”
바로 칼자루를 풀어 바지 뒤쪽에 쑤셔 박았다.
움직일 때 거치적거리긴 해도, 이걸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디즈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자기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근래에 광포화된 동물 몇을 죽였는데, 그 중 틀림없이 위쪽에서 탈출한 녀석이 있을 거라면서, 시비가 걸릴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라이시와 함께 대군장과 강경파들이 머문다는 달이 머무는 계곡의 소로 향했다.
올라가면서 차츰 분위기가 변했다.
아래쪽은 정말 캠핑을 즐기러 온 느슨한 분위기였다면, 소에 다가갈수록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다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고, 약이나 환각제를 했는지 표정과 눈이 풀린 이들도 종종 보였다.
그중 압권은 등딱지를 다 열고 다니는 거북이 수인이었는데, 양손에 물병을 들고 쉬지 않고 물을 퍼먹으며 행복한 웃음을 짓는 것이, 진짜 광기를 느끼게 했다.
‘엮이면 진짜 X된다’ 하는 경각심이 절로 들었다.
마침내 소에 이르렀다.
거신족의 발자국에 물이 담겨 만들어졌다 설화가 있을 만큼 커다란 소였다.
계곡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소를 이루기 시작하는 지점, 줄기에 케이블과 회로가 잔뜩 솟아 나온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저게 계룡 권역의 대군장······.’
아마 케이블이 묻힌 줄기 안에는 예의 그 수액에 절여진 슈퍼컴퓨터가 있을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 동안, 몇 명인가 우리를 제지하기는 했지만 라이시 덕에 큰 문제 없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렇게 뒤쪽에서 잘 보이지 않는, 대군장 뒤쪽에서 조금 떨어진 공간으로 이동한 뒤, 라이시가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대군장이 펼쳐놓은 장막이 시작돼요.”
“네? 보기엔 아무것도 없어 보여요.”
“대군장이 허락한 사람만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어요. 보세요.”
그리고 라이시가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아까 봤던 눈빛이 맛이 간 거북이가 소리를 지르며 대군장에게로 뛰어들었다.
“으헤헤헤! 에헤헿!”
라이시가 알려준 곳에서 대군장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 닿을 경계에 들어서자마자, 거북이 수인은 제자리에서 넘어지고, 구르고, 공중제비를 돌고, 헤엄을 쳐댔다.
그리고는 몸을 반대로 돌려 튕기듯 대군장에게서 멀어졌다.
“흐허허헣!”
정말 마음으로만 생각하려 했는데, 거북이 수인의 웃음을 듣고서 나도 모르게 한 마디가 새어 나오고 말았다.
“안타깝다, 안타까워. 한창으로 보이는 친구가······.”
푸훅하고 웃음을 터트린 라이시가 설명했다.
“대군장의 구형 슈퍼컴퓨터에서 발생하는 독특한 전자파와 대군장이 그동안 말 나눴던 정령들의 파장이 만들어내는 현상이라고 해요. 설명이 길었지만, 쉽게 말해 대군장이 자기 모습을 감추고 허가받은 사람만 들여보내게 하는 일종의 결계예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도 대군장의 모습은 보이잖아요.”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이죠. 일단 전 안에 들어 갔다 올게요. 말씀드렸지만 절대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지 마세요. 아시겠죠? 안쪽으로 들어오지도 마시고요.”
라이시가 대군장을 향해 걸음을 내딛자, 아까 봤던 거북이 수인과는 다르게 몸이 아예 사라졌다.
“오······.”
신기해하며 약 30분 정도 멀리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을 무렵, 뒤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객이 계셨군. 오늘 올 사람은 의사가 전부라고 들었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가면을 쓴 남자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이상하게 낯이 익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 구면인가?”
이렇게 급작스럽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
뭘 물어야 하지?
거신족과의 관계?
대군장을 조종하는 이유?
프로이데 마탑과의 충돌로 인해 그쪽이 얻어갈 이득?
남자가 내게 다시 물었다.
“왜 대답이 없지?”
질문을 결정했다.
“당신은 어째서 대군장에게······.”
그때, 사라졌던 그대로 라이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시 역시 가면 쓴 남자를 보고 흠칫 놀란 뒤, 내게 말했다.
“대군장이 알파 씨를 만나고 싶대요.”
“이 사람을?”
예상치도 못한 말에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가리키는 동안, 가면 쓴 남자의 목소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마구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