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037.
“나오지 마세요. 얼마 안 걸릴 거예요.”
디즈가 나오려 하길래 이렇게 말했더니 고릴라 수인과 오크의 눈치를 본 디즈가 망설였다.
그러자 고릴라 수인과 오크를 여기까지 데려온, 디즈의 친구인 것 같은 켄타우로스가 디즈를 잡아끌며 말했다.
“그래, 네가 말한 대로 저분이 ABT에서 보낸 거라면 별문제 없을 거야. 그렇죠?”
그 말에 오크가 지팡이를 만지작대며 웃었다.
기분 나쁜 웃음이다.
“맞아. 문제가 없다면 말이지.”
디즈와 켄타우로스가 연구소 안으로 사라졌다.
잘 닦지 않아 먼지가 가득한 연구소의 창문에 리자드맨과 켄타우로스의 것이 분명한 실루엣이 생겨났다.
나를 연구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려간 고릴라 수인이 입을 열었다.
“그쪽이 죽인 새비지 랩터들의 시체를 조금 봤는데 말이지.”
팔짱을 끼고 무슨 말을 하나 가만 듣고 있었다.
“두 놈은 베여 죽었는데 상처에 뜨거운 걸로 지진 자국이 있었고, 다른 한 놈은 넝쿨에 온몸이 으스러져 죽어 있었단 말이야.”
“할 말 있으면 빨리합시다.”
오크가 끼어들었다.
“왜? 조마조마해?”
나를 보는 둘의 눈이 맛있는 고기를 어디부터 베어 물어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다시 고릴라가 말했다.
“그런 넝쿨을 얼마 전에 분명 봤단 말이지. TV에서. 무쌍부부가 비슷한 넝쿨에 묶여서 고속도로 위를 구르더라고.”
이번엔 오크.
“그리고 다른 두 랩터를 죽인 건 아마도.”
오크가 짧은 턱을 내 허리춤의 칼자루를 향해 앞으로 깔짝인다.
“좀 알아봤는데, 유명하시더라고. 흡혈귀 호위이자 해결사 오메가 씨.”
랩터가 튀어나왔을 때 검을 쓴 것이 실수였다.
차라리 화염계 마법으로 죽였으면 내 정체를 추측할 수 있을 만한 증거를 남기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내가 보기에 이 둘은 진짜 정말 언어 그대로 대수롭지 않았다.
“좀 덜 알아보신 모양이네. 그걸 알고도 둘이 오신 걸 보니.”
내 입으로 정체를 밝히자 고릴라와 오크는 이제 입맛까지 다시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서로에게 말했다.
“이 녀석을 잡아가면 엄청난 공이겠지?”
“말이라고. 지긋지긋한 경계에서도 빼줄걸.”
흘끗 주위를 둘러봤다.
앞에 있는 둘 말고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것이, 나를 잡아갈 공에 눈이 멀어서 둘만 온 것 같았다.
“바이크나 조금 몰 줄 알지, 이 녀석 자체는 강하지 않을 거야. 틀림없어. 다른 호위들에 비해 이 자식 이름값은 형편없잖아.”
그렇게 말한 고릴라의 얼굴과 가슴에 그려져 있던 붉고 푸른 문신이 빛나더니 안 그래도 우락부락했던 몸이 더욱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가슴을 치며 돌격하는 고릴라.
놈의 우악스러운 주먹이 나를 강타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버리는 내 몸.
먼지와 분진이 확 피어올랐다.
하지만 나는 그의 왼쪽에 있다.
“나를 두 명 데려가면 더 많은 상을 받나?”
다음 말은 고릴라의 오른쪽에 있는 내가 이어받았다.
“세 명을 데려가면? 경계만 빼주는 게 아니라 작전 회의에도 끼워주나?”
당황스러운 듯 좌우를 둘러보는 고릴라.
이 중 진짜 나는 한 명뿐.
[분신 생성]
만들어진 분신들은 내 움직임을 따라 하지만, 유효할 정도의 물리적 타격은 입힐 수 없다.
하지만 여러 곳에서 넣는 입딜로 멘탈을 긁을 수는 있지.
소리가 앞뒤좌우상하 전부에서 똑같이 들려서 방향을 구분할 수 없게 하는 기술을 육합전성六合傳聲이라고 한다지?
나는 진짜 여섯 방향에서 떠들어주겠어.
분신에서 또 분신이 갈라져 나오고, 어느새 이 주변에 내가 수도 없이 많아졌다.
“혼란스럽나? 그렇겠지? 누가 진짜일까? 이젠 나도 모르겠는걸.”
고릴라가 두더지 게임을 하듯 커다란 주먹으로 내 분신들을 뭉갰다.
“크아아아! 다 없애다 보면 진짜도 잡히겠지!”
그걸 본 오크가 당황해서 외쳤다.
“진정해! 그러다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이 녀석들은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 내가 처리할게.”
오크가 들고 있던 기계 지팡이에서 불길한 기운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릴라가 분신을 뭉개는 사이, 나는 오크에게 이미 접근한 상태였다.
“분신은 공격 못 하는데, 나는 아니야.”
손을 뻗어 오크의 수혈睡穴을 짚었다.
이제 이 녀석은 쓰러지듯 잠에 빠져들어······.
하지만 오크는 눈을 멀뚱멀뚱하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씨······.
칼자루를 꺼내서 오크의 머리통을 향해 휘둘렀다.
[거인의 망치]
타격지점에 강한 충격을 가하는 스킬을 더해서.
관자놀이를 맞는 것과 거의 동시에 눈을 뒤집은 오크가 한쪽의 나무에 처박힌 채 정신을 잃었다.
“오크는 혈도 위치가 다른 건가?”
깨어날 기미가 없는 것 같으니 어찌 됐든 점혈(물리)은 먹혔다.
고릴라가 나를 향해 크게 외쳤다.
“레오나르도에게 무슨 짓이야!”
더럽게 못생긴 오크 이름이 레오나르도······?
“성은 디카프리오라고 하지 왜, 아니다. 아예 브래드 피트라고 해라.”
내가 흘린 말에 고릴라가 충격받았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내 이름을······어떻게?”
진짜 줘 패고 싶다.
이건 세기의 명배우들에 대한 모독이다.
“너넨 진짜 안 되겠다. 이름이랑 얼굴 매칭이 최악이야.”
“잡아가려고 했는데! 이제 힘 조절 따위는 없다!”
흥분해 날뛰는 고릴라의 주먹이 내 머리통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
피하지 않았다.
이쯤이면 분명 약효가 퍼질 시간이다.
고릴라의 몸이 휘청였고, 녀석의 커다란 주먹이 내 옆으로 비켜 떨어졌다.
“어어?”
녀석은 비틀대며 자세를 바로 하지 못했다.
“신나게 터트리던데, 뭔가 이상하다고 못 느꼈나? 먼지가 많다든지. 그런 거.”
“으으······?”
이제 녀석은 눈이 반쯤 감겨있다.
분신들 안에 담겨 있던 [수면 포자]를 신나게 터트리며 마셔댔으니 버티지 못하겠지.
고릴라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분신들도 사라졌다.
레오나르도와 브래드······에게 각자 제일 탄성 좋고 튼튼한 어레스트를 물린 뒤, 볼드가 묶여 있는 마구간······아니 공룡구간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파키케팔로사우루스의 집 근처로 데리고 갔다.
디즈가 볼드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건초와 식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곳에 둘을 던져 넣었다.
오크가 들고 있던 기계 지팡이는 부러트려 근처에 던져버렸다.
적당히 정리하고 나오는데, 볼드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볼드에게 말했다.
“저 둘이 나오려고 하거든 머리로 박아버려도 좋아.”
꾸워어어어-
공룡을 타고 다닌다······꽤 괜찮지 않나?
네오-서울에서 이걸 타고 다니면 상당히 멋있을 것 같았다.
그때, 푸드드드득하는 소리가 들렸다.
볼드가 만들어낸 어마무시한 양의 배변이 뜨거운 김을 피워내고 있었다.
사무실 앞에 저런 게 매일 생긴다면 앨리스가 날 죽이겠지?
“······바이크 생긴 지 얼마나 됐다고 다른 탈 것 고민이야. 나도 참, 배가 불렀구나.”
방금 목격한 충격적인 광경을 잊으려고 애쓰며, 디즈와 그의 친구인 켄타우로스가 기다리는 연구소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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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달이 머무는 계곡에 접근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의 이름은 펠루다.
거북이 수인이며, 수납 공간으로 개조한 그의 등딱지 빈 공간에는 호위나 방어에 특화된 장비들이 가득했다.
펠루다는 PMC에서 일하는 전문 인력이며, 흡혈귀 회합으로 분위기가 엉망인 계룡 권역에 침투할 만큼 숙련된 요원이기도 하다.
그의 이번 임무는 디즈라는 리자드맨을 만나 계룡 권역의 긴장 상태가 해소될 때까지 그를 보호하는 것.
대기업인 ABT에서 받은 첫 의뢰이기에 펠루다의 가슴은 조금 설레고 있었다.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대기업과의 관계를 잘 맺어두면 나중에 고문이나 사외이사직도 노려볼 수 있다고.
펠루다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그는 전문 인력이자 철저한 현실주의자.
달콤한 상상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망상이다.
그의 눈에 물줄기를 따라 만들어진 거대한 텐트촌이 들어왔다.
‘아마 저들이 달이 머무는 계곡을 점거하고 있는 자들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펠루다가 다가가자 순찰을 돌고 있던 인원들이 다가왔다.
“뉘슈?”
PMC는 거칠고 다 때려 부술 것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현지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필수 중의 필수다.
펠루다는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혹시 여기 디즈라는 리자드맨이 계신지요? 저는 그분의 안전을 위해 파견된 사람입니다.”
굳이 임무를 비밀로 할 필요도 없는 쉬운 의뢰.
하지만 펠루다에게 접근한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디즈를 찾는데?”
“호위인가 봐. 디즈가 몇 주 전부터 그랬거든. 본사에 요청했다고.”
“그 사람은 오늘 아침에 디즈랑 같이 여기 지나갔어. 내가 봤다고.”
마지막 사람이 한 말에 펠루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끌고 가.”
끌려가면서도 펠루다는 생각했다.
‘무슨 오해가 있나 보네, 곧 풀려나겠지.’
구석진 곳으로 옮겨진 펠루다는 의자에 앉은 채로 결박당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펠루다를 PMC로 위장해 내부로 침입하려 한 프로이데 마탑의 첩자로 생각했고, 오해는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결국, 펠루다는 몇 시간이나 심문받으며 지쳐버렸다.
“물······물 한 잔만······.”
그러자 누군가 펠루다를 끌고 가서 흐르는 물줄기에 얼굴을 처박았다.
“너 같은 첩자한테 물을 떠다 줄 놈은 여기 없어!”
왠지 물 색깔이 영롱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펠루다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왠지 몽롱해지고, 발이 둥실둥실 뜨는 것 같았다.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여유와 행복감이 솟았다.
고개를 든 펠루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흐흐······흐헤헤헤······.”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보여주는 완벽히 이상적인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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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는 잘 된 것 같네요?”
연구소로 들어서자 조심스럽게 디즈가 내게 물었다.
“네. 다행히 별일은 없었어요.”
들린다.
양심 삼각형 모서리가 둥글게 갈리는 소리가.
디즈가 오크와 고릴라를 데려왔던 켄타우로스를 소개해줬다.
“인사해. 이쪽은 알파 씨. 알파 씨, 얘는 라이시에요.”
라이시는 디즈가 동물 생태계를 관리하는 것처럼 자신은 식물 생태계를 관리한다고 했다.
“나무 의사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르실 것 같네요.”
“맞아요. 그중에서도 명의죠, 명의. 라이시는 주술사이기도해서 식물과 말이 통하거든요.”
친구끼리는 서로 닮는다던가, 라이시도 디즈처럼 떠들기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고, 결국 나는 연구소에서 나서기 전의 주제로 이들을 돌려놔야 했다.
“아까 대군장이 했다는 예언에 대해 말씀하려다 마신 것 같은데요. 들어볼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외치고 다닌다면서요.”
내 질문에 디즈가 뒤통수를 긁으며 기억하려 애썼다.
“어······. 뭐더라? 좀 길었는데······. 옛 주인이 온다? 이 뒤에 무슨 말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한참이나 버벅이던 디즈를 보던 라이시가 단숨에 문장 하나를 말했다.
“땅의 옛 주인이 돌아올 것이나 그는 흐려진 채일 것이라. 하지만 그와 함께 일어서면 되찾을 영광은 무궁하리라.”
디즈가 놀란 눈으로 라이시를 바라봤다.
“너······언제 그걸 다 외운 거야. 설마 너도 프로이데 마탑을 공격하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건 관심 없다며!”
“지금도 관심 없거든? 대군장이 노망이 났는지 항상 중얼중얼해서 내가 다 외울 지경이야. 뒷 문장도 더 있는지 뭐라 웅얼웅얼하긴 하는데, 거기까진 알아들을 수가 없더라.”
“그러니까 그걸 네가 왜 외우고 다니냐고.”
“나무 의사잖아, 나무 의사! 대군장은 목인이고! 매일 가서 대군장 건강 체크 하다 보면 외우기 싫어도 외워진다고!”
라이시는 대군장의 주치의라는 소리?
조금 더 세밀한 내부 사정을 알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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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프로이데 마탑으로 복귀하고 바로 라벤느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나를 본 라벤느가 물었다.
“정민도 떼놓고 따로 움직이던데, 알아낸 건 있나?”
“계곡에 모인 사람들은 대군장의 말을 떠받들더군요. 그리고 대군장 주위의 누군가가 대군장에게 바람을 넣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온종일 조사해서 알아낸 게 그건가? 생각보다는 실망이군. 엿새 남았네. 나가보게.”
이어지는 내 말에 라벤느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정체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구? 다른 권역의 놈인가? 다른 마탑? 그것도 아니라면······?”
“그 전에 하나 묻겠습니다. 대군장이 이번에 했다는 예언, 알고 계십니까?”
라벤느의 표정이 식었다.
“들어는 봤지. 그런데 너무 맹신하지는 말게. 원래 예언이라는 건 자기 사정에들 맞게 끼워 맞추는 거니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계룡 권역의 옛 주인은 누구입니까.”
“이 땅에 주인이랄 게 있나. 다들 흘러오는 대로 살고 흘러가는 대로 사는 거지.”
“제가 듣기로는 그렇지 않던데요. 달이 머문 계곡에 있는 소도 그들이 만들어냈다는 설화도 있다면서요.”
눈이 화등잔만해진 라벤느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들······?! 설마······말도 안 돼! 그건 사라진 존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