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036.
“알파 씨!”
그게······누구?
“알파 씨! 왼쪽이요!”
아! 나구나.
엉겁결에 급조해 낸 이름과 스스로를 매칭시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눈을 뒤집은 채로 입가에 거품을 잔뜩 묻힌 검치호가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유연해지기]
놈의 거대한 앞발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흘리고, 단숨에 놈을 양단하기 위해 검을 들어 올리는 순간, 디즈가 다급하게 외친 소리가 들렸다.
“죽이지 마세요!”
저런 말은 왜 항상 아슬아슬할 때 하는 거야?
급히 검을 더 높게 들어 올렸지만, 검치호의 옆구리에 광자 검날이 만들어낸 자국이 길게 남았다.
급히 달려온 디즈가 양손을 땅에 닿게 자세를 낮추고 입으로 오오오- 하는 낮은 소리를 냈다.
[정신 동조]가 분명하다.
드루이드, 조련사 계열의 스킬.
구스타보 할아범의 정신 억압이 머리채를 휘어잡는 방법이라면, 정신 동조는 차분하게 달래는 방식이다.
계속해서 크르륵거리면서 흰 거품을 뿜어대던 검치호의 호흡이 조금 안정됐다.
입으로 내던 소리를 멈춘 디즈가 조심스레 땅에 대고 있던 오른손을 위로 들자, 검치호의 커다란 오른발도 디즈처럼 들렸다.
“아까 랩터들은 애초에 폭력성이 극대화되도록 변형이 이루어진 놈들이라 죽여야만 했지만, 이 녀석은 약에 취한 것뿐이에요. 죽일 필요까지는 없어요.”
그 순간, 들려있던 검치호의 오른발이 내려오더니 녀석은 곧 디즈를 향해 거대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대체 무슨 약에 취한 건지는 몰라도 [정신 동조]가 깨진 것이 분명했다.
[근력 강화]
디즈의 목덜미로 향하는 검치호의 아가리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이럴 때 쓸만한 스킬······!
[인간 캣닙]
몸에서 개박하 냄새가 풍기는, 마을에서 고양이들의 관심을 끌 때나 쓰는 스킬.
크르릉대며 나를 씹어먹으려던 검치호의 축축한 코끝이 움찔했다.
통하나?
녀석은 곧 침을 질질 흘리며 내 주위에 배를 깔고 비비적댔다.
이걸 본 디즈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이럴 수가······. 드루이드는 아니신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신 겁니까.”
“고양잇과 동물에게만 통하는 뭐, 그런 거죠.”
“멀쩡한 검치호도 다루기 쉽지 않은데······이거 참······.”
그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비비적거리던 검치호는 정신이 돌아왔는지 펄쩍 일어나서 우리를 응시했다.
마치 ‘당신들 뭔데 여기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뭐, 임마.”
그러자 남사스러운지 괜히 꼬리로 나를 툭 치고 제 갈 길을 가는 검치호였다.
주위에 다른 위협이 없는지 확인한 뒤, 디즈에게 물었다.
“약에 취했다는 건 무슨 소립니까?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는 하던데.”
그러자 골치 아프다는 듯, 한 손으로 목 뒤를 주무르는 디즈.
“달이 머무는 계곡을 점거한 사람들은 여러 부류지만,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이들은 주술사와 샤먼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허구한 날 환각 성분이 있는 버섯이나 풀로 약을 만들어 주술과 축제에 사용하죠. 남는 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위에 뿌려버리거나 근처에 흐르는 물길에 흘려버립니다.”
“그걸 마신 동물들이 저렇게 되는 거군요.”
“네. 그래도 계룡 권역 여러 군데에서 조금씩 벌어지던 일이라 큰 우려는 안 했는데, 지금 계곡에 모인 사람들이 많으니 계곡 하나로는 정화가 힘든 지경에 이른 겁니다.”
마지막에 디즈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게다가 프로이데 마탑을 공격할 때 필요할 수도 있다면서 일부러 동물을 광포하게 만드는 약을 제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쳤어요. 광기에 가까워지고 있다고요.”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원래부터 이렇게 프로이데 마탑에 적대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들었습니다.”
“많이 조사하고 오셨군요. PMC는 역시 좋은 회사인가 봅니다. 저희 ABT는 위험하다고 그렇게 말해도 하던 일이나 계속 하라고 하던데요.”
디즈는 한참이나 ABT 욕을 늘어놨다.
처음에는 3개월로 시작한 계룡 권역 파견이었는데 어느새 6개월이 되고, 1년이 가까워간다, 말이 좋아 연구소장이지 여기 정식 연구원은 나 하나다, 계약직이랑 알바들 관리하기 힘들어 죽겠다, 내가 여기 출신이긴 하지만 이건 차별이다.
그런 내용이었다.
그렇게 지방 발령받은 직장인의 애환을 제법 들어주고 나서야, 솔깃한 내용이 나왔다.
“대군장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게 이상하단 말이죠. 그간은 프로이데에서 영원빙정이라도 몇 개 얻어먹은 거 아니냐는 말이 돌 정도로 프로이데의 편의를 봐줬는데, 지금은 당장이라도 프로이데로 돌격할 것 같으니······.”
대군장은 계룡 권역에만 있는 지위로, 다른 도시 권역의 시장이나 의장에 대응하는 자리다.
미리 조사해봤을 때는 굉장히 온건한 성향의 인물로 파악됐는데, 갑자기 태도를 바꿀만한 사건이 있었던 모양.
“대군장이 스탠스를 바꿀만한 계기는 없었습니까.”
“글쎄요······.”
디즈가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그런데 알파 씨는 이 일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네요.”
“아······. 주요 임무는 ABT 사원들의 보호지만 정보 수집도 게을리할 수는 없죠. 계룡 권역의 상황이 외부에도 알려지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내부에서 보고 듣는 1차 정보가 가장 중요할 때가 많으니까요.”
“흑······.”
갑자기 손등으로 눈물을 조금 훔쳐내는 디즈.
당황스럽다.
“리포트에 제가 써서 보낸 말을 그대로 들을 줄이야. 회사에서 제 존재를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군요. 역시 난 회사에 필요한 존재였어······.”
드루이드의 감정에 반응하는 것인지 우리 뒤를 따라오던 파키케팔로사우루스도 갑자기 나무에 머리를 쿵쿵 박기 시작했다.
회사의 주춧돌을 빼고 자기가 거기 들어가겠다는 표현인가?
양심이 조금 찔리긴 하지만 일단 의뢰 해결이 우선이니 조금 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이런 일이 있을까 봐 앨리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마음속 삼각형 얘기를 해준 것인가.
앨리스, 못난 사장이라 미안하다.
그런데 나는 의뢰를 위해서라면 양심의 삼각형 테두리 정도는 갈아낼 준비를 마쳤어.
“그래서 말인데, 달이 머무는 계곡에 가서 사람들을 조금 만나보고 싶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일을 마치고 올릴 보고서에 디즈 씨 이름은 반드시 넣겠습니다.”
“도와드려야죠! 제 리포트도 다 읽어보시고 오신 것 같은데, 그 정도 못 도와드리겠습니까!”
나중에 보답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꼭 디즈에게 도움을 줘야겠다.
그럴 기회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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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역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여기저기 작은 움막과 간이 텐트가 많이 보였고,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내민 사람들이 디즈와 파키케팔로사우루스를 향해 한마디씩을 던졌다.
“디즈! 공룡 사냥은 마쳤냐?”
“사냥이 아니야. 개체 수 조절이라고.”
“그게 그거야.”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있어!”
“오늘도 대머리랑 같이 구석에서 질질 짠 거 아니지? ‘히잉 연구원 생활 넘넘 힘드렁’ 이러면서?”
“그런 적 없어! 그리고 이 녀석 이름은 볼드야! 대머리가 아니라고!”
“알지, 알지. 대머리. 근데 옆에 계신 분은 누구야?”
“우리 회사에서 드디어 내 신변 보호를 위해 사람을 보내주셨지! 실력 장난 아니야. 새비지 랩터 3마리를 단숨에 죽인다고!”
대략 느꼈지만 디즈는 어수룩하면서도 순수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고, 그 덕에 사람들이 친근하게 대하는 듯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 대한 의심도 거의 안 하는 것 같고.
마치 거대한 캠핑장에 온 것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였지만, 곳곳에 뼈로 만든 목걸이를 걸고 다니는 오우거나, 계속해서 동물로 모습이 변하는 사람이 순찰하듯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면 나름의 규율도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여길 조사한다고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으면 분명 의심받았을 거다.
그런데 중간중간 보이는 위가 터져 있는 규모 있는 텐트에서는 어김없이 형형색색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런 것 때문에 동물들이 맛이 가는 겁니까?”
내 물음에 디즈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네. 집단 환각이니 매스 트랜스니하면서 계속해서 식물을 태우고 약을 만들어대요. 그리고 잔해들은 모두 저기로 흘려버리죠.”
디즈가 턱으로 가리킨 곳에는 달이 머무는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있었고, 얼마나 버려댔는지 물줄기의 색은 알록달록한 무지개 저리가라였다.
목소리를 죽인 디즈가 중얼거렸다.
“흡혈귀가 계곡물을 마시면 오염된다고 하면서 모였으면서, 정작 누가 오염시키고 있는 건지······.”
이 물줄기를 따라 위로 가면 달이 머무는 계곡에서 가장 큰 소沼가 나온다.
아마 거기에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있을 것이다.
“조금 더 올라가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디즈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소 근처는 위험할 수 있어요. 여기 있는 친구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모인 사람도 많지만, 위쪽은 정말 강경한 사람들이 자리 잡았거든요. 외부 인원을 극도로 경계해요. 저도 여기서 나고 자랐는데 ABT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프로이데 마탑의 편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어요. ABT가 프로이데와 어떻게 이어지는 건지는 아무도 설명해주지 못해요. 그저 의심 가니 너는 나쁜 놈이라는 틀 씌우기에 미쳐 있어요.”
그 정도라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가자고 하는 것은 의심을 살 수 있다.
위쪽은 나중에 혼자 은밀히 접근해야겠다.
디즈는 나를 계곡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ABT 연구소로 안내했다.
말이 연구소지, 급하게 지은 임시 건물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건물이었다.
“집단행동 들어가면서 알바생이랑 계약직들이 다 나가버려서 지금은 저 혼자 쓰고 있어요. 들어오셔서 괜찮아 보이는 의자 아무거나 앉으세요.”
여기저기 널브러진 서류와 책, 책상 가득 흩어져 있는 약초 샘플, 말라붙은 커피 테두리가 그대로 남아 있는 머그잔.
나도 깔끔한 편은 못되지만 디즈는 정말 엉망으로 산다는 느낌이 확 와닿았다.
그나마 책이 덜 쌓여있던 의자에서 책을 아래로 내려놓은 후에 앉았다.
“계룡 권역의 생태계는 연구 대상이라고 들었는데, ABT에서 이렇게 관심이 없어도 되는 건가요?”
“이미 프로이데 마탑과 협력관계를 맺었거든요. 연구 자료는 대부분 프로이데와 공유해요. 저는 뭐······.”
커피를 내오며 어깨를 한 번 올렸다 내리는 디즈였다.
“ABT가 계룡 권역에서 관심을 완전히 떼지 않았다- 하는 걸 보여주는 정도인 거죠.”
커피를 마시려고 컵을 드니 제대로 닦이지 않아 남아 있는 이전 커피의 흔적이 보인다.
입가로 향하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대군장에 대해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리포트에 다 써서 올려보냈을 텐데요.”
“아, 읽었습니다. 하지만 더 추가된 정보도 있을 수 있고, 무엇보다 리포트 작성자에게 생생하게 듣고 싶어서요.”
내 말에 디즈는 기분 좋은 얼굴이 되어서 내 건너편의 삐걱거리는 의자를 가까이 당겨 앉았다.
“말씀하시죠. 오늘은 도와주신 덕에 일도 일찍 끝났으니 얘기할 시간은 많을 것 같군요.”
어째 건드리면 안 되는 걸 잘못 건드린 것 같다.
신시아보다 더 한 수다쟁이 기운이 퍼져 나온다.
뭐 하나 물어보면 ‘그건 제가 태어날 적의 계룡 권역의 모습을 아셔야······.’하는 말부터 시작할까 무섭다.
침착하게 고른 질문을 내놨다.
“대군장은 샤먼이자 훌륭한 예언자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대군장이 이런 사태에 대한 예언을 한 것은 없습니까?”
“있죠! 그런데 그 의미가 매우 모호해요. 대군장의 예언은 늘 비유와 모호함으로 가득하거든요. 사실 제가 보기에는 끼워 맞추기인 것 같은데, 대군장의 예언을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해 보이나 봐요. 아! 오해는 마세요. 대군장의 인품이나 성격은 저도 존경해요. 다만 요새 보이는 과격함은 저 나무한테 저런 면도 있었나 싶긴 하지만.”
나무라는 단어.
계룡 권역의 대군장은 목인木人이다.
이동이 가능한 나무 그 자체라는데, 줄기에 슈퍼컴퓨터를 박아 예언 연산에 사용한단다.
다만 슈퍼컴퓨터도 때가 되면 교체를 해줘야 하는데, 성장한 부분이 덮어버려 교체할 수 없어졌고, 수액에 절여진 구형 슈퍼컴퓨터로 하는 예언이라 제대로 된 예언인지, 예언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기 매우 힘들다고.
하지만 계룡 권역의 자연주의자들에게는 거의 반신처럼 모셔진다고 한다.
“뭐라더라? 계곡 근처에 가면 막 외치고 다니던데······.”
나도 모르게 디즈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집중하고 있었다.
“아!”
그 순간, 밖에서 디즈의 애마, 아니 애공룡 볼드가 우는 소리가 났다.
꾸워어어어-
그리고 연구소의 문을 두드리고 디즈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디즈! 안에 있어? 이분들이 오늘 너랑 같이 다닌 분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대.”
디즈가 일어섰다.
“잠시만요.”
문을 열자, 연구소 안쪽으로 얼굴과 가슴에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기묘한 문양을 그린 고릴라 수인과 기계로 된 지팡이를 짚은 오크 하나가 들어오더니 나를 보고 말했다.
“오늘 계곡에 오셔서 이런저런 걸 물어봤다는 분이 그 쪽이신가?”
당황한 디즈가 왜들 이러시냐며, 이분은 자기를 도와주러 오신 분이라고 설명했지만, 이들은 듣지 않았다.
“그건 우리가 판단해. 그리고 요새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거 몰라? 외부에서 온 사람이라면 더 철저히 검증해야 해.”
지팡이에 올라가 있는 오크의 손이 당장이라도 움직이고 싶어 움찔거리는 것이, 검증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았다.
심문 정도가 적당하려나.
그것도 이미 답을 정해놓고 하는 심문.
천천히 일어서서 연구소를 한 번 둘러본 후에 연구소에 들어온 이들에게 말했다.
“여긴 좁으니까, 나가서 얘기합시다.”
이 친구들 하는 꼬라지를 봐서는 아마도 몸의 대화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