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035.
“영원빙정永遠氷晶을 주지.”
빙정은 공기가 0도 이하로 내려갈 때 수증기가 승화하며 생기는 것.
이 빙정에 물방울이 붙거나 다른 빙정이 붙으면 눈송이가 된다.
영원빙정은 이 빙정을 잡아다가 마법으로 유지 시킨 채, 눈이 올 때마다 가지고 나가 다른 빙정을 붙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냉기가 덧입혀지고, 보관할 때 곁에 두거나 위에 올려두는 약초의 향과 효능이 옮겨진다.
일종의 영약이다.
빙정을 감싸는 재료에 따라 효과와 가격이 천차만별이기도 하다.
“초정初晶입니까?”
“초정도 알고 있나? 우리 애들도 잘 모르는 건데.”
초정은 매년 첫눈의 빙정만을 모아 붙여 가장 귀하고 좋은 약초로 덮어둔 아주 특수한 영원빙정이다.
내가 영원빙정에 이렇게 빠삭한 이유는 이 영약이 서리얼에도 있던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근본이 살아 숨 쉬는 물건이라는 소리.
빙결계 마법 숙련도 증가, 추위 및 냉기 저항, 활력 상승 등등 게임에서는 굉장히 좋은 효과를 발휘했다.
빙결계 마법사 플레이어들이 ‘영원빙정 삽니다. 제발 팔아주세요. 부르는대로 드려요.’ 하고 찾아 헤매던 물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 오기 전 조금 알아본 결과, 영원빙정은 프로이데 마탑의 특산품이었다.
계룡 권역에서 자라는 약초들 질이 워낙 좋아서 좋은 영약이 만들어진다고.
프로이데 마탑이 계룡 권역을 떠나지 못하는 게 영원빙정 수익이 쏠쏠해서 그런 거라는 웃지 못할 농담도 있었다.
마탑주인 라벤느가 직접 의뢰의 보상으로 내건 만큼, 판매를 위해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그런 빙정은 아닐 것이다.
내가 잠시 말이 없자 라벤느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초정 20년.”
초정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20년 숙성?
군침이 사악 돈다.
하지만 협상의 기본 하나.
크게 불러 흔들라.
“40년.”
“욕심이야. 직계 제자들도 20년짜리 하나 받아보려고 내게 얼마나 아양 떠는데. 그것도 초정이 아닌 일반 영원빙정을.”
“말씀 잘하셨네요. 그럼 이 일에 직계 제자들을 투입하시죠. 제가 정민 씨한테 말 대신 전해드려요?”
“이이······.”
“테오릭 경과 흡혈귀들의 총애를 받는다고 하셨죠? 그건 제가 맡은 일은 모두 성공했기에 따라오는 결과였을 뿐입니다.”
라벤느의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부터는 입을 다물었다.
다시 그녀의 입이 열렸다.
“25년.”
준비하고 있던 말을 쏟아냈다.
“나중에 동화에 나오시겠는데요. ‘40년짜리 초정을 아끼기 위해 흡혈귀 회합을 망쳐버린 어느 마탑주.’ 이렇게요. 너무 황당한 이야기라서 400년은 넘게 이어지지 않을까요? 가상현실 연극, 가상현실 뮤지컬로도 나온다고 생각하면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자신감과 혀놀림 하나는 대단하군.”
“의미 없이 시간만 보내실 거라면, 이제 마탑주 님의 방으로 돌아가시는 걸 부탁드려도 될까요. 잘 시간이 지나서요. 대단히 피곤합니다.”
“30년. 더는 안 돼. 이것도 몇 개 없어. 매년 첫눈을 덧입히기 위해 보관고에서 나오는 과정에서 깨지거나 흐트러져서 상품성을 잃는 초정이 몇 개인지는 아나?”
이 정도면 적당하다.
협상의 기본 둘.
크게 불렀다면 적당한 선으로 깎아 나가라.
처음의 임팩트 때문에 조정값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인다.
이어서 협상의 기본 셋.
배려한다는 듯한 티는 얼마든 내도 좋다.
“좋습니다. 저도 양보하죠. 초정 30년. 그 조건이 적힌 계약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를 부드득 간 라벤느가 문을 열고 사라졌다.
그녀의 발아래로 살얼음이 번지는 것이, 보통 열받은 게 아닌 것 같았다.
얼음장이 되어버린 복도를 보던 나는 문을 닫고 침대에 쓰러지듯 앉았다.
“후······.”
화염계 마법은 원래부터 익히고 있어서 사용에 불편함이 없지만, 빙결계 마법은 그렇지 않다.
나이누안의 마나 하트와 그에게 받은 지식으로 어설프게 흉내를 내는 정도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능숙한 것과 새롭게 익힌 것의 차이랄까.
기계 교단의 성당 지하에서 문을 얼렸던 스킬인 [흐림수르사르]도 원래의 위력이라면 아무리 기계화 좀비가 때렸다고 해도 부서지는 일이 없어야 했다.
내 이해와 숙련이 부족했기에 부서진 거다.
언젠가는 밝혀야 할 것 같지만 아직은 내가 화염계와 빙결계 마법 모두를 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빙결계 마법을 익히기 위해 마탑으로 가는 건 내 비밀무기를 하나 공개하는, 좋지 못한 수.
그러니 이런 식으로라도 보충을 해야 한다.
기술과 정밀함이 모자란다면 체급으로라도 밀어붙여야지.
일단 누웠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졸리다, 진짜.
#
다음 날 아침, 정민 말고 다른 직계 제자 하나가 내게 서류 봉투를 가져다주었다.
일주일 내에 흡혈귀들이 달이 머무른 계곡을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의뢰와 그에 대한 보상으로 초정 30년 하나를 주겠다는 계약서 하나.
해당 의뢰는 신시아 호위 의뢰의 연장이며 내가 마탑에 부재한 동안 신시아에게 가해지는 모든 위협과 위해에 라벤느가 책임진다는 약조문 하나.
“일 처리는 빠르네.”
어제 태도로 봤을 때, 신시아가 회합에 크게 관심을 두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것 같으니 그 덕도 좀 봤을 것이다.
신시아가 화장실 가기만을 기다리는 라벤느라.
그림이 웃기긴 했겠다.
서류를 바이크 시트 아래 보관한 나는 달이 머무는 계곡으로 향하는 계곡으로 향하기 위해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스쳐 가는 주위의 마법사들이 나를 보는 눈이 어째 이상하다.
[청력 강화]
정민 님이 눈독 들인······그러다 흡혈귀에게 호되게 당한······네오-서울 대림 에어리어의 미친 광견······그 또라이 위타천도 오메가 성질머리에는 한 수 접는다더라······.
뒤의 내용처럼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지적하기도 황당한 것들 말고는 대부분 어젯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수군대는 소리였다.
마탑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소문 퍼지는 속도는 죽여준다.
출발하려는데, 어젯밤에 들었던 목소리가 들렸다.
“길이 좁아서 그걸로는 못 갑니다. 맨몸으로 가시죠.”
정민이었다.
“마탑주 님께서 오메가 님과 동행하랍니다.”
“일 잘하나 감시하라는 거죠? 미안하지만 사절입니다. 정민 씨 정도면 계곡을 점거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굴을 알지 않을까요? 방해입니다.”
“하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설명을 덧붙이려는데, 염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뒤쪽의 건물에서 신시아의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
“야! 저 동태 년이 내 말을 뭘로 아는 거지? 오메가 님 근처에 있지 말라고! 진짜 죽을래? 어? 너 정말 사람 속 긁는데 재능이 탁월하구나?”
몸을 돌려보니 창문 밖으로 상체 대부분을 내민 채로 고래고래 소리치는 신시아가 보인다.
손을 흔들어주자 ‘오메가 니임! 잘 다녀오세요! 저녁에 오늘 회의 결과 알리러 나올 때는 회의실 앞에 계셔야 해요~.’ 라면서 눈웃음까지 보여주더니 이내 정민을 향해 육두문자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정민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아침에 분명히 설명해 드렸는데······.”
“신시아 씨는 성에 안 찼나 보죠. 감당되겠어요?”
무슨 일인가 모여드는 마법사들 때문인지 정민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마탑주 님한테는 제가 나중에 잘 말할 테니까. 돌아가도 좋아요.”
그러자 허리를 숙여 인사를 꾸벅하고 달려서 사라지는 정민이었다.
“역시! 오메가 님은 너 같이 발랑 까진 냉동 고등어는 쳐다도 안 보신다고······! 읍! 읍!”
닐과 레온에게 입이 막힌 채로 회의실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신시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드디어 프로이데 마탑을 벗어나 달이 머무는 계곡으로 향할 수 있었다.
#
“뭐 이런 곳이 다 있지?”
나는 식물학자가 아니다.
고생물학자는 더더욱 아니고.
그런데 끝이 보이지 않게 위로 뻗은 나무와 바닥을 가득 덮고 있는 거대한 양치식물들이 공룡 나오는 영화들의 주요 배경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계곡으로 향하는 길은 그런 식물들 천지였다.
이곳의 시간만 아주 예전으로 돌아간 건가 하고 생각될 정도.
그런데 또 조금 걷다 보면 내가 알 법한 나무나 식물들이 나오고 또 조금 걸으면 높은 산들의 정상 근처에서 보일 법한 작은 관목 식물이 모습을 보이곤 했다.
“이게 다 그 계곡에서 만들어내는 조화라니.”
일정한 생태계나 식생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알려준 대로 계곡으로 향하던 도중, 내게로 빠르게 접근하는 무언가의 소리가 들렸다.
[청력 강화]
[반향 정위]
[기막 펼치기]
정확한 종류를 알기 힘든 물체 셋이 나를 향해 이동 중이었다.
몸을 피할까도 생각했지만 각자 다른 방향에서 정확히 이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내 위치를 이미 파악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칼자루를 손에 쥐고 두 번 비틀었다.
솟아오르는 광자 검날.
보조 배터리는 주머니에 있다.
두 번이나 확인했으니 틀림없다.
나를 향해 다가오던 소리는 약 2, 3m의 거리를 두고 주위를 도는 소리로 바뀌었다.
제멋대로 높게 자란 식물들 때문에 정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중 하나의 소리가 멈췄다.
온다!
식물들 사이에서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나를 향해 달려든 것은 데이노니쿠스, 속칭 랩터였다.
전투기 랩터 말고, 진짜 공룡 랩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랩터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일단 나를 덮치는 녀석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푸확-
튀는 피가 광자 검날에 닿아 한줄기 붉은 수증기로 변해 피어오른다.
끝이 아니다.
좌우에서도 한 마리씩, 나를 향해 달려드는 랩터가 있었다.
[연하일휘煙霞日輝]
안개 속에 내려앉는 노을처럼 검의 궤적이 부드럽지만 확실하게 목표한 것의 숨통을 끊는다.
왼쪽에서 달려드는 놈은 처리했다.
아직 한 놈이 남았다.
[고속 이동]
갈고리처럼 휘어진 놈의 발톱이 내가 있던 자리를 찍어 내렸다.
어레스트를 찾아야 하나?
파충류 수인용 어레스트가 있긴 한데, 그게 공룡한테도 먹히나?
주머니에 뭔가가 잡힌다.
아직 남은 씨앗이 있었다.
꺼내 던졌다.
[과잉 생장]
순식간에 자라난 덩굴이 랩터를 옴짝달싹 못하게 조여들었다.
어찌나 세게 조이는지 근육과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
마침내 마지막 남은 랩터도 숨을 거뒀다.
보고 있는 게 정말 랩터인가 싶어서 다가가려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났다.
이 녀석들보다 더 큰 놈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건 진짜 혼란스럽네.”
검을 완전 전개한 채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내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순간, 곧바로 베어버릴 셈이었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건, 파키케팔로사우루스.
통칭 대머리 박치기 공룡.
그리고 그 위에 타고 있는 리자드맨이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나도 모르게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공룡 탄······공룡?”
대머리 공룡에서 내린 리자드맨이 놀란 눈을 하고 내게 물었다.
“이 녀석들을 혼자 처리한 겁니까? 보통 사나운 게 아니었을 텐데요.”
“예······. 그렇긴 했습니다만.”
“역시 굉장하군요. 저는 디즈라고 합니다. 드루이드입니다. 유전학자기도 하고요. 이 근방에서 무절제하게 퍼지는 유전자 변형 생물 생태계를 조정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드루이드요? 드루이드는 동물과 친밀한 관계를······.”
내 눈은 자기 얼굴을 디즈 얼굴에 비비는 파키케팔로사우루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많은 분들이 처음 보실 때는 놀라시곤 하는데요. 공룡도 결국 동물 아닙니까.”
쾌활하게 말을 이어가는 디즈.
마치 내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는 눈치다.
“지금이라도 와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요새 이곳 분위기가 영 흉흉해요. 생태계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말이죠. 프로이데 마탑에 대한 여기 사람들의 감정이 좋지 않습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조용히 연구나 하고 싶을 뿐인데 말이죠.”
적당히 맞장구나 치면서 들어보니 디즈는 생명공학 기업인 ABT의 연구원이었다.
계룡 권역에는 주술사나 샤먼들이 마구잡이로 만들어놓은 생명체들이 있는데, 그것 중 생태계에 적응하는 것들을 연구하거나 처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그런데 근래 들어 프로이데 마탑의 행보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모여 계곡을 점거했고, 디즈는 ABT에 안전한 연구를 도와줄 경호팀을 요청했다고 한다.
흡혈귀 회합이 발표 난 직후 요청했으나 몇 주 동안 연락이 없어서 굉장히 불안했다는 디즈의 말을 듣고서 생각했다.
‘경호원인 척 드루이드인 디즈를 따라다니면 내부 사정을 알기 쉬워지는 거 아닌가? 내 원래 이름을 밝히면 분명 흡혈귀 호위로 왔다는 걸 알아채는 사람이 있을 건데.’
헬멧과 고글 덕에 얼굴은 많이 노출이 안 되었겠지만, 방송사들이 경쟁적으로 흡혈귀들의 계룡 권역 행을 찍어갔으니 오메가라고 이름을 대면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무조건 알아본다.
그렇게 되면 의뢰는 초장부터 꼬이겠지.
계산을 마치고 말했다.
“아쉽지만 디즈 씨가 기대하신 것처럼 ABT 자체 경호팀은 아닙니다.”
“그럼요?”
“저는 PMC(Private Military Company: 민간 군사 기업) 소속입니다. ABT와의 계약에 따라 파견됐습니다.”
“오! PMC 좋은 회사죠! 더 믿음이 가네요. 우리 회사 경호팀은 몸 사린다고 악명이 자자하니까요. 그럼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회사명은 밝히지 않았지만 PMC가 회사 이름이라고 알아서 오해해 주는 디즈.
그나저나 이름을······.
“ㅇ······알파라고 부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