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잡캐여도 너보단 강함-34화 (35/258)

034.

034.

쿵쿵쿵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열어보니 정민이 화를 삭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의 무례는 잊도록 하겠습니다. 올라가시죠.”

“미사일 비를 뚫고 운전한 사람한테 늦은 밤에 찾아오는 건 무례가 아니고요? 저도 그쪽의 무례는 잊겠습니다. 날 밝으면 뵙죠.”

닫히는 문 사이로 정민이 손을 내밀어 문을 막았다.

“오메가 님께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탑주 님께서 의뢰하실 일이 있으십니다.”

“의뢰라면 사무실로 발주해주시면 됩니다. 직접 찾아오시면 좋고요.”

다시 한번 문을 닫으려고 하자 정민은 몸의 절반 정도를 들이밀었다.

“다 사정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온 거 아니겠습니까.”

“죄송하지만, 저 여기 놀러 온 거 아닙니다. 예상했던 것과 다르기는 하지만 지금도 의뢰 수행 중이라는 소립니다. 의뢰 중에 다른 의뢰를 받지는 않습니다.”

퀘스트는 하나씩 해결해야지, 막 준다고 다 받으면 동선만 꼬이기 마련이다.

정리와 협상을 담당해 줄 앨리스랑 연락도 안 되는데, 괜히 일 늘리는 건 사절이다.

그리고 이번 의뢰에 걸린 게 많은 만큼, 회의 시간에 자유롭게 마탑 내를 돌아다녀도 좋다고 미리 언질 받았지만 나는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는 회의실 근처에 머물 예정이었다.

내 단호한 태도를 정민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인지, 붉어진 얼굴로 땀을 흘리며 나를 어떻게든 데려가려고 했다.

심지어 가서 짧게나마 말씀 나눠보시라고 내 손목을 잡기도 했다.

그때, 복도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뭐야! 너 뭐야!”

신시아였다.

놀란 정민이 내 손목을 놓았지만, 신시아가 성큼성큼 걸어와 쏘아붙였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이 냉동 고양이년! 감히 누구 몸에 손을 대! 나도 못 잡아본 손을! 어! 너 뭐야!”

화들짝 놀란 정민이 내 손목에 닿아있던 손을 떼고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다 봤는데! 그리고 너 왜 몸이 오메가 님 방 안으로 들어가 있어! 이거 아주 안 될 년이네?”

신시아의 빠르고 높은 말투가 복도에 퍼져나가자, 근처 방에 짐을 푼 여다함과 페테르가 무슨 일인가 싶어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러자 정민은 이제 얼굴이 터질 것 같이 변해서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라! 진짜 그게 아니라!”

신시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뭔가 벌어지고 있다.

기세만 봤을 때로는 기계 교단 성당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고 고래고래 고함칠 때보다 더 매서웠다.

다가가서 신시아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신시아 씨! 그런 거 아니에요! 여기서 전에 머물던 손님 짐을 못 치운 것 같다고, 혹시 지금 가져갈 수 있냐고 온 거예요. 아무나 보낼 수 없어서 정민 씨가 왔대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래요?”

늘어지던 신시아의 그림자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조금 순해지나 싶던 신시아의 얼굴이 정민을 보자 다시 악귀 같이 변했다.

“너! 조심해! 한 번만 더 이런 꼴 보이면 영혼을 잡아 뜯어서 원심분리기에 돌려 버릴 거야! 알겠어?”

서슬 퍼런 신시아의 겁박에 정민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결국 내가 한 번 더 나섰다.

“신시아 씨. 너무 그러지 마요. 정민 씨는 가세요. 내일 다시 한번 신시아 씨한테 상황 설명하시고요.”

정민이 후다닥 사라지자 좋은 구경한다는 듯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여다함과 페테르도 각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신시아의 눈이 정민이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는 것이, 신시아 혼자 회의실로 돌아가라고 보냈다가는 내일 좀비 상태의 정민을 발견할 것 같았다.

“돌아가시죠. 제가 같이 가드릴게요.”

“후우······. 그래요.”

“화장실 다녀오신 것 같은데, 왜 바로 안 들어가시고 여기까지 오셨어요.”

“머리나 식힐 겸 해서요. 지금 논의되고 있는 파나마 운하 건은 닐 숙부랑 마테우스가 다루는 건이라 제가 할 말이 별로 없기도 하고요.”

기분이 풀렸는지 웃는 낯으로 조잘대는 신시아를 회의실에 밀어 넣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똑똑똑-

저절로 이가 갈렸다.

“잠 좀 자자. 잠 좀.”

문을 벌컥 열었다.

“아까 신시아 씨 못 봤어요? 또 오면 나도 커버 못 쳐······.”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정민이 아니었다.

“직접 오면 좋다고 했다던데?”

프로이데 마탑의 마탑주, 라벤느였다.

정민은 나이대도 비슷해 보이고, 진짜 피곤해서 돌려보냈지만, 프로이데 마탑주인 라벤느에게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들어오시죠.”

문에서 비켜주자 라벤느는 투덜거리며 들어왔다.

“테오릭 그 정신 나간 노인네랑 흡혈귀들에게 총애를 받으니 뵈는 게 없는 모양이지? 감히 나를 오라 가라 하다니······.”

“테오릭 경도 사무실로 직접 오셨습니다. 신시아 씨도 직접 오셔서 호위 의뢰를 주셨고요. 특별 대우를 해 드릴 수는 없었던 것뿐입니다.”

투덜대던 라벤느의 입이 멈췄다.

그녀가 방 안에 있는 탁자에 앉았다.

나는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그녀에게 주지시켰다.

“그리고 제자 분은 제게 굉장한 무례로 느껴질 수 있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걸 본 신시아 씨가 오해할 뻔해서 제가 개입해 막았고요. 정민 씨와 신시아 씨의 우열을 가릴 생각은 없지만, 신시아 씨의 능력은 사령술 이상의 것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돈 되는 곳이라면 손대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이 있는 야스민 공인만큼, 프로이데 마탑의 연구자금 일부도 야스민 공에게서 융통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야스민 공이 예뻐라 하는 신시아가 회합에서 돌아간 뒤, 프로이데에 대해 안 좋은 소리라도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지원이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신시아의 무게감을 다시 체감한 것인지 라벤느가 손을 들어서 목 주위를 쓸었다.

마법?

진짜 무서운 마법은 황금과 화폐의 마법이다 이거야.

“상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지만, 얼추 들은 정황과 일치하는군.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고맙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정민 씨에게도 말했지만, 저는 지금 의뢰 중이니 다른 의뢰를 받을 의향이 없습니다. 제게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의뢰라서요.”

“이해하네. 흡혈귀 회합의 호위는 누군가에게 인생에 한 번 있을 영광이기도 하니까.”

“그럼.”

돌아가시라고 일어나 문을 열어 주려고 했지만, 라벤느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 회합이 무사히 끝나지 못할 수도 있어.”

“후······. 말이나 들어보죠.”

의뢰 완료 조건은 ‘회합 종료 후 신시아의 무사 귀환’이다.

그런데 회합장의 총책임자가 회합이 무사히 끝나지 못할 수도 있단다.

“계룡 권역에 ‘달이 머무는 계곡’이라는 곳이 있네.”

나도 들어봤다.

계룡 전역을 감싸는 상서로움이 그곳에서 흘러나온다는 말도 있고, 계곡의 거대한 소沼에 밤새 달이 떠 있다는 말도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퍼지는 신비함 때문인지, 계룡 권역의 독특한 생태계는 항상 연구 대상이라고 한다.

“그 계곡을 어필해서 이번 회합장을 우리 마탑으로 가지고 올 수 있었네. 요새 데이워커가 아닌 흡혈귀가 없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흡혈귀는 음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나.”

“흠······. 계속하시죠.”

“그래서 회합의 마무리는 달이 머무는 계곡에서 흡혈귀들이 그곳에 흐르는 물을 마시는 것이 될 예정이었네. 이미 준비는 대부분 마친 상태기도 했고.”

“그런데요.”

“계룡 권역의 다른 이름이 뭔 줄 아나?”

신시아가 얘기했었지.

“자연주의 권역 아닙니까.”

“알고 있군. 주술사, 샤먼, 드루이드와 같은 이들이 이곳에 다수 모여 살지. 헌데 그들이 보기에 흡혈귀는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야. 다른 삶을 거두어 자신의 삶에 편입시키지 않나. 순환이라는 대자연의 법칙에 거스르는 존재라는 거지.”

대충 가닥이 잡히는 것 같다.

“하지만 제가 듣기로는 아까 말씀하신 자 중에도 기계나 기술, 마법의 힘을 빌리는 자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틀린 말이 아니네. 하지만 흡혈귀는 그런 것들이 없어도 ‘원래’ 영생의 존재지 않나. 그게 싫다는 거지.”

진짜 여긴 별별 놈이 다 있다.

“여튼, 여기서 흡혈귀들의 회합이 열린다는 것만으로 저들의 항의 방문이 있었는데, 회합 마무리에 대한 내용이 알려지고 불만이 폭발했네. 달이 머무는 계곡은 저들에게 점거당했어.”

“다른 곳은······.”

“달이 머무는 계곡의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흡혈귀들이 이번 회합장을 우리 프로이데로 정한 거라네. 반출이 안 되는 물이거든.”

한숨을 푹 쉰 라벤느가 부연했다.

“게다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 당장이라도 마탑을 공격할 기세야.”

“갑자기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진 겁니까?”

“그렇다네. 불만은 있어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이거, 정치군요.”

#

인간은 무리 짓는 동물이라지만 집단행동이라는 것은 상당히 고도화되고 어려운 행위다.

모이기 위한 목적이 있어야 하고, 모인 자들을 이끌 리더가 있어야 하며, 집단의 기강이 무너지지 않게 할 규율이 있어야 한다.

이건 집단이 클수록, 목적이 흐릴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진다.

그런데 프로이데 마탑이라는 대형 마탑에 대항해서 많은 사람이 뭉쳐 한목소리로 흡혈귀가 계곡에 가는 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일을 한다고 해서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익이 명확하지 않음에도.

그렇지만 이런 일을 일부러 꾸미는 자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런 건 서리얼에서도 많이 봤다.

거대 길드의 횡포에 저항한답시고 모인 사람들 중 대부분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런 게 있나 보다 하고 온 사람들이다.

순수한 의지와 정의감 때문에 모인 이들.

하지만 목적을 가진 소수가 그런 이들을 제 뜻대로 조종한다.

그 소수?

거대 길드를 쓰러트린다면 곧 그들이 했던 짓을 똑같이 하던 놈이 되고, 그렇지 못했다면 조용히 몸을 숨긴 채 다른 목표를 찾는다.

#

라벤느가 놀랐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내 말을 긍정한다.

“이것만 듣고 거기까지 짚어낸 건가. 내 생각도 자네와 다르지 않네. 이건 계룡 권역에서 프로이데의 영향력을 약화하려는 누군가의 의도적 개입이자 공작이야.”

그리고 분통이 터진다는 듯이 말을 쏟아내는 라벤느.

“프로이데 마탑이 여기 계룡 권역에 자리 잡은 지가 언제인지 알 수도 없네. 이곳에 터 잡은 분이 몇 대 위의 마탑주 님인지도 전해오지 않는단 말일세. 그동안 우리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왔다고 자부하네. 심지어 흡혈귀가 달이 머무는 계곡에 다녀갔다는 기록도 존재하네. 그런데 이제 와 흡혈귀 핑계를 대면서 계곡을 점거하다니······!”

탁자 위의 꽃병에 꽃혀있던 꽃에 라벤느의 거친 숨이 닿았다.

쩌적하는 소리와 함께 얼어붙은 꽃잎이 깨진 뒤 탁자 위에 떨어졌다.

“얘기 잘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뭘 의뢰하고 싶으신 겁니까.”

“시급한 것은 일주일 내에 흡혈귀들이 달이 머무는 계곡을 이용할 수 있게 그곳에 모인 자들을 해산시키는 것. 가능하면 충돌이 적은 방향으로.”

“쉽지 않겠군요.”

“그렇게 생각하네. 부가적인 것은 만약 이것이 자네와 내 생각처럼 누군가가 개입한 일이라면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

“부가적이라면 필수는 아니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애초에 기한이 촉박한 의뢰를 맡기는 판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겠네.”

이제 세부 사항을 조율할 시간이다.

“마탑주 님은 회합 간 자리를 비우시기 힘드실 테니 직접 나서지 못할 테고, 현재 계곡에 모인 사람들이 프로이데 마법사들도 좋게 보지 않으니 휘하의 마법사들도 움직이긴 어려울 것 같군요. 그렇죠?”

“정확하네.”

“다른 호위들도 있는데 제게 맡긴 이유는요?”

“각자 호위 중인 흡혈귀들과 깊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지. 로렌과 구스타보는 사실상 아펠블뤼텐 가와 히라솔 가의 가신이나 마찬가지지 않나.”

“프로이데의 치부를 흡혈귀들이 알게 하기는 싫으시다는 거군요.”

“당연하지. 그리고 여다함은 로즈 가에 알리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것보다 더 싫은 테오릭에게 쪼르르 가서 말할 테니 제외. 페테르는······.”

“됐습니다. 알 것 같군요.”

페테르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걸 말하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달이 머무는 계곡 위를 날면서 백린연막탄을 쏟아부을 것 같다.

그럼 이제 달이 머무는 계곡은 사라지고 용이 날며 지워버린 계곡이 하나 생기겠지.

그렇게 되면 프로이데 마탑과 다른 이들의 반목은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고.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마탑주 님의 의뢰가 신시아 씨 호위 의뢰의 연장선이라는 것을 신시아 씨가 납득해야 합니다. 물론 지금 들은 내용을 발설하지는 않겠지만, 신시아 씨가 거절 의사를 표현한다면 마탑주 님의 의뢰는 없는 것이 됩니다. 그게 도의라고 생각합니다.”

“이해했네. 신시아가 회의장에서 나오면 말해보겠네.”

“그리고 신시아 씨가 납득한 후, 제가 마탑주 님의 의뢰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리를 비우게 될 때, 신시아 씨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면 모든 책임 소재는 라벤느 마탑주 님께 있다는 걸 문서로 남겨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까지 해야겠나?”

“내키지 않으시면······.”

내가 일어나 문으로 가자 라벤느가 손을 뻗어 문틈을 얼어붙게 했다.

“아직 대화의 여지가 남아 있나 보군요.”

“내일 신시아와의 대화가 잘 마무리된다면 문서도 바로 작성해서 보내주겠네. 혹시 모르니 스캔본도 자네 사무실로 보내주고.”

“좋습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남았군요. 마탑주 님의 의뢰로 제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뭔지요?”

가장 즐겁고 떨리는 순간이다.

이 질문을 할 때마다 앨리스의 눈이 반짝거리는 이유를 알겠다.

라벤느의 입술이 떨어진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