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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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들은 적 없는 소리인데요.”
내가 정색했지만 테오릭 경이 오히려 더 당당하게 나왔다.
“그럴 리가. 내가 야스민 공에게 직접 들은 말인데.”
“누구요?”
“야스민 공. 커머라시 야스민. 야스민 가의 가주.”
신시아의 아버지 되는 사람인가 보다.
당장이라도 나가서 앨리스와 신시아에게 확인하고 싶지만, 테오릭 경 눈빛이 앞에 놓인 걸 다 먹지 않는 이상 보내주지 않을 것 같다.
“내 제자 중 한 명도 로즈 가의 호위로 간다니 가면 인사나 나누거라. 괜찮은 녀석이야.”
테오릭 경의 기준에서 ‘괜찮은 녀석’은 어떤 종류의 인간일지 진지하게 궁금해졌다.
타이린드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로즈 가는 상해 권역에 머물죠?”
“그렇다네.”
“상해 권역에······강철계 페룬 마탑의 마법사······흡혈귀 가문의 호위가 될 실력자면······혹시 제자 분 이름이 여다함인가요?”
“그렇네. 역시 루트라 그런가? 금세 알아맞히는군. 신통해.”
그렇게 말하고 돈까스 한 장을 입으로 가져가는 테오릭 경.
놀랍게도 그가 쓰고 있는 금속 마스크 가운데가 벌어지더니 돈까스 하나를 그대로 삼켰다.
저건 뭐 어떻게 되어 있는 구조야?
“여다함 님을 어떻게 몰라요! 페룬 마탑의 상해 지부장! 중화권 마탑인 칭롱이랑 후포아가 아직도 옛날의 위세를 못 찾고 있는 게 여다함 님 활약 덕이잖아요!”
“녀석에게 금칠해봐야 내게서 나올 건 없네.”
노인네······말은 그렇게 하면서 눈은 싱글벙글이다.
근데 궁금하긴 하다.
“뭘 어떻게 했길래요?”
“오메가는 기억이 없어서 모르는구나? 15년 전쯤에 페룬 마탑이 상해에 지부 세울 때 중화권 마탑들이 견제를 엄청나게 했대. 수습 마법사들 빼가고, 지부가 들어갈 건물 지어야 하는데 하청업체들에 압박 넣어서 공사 못 하게 하고. 산업 스파이도 하루에 몇 명씩 잡혔다던데, 정말인가요?”
“징글징글했었지. 관리들이 다 저쪽 편이라 대놓고 접대랑 뇌물을 요구한다면서 여다함이 어찌나 힘들어하던지. 권역 체제가 된 지가 언제인데 소국이 대국에 어쩌고 할 때는 전용기 띄울까도 생각했었다.”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는 테오릭 경이 대화의 바통을 타이린드에게서 넘겨받았다.
“여다함이 고생하길래, 내가 조언 하나 했다. 말로 해서 될 놈이 있고, 안 될 놈들이 있다고.”
“와! 그런 비화가 있구나. 전혀 몰랐어요.”
“어디에 말 한 적이 없으니까.”
“여튼 이후에 여다함 님이 트레일러 동원해서 컨테이너 수십 개를 두 마탑 근처에 옮긴 다음, 그걸 하나하나 들어서 마탑에 다 처박아버렸대.”
미친······놈인가?
“마탑은 무너지지 않게 하면서, 내부의 사람도 하나도 안 다치게. 거의 예술의 경지라서 그 현장을 찍은 사진이 그 해 온갖 상을 다 휩쓸었지. 지금도 거긴 관광 명소야.”
스승은 술김에 말싸움 한 거로 프로이데 마탑에 가서 구조를 엿가락처럼 바꿔놨더니 제자는 컨테이너를 박아버렸단다.
페룬 마탑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애초에 미치광이인지, 아니면 멀쩡한 사람이 들어가서 미치광이가 되어 나오는 건지 의문이다.
“다친 사람도 없고, 건물이 무너지지도 않았으니까 누가 신고를 해도 처벌이 안 됐대. 실력 행사를 제대로 한 거지. 그리고 그렇게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니까 여다함 님 앞에서 목소리나 제대로 나왔겠어? 찾아온 마법사들도 보상 어쩌고 중얼거리다가 다 돌아갔대더라. 그 이후로 상해 권역을 거점으로 삼는 로즈 가와도 인연이 되어서······뭐 그런 얘기지. 맞죠? 테오릭 경?”
듣기 좋은 노래를 듣는 것처럼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던 테오릭 경이 눈을 뜨고 말했다.
몇 번을 들어도 좋아 죽겠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로.
“페룬의 마법사라면 모름지기 그래야지, 암. 그렇게나 뻗대던 관리 놈들이 흡혈귀들 앞에서는 꽌시고 뭐고 눈부터 피한다는 소리 듣고 더러우면서도 속이 시원하더구나.”
분노를 푸는 건지 이번에는 돈까스 2장을 한 번에 씹어 넘기는 테오릭 경이었다.
그런데 생각하다 보니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신시아 씨는 사령술사잖아요.”
“그렇지.”
“그리고 흡혈귀는 종족 자체가 강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호위가 필요해요? 그리고 어차피 흡혈귀들끼리 모이는 자리이기도 하잖아요.”
내 말을 들은 테오릭 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
“왜, 왜요······.”
“흡혈귀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지 말 해봐라.”
“음······. 영생, 흰 피부, 송곳니······부자?”
“얼추 알고는 있구나. 그렇다면 다른 질문을 하나 해보마. 돈이 어떻게 불어난다고 생각하느냐.”
느낌이 확 왔다.
자본은 눈덩이 같아서 몇 바퀴 구르면 어느새 처음의 모습은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해진다.
그런 자본을 굴림에 있어서 제약사항은 시간.
하지만 흡혈귀에게 시간이라는 제약사항은 아주 조그마한 걸림돌일 뿐이겠지.
“기업, 부동산, 사람. 흡혈귀들한테는 이 세상 모든 게 투자 대상이야. 그저 기다리면 되는 거지. 성장세가 늦다 싶으면 이미 가지고 있던 돈을 부어서 발전시키는 방법도 있고.”
부연하는 타이린드.
젊은 처자가 참 신통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테오릭 경이 설명을 이어간다.
“아무리 사람들의 수명이 늘어났다지만 그동안 흡혈귀들이라고 놀고 있었겠느냐.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 도가의 양생법, 유전자 조작, 티타늄 골격 교체 등등······.”
대충 종합하면 몸의 뼈가 티타늄인 유전자 조작 흡혈귀 신선이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혼종이······!
“생명공학 덕이 컸죠. 그 덕에 이제 데이워커(Daywalker: 햇빛에 노출되어도 죽지 않는 흡혈귀)가 아닌 흡혈귀가 거의 없잖아요.”
“애초에 남의 피를 들이켜서 젊음을 유지해 온 게 흡혈귀 종족이니, 종족 자체가 생명공학의 정수라고 봐야지.”
막대한 자본을 굴리는 영생의 종족.
누군가에게 부러움과 질시, 원망의 대상이 되기 딱 좋은 조건이다.
“그래서 호위가 필요한 거군요. 그런데 그런 의뢰를 저한테 할 이유가 있을까요. 페룬 마탑에만 부탁해도 수많은 전투 마법사를 보낼 수 있잖아요.”
“세상에 가장 빠르게 적응하는 게 흡혈귀라고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봤을 때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전통에 집착하더구나. 예를 들면 상위 가문의 회합은 참석자와 호위, 단둘만 참여해야 한다는 전통 같은 것 말이다.”
돈까스를 꿀꺽 넘긴 타이린드가 한 마디를 보탠다.
“전경련이랑 경실련이 잔뜩 벼르고 있겠네요. 흡혈귀들이 가지고 있는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고 난리니까요.”
“그렇겠지. 흡혈귀 상위 가문들의 회합은 쉽게 성립하지 않으니. 성립했다고 해도 다섯 가문 다 모이는 일이 흔치도 않고.”
굉장히 익숙한 단어가 들렸기에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 어디요? 전경련, 경실련요?”
“응. 전全 도시 경제 해방 연합이랑 경제 정의 실현 연맹. 가장 큰 반反 흡혈귀 세력이지. 저 단체 과격파 중에는 당장 흡혈귀들 효수해서 남대문에 내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 효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왜 그런 이름과 그런 노선을 탄 집단이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회합장으로 가는 길에 어마어마한 테러와 공작이 있을 게다.”
“전경련이랑 경실련이 흡혈귀 회합을 방해하는 데 성공할지 배팅하는 사이트도 있더라고요.”
나한테 전달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어째 둘이 말하는 걸 보니 내가 당연히 그 의뢰를 한다는 분위기다.
“일단, 저는 들은 바 없고요. 만일 그렇다고 해도 거절할 것 같은데요.”
내 말에 타이린드와 테오릭 경의 눈이 커다랗게 변한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향해 외쳤다.
“어째서!”
“어째서냐니요. 딱 봐도 위험하고 번거로운 일이잖아요.”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일 중에 위험하거나 번거롭지 않은 일이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건 적어도 ‘하다 보니’ 복잡해진 거지 이렇게 처음부터 대놓고 문제가 산재해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별 뜻 없이 내뱉은 말인데, 테오릭 경이 보기엔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회합 참석자의 호위다! 평생 그 자리에 한번 가보고 싶어서 열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예? 대놓고 죽이러 온다면서요. 이쪽은 두 명이서 가고요.”
타이린드도 가세해 소리친다.
“그러니 무사히 갔다 오기만 하면 넘볼 수 없는 커리어를 가지게 되는 거야! 상위 가문들과의 인맥은 말할 것도 없고!”
“호위로 데려가 주기만 한다면 한 권역의 공공 집행자를 내려놓겠다는 소리를 하는 놈도 있는 판에······이런 멍청한 놈을 봤나!”
뭐 대충 그런 자리인 건 알겠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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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었군요.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생각 정도 해보시는 것 나쁘지 않다고 아버지한테만 살짝 건의드린 건데, 테오릭 경에게 흘리듯 말을 꺼내셨나 봐요. 두 분이 워낙 절친하셔서요.”
사무실로 찾아와 내 앞에서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숙이는 신시아였다.
“테오릭 경과 타이린드한테 설명을 어느 정도 들어서 굉장히 중요하고 명예로운 자리인 건 알겠는데요. 왜 그런 자리를 제게 제의하신 건지······. 이거 발표되면 논란이 될 수도 있다고 해서요.”
내 질문에 신시아의 흰 얼굴이 벌겋게 물들더니, 더듬으며 말을 꺼냈다.
“대주교님이랑 얘기를 좀 나눠봤는데요. 그분 말씀으로는 오메가 님처럼 용맹한 사람을 본 적이 없대요. 그리고 쪼금의 팬심······이기도 하고요.”
그러더니 신시아가 조심스럽게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무언가를 쥐는 자세를 취하더니 이런 말을 했다.
“나를. 네오-서울의. 전기톱 학살자라. 부르라.”
뒤에서 앨리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푸훅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건 [광란] 상태에서 알아서 흘러나오는 방언이야······.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아니다.
섹-스! 라고 외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하기로 하자.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멋있고 너무 감동이어서 저 울었잖아요.”
얼굴이 화끈거린다.
뒤에서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앨리스가 꺽꺽거리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고 있다.
숨을 돌린 뒤 생각을 좀 해봤다.
신시아에게는 도움받은 일이 많다.
사실 많다는 말로는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기계화 좀비 문제의 해결을 적극적으로 도와줬으며, 헤지르 대주교의 정체가 세계 정복을 꿈꾸던 사령술사 야바니에르라는 걸 알고도 아무 말 않고 있다.
대주교 영감님에게 전해 들은 말에 의하면 교단에서도 나올 예정이라면 자기네 가문에 몸을 의탁하는 건 어떠냐는 제안도 했다고 한다.
천재 사령술사이자 능숙한 엔지니어를 가문 영향력 아래에 두고 싶어서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능력 있고 믿을만한 사람인 건 분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자다.
엄청난 부자.
말에 따르면 야스민 가의 역사는 네오-서울과 같이한다나.
하지만 그렇다고 덥석 의뢰를 받을 수는 없지.
아직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앨리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야, 일해. 그만 웃고.
간신히 숨을 고른 앨리스가 신시아에게 말한다.
“신시아 고객님, 의뢰 내용은 잘 들어보았습니다. 흡혈귀 가문 회합의 호위 건, 맞으시지요?”
“네.”
“신시아 고객님이 저희 사장님의 대단한 팬인 것도 알고, 많은 도움을 주신 것도 알고 있지만······해결사 일이 호의만으로 지속되기엔 힘들다는 말씀을 부득이하게 먼저 드립니다.”
“아, 그렇죠. 당연히 합당한 대가를 제시할 생각이었어요. 웹에 올라와 있는 걸 보니까 검술이나 마법에 대한 보상을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앨리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가문의 비고祕庫에서 찾은 건데 혈계조검술血溪造劍術이라는 술법이에요. 본인의 피를 이용해서 검을 만드는 술법인데, 흡혈귀가 아니어도 사용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성당 지하에서 검 배터리가 나간 경험 이후로 항상 보조 배터리를 챙겨 다니기는 하지만, 그것도 무한한 것은 아니기에 앨리스가 제안한 건 상당히 유용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신시아가 야스민 가의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제안.
“추가로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네. 말씀하세요.”
“춘부장이신 야스민 공과의 독대를 원합니다.”
수연이나 진오, 얼굴에 면사 쓴 놈 등등.
계속해서 이상한 놈들이 일에 얽혀들고 있다.
네오-서울과 역사를 같이 한다는 야스민 가, 현재 그곳의 수장인 야스민 공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저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
혹독한 매질을 겪지 못해서 어린아이가 날뛴다고 그랬지.
바닥에 누워 온몸 비틀기로 떼쓰는 어린아이의 무서움을 알고나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장담하는데 매질로는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