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1권 후기)
025.
파라터스가 평범한 사제는 아닐 것이라고 짐작은 했었다.
예공방의 상무인 수연의 입에서 직접 이름이 나왔고, 기계 교단의 인사 방침이 아무리 순환 배치라지만 태백 권역 이후 바로 자기네들의 성지인 대림 교구에 둘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교단 내에서 무게감을 가지는 것과, 사령술까지 동원해서 기계화 좀비를 찍어내는 현장에서 익숙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으으으······.”
옆에 처박아 놨던 사제가 정신이 드는지 가느다란 신음을 뱉었다.
다시 한번 칼자루를 꺼내 정수리를 내리치자 축 늘어졌다.
죽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러게 왜 소리를 내서 날 나쁜 사람으로 만드나?
사제를 기절시킨 뒤, 몸을 숨긴채로 저들을 지켜봤다.
"일단 내려가지. 오늘도 할 일이 많아."
파라터스를 중심에 둔 사제 몇몇이 빠르게 멀어졌다.
슬슬 움직여볼까라고 생각하는 찰나-
-사장님.
“깜짝아!”
-5분마다 연락해달라면서 놀라긴 왜 그렇게 놀라세요.
대략적인 이야기를 해주자 앨리스의 분통 끓는 목소리가 전해진다.
-그래서, 사제 하나를 구속해둔 채로 거길 들어가셨다고요?
“안 그러면 방법이 없잖아? 그럼, 거기까지 와서 ‘아이고 길을 잘못 들었나 봅니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해야 했겠냐고.”
-일단 사진 찍어서 전송 좀 해봐요. 증거는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나 사진기 없는데?”
-귀걸이! 귀걸이! 귀걸이! 사진 촬영 기능이랑 데이터 전송 기능 있다고 했잖아요! 설명서 제대로 읽어보라고 했죠!
앨리스가 말한 대로 귀걸이의 장식 부분을 몇 번 돌리자 찰칵하는 소리가 났다.
“오!”
-바로 전송되네요. 아니, 이게 다 뭐야. 성당 지하에 이런 게 있다고요?
“그래. 아주 공장이야. 공장.”
-천장에 이건 신시아 씨가 그때 보여줬던 문양이랑 비슷해 보여요.
“사진 좀 신시아 씨한테 보내서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좀 물어봐 줘.”
-알겠어요. 그런 은밀한 곳인데도 용케 통신은 가능하게 해놨네요.
“워낙 넓어서 통신마저 안 되면 자기네들끼리도 불편해서 그렇겠지.”
그 순간, 문을 여는 데 쓰느라 손에 들고 있던 기계 교단 문양 목걸이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격앙과 짜증이 가득 묻어있는 목소리였다.
“호른 사제! 어디야! 파라터스 사제님 화가 이만저만 나신 게 아니라고! 호른 사제!”
열쇠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끼리의 통신수단이기도 했던 모양.
"이거 어떻게 끄지?"
계속해서 시끄럽게 굴길래 손으로 여기저기 누르다가 결국에는 발로 밟아 뭉개버렸다.
목소리라도 따라 해서 답해보려 했는데, 목걸이의 어딜 눌러도 발신 버튼이 없던 까닭이다.
쓰던 사람이 기계 교단의 사제이자 안드로이드였으니 고유 인증을 사용하거나 뭐 그런 방식으로 통신하는 것 같은데, 나는 맨몸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시끄럽게 떠들게 놔두느니 소리라도 안 나게 해야지.
내가 목걸이를 뭉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컨베이어 벨트가 정지하고, 공장 곳곳에서 드론과 무장 로봇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드론의 탐조등과 무장 로봇의 안구가 새빨간 것이 아주 잡아먹을 기세였다.
파라터스에게 호른을 찾아보겠다고 한 사제의 목소리가 공간 전체에 쩌렁쩌렁 울린다.
“호른 사제를 찾아! 당장!”
드론이 날아오르고, 로봇들이 철컥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꿈치로 뭉개버려 반토막이 난 목걸이가 보인다.
저걸 다시 합쳐놓는다고 해서 이 일이 무마되지는 않겠지?
“······얌전히 구석에 둘 걸 그랬나.”
#
앨리스에게 사진을 전송받은 신시아는 한걸음에 해결사 사무실로 달려왔다.
“이 사진, 어디서 찍은 건가요?”
앨리스는 말하지 않았다.
신시아가 의뢰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한 외부인.
‘사장님이 기계 교단 성지 지하에 침투해서 사제 하나를 묶어놓은 다음 찍어온 거랍니다.’라는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앨리스가 입을 다물자 신시아가 답답하다는 듯 손짓을 하며 외쳤다.
“이건 지금 존재할 수 없는 술식이란 말이에요!”
앨리스의 눈썹이 움찔하는 걸 본 신시아가 폭풍처럼 말을 쏟아냈다.
“사령술은 마법과 달라서 체계적이지 않고 개개인의 역량에 기대는 부분이 커요. 그런 만큼 술식에 그려지는 도형 하나에도 술사의 특성이 진하게 묻어나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이 술식에 묻어있는 흔적은 50년 전에 죽은 걸로 알려진 사령술사의 것이 분명해요! 어서 말해주세요!”
반대편 눈썹까지 움찔했지만, 앨리스는 입을 열지 않았다.
더더욱 애가 탄 신시아.
“오메가 님이 이 사진을 찍은 거라면 정말 위험할지도 몰라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방금 죽었다고 했던 사령술사. 왜 죽은 줄 아세요? 좀비로 군단을 만들어서 전 세계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려고 시도했어요. 고작 20대의 나이에! 제가 본 사령술사 중에 천재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릴법한 사람이었다고요! 저는 그 전이나 그 후나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천천히 떨어지는 앨리스의 입.
하지만 앨리스가 한 말은 신시아가 듣고 싶어 하던 것이 아니었다.
“20대의 나이에 죽었다고요?”
“네!”
“어떻게 죽었죠?”
“그걸 왜······.”
이제는 앨리스가 급해졌다.
“어떻게 죽었는지 말씀해주세요.”
“그 사령술사 하나를 죽이려고 여러 도시 권역의 공공 집행자들이 모였어요. 열흘 밤낮 전투가 이어졌고······.”
신시아 특유의 장광설이 시작하려 할 때쯤, 앨리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죽을 때의 모습만요!”
“······상반신과 머리의 절반이 날아갔다고 들었어요.”
앨리스는 오메가가 성당 지하로 침투하기 전에 자신과 나눴던 대화를 복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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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교구의 헤지르 대주교. 헤지르는 세례명이고, 원래 이름은 찾을 수가 없어요"
앨리스의 말에 답하는 오메가.
-기계 교단에 입문한 때는 언젠데?
"50년 전이요. 대주교가 20대 때인데, 사고에 휘말려서 얼굴과 상체 대부분이 날아갔고 이후 사이보그가 됐다고 하네요. 그 이후에 사제가 된 것 같아요."
-무슨 사고인지는 모르고?
"네. 그냥 사고라고만 되어 있어요. 40대에 대림 교구의 대주교가 된 이후로는 쭉 그곳에 머물렀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상한 건 사제가 되기 이전의 기록이 거의 없어요. 이거 정말 간신히 찾은 거예요. 정보가 어찌나 없던지······."
-기계 교단은 사제들이 죽질 않아서 인사 적체가 심하다던데 사제가 된 지 20년 만에 성지의 대주교가 됐다······.
"원래부터도 기계 교단은 세력이 큰 종교이긴 했는데, 헤지르 대주교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이후에 더더욱 세를 넓혔어요. 그 전부터 유명하긴 했는데 대림 교구가 교단의 성지라는 말을 듣게 된 것도 헤지르 대주교의 부임 이후라고 하네요."
-인공 부양 대지도 그 대주교 주도로 만들어진 거라며?
"맞아요. 엄청난 인원의 기계교 신자들이 자원봉사 한 거로 유명하죠."
-묘한 양반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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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자리로 돌아가 앉은 앨리스가 서포팅 모드를 가동했다.
신시아가 말하는 사령술사와 성당 지하에 기계화 좀비 공장을 만든 헤지르 대주교가 같은 인물이라면?
오메가는 말도 안 되는 위험이 도사리는 곳에 제 발로 들어간 걸지도 모른다.
“사장님! 응답하세요!”
#
-사장님! 응답하세요!
급히 손을 올려 귀걸이의 서포팅 모드를 해제했다.
지금은 곤란해.
조그마한 말소리라도 냈다가는 옆에서 사방으로 탐조등 불빛을 뿌리고 있는 드론이 날 향할 것 같거든.
기계 교단 아니랄까 봐 얘네들은 드론 하부에도 이상한 검은 막대기를 달아놨네.
설마 저거 레일건 아니겠지?
눈알이 불타는 것 같다.
[은신] 스킬의 지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렇게 은신을 남발하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틀림없이 안구건조증에 걸리지 싶다.
간신히 드론 13대와 로봇 5대 정도를 지나친 후, 공장 구석에 있는 문을 당겼다.
덜컥-
잠겨있다.
더는 한계다.
눈알 표면이 갈라지는 것 같다.
[문따기]
성공확률 5%.
확률성인데다가 336시간이라는 극악의 쿨타임이 붙어 있어 진짜 다들 왜 배우냐고 했던 스킬.
5%면 돌릴만한 가챠잖아!
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
철커덕-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돌아간다.
재빨리 들어와 문을 닫고 안쪽에서 잠갔다.
이 스킬은 분명 디지털 방식에는 안 먹힐 것 같은데, 아날로그식 잠금장치라 살았다.
깜-빡
눈을 감자 아릿한 느낌이 멀어지며 하얀빛의 잔상이 망막을 가득 채웠다.
양손에 냉기를 머금게 해서 눈에 가져다 댔다.
아아- 이것이 극락인가.
하지만 입에서는 절로 투덜거림이 새어나왔다.
"아이고야...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눈꺼풀과 빙결계 마법의 존재에 감사하고 있을 무렵, 옆에서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자넨······누군가?”
“으아아아······깜짝이야.”
정말 놀라서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려다가 간신히 소리를 목 뒤로 넘겼다.
여기서 잡혔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컨테이너 위에 좀비 대신에 올라가는 꼴은 당하고 싶지 않다.
뻑뻑한 눈을 돌려보니 머리와 상체의 인공피부가 너덜거려 안쪽의 부품이 그대로 노출된 노인이 철창 안에서 머리에 반구형 기계 장치를 쓴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볼이 넓은 냄비를 엎어놓은 것처럼 생긴 장치에서는 바깥과 연결되는 듯한 굵은 케이블이 몇 개 뻗어있었고, 노인은 오랫동안 관리받지 못한 건지 보이는 그의 부품 군데군데 녹이 슬어있었다.
그의 얼굴이 몹시 낯익었다.
“헤지르 대주교?”
주름진 노인의 얼굴 반쪽이 요동치더니, 이윽고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내 세례명을 얼마 만에 들어보는 것인지······.”
대체 어떻게 해야 미사를 집전하던 대주교가 이 모양 이 꼴로 갇혀 있는지는 차차 알아가야 할 문제다.
입을 떼려는데, 문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침입한 게 확실합니까?”
“호른이 그 꼴로 발견된 걸 보고도 모르겠나? 정신을 차리는 대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열쇠를 밀어 넣는 소리가 들린다.
눈물자욱을 훔친 대주교가 나를 향해 소리 죽여 외친다.
“숨게, 어서!”
아니, 이 방은 크지도 않고 뭐가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숨냐고요.
결국 눈알을 한 번 더 희생해야 하는 수밖에 없나.
[은신]
눈 함부로 쓰면 자기처럼 인공 안구로 교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키클롭스 아재의 농담이 떠오른다.
젠장, 농담이 현실 되게 생겼다고!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파라터스였다.
그가 철창 앞으로 다가와 대주교를 바라보며 말했다.
“공장에 쥐새끼가 한 마리 들어온 것 같습니다. 잠시 쉬고 계시죠. 스승님.”
퉷-
대주교가 뱉은 기름 섞인 침이 파라터스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어어······그러지 마요.
그냥 얌전히 내보내요.
얘기가 길어지면 눈이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요.
작가의 말
1.
25화 기념 조금 긴 작가의 말이 될 것 같습니다.
‘모름지기 작가와 독자는 작품으로만 소통해야지.’라고 생각하신다면 넘어가셔도 좋은 부분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잘못됐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저도 평소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하지만 많은 분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으니, 이 정도는 남겨도 되지 않을까하는 변덕이 조금 생겼습니다. ㅎㅎ
(처음 이 부분을 쓰고 예약 연재를 걸어놨을 때 선작이 2000대로 기억하는데 올라갈 때가 되니 8000 가까이 되어 있네요...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너무 빨리 성장한 것 같아서 살짝 두렵읍니다...)
2.
웹소설은 한 편에 대략 5000~5500자가 기본 분량입니다.
25화 단위로 한권이라고 하니 약 12만5천자에서 13만7천5백자 정도가 한 권 분량이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제 글 0화에서 25화까지의 원고 글자수를 보니 16만5천7백자 정도가 나옵니다.
문피아 웹에서 수정한 뒤에 아직 원고에는 반영되지 않은 부분도 있으니 실제 분량은 조금 늘어날 것 같군요.
3.
2번의 이유를 이 글의 장르적 특성..이라는 핑계로 무마하고는 있지만 제 글솜씨가 부족하기도 해서겠지요.
다양한 장르가 혼합된 글을 쓰고 있다보니 익숙하지 않은 독자분도 계실 것이고, 그런 분들에게 상상의 여지를 드리기 위해서 설정이나 묘사가 조금 많이 들어있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스토리는 진행시켜야 하기에 이래저래 쓰다보면 5500자가 넘는 경우가 다반수고, 체감상 7000~8000자에서 원고가 마무리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면 어차피 무료분인데 4000자로 끊어서 조금 더 덧붙이거나 해서 2편으로 올려라 하는 의견도 있는데요.
그렇게는 하지 않으려고요. 호흡 끊기면 재미 없잖아요.
4.
제가 작년 말에 쓰다 연중한 글을 보신 분이 계실지는 모르겠는데요.
옛 동료였던 용사를 죽이러 가는 졸라쎈 엘프 전사 얘기였습니다.
제 기억에 25화까지 올렸는데 하루 조회수가 40 언저리에서 왔다갔다해서 눈물을 머금고 연중을 했었죠.
그때 지금 담당자님이 재밌다며 후원해주시고, 다음 글은 같이 해보자고 계약 제의까지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글이 탄생했죠.
이 파트를 보실지는 모르겠지만 문피아 이 모 PD님 감사드립니다.
5.
부정기적으로 작가의 말에서 작품 외적인 설정을 하나씩 풀까 하는데요.
이 부분이 마음에 안 드시면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글을 읽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으며, 제가 글을 쓰면서 생각했던 여러 설정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처음에는 오메가를 사설집행자로 설정하고 글을 쓰려고했다.>
이런 부류죠.
6.
기계화 좀비 에피소드가 조금 길어지고 있는데요, 곧 끝납니다.
그리고 제가 이 소재를 택한 건 오로지 이 에피소드의 끝부분을 쓰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진짜 빨리 보여드리고 싶어서 연참 할까 5천 번쯤 고민했는데 비축은 작가의 생명줄 같은 것이라서 차마 풀지는 못했습니다. 올라가면 재밌게 봐주세요.
(미리 받아보신 PD님이 저보고 짤을 하나 보내시더군요. ‘무슨 약을 하시길래 이런 생각을..’하는 심슨짤요. 약 안 했습니다. 저 술담배도 안하고 커피도 아침에 딱 한 잔 마십니다.)
7.
다시 한 번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모두 행복한 일만 있으시길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