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017.
“나이누안!”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려보니 샴록, 아니 생김새는 분명 눈에 익지만, 목에 문신이 없는 엘프였다.
‘나이누안의 기억 속인 건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이누안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밖에 없었다.
“셀티스. 애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들이 꺄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셀티스가 염동력으로 아이들을 띄웠다 내렸다를 하고 있었다.
“나이누안 선생님!”
나이누안을 발견한 아이들이 반갑게 소리치자 나이누안은 장난기 많은 소년 같은 미소로 아이들을 반겼다.
“무지개 만들어주세요! 무지개!”
그 말에 늑대인간으로 변한 나이누안이 공중에 아주 작은 얼음을 흩뿌리자 작은 무지개가 생겨났다.
아이들이 나이누안과 셀티스의 주변을 돌며 놀고 있을 때, 내 귀에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셀티스 선생님! 나이누안 선생님! 지금 애들 공부할 시간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지금처럼 하나가 의수가 아닌, 두 팔 모두 멀쩡했을 시기의 가브리엘라였다.
“가브리엘라 누나다! 도망쳐! 잡히면 책상에 앉아서 공부해야 해!”
“공부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거야! 선생님들이 학교를 만든 이유가 그거라고!”
가브리엘라가 잡으러 오자 아이들은 웃으며 도망쳤다.
“왜 맨날 저만 나쁜 사람이 되는 건가요오!”
가브리엘라의 장난 섞인 울부짖음에 셀티스가 살풋 웃고는 도망치는 아이들을 염동력으로 잡아다가 가브리엘라의 앞에 데려다 놓았다.
“가브리엘라 누나처럼 너희도 다른 동생들을 가르치고 싶지?”
“네에!”
“그럼 누나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야 해. 가브리엘라는 어찌나 공부를 열심히 하던지 내가 놀랄 정도였다니까.”
“아이······셀티스 선생님도······.”
예상치 못한 칭찬에 고개를 수그린 가브리엘라였다.
나이누안도 가브리엘라 칭찬을 거들었다.
“그래. 어마어마했지. 여름에 더워서 공부를 못 하겠으니까 얼음을 내놓으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기도 했지?”
“그, 그때는 낮에 너무 더워서······.”
일전에 만났을 때의 적대적이고 날카로운 가브리엘라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아이들이 나이누안을 향해 한입으로 외쳤다.
“선생님! 저희도 더워요!”
그 말에 나이누안은 모든 아이들의 손목을 하나하나 잡아주었고, 나이누안이 손을 뗀 곳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얼음 팔찌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러면 덜 덥겠지? 어서 올라가자.”
아이들이 뛰어가자 셀티스가 가브리엘라에게 말했다.
“먼저 올라가 있어. 나랑 나이누안도 곧 올라갈게.”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학교 건물로 가브리엘라와 아이들이 들어가고 셀티스와 나이누안도 천천히 안으로 걸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진오랑 샴록은?”
“진오는 학교 증축에 필요한 예산 받아 내겠다고 구 여의도에 갔고, 샴록은 마법사들의 자원봉사 프로그램 제의하러 불칸 마탑에 갔어.”
“마탑에? 마법사들이 여기에 오려고 할까?”
“글쎄. 안돼도 일단 해봐야지. 그래도 안 되면 몇 번 더 해보는 거고.”
“자매가 똑같네.”
“나보다는 샴록이 더 똑부러지지.”
대화를 마친 나이누안이 밖을 보고 조용히 읊조렸다.
“오늘은 밖이 조용하네. 26구역 같지 않아.”
바람 잘 날 없는 대림 에어리어, 그중에서도 혼잡하기로는 둘째라면 서러운 26구역이다.
마치 이런 평온함은 마치 폭풍 전의 고요 같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어. 부정 타게.”
“그래. 내가 말을 잘못했다. 이렇게 조용한 날도 있어야지.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어.”
이 기억은 나이누안이 죽기 전에 남긴 잔류사념.
즉, 학교가 습격당한 날의 기억이다.
#
평화로웠다.
아이들은 다 해진 책을 들고 셀티스에게 궁금한 것을 물으러 왔고, 나이누안은 학교로 찾아와서 고충을 털어놓는 주민들의 말을 빠짐 없이 들어주었다.
사람들의 허름한 행색은 그들의 삶이 풍족하지 않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었지만, 눈빛과 숨결에는 생동감이 가득했다.
이들은 정말로 작지만 확실하게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켜 가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 대부분이 지났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으나 이곳에서는 부모 모두 일하는 가정이 많았기에 아직 대부분의 아이는 학교에 남아 있었다.
하루종일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사람을 상대해야 했던 나이누안이 의자에 축 늘어져 셀티스에게 물었다.
“샴록은 언제 온대? 샴록의 소환수들이 있으면 우리가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디까지 왔나 물어볼까?”
눈을 감은 셀티스는 고개를 저었다.
“텔레파시가 닿질 않네. 주변은 아닌가 봐.”
그런 셀티스를 한심하게 보고 있던 나이누안이 손목시계를 만져 샴록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어. 나야. 불칸에 갔다며. 일은 어떻게 됐어? 아······. 그래? 괜찮아. 와서 얘기하자. 오고 있는 길이야? 알겠어.”
통신을 끊은 나이누안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대.
“이제 인천 권역 벗어났대. 불칸 마탑이랑은 얘기가 잘 안 됐다나 봐.”
눈치를 보던 셀티스가 조그마하게 말을 꺼냈다.
“불칸이면 나이누안 네가 있던 곳이니까, 말이라도 한 번 꺼내주면······.”
“마탑주님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성격 아니신 거 알잖아. 요새는 잘 만나주지도 않으셔.”
자신을 다시 만나러 올 때는 낙후지역에서 마음을 완전히 뗀 후여야 할 거라는 불칸 마탑주, 박운의 차가운 말이 아직 나이누안의 기억에 생생했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셀티스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래도 샴록은 금방 오겠네. 진오도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온다고 했으니까 곧 올 거고. 다들 고생했으니까 오늘은 맛있는 거 먹자. 아까 학부모님이 고기 주시고 가셨어. 고기!”
그렇게 하자고 나이누안이 답하려는데, 날카로운 소음이 귀를 때렸다.
창문이 부서지는 소리.
차츰 주변 주민들의 마음을 열고 있는 이들이었지만, 아직도 불만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그들 중 누군가는 진오, 샴록, 셀티스, 나이누안이 그럴듯한 사회사업을 하는 척만 하고 그걸 미끼로 정계에 입문하고 싶어 한다거나, 아이들에게 헛된 희망만 심어줄 거라고 하기도 했다.
늘 흔들리는 기반 위에서 살아왔던 대림 에어리어 26구역의 사람들이니만큼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선의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이누안과 셀티스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아직 집에 가지 않은 아이들이 까치발을 하고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도둑고양이가 들어왔나 보네. 모두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서 가브리엘라랑 놀고 있으렴.”
“애들 진정시켜줘. 내가 가볼게.”
셀티스가 소리 난 쪽으로 뛰어갔다.
머지않아, 나이누안에게 셀티스의 텔레파시가 닿았다.
-최루탄이야. 정리하고 돌아갈게.
종종 있는 동네 양아치들의 짓이라 생각하고 나이누안이 아이들을 진정시키려던 찰나, 셀티스가 향했던 곳에서 총성이 들렸다.
타앙-
“가브리엘라! 애들 못 나오게 해!”
“네!”
가브리엘라가 아이들을 한 교실에 모으는 것을 확인한 나이누안이 늑대인간으로 변해 학교의 복도를 내달렸다.
도착한 나이누안을 맞이한 것은 자신의 머리를 향하는 총알을 염력으로 잡아둔 셀티스.
그리고 셀티스에게 총을 겨눈 괴한들.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데다 두드러진 신체의 특징조차 확인하기 어려워 신원이나 소속을 특정하기 힘들었다.
“넌 아이들에게로 돌아가.”
나이누안의 말에 셀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허공에 멈춰있던 총알에 바닥에 떨어졌다.
빠르게 돌아가는 셀티스의 뒤를 쫓아가려던 괴한 몇의 팔과 다리에 나이누안이 만들어낸 송곳 같은 얼음이 꽂혔다.
“뭐 하는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얼음을 뽑아 든 괴한을 본 나이누안의 말문이 막혔다.
뽑혀 나온 얼음에는 살점도, 피도 묻어있지 않았다.
계속해서 담을 넘어 학교로 침입하는 괴한의 수가 많아지고 있었다.
나이누안에게 총탄이 쏟아졌다.
빙벽을 세워 자신에게 향하는 탄환을 막아낸 나이누안이었으나,
“···네놈들···.”
나이누안이 직접 주민들과 자재를 옮기며 지은 학교의 벽면에 흉한 총알 자국이 남았다.
괴한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수류탄을 까서 빈 교실로 던져 넣었다.
샴록과 셀티스 자매가 아이들과 함께 돌려보느라 손때 묻어 모서리가 둥그렇게 닳은 책들이 찢겨 나부꼈다.
아이들이 앉을 자리가 부족하다는 소리에 진오가 큰 손으로 서툴게 만든 책상과 의자가 꺾이고 불타올랐다.
“그만둬!”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나이누안의 손이 쉬지 않고 수인을 맺고 마법을 그려냈다.
몇몇 괴한이 숯덩이로 변했으나 다른 괴한들에 의해 모두 회수되었다.
빈 교실에서 시작한 불은 학교 전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총격을 가하는 괴한 몇을 뭉개버린 뒤 나이누안은 셀티스와 아이들에게로 합류했다.
총탄과 폭발을 막아내기 위해 염력장벽을 극한까지 전개했던 셀티스는 이미 입을 열기도 어려울 정도로 지쳐 있었다.
정신을 잃은 가브리엘라도 폭발의 여파에 휘말린 듯 한쪽 팔이 보이지 않았다.
잔뜩 겁먹은 얼굴을 한 채로 울고 있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나이누안이 말했다.
“미안하다. 아프게 해서 선생님이 미안해.”
그리고 셀티스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길을 뚫을게. 아이들을 보호해줘.”
셀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서 보랏빛 안광이 흐르자 무너져 가던 장벽이 수복되었다.
코피가 흘러내렸으나 셀티스는 모든 기량을 아이들을 보호하는 데 쓰느라 신경 쓸 틈도 없어 보였다.
이후, 나이누안은 괴성을 터트리며 괴한들에게 달려들어 길을 뚫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멈췄다.
#
주위 모든 것이 멈춰 있는 상황에서, 나는 나이누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이성을 잃은 채 대마법사라도 된 것처럼 주위에 마법을 쏟아붓던 나이누안도 영체의 반투명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가 내게 말했다.
“이후의 기억은 선명하지 않습니다. 간헐적으로 마나 하트가 터질 듯 아파왔다는 기억과 지키지 못한 아이들을 보고 절규했던 것이 전부죠.”
“잔혹하군.”
“맞아요. 끔찍하고 잔혹한 짓이죠. 제가 건넨 의뢰는 잘 생각해보셨나요?”
몸을 돌려 나이누안의 기억 속 온통 불타오르는 학교를 바라봤다.
그리고 지금 26구역에 남아 있는 폐교를 생각했다.
“학교를 다시 일으켜달라······. 세우는 것도, 지키는 것도 쉽지 않겠어.”
“그것과 하나 더 있었죠.”
뚜벅뚜벅 걸어간 나이누안이 근처의 괴한 앞에서 멈추었다.
안에 있는 누군가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한 복면과 검은색 옷을 뜯어내려는 나이누안의 시도는 모두 허공의 손짓일 뿐이었다.
이곳은 아직 그의 잔류사념 안, 과거의 기억에 간섭할 수는 없다.
“이들의 정체를 밝혀주세요. 그리고 왜 그랬는지 알아봐 주세요.”
나도 나이누안의 시야로 봤다.
이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정체를 숨겼다.
심지어 쓰러진 동료의 시체도 남김없이 회수할 정도.
옆에 있던 놈이 쓰러지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내빼는 어설픈 지하조직이 아니라는 소리.
게다가 조직적인 움직임과 단호한 행동.
“특정하기 힘들어. 고통에 무감각해 보였다는 것과 피를 흘리지 않았다는 것 정도가 특징인 것 같은데······.”
나이누안에게 물었다.
“원한을 산 건가?”
“주변의 어중이떠중이들과 다툼이 있긴 했죠. 하지만 되새겨봐도 이렇게 잔혹하게 보복당할만한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이누안의 목소리가 점차 격해졌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아이들까지 이렇게 잔혹하게······.”
그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건지 물어도 되나? 서로가 견제 중이라고 해도 폐교에 진입한 다른 마법사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나이누안의 답이 걸작이었다.
당연한 걸 묻고 있냐는 말투.
“너덧 명씩 저를 제압하러 온 마법사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중에 단 한 명도 오메가 당신처럼 저를 쓰러트리지 못했죠. 생에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 될 텐데, 적어도 제가 인정할만한 사람에게 해야 하지 않겠어요?”
내 곁으로 다가온 나이누안이 어깨로 나를 슬쩍 건드리며 물었다.
“그리고 당신, 검술과 마법만 쓸 수 있는 게 아니죠?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상의 뭔가가 있어요. 달아오른 피부가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 봤다고요.”
자연 회복의 상위 스킬인 급속 회복이다.
마이너 스킬의 존재를 알아챈 건 나이누안이 처음이다.
그나저나 이 녀석, 너스레 떠는 게 밉지 않다.
어울렸다면 제법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오른손을 내밀었다.
“의뢰, 받아들이지.”
이제 감각도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흐려진 나이누안의 손이 내 손과 맞닿았다.
“보상을 먼저 드리는 거니까 꼭 성공해야 해요?”
“밖에서 요새 날 보고 뭐라고 부르는지 아나?”
“저야 모르죠. 뭐라고 하는데요.”
“실패를 모르는 해결사.”
박장대소한 나이누안의 모습이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채 사라진다.
“지켜볼 거예요.”
그의 몸에서 빛이 뿜어진다.
눈을 감았다 뜨자 나는 폐교에 홀로 서 있었다.
나이누안과 맞잡기 위해 뻗었던 손, 그 위에는 나이누안의 것이 분명한 마나 하트가 놓여있었다.
두근, 두근
소중히 가져가기 위해 조심히 쥐어든 순간······!
“···님! ···해요! ···위험해요! 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