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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14화 (15/258)

014.

014.

“기공 계열의 능력을 가진 걸로 추정하고 있었는데. 마법이라니. 그것도 화염계 마법.”

뒤에서 타이린드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짧은 시간 동안 타이린드와 친해진 정현이 두어 마디 맞장구를 칠 법했으나 녀석은 아직도 얼이 빠져 있는지 터벅터벅 걷기만 하고 있었다.

“게다가 영창도, 마법진도 없이 발현되는 수준······. 패스트 캐스팅Fast Casting을 뛰어넘었어. 분명 퓨어라고 했는데.”

마나 하트 없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걸리는 모양.

이래서 마법에 관한 것은 쉽게 밝히고 싶지 않았던 거다.

마나 하트가 없이 마법을 쓴다는 건 이쪽 세계의 마법 체계에 대한 패러다임이 박살 나는 수준이기 때문.

서리얼에서는 마법을 배우게 되면 스테이터스 창에 [마나 하트가 생성되었습니다!]라는 문장 하나와 주로 익힌 마법의 속성에 따른 숙련도가 표시되는 것이 전부였다.

단순한 설정으로의 기능이었던 것.

하지만 그 설정이 현실이 되어버린 이곳에서는 그 어떤 마법사도 마나 하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심장을 둘러싼 그릇 형태의 기관, 마나 하트.

힘이 약해지는 페널티를 감수하고서라도 생명공학이나 기계공학, 혹은 다른 마법의 힘을 빌려 심장 자체를 외부에 보관하는 마법사가 있다고는 하지만 마나 하트 없이 마법을 쓰는 전례는 단 한 건도 없다.

어째 뒤통수가 뜨겁다.

폭발이 잠잠해진 이후,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린 정현을 뒤에 둔 채 타이린드와 둘이 다시 통로에 진입했다.

막혀있는 지하철 선로에서 뻗어나간 새로운 길이 다른 하수도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파악했으며, 다른 선로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숨겨진 길이 있을 수 있으니 탐색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는 통신을 드론을 통해 보낸 상태.

그리고 다시 정현이 있는 곳으로 복귀해서 처음에 출발했던 차량 기지로 돌아가는 길, 타이린드는 내가 보였던 마법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했다.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이제는 혼자서 문답을 주고받는 중이다.

아무 제지도 하지 않자 ‘대림 에어리어의 뒤를 봐주는 거물’, ‘역시 위타천이 인정할만한 남자’ 등 타이린드의 상상이 끝도 없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결국 앞장서서 걷던 나는 잠시 멈춰 뒤로 돌아섰다.

“상상한 거 전부 아닙니다. 그냥 해결사예요.”

타이린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예, 예. 그러시겠죠.”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듣고 싶은 말을 해주면 된다.

하지만 내 비밀을 술술 말하고 다니게 할 순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이린드는 정보 조직의 일원 아닌가.

“제가 마법을 사용한다는 걸 비밀로 해주면, 어째서 제가 퓨어인지 알려드릴게요.”

눈을 반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타이린드.

감정 표현을 참 솔직하게 하는 여자다.

“대신, 비밀로 하라는 건 루트에도 말하지 말아 달라는 거에요. 혼자만 알고 있어 달라는 소리죠.”

“언제까지?”

기간을 내밀 줄은 몰랐다.

“음······. 다른 경로로 제가 마법을 쓴다는 걸 들을 때까지?”

“좋아. 그럼 오메가와 타이린드 개인 간의 약속인 거네.”

“제가 원하는 게 딱 그거에요.”

“그럼 나도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 만약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루트 관련 의뢰를 받게 된다면 알려줄 수 있겠어?”

잠시 고민했다.

내가 아무리 다들 등쳐먹기 바쁜 대림 에어리어에서 해결사를 한다지만 의뢰인과 의뢰 내용을 노출하는 건 금기 중의 금기다.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세부 사항은 아무것도 알려드릴 수 없어요. ‘의뢰가 있다.’ 이 정도가 언급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그것도 제가 알려줬다는 걸 노출해서는 안 되고요. 괜찮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타이린드.

“좋아. 이제 난 네 편이야.”

정보를 받아먹을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

그런데 내가 줄 정보는 거짓 정보다.

하지만 타이린드는 충분히 납득하고 만족하겠지.

몸을 기울여 타이린드에게 속삭였다.

혹시나 정현이 들을까 봐 조심하는 척.

“저, 마나 하트 있어요. 다만 평소에는 심장이 아니라 몸 전체에 녹아있다가 마법을 쓸 때만 생겨나는 특수체질이라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없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

“그런······! 마나 하트 연구자들이 꿈꾸는 체질이잖아. 평소에는 일반인인데 마법을 쓸 때만 마법사가 되는 거!”

마나 하트는 각자 고유한 파장을 만들어내고, 따라서 마법사들 중 예민한 부류는 그 파장 여부에 따라 주위 다른 마법사의 존재 유무를 알아챌 수 있다고 한다.

강력한 마법사의 마나 하트가 내뿜는 파장은 꼭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알아챌 수 있다고도 하고.

이것 때문에 마법사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지 파장을 감추는 연구, 마나 하트 자체를 다른 공간에 보관하는 연구 등등 마나 하트 연구자들의 숙원 중 하나가 마나 하트는 존재하게 하면서 파장은 없애는 것이란다.

그런데 내가 그런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타이린드의 눈이 왕방울처럼 땡그랗게 변할 만하다.

새빨간 거짓말이긴 하지만, 내가 마나 하트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는 걸 납득할 만 한 이유가 되긴 할 거다.

“이걸 다른 마법사들이 알게 되면 어디 납치돼서 평생 연구 재료로 쓰일 수도 있고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비밀로 좀 해줘요.”

타이린드는 나를 향해 안쓰럽다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입맛을 쩍쩍 다셨다.

이런 대형 정보를 알고도 발설할 수 없는 아쉬움일까.

“이걸 알려준 건 타이린드 당신이 처음이에요. 만일 제가 이 소리를 다른 곳에서 듣게 되면 그건 타이린드가 어디선가 약속을 어겼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표정을 싸늘하게 바꾼 뒤 칼자루를 톡톡 쳤다.

약속을 어기면? 그때는 이판사판인 거야.

“알았어. 나 그렇게 입 가벼운 여자 아니야.”

다시 움직이려는데, 정신이 조금 돌아온 것 같은 정현이 코를 들고 킁킁거렸다.

“누가 이쪽으로 와요. 2명인 것 같은데. 한 사람한테는 피 냄새, 다른 사람한테는 그을음 냄새가 나는데요?”

그 말에 드론을 확인했으나 베이스에서 전파된 사항은 없었다.

정현과 타이린드도 각자의 드론을 확인한 뒤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한번 정현의 코가 움찔거렸다.

“피 냄새에서는 분노가, 그을음은 호기심이 느껴져요.”

“냄새로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저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저 냄새로 감정 일부를 읽어낼 수 있다고. 정확도는 60% 정도?”

솔직히 기억 안 난다.

키클롭스 아재랑 정현이랑 술판 벌이던 때 들었나 보다.

철커덕하는 소리와 함께 타이린드가 두 자루의 총을 꺼내 옆구리에 끼었다.

“분노한 채로 이쪽으로 올 놈이 있을까?”

그 말이 맞다.

나는 원치 않았지만 나와 타이린드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 역시 예공방 내부 권력투쟁의 대리로 세워진 셈.

하하호호 웃으며 끝나기는 힘들다.

칼자루를 꺼내 언제든 비틀어 전개할 준비를 하면서 청력 강화를 사용했다.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든다.

“굳이 그 해결사를 찾아가서 뭘 어쩌려고.”

허리 언저리에 날개 4개가 달려있던 사람의 목소리다.

“알아서 할 테니까. 선우 넌 빠져라.”

사이먼의 목소리.

거품 물고 쓰러지는 걸 봤는데 목소리만 들어서는 꽤 멀쩡해 보인다.

맷집은 좋은 편인가보다.

사이먼이 선우라 불린 익인翼人에게 묻는다.

“너와 같이 갔던 놈들은, 어떻게 했지? 또 그 역겨운 ‘작품’으로 만들었다는 소리를 하지는 않겠지?”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 난 아무것도 안 했어. 그 두 놈이 인센티브에 눈이 멀어서 앞서가다가 선로 아래 트랩을 건드린 거야. 멍청한 놈들 때문에 내 깃털 그을린 것 좀 봐. 아름답지 못해.”

“너와 같이 있던 놈들은 도만 상무가 보냈다고 했나?”

“정확한 건 몰라. 다만 수연 상무님은 다른 임원들에게 확실한 경고를 전달하길 기대하고 계실 거야. 누구처럼 뻗어있다 뒤늦게 뛰어드는 게 아니라.”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사이먼이겠지.

‘날개 달린 놈도 수연 상무의 라인인 것 같고.’

확실한 경고는 아마 다른 임원들이 보낸 조사원들을 때려눕히라는 거겠지.

어쩌면 죽이는 것도 고려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딴 건 모르겠고. 해결사 놈은 내 손으로 끝장낸다. 그 자식만 없었더라면 이런 추태를 보이는 일은 없었을 거 아냐!”

미친놈.

머리통 활짝 열고 뇌수를 사방팔방으로 흩뿌릴 위기에서 구해줬더니 이게 내 탓이란다.

청력 강화를 해제하고 목을 좌우로 돌려 풀었다.

다른 임원들한테 확실한 경고를 보내길 원한다고?

나도 경고를 해야겠다.

-해결사 오메가는 건드리면 무니까 건드리지 마시오.

-장기 말을 쓸 거면 제대로 된 장기 말을 쓰시오.

라는 경고를.

앞으로 걸어가자 몸을 낮춘 채 코를 킁킁거리던 정현과 총기 거치를 마친 타이린드가 당황한 목소리를 낸다.

“어어······형님?”

“오메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내게 걸어온 시비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

어깨 주위를 맴돌던 드론에서 뻗어나간 흐릿한 빛이 사이먼과 선우의 발치에 닿을 무렵, 그들도 나를 발견했다.

“어! 저기!”

선우의 말을 듣고 내 쪽을 바라본 사이먼의 숨결이 더욱 거칠어졌다.

부러진 뿔에 감겨있던 피 묻은 붕대를 뜯어내는 사이먼.

반대편 뿔에 비해 반절도 남지 않은 뿔의 형태가 위타천의 혹독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내가 방향을 돌리지 않았다면 부러지는 건 뿔이 아니라 대갈통이었을 텐데.

“저 건방진 놈!”

어떻게든 나를 나쁜 놈으로 만들려는 수작이 슬슬 짜증 난다.

그렇게 잔뜩 쪽을 팔고 나자빠졌으니 어떻게든 자존심을 유지하려는 방어기제겠지만, 영문도 모른 채 끌려들어 간 나는 왜 나쁜 놈이 돼서 욕을 먹어야 하는 건데?

사이먼의 뿔 사이에 에너지가 뭉쳐 들더니 이내 환하게 빛나는 구체를 형성했다.

“적당히 해, 사이먼! 그러다 여기가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선우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사이먼은 빛을 내게 쏘아냈다.

“죽어버려라!”

사이먼을 본 순간, 이미 검은 완전 전개를 마쳤다.

나를 꿰뚫고 지나가려는 빛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역려건곤]

에너지의 집합체였던 빛이 검에 닿아 하얗게 부스러진다.

미처 다 반감시키지 못한 빛은 내 양옆으로 갈라져 선로의 벽에 처박혔다.

만들어진 틈 사이로 검기를 쏘아 보냈으나 사이먼은 팔을 휘둘러 검기를 옆으로 튕겨냈다.

벽에 박힌 검기 때문인지 선로 전체가 우르릉 떨며 오래 묵힌 먼지를 털어냈다.

“잔재주는 통하지 않는다! 애송이!”

사이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다시 한번 번쩍이며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사이먼의 뿔.

놈은 뿔 사이를 내가 있던 곳으로 조준하지만, 그곳에 나는 이미 없다.

“사이먼! 아래!”

선우의 외침.

하지만 늦었다.

검기가 사이먼을 향할 때, 고속 이동을 통해 놈의 턱 바로 아래로의 이동을 완료했다.

역려건곤이 상대방의 힘을 반감시키는 기술이라면 지금 사용하는 기술은 쾌快의 묘리가 담긴, 절삭에 특화된 스킬.

[만사재시萬事在始 매사필종每事必終]

온갖 일에는 시작이 있으며 모든 일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베어냄 또한 그러하니 검이 닿은 것이 있으면 잘려 떨어지는 것도 있는 법이다.

원을 그리듯 아래에서 올려 친 검이 어떠한 저항 없이 부드럽게, 자연히 그러해야 한다는 듯 사이먼의 하나 남은 뿔을 베어낸다.

당장이라도 작열할 듯 뿔의 끝에 맺혀있던 구체는 힘을 잃고, 길고 어두운 선로에는 뿔이 떨어지며 바닥과 충돌하는 소리만이 울린다.

그 길고도 허무한 울림이 멎자, 비로소 뿔의 절단면에서 피와 유동액이 솟았다.

비탄에 가득 찬 사이먼의 울음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그아아아아-!”

이미 놈의 눈은 흰자위로 가득했다.

이성을 잃고 분노한 사이먼의 뿔 절단면에서, 미처 뭉치지 못한 광선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광선이 선로의 천장을 마구 뚫고 들어갈 때쯤, 뒤에서 탕-하는 격발소리가 들렸다.

탄환이 어깨에 꽂히자 사이먼은 비틀대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선로에 쓰러졌다.

돌아보니 어깨에 총을 견착한 타이린드가 보였다.

“일단 제일 쎈 마취탄으로 때려 박았어. 쇼크로 죽진 않겠지?”

검날을 집어넣지 않고 옆에 있던 선우에게 몸만 돌려 물었다.

전투 직후라 고양되어 있어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너도 나한테 꼬운 거 있냐? 있으면 빨리 말해.”

칼등에 묻은 사이먼의 피를 털어내기 위해 검을 휘두르자 광자 칼날 특유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축축한 지하의 공기를 갈랐다.

검의 움직임과 배를 깔고 엎어진 사이먼 사이를 빠르게 왕복한 선우의 시선이 멎었다.

“사이먼 이 친구, 오늘 많이 무리하더니 결국 ‘혼자’ 뻗어버렸군요. 헤헤.”

상황판단이 빨라 좋다.

근데 왜 꼭 몸을 움직여야 그런 빠른 상황판단을 보여줄까.

너무나 아쉬운 부분이다.

쓰러진 사이먼 옆으로 가서 잘린 뿔의 윗부분을 챙겼다.

“그건 어디다 쓰시게요.”

정현의 말에 간단히 답했다.

“헌팅 트로피. 사무실에 걸어놓을 거야.”

마음 같아서는 사이먼의 전신을 불로 그슬려서 털 하나 안 남기고 싶은데, 보는 눈이 많아 그렇게는 못 하겠다.

엉거주춤 차량 기지로 돌아가려는 선우에게 말했다.

“뭐해? 이거 들어.”

“저요?”

다시 한번 검을 흔들자 선우는 울상을 짓고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이먼을 일으켜 부축했다.

두 쌍의 날개가 사이먼의 무게를 견디느라 열심히 펄럭댔다.

워낙 거구여서 축 늘어진 사이먼의 발이 땅에 질질 끌리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

처음에 조사를 시작했던 공동으로 돌아가니 대부분의 조사원이 모여 있었다.

모든 선로의 끝은 막혀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끝에 임시 궤도차량이 있었다고 하니까 그쪽에도 다 어디론가 빠지는 길이 있을 것이다.

“어이. 그쪽에서 트랩 밟았다고 안 했어? 길은 발견 못 한 건가?”

간신히 사이먼을 내려놓은 채 숨을 몰아쉬는 선우에게 물었다.

“길요? 선로에 있던 트랩이었습니다만······.”

트랩이 선로에도 설치되어 있었던 건가.

타워 리프트를 타고 위로 올라간 다음, 다른 선로들에도 우리가 발견한 것과 비슷한 통로가 있을 것이란 말을 예공방 직원에게 해주었다.

네오 서울의 하수도는 복잡한 것으로 유명하다.

누군가는 한강의 물을 몽땅 하수도에 넣어도 공간이 남을 거라는 소리를 할 정도.

그런 곳을 이용해 숨어들었으니 리벨리온을 단시간에 찾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정면에서 나를 응시하던 샴록이 떠올랐다.

또 볼 것 같다고 했지.

웃으며 만날 것 같지는 않다.

직감이 그랬다.

“형님!”

보관소를 빠져나오는 도중에 정현이 나를 불렀다.

“아까 아래에서 저 몰래 타이린드 누님이랑 속삭이실 때요.”

걸음을 반보 늦췄다.

이 녀석, 냄새로 감정을 읽는다고 했지.

그렇다면 타이린드와의 대화를 나눌 때 내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아챈 건가?

“번호 물어보신 거죠. 누님이 뭐래요? 오케이? 아님 거절?”

“번호 안 물어봤어.”

“에이, 분위기가 딱 그랬는데. 뭘 부끄러워합니까.”

“진짜야.”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떠봤다.

“그때 타이린드한테서는 어떤 감정을 맡았냐?”

“의혹과 신뢰? 왔다 갔다 하다가 신뢰 쪽으로 기울어지는 냄새?”

“나는?”

정현이 피식 웃었다.

“이 형님 그때 진짜 취하셨나 보네. 말씀드렸잖아요. 형님한테서 냄새가 나긴 나거든요? 근데 어떤 감정도 읽을 수가 없어요. 근데 하나 확실한 건 엄청 진한 냄새가 나요.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뚜렷하게 느껴지는 냄새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저도 잘 몰라요. 근데 그렇게 밖에 설명을 못 하겠어요.”

예상치 못한 말에 잠깐 발걸음을 멈춘 사이, 정현은 서성거리는 키클롭스 아재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뛰어갔다.

정현이 남긴 말을 혀끝으로 굴려봤다.

여전히 완전한 의미를 알기 힘들었다.

“씻고 다니라고 돌려 말한 건가······?”

#

하르파고스는 잘 처리해주어 고맙다는 연락과 함께 지원을 듬뿍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며칠 뒤, 사무실의 내 자리에서 검 손질을 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앨리스가 종종걸음으로 손님맞이를 위해 뛰어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오세요!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드는 해결사 오메가 사무소입니······!”

앨리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우렁찬 목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오메가란 놈이 누구냐!”

고개를 빼꼼 내밀자 하관의 대부분을 가리는 금속제 마스크가 인상적인 초로初老의 건장한 노인이 있었다.

짧게 올려 깎은 머리와 꼬장꼬장한 눈빛이 군인을 연상케 했다.

노인이 자신 앞에 선 앨리스를 향해 말한다.

“네가 오메가냐? 생각했던 것보다는 작은데!”

어떤 생각을 한 건 지는 모르겠지만, 선입견이나 편견은 없는 것 같다.

당황할 법도 한데, 앨리스는 응대용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저는 사무 보조 안드로이드인 앨리스입니다. 사장님은 저쪽에 계십니다.”

공손히 내민 앨리스의 손을 따라 노인의 고개가 내 쪽으로 향했다.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왠지 움찔하게 되는 포스가 있다.

성큼성큼 노인이 내 쪽으로 다가오자, 나는 엉겁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애들 데려다 쓰고 싶다고 했다며?”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대화는 주고받는 캐치볼이라는데 이 노인은 내가 서 있는 반대방향으로 150km 강속구를 뿌리는 듯하다.

맥락을 읽을 수가 없다.

그제야 남자 뒤에서 따라 들어오는 하르파고스가 보였다.

“아이고 마탑주님. 앉아서 얘기하시죠! 앉아서! 오메가님 인사하십쇼. 이쪽은 페룬 마탑의 마탑주님이신 테오릭 경입니다!”

마탑주? 동네 헬스장 가면 죽어라고 덤벨을 들어올리고 있을 것만 같은 이 할배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노인의 가슴팍에 새겨진 페룬 마탑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일전에 봤던 다른 마법사들의 평면적인 문장과는 다르게 마치 금속이 녹아 붉게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

“하르파고스 이사한테 신세 진 게 있으니 갚는 셈치고 애들은 보내주겠다만, 어떤 일 때문에 데려가는지는 알아야겠다.”

왠지 ‘네가 요새 좀 날린다는 놈이라며?’라는 말을 하는 듯한 눈빛.

뒤에서 말리는 척하면서 크게 개입하지 않는 하르파고스.

알겠다.

소개해주는 건 소개해주는 거고, 이 할배 마음에 드는 건 내 몫이라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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