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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캐여도 너보단 강함-9화 (10/258)

009.

009.

예공방 대림 생산기지 3번 보관소.

“진작 이랬어야 했어.”

진오가 고개를 위로 한 채 말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보관소의 바로 아래를 통과하는 폐기된 지하철 차량기지.

무너져내린 보관소의 바닥 잔해가 아직도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서둘러서 올라가! 되는대로 긁어서 내려보내!”

그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뚫린 바닥을 넘어 보관소로 올라가 무기를 아래로 내려보냈다.

“이제 되돌릴 수 없어.”

샴록을 향해 건넨 진오의 말.

샴록은 입술 씹는 것을 멈췄다.

“알고 있어요. 애당초 여기에 안 쓰는 차량기지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도 몇 없어요.”

그중 하나가 셀티스의 신분을 뒤집어쓰고 대림 에어리어 개발부에서 일한 샴록이었다.

필요한 정보를 얻고 이용했으니 직장 정도는 미련 없이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언니가 죽기 직전 보냈던 텔레파시가 샴록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

-나로 살아. 곁에서 진오를 붙잡아줘. 그리고 꼭 이곳을 바꿔줘. 샴록 넌 할 수 있어.

3년 가까이를 그렇게 살았다.

상처받은 사회운동가.

엘프 사회로 돌아가기 좋은 사유였다.

꿈을 잃고, 혈육을 잃은 엘프를 내칠 만큼 종친회는 모질지 않았다.

가끔 과거의 셀티스를 기억하는 이들이 그녀를 만나러 왔었지만, 충격으로 혼란한 척을 했다.

그래야 염동력을 잃은 것에 대한 핑계가 되니까.

하지만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더 타오르기만 했다.

불타는 학교의 모습이 꿈에 등장해서 땀에 흠뻑 젖은 채로 깬 적도 많았다.

결국 샴록은 진오를 찾아가 말했다.

“언니가 살아남은 줄 알았겠죠. 하지만 전 3년간 언니로 살았어요. 언니는 자신이 있어야 당신이 폭주하는 걸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샴록의 문신이 빛나고 있었다.

셀티스와 나이누안이 죽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저는 무장 투쟁을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그 당시 바로 움직이자는 건 아니었어요. 그때의 우린 패기만 있었을 뿐이었으니까요.”

“지금은 뭔가 달라진 것 같나?”

“저도 듣는 게 있어요. 사람을 모으고 있죠?”

진오는 입을 다물었다.

3년간이나 감쪽같이 자신을 속인 샴록이다.

그의 마음에 의심이 피어오르려는 찰나, 샴록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왔다.

“언니가 바라는 길은 이 길이 아닐지도 몰라요.”

샴록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주인의 분노에 공명하듯, 그녀의 문신들이 꿈틀댔다.

“하지만 그런 언니와 나이누안을 누가 알아줬죠? 둘의 장례식에 찾아온 사람들이 몇이나 됐죠? 나도 내 고향을 바꾸고 싶어요. 하지만 언니의 방식은 너무 물러요. 상대방은 힘을 들이미는데 왜 우리는 맞고만 있어야 하는 건가요!”

찢어지듯 쏟아내던 샴록의 말이 차분함을 되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조금은 목소리가 떨리는 채였다.

“속였다고 생각한다면 미안해요. 언니로 사는 게 내게나 진오 당신에게나 좋을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난 순진했어요. 아니, 순진한 척하고 외면했던 걸지도 몰라요.”

무거운 침묵 끝에 진오가 입을 뗐다.

“네 말이 맞아. 난 사람을 모으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꿈꿨던 것의 첫걸음을 위한 장기 말들이지.”

힘이 필요 없어지는 때가 오면 진오는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모인 자들을 버릴 수 있었다.

그런 어중이떠중이 백 명보다 셀티스 한 명이, 나이누안 한 명이 그에게는 더 소중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없다.

친구이자 동지를 앗아간 자들이 누군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렇기에 진오는 숨죽이며 세력을 키웠다.

비로소 머리를 들 때, 그때는 모든 준비가 끝나 있어야 했다.

“다른 준비는요. 사람만 있다고 될 게 아니잖아요. 물자는 어떻게 하고요.”

“예공방의 임원 중 하나와 접촉했어. 대림 에어리어 28구역에 있는 생산기지에서 보관 중인 무기를 지원해줄 거야.”

“얼마나요.”

“매일 밤 학교를 둘러싸고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 적어도 거기 끼어들 정도는 되지.”

“그걸로는 부족해요.”

“부족하다는 말 때문에 행동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조건은요.”

“조건?”

“아무 조건도 없이 예공방에서 지원을 해주진 않을 것 아니에요.”

“예공방의 지원이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예공방의 상무 중 하나지.”

“어쨌든요.”

“첫 번째는 무기들의 실전 사용 데이터, 두 번째는 자기네 대림 생산기지 책임자에 대한 견제.”

“견제요?”

“일 잘하는 이사가 거기 있는데 치고 올라오는 꼴이 아니꼬운 모양이야. 나중에 우리가 그쪽 생산기지의 무기를 쓰고 있다는 게 밝혀지면 관리 책임을 물을 생각인 것 같더군.”

샴록은 머리를 굴렸다.

더 많은 물자를 받아 올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더 크게 키워보죠. 양측 모두가 만족하는 방향으로.”

며칠 뒤, 다시 진오를 찾은 샴록의 품속에는 몰래 반출해 온 대림 에어리어 지하철 노선도가 있었다.

“폐기된 지하철 차량기지가 예공방 생산기지 아래에 있어요. 여길 날리는 건 어떠냐고 제안하세요. 물론 안에 있는 건 우리가 가져가고요.”

#

예공방의 상무는 생각보다 선선히 제안을 수락했다.

한 가지 조건을 덧붙여서 말이다.

‘예공방이면 그래도 이름 좀 날리는 기업인데 거기나 대림이나 복마전인 건 마찬가지인가.’

추가 조건을 되새겨보고 있던 샴록에게 다급한 외침이 날아들었다.

“아래쪽 조심해!”

철근이 삐죽 솟은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샴록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작업을 위해 임시 안전망을 쳐놓았지만, 시간이 급해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이 있었던 것.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샴록의 문신이 조금 빛나려던 찰나, 옆에서 진오가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향해 주먹을 우악스럽게 휘둘렀다.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든 정도의 빠른 주먹이 계속해서 콘크리트를 때렸다.

그의 주먹이 닿을 때마다 덩어리는 분쇄되었고, 진오는 콘크리트를 잘못 밟아 떨어지려던 사람 하나를 제자리로 돌려보낸 다음 샴록의 곁으로 돌아왔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거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니까.”

“미안해요.”

둘은 보관소로 올라갔다.

위는 무기를 아래쪽으로 내리랴, 진입하려는 예공방의 보안 요원들을 막아내랴 아수라장이었다.

예공방 측의 저항도 거셌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봉쇄해둔 입구가 뚫릴 것 같았다.

“이만하면 됐다! 더 욕심내지 말고 철수해!”

진오의 외침에 사람들이 그 즉시 무기에서 손을 뗀 뒤 뚫려버린 바닥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법 많은 양의 무기들이 얼기설기 만들어진 궤도차량에 실려 옮겨지고 있었다.

“다녀올게요.”

샴록의 말에 진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보지.”

샴록은 다른 통로를 이용해 보관소의 밖으로 빠져나갔다.

샴록이 사라지는 걸 본 진오가 보관소의 문으로 다가가 다른 사람들을 옆으로 비켜서게 했다.

“나와.”

그 순간, 플라즈마 용접기가 문과 빗장을 뚫고 푸른 광선을 뱉어냈다.

문이 떨어져 나가자, 강화 외골격을 입은 보안 요원들이 안쪽으로 진입하려 했다.

“모두 손 떼! 이건 모두 예공방의 사유 재산······!”

가장 먼저 들어온 보안요원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진오의 발차기 한 번에 그대로 몸이 반으로 접혀 들어왔던 구멍으로 튕겨 나갔기 때문.

내부의 폭발물 때문에 보안 요원들은 화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는 진오가 우두둑거리며 주먹을 풀더니 들어오는 보안 요원을 차례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강화 외골격들이 거신족 혼혈의 괴력 앞에서 고철이 되어갔다.

그렇게 쌓인 고철이 입구의 구멍을 막을 정도가 되어서야 진오는 뒤돌아서 바닥에 만들어진 거대한 구멍으로 몸을 내던졌다.

#

보관소 밖으로 나온 샴록은 잠시 눈을 감고 집중했다.

저번에 왔을 때 두고 간 자신의 소환수 중 하나를 불러들이기 위함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랜 기간 주인에게서 멀어져 있어 몸이 거의 사라진 개미 몇 마리가 샴록에게 다가왔다.

“어서 와.”

샴록의 손이 닿자, 개미들은 그대로 문신이 되어 샴록의 피부에 새겨졌다.

개미들은 샴록에게 생산기지 내부의 자잘한 길을 알려주었고, 이미 근방의 지하도를 꿰뚫고 있던 샴록은 외부로 빠져나가는 길이 있음을 알아챘다.

‘가능하면 책임자를 죽여도 좋다. 아수라족이니 구분에 어려움도 없을 것.’

예공방의 상무가 내걸었다는 마지막 조건을 다시 한번 확인한 샴록이 모자를 꺼내어 쓴 뒤 습관처럼 셔츠 깃을 올려세웠다.

소환수를 사용해 사람을 죽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진오의 말처럼 그만두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다시 한번 자신을 다잡으며 샴록이 움직였다.

#

“이쪽입니다! 이사님!”

앞에서 보안 요원이 소리쳤다.

예공방 대림 생산기지의 책임자인 하르파고스는 잠시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봤다.

이제 화염 기둥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소음은 계속되고 있었다.

강화 외골격을 장착한 보안 요원들이 갔으니 금방 진압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어떤 미친놈들이!’

방산업체의 물건을 노리는 놈들은 많지만 적어도 시장에 풀린 이후의 것을 노리지, 이렇게 공장을 습격하는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분명 내통자가 있다.’

자신도 모르게 반출된 무기,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무기의 수령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한 생산기지 습격까지.

설계된 판 위에서 자신만 발을 굴러대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나마 오메가라는 인물과 연이 닿아서 이 정도까지 알게 된 것이지, 그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당하고만 있었을 것이다.

일단은 빠져나간 뒤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야겠다고 생각하며 하르파고스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 와중에 가슴에 품고 나온 몇 자루의 검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제법 먼 거리를 이동한 뒤, 보안 요원이 허름한 해치hatch형 출입구를 가리켰다.

“외부로 나갈 수 있는 VIP 통로입니다. 이쪽의 홈에 이사님의 출입 카드를 긁으면······!”

하르파고스가 건넨 카드를 손에 쥔 보안 요원의 표정이 공포로 굳었다.

예공방 내부에서는 근본 없는 놈이라고 욕을 먹지만, 하르파고스는 도시 간 분쟁에 몇 번이나 참여한 적 있는 베테랑 용병 출신.

위기에는 몸이 먼저 반응했다.

하르파고스는 즉시 몸을 뒤로 돌린 뒤 검을 뽑아 휘둘렀다.

그의 손에 들린 여섯 개의 검이 허공을 거닐었다.

순간, 속도를 줄이지 않고 하르파고스를 뒤에서 덮치려 들던 괴수는 그에게 채 닿지 못한 채로 검은 잉크가 되어 흩어졌다.

“아수라족이라는 말만 들었지, 검을 쓴다고는 못 들었는데요.”

몸의 문신을 빛내는 엘프.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문신들이 속속 괴수로 변해 꿈틀대고 있었다.

하르파고스는 직감했다.

“그쪽이 샴록인가?”

의외의 인물에게서 자신의 이름을 듣게 된 샴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걸 알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별거 없을 겁니다.”

이번에는 날개 달린 괴수가 하르파고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을 잡은 하르파고스의 여섯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검 두 개를 사용해서 방어한 뒤, 남은 넷으로 단번에 숨통을 꿰뚫는다.’

수집한 명검에 피가 묻는 것이 영 거슬리는 하르파고스였지만 별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두 개의 검이 괴수를 향하던 찰나, 괴수는 날개를 한 번 펄럭이더니 하르파고스를 훌쩍 뛰어넘었다.

콰직-

괴수에게 목을 물린 보안 요원이 단숨에 숨을 거두었다.

괴수는 바닥에 떨어진 하르파고스의 출입 카드를 물고 와서 샴록에게 건넸다.

“대림 에어리어의 발전을 위해 죽는다고 생각해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샴록의 곁에는 덩치가 소형 자동차 정도 되는 괴수 다섯 마리가 으르렁대고 있었다.

“쉽게 죽어줄 생각은 없다. 적어도 날 이 꼴로 몰아붙인 놈의 얼굴은 보고 죽어야지.”

하르파고스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비록 용병 시절 쓰던 ‘자가 동력 헤비 멜팅 건’이 아닌 건 아쉽지만, 그동안 책과 영상을 통해 익힌 검술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챌 때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때, 제3의 인물이 현장에 난입했다.

“저는 호위 의뢰도 받습니다. 상황이 급하신 것 같은데, 긴급 의뢰는 추가 보상이나 추가 요금이 책정될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쪽으로 눈을 돌린 샴록과 하르파고스가 동시에 외쳤다.

둘 다 놀랍다는 목소리였지만 한 명은 짜증이, 다른 한 명은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

“오메가!”

#

“의뢰하겠습니다!”

하르파고스의 외침.

“보상은 추후 협의하도록 하죠.”

생각해 둔 게 있긴 한데, 협상의 장은 아닌 것 같아서 일단 미뤘다.

괴수 하나의 공격을 피하며 하르파고스의 옆으로 붙었다.

“어떻게 찾은 겁니까?”

“그냥 뭐······직감이랄까요.”

신기하다는 듯 물어보는 하르파고스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혹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저 엘프의 모자에 '체취 남기기' 스킬을 사용했어요.’ 라고 하기에는 너무 추해 보여서.

예쁜 엘프와 운명적 재회를 꿈꾸는 건 죄가 아니잖아.

만일 하나 스쳐 지나갈까 봐 알아볼 수 있게 내 주변에 다가오면 알아챌 수 있는 스킬을 남겨뒀다.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 스킬이고, 사용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보관소 주변을 돌아보는 중에 내 체취가 느껴져서 따라왔다.

다만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나와 저 엘프가 만난 타이밍과 장소가 최악이라는 것.

그리고 체취 남기기를 쓸 때는 몰랐지.

이렇게 과격하고 폭력적인 엘프일 줄은.

“옵니다!”

하르파고스의 외침.

하늘에서 발톱을 세워 나를 찍어 내리려는 괴수가 보인다.

곧바로 칼자루를 연속으로 비틀어 검을 완전 전개했다.

의뢰를 받았으니 일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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