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008.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의 왼팔에 보이는 조잡한 인공 의수가 시선을 먼저 사로잡았다.
의수와 신체의 경계면에는 고름이 조금 배어있는 붕대가 둘둘 말려있었다.
“이 문신을 목에 그린 엘프 여인을 찾고 있습니다. 그 엘프 이름이 샴록입니까?”
내 말에 여인은 반발짝 정도 뒤로 물러섰다.
당혹스러워 보이는 표정.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달아날 것 같았다.
두 손을 펴서 내게 공격 의사가 없음을 보였다.
“얘기를 좀 나누고 싶습니다. 괜찮겠습니까.”
그러는 사이 마침내 해는 가느다란 빛줄기만을 남기고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이쪽 에어리어 사람인가요?”
“오메가라 합니다. 해결사고요. 23구역에 사무실이 있어요.”
해가 지기 무섭게 거리에서 사람의 자취가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여인도 연신 이곳저곳을 경계하기 바빴다.
멀리서 사람 여럿이 북적대는 소리가 들렸다.
간헐적으로 무언가 터지는 소리, 그에 호응하듯 욕설이 터져 나오는 소리가 여과 없이 들렸다.
지배하는 세력이 없다더니 내려앉는 어둠을 신호로 세력들 간의 힘싸움이 시작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곳에서 목에 문신이 있는 엘프가 목격된다는 말이 돌아서 찾아 온 겁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5명 정도의 인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통일된 복장을 본 나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마법사?’
등 뒤로 길게 내려온 망토와 흉장에 새겨진 소속 마탑의 문장紋章.
분명히 마법사들의 복식이었다.
‘대림 에어리어에 마탑은 없을 건데?’
이쪽 세계에는 마법의 다양한 분파가 존재한다.
그에 따라 여러 계열의 마법이 번성하고 있으며 마법사들은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마탑에 소속되어 움직인다.
외부 활동을 하는 마법사들도 많지만 많은 수의 마법사들은 마탑에서 연구와 정진에 힘쓴다.
게다가 마법사 하나하나가 귀중한 자원이기 때문에 위험한 곳에는 큰일이 아니고서는 잘 보내지 않는다 들었다.
위험한 걸로는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둘째라면 서러울 대림 에어리어에서 마법사를 다섯이나 보게 될 줄이야.
마법사 중 하나가 나와 여인을 포착한 듯 싶었다.
“먼저 접근한 놈이 있다! 폐교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선두에 서 있던 마법사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수인을 맺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대량의 물이 터져 나오더니 곧 얼어붙은 새의 형상을 이루어 날아왔다.
물이 없는 곳에서 이 정도의 빙결계 마법을?
아니, 그 이전에 다짜고짜 마법을 갈겨대?
여인은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몸이 굳었는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고속이동 스킬로 여인의 앞으로 이동했다.
허리춤의 칼자루를 뽑기에는 시간이 좀 모자랄 것 같았다.
두 손을 앞으로 뻗어 손가락으로 삼각형을 만든 뒤 숨을 밀어 넣었다.
삼각형을 통과한 숨이 불길의 벽으로 바뀌어 내 앞을 막았다.
[플람 수플레flamme soufflé]
‘불어넣은 불’이라는 뜻을 가진 화염계 마법 스킬.
내 호흡이 지속되는 한 불의 벽은 꺼지지 않는다.
불길의 벽에 충돌한 얼음 새가 거대한 증기를 터트리며 녹아내렸다.
마법사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화염계 마법! 불칸의 머저리인가!”
“푸에고일지도! 찾아라! 화염계 놈들에게 나이누안의 유품을 빼앗길 수는 없다!”
수증기 속에서, 불어넣던 숨을 멈추고 굳어버린 여인의 손목을 낚아챘다.
“엉망이라고 얘기는 듣고 왔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일단 다른 곳으로 가죠. 얘기를 나눌만한 곳이 있을까요?”
여인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거리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많이 놀랐는지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엎어지길래 어깨 위에 여인을 들쳐 올렸다.
“상황이 급하니까 이해 좀 해줘요. 어디로 갈까요.”
여인은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그 사이, 다른 마법사들이 합류했는지 뒤쪽에서 마법들이 연신 터져나왔다.
얼핏 보기에 주로 화염계와 빙결계 마법들이 많아 보였다.
이외에도 연원을 알기 힘든 마법, 폭탄, 총탄, 심지어 기파까지.
서로가 폐교에 접근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
엘프를 찾으러 왔다가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여기요.”
어깨에 올려놨던 여인의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다 무너져 가는 집이었다.
이제 얘기를 좀 들을 수 있겠네.
#
안쪽으로 안내받은 나는 먼저 손목시계를 만져 엘프의 3D 몽타주를 보여주었다.
“맞아요. 샴록 선생님이에요.”
“폐교와 관련된 사람인가요.”
“네. 5년 전, 학교를 세운 사람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네 명 중 한 사람이죠.”
“네 명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선생님을 찾아다녔던 건가요?”
알았으면 이러고 있겠냐고.
적당히 거짓말을 했다.
“이 사람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네? 찾아달라고요? 샴록 선생님은 2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일단 하나 하나 확인했다.
“이 몽타주에 있는 사람, 맞습니까.”
“네. 맞아요.”
“문신이 목까지 있는 것도 맞습니까.”
“네. 그것도 맞아요.”
“미안하지만 저는 이 엘프를 얼마 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나를 향해 적개심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말씀을 가려서 해주세요. 샴록 선생님은 분명 돌아가셨어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샴록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어요. 저도 목숨은 건졌지만······.”
여인의 시선이 자신의 의수에 머물렀다.
나는 생각했다.
엘프의 문신이 위장이었을까?
내 시선이 닿았을 때, 그녀는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을 보인 것처럼 문신을 감추려 했다.
위장과 연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
문신을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었을까?
일단 더 이상 엘프 이야기를 꺼내는 건 나에 대한 여자의 적대감을 높이는 행위 밖에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저는 제 소개를 한 것 같은데, 아직 그쪽 이름은 듣지 못한 것 같네요.”
“가브리엘라요.”
“좋아요, 가브리엘라. 서로 얘기가 엇나가고 있으니······.”
가브리엘라가 내 말을 끊었다.
“아까 벽에 그리던 그림, 어디서 봤나요. 왜 그걸 학교 담벼락에 그리고 있었죠?”
“말씀드렸던 그대로입니다. 저는 당신이 샴록이라 부르는 엘프를 한 번 본 적 있고, 이후에 엘프를 찾아줬으면 한다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쪽에서 목격된다는 정보를 받아서 방문했고, 혹시나 문신을 아는 사람이 보면 흔적을 남길 거라는 생각에 그렇게 했던 겁니다. 궁금한 부분이 좀 해소가 되셨나요?”
“선생님을 언제 보셨죠?”
“며칠 안 됐습니다.”
“거짓말.”
“제가 그쪽한테 거짓말을 해서 얻는 게 뭡니까. 일단 이 부분은 넘어가죠. 서로의 불신만 키우고 있어요.”
“좋아요. 목격된다는 건 아마도 학교에 남은 마법의 흔적 때문일거예요. 밤이 되면 샴록 선생님의 생전 모습이 나타날 때가 있거든요.”
“학교 얘기도 좀 듣고 싶군요. 아까보니 마법사들이 다른 사람들이 안쪽으로 진입하려는 걸 기를 쓰고 막으려고 하던데, 안에 뭐가 있는 겁니까?”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네요.”
가브리엘라는 자신이 샴록을 비롯한 네 명이 세웠던 학교의 학생이었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법 복잡하고, 동시에 흥미롭고, 하지만 비극적인 이야기였다.
#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보죠.”
하르파고스의 말이었다.
여전히 삼면이 검으로 가득한 장식장이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나는 가브리엘라에게 들은 내용을 토대로 경과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 네 명, 이름이 뭐라고요?”
“진오, 샴록, 셀티스, 나이누안요. 진오는 거신족 혼혈, 샴록과 셀티스는 엘프 쌍둥이, 나이누안은 늑대인간이라고 하더군요. 대림 에어리어를 바꾸려는 사회운동가 정도로 설명하면 될 것 같습니다.”
“5년 전이면 제가 대림 에어리어에 있을 때는 아니지만 어디선가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청년들 넷이 망가져 가는 대림 에어리어를 바꾸기 위해 나섰다던······.”
넷은 모두 대림 에어리어 출신이라고 한다.
다만 진오와 나이누안은 대림 에어리어에서도 최외곽인 30번대 구역 출신이고 샴록과 셀티스, 엘프 쌍둥이는 구 여의도인 2구역 출신.
“넷은 26구역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이끌었다고 합니다. 학교를 세우고, 책을 들여오고, 사람들의 노동이 제값을 받게 하기 위해 애썼다는군요.”
이들은 의도는 순수했다.
망가져 가는, 어쩌면 이미 망가진 고향을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바꿔보려는 몸부림.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선의로 하는 일들도 고깝게 보기 마련이었다.
“주위의 조직들은 당연히 반기지 않았습니다. 망가진 교육과 노동 체계야말로 신입 조직원들을 끊임없이 보급해주는 화수분이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들도 위협만 가할 뿐, 함부로 하지는 못했다. 일단은 넷 중 하나가 거신족 혼혈이라······. 매우 드문 핏줄이군요. 저희 아수라들도 거신족과의 완력 싸움에서는 승부를 장담하기 힘듭니다.”
하르파고스의 말에 따르면 아수라라는 종족은 웬만한 무기로는 상처조차 내기 힘들다고 한다.
실제로 격투나 용병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다는 부연 설명도 있었다.
그런 종족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거신족이라······.
하르파고스의 말에 내가 조금 덧붙여주었다.
“진오도 진오지만 진짜 전력은 나이누안이었다고 하더군요. 인간 모습일 때는 화염계 마법을, 늑대인간일 때는 빙결계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그 사이 나쁘다는 화염계 마탑과 빙결계 마탑이 나이누안은 자기네 제자라며 서로 주장했을 정도니 비슷한 또래의 마법사 중에서 재능은 발군이었던 듯싶다.
“샴록은 소환술사, 셀티스는 염력술사였으니 사회운동을 하는 것치고는 대단한 구성이긴 했을 겁니다.”
일은 진오와 셀티스가 자리를 비웠을 때 벌어졌다.
아이들이 있는 학교에 무장한 인원들이 들이닥친 것.
“진오와 셀티스가 돌아왔을 때 학교는 이미 불바다였다고 합니다. 아직도 배후는 누구인지 모르고요. 진오가 뛰어들었으나 이미 늦었답니다. 화상만 입었다죠.”
“남아 있던 인원들은······?”
“아이 몇을 빼고는 모두 죽었다 합니다. 샴록과 나이누안 모두요. 샴록의 경우는 열기 때문에 피부가 다 타버렸답니다. 나이누안은 마나 하트가 과부하 될 때까지 마법을 써대서 아직도 근처에 그때의 여파가 나타난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아직도 학교 안 어딘가에 나이누안의 마나 하트가 남아 있단다.
그 마나 하트를 회수하려고 여러 마탑들이 마법사들을 폐교로 파견하는 것.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들과 힘의 공백이 생긴 26구역을 접수하려는 여러 조직들의 난전 양상 때문에 26구역은 여전히 혼란하다.
네 명이 26구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5년 전, 학교가 불탄 것이 3년 전인데도 말이다.
“이후 진오는 모습을 감췄고 셀티스는 2구역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지금 셀티스는 네오 서울 시청에서 대림 에어리어 개발 부서에 있다더군요.”
“흥미롭군요.”
“진짜 흥미로운 부분은 이제 시작입니다.”
앞에 놓인 물을 한 잔 마셨다.
“이 정보는 모두 당시 습격받은 학교에서 살아남은 사람에게서 들은 겁니다. 그 말인 즉슨, 이 아이는 진오, 샴록, 셀티스, 나이누안 모두를 알고 있다는 말이겠죠.”
가브리엘라가 했던 말이 생생했다.
“샴록과 셀티스. 쌍둥이 자매를 구분하는 방법은 문신이었습니다.”
“쌍둥이라면 같은 일족일 테니 똑같은 일족 문신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르파고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샴록은 소환술의 매개로 문신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제외한 전신에 문신이 있었답니다. 턱 바로 아래까지요.”
“샴록이 학교에서 죽었다는 엘프지요?”
“네. 일단은 그렇죠.”
“일단은?”
하르파고스에게 내가 저번에 예공방에 왔을 때 엘프를 마주쳤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목까지 문신이 있었으며, 감추려는 행동이 마치 들켜선 안 되는 걸 들킨 것 같은 모습이었다라는 것을.
“그렇다면 그때 죽은 엘프가 셀티스고 살아남은 엘프가 샴록?”
“어디까지나 가설입니다.”
“하지만 그렇게나 정체를 숨길 이유가 있던 겁니까?”
그래.
나도 가졌던 의문이다.
죽음은 안타깝지만, 왜 서로의 신분을 바꿔가며 죽어야 했나.
“여기서부터는 셀티스가 죽고 샴록이 살아남았다는 가설 하에 해보는 추측의 영역입니다.”
“들어보겠습니다.”
“증언에 따르면, 넷은 대림 에어리어를 바꾸자는 목표는 같았지만 의견이 좀 갈렸다고 합니다. 진오와 샴록은 무장 투쟁에 찬성하는 쪽, 셀티스와 나이누안은 반대했다고 합니다.”
“고민되는 주제군요. 폭력은 다른 폭력을 낳지만······맨몸으로 바꿔가기에 이곳은 너무 거칠어요.”
“그런 상황에서 셀티스와 나이누안이 죽습니다. 강경파인 진오와 샴록만이 남았죠. 셀티스와 나이누안은 자신들의 죽음이 또다른 피를 부르기를 원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가브리엘라는 내게 말했다.
진오는 굉장히 다혈질이었다고.
친구들의 죽음은 거신족 혼혈의 내재된 힘을 폭발시킬 가능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설령 무장 투쟁을 동반한다 하더라도 그들을 지지할 세력은 없다.
그저 개인의 일탈로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셀티스는 죽음을 예감한 순간, 샴록에게 자신인 척해서 진오를 진정시킬 것을 부탁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어떻게요. 셀티스는 학교 안에 있었지 않습니까. 샴록은 밖에 있었고요.”
나는 손가락을 들어 머리를 톡톡 쳤다.
“셀티스는 염력술사였습니다. 염력의 가장 대표적인 기술이 뭔 줄 아십니까?”
“텔레파시!”
“게다가 텔레파시는 형제자매 간에 더 쉽게 통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쌍둥이일 경우는 더더욱요.”
실제로 셀티스가 눈을 감은 채 멀리 있는 샴록을 불러내곤 했다는 가브리엘라의 증언도 있었다.
한가지의 추측을 덧붙였다.
“그리고 엘프 사회로의 복귀도 강경파였던 샴록보다는 온건파였던 셀티스의 이름을 쓰는 편이 좋았을 겁니다.”
그럴듯하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던 하르파고스가 내게 의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저희에게서 무기를 받아 갈 때는 문신을 가리지 않은 걸까요? 셀티스인 척을 그만두기라도 한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왜요?”
조금은 어렵게 입을 뗐다.
“단순히 실수로 노출한 것을 배제한다면 제 생각은 세 가지입니다. 더 이상 셀티스의 가면으로도 진오를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두 번째는 샴록 스스로 온건파 놀이가 질렸다는 거죠.”
“······마지막은······?”
“앞서 말씀드렸던 두 가지가 모두 해당되는 경우겠죠.”
하르파고스가 네 개의 팔로 두 개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직 감싸 쥐지 않은 머리로는 내게 말을 걸었다.
“해결사 님의 추측을 토대로 한다면, 동지를 잃은 강경파 사회운동가가 대량의 무기를 가져간 겁니다. 게다가 지금 신분은 대림 에어리어 개발 부서에 근무 중인 엘프. 대림 에어리어의 난개발이 불러온 하수도와 지하도를 파악할 수 있는 위치란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가정과 추측에 크게 기대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두셨으면 좋겠군요.”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대량의 무기가 그쪽으로 반출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건 아마도 상무인······.”
“잠시만요.”
더 위험한 말이 하르파고스의 입에서 튀어나오기 전, 나는 그를 막아세웠다.
내 의뢰는 여기까지다.
방산기업 내부의 권력투쟁에 끼는 건 사절이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회색을 지향합니다.”
아쉽다는 하르파고스의 눈빛이 느껴졌다.
“확실하시군요.”
“워낙 위험한 동네에서 일을 하니, 저라도 확실해야죠.”
“마음에 듭니다. 혹시 다른 의뢰도 하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빙긋 웃었다.
앨리스에게 뺨을 찔려가며 배운 영업용 미소였다.
“의뢰는 일전에 알려드린 사무실로 문의 주시면 검토 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해결사 오메가였습니다.”
술술 나오는 멘트를 듣던 하르파고스는 조금 전의 고민 가득한 표정을 뒤로하고 껄껄 웃은 뒤, 일전의 티셔츠를 내게 가지고 왔다.
그리고 장식장 한켠에 걸어놓고는 옆구리에서 권총 하나와 탄창 두 개를 빼서 내게 건네는 것이 아닌가.
“확인해보시죠.”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라고 하면서 권총을 들어 티셔츠를 향해 난사했다.
물건 인수인계는 확실해야 하니까.
조준보정 반동제어 신속장전 등의 스킬들이 발동되며 두 탄창을 모두 티셔츠에 꽂아 넣었다.
저번처럼 티셔츠는 올 하나 찢어지지 않았다.
“사격도 일가견이 있으시군요.”
스킬의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손이 조금 얼얼했지만 담담하게 말했다.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손맛이 없어서요. 모름지기 무기는······.”
손끝으로 허리춤의 칼자루를 톡톡 두드렸다.
하르파고스는 내 말과 행동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 보였다.
입던 옷을 벗고 티셔츠를 걸친 뒤, 그 위에 입고 왔던 옷을 다시 입었다.
입은 듯 안 입은 듯 움직임에 전혀 제약이 없었다.
공기와 같은 이 촉감.
“좋은 분께 드리게 되어 저도 기분이 좋군요.”
“감사히 받았습니다. 혹시 이게 절 구하는 일이 있다면 예공방 제품이라고 주위에 팍팍 알리겠습니다.”
“어후, 광고비라도 드려야 하는 거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너스레를 떨던 하르파고스는 내가 방을 나서기 직전,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조언을 구해도 되겠습니까.”
내키지는 않지만, 좋은 방어구를 받은 김에 선심 쓰기로 했다.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대림 에어리어 출신이 아니라 묻는 부분입니다만······.”
하르파고스는 조심히 말을 골랐다.
“넘어간 무기, 어디에 쓰일 것 같습니까.”
천천히 심호흡을 한 뒤에 하르파고스에게 말해주었다.
“힘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힘이 없을 때 이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막상 힘이 생기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그런 사람들 서리얼에서 많이 봤다.
자기가 뉴비일 때는
‘고인물 새끼들 자기들끼리 카르텔 만들어서 뉴비 배척하는 거 개 역겨움.’
이런 말 하더니 막상 자기가 도움 줄 수 있는 자리가 되면 어떻게든 뉴비 밟고 고인물들 사이에 끼어보려고 아등바등하는 놈들.
“더 큰 힘을 원하더군요.”
꼭 적합한 예시는 아닐지라도, 힘을 가진 사람이 나아갈 방향을 예측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서리얼에서의 힘은 현실에 통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하르파고스와 내가 말하는 힘은 무력武力.
무력은 더 큰 무력을 탐한다.
복잡한 표정의 하르파고스를 뒤로 한 채, 그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예공방 생산기지를 벗어나기 직전, 뒤쪽에서 거대한 폭음이 터지고, 화염 기둥이 치솟았다.
혼비백산 뛰어다니는 보안요원 하나를 붙잡고 다그쳤다.
“무슨 일입니까!”
말하지 않으려 하길래 이사 직인이 찍힌 방문증을 들이밀었다.
“책임자인 하르파고스 이사님과의 약속 때문에 와 있는 겁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보안 요원의 입이 떠듬거리며 열렸다.
“무기 보관소 중 하나가 습격당했습니다. 지하에서의 침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위험하니 피하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