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004.
솔직히 털어놓자면, 이 몸의 전주인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마주했다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듯싶다.
거칠기 짝이 없는 곳에 차린 해결사 사무소로도 모자라서 첫 임무에서 낙상, 그리고 혼수상태.
꽤나 대책 없이 살아온 인간 부류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하나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다.
손에 잡혀서 웅웅거리는 낮은 진동음을 내는 이 검을 주요 무장으로 썼다는 점이다.
형태와 무게, 실용성, 무엇보다 간지까지.
마스터피스라는 말은 이런 물건에게 붙이라고 있는 말일 것이다.
앨리스에게 사용 방법을 들은 뒤에 건물 옥상에 올라 검을 완전 전개했을 때, 심장이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가장 좋아하는 밴드곡의 드럼 도입부를 들었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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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끼······. 어디 조직에서 보낸 놈이야. 설마 공공 집행자냐?”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는 토끼.
몸이 90도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지면이 서 있고 토끼가 그 위에 발을 딛고 있다고 하면 설명이 되려나.
이건 내가 지금 건물의 벽면에 붙어 있는 채로 놈을 보고 있어서 그렇다.
‘일시 접착’ 스킬을 응용한 기술.
약이 잔뜩 오른 토끼가 다시 한번 나를 향해 쇄도한다.
벽에 붙어 있는 그 상태에서 ‘유연해지기’를 이용해 허리를 뒤로 눕혔다.
그러자 굉장한 기세로 녀석의 발끝이 내 코끝을 스쳐 갔다.
재빨리 검을 휘둘러 베어냈다.
묵직한 감각이 앞서고 토끼의 흰 털이 뒤따라 공중에 휘날린다.
털보다 더 깊은 곳에 있어야 했던 녀석의 피가 튀며 털을 붉게 물들였다.
“크윽······!”
이미 몇 번이나 내가 새겨준 비슷한 고통 탓일까, 토끼의 신음이 애처롭다.
나풀거려야 할 털들이 젖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질 즈음, 나 역시도 벽이 아니라 원래의 지면에 발을 딛고 섰다.
몇 번의 공방이 만들어낸 풍경이 자못 처참하다.
뒷골목은 터진 쓰레기봉투와 무너져내린 담벽으로 엉망이었고, 토끼의 부하들은 정신을 잃은 채로 그 사이사이에 박혀있었다.
“흔한 뒷골목 풍경이군. 안 그래?”
검을 휘둘러 칼등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물었다.
처참함은 이 동네의 기본 배경이니까.
토끼의 몸 이곳저곳이 붉게 물든 모습이 보였다.
그에 반해 나는 생채기 하나 없으니 누가 우위인지는 분명했다.
토끼도 그걸 직감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공격적인 자세를 거두었다.
“얘기를 좀 하고 싶다.”
검을 수납하지 않은 채로, 반문했다.
“얘기? 내가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토끼의 목소리가 급해진다.
“잘 모르나 본데, 내가 네오 서울에 와 있는 건 일이 좀 안 풀렸기 때문이야. 한신나 쪽의 사정이 정리되면 재기하는 건 어렵지 않아. 그쪽에서는 나름 이름 날린단 소리다. 이대로 날 놔주면 두둑이 사례하마. 이 몸, 이바르타나. 은혜는 잊지 않는다.”
“범죄자가 은혜 어쩌고 하니까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네. 돈 빌려준 은혜도 모르는 새끼가 사례를 잘도 하겠다.”
“그렇담······.”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토끼는 몸을 웅크렸다.
녀석의 강화 의족에 달린 유압 펌프의 움직임이 거세졌다.
“죽어!”
이제까지와는 다른 속도.
비장의 수를 남겨두고 있었던 건가.
바꿔치기나 유연해지기를 사용하기도 전에 놈의 발끝이 바람을 가르며 내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찰나 간의 판단과 움직임이 승부를 가른다.
허리와 어깨를 옆으로 틀어 일부러 균형을 무너트렸다.
가슴팍이 시큰하다.
놈의 다리에서 뻗어 나온 날카로운 칼날이 가슴에 스쳤다.
그렇게나 베이면서도 끝까지 마지막 발톱을 숨긴 건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서로가 칭찬을 주고 받을만한 사이가 아닌 건 나도 알고, 토끼도 알고 있다.
그리고 숨긴 발톱은 내게도 있다.
균형을 잃고 무너지는 불안정한 자세에서 몸을 틀어 바로 세웠다.
그리고 일체의 망설임 없이 검을 움직였다.
마치 모든 것이 멈춘 세계에서 내 손에 들려 있는 검만이 자유로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빛으로 이루어진 검날이 아무런 저항 없이 놈의 강화 의족 한쪽을 깔끔하게 절단했다.
이번에는 붉은 피뿐만 아니라 거뭇한 기름도 함께 튀었다.
잘린 의족이 몇 번 회전하며 그것들을 흩뿌리다 바닥에 떨어졌다.
토끼는 고통이 가득한 비명을 골목 가득 내질렀다.
“이게······이게 얼마짜리인데! 이 쓰레기! 쳐죽인다! 절대로 쳐 죽일 거라고!”
그 바람에 몇몇이 골목을 들여다봤으나, 이내 익숙한 일이라는 듯 재빨리 몸을 돌려 가던 길을 재촉했다.
남은 한쪽 다리로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는 토끼를 넘어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갚는다는 은혜보다는 목에 걸린 액수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입금될 것 같더라고.”
검을 수납한 뒤, 주머니에서 작은 공 같은 기기를 꺼내 악을 쓰는 토끼의 입에 물렸다.
철커덕하는 소리와 함께 작동음이 들리고, 작은 공에서 조각들이 뻗어 나와 토끼의 입을 막고 눈을 가린 뒤 마지막으로는 등 뒤로 진행되어 양손을 결박시켰다.
구속 장치인 어레스트arrest, 그중에서도 인간형 신체 버전이다.
일단 상황이 종료된 걸 확인한 나는 귀걸이를 만져 통화 모드로 변경해 앨리스와 연결했다.
[통화 모드가 아니라 서포팅 모드로 전환하면 따로 전화 걸 필요 없이 바로 연결된다니까요, 사장님]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49시간 32분가량 전에 제가 말씀드렸거든요? 어휴. 좋은 기능이 있으면 뭐 해요. 쓰질 못하는데.]
어째 앨리스의 잔소리가 갈수록 늘어나는 것 같아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상황 종료야. 대상 확보했어.”
[벌써요?]
“일이 그렇게 됐어. 운이 좋았지 뭐. 이 의뢰 넣었던 업자 사무실이 어딘지 좀 알려줄래? 바로 가져다주게.”
[잠시만요.]
앨리스가 패널을 두드리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내게 되물었다.
[사장님 혹시 거기 구역이 어떻게 돼요?]
“우리 사무실에서 별로 안 멀어. 19-G. 왜?”
[19-G······19-G. 여기 있······.]
앨리스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실렸다.
[거기 무슨 일 있어요? 통제 예정이라고 떠요.]
“통제? 별일 없었는데?”
장담하는데 내가 토끼 패거리를 때려눕힌 건 별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통제는 적어도 한 조직이 다른 조직을 조지려고 화기나 그에 상응하는 유기체를 동원해서 건물이 몇 개 날아가거나 해야 발동되는 조치다.
의문을 느끼며 앨리스에게 물었다.
“통제 등급이 어떻게 돼?”
[레벨 7요.]
앞서 설명했던 조직 간의 항쟁 시 발동하는 통제 등급이 레벨 9, 가장 낮은 수치다.
숫자가 작아질수록 위험해져서 0에 이르면 도시 전복 위험이나 도시 간 전쟁 발발이라나.
대림 에어리어는 워낙 흉험한 곳이라 외곽지역이라면 레벨 9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발생하는 곳이었고, 레벨 8도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발동되곤 했다.
그런 이곳에서도 처음 겪는 레벨 7.
‘레벨 7이 발동될 일이 뭐지? 어디서 마약 공장이라도 폭발했나?’
너무나 끔찍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나는 이미 이 구역에 제법 잘 녹아든 것이 분명했다.
이게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 건지······.
“일단 빨리 나갈 테니까 업자 주소나 알려줘.”
넘겨주기 전에 머리에 꽃을 피우는 건 괜찮겠지?, 주머니에 씨앗을 가져왔던가 하는 생각이 이어질 즈음.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귀걸이를 조작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마치 누군가 통신을 방해하기라도 한 듯, 완벽한 먹통.
몇 번의 구역통제를 경험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일단 나가자고.”
잘려서 나뒹굴던 놈의 의족을 챙겼다.
통제가 발동되면 인근의 사설 집행자들이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하고 몰려든다.
그 녀석들에게 다리 한쪽이 잘린 채 구속된 범죄자는 좋은 먹잇감일 것이다.
다 차려진 밥상을 남의 입에 밀어 넣어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토끼에게 다가서려는데, 누군가 골목 입구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좀 늦은 모양이군.”
새치 희끗한 머리, 하와이안 셔츠와 반바지, 질질 끄는 슬리퍼.
누가 보면 적도 근처로 휴양이라도 온 모습.
길게 드리운 다크서클과 충혈된 눈, 푸석한 피부.
갑자기 등장한 중년의 모습은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에 혼자만 유화 물감으로 그려진 것처럼.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가 칼자루를 꺼내 조작했다.
검이 빠르게 완전 전개하며 다시 한번 빛으로 이뤄진 날을 드러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앨리스와의 통신이 두절된 직후 모습을 드러낸 남자.
아무리 정신없는 전투 직후라지만 접근하는 기척까지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중년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고인물도살자의 본능이 강렬하게 외친다.
이 남자는 진짜라고.
“당신, 누구야.”
남자는 내 말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검을 쓰나 보지? 요새 드문 친구군.”
남자의 눈에 인공적인 빛이 맺혔다 사라졌다.
“조회 결과가 없는 걸 보면, 현직 집행자는 아닌가본데.”
내 정보를 조회해 본 모양.
대뜸 집행자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이 아저씨도 집행자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집행자인 것 같은데, 그 토끼 내가 잡은 겁니다. 못 줘요.”
그러자 남자의 표정이 아주 미묘해졌다.
“날······모르나?”
어이없네.
누군데 나보고 자길 아네마네야.
기억에 있는 얼굴은 아니다.
연예인 병인가?
아니면 혹시······.
“혹시 우리 2개월보다 더 예전에 만났나요?”
“······.”
“제가 모종의 일로 기억을 잃어서요. 기억 못 하는 거면 미안합니다.”
“아닐세······. 그러면 혹시 위타천이라는 집행자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위타천······위타천······.
들었던 것 같다.
키클롭스 아저씨가 떠들던 내용에 있던 것 같은데?
공공 집행자 중에서도 네오 서울 시청과 직접 계약한 다섯 집행자.
사실상 네오 서울이 동원할 수 있는 양지 무력의 최대치라고 봐도 좋다던 키클롭스 아저씨의 말이 생각난다.
그중에서 사시사철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다니는 새치 중년······.
“어?!”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짜증이 묻어나는 표정을 짓고 있던 중년 남자의 얼굴에 안도감이 퍼져나갔다.
‘설마 했다.’ 하는 감정이 그대로 번져왔다.
“그래.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내가 위타천이라는 이명이 있는 집행자라네.”
“들어본 것 같네요.”
그러더니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론부터 말하지. 자넨 네오 서울과 한신나의 공공 집행자들이 오래 준비했던 추적 수사를 망쳤어.”
“에?”
“이 토끼 뒤에 숨은 거물이 드러나야 했는데, 자네가 이 꼴을 내놓은 덕에 더 그 거물이 더 깊게 숨어들 거라는 얘기지.”
했던 짓을 되짚어보면 저 토끼 자체로 거물이던데?
“그런 말은 들은 적 없는데요.”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니까.”
“여튼, 그래서요?”
“이 녀석은 우리 측에서 데려가겠네. 상하긴 했지만, 아직 미끼로 쓸 정도의 가치는 있을 거라서.”
나는 걸어가 그와 토끼 사이에 섰다.
“그건 좀 곤란한데요.”
“곤란?”
“제가 잡았잖아요.”
“내 말 못 들었나? 자넨 우리 수사를 방해했다니까.”
“그건 그쪽 사정이고요. 난 의뢰를 처리한 거고. 저건 내 의뢰 완료 증거니까 못 가져갑니다.”
푸후- 위타천이 긴 한숨을 뱉자 주위의 공기가 요동쳤다.
그가 말했다.
“악의가 있지는 않네. 다만 나는 될 수 있으면 칼퇴하자는 주의라.”
위타천의 머리 위로 다른 사람의 형상이 보이나 싶더니, 호리호리했던 그의 몸에서 근육이 부풀었다.
강신술降神術인가.
다른 격 높은 영혼을 불러 자신에게 두르는 술법.
위타천이 몸의 중심을 낮추었다.
고강한 권법가가 취할 법한 자세.
그가 손을 뻗었다.
토끼의 발차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빠르기.
내 뿌리침을 가볍게 털어낸 위타천의 손끝이 내 어깨의 혈을 짚었다.
어깨에서 아릿한 느낌이 번지더니 곧 마비가 된 것처럼 감각이 둔화되기 시작했다.
‘점혈!’
위타천이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
점혈 정도는 나도 익히고 있다고.
그리고 점혈을 할 줄 아니 당연히 해혈解穴도 할 줄 알지.
점혈을 풀고 몸을 움직여 검을 찔러넣었다.
손에 전해오는 감각이 없다.
곧바로 검을 회수하고 숨을 억눌렀다.
반향정위를 사용해 주위의 기척을 파악하려는 찰나,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공을 익힌 흔적이 없던데 점혈을 풀어내? 게다가 퓨어(Pure:시술, 시공을 받지 않은 순수한 상태의 몸을 부르는 말. 아주 드물다.)인 것 같던데.”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으나 이번에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타천의 모습이 보였다.
피곤에 찌들었던 위타천의 눈에 미미하게나마 생기가 돈다.
“놀랍군. 퓨어에 검사라. 게다가 본 적 없는 움직임. 일인전승 문파의 계승자인가?”
“저건 내 거니까. 넘겨주고 가시죠? 서로 피곤할 일 만들지 맙시다.”
“그럴 수는 없지. 각자의 입장이라는 게 있지 않겠나.”
“말이 안 통하는 분이시네.”
“포기할 마음이 없어 보이니, 내가 좀 도와주겠네.”
위타천이 정권을 뻗었다.
느릿한 정권이 주위의 공기를 빨아들이는 듯하다.
마침내 나아간 주먹이 허공을 때리자 기파가 주위를 진동시키며 내게로 향했다.
직감이 스쳐갔다.
게임에서는 고인물 도살자라고 불렸던 나지만, 아직 이쪽 세계의 고인물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하다.
일단은 피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궁금증도 생겼다.
공공 집행자는 전술 병기 수준이라는데 이쪽 세계의 나, 오메가는 이들에 비하면 어느 정도의 수준일 것인가.
마음을 다잡았다.
자기 평가를 하기에 좋은 기회다.
곧장 광자 출력을 최대로 올리고 자세를 잡았다.
강맹한 위력의 기파가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 뒤로, 어느새 강신술을 해제했는지 호리호리한 모습으로 돌아간 위타천이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배알이 꼴렸다.
저 건방진 자세마저 베어버리고 싶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감각을 날카롭게 벼려냈다.
새로운 현실이 되어버린 이곳에서는 굳이 스킬을 영창 할 필요가 없었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발동한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주로 쓰던 검술 스킬의 이름을 마음 속으로나마 읊조리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조금의 힘이라도 더 얻을 수 있다면.
나를 내려다보는 저 건방진 상판떼기를 뭉개줄 수 있다면!
[역려건곤逆旅乾坤]
기파의 해일이 검에 닿는 순간, 그것은 새하얀 포말이 되어 부스러져 흩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