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003.
스냅샷과 나는 협력관계다.
정확히 말하면 스냅샷은 지하세계의 정보를 긁어모으고, 나는 이용한다.
도박중독자 부인을 찾아 달라는 의뢰 때문에 이곳에 들렀다가 알게 됐는데, 이 친구 아주 쓸만하다.
뇌용량확장술과 순간기억마법, 기억데이터전송술까지 익힌 제대로 된 ‘기억덕후’기 때문.
대충 훑어도 쓸모가 많은 놈이 왜 대림 에어리어의 카지노 지배인이나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각자의 사정과 그에 따른 복잡다단한 이유가 있겠지.
얘기만 들어서는 내가 스냅샷을 털어먹는 것 같지만, 내가 그렇게 정 없는 사람은 아니다.
협력관계이니만큼 오고 가는 게 있어야지.
스냅샷이 은근히 부탁하면 나는 다른 카지노로 간다.
가서 테이블에 앉은 뒤, ‘마술’과 ‘손기술’ 등의 스킬을 이용해 경쟁 카지노의 그 달 재무제표를 엉망으로 만든다.
타짜가 있다는 소문도 퍼져서 일반 고객들이 기피하게 되니 경쟁 카지노 입장에서는 천재지변이 따로 없겠지.
카지노 소속 타짜도, 기술 감별 안드로이드도, 감시 AI 소프트웨어도 내게 농락당했다.
카지노에서의 내 가치를 누구보다 먼저, 정확히 파악한 것이 스냅샷이다.
내 손기술 시험대에 가장 먼저 올라봤다는 뜻이다.
내가 해결사라는 걸 알게 된 뒤로는 먼저 협력하지 않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대림 에어리어에서 손에 꼽히는 규모의 카지노의 지배인이다보니 머리 회전과 행동도 상당히 빠른 친구였다.
비록 초반에는 내게 물리력 행사를 시도해서 이쪽 카지노 애들에게 손자국을 조금 남겨주는 사소한 해프닝도 있었지만, 대림 에어리어에서 그 정도는 늘 일어나는 일이니 상호 간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남을 때리려고 했으면 자기 턱이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 정도는 이곳의 기본 상식 축에도 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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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냅샷의 안내로 카지노 안쪽의 응접실에 앉은 나는 거두절미하고 키클롭스 아저씨에게 받은 파일을 꺼냈다.
그리고 안쪽에 붙어 있던 토끼 수인의 사진을 꺼내 밀었다.
“사채 쓰다 신세 조지게 생긴 년인데, 본 적 있냐? 들은 거라도.”
“토끼 수인이군요. 여성이고요. 다른 특징은 없습니까? 주어진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탐색이 용이해집니다.”
“한신나에서 왔대.”
“열도의 관서 출신이군요.”
“다리에 뭐랬지? 강화 의족에 유압 펌프가 있다고 했어.”
우두둑하며 스냅샷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자신만 접속할 수 있는 외부의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서 기억을 뒤지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냅샷의 고개가 내려왔다.
영 뻐근하다는 듯 손을 목에 대고 고개를 좌우로 돌리는 스냅샷이 말했다.
“사흘 전, 어설픈 우리말을 쓰는 자들 넷이 방문했었군요.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로 미루어보건대 추정되는 주 사용언어는 일본어. 그중에서도 칸사이벤関西弁. 모자로 가렸지만, 토끼 수인의 귀로 보였고······. 미미하게나마 아래에서 기름 냄새가 올라왔습니다.”
“기름 냄새?”
“유압 기계가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도 작게 났었죠.”
칸사이벤은 일본열도 서쪽 방언.
한신나 출신이라는 정보에 부합한다.
혼자가 아닌 걸 보니 부하들을 좀 끌고 온 건가.
“확실해?”
“드랍액이 커서 관리를 위해 직접 내려가서 봤습니다. 확실합니다.”
“돈은 좀 따가던?”
“승률은 항상 카지노가 높습니다.”
개털 되어 나갔다는 뜻.
사채를 빌려서 카지노에 태워?
경제 관념이 심각하게 부족한 놈이 분명하다.
“어디로 간다거나 하는 말은 없었어?”
“오늘 재방문하겠다고 했습니다. 마침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많이 움직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훌륭한 동선과 일정.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려 한다.
“그 테이블에 나도 앉자.”
어차피 놈은 또 빌린 돈을 들고 오겠지?
그걸 내가 좀 털어간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경험상, 침착한 놈보다 흥분한 놈을 제압하는 쪽이 훨씬 용이하다.
상대를 흥분하게 만드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눈앞에서 돈을 털어가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몇 없다.
손을 뻗어 허리춤으로 가져가자 결속되어 있던 칼날 없는 칼자루가 만져졌다.
지하 투기장에 침입할 때는 꺼낼 필요가 없었던 무기.
이번에는 이걸 써야 할 상황이 올 것만 같다.
스냅샷이 조심스레 묻는다.
“원하시는 정보도 드렸으니 이번에는 DL카지노 쪽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재개장 이후 성장세가 눈에 띄어서요.”
“거긴 이미 갔다 왔는데? 재개장 당일에.”
표정이 밝아지는 스냅샷.
“오오. 아주 혼쭐을 내주셨겠죠?”
“아니, 다른 곳에서 내 인상착의를 알려줬는지 정중히 나가달래. 블랙리스트에 올랐나 봐.”
밝았던 스냅샷의 표정이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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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가 아주 좆같네. 오는 길에 똥이라도 처 밟았나.”
귀걸이 형태의 디바이스를 통해 카지노 테이블의 옆자리에 앉은 토끼 수인의 말이 통역되어 들린다.
칸사이벤을 완벽한 표준 한국어로 바꿨다.
비속어까지 찰져서 듣는 나도 어이가 없을 정도다.
그것도 목소리의 차이는 거의 없다.
살짝 어색함이 느껴지던 현실의 텍스트 음성 변환이나 통역 프로그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다.
조작하면 통역 기능 뿐만 아니라 핸드폰이나 무전용으로도 쓸 수 있다니 놀라 자빠질 노릇이다.
“어이, 기생 오라비처럼 생긴 새끼. 그래 너, 이번에도 패가 좀 괜찮은가보다? 실실 쪼개는게?”
나를 향한 견제.
그럴 만도 하다.
내 앞에 쌓인 산더미 같은 칩 대부분이 몇 분 전만 해도 저 녀석의 것이었으니.
나와 놈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긴장감 사이로 딜러의 말이 파고든다.
“베팅하시겠습니까.”
나도, 토끼도 고개를 끄덕이자 각자의 앞으로 카드 한 장씩이 더 날아온다.
카드를 확인한 토끼가 자신의 앞에 있던 모든 칩을 앞으로 민다.
“올인.”
나를 흘끗 보는 꼴이 노골적인 도발이다.
“이번 건 내가 좀 먹어 간다. 들어오기만 해. 넌 뒤지는 거야.”
제발 들어와 달라고 몸을 뒤트는 수준이다.
이런 실력을 가지고 무슨 깡으로 사채까지 내서 도박을 하는 거야?
원하는 대로 해주마.
“콜.”
한 번 더 베팅 후, 마지막 카드가 나와 토끼에게 전해졌다.
엎어진 카드의 끄트머리를 살짝 들어 확인했다.
딜러가 줬을 때와는 달라진 문양과 숫자.
익히고 있던 마이너 스킬, ‘손기술’ 덕이다.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는 패를 만들었다.
“올인.”
높이 쌓여있던 칩들을 앞으로 밀자 토끼는 참지 못하고 입 주위에 웃음을 걸었다.
“경고를 해도 기어들어오네. 무서운 줄을 몰라. 너 그러다 오링나는 거야. 다 털린다고.”
“그쪽이야말로 다 털리면 쪽팔릴 텐데.”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거지. 개평이라도 좀 주마.”
“개평 좋지. 근데 혓바닥이 기네.”
내 말이 토끼 뒤에 서 있던 시다바리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려다 토끼의 제지를 듣고 멈춰 섰다.
“가만들 있어라. 카지노 안에서는 힘쓰는 거 아니다.”
밖에서는 쓴다는 말이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 범죄자답지.
“어째 귀보다 혓바닥이 더 긴 것 같아?”
이 정도는 해줘야 앞뒤 모르고 달려들 거다.
토끼가 손을 뻗어 모자 위를 더듬었다.
놈의 눈에 살기가 어릴 때쯤, 딜러가 손을 뻗어 토끼 수인의 카드를 확인한다.
그중 몇 개를 집어서 가운데 놓여있던 공유 카드와 맞췄다.
2, 3, J, Q, K.
“스페이드 플러쉬입니다.”
‘대단하십니다.’, ‘역시 누님이십니다.’와 같은 시다바리들의 찬사 속에서 토끼가 손을 뻗어 칩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그 재빠른 손놀림은 얼마 가지 못했다.
내 패를 열어본 딜러의 떨리는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10, J, Q, K, A.
모양은 모두 스페이드.
“로,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
1/649,740의 확률이라던가?
사실 10은 하트였는데 스페이드로 바꿔 쳤다.
굳어버린 토끼의 앞에 있던 칩까지 쓸어 담는데 저 새끼 타짜 아니냐는 둥, 딜러 이 개새끼 짜고 치는 거 아니냐는 둥 온갖 험한 소리가 들린다.
유압 펌프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기름 냄새가 확 풍겼다.
쾅-
토끼가 뻗은 다리에 카지노 테이블이 반토막 났다.
녀석을 향해 칩 하나를 튕겼다.
튕기기 스킬 덕인지 빙글빙글 돌며 날아간 칩이 토끼의 미간에 맞고 떨어진다.
“개평. 애들 밥이라도 사 먹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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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잠깐 우리 좀 보지.”
지루한 표정으로 홀로그램 슬롯머신을 몇 번 당기고 있었더니 아까 토끼 뒤에 서 있던 시다바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했다.
빨리 좀 오지.
홀덤으로 딴 돈 슬롯머신이 다 빨아가는 줄 알았다.
머신한테는 마술이 안 통하더라고.
따라가자 대림 에어리어에서 아주 흔한, 좁고 지저분한 골목이었다.
“개평 계산이 좀 그렇더라? 어떻게 생각하는가 싶어서.”
토끼의 말에 곁에 있던 놈들이 우두둑하며 손가락을 풀었다.
“어차피 사채로 끌어온 돈 아닌가? 이번에도 털리니 슬슬 불안한가 보지?”
녀석이 모자를 벗자 토끼 수인 특유의 긴 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귀 얘기도 그렇고, 사채 얘기도 그렇고. 아는 게 좀 있는가 봐? 그럼 혼자 생각만 하지 왜 씨부려서 일을 만드나?”
“그 쪽한테 걸린 현상금이 달달한가 보더라고.”
“그거 가져가려고 나한테 왔다가 콘크리트에 담겨서 오사카만에 가라앉은 애들이 좀 있는데 여기서는 어디에 처 넣어야 하나. 한강이 넓으니까 티가 덜 나려나?”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건지 토끼 곁에 있던 시다바리 하나가 나를 향해 달려들어 주먹을 뻗었다.
몸에 비해 과도하게 부푼 팔의 근육.
불법 약물인가.
가볍게 옆으로 피한 뒤 놈의 팔꿈치와 어깨에 손을 대고 힘을 줬다.
내 손바닥에 푸른 기운이 맺히나 싶더니, 곧이어 우드득하고 경쾌한 소리가 들린다.
기괴한 형상으로 꺾인 팔을 부여잡고 바닥에 뒹구는 놈을 발로 걷어내자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보는 토끼 수인이 보인다.
“기공 수련자? 단전 쪽에서 내력이 움직이는 기색은 없던데?”
수련한 적은 없지만 사용할 수는 있다.
예전에 게임에서 익혔었거든.
계속해서 나를 향해 달려드는 놈들 중 한 놈의 얼굴에 불덩이를 박아 주었다.
화염계 마법의 가장 기초적인 스킬, ‘불덩이 소환’이다.
두 놈이 전투 불능이 되자 분위기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마법?”
“마나 하트도 있어?”
그것도 없다.
모두 스킬이다.
이쪽 세계에서는 숨 쉬듯 자연스레 내보일 수 있는 것들.
“별 잡스런 놈이 들러 붙었네.”
잠시 내 미간이 찌푸려지는 사이, 토끼가 몸을 일으켰다.
펄럭이는 놈의 바지 아래로 기계장치가 가득한 뒤꿈치와 발목이 보인······.
콰직-
놈이 딛고 있던 땅이 깊이 파임과 동시에 바꿔치기 스킬을 이용해 구석에 놓여있던 쓰레기 봉투와 내 위치를 바꿨다.
기름 냄새가 자욱이 퍼진다.
터져버린 쓰레기 봉투에서 쓰레기가 흩날린다.
난데없이 쓰레기봉투를 발에 끼우게 된 토끼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인다.
그걸로도 모자라 토끼는 뒤쪽의 벽에까지 다리를 박아 넣었고, 벽은 단숨에 박살이 났다.
“한 방에 심장이 뚫렸어야 하는데, 너 정체가 뭐야.”
대답하지 않고 허리춤에서 칼자루를 꺼냈다.
익혔던 수많은 기술 중 특기라고 할 만한 것은 검술과 마법, 그중에서도 더 파고들었던 쪽은 검술.
독특한 방식으로 칼자루를 비틀자 코등이에서 검신劍身이 올라왔다.
전개형 기계식 검인데, 이쪽에서는 흔한 물건이라는 모양이다.
다만 칼날이 있어야 할 부분이 없었다.
일반적인 검의 형태에서 칼등만 있는 얇은 형태.
얇은 작살이 솟아오른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자루나 코등이에 비하면 균형이 맞지 않아 보였다.
“날도 없는 거 가지고 휘두르면 베이기나 하겠냐?”
비꼬는 토끼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 한 번 더 칼자루를 조작했다.
우웅거리는 낮은 진동음과 함께 비어있던 칼날 부분에 빛이 솟았다.
빛이 작살 끝의 튀어나온 부분에 닿자, 위태로워 보였던 불균형은 사라지고 비로소 날이 빛으로 이루어진 완연한 형태가 드러났다.
빔 샤벨이 아니다.
라이트 세이버도 아니다.
전개형 기계식 검 – 광자光子 튜닝이다.
해결사 일 때문에 잠시 뒤로 밀려나 있던 내 또 다른 별칭, ‘고인물 도살자’의 본능이 꿈틀댄다.
게다가 저 녀석은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하고 말았다.
내뱉기 전에는 하염없이 가볍지만 밖으로 꺼낸 후에는 측정하기 힘든 무게를 지닌 것이 말이다.
힘을 주어 말하느라 관자놀이 주변이 움찔대는 것이 느껴진다.
“잡스런 놈?”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