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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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여행

활기에 찬 수인과 인간들이 득시글거리며 재정비하는 황궁을 빠져나가고도 그레칸은 한참을 이동했다.

기껏해야 화단에 새로 심은 꽃이라든가 나무를 보러 갈 거라고 생각했던 밀라니아는 점점 멀어지더니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황궁을 보고 그레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레칸이 그녀를 흘끗했다.

“왜? 힘들어? 좀 쉴까?”

딱히 그런 건 아니었지만 밀라니아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울창한 숲속의 호숫가에 내려앉았다.

“오늘은 햇볕이 꽤 뜨거워.”

밀라니아를 바위에 앉힌 그레칸은 양손으로 그녀의 발목을 쥐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발을 호수 안으로 집어넣었다.

머리가 짜릿할 정도로 시원했다. 강한 햇빛 탓에, 알게 모르게 지쳐 있던 밀라니아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물고기도 좀 잡을까?”

“배는 고프지 않아. 그나저나 어딜 가는 것이야?”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짊어진 이질적인 배낭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레칸이 장난스럽게 손으로 가방의 아랫면을 툭 쳤다.

“여행.”

“뭐라?”

“여행 말이야.”

손으로 물을 퍼서 밀라니아의 매끈한 종아리를 적신 그레칸이 그녀 옆에 걸터앉았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에 한 손으로 제 뒷머리를 헤집었다.

“그냥, 지난번처럼 여행 가자고. 저번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여행이었다면 지금은 힐링 여행.”

“……이렇게 갑자기 말이냐?”

밀라니아의 눈이 가늘어지자 찔린 얼굴로 그레칸이 방긋방긋 웃었다.

“여행의 목적지는 상생의 다리야.”

“…….”

“보고 싶다고 했었잖아. 보러 가는 거야, 지금.”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지금 인간 중에서 제일 바쁜 인간은 공식적으로 인간의 대표 자격을 얻은 그란젤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는 바쁜 와중에도 종종 밀라니아를 찾아 이것저것 조언을 얻거나 앞으로 하려는 일들을 설명하고 떠나곤 했다.

상생의 다리는 그가 몇 번이나 말했던 화제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바다를 건너는 이들을 막아 냈던 워터드래곤은 불순한 의도, 또는 적의를 가진 이들의 통행만 제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신수인 워터드래곤은 생명체의 선한 마음을 색깔로 파악할 수 있었으므로 파수꾼 역할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1대륙의 수장들까지 설득한 건 의외였지.’

상생의 다리를 건설하려면 선행되어야 할 것은 1대륙의 동의.

그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말은 했지만 그녀는 내심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마녀, 체라, 그리고 수많은 소수 종족들. 천 년 동안 희박했던 2대륙과의 교류를 흔쾌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심지어 비교적 인간 친화적인 마녀족도 반기기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그렇게 싫어하는 반응은 아니었어요. 물론 경계심은 심했습니다만, 상생을 위해 인력, 물자를 아낌없이 지원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설득했죠. 특히나 의술에 관한 건, 소수의 수인족을 제외하면 없는 기술이니까요. 약속도 했습니다. 1대륙에 대한 존중을 가지지 않거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허가받지 않은 건축물을 세울 경우에는 이유를 막론하고 응징할 권한이 있다고요.]

그란젤은 생각보다도 의욕적이었고 재미있어했다.

[나도 한번 보고 싶구나. 완성되어 가는 상생의 다리를.]

눈을 반짝이며 열성적으로 말하는 그에게 언질 준 적은 있었다.

‘지금 당장 보러 가게 될 줄은 몰랐지만. 기둥을 세우지도 못했을 텐데.’

그래도 생각해 준 그레칸의 마음이 갸륵해서 밀라니아의 얼굴에 사르르 웃음이 내려앉았다.

그녀의 표정을 뚫어져라 살피던 그레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활기차진 그레칸이 호수에 뛰어들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요기 좀 하자. 배가 안 고파도, 날다 보면 배고플 거야. 건량을 챙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래. 그럼 간단히 먹고 떠나자꾸나.”

신이 난 그레칸은 사냥 준비를 시작했다.

* * *

상생의 다리 공사가 이뤄지는 바닷가.

공사 현장은 밀라니아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진척되고 있었다.

백 명에 가까운 인원이 득시글대고 있는데, 각자 역할 분담이 확실했다.

검은 피막 날개를 편 박쥐족 스무 명이 열 명씩 나뉘어 각자 줄을 들었다. 손목에 몇 번이나 휘어 감고 날개를 펄럭였다.

줄의 끝에는 단단한 천막이 연결되어 있고 그 위에는 커다란 우물통이 있었다.

처음에는 꼼짝도 안 했던 우물통은 스무 명의 박쥐족이 동시에 날아오르자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힘에 부친 한 사람이 조금 뒤처지자 전체 상황을 감독하던 박쥐족이 손을 들어 흔들었다.

“속도 맞춰서, 천천히!”

뒤처진 박쥐족이 다른 이들의 높이에 맞춰 몸을 띄웠다.

스무 명은 동료들의 상황을 확인하면서 이전보다 느리게 움직였다.

우물통은 안정적으로 움직여 바다 위로 날아갔다. 바위에는 인어족이 있었다.

인어족 세 명이 한 부분에서 빙글빙글 돌며 양손을 들어 휘저었다.

고개를 끄덕인 박쥐족이 그들 위로 이동하자 인어족이 팔로 동그라미를 그리고는 우물통 그늘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박쥐족들이 손을 놓았다. 육중한 우물통은 정확히 바다 아래로 떨어졌다.

이 위로 자재가 쌓이면 다리의 기둥 하나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오차 없이 떨어진 우물통을 확인한 박쥐족과 인어족의 일족들이 손뼉을 쳤다.

바닷가 높은 절벽에는 각 일족의 수장들이 공사 진척 상황을 확인했다.

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지 벌써 며칠이 지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지금 상황이 어색한 듯 묘한 눈빛이었다.

“나 참, 살다 살다 이런 꼴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

목덜미를 덮는 긴 금발을 쓸어 넘기며 르베리안즈가 혀를 찼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팔짱을 낀 대마녀 나탈리아가 대꾸했다.

“다리가 완성이 되면 파장이 크겠죠.”

르베리안즈가 그녀를 흘끗했다.

“그렇겠지. 그래도 예상한 바잖아?”

나른한 말투의 그는 현 상황이 그다지 불만스럽지 않은 듯했다. 나탈리아가 태연히 어깨를 끄덕였다.

“파장이 클 테고, 문제도 발생할 테지만 그거야 양쪽에서 잘 살피면 되는 일이니까. 얻을 것도 많죠. 인간과 수인의 화합은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큰일이니.”

절벽에 서서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던 체라가 아차 하고 나탈리아에게 말을 전했다.

“조인족이 전갈을 보내왔다는 말, 제가 했었나요?”

나탈리아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안 했어요.”

“붉은 줄무늬 새 일족이 참여하고 싶다고 했어요.”

“하칸 때문에 싫어하는 일족들이 꽤 많은데…….”

대마녀가 턱을 쓰다듬자 절벽에 앉아 있던 그란젤이 몸을 일으키고 엉덩이를 툭툭 틀었다.

“뭐 어때요. 일하고 싶다는데, 다 받죠.”

몇몇 수장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밀라니아 님은 공사 참여를 원하는 이들을 웬만해선 내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하,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다리가 갖는 의미가 많아진다고요.”

발랄하게 손을 든 그란젤이 플라잉 마법으로 허공에 몸을 띄웠다.

“전 현장으로 가까이 가 볼게요. 아무래도 스미스가 혼자 통제하긴 어려워 보이는군요.”

그란젤이 허공을 날아 바닷가로 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르베리안즈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밀라니아…….”

바람에 날린 소리를 들은 체라가 바람에 날리는 머리를 묶으며 툭 뱉었다.

“보고 싶으면 황궁에 가 보지 그러니? 일주일 정도 비행하면 도착할 수 있을 텐데.”

르베리안즈의 표정이 찡그리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모양으로 변했다.

“싫어요. 그레칸 자식을 보면 주먹이 나갈지 발이 나갈지 나조차 예상이 안 가서 말이에요.”

한 손을 든 르베리안즈가 피아노 치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바넷사한테 들었는데, 그레칸이 약재를 보내 줬다며. 불도마뱀의 진원이라 꽤 효과가 좋았다는데.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잖아.”

“그래서 뭐요. 고마워하기라도 하란 겁니까? 케케묵은 원한이 그런 걸로 나아지겠어요? 병 주고 약 주고 하는데 고맙다 하면 그건 실없는 거지.”

흥, 코웃음 치는 르베리안즈를 보고 체라는 웃음을 참았다.

“어이구, 그거 참 강단 있어 보이네.”

대꾸할 가치가 없다는 듯 무시하는 르베리안즈에게서 고개를 돌린 체라가 얄밉게 이죽거렸다.

“나는 보러 가야겠구나. 밀라니아 님.”

르베리안즈의 어깨가 알게 모르게 굳어졌다.

* * *

밀라니아는 궁금해졌다.

“숲을 다 털어먹을 생각이냐?”

그레칸이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안 그래도 면적 좁은 숲을, 샅샅이 누비고 돌아온 그레칸의 품엔 먹을 것이 산더미였다.

낭비벽 심한 청년을 책하는 귀부인처럼 밀라니아는 혀를 쯧쯧 찼다.

“먹을 수 있는 만큼만 구해 와야지. 다 죽어 가는 자연이니라. 뿌리를 남겨 두지 않으면 살아남지 않아.”

그레칸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밧줄처럼 줄기줄기 엮은 넝쿨에는 토끼와 멧돼지가 묶여 있었고, 넓은 잎사귀 위엔 산딸기와 자연산 도라지가 한 아름 담겨 있었다.

그레칸은 그늘의 편평한 바위에 식재료를 내려놓았다.

“걱정 마. 다 먹을 거니까.”

“그걸?”

“이동할 때 먹을 음식도 필요하잖아. 남은 건 훈제해서 챙겨 놓으려고. 딱히 낭비하려고 그런 건 아니야.”

“…….”

“정말로.”

그레칸은 진지하게 얘기했지만, 밀라니아는 영 미덥지가 못했다.

100년 전의 그레칸이라면 의심할 것 없이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레칸은 그 어떤 기상천외한 일이라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할 수 있을 위인이라, 미심쩍었다.

‘필시 무조건 많이 먹여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터.’

그가 그녀의 생각을 꿰뚫는 것처럼 밀라니아도 이제 그레칸의 사고 과정과 흐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가 풍요롭게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연을 되살리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되느니.”

다소 부드러워진 어조로 타이르자 그레칸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레칸이 그녀의 앞에 가볍게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뒤로 흘러내렸다. 묘하게 그늘진 눈가에 밀라니아는 시선이 멎었다.

“알았어. 이번에는 내가 들떴어. 황궁에서는 뭘 많이 먹지를 않으니까……. 당신하고 다시 여행을 간다는 게 설레기도 했고.”

약간 시무룩하면서도 잔잔하게 깔리는 목소리. 밀라니아의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솔직한 그레칸이, 시침을 떼며 변명하는 모습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그녀는 서늘한 손으로 그레칸의 뺨을 살며시 감쌌다.

그녀와 달리 그는 체온이 높은 편이어서 뺨은 따끈따끈했다.

그레칸이 기분 좋은 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레칸의 본성이나 생긴 것은 늑대가 틀림없는데, 간혹 전에 만난 묘족 아이처럼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릴 때가 있다. 지금이 딱 그랬다.

그녀의 손바닥에 뺨을 비비적대는 그레칸의 눈꺼풀이 거의 감길 듯 아래로 내려왔다.

얼굴을 온전히 맡기는 모습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손가락으로 매끈한 구릿빛 뺨을 훑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긴 은발이 옆으로 흘러내린다.

머리카락이 만들어 낸 그늘 속에서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레칸이 눈을 반짝 떴다. 후후 웃으며 밀라니아가 속삭였다.

“착한지고. 솔직하니 얼마나 보기 좋으냐.”

꿀꺽. 그레칸의 목울대가 거칠게 움직였다.

“큰일이야.”

목소리 또한 한 톤 낮아졌다.

“왜?”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그레칸이 곤란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밀라니아의 서리처럼 투명한 뺨에 옅게 홍조가 올라왔다.

그레칸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심장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것도 붉은 꽃에 의해 심장이 연결된 탓인가.’

심장이 뛰는 속도나 고동 소리 같은 것이 비슷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배가 고프구나.”

“준비할게. 밀라니아는 쉬고 있어.”

그레칸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불을 피우기 위해 나뭇가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밀라니아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의 자세가 어딘가 불편해 보여 고개를 기울인 그녀는 곧 그의 다리 사이가 불룩한 것을 보았다.

눈이 빠르게 깜박거렸다. 뺨의 홍조가 눈가에까지 옮겨졌다.

“터질 것 같은 게 심장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그새 나뭇가지를 한 아름 품에 안은 그레칸이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했어?”

밀라니아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니라.”

* * *

타다닥. 탁.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모닥불 주변에 의자로 쓸 커다란 바위 두 개를 놓고, 한 곳을 차지한 그레칸은 나직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고기를 구웠다.

익숙하지 않은 멜로디에 가사도 없는 콧노래였지만 묘하게 집중하게 되는 흥얼거림이었다.

발을 까딱거리며 밀라니아는 가벼운 바람을 일으켜 씨앗을 곳곳으로 이동시켰다.

요즘 그녀가 소일거리 삼아 하는 일은 파종이었다.

자연은 거대하고 복잡하고 섬세한 사슬의 집합체.

어느 한 생물 종이 사라져도 무너지는 속도가 빨라지는데, 그중에서도 식물의 멸종은 그 어떤 생물 종의 멸종보다도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밀라니아는 발길이 닿는 곳마다 씨를 뿌렸다.

당장 변하는 것이 없더라도 땅에 심어진 씨앗 하나하나는 언젠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렇게 자라난 식물은 곤충과 들짐승과 날짐승의 먹이가 되고, 풍요 속에 번식한 짐승들은 건강한 미생물을 증식시킬 것이다.

척박하고 메마른 대륙이 언젠가는 예전처럼, 혹은 그보다도 더 풍요로운 자연을 되찾기를 바랐다.

미래를 위해 묵묵히 씨앗을 심는 그녀의 금안에 흐릿한 그리움이 맴돌았다.

“식사하자, 밀라니아.”

그레칸이 노릇하게 잘 구워진 고기 꼬치를 내밀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밀라니아는 그의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후.

아삭아삭.

맛있게 먹는 밀라니아를 그레칸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다소 불만스러운 시선이다.

“밀라니아. 정말 그것만 먹을 거야?”

뾰로통한 목소리에 밀라니아는 오물거리며 꼬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레칸이 무형의 검기로 날카롭게 간 나무 꼬챙이에는 산딸기와 도라지가 꽂혀 있었다.

반면 그레칸이 들고 있는 꼬치엔 두툼한 살코기가 가득했다.

분명 그레칸이 그녀에게 처음 건네준 꼬치도 고기가 많았는데 어느 순간 밀라니아의 꼬치엔 식물류만 가득해졌다.

그레칸의 속도 모르고 밀라니아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맛이 있구나.”

“고기를 먹어야지 영양을 보충하지.”

“나는 그다지 힘을 쓸 일이 없으니 고기를 먹지 않아도 된다.”

“당신 몸이 약한 건 그 편식 때문이야.”

예전부터 종종 그레칸은 그녀의 음식 취향을 못마땅해했고, 그건 지금 들어서 더 심해진 듯했다.

밀라니아가 눈살을 찡그렸다.

‘잔소리쟁이.’

“두 번이나 죽을 뻔했잖아. 몸을 생각해야지. 먹어 봐. 맛있어.”

그레칸이 손에 든 꼬치를 내밀었다. 향신료까지 뿌려 맛있게 구워 낸 건 다 그녀를 풍족하게 먹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밀라니아는 떨떠름하게 꼬치를 내려다보았다. 고기 냄새가 훅 올라왔다.

“나는 본래 고기를 즐기지 않느니라. 너야말로 채소를 즐기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채소는 고기가 채워 주지 않는 여러 영양분을 채워 주느니라.”

“당신부터 골고루 먹으면.”

할 말을 잃은 밀라니아는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준 건 먹지 않았느냐.”

“반은 나 먹으라고 줬잖아. 먹여 주는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먹기 싫어서 그런 거였네?”

이제야 그 속셈을 알았다는 듯 그레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부정하지 못한 밀라니아가 흠, 헛기침을 했다.

“맛있어. 먹어 봐.”

“나는 고기가 맛이 있는 줄 모르겠느니.”

끝까지 꼬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그녀가 답답한지 입술을 달싹인 그레칸은 갑자기 무슨 생각인지 표정을 바꾸고 꼬치를 거둬들였다.

밀라니아는 그저 잘됐다 싶었다.

다시 식사가 시작되었다. 조용했다. 밀라니아는 입이 짧았고, 음식을 먹을 때 말을 하는 편이 아니었다.

살짝 구운 산딸기를 조심스럽게 떼어 먹는 밀라니아를 주시하며 그레칸은 큼지막한 살코기 하나를 전투적으로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입술이 실룩거린다.

‘고기 맛을 모르겠으면 알려 주면 되지.’

그는 조용히 내부를 관조했다.

죽어 가는 밀라니아를 살린 뒤, 그레칸은 하루에 수십 번도 넘게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이 심장이 밀라니아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레칸은 심장에 연결된 실을 따라 황금색 문을 찾았다.

밀라니아의 고통을 대신 집어삼켰던 문이었지만, 이 문의 효용성은 그것만이 아니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이렇게 닫힌 상태는 단절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 감각을 공유할 수 있게 되지.’

밀라니아가 잘 때 몰래 몇 번 실험해 보고, 즐거워했던 그레칸의 눈이 번뜩였다.

문을 조금 열었다. 열린 틈에서부터 밀라니아 특유의 상쾌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고기를 맛있게 씹어 먹으며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얼굴을 살폈다.

막 도라지를 깨물어 먹던 밀라니아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했다.

“아?”

불가해한 표정으로 꼬치를 내려다보는 그녀를 보고, 그레칸이 모르는 척 물었다.

“왜 그래?”

“희한하구나. 왜 도라지를 먹는데 고기 맛이 나누?”

그레칸이 킬킬거렸다. 그제야 이상함을 깨달은 밀라니아가 눈을 깜박였다.

“어때, 맛있지? 맛있을 수밖에 없어. 싱싱한 재료에 소금이랑 후추까지 쳤으니까.”

밀라니아가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뭘 한 게야?”

“내가 느끼는 고기 맛이야.”

“그레칸!”

“밀라니아는 고기가 싫다며. 어떻게 하면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야. 나쁘지 않지?”

밀라니아는 무심코 입맛을 다셨다.

“자.”

그레칸은 멍해진 밀라니아의 손에서 야채 꼬치를 빼앗고 고기가 꽂힌 꼬치를 들려 주었다. 그러고는 직접 손을 움직여서 입으로 전달했다.

밀라니아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고기를 씹었다.

텁텁한 맛 대신, 고소하고 담백하다.

밀라니아는 고기를 좀 더 빼먹었다.

그레칸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손을 붙들지 않아도 꼬치를 쥐고 고기를 우물거렸다.

“맛있구나.”

“부부끼린 입맛도 닮는다지.”

능청스럽게 말한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꼬치에서 도라지를 씹고 인상을 썼다. 그 맛마저도 공유되었다.

씁쓸한 맛이 느껴지자 밀라니아는 이제 알겠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감각 공유를 이렇게도 할 수 있느냐?”

그는 씨익 웃기만 했다.

바스락.

밀라니아는 고기를 먹고, 그레칸은 버리지 못해 마지못해 먹는다는 기색으로 야채 꼬치에서 산딸기를 빼 먹었다.

나름대로 화목한 식사 시간이 마무리될 무렵.

부스럭.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그레칸이었다.

번개처럼 움직인 그레칸은 곧바로 밀라니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푸슷. 바스락.

싸늘한 시선이 아무것도 없는 풀숲 저편을 쏘아보았다. 소리는 점점 빨라지고 가까워졌다.

바슷.

나뭇가지 가득한 잎사귀를 헤치고 가죽이 축 늘어진 호랑이가 나타났다.

총기 없는 눈과 깡마른 몸을 한 늙은 호랑이는 그레칸을 보자마자 깜짝 놀란 듯 앞다리를 긴장시켰지만, 노란색 눈은 모닥불 위에 놓여 있는 고깃덩이를 향해 있었다.

광기까지 느껴지는 눈빛은 그레칸을 경계하는 것조차 잊은 것 같았다.

딱 보아도 늙고 배고픈 호랑이였다.

그레칸의 눈썹이 위로 휘어졌다.

“뭐냐, 너.”

홀린 듯 앞으로 나섰던 호랑이는 칼날 같은 기운에 겁을 먹어 뒤로 몸을 물렸다.

한창때의 호랑이들에게 밀려 산에서 내려온 호랑이인 듯했다.

까만 털은 흐릿하여 윤기가 없었고 수염은 불균일하게 뾰족했으며 귀는 축 처져 있었다.

눈치를 보는 눈은 교활한 데가 있었으나 많이 위축되어 다른 수를 쓸 것 같지가 않았다.

“그거, 남은 고기라면 좀 나눠 먹어도 되겠습니까. 콜록콜록. 배가 많이 고픕니다.”

눈치가 빠르다 싶었는데 역시 수인이었다.

그레칸은 못마땅하게 호랑이를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뒤에도 기감을 넓혔지만 숨어 있는 짐승은 없었다.

“내가 왜…….”

냉정히 거절하고 호랑이를 쫓아내려던 그레칸은, 말 없는 밀라니아를 흘끗했다.

‘그녀라면 어떡할까.’가 아니었다. ‘내가 뭘 해야 밀라니아가 좋아할까.’

그레칸의 머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밀라니아를 중심에 두고 움직였다.

고민은 짧았다.

손에 든 꼬치에서 고깃덩이 하나를 떼어 내어 호랑이에게 던졌다. 고깃덩이는 풀숲에 떨어지지도 않았다.

타앗!

그레칸이 팔을 흔듦과 동시에 허공으로 뛰어오른 호랑이가 고깃덩이를 낚아채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고깃덩이가 사라지기까지 눈 한 번 깜짝할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구먼.”

금세 고깃덩이를 해치운 호랑이는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예. 콜록. 일주일간 토끼 한 마리밖에 먹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근처에 짐승들은 씨가 말랐고, 있다 하더라도 머리가 좋아 저 같은 늙은 호랑이에겐 잡히지 않죠. 콜록콜록.”

거기까지 말한 호랑이는 눈알을 굴렸다. 여전히 배고픈 모양.

“고기는 많으니 배를 채울 만큼 먹거라.”

관대한 그 말에 표정이 확 밝아졌지만 그레칸이 신경 쓰이는 듯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레칸은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는 훈제를 만들어 저장하려고 했지만……. 밀라니아가 허락했으니. 먹어.”

그레칸까지 허락하자 호랑이는 가릴 것이 없었다.

그는 밀알 한 톨 남은 경계심까지 벗어던지고 모닥불이 있는 곳까지 쏜살같이 달려왔다.

하마터면 모닥불에 머리를 박을 뻔했으나 그레칸이 발끝으로 막아 주었다.

고맙다고 고개를 숙인 호랑이는 뜨거운 줄도 모르고 고깃덩이를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짐승의 모습이긴 했지만 앞발을 쓰는 폼이 퍽 자연스러웠다.

인간형으로 변하지는 않았어도 사지를 인간처럼 쓰는 데 능한 걸 보니 나이가 많긴 많은 모양이었다.

분명 뜨거울 텐데 배를 채우는 게 더 급한지 허겁지겁 먹어 치우는 모습이 안쓰러워 밀라니아는 손가락을 튕겼다.

컵 하나를 채울 정도의 물을 만든 밀라니아가 넓은 잎사귀를 둥글게 말아 컵 모양으로 만들었다.

잎사귀에 물을 담아 호랑이에게 내밀었다.

“마시면서 먹거라. 뺏어 먹지 않을 테니.”

호랑이는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며, 천천히 음식물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요란하게 기침을 하더니 밀라니아에게서 잎사귀 컵을 받아들었다.

음식을 먹은 것처럼 물도 급하게 들이켠 호랑이의 태도는 이전보다는 여유로워졌다.

“콜록. 감사합니다. 굉장히 친절하시군요. 콜록콜록.”

그레칸이 눈썹을 꿈틀했다. 아까부터 기침을 하는 것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못마땅한 기운이 뱀처럼 몸을 감싸자 호랑이는 흠칫 몸을 떨었다. 두툼한 앞발로 가슴을 쳤다.

“아, 죄송합니다. 콜록콜록.”

그레칸의 눈치를 보고는 크흠, 괴로운 헛기침을 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지 꽤 되어서, 가벼운 기침병을 앓고 있습니다. 콜록콜록.”

그레칸의 시선이 한층 매서워졌다. 오래 살아온 만큼 눈치 빠른 호랑이는 잽싸게 변명했다.

“옮는 병은 아닙니다. 콜록.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레칸은 못마땅해하면서 밀라니아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호랑이가 기침할 기미를 보이면 손을 뻗어 밀라니아의 얼굴 앞을 막아 냈다.

밀라니아는 유난이라고 생각했지만 말린다고 들을 그레칸이 아니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콜록. 오랜만에 굉장히 맛있는 식사였습니다. 저는 옛 친구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제 무리는 고향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콜록, 제 몸이 너무 늙어 뒤처지고 말았거든요. 콜록, 크흠. 마지막이 될 것 같으니 그리운 얼굴을 보려고요. 두 분은 여행객이십니까? 콜록콜록.”

“그래.”

갈증이 나는 듯 입맛을 다신 호랑이는 양해를 구하고 호숫가로 달려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다시 돌아온 호랑이의 얼굴은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이런 시대에 여행객이라니, 근 삼십 년 만에 처음 만나 보네요. 피난민도 아니고.”

“의심이라도 하는 거냐?”

그레칸이 호랑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호랑이는 실수했다는 듯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콜록. 그저 신기해서 그랬지요.”

호랑이는 침을 삼키고 눈알을 양옆으로 굴렸다.

“가고 싶으면 가도 된다.”

속내를 정확히 짚은 밀라니아가 말했다. 호랑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확히 그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마음에 걸린다는 표정이었다.

“아, 그래도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콜록. 일주일 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주신 분들인데요. 콜록콜록. 제가 비록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기는 했어도 은혜를, 콜록, 모르는 자는 아닙니다.”

짐승의 얼굴로 엄숙히 말한 그는 그레칸이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자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 여행객이시라면 잘 곳을 찾고 있지 않으십니까? 콜록. 이 일대는 제가 속한 무리가 한동안 지냈던 곳입니다. 콜록콜록. 썩 편안하진 않아도 그럭저럭 아침 이슬을 피할 수 있을 동굴을 압니다.”

밀라니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레칸이 동굴의 위치를 물었다.

호랑이는 그레칸에게서 남은 고기를 받아 길을 떠났고, 밀라니아는 어이가 없었다.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거늘, 잘 곳을 찾아서 무엇 하느냐?”

“여행이잖아, 밀라니아.”

그레칸이 모닥불 위에 흙을 부어 불씨를 꺼뜨렸다.

“갈길 바삐 구는 건 여행이 아니라 일이지, 일.”

“……이럴 때는 말을 참 잘하는구나.”

“이럴 때라도 잘하는 게 어디야.”

할 말 없게 만드는 말이다.

그레칸이 밀라니아를 훌쩍 들어 안았다.

“그럼 쉬러 가 볼까.”

단지 쉬자는 말을 했을 뿐인데 어딘지 야릇한 느낌이라 밀라니아는 괜히 귓바퀴를 긁적였다.

호랑이가 말한 동굴은 딱 그가 설명한 대로였다.

딱딱하고 어두워 마음 편히 쉴 만큼 편하지는 않았지만 외진 곳에 있어 적막하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따뜻하여 하룻밤 쉴 만큼은 되었다.

다른 건 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지만 바닥이 딱딱한 게 흠이었다.

‘어깨가 배기겠구먼.’ 

그레칸은 어떤가 싶어 슬쩍 살피자.

“오, 괜찮네.”

의외로 긍정적인 대꾸.

밀라니아가 눈을 둥글게 떴다. 그녀를 돌아본 그레칸이 바보처럼 헤실거렸다.

“신혼 동굴.”

“떽!”

킥킥거린 그레칸은 우선 밀라니아를 동굴 입구에 내려놓고 잘 마른 나뭇잎을 모았다.

동굴 안에 작은 모닥불을 피우고 한쪽 구석에 잔뜩 모은 나뭇잎을 깔자 편안함이 황궁의 푹신한 침대는 아니어도 마녀성의 지푸라기 침대 정도는 되었다.

“내가 뭐 도울 것은 없느냐?”

멀뚱히 앉은 밀라니아가 머쓱한 마음에 물으니 모닥불 세기를 조절하고 있던 그레칸이 모닥불을 내버려 두고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밀라니아 아무것도 안 하는 거 좋아하잖아. 도와줄 생각이었어?”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그녀는 발끈했다.

“내가 자리보전하고 누운 노인인 줄 아는구나.”

“하하하.”

꺄륵거린 그레칸이 돌연 밀라니아를 끌어안았다.

흠칫한 밀라니아가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밀어내었다.

그레칸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 손가락을 떨치더니 그녀의 부드러운 목덜미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아. 그냥 내가 하는 걸 봐 줘. 내가 밀라니아에게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그럼 나야 편하다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려니 미안해서 말이다.’ 중얼거린 밀라니아는 말이 끝나기 전에 몸이 뒤로 넘어갔다. 임시 낙엽 침대가 바스락거렸다.

당황한 밀라니아의 눈꺼풀이 삼박거렸다. 그레칸은 모로 누워 그녀를 한층 강하게 끌어안고는 숨을 나른히 쉬었다.

“아, 좋다. 잠도 솔솔 오고.”

“아직 시간이 이르도다.”

“낮잠 자자.”

시원스럽게 대꾸한 그레칸의 콧김이 밀라니아의 목덜미에 닿았다. 따뜻하고 간지러웠다.

푸슬거리며 웃던 밀라니아도 점차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하루 반나절을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걸 좋아하는 그녀였다. 밖으로 나왔다고 달라질 리가 없었다.

슬며시 눈을 감은 밀라니아는 그대로 잠을 청했다.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밀라니아의 한쪽 눈에 주름이 잡혔다. 그레칸의 손놀림이 수상했다.

팔베개를 한 그레칸의 손이 팔뚝을 슬슬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검지를 빼꼼 내밀어 쇄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만진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로 깃털처럼 나긋했다.

귓가에 입술을 맞춘 그레칸이 꼬물꼬물 움직여 밀라니아의 귀밑 여린 살을 만지작만지작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레칸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무엇을?”

의도치 않게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히 기분이 야릇해져 당황한 밀라니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했다.

“자꾸 만지고 싶어지는 거.”

“예전에는 안 그랬느냐.”

뜻밖의 맞는 말에 그레칸은 침묵했다.

“……그랬지.”

“그럼 이상할 것도 없지.”

“아닌데. 다른데.”

떨떠름하게 중얼거리자 밀라니아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뒤늦게 그녀의 웃는 기색을 눈치챈 그레칸의 얼굴이 불만스러워졌다.

고개를 든 그레칸과 밀라니아의 눈이 마주쳤다.

목덜미에 머리를 비벼 대서 새집처럼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 살짝 발갛게 변한 뺨, 그리고 눅눅한 검은 눈동자.

폭발 직전의 모습이었다. 뜨겁고 습한 숨이 밀라니아의 쇄골 부근을 간질였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오뚝한 코에 입을 맞추었다.

코끝에 느릿하게 입술을 누르고 떨어지자, 그레칸의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가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그레칸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밀라니아의 입술 사이에서 웃음이 바람처럼 새어 나갔다.

입을 맞대고 있는데 그레칸이 눈치를 못 챌 리 없었다.

좁아 든 눈으로 그레칸이 상체를 비스듬히 들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시침을 뚝 뗀 밀라니아가 눈만 깜박이자 그레칸의 눈이 한층 더 좁아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어리둥절한 밀라니아는 다시 입을 맞춰 오는 그레칸의 입술에 눈을 반쯤 감았다.

그레칸의 입맞춤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심장이 기분 좋게 뛰고 피부가 간질거린다.

여느 때처럼 그가 주는 보드라운 감각에 빠져들려던 밀라니아는, 숨을 쉬기가 버거워졌다.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어서 과호흡이 오는 기분이었다.

손을 심장으로 가져다 댔다. 심장은 특별할 것 없이 평소처럼 뛰고 있었다.

쿵쿵쿵쿵. 쿵쿵쿵쿵.

‘그럼 이 심장 소리는 뭐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고동보다 두 배는 크고 세 배는 빨랐다.

“하.”

밀라니아가 짧은 숨을 토해 내자 입술을 멈춘 그레칸이 조금 떨어졌다.

코끝에서 코끝까지의 거리는 한 뼘뿐이었다.

밀라니아는 놀란 눈으로 그레칸을 올려다보았다.

“왜.”

쉰 목소리로 그레칸이 속삭였다.

“아니…….”

심장이 점차로 차분해진다. 고개를 갸웃한 밀라니아의 입술이 타액에 젖어 반짝거렸다.

꺼지지 않는 모닥불의 노란 불빛이 그녀의 하얀 얼굴에 어른거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얼굴 반쪽과 빛을 받아 노르스름하게 물든 얼굴 반쪽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눈을 내리깐 밀라니아의 속눈썹이 길고 느리게 흔들렸다.

막 잠들려고 했기 때문인지 나른한 표정. 그레칸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굴의 홍조가 채도를 더했다.

한편 밀라니아는 다시 심장이 뛰었다.

‘왜 이러는 게야.’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심장은 여전히 평범하게 뛰고 있었다.

그레칸이 입을 맞추었다. 밀라니아는 “흐음.” 옅은 신음을 흘리고 그레칸을 받아들였다.

입맞춤에 집중하려는데 귓가에 크게 울리는 심장 고동 소리가 거슬렸다. 결국 그레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잠깐. 잠깐 멈춰 보거라.”

그레칸이 다시 입술을 뗐다.

밀라니아는 제 가슴에 손을 대고 심장 고동을 들었다. 얼굴이 심각해졌다. 

“미친 듯이 뛰는구나. 내가 병이 났는고?”

밀라니아는 혼란스러웠다.

그때, 어디선가 웃는 소리가 났다. 제대로 눈을 뜨자 그레칸이 웃고 있었다.

“이상하네. 난 평온하고 기분 좋은데.”

“그게 무슨 소리냐?”

그레칸이 얼굴을 내렸다. 부드럽고 촉촉해진 입술이 다시 맞부딪쳤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입을 벌렸다.

그레칸이 아랫입술을 빨아들였다.

심장의 이상 반응이 우려스러운 밀라니아는 처음에는 입맞춤에 집중하지 못했지만 그레칸이 끈질기게 아랫입술만 공략하자 그쪽으로 신경이 쏠렸다.

입술이 부어오를 것 같았다. 아랫입술에 꿀이라도 묻어 있는지 그레칸은 한참을 입술만 빨았다.

밀라니아는 한 손으로 그레칸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이제 그만하라는 뜻이었으나 의도하지 않게 그를 자극시켜 버린 것 같았다.

흐으. 새어 나오는 숨이 퍽 거칠었다.

그레칸이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그러자 입술의 결합이 깊어졌다.

밀라니아는 코로 숨을 쉬기 위해 노력했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숨을 쉬는 게 쉽지가 않았다.

손끝에서부터 그레칸의 심장 고동이 전해져 왔다.

쿵쿵쿵쿵.

쿵쿵쿵쿵.

그 속도가 놀라울 만큼 빨랐다. 문득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심장 고동과 귓가에 맴도는 심장 뛰는 소리가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 순간 밀라니아는 의문을 해결했다.

모닥불이라도 피워 놓은 것처럼 뜨거운 심장. 벅찬 가슴과 가빠지는 숨결.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치달아 오르는 환희와 황홀한 행복감…….

이건 그레칸의 감각이었다.

“흣.”

밀라니아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레칸이 입술을 뗐다. 뜨거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찔거리면서 그녀는 그레칸을 쏘아보았다.

그레칸은 어리둥절한 눈빛이었다.

밀라니아는 기가 막혔다.

그레칸의 집요한 성정과 끈질긴 태도가 신기했었다.

한데 그레칸은 내내 이런 기분이었을까.

도대체 내가 네게 뭐라고.

“그 감각 공유. 어느 때고 할 수 있는 것이냐?”

밀라니아가 알아챘다는 것을 깨달은 그레칸의 낯에 난감한 웃음이 어렸다.

잠시 후, 밀라니아의 안색이 한결 편안해졌다. 태풍처럼 휘몰아치던 가슴 벅찬 감각이 가라앉은 것이다.

팔꿈치로 몸을 지탱한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부풀어 오른 입술을 엄지로 쓸었다.

“기분 좋았지?”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느니라.”

질색하는 밀라니아를 빤히 보고 못 참겠다는 듯 그레칸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익숙해지면 아주 기분 좋아. 그거 할 때 감각 공유하면, 기절할지도 모르겠는데.”

아직도 감각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밀라니아는 그 말을 장난으로 치부했다.

설마 정말로 그렇게 하리라곤 생각 못 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따뜻해서 몸이 절로 떨리는 손이 옷자락을 들추고 들어와 가슴 밑부분을 붙잡았다.

밀라니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바라보던 그레칸이 커다란 눈을 휘었다.

“그레칸?”

“당신이 기분 좋아했으면 좋겠어.”

중얼거린 그가 엄지의 넓적한 면으로 톡 튀어나온 그녀의 젖꼭지를 좌우로 비볐다. 부드럽게 그러나 강약을 조절하며.

밀라니아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들었다. 싫어서가 아니라, 그녀에게는 아직도 낯선 감각이 피어오르는 기미가 느껴져서였다.

그레칸의 다른 손마저 옷 안쪽으로 들어와 비어 있는 가슴을 잡았다.

“음.”

한쪽 손으로는 젖꼭지를 매만지고 비비고 누르고 온갖 손장난으로 희롱하고 다른 손은 가슴 밑부분부터 시작하여 안쪽으로 둥글린다.

밀라니아는 허리를 움찔움찔 떨었다.

“왜 그래?”

시침을 뗀 그레칸이 묻자 그녀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아주, 기묘하구나.”

감각 공유라는 신이한 일이 다시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몸은 하나인데 꼭 둘이 된 기분이었다.

가슴으로 쾌감을 느끼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슴을 애무하며 설레하는 그레칸의 감각까지 느껴졌다.

몸 안에서 두 개가 된 심장이 각기 다른 속도로 뛰고 있는 듯했다.

“어떤데?”

낮게 속삭인 그레칸이 눈을 내리깔았다. 밀라니아의 붉은 입술을 내려다보다 못 참겠다는 듯 얼굴을 내려 입을 맞추었다.

아랫입술을 빨리며 밀라니아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인간들의 표현으로, 구름 위를 나는 것 같구나.”

몽환적인 목소리에 풍만한 가슴을 애무하며 키스하던 그레칸이 멈칫했다.

밀라니아가 느릿하게 눈을 뜨며 그를 바라보자, 그레칸의 입술이 살짝 들떴다. 그 아래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그런 말을 하면 못 참게 돼, 밀라니아.”

흥분을 참지 못하는 기색으로 그르렁댄 그레칸이 순식간에 그녀가 걸친 옷을 벗겼다. 아차 할 틈도 없이 벗겨진 옷가지에 밀라니아가 입술을 벌리는 찰나, 그레칸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크게 입을 벌려 가슴을 문 그레칸이 양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 위로 올렸다. 허벅지 사이에 단단히 자리 잡은 그레칸이 허리를 올려붙였다.

옷을 벗지 않았어도 발기한 성기로 인해 불룩하게 튀어나온 뜨거운 부분이 밀라니아의 속옷을 위아래로 비벼댔다. 금방이라도 옷을 뚫고 나와 삽입할 것 같은 느낌에 밀라니아의 얼굴에도 가벼운 흥분의 기미가 떠올랐다.

평소보다도 빠르게 흥분이 되고 있다. 그레칸이나 자신이나.

‘그레칸의 흥분까지 느껴지니, 내가 흥분한 건지 그레칸이 흥분한 건지 모르겠구나.’

내심 탄식을 하는데, 그레칸은 그녀에게 딴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허벅지를 더 위로 벌리고 강하게 허리를 튕겼다. 동시에 가슴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헉!”

양쪽으로 오는 자극에 밀라니아가 입을 벌리고 경악성을 토했다.

그레칸의 앞섶이 축축해졌다. 벌써부터 쿠퍼액을 흘리기 시작한 걸까? 의아해하는 밀라니아에게 그레칸이 쑥스럽게 중얼거렸다.

“정액이 물처럼 묽어질 때까지 쌀 수 있을 것 같아.”

밀라니아가 눈을 크게 떴다.

“벌써 사정한 게냐?”

그레칸은 답하지 않고 씨익 웃었다. 바지를 벗어 던지고,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본래 속옷을 잘 입지 않았으므로 그가 바지를 벗자 곧바로 거대하게 발기한 성기가 튀어나왔다. 끄트머리가 희끄무레한 액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설마 하던 밀라니아가 ‘끄응’ 하고 신음을 흘렸다.

당장이라도 삽입할 것처럼 굴던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양 가슴을 덥석 잡고 입을 맞춰 왔다.

온도가 높아진 뜨거운 혀가 입술 안으로 밀고 들어오자 밀라니아는 저절로 눈이 닫혔다. 시야가 차단되니 촉각이 예민해졌다.

그레칸의 거친 손가락이 말랑말랑한 가슴의 살갗을 쓸어대는 느낌이나 뭉툭하고 단단한 손가락 끝이 젖꼭지를 빙글빙글 돌리고 꾹 누르는 감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신음을 흘리자 입을 맞추고 있던 그레칸이 그 신음까지 남김없이 흡입했다. 그녀의 입 안에 고인 타액을 감로수처럼 혀로 빼앗은 그레칸은 그녀가 헐떡일 때에야 입을 놓아주었다.

츄릅, 혀로 입술을 핥는 그레칸을 밀라니아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정말 짐승처럼 구는구나.”

입 안이 끈적한 것 같았다. 그레칸은 태연하게 한편에 놓아둔 물을 그녀의 입술 안으로 흘려 넣어 주며 말했다.

“당신 앞에서는 짐승이 될 수밖에 없는걸.”

“말은 잘……, 헉!”

말은 잘한다고 핀잔을 주려던 밀라니아가 돌연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레칸이 손바닥 아랫부분으로 음부를 문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속옷의 부드러운 천이 그레칸의 단단한 손바닥에 의해 음부에 사정없이 마찰했다.

밀라니아는 뒤늦게 입술을 사리물고 미간을 좁혔다.

그 반응에 그레칸이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역시 옷 위로는 느낌이 안 오지?”

“잠깐!”

말리는 건 소용이 없었다. 이번에 그는 속옷을 벗기는 수고도 들이지 않았다. 그대로 잡아 뜯자 성긴 천은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쉽사리 뜯겨나갔다.

훤히 노출된 음부에 그레칸의 맨손이 닿았다. 뜨겁고 건조하고 딱딱한 손바닥이 은빛 수풀과 축축한 동굴을 한 번에 가렸다. 그리고 강하게 문질렀다.

“하아!”

밀라니아가 뜨거운 숨을 토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빠르게 문지르는 손바닥의 감각에 넘실거리던 쾌감이 성큼 다가왔다.

마침내 그가 음부를 압박하는 순간, 밀라니아의 발가락이 쫙 펴졌다. 바르르 경련하는 허벅지 사이로 뜨겁고 미끈거리는 애액이 쭉 튀어나왔다.

“하아, 하아.”

밭은 숨을 내쉬는 그녀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던 그레칸이 열정으로 몽롱해진 눈으로 그녀의 힘 풀린 눈가와 보드라운 입술에 각기 입을 맞추었다.

절정을 맞은 밀라니아가 진정할 때까지, 그레칸은 얌전히 기다렸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아래 털도 부드러워.”

감탄하는 어조로 속삭인 그레칸이 다섯 손가락을 세워 빗이라도 된 듯 음모를 상하로 쓸어내렸다.

한참을 음모를 가지고 놀던 그레칸은, 한숨 돌린 밀라니아가 ‘그만하라’고 밀어낸 순간 돌변했다.

“다시 할게, 그럼.”

“뭘? 아!”

“한 번으로는 부족하잖아. 그렇지? 당신은 느낄 때 이런 기분이었구나.” 

취한 것처럼 흐물거리는 목소리가 왠지 불안했다. 밀라니아의 눈빛에 불안감이 스치는 그 찰나에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젖은 음부에 손가락을 침입시켰다.

“여길 만져 주니까 더 흥분하던데, 밀라니아.”

그레칸은 탐구를 시작한 학자처럼 진지하고도 흥미가 스민 얼굴로 밀라니아의 톡 튀어나온 음핵을 엄지로 문질렀다. 다른 손가락은 구멍 속에서 깔짝거렸다.

손가락이 꽂힌 채 다리를 바르르 떤 밀라니아가 그레칸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그레칸의 말이 맞았다. 그가 음핵을 강하게 짓뭉갤 때마다, 빠른 속도로 밑구멍을 쑤실 때마다 몸 안 깊은 곳이 움찔움찔 경련하길 반복했다.

본래도 그녀의 성적인 반응에 민감했던 그레칸이었으나 감각 공유는 그 이상의 것까지 감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밀라니아가 오르가즘을 느낄 때 그 역시 건조한 절정에 맞았던 것이다.

“만져지지 않았는데도 사정할 뻔했어.”

그레칸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왠지 민망해진 밀라니아가 다리를 뒤틀며 그레칸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내자 그레칸이 구멍을 쑤시지 않는 다른 손으로 허벅지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입술에 닿은 그녀의 손가락을 쪽 빨아들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밀라니아는 강렬한 시선에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레칸이 엄지로 음핵을 강하게 위로 튕겼다. 아래로 수그리고 있던 음핵이 위로 솟구쳤다.

“흐응……!”

아찔한 통증과 쾌감에 밀라니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통증을 달래듯 엄지가 음핵을 부드럽게 쓸었다. 이번에는 간질간질한 쾌감이 밀려와 그녀의 흰 뺨에 홍조가 어렸다.

밀라니아는 즐거웠다. 흥분되었다. 이게 그레칸의 감정인지 자신의 감정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각기 다른 속도로 뛰던 심장의 고동도 어느 순간부터 하나가 된 듯했다.

음핵을 문지르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앗!”

마침내 또 한 차례 절정을 맞은 밀라니아가 그레칸의 어깨에 이마를 파묻었다. 이번에는 그레칸도 마찬가지였다.

성기는 한 번도 만져지지 않았지만 밀라니아가 가는 순간 함께 느낀 쾌감에 성기가 절로 까딱이며 정액을 사출한 것이다.

삽입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두 번이나 간 그레칸은 힘이 빠진 팔다리를 아래로 내려놓은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는 때에 성기를 삽입했다.

“흑…….”

밀라니아가 가늘게 신음했다. 물기 어린 음성은 짐짓 연약했고, 색스러웠고, 가슴을 간질거리게 했다. 

마구잡이로 움직이고 싶은 충동을 참는 그의 하관에 힘이 들어갔다.

그레칸은 그녀의 얇은 허리를 붙잡고 슬슬 왕복 운동을 시작했다. 밀라니아는 다시 신음을 흘렸다.

“흐응.”

“자극하지 마, 밀라니아. 당신 지금 민감한 상태라서 내가 막 움직이면 못 버틸 거라고.” 

투덜대는 그레칸은 과연 진지한 표정으로 신중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배려는 밀라니아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왕복 운동하는 속도가 매우 느렸기 때문에, 밀라니아는 다소 초조함을 느꼈지만 독촉하지는 않았다. 

그레칸의 인내심은 촛불보다 결코 길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의 예상대로 오래지 않아 그레칸의 얼굴에 땀이 흘렀다. 저도 모르게 빨라지는 성기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그는 흡사 시험에 든 사람 같았다.

밀라니아는 내심 웃으며 다리로 그의 엉덩이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삽입이 미약하게 깊어졌다.

퍼뜩 놀란 그레칸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밀라니아. 하지 마.”

“쓸데없는 데 배려심이 강하다니까, 너는.”

밀라니아는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삽입이 좀 더 깊어졌다. 그레칸의 미간 주름도 그 깊이를 더했다.

“이리 오거라, 그레칸.”

부드럽게 부르는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눈빛은 뇌쇄적이기 짝이 없었다. 결국 그레칸은 항복했다. 

허리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싶을 무렵, 허리가 강하게 움직였다. 

쾅!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귀두가 안쪽을 거세게 찧는 소리였다.

“하아!”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밀라니아가 뜨거운 한숨을 토하자 그레칸은 곧장 고개를 내려 벌어진 입에 혀를 집어넣었다.

밀라니아는 눈을 감고 양팔로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틈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딱 붙은 상태에서 그레칸이 허리를 빠르게 놀렸다.

밀라니아의 높아진 신음이 맞닿은 그레칸의 입 안으로 모조리 빨려들어 갔다. 곧 동시에 절정에 다다른 두 사람의 다리가 잘게 경련했다.

그날 밤, 그레칸은 시도 때도 없이 감각의 문을 열어젖혔고 밤은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불타올랐다.

서로가 느끼는 쾌감이 전달되었으므로 감각은 무서울 정도로 증폭했다.

쾌락에 몸부림치며 밀라니아는 몇 번이나 자지러졌다.

그레칸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좋아했다.

결국 그녀에게 한 대 맞은 그레칸이 수그러질 때까지, 밤은 끝나지 않았다.

* * *

다음 날.

콜록콜록. 기침 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새벽녘 축축하게 젖어 더는 쓸 수 없는 낙엽을 내다 버리고 새로운 낙엽을 깔았던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이마에 손등을 올렸다.

“열도 나.”

밀라니아는 인상을 찌푸린 채 주먹으로 입을 막았다.

간질간질한 기침이 연신 뛰쳐나오려고 하는 게 여간 낯선 게 아니었다.

크흠. 목을 가다듬는 밀라니아를 바라보는 그레칸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늙은 호랑이가 거짓말을 했군.”

밀라니아의 기침은 어제 만난 호랑이에게서 옮은 게 분명했다.

콜록. 작게 기침한 밀라니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그런 것 같구먼.”

그레칸의 팔뚝과 어깨가 흉흉히 부풀어 올랐다.

“호랑이 고기가 기침병에 좋으려나.”

밀라니아는 그의 손등을 붙들었다.

야생 상태에서 늑대는 호랑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호랑이 한 명을 사냥하려면 늑대가 열 마리, 최소 다섯 마리는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레칸은 다 늙은 호랑이 수인 따위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됐느니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인사. 탓해 봐야 뭣 하겠느냐.”

나이 들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방황하고 있는 호랑이가 그 정도 교활한 건 있을 법한 일이었다.

밀라니아가 괜히 힘 빼지 말라고 고개를 젓자 그레칸의 매서운 눈초리에서 힘이 빠졌다.

“뜨거운 국물 요리 좀 해 올게. 쉬고 있어.”

그레칸이 만들어 온 수프를 먹고 밀라니아는 동굴 벽에 기대어 하루 종일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레칸은 그녀의 상태가 많이 안 좋을 줄 알고 안절부절못했다.

내부를 관조한 밀라니아가 눈을 뜨자 바로 앞에 그레칸이 앉아 있었다.

“하지 말거라.”

“……뭘.”

움찔한 그레칸이 짐짓 순진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밀라니아는 열이 올라 불그스름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감각을 공유하는 거. 전에 말란도르의 진원을 대신 흡수한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아픈 게 나아.”

“하지 말라고 얘기했다.”

“밀라니아.”

눈빛이 난폭해진 그레칸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밀라니아는 담담히 그의 매서운 시선을 받아넘겼다.

서리를 만난 불꽃처럼 그녀와 시선을 주고받은 그레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아픈 게 싫으냐?”

“그걸 말이라고 해?”

“나도 그러느니라.”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그레칸의 고개가 미세하게 기울어졌다.

“네가 나 아픈 걸 보는 걸 싫어하는 것처럼, 나도 네가 아픈 걸 보고 싶지 않아.”

얼굴이 빨개진 그레칸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당신은 약해. 차라리 내가 견디는 게 빠르고 짧으니까.”

밀라니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팔을 벌렸다.

“차라리 끌어안아다오. 그게 낫겠어.”

망설이던 그레칸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자세를 바꾸자 그레칸이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었고 밀라니아는 그의 허벅지 위에 있게 되었다.

뜨겁고 단단한 팔로 그녀의 상체를 단단히 껴안은 그가 선이 유려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물기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당신이 아픈 게 정말 싫어. 차라리 내 팔다리 하나가 끊어지는 게 낫지.”

정서적으로 불안해 보이는 그의 넓은 어깨와 등을 쓰다듬듯이 토닥거렸다.

그다지 크게 아픈 것도 아닌데, 그레칸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아픔 자체가 트라우마가 되어 버린 것처럼.

불안에 떠는 그레칸이 안쓰러워서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머리를 깊이 끌어안고 흔들림이 멎을 때까지 쓰다듬어 주었다.

다행히도 하루가 지나니 밀라니아의 기침병은 가라앉았다.

뜨겁지 않고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야채와 고기를 섞어 만들어 준 꼬치를 오물오물 씹었다.

“기침이 멈추지 않는다는 게 뭔지 어제 처음 알았느니라. 오래 살았는데도 별 희한한 경험을 해 보는구먼.”

혈액에 치유의 성분이 있는 그녀는 자체 면역력이 매우 뛰어난 편이었으므로 각종 병마에 강한 편이었다.

타인에게서 기침병이 옮았다.

다른 이에겐 흔한 경험이지만 밀라니아에겐 생소했다.

더는 온전한 대마녀가 아니라는 증거인 것만 같아, 불안해진 그레칸이 인상을 썼다.

“안 그래도 허약한 몸이 더 허약해졌다는 뜻 아니야, 그거.”

* * *

그녀가 끙끙 앓았던 어젯밤, 그레칸은 이 일대를 모조리 뒤져 기침병과 감기에 좋다는 온갖 약재를 다 구해 왔다.

간간이 잡초가 섞여 있긴 하지만 밀라니아도 알고 있는 약재였다. 문제는 맛이 꽤 쓰다는 것이었다.

그레칸은 약효가 강한 풀을 하나 길게 뽑아내어 고기에 둘둘 싸매고 밀라니아에게 건넸다.

밀라니아는 꼬치를 들어 보이며 항의했다.

“그것도 먹고 이것도 먹고.”

그레칸은 한 치의 타협도 없는 깐깐한 협상가처럼 굴었다.

간밤에 그녀가 감각 공유를 시도하려는 그를 강하게 떨쳐 냈던지라 이번만큼은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완강한 태도였다.

결국 밀라니아는 투덜거리며 그레칸에게서 약풀로 싼 고깃덩이를 받아들였다.

약풀은 소금을 친 고기 맛마저 씁쓸히 만들 만큼 썼다.

그녀는 떨떠름하게 고기를 질겅거렸다.

“잔소리하는 집사 같으이.”

그레칸은 푸핫 웃었다.

낄낄거리며 모닥불 위에 드리운 꼬치를 뒤집자, 밀라니아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레칸이 웃으며 약풀로 감은 고기를 내미니 웃음은 싹 날아갔다.

“먹어.”

“먹었지 않느냐.”

“더 먹어야지.”

“하아…….”

결국 실랑이 끝에 다시 약풀을 씹는 그녀의 얼굴이 우중충해졌다.

그레칸이 집사처럼 잔소리하고 참견하는 건 식사 시간뿐만이 아니었다.

“따뜻한 물.”

세수를 하기 위해 샘에 손을 넣으려던 밀라니아의 앞으로 어디서 구해 왔는지 가운데가 넓게 파인 바위가 나타났다.

그 안에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샘물로 씻어도 괜찮다.”

“감기 걸려.”

“…….”

“내가 씻겨 줘?”

결국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대령한 물로 얼굴을 씻었다.

이것저것 챙겨 주는 그레칸은 세심했고, 역시나 타협은 없었다.

건강에 안 좋을 것 같다 싶으면 칼같이 쳐내는 것이, 손이 베일 것 같은 깐깐함이었다.

바위에 앉은 그레칸은 황궁에서 챙겨온 보석 빗으로 밀라니아의 은발을 빗어 주고 있었다.

그의 무릎에 등을 기대고 앉은 밀라니아는 나른히 잠이 쏟아졌다.

목을 뒤로 젖히고 그레칸의 무릎과 허벅지 사이에 뒷머리를 대었다.

“졸리면 자.”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두피를 꾹꾹 눌러 주었다. 손이 크고 따뜻해서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다.

어제 자신의 품에서 바들바들 떨던 그레칸을 기억하는 밀라니아로서는 반나절 만에 보살핌받는 입장이 된 것이 어색하고 머쓱했다.

“어제랑은 상황이 달라졌구먼.”

무심코 중얼거리니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레칸이 피식 웃었다.

“우리는 천생연분일 거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당신은 헐렁이 같은 면이 있으니 내가 챙겨 줘야 하고. 나는 뭐, 당신이 안아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이 정도면 천생연분, 맞잖아?”

“……어허.”

할 말이 없어진 밀라니아는 멋쩍어서 목만 울렸다.

내심 그의 말이 그럴듯하다 여기며.

* * *

중간에 늑장을 피웠더니 상생의 다리에 도착했을 때는 예상 도착일보다 4일이 늦어졌다.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레칸도 밀라니아도 느긋했다.

“저기, 사람들이 보이는구먼.”

그레칸은 상생의 다리가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산자락 두꺼운 나무 위에 멈추어 섰다.

산이 워낙 높아서 아래가 한눈에 보였는데 바닷가 해변과 공사 현장, 그리고 드글드글 모여 있는 사람들도 개미처럼 작은 크기로 눈에 들어왔다.

“그란젤에게 듣기로는 오십 명쯤 모였다 했는데 지금 보니 이백 명은 되는 것 같지 않누.”

“그러네.”

“저 절벽에서 빈둥거리는 건 가만있자…….”

바닷가와 가까운 절벽 위에 몇 명이 모여 있었다.

눈을 가늘게 떠서 안력을 돋운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르베리안즈와 체라가 아니냐. 나탈리아도 있는 거 같고. 그란젤은 없구나.”

“…….”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어깨를 탁탁 쳤다. 저기로 한번 가 보자는 뜻이었지만 그는 미동이 없었다.

그녀는 의아하게 그레칸을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자 못마땅했던 표정이 순식간에 평범하게 바뀌었다.

“가고 싶어?”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지 않누.”

“지금 가면 소란스러워질 텐데. 아무리 평화 조약 맺고 사이가 좋아졌대도 내가 가면 별로 좋지 않을걸.”

밀라니아의 표정이 멍해졌다.

“뭐라?”

“생각해 봐. 르베리안즈는 아직 나만 보면 부들부들 떨 텐데, 지금 가서 만나 봤자 좋은 꼴 못 볼 거야. 그렇다고 당신만 갈 수도 없고.”

순간적으로 ‘그래도 될 것 같구나’ 하는 표정이 밀라니아의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그레칸의 눈빛이 금세 사나워졌다.

크흠, 헛기침한 밀라니아는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찌하누. 모처럼 2대륙에 모인 것인데 이대로 모르는 사람처럼 넘어가란 말이야?”

“어차피 황궁에서도 상생의 다리 공사 지원을 하고 있어. 조만간 만찬을 열라고 명령을 내리면 돼. 여기서 정신 사납게 구는 것보다는 황궁에서 회포를 푸는 게 낫잖아.”

하칸이 그레칸에게 공개 처형을 당하고 황궁은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그란젤을 대표로 삼는 인간 세력, 하나는 하이로드인 그레칸을 따르는 수인 세력이었다.

아직까진 그란젤보다 그레칸의 황궁 영향력이 더 컸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그래도 상생의 다리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었거늘.”

“10분의 1도 완성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레칸이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리의 기둥이 될 우물통이 열 개쯤 만들어진 상태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는 것도 아쉽긴 하지.”

밀라니아를 고쳐 안은 그레칸이 빠른 속도로 바다를 향해 떨어졌다.

그러고는 평지를 걷는 것처럼 허공을 밟고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우물통 위에 당도했다.

10번째 기둥이라고는 하나 다리 간 거리가 꽤 되어 육지가 어른거려 보였다.

“예상은 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은 공사 같군.”

우물통 위에 발을 딛고 선 밀라니아는 주변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이 푸른 바다였다.

고개를 내밀자 저만치에서 바닷물이 넘실거렸다.

우물통 위에서 바다와 저 멀리 있는 산과 육지 근처에서 동동거리며 움직이는 인간과 수인을 둘러본 밀라니아는 우물통 가운데 털썩 주저앉았다. 몸을 뒤로 젖혀 누웠다.

하늘 가운데 뜬 해가 꽃이 향기를 뿜듯 햇빛을 뿌려 댔다.

밀라니아는 눈을 반쯤 감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그녀를 굽어보고 있었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맡아지고 끼룩거리는 물새 지저귀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산새들보다 두껍고 긴 울음소리였다.

밀라니아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딱딱한 우물통에 누워 있음에도 평온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아래쪽을 힐끗했다.

그레칸이 그녀의 발치에 앉아 우물통 밖으로 다리를 내놓고 있었다.

“밀라니아.”

“응.”

“다리가 완성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글쎄, 오십 년은 훨씬 넘게 걸리지 않겠느냐. 그란젤도 다음 대, 다다음 대까지 이어져야 할 대업이라 했으니.”

상생의 다리 건립은 다른 의미로 인간과 수인의 화합이었다. 단순히 두 대륙을 잇는 상징적 건물만이 아닌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바라보며 그레칸은 말이 없었다.

바닷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밀라니아의 눈이 스륵 감겼다.

“우리 이 다리가 완성되는 걸 볼 때까진 살자.”

밀라니아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레칸이 뭘 알고 하는 소리일까?

주어진 천수를 다하고도 살아 있는 자신.

존재 의의는 어렴풋 깨달았으되 그 끝은 오리무중이었다.

세상의 인과에서 벗어난 이 내 몸의 끝은 어디에 있을까.

내심 고민해 왔던지라 그레칸의 말에 가슴이 찔렸다.

행복하고 평온해도 내심 찜찜했던 마음 한구석의 그늘이 바늘 꽂힌 풍선처럼 사그라졌다.

“그것도 좋겠구나.”

그레칸이 벌떡 일어나 그녀의 옆에 누웠다. 그러고는 꼬물꼬물 아래로 내려가더니 밀라니아의 가슴에 뺨을 댔다.

두근두근. 심장 뛰는 소리가 그의 귀를 통과했다.

“기분 좋아서 미쳐 버릴 것 같아.”

끄응, 그레칸이 신음을 흘렸다. 밀라니아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이 평온한 분위기와 미쳐 버릴 것 같다는 그레칸의 감탄이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어울렸던 탓이었다.

갑자기 그레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왜 그러느냐?”

그레칸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장난 그만 치거라.”

속지 않는다는 뉘앙스로 밀라니아가 혀를 찼다.

“그게 아니라…….”

그레칸은 눈을 깜박거리다 다시 고개를 숙여 밀라니아의 가슴과 배 사이에 뺨을 대었다.

흠칫.

‘장난하지 말라 했거늘.’

그레칸의 반응이 괜히 신경 쓰인 밀라니아가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라?”

그레칸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왜 자꾸 그리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확장되었다.

마침내 밀라니아가 인상을 쓰자 그의 턱이 툭, 떨어졌다.

“……심장 소리가 두 개로 들려.”

눈이 마주쳤다.

밀라니아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이내 버럭 외쳤다. 잔뜩 당황한 얼굴로.

“말도 안 되는 소리! 심장 소리가 어떻게 두 개가 되어.”

“왜, 그럴 수 있잖아. 아이. 아이가 생기면…….”

떨리는 목소리에 밀라니아는 골이 올라 딱 잘라 말했다.

“난 피 흘리는 날도 없느니라. 그런 내가 무슨 임신을 하느냐.”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그레칸이 다시 그녀의 배와 가슴 사이에 귀를 갖다 대었다. 집중하여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레칸의 장난이라 생각한 밀라니아는 어이가 없었지만 집중하는 그레칸의 얼굴이 너무나도 진지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곧 그레칸이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들려. 콩닥콩닥, 작은 심장 소리.”

그녀의 눈동자도 동그랗게 커졌다.

“행복해지는 소리야. 어떡하지, 밀라니아?”

그레칸의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나, 행복해서 눈물 날 것 같아.”

밀라니아는 멍한 얼굴로 무심코 손을 배에 가져다 댔다.

그레칸의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밀라니아 님?”

의심이 깃든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잔뜩 집중하고 있던 두 사람이 소스라쳐 고개를 돌렸다.

우물통 아래에 빼꼼 고개를 내민 인어족이 있었다. 그 뒤에 업힌 건 스미스였다.

그레칸과 밀라니아의 얼굴을 확인한 스미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정말 두 분이셨군요!”

“스미스, 누구야?”

어디선가 소리가 튀어나왔다. 통신 마도구인 듯, 스미스가 손에 들고 있는 작은 돌에다 대고 외쳤다.

“밀라니아 님과 총통이요!”

“뭐어?!”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육지가 소란스러워졌다.

언제 육지까지 내려왔는지 르베리안즈로 추정되는 박쥐족과 빗자루를 탄 마녀 하나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레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휙 밀라니아를 보자 혼란에서 벗어난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게 되었구나.”

마주할 수밖에.

그레칸은 고민스러운 눈으로 육지 쪽에서 밀려오는 르베리안즈와 체라, 그리고 그란젤 등을 한 번 흘끗하고, 밀라니아의 아직 편평한 배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더니 결심한 듯 밀라니아를 덥석 안아 들었다.

“뭐 하는 게냐?”

그레칸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이 중요한 순간에 다른 놈들의 방해를 받을 순 없잖아.”

그리고 빠른 속도로 날아올랐다. 뒤에서 고함 소리가 크게 터졌다.

“야, 그레칸! 거기 안 서! 왜 도망가는 거야!”

르베리안즈와 체라, 그리고 얼떨결에 날아오른 날개 달린 개체들이 그들을 쫓았다.

“그레칸, 멈춰!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도 안 보고 갈 셈이냐!”

“응. 꺼져.”

“개자식! 너 지금 밀라니아와 내가 만나는 게 싫어서 그런 거잖아!”

“…….”

“그렇게 집착하다간 질려서 버림받을 거다!”

그레칸은 아랑곳하지 않고 속도를 높였다.

무시당한 르베리안즈의 눈에서 귀기가 흘렀다.

“안부 인사 정도는 해 줘도 될 것을.”

“그랬다간 또 개소리를 해 댈 거야. 방금 들었잖아? 악담하는 거.”

뒤에 추격하는 이들을 달고 있는 주제에 태도는 태연하기 짝이 없다.

다만 그녀를 향한 눈빛은 축축했고, 눈동자는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그 간극에 밀라니아는 웃었다. 문득 그레칸이 입을 벌렸다.

“아기 이름은 뭐로 정할까.”

그녀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졌다.

* * *

6개월 후.

밀라니아는 주방에서 냄비를 든 채 멀뚱멀뚱 서 있었다.

“뭘 넣어야 하는 거지.”

식탁 위에는 식재료가 가득했다. 냄비를 내려놓고 토마토 하나를 든 밀라니아는 다시 정지했다.

요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10분. 재료만 왕창 꺼내 놓고 영 진전이 없었다.

“내내 그레칸이 해 왔으니까.”

그레칸은 그녀가 주방 출입을 하도록 두지 않았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게 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굴었는데, 처음에는 유난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런 대접이 점점 편해져서 어느 순간 밀라니아는 소파 위에서 빈둥거리는 게 일상이 되었다.

지금 그레칸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어젯밤 내내 자지도 않고 그녀를 구경하더니, 잠이 뒤늦게 쏟아지는 모양이다.

“그레칸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이상하고…….”

무엇보다 배가 고프다.

임신한 뒤 입맛이 당긴 밀라니아는 입술을 핥았다.

머릿속에 몽실몽실 떠오르는 건 토마토 그라탕. 토마토소스와 양고기의 조합이 기가 막혔다.

임신 이후의 변화는 놀라웠다. 식욕이 늘었고, 입맛도 변했다. 무엇보다 고기를 잘 먹게 되었다.

편식이 고쳐졌다고 누구보다 그레칸이 기뻐했지만, 밀라니아는 배 속의 아기가 의심스러웠다.

‘아무래도 그레칸을 많이 닮은 것 같으이.’

입 안에 침이 고인 밀라니아는 결심한 얼굴로 토마토를 꼭 쥐었다.

물에 씻고 식칼로 잘라 냈다.

몇 개월 전에는 위제니아와 함께 학교 사람들을 위한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했었는데, 그새 손이 녹슬었는지 칼질이 어설펐다.

“이왕 만드는 거 그레칸이 해 온 것보다 맛있는 걸 만들어야겠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칼이 손에 익었다. 그녀는 보다 능숙해진 손길로 양고기를 다졌다.

그레칸이 맛있게 먹을 생각을 하니 입가에 미소가 고였다.

낮은 허밍이 새어 나왔다.

고작 야채와 고기를 썰고, 요리를 하는 것뿐인데 행복하다.

마력이 몸에 가득 찼을 때보다도 진한 충만감.

사랑과 행복, 충만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1년 사이, 그녀는 많은 것을 알았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오랜 시간을 살아와 모르는 것 드문 그녀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왜 황후가 그녀가 기껏 해 주었던 길고 긴 조언을 떨떠름해했는지도.

‘그때로 돌아간다면 좀 더 따스하게 위로해 줬을 텐데.’

비록 어리석은 짓을 하기는 했으나, 누구보다 사랑에 열정적인 여자였다.

‘황제에게는 따끔하게 충고해 줬을 테고.’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허덕였던 어린 마녀들도 따뜻하게 안아 줬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부터가 행복하다는 증거겠지.’

내내 평온한 영면을 바라오며,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밀라니아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배에 손을 올렸다. 봉긋 솟은 언덕처럼 볼륨감이 느껴졌다.

안에서 새어 나오는 마력의 파동.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고 있다.

마녀목을 어버이로 둔 밀라니아는 때때로 이 생명의 신비에 넋을 잃고 몰두했다.

‘아무래도 나보단 그레칸을 많이 닮은 것 같도다.’

그런 말을 하면 그레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날 닮았으면 나오기 어려울 텐데. 당신을 닮았으면 좋겠어. 힘들지 않게.]

괜찮다고 대꾸해도 심각한 얼굴이었다.

[당신은 아픈 걸 싫어하잖아. 아무래도 안 되겠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걱정 마. 몸을 바꾸는 마법은 아니어도 감각 공유가 있으니까.]

붉은 꽃의 저주를 그렇게 이용하면 안 된다고 타박을 놓아도 그레칸의 걱정하는 마음이 기꺼웠다.

사실 은근히 불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출산의 고통.

산고는 인간이 겪는 3대 고통 중의 하나라지 않은가.

그녀는 마법을 일으켜 냄비 아래 불을 붙였다.

‘요리가 완성되기 전에 그레칸이 일어날까.’

타오르는 마법 불꽃이 그녀의 마음에 감응하여 춤을 추었다.

* * *

그레칸은 잠들어 있었다. 오래된 악몽이 불청객처럼 찾아왔다.

100년 전.

천 년 제국의 르안나 황실은 멸망했다.

그날 황궁이 흘린 피로 인해 일 년간 황궁에선 피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흐으으. 흑. 흐윽. 흐흐흑.

오십 년간 손에 닿는 모든 걸 파괴했다.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핏방울과 눈물이 얼룩진 얼굴은 공허하게 저편을 바라보았다.

[제정신이 아니야. 이 미친 자식!]

흑계의 말란도르도, 박쥐족의 르베리안즈도 그에게 침을 뱉고 떠났다.

모든 걸 활활 태워 폐허가 된 땅 위에서 그레칸은 환상을 보았다.

파릇한 풀잎 위에 편안히 누워 있는 밀라니아가 자신을 돌아보는 얼굴이었다.

심장이 찌부러질 듯 아팠다. 시간이 지나도 사그라지지 않는 통증.

그레칸은 울고 토하고 고통스러워하고 또 스스로를 죽였다.

정신은 피폐해지고 있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었다.

가공할 회복력은 그를 몇 번이고 되살렸다.

스스로 목을 그어도 쓰러졌다 일어나면 치유되어 있었다.

그럴 때면 그레칸은 화가 나서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점점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이러다 이 손으로 모든 것을 없애서, 종국엔 혼자 남으리라.

그때가 되면 밀라니아를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 * *

그레칸은 잠에서 깼다. 눈가에 고인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악몽을 꿨어.’

멍한 머리로 덤덤히 생각했다. 아직까지도 그 시간 속에 고여 있는 느낌이었다.

끔찍한 감각에 어깨가 잔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정원을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나무 사이 설치한 해먹 위에 있었다.

무표정하고 삭막한 얼굴로 풀이 깔끔히 정돈된 땅을 내려다보았다.

꿈의 여운이 그의 발목을 잡고 끌어내렸다. 끝없이, 아래로.

그 순간.

“그레칸, 일어났느냐?”

그림자가 걷혔다.

“그레칸?”

안쪽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손등으로 눈물 자국을 없앤 그레칸의 얼굴에 말간 웃음이 떠올랐다.

“일어났어요, 여보!”

밀라니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레칸의 입에 붙은 호칭이었다.

무려 6개월 동안이나.

정원으로 걸어 나온 밀라니아가 신경질을 냈다.

“그놈의 여보 소리 말랬지 않누!”

그레칸은 생글생글 웃으며 해먹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밀라니아를 해먹에 앉히고 날씬한 허리를 껴안았다.

살짝 튀어나온 배에 귀를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콩닥콩닥.

쿵쿵쿵쿵.

두 개의 심장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행복해지는 소리다.

어깨에 소복하게 쌓여 있던 악몽의 잔재가 조금씩 녹아내렸다.

그레칸은 깊이 안도했다.

“흠흠, 토마토 그라탕을 해 보았다. 네가 일주일 전에 해 주었던 거 있잖느냐.”

“……요리했어? 왜 그랬어. 주방에 들어가지 말랬잖아.”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었느니라.”

“낮잠을 괜히 잤네.”

“그러게 밤에 자라고 하지 않았누.”

“여보 얼굴이 너무 예뻐서 어쩔 수 없었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나직한 한숨 소리에 그레칸은 키득거렸다.

“행복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아.”

밀라니아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여보 소리만 하지 않는다면 미치지 않게 옆에 있어 주마.”

“…….”

“왜 아무 말이 없느냐?”

“감동해서.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여보를 포기할 수는 없어.”

진지한 목소리에 어이없다는 듯 웃는 밀라니아.

그레칸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사랑해, 여보. 옆에 있어 줘서 고맙고. 행복해서 미칠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

“그래. 이미 미친 것 같구나.”

밀라니아의 핀잔에도 그레칸은 속없이 헤실거리며 배에 얼굴을 비비적댔다.

길들여진 짐승은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는다.

<집착 남주를 사육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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