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이기적인, 이타적인
한 달이 지났다.
더는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크리스털 방으로 들어온 말란도르는 피고름이 말끔히 떨어진 그레칸을 보고 침묵했다.
침대에 바싹 다가가 그에게 얼굴을 가져다 댔다.
머리에서부터 심장 부근까지 천천히 움직이며 냄새를 맡은 그가 허리를 펴자 밀라니아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놀랍군. 위급한 상황은 지났어.”
밀라니아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말란도르는 그녀를 흘끗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팔에 붕대를 칭칭 맨 꼴이 환자와 다를 바 없었다.
당장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싶었지만 방해하지 않는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불만스러운 마음을 억눌렀다.
딱딱한 목소리에 밀라니아가 고개를 들었다.
“내 독은 뼈 하나하나, 혈관 하나하나에 침투하는 사기. 만지는 것만으로도 시종 몇 명이 나자빠졌어.”
“…….”
“완전히 해독된 게 아니야.”
그는 그레칸에게 시선을 옮겼다.
“바보 같은 놈.”
말란도르는 씁쓸함과 어쩔 수 없는 체념이 섞인 한숨을 쉬었다.
“이놈은 너한테 미쳤어, 밀라니아.”
덤덤한 중얼거림에 밀라니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잠시 그런 그녀를 본 말란도르가 분위기를 바꾸었다.
“걱정 마. 만약 죽지 않고 살아난다면 그레칸은 빠르게 회복해 나갈 테니까.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게 중요해. 내장이 흐물흐물해진 상태이니 소화하기 좋은 음식을 먹이는 게 좋겠지.”
“알았다.”
“새롭게 몸이 구성되어 나가는 것이라, 혈기가 머리끝까지 치달을 수 있어. 조심해. 광기에 사로잡히면 끔찍해질 거야.”
말란도르의 경고에 밀라니아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그렇게 쉽게 얘기할 게 아니야!”
밀라니아가 침착하게 눈을 맞추었다.
“다른 이가 있다더라도, 그들이 그레칸을 감당할 수 있을 성싶으냐?”
말란도르는 대답하지 못했다. 밀라니아가 그럴 줄 알았다는 시선을 보내자 입매를 단단히 굳혔다.
“그럼 내가.”
“그럴 필요 없느니. 통제 불능의 상황이 오면 피하겠다.”
말란도르의 눈이 의심스러워졌다.
“정말이지?”
“그래.”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제정신 아닌 그레칸을 마냥 내버려 두진 않을 것이다.
* * *
하칸의 공식 컬렉션 방.
똑똑.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부관이 총총거리며 그의 곁에 섰다.
“명하신 대로 반란 종자들을 감옥에 가둬 놨습니다.”
“그런데.”
왜 들어왔냐는 뉘앙스에 부관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고는 한층 더 조심스럽게 굴었다.
“간밤에 탈옥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뭐? 탈옥?”
요 며칠 부쩍 핼쑥해진 뺨과 핏발이 선 눈을 차마 바로 마주할 수 없었던 부관이 슬그머니 시선을 떨어뜨렸다.
“외부의 조력이 있어서 대처가 늦었습니다.”
“혹시 총수라도 온 거야?”
“마법을 쓰는 자가 한 명 있긴 있었는데 총수처럼 보이진 않았습니다. 대부분이 검사였고, 맨 끝 감옥에 갇혀 있는 반란 종자 셋이 소란을 틈타 빠져나갔어요.”
“빌어먹을!”
하칸이 거세게 발을 굴렀다. 푸드덕 피어오른 깃털이 먼지를 뿜어냈다.
원래도 까다롭고 짜증이 많아 대하기 편한 상관은 아니었지만 크리스털 방의 비극 이후로는 손대면 썰릴 듯한 칼날처럼 날카로워서 부관은 적잖이 곤욕스러웠다.
하칸이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호, 혹시 하이로드의 상태는, 여전히 아무도 몰라?”
“접근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아직도?”
“흑계의 손님과 크리스털 방의 밀라니아 님은 가능하시지만, 밀라니아 님은 나오지 않고 흑계의 손님은 말을 하지 않으셔서…….”
“알아야 해. 하이로드가 일어날 수 있는지, 아니면…….”
하칸은 말끝을 흐렸다. 왠지 그가 하려던 말을 알 것 같아서 부관의 목울대가 눈에 띄게 불거졌다.
이상하게 초조해 보이는 하칸은 마침내 결심한 듯 눈을 까뒤집었다.
“일단은 반란 종자의 그, 하찮고 끈질긴 의지를 모두 꺾어 버려야 해. 하이로드에 대한 문제는 그다음이야. 너.”
“예!”
“공표문을 작성하여 사방에 퍼뜨려. 일주일 후, 정오, 황궁 앞 광장에서 반란 종자의 처형식이 있을 거라고.”
눈을 크게 뜨는 부관을 바라보는 하칸의 눈동자가 반들거렸다.
“반란 종자의 수괴놈이 나타나면, 망설임 없이 목을 따는 거야.”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그럴 때 아닌 때가 어디 있어! 포로의 쓸모는 미끼 역할에 있는 거야. 지금 다 처리해야 돼, 지금.”
강박적으로 중얼거리는 하칸의 정신 나간 모습에 부관은 소름이 돋았다.
* * *
밀라니아는 넓은 탁자 위에 빈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릇을 놓을 곳이 없어서, 놓여 있던 그릇 위에 겹쳐 올렸다. 그렇게 해서 쌓인 그릇이 제법 많았다.
가득 담겼던 음식은 모조리 그레칸의 배 속으로 사라졌다.
영양 공급이 필요할 거라는 말란도르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그레칸은 쇠약해져 피를 갈구하는 박쥐족처럼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그의 허기를 채워 주느라 발 빠르게 움직이는 밀라니아의 발바닥에 근육이 잡혀 있었다.
초콜라떼 사건 이후로 먹고 마시는 문제는 다른 이들의 손을 타고 있지 않았으므로, 모두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게으름뱅이였지만, 요즈음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육식 취향답게, 고기가 듬뿍 들어가야 잘 먹는구먼.’
빈 그릇을 채우기 위해 주방으로 내려가려는 찰나였다.
“으…….”
그녀는 곧장 몸을 돌려 그레칸에게 다가갔다.
가슴을 움켜쥐고 허리를 둥글게 만 그가 마른 신음을 뱉어 냈다.
잠깐 정신을 차렸을 때를 제외하고 그레칸은 내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손이 많이 가는 하루하루였지만 밀라니아는 조금도 귀찮음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식욕이 왕성해질수록, 먹는 음식량이 많아질수록 죽음에서 비켜 가고 있는 것이었으므로 귀찮음은커녕 기쁨이 커져 갔다.
침대에 앉아 그의 손에 손을 얹었다. 그레칸의 손가락이 담쟁이 넝쿨처럼 밀라니아의 손에 얽혔다. 손아귀 힘이 강해졌다.
살짝 얼굴을 찌푸린 밀라니아의 품으로 그레칸이 파고들었다.
“……그레칸.”
사락.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레칸은 그녀의 손길에 반응하는 것처럼 더욱 강하게 파고들었다.
고통을 잊고자 하는 필사적인 움직임이라는 걸 알기에 제지하지 않았다.
강인한 팔로 허리를 안고, 그레칸이 고개를 들었다.
살짝 뜨인 눈이 혼탁했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혹시.’
그녀는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뜨겁다. 다시 그와 눈을 맞추었다. 흐릿한 눈동자는 열에 들떠 있었다.
그레칸이 홀린 듯이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맞대어졌다. 뜨겁고 건조한 입술 껍질이 그녀의 마른 입술을 긁었다.
밀라니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를 끌어안았다.
그레칸의 몸이 회복되면 회복될수록 그는 그녀와 닿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굴었다. 정신이 없는 상태임에도.
밀라니아는 어미 새처럼 그를 안고 먹이를 먹여 주고 애정을 갈구하는 몸짓에 화답해 주었다.
문득 밀라니아가 눈을 반짝 떴다. 바싹 붙어 있던 상체의 틈으로 그의 손이 파고들어 있었다.
흠칫하는 그녀에게 그레칸이 입술을 밀어붙였다.
밀라니아의 눈이 느릿하게 닫혔다. 옷이 벗겨지고, 눅눅한 공기가 피부에 내려앉았다.
불현듯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은 그레칸이 머리를 뒤로 물렸다.
밀라니아는 눈을 떴다. 그레칸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레칸?”
“…….”
“정신이 들었느냐?”
그레칸은 그녀의 헐벗은 모습과 제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하는 거야, 밀라니아. 나 지금, 아니, 어서 내 곁에서 물러나.”
그레칸의 목소리는 초조했다. 곧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제 손을 보고서 소스라쳤다.
떨어지는 손을 붙들고, 밀라니아는 태연히 말했다.
“이리 오거라.”
“뭐?”
“갈 곳 없이 솟아오르는 혈기와 생기를 풀어내야 한다.”
“…….”
“내게 하거라.”
눈동자가 확장된 그레칸이 돌연 미간을 구겼다.
“이럴 것까진 없어.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아. 이런 걸로는, 결코.”
이를 아득 가는 그레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찌푸려져서 주름이 생긴 눈썹을 밀라니아가 엄지로 천천히 쓸었다.
그 농밀한 손놀림에 그레칸의 이마가 저절로 반듯해졌다.
“내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안다고 그러지 않았어?”
눈을 깜박이는 그의 눈매를 쓸어 낸 밀라니아가 속삭였다.
“날 봐, 그레칸. 내가 싫은데도 네게 몸을 열려는 것 같으냐?”
“…….”
그레칸이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불만족스러운 듯, 초조한 듯 애가 타는 음성이었다.
그가 그녀를 파헤치겠다는 듯 그녀의 금빛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눈빛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밀라니아가 피식 웃자, 그레칸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성정이 급한 그는 결코 인내심이 깊지 않았지만, 밀라니아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가 가진 최대치의 인내심을 발휘하곤 했다.
지금 이 순간은, 인내심을 바닥까지 긁어모아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미친 괴물처럼 날뛰어 그녀를 먹어 삼키고 말 것이다.
“무서워. 당신을 상처 입힐까 봐.”
밀라니아는 눈을 반쯤 뜨고,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너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알아? 나도 날 못 믿겠는데. 내 속에 괴물이 살고 있어.”
밀라니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레칸의 머리를 쓰다듬고 목덜미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토닥토닥.
“언젠가부터 너는, 날 한 번도 다치게 하지 않았느니라.”
“…….”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내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곤 생각 못 했느니. 이 세상에서 가장 널 못 믿는 사람을 꼽는다면 그게 나였을 텐데.”
그레칸의 어깨가 굳어졌다. 뒤이은 목소리에 웃음기가 뱄다.
“하지만 이제는 믿느니라.”
“…….”
“그러니까 걱정 마라, 그레칸. 넌 날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야. 널 믿지 못한다면 날 믿거라.”
묘하게 확신 어린 말투에 그레칸은 서서히 몸이 이완되었다.
그는 밀라니아의 목덜미에 경애를 담아 입을 맞추었다.
“역시, 당신이 내 중심이야.”
“…….”
“내가 정신을 잃을 것 같으면 머리를 후려쳐도 돼.”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그레칸의 볼은 흥분으로 잔뜩 붉어져 있었다.
발긋해진 눈시울과 까맣게 변한 눈동자가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밀라니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그레칸이 그녀 안으로 들어갔다.
단단한 남성이 한 번도 외부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던 은밀한 여성을 빠듯하게 채워 나갔다.
“하아.”
깊게 숨을 내쉬는 밀라니아를 그레칸이 꼭 끌어안았다. 맨몸이 바싹 밀착되었다.
그레칸의 팔에 힘줄이 곤두섰다.
삽입의 충격이 한결 가신 밀라니아는 움직임 없는 그레칸이 의아하여 근육이 불끈거리는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레칸?”
“아, 나…….”
그레칸이 나직하게 신음을 흘렸다.
밀라니아가 그를 보기 위해 몸을 움직이자 흠칫하고는 강한 힘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움직이면 못 참아.”
색색거리는 숨소리에 흥분이 그득 배어 들었다.
그레칸의 팔이 바르르 떨렸다. 참을 수 없는 흥분과 성적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내가, 막 움직이면, 정말 때려도 돼.”
“그래.”
밀라니아의 속눈썹이 날갯짓하듯 흔들렸다. 다리 사이에 파고든 그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뭘 했다고 커지는 거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었지만 천 년을 살아왔다.
누군가의 정사 경험을 들었던 적도, 심지어 목격한 적도 있었다.
자극을 받으면 흥분한다. 그러나 자극이 없는데도 흥분하는 건 무엇인가.
뜻밖의 의문에 몰두하려던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더는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좁은 통로를 꽉 채운 남근이 결코 빠르지 않은 속도로 빠져나갔다.
그레칸이 급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침대 머리판을 짚은 팔에 불끈 솟은 힘줄로 알 수 있었다.
“아…….”
밀라니아가 나직하게 신음했다. 야릇한 숨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자 그레칸의 목에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미안.”
꺼질 듯 연약한 목소리가 그녀의 위로 떨어졌다.
뭐가? 물으려던 밀라니아는 갑자기 빨라진 그의 움직임에 입을 ‘헉’ 하고 벌렸다.
자기통제력을 잃어버린 그레칸은 미친 말이 질주하듯 했다.
팍!
밀라니아는 몸이 뒤로 밀려날 것 같아서 움찔움찔 떨었다.
반사적으로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했지만 그레칸이 기다렸다는 듯 따라붙었다. 그러고는 다시 뚫어 버릴 것처럼 박아 댔다.
“하악!”
밀라니아의 나직한 신음은 곧 교성이 되었다.
그 소리에 흥분한 그레칸이 성기를 입구까지 뺐다가 강하게 박았다.
밀라니아가 뭘 하든, 심지어 숨을 쉬는 것조차 그에게 자극이 되는 것 같았다.
몸이 미친 것처럼 흔들려서, 하는 수 없이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자세가 잡히자 다시 허리 짓을 시작했다.
뜨거운 내벽을 쓸어 대는 남근은 점점 더 성이 나는지 시간이 지나도 가라앉기는커녕 흉포한 기세가 더해지기만 했다.
아, 아, 아! 밀라니아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신음도 텀이 짧아졌다.
* * *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그레칸은 다섯 번 토정했고, 그녀 역시 전에 느껴 본 적 없는 전율에 일곱 번 몸을 떨었다.
딱 죽을 만큼 피곤했다. 꺼지지 않는 화염의 바다에 떨어졌을 때, 살아나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을 때보다도 세 배는 더 힘들었다.
내가 마구잡이로 굴 때는 머리를 때려. 그레칸의 말이 머리에 수없이 맴돌았다.
그레칸이 세 번 토정하고, 즉시 허리를 움직였을 때는 참다 못 해 머리를 때리고 밀어냈다.
정신이 나가다 못해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레칸은 잠깐 멈칫했다. 그 모습에 적어도 정신이 완전히 나간 건 아니구나. 안심하려는 찰나, 그레칸이 그녀의 손을 끌어내려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손가락 마디를 빨며 허리를 움직이는 그의 눈을 본 밀라니아는 그가 멈추는 것보다 자신이 기절하는 게 빠르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손목을 아작 씹은 그레칸은 흥분이 머리끝까지 치달은 얼굴로 거칠게 신음을 흘렸다.
그때 씹힌 흔적이 아직도 손목에 동그랗게 남아 있었다.
열정적으로 움직이는 그는 도저히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몸을 겹치면 겹칠수록, 뜨거운 씨물을 토해 낼수록 더 생생하게 살아나는 듯했다.
“그레칸……!”
쉰 목을 쥐어짜 외치자 그레칸이 으르릉거렸다.
홱, 몸이 뒤집힌 밀라니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매끄러운 엉덩이가 드러나자 그레칸의 눈이 뒤집혔다. 육중한 몸이 그녀의 몸을 내리눌렀다.
말캉한 엉덩이에 우뚝 솟은 두꺼운 성기가 닿았다.
땀에 젖은 피부에서 미끄러진 성기가 엉덩이의 부드러운 틈 사이에 꽂혔다.
그 상태로 그레칸이 몸을 튕기자 눅진하게 젖은 구멍에 두툼한 귀두가 꽂혔다가, 빨려들어 갔다.
“으음.”
자세가 바뀐 탓인지 좀 더 깊게까지 들어가는 것 같았고, 압박감도 심했다. 묵직하고 탄탄한 육체에 깔린 밀라니아는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흐읏, 신음이 흘러나가자 그레칸이 팔꿈치를 침대에 대고 몸을 떼어 냈다.
밀라니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산소가 부족했던 폐가 공기를 열렬히 환영했다.
급하게 숨을 쉬는 그녀의 어깨와 목덜미가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유려한 선이 부드럽게 일렁이는 모양이 그레칸의 까만 눈에 꽂혔다.
그레칸의 입술이 벌어졌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이고, 그대로 밀라니아의 목덜미를 물었다.
“윽!”
골반을 붙잡고 그레칸이 허리짓을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로 꽂히는 성기가 밀라니아의 다리 사이를 푹푹 쑤시기 시작했다.
“하읏! 아아, 아!”
반복적으로 텀 짧은 신음을 흘리는 밀라니아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윽고 그레칸이 그녀의 손에 손을 얹고 깍지를 꼈다.
땀이 배어 축축하고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을 집어삼켰다.
그레칸이 고개를 들었다. 물린 목덜미에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그레칸은 상처를 위로하는 짐승처럼 이빨 자국 위를 할짝였다.
통증이 지나간 곳을 뜨거운 혀가 핥자 묘한 감흥이 몰려와 밀라니아가 앓는 신음을 흘렸다.
“밀라니아.”
지독하게 가라앉은 허스키한 목소리가 밀라니아의 지친 귀를 휘감았다.
“짐승, 같은 놈…….”
밀라니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욕설을 퍼부었다. 그레칸이 웃는 듯 가슴을 들썩거렸다.
“뭐 하는 게야.”
그녀는 색색거리는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말없이 새로 생긴 이빨 자국 위로 입을 맞춘 그레칸이 뒤늦게 대꾸했다.
“반려에게 남기는 늑대족의 각인이야.”
“흐읏.”
“난 아주 예전부터 당신에게 각인해서 이런 행위는 필요하지 않지만…….”
“필요하지 않다 하지 않았느냐!”
“기분이 좋아서. 당신에게 내 흔적이 남는 게…….”
이제 완전히 정신이 든 그레칸이 손을 내려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방금까지의 거친 동작과 달리 섬세한 손놀림이었다.
밀라니아의 목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레칸은 그녀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며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붉게 난 이빨 자국이 가슴을 진동시켰다. 격정을 참지 못하고 그는 그 위에 입술을 내렸다.
* * *
젖은 수건으로 그녀를 닦아 준 그레칸은 그녀를 안아 소파로 옮기고, 침대 시트를 갈았다.
다시 밀라니아를 침대로 옮기자 몸을 돌린 밀라니아가 엎드린 채 새근거렸다.
그레칸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옆에 엎드려 누웠다.
밀라니아는 이대로 기절해 버리고 싶었지만, 그레칸의 시선이 느껴지자 잠이 달아났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그레칸과 딱 눈이 마주쳤다.
그레칸이 입꼬리를 올렸다. 물을 머금어 활짝 핀 장미처럼 싱그러웠다.
‘내 꼴은 보지 않아도 알겠구먼.’
그레칸의 정반대일 것이다. 어이가 없어 피식 웃자 그레칸의 눈에 웃음이 아롱아롱 맺혔다.
“……죽다 살아났어.”
밀라니아는 눈동자만 굴려 그레칸의 여기저기를 뜯어보았다.
상태를 물어보지 않아도, 전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 겉으로도 보였다.
“네가 쓰러진지 한 달이 넘어 두 달이 되어 간다. 일어나면 진상을 물어보겠다고 단단히 작정했어.”
“…….”
“내게 할 말이 있지 않느냐.”
쉰 목소리로 속삭이자 그레칸은 그녀의 목에 수건을 얹어 주며 곤란한 얼굴을 했다.
“내 예상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그런다.”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피곤한 얼굴을 응시하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달싹여 조용히 설명했다.
밀라니아는 그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새겼다. 설명을 곱씹고는, 확인했다.
“그렇다면 너는 이제 얼마든지 내가 느끼는 걸 느낄 수 있다는 말이냐?”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그레칸이 어기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밀라니아가 빤히 쳐다보자 좀 더 확실히 고갯짓을 한다.
“…….”
“난 이걸 감각 공유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밀라니아의 눈빛이 점점 의미심장해져서 그레칸은 서둘러 말했다.
“반대도 가능하지. 내가 느끼는 걸 밀라니아도 느낄 수도 있어.”
“……뭐라고 그러려는 게 아니다.”
밀라니아는 한숨을 쉬었다.
담담한 말투에 그레칸의 얼굴이 밝아졌다.
“밀라니아가 날 죽이고 싶다면, 얼마든지 심장의 연결을 끊어 내면 돼.”
괜찮다 했던 밀라니아는 도리어 그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또 그런 말을 하는구나.”
“내가 죽어도 밀라니아는 얼마간 더 살아갈 수 있어. 내 수명을 전해 받을 테니까.”
전혀 기쁘지 않다는 표정으로, 밀라니아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너에게만은 정녕 저주가 아니냐. 한 사람에게 온전히 맡겨지는 인생이라니.”
“저주라니.”
“축복이잖아.”
그 말에 뜻밖에도 밀라니아는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뭔가 울컥하고 치밀었다.
황금색 눈에 눈물이 가득 찼다.
밀라니아가 우는 것을 처음 보는 그레칸은 표정이 무너질 정도로 당황해서 몸을 일으켰다. 밀라니아는 조용히 눈을 깜박였다.
다시 그녀의 옆에 누운 그레칸이 조심스럽게 검지를 그녀의 눈가에 댔다. 막 흘러내린 눈물이 손가락에 고였다.
“울지 마.”
“울지 않는다.”
밀라니아가 냉랭하게 말하니 그레칸은 손가락을 비벼 눈물을 없애면서 말갛게 웃었다. 이내 눈빛에 긴장감이 어렸다.
“이건, 감각을 공유하지 않아도 알겠어. 착각이면 접싯물에 코를 박을 거야.”
“너 또 그런 말을!”
그가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자 밀라니아의 얼굴에서 냉한 기운이 사그라졌다.
긴장이 사이사이 배인 목소리로, 그레칸이 속삭였다.
“혹시 밀라니아, 날 사랑해?”
“…….”
“만약 그렇다면…….”
간절한 눈으로.
“함께해 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고독한 생을.”
손가락으로 다시 눈물을 받은 그레칸이 다행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이 바보 같고, 또 사랑스러워서 밀라니아는 눈물 젖은 눈으로 빙그레 웃었다.
잇새로 한숨이 흘렀다.
부정적인 대답을 예감한 그레칸의 떨리는 눈이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만약 싫다면…….”
“…….”
“어쩔 수 없지.”
“…….”
“그래도 끝까지 쫓아다닐 테니까…….”
섣부른 반응에 밀라니아는 쯧, 혀를 찼다.
“어쩔 수가 없지 않느냐.”
“…….”
그레칸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는 치미는 감격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격정으로 휘몰아치는 눈동자가 밀라니아에게 못 박혔다.
모든 격한 감정은 두 눈에 가둔 듯 그레칸은 더없이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여 밀라니아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의 강인한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비로소 잠이 쏟아져 내렸다.
* * *
평소보다 이르게 일어난 하칸은 두 달 동안 내내 그랬던 것처럼 부리나케 부관을 불렀다.
“크리스털 방은 어떠해?”
“평소랑 다를 게 없습니다. 밀라니아 님이 음식을 가져가시고요. 접근을 할 수 없어 상황을 알 수는 없지만 하이로드께서는 아직도 병상에 계신 것 같아요.”
부관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그를 힐끗거렸다.
‘언제는 하이로드가 모든 수인들의 희망인 것처럼 굴었으면서. 여태 아픈 상태라는 데 안심하는 것 같잖아.’
두 달 전 크리스털 방의 비극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다.
하칸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하이로드에게 앙심을 품은 인간의 무리가 저지른 짓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치고 하칸의 반응이 영 수상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며칠 전의 일만 해도 그렇다. 심각하게 생각에 잠기려던 부관은 하칸의 질문에 현실로 돌아왔다.
“수장들에게도 소식을 전했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하라고 말이야.”
“전하긴 했는데…….”
“했는데 뭐. 또 뭐야.”
기겁한 하칸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부관은 피가 바싹바싹 말랐다.
요즘 황궁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이유.
“인어족의 수장께서 바다로 돌아가신다고 연통 주셨습니다.”
“이번엔 인어족이야?”
하칸이 얼굴을 구겼다. 한 달 새 벌써 다섯 명의 수장이 황궁을 빠져나갔다.
그날 하칸의 침실은 베개가 터지고 장식품이 깨지는 등 엉망이었고, 인간 노예를 움직여 그걸 치운 것이 부관이었다.
그날의 대화가 아직도 생생했다.
[난 빠지겠어.]
[무슨 소리야?]
[이미 살 만큼 살았어. 버려진 일족들이 날 원망하는 것도 알고. 내가 결정을 바꾼다 한들 뭐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가 여기 박혀 있는 건 일족의 세를 줄이는 길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았어. 깨달은 이상 이대로 있을 순 없지.]
[일족으로 돌아간다는 거야?]
[그래.]
[바보 같은 선택이네. 사냥할 짐승도 없고, 설사 있다 할지라도 그렇게 둔해 빠진 몸으로 사냥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빈정거려 봤자야. 파괴하는 건 쉽지만, 되돌리긴 어렵다 했나?]
[그래. 당연한 거 아니야?]
[그래도 일족들과 노력해 봐야지. 일족들이 여전히 날 수장으로 여겨 줄지는 모르겠지만.]
“알았어. 나가 봐.”
부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빠져나가고 홀로 남은 하칸은 손톱을 씹어댔다.
길게 자랐던 손톱은 대부분 부러지고 갈려 짧아진 상태였다.
‘수장들이 떠난 건 괜찮아. 그 간사한 것들은 어차피 하이로드가 몸을 회복하면 다시 돌아올 테니까. 그놈들이 밖에서 뭘 하겠어? 이미 내가 제공한 것에 취해서 사냥하는 방법도 까먹었을 텐데.’
위안했지만 하칸의 마음 한편에 불안감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하이로드가 깨어나면…….’
그게 가장 불안했다.
‘알까?’
손톱을 질겅질겅.
‘누가 한 짓인지, 알아낼까? 일어나자마자 할 일은 뻔하지. 범인을 잡아내려고 할 거야. 괜찮아. 흔적은 다 없앴어. 시종도 죽였고, 주방장도 사고로 위장해서 죽였고.’
아는 사람은 시종을 죽이고 남은 초콜라떼를 처리한 그의 일족 전사뿐인데, 불안감이 극심해진 하칸이 일주일 전에 그마저 처리했다. 그러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로소 안심한 하칸의 손톱이 치아 사이에서 해방되었다.
손수건으로 손을 벅벅 닦으면서 하칸은 벌떡 일어났다.
“하이로드가 일어나도 괜찮아. 수장들이 하는 꼴을 보니 하이로드의 부재는 아직 시기상조야. 그러니 깨어나는 건 좋아. 나쁘지 않은 일이야.”
그레칸 대신에 황궁을 운영하면서 내정을 장악했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절절히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그레칸 없는 황궁은 그의 통제에서 벗어날 것이다.
완전히 수장들을 굴복시키기 전까지는 그레칸이 강대한 무력으로, 꺾이지 않는 절대자로서 군림할 필요가 있다.
“일단은 불도마뱀 의사를 보내 주면 되겠지.”
꺼림칙한 불안을 모두 정리한 하칸은 한결 상쾌해진 얼굴로 옷을 갈아입었다.
반란 종자 레지스탕스의 수괴를 잡을 함정을 팔 시간이었다.
* * *
황궁 앞 광장 한가운데엔 화형대가 다섯 개 준비되어 있었다.
화형대 가운데 높이 선 나무 기둥에는 인간, 또는 수인 혼혈, 심지어는 수인도 두세 명씩 묶여 있었다.
하칸이 준비하라 명한 화형대였다.
하칸은 성벽 위에서 광장을 둘러보았다.
대대적으로 나라를 어지럽히는 간악한 인간들의 처형을 공표한 터라 성벽 밖에 사는 수인들이 득시글했다.
개중에는 인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수인처럼 위장하고 있을 것이므로 한 번에 알아차리기는 힘들었다.
‘지금은 그런 부스러기들을 색출할 때가 아니지.’
인간이 섞여 있다고 예상함에도 하칸의 얼굴은 만족스러웠다.
애초에 개미를 꾀기 위해 달콤한 잼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이 역시 반란 종자들을 유혹하기 위한 장치였다.
수많은 처형 방법 중 화형을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산 채로 불태워지면서 겪는 고통은 상상 이상일 터.
고통을 참지 못해 지르는 비명이 널리 널리 퍼져서 반란 종자의 귀에 들어가길 바랐다.
반란 종자들에게 협조하는 수인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하칸은 그때부터 이 일을 계획했다.
뭘 하든 황궁에 댈 수는 없다. 황궁은 무너지지 않은 절대성이다.
이 사실이 각인되면, 누구도 반란 종자에 붙지 않을 것이므로!
‘하이로드를 보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그건 공포감의 필수성. 야생에서 맹수가 군림하는 이유가 뭐야. 초식 동물이 그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흥분한 하칸의 숨이 거칠어졌다. 오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황궁의 2인자로서, 실세로서 살았다.
자신보다 강한 맹수과의 수장들에게도 명령할 수 있었던 지난날, 맛보았던 권력은 얼마나 달콤했던가.
왜 인간들이 아래 계급의 인간들을 착취하고 쥐어짜면서 자리에서 내려오려고 하지 않았는지 오십 년간 충분하고도 절절하게 깨달았다.
“이번 일로 절대적인 공포를 보여 주는 거야. 절대로 나 하칸에게 거스르면 안 된다는 것을.”
반란 종자의 수괴가 나타나지 않아도 좋다.
화형대에 불이 붙으면, 인간들은 공포에 질릴 것이고 그들이 죽어 가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공포를 전염시킬 테니.
그들의 비명이 황궁에서 달아난 수장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기를.
하칸은 기대감에 혀로 입술을 축였다.
“준비 다 됐습니다.”
부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하칸이 날개를 펼쳤다. 그대로 내려가려다가, 부관의 얼굴을 흘끗했다.
“근데 너 안색이 왜 그래?”
“안색이요?”
“그래.”
하칸이 눈을 부라렸다.
“똑바로 말 안 해?”
“……화형식에 참석하겠다고 세 분의 수장께서 전갈을 보내오셨습니다.”
내가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있으면서 내 명을 듣지 않아? 하는 시선에 부관은 땀을 뻘뻘 흘렸다.
“오늘 내로 황궁을 나가신다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하이로드가 아프시다고 황궁을 포기한다고? 아무리 멍청이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총사령관의 말로는 그들이 아무래도 인간들과 접촉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럽다고 했습니다.”
“총사령관이?”
부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총사령관은 조인족 군대의 책임자로 하칸이 황궁에서 제일 믿고 있는 심복 중 하나였다.
“역시 그랬군. 흥, 그렇게 해 보라 그래.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이로드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시면 납작 엎드릴 놈들이니까. 그렇게 되면 내 손으로 그놈들을 수장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거야. 수장이야, 새로운 놈을 내세우면 되는 거니까.”
인간의 황제처럼.
자신만만하게 웃은 하칸은 하늘을 가릴 듯 날개를 크게 펼치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광장의 한가운데 그를 위해 자리한 단상에 내려앉자 웅성거리는 군중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다들 소식은 들었을 것이다!”
카랑카랑한 음성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하이로드께서 간교한 인간들의 수에 휘말려 병을 얻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위대한 수인의 절대자! 몸을 회복하고 계시지. 나는 그분의 심복으로서 이 일을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말을 멈춘 하칸이 잠시 군중을 훑어보았다.
혹시 반란 종자의 수괴가 섞여 있지 않을까 날카로운 시선을 뿌렸지만 아직까진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화살을 쏠 수 있으므로 전사들에겐 근처 저택의 천장을 주시하라고 명을 내렸고, 나타난다면 신호를 보내올 것이다.
“그리하여 추악한 인간의 무리가 득세하고 선량한 수인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어지러운 현 대륙의 질서를 다시 세우고자 반란 종자의 일당을 본보기 삼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오늘은 그들을 처형하고 황궁이 세운 질서가 엄정함을 사방에 알릴 것이다! 잊지 마라, 황궁은 수인들의 편이다!”
말을 더듬지도 않고 경고를 엄숙히 끝냈다고 흡족한 하칸은 생각보다 호응이 적은 군중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이로드가 없어서일까?
열렬한 환대를 바랐던 하칸은 못마땅해졌다.
그대로 넘어가려는 순간.
고함이 터졌다. 고개를 돌리자 화형대에 묶인 인간 여자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총통을 해친 것은 인간이 아니다! 누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거야!”
“흥.”
코웃음을 친 하칸이 처형식을 담당하는 망나니들에게 눈짓을 했다.
얼굴에 까만 무늬가 선명한 하이에나 일족이 고개를 끄덕이고 화형대에 불을 붙였다.
기름을 먹인 나무가 불길을 집어삼켰다. 삽시간에 커진 불덩이가 뱀처럼 화형대를 휘감았다.
한 혼혈은 발치까지 다가온 불길을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필사적으로 발을 뒤로 물려 보았지만 애석하게도 기둥에 고정된 몸은 까딱거리기만 할 뿐 불길을 피할 수 없었다.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불이 발끝에 닿았다. 따끔거리는 고통, 가까워지는 열기.
공포를 참지 못한 혼혈의 눈이 회까닥 뒤집혔다.
“으, 으아아악!”
발가락이 타들어 가기 시작한 혼혈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본능을 건드리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소리였다.
하칸은 남몰래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거야. 더, 더 크게 비명을 질러라. 그러기 위해 입을 막지 않은 거니까.’
군중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누군가는 끔찍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고 누군가는 두려워했고 누군가는 광기에 찬 즐거움을 누렸다.
화살 한 발이 화형대에 꽂혔다. 깜짝 놀란 하칸이 날개를 퍼덕였다.
쌔액, 쌔액, 쌔액!
다른 화형대에도 화살이 꽂혔다.
푸슉!
화살깃에 달린 푸른 보석이 터지면서 한 바가지의 물이 사형수에게 떨어졌다.
뜨거운 열기에 헐떡이던 사형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놀란 것도 잠시, 매섭게 눈을 빛낸 하칸이 전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타났다! 쫓아! 찾아내서 잡아들여!”
대기하던 전사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늘에 꽂혔다.
“으, 으아아아악!”
처음에 하칸은 그들이 조인족 전사들의 위용에 겁을 집어먹었다고 생각했다.
그중 몇 명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기까지 하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 군대가 이렇게까지 두려운 존재였었나?’
아니었다.
사람들은 경악하고 있었다. 그의 군대가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며.
“…….”
불길한 감각이 등골을 싸악 스쳤다. 하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기세 좋게 날아올랐던 조인족 전사들이 뱀을 만난 쥐처럼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어도 아픈 줄 모르고 물러난다.
하칸은 그 추한 몰골을 질책할 수 없었다. 그 역시 그럴 뻔했기 때문에.
“하칸.”
마침내 땅에 닿은 그레칸. 그와 하칸의 눈이 마주쳤다.
본능적으로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좁쌀만큼 작고 단단한 이성이 남아 하칸을 붙들었다.
‘괜찮아. 하이로드는 아무것도 몰라.’
불안한 가슴을 다독이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붉은 머리 흑계의 손님이 그의 뒤에 내려앉는 게 보였다.
하칸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아내려 애썼다.
말란도르가 하칸을 빤히 보더니 그레칸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하칸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났다.
‘뭐지? 뭐라고 지껄여 대는 거야?’
그 사이에 화형대의 불길은 모두 꺼져 매캐한 연기만 났다.
침묵이 맴돌았다. 하칸은 침묵에서 죽음과 긴장의 냄새를 맡았다.
결국 초조한 불안증을 참지 못하고 간사하게 웃었다.
“하이로드,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의사를 보내 놨는데……. 얼마나 많이 걱정했는지요.”
그레칸이 흑계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칸은 더 불안해졌다.
불안을 감추기 위해 한껏 과장된 움직임으로 화형대를 가리켰다.
“이, 일단은 저놈들 좀 보십시오. 제가 잡아 놨습니다. 저놈들이 하이로드를 위협했습니다. 밀라니아 님도요!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하이로드의 명을 받지 않고 일을 벌렸어요. 어찌 처분하실 셈이세요? 아무래도 불에 태우는 게 깔끔하겠죠?”
교묘히 그레칸의 관심을 반란 종자에게로 옮겼다.
사형수 중 누군가 뭐라고 하기 전에 하칸이 선수를 쳤다.
‘괜찮아. 하이로드는 나를 믿고 있어.’
그러도록 수십 년간 열심히 날개를 흔들어 댔지 않았나.
달콤한 혀와 편리한 손발이 되어 준 자신은 황궁에서 그레칸의 오른팔이었고, 명실상부 황궁의 2인자였다.
‘나만큼 믿음직스럽고 편리한 자는 없어.’
제 효용성을 떠올린 하칸은 불안을 잠재우려고 했지만, 심장이 크게 뛰어 대서 토할 것 같았다.
하칸만이 아니었다.
그레칸의 등장은 군중의 공포를 자극했다.
“총통이야.”
“쓰러졌다더니, 멀쩡하잖아.”
삽시간에 어지러워지는 분위기 속에서 간신히 죽을 위기에서 벗어난 사형수가 그레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칸 씨?”
하칸에게 거짓말을 한다며 비난했던 그 여자였다. 미넬라.
“총통이라고?”
아연한 여자를 하칸이 곁눈질했다.
그레칸을 살폈다. 여자에게 알은척은 않지만, 알고 있는 눈치. 좋은 신호는 아니다.
‘아무래도 입 닥치게 해야겠어.’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사악한 인간이 감히! 입 닥치지 못해!”
미넬라의 눈이 표독스러워졌다.
“너 이 자식! 저자, 저자 하칸이 거짓말을 한 거예요! 우리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마녀님의 말대로 수장들을 만나고, 수인들을 설득하고……. 그런 것밖에 안 했다고! 마녀님이 우리에게 어떤 의민데 우리가 그분을 해치려고 하겠어!”
격해진 감정에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그만큼 진정성이 느껴졌다.
불리한 상황임을 느낀 하칸은 그레칸에게 눈빛으로 매달렸다.
“하이로드……. 인간의 말을 믿으시는 거 아니죠? 인간입니다, 인간이에요.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고 남을 해할 생각밖에 안 하는, 그런 족속의 주장이에요.”
그를 지그시 바라본 그레칸의 입이 열렸다.
“말란도르는 네게서 냄새가 난다는군.”
“네? 냄새요?”
“흑계의 시독 냄새 말이야.”
하칸의 관자놀이 깃털이 빳빳해졌다.
“내 실수였지.”
그가 한숨을 쉬었다.
“넌 힘이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고 쉽게 여긴 내 실수.”
“하이로드, 대체 무슨 말을…….”
“그게 그녀를 죽일 뻔했어.”
까만 눈에서 광폭한 청광이 폭사되었다. 하칸이 해쓱하게 질렸다.
“증오에 매몰된 네 악함이 인간 못지않게 사악하다는 걸 몰랐거든. 나도 너와 같은 모습이었겠지…….”
하칸의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살려 주세요, 하이로드.”
상황을 깨닫자마자 하칸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변명은 소용없다.
오십 년 넘게 그의 측근으로서, 백 년 가까운 세월 그를 지켜봤던 사람으로서, 하칸은 그레칸에게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칸은 눈물을 흘리며 파리처럼 손을 비벼 댔다.
“살려 주세요. 제 말부터 들어주세요. 이유가, 이유가 있었어요.”
그레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칸의 안색이 곧 죽을 것처럼 파리해졌다.
“……그래. 네 잘못만은 아니지. 내 안이함이 컸으니까.”
그레칸이 깨달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살 수 있을지도 몰라!’
하칸의 얼굴이 조금 밝아지는 찰나.
삭막한 얼굴로 그레칸이 손을 들었다.
“그러니 고통 없이 보내 주겠다.”
손가락이 차분히 횡으로 가로질러 그어졌다.
눈을 크게 뜬 하칸에게서 켁, 단말마의 신음이 튀어나왔다.
떨리는 손으로 목을 더듬었다. 아무런 변화도 없던 목에 붉은 선이 생긴 건 그때였다.
스륵, 몸통에서 떨어져 나간 목이 바닥으로 떨어져 데구루루 굴렀다.
뒤늦게 피 분수가 터져 나왔다.
수십 년간 증오를 쌓아, 그 증오를 휘두르며 괴물이 되었던 자의 최후였다.
좌중이 조용해졌다.
“어…….”
한바탕 드잡이질을 각오했던 미넬라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레칸이 망나니에게 눈짓했다.
“풀어 줘.”
망나니가 대경하여 사형수들을 풀어 주는데, 그레칸은 하칸의 시체를 뒤로하고 군중을 마주 보았다.
공포에 질린 얼굴.
그레칸이 입을 열었다.
한마디뿐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 그레칸이 자리를 떠나자,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요란했다.
* * *
하칸이 죽었고, 그의 세력은 뿔뿔이 흩어졌다. 애초에 조인족은 모든 수인을 관장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큰 일족이 아니었다.
그레칸에게 들러붙은 하칸의 노력이 일족을 부강하게 만들었지만, 수장이 스러진 조인족은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살아남은 조인족의 선언이었다.
일족 내에서도 여러 무리로 갈라진 조인족은 각 무리의 수장을 새롭게 세웠고, 대륙 각지로 퍼져 나갔다.
그레칸과 1대륙의 수장들, 그리고 레지스탕스의 수장 그란젤이 한데 모여 평화 조약을 맺었다.
바야흐로 2대륙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흑계로 돌아가겠어.”
황궁의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을 때 말란도르는 말했다.
밀라니아는 그를 배웅하러 크리스털 방을 나섰다. 그레칸이 득달같이 따라붙었다.
황궁의 입구. 황금색 문이 햇살을 받아 찬란히 빛났다.
문밖으로 걸어 나가던 말란도르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밀라니아는 손으로 양 팔꿈치를 붙잡은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입가에 띤 미소가 다정했다.
울컥, 말란도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다시 몸을 돌리려다, 돌연 그녀에게 걸어왔다.
성큼성큼 빠르게 다가온 그가 거리를 두고 그녀와 마주 보았다. 그 자리에서 더 다가오지는 않고, 그녀를 바라본다.
밀라니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감돌 때, 그레칸이 느닷없이 밀라니아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 왜 이러느냐.”
밀라니아가 치워 내는데도 비키지 않는다.
“회복이 다 되지 않았누?”
“그런가 봐.”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레칸을 살폈다.
한편, 말란도르의 시야는 밀라니아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아프다고 눈꼬리를 축 내린 그레칸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레칸의 입술이 바르르 경련했다. 살짝 올라간 입술 사이 뾰족한 송곳니가 날카롭게 번쩍였다.
그러다가도 밀라니아가 자세히 살피려 하자 힘없이 눈을 깜박거린다.
말란도르는 기가 막혔다.
“미친놈…….”
밀라니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레칸의 시선이 한층 살벌해졌다.
말란도르는 왠지 마음이 허탈했다.
배알이 꼴리긴 하지만 그레칸을 더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봤자 내 속만 더 쓰리지.’
그는 마음속으로 설정한 그 거리를 지키며, 밀라니아와 눈을 맞추었다.
신비로운 금색 눈동자가 그를 비추었다. 이렇게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져 왔다.
그의 인생에서 그녀는 그런 의미였다. 깜깜한 어둠에 내리쬐는 한 줄기 따스한 빛.
그는 가슴이 지끈거렸다.
“널 살게 하고, 또 웃게 하고 싶었는데.”
“…….”
“그런 멋있는 역할은 모조리 저놈이 맡는구나.”
말란도르는 쓰게 웃었다.
“말란도르.”
“더 말하지 마. 울 것 같으니까.”
말란도르는 검지로 눈가를 비비고는 히죽 웃었다.
“잘 있어, 밀라니아.”
그의 발밑이 검게 흐려졌다. 곧 검은 연기로 변한 그의 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하늘을 향해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보던 밀라니아는 문득 몸을 옥죄는 힘에 정신을 차렸다.
“들어가자, 밀라니아.”
눈빛이 초조히 흔들리고 있었다. 밀라니아는 피식 웃고 고개를 돌렸다.
* * *
인간, 혼혈, 수인을 모두 포용한 레지스탕스가 황궁을 정리하는 가운데 밀라니아는 조용한 크리스털 방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셨다.
손님들과 함께.
“그건 아니에요.”
도니와 도나티가 서로를 쏘아보았다.
“왜 아닌데? 밀라니아 님, 들어 보세요. 인간이 세력을 불리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수인은 약자가 되었어요. 그런 그들을 배려하는 인간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인간들도 많았고요. 만약 하이로드가 아니었다면 수인은 약자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전 하이로드가 좋아요. 그분은 잘못한 게 없어요. 제 말이 맞지 않아요?”
공손한 투였지만 도니를 쏘아보는 도나티의 눈은 이글거렸다.
두 사람은 ‘하이로드 그레칸’의 과거 행적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팽팽히 피력하고 있었다.
도나티보다 차분한 어조로, 그러나 물러서지 않으며 도니가 고개를 저었다.
“입장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문제예요, 이건. 총통의 파괴적인 행위까지 합리화할 수는 없죠. 물론 수인들의 위상이 높아진 건 맞아요.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죠. 만약 총통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화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의식을 갖춘 저 같은 사람들이 생긴다면.”
밀라니아가 있어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도나티는 당장이라도 악다구니를 쓰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탁.
찻잔을 내려놓은 밀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제 말에 문제가 있나요?”
도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밀라니아는 손바닥에 턱을 괴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무리를 규합하는 인간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아느냐?”
도니와 도나티의 눈이 부딪쳤다. 도니는 신중한 표정으로 말을 아꼈고 도나티는 냅다 뱉었다.
“돈이요. 아니면 여자?”
도니가 한심하단 눈빛을 보냈다.
“내가 본 인간들은 다 그랬어.”
“도나티 님이 본 인간이라고 해 봤자 백 명이 안 되잖아요.”
밀라니아의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네?”
“내가 지금보다 더 오래 산다고 해도, 인간의 복잡한 속내를 꿰뚫는 건 힘들 것이야. 그럼에도 한 가지 꼽는다면.”
“…….”
“규칙을 정하는 게다.”
“예?”
“네?”
“수가 모이고 먹고살기 수월해지면 그때부터 인간들은 율령과 법을 만들지. 역사를 살펴보면, 대체로 그렇다. 법이 그들을 통제하고 바꾸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어서.”
도나티가 눈을 굴렸다.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굳이요? 그런 게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는데.”
“인간들은 그런 것 같더구나. 법 없이 변하기를 바라지 않아.”
“그거야…….”
“인간은 개개인의 생각이 다르고, 그 많은 생각을 하나로 모은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그런 일이 일어나면 기적이라고 부르지.”
“…….”
“그래서 법을 만들어야 한다. 수인과의 공존과 화합을 위해서라면, 인간들에겐 법이 필요해.”
“그 말은 강제적인 힘이 아니라면 인간들은 스스로 자정할 수 없단 뜻인가요?”
시무룩한 목소리에 밀라니아가 도니를 흘끗했다.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느니라. 네 말도 틀린 건 아니야. 의식 있는 사람들이 생기고, 필요성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그때가 바로 법이 만들어지는 때이니.”
딱,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은빛 빛무리가 춤추듯 움직여 글자를 이루었다.
<평화 조약>
“조약을 체결했으니 이를 토대로 인간과 수인이 상생하는 법이 만들어질 것이다. 새로운 법을 만든다는 건 세상이 바뀐다는 의미. 인간은 변할 것이야. 시간이 흘러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해도, 바른길을 찾으려고 하겠지.”
도니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도나티는 방긋 웃었다.
‘완전히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도니의 말보단 내 말이 더 맞다는 뜻 아니겠어?’
“아니거든요.”
“무슨 생각 하는지 얼굴에 훤히 드러나요.”
“이게……!”
도나티의 주먹질을 능숙하게 피하며 시계를 확인한 도니가 몸을 일으켰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위제니아 선생님과 약속이 있어서요. 이만 가 봐야겠어요.”
“어딜 가는데?”
도나티와 도니가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번만큼은 똑같이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상생의 다리요!”
벌컥. 문이 열렸다. 그레칸이었다.
도니는 깜짝 놀라 물러섰다. 반면 도나티는 눈을 반짝거렸다.
원래도 그를 두려워했던 도나티와 도니는 그가 총통이라는 게 밝혀진 이후에는 숫제 감히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존재처럼 굴었다.
재빨리 고개를 숙이는 두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나는 듯이 뛰어온 그레칸이 밀라니아를 안아 들었다.
“뭐 하는 게야?”
“갈 곳이 있어.”
“어디?”
답하는 대신 익살맞게 웃은 그레칸이 멀쩡한 문을 놔두고 창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도나티와 도니는 묵직한 존재감이 사라진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