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감정 수업
“덩치가 베어쿼터인 나만 한데?”
허험, 밀라니아가 헛기침을 했다. 움찔한 그레칸이 느릿하게 대꾸했다.
“인간, 맞다.”
호루스가 그레칸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인간화가 완벽에 가까운 그레칸은 겉으로 보아서는 수인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수확은 없었다.
대부분의 수인들은 인간화한다고 하더라도 그들 종족의 특성이 조금씩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다른 이종족에 비해 인간과 비슷한 편인 박쥐족 역시 인간에게선 보기 힘든 새빨간 눈동자와 매혹의 습성을 통해 인간이 아닌 것을 의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레칸은 늑대족임을 드러내는 특징이 없어서, 다들 반신반의하기는 해도 대놓고 의심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때 밀라니아가 태연히 쐐기를 박았다.
“내가 신분을 보증하지. 칸이 여기 있어도, 너희에게 피해가 갈 일은 절대 없을 것이야. 약속하마.”
“하지만…….”
미넬라가 꺼림칙하게 서두를 열었지만 말을 잇지는 못했다.
몇 날 며칠 학교에 머물면서, 뚱하거나 귀찮은 태도를 보이기는 해도 잘 어울렸던 밀라니아를 알기에 다들 알게 모르게 그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학교의 일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믿을 수 없는 자를…….”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찝찝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위제니아가 생긋 웃었다.
“저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황궁 사람들은 위험하지만, 마녀님은 믿으니까요. 그러니까 칸 씨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요?”
지대한 신뢰에 밀라니아는 마음이 뜨끔했다.
‘이놈이 제일 위험한 총통인데.’
위제니아는 따뜻한 눈으로 미넬라와 호루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녀님이 보증한다고 했잖아요? 움직이는 걸 귀찮아하시기는 하지만 거짓말이나 해가 되는 짓은 한 적 없으세요. 오히려 아이들에게 귀한 마법을 전수해 주셨죠. 다른 동료들의 행방을 궁금해하시지도 않았는걸요.”
“그래도…….”
“당분간 잘 지켜봐요. 그럼 되지 않을까요?”
위제니아가 나섰기 때문인지 다른 선생들의 못마땅한 표정이 약간이나마 누그러졌다.
이 학교에서 위제니아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쿠션 같은 존재라서, 불안과 긴장이 높아져서 싸움이 잦은 환경에서도 사람들을 끈끈하게 묶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밀라니아는 조곤조곤 설명했다.
“배움에 문제가 있어 당분간 내가 가르치기로 했느니라. 공짜로 여기 있겠다는 건 아니야. 검 쓰는 실력이 쓸 만하니, 학생들을 가르칠 수도 있을 게다.”
홱 고개를 돌린 그레칸이 밀라니아를 큰 눈으로 응시했다.
‘그런 소리는 한 적 없었잖아.’
콧잔등을 찡그린 밀라니아는 가만히 있으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밀라니아와 같이 있는 건 좋지만 인간들과 좁은 곳에서 북적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던 그레칸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러나 쫓겨나기는 싫은지 가만히 있었다.
밀라니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 * *
“칸 씨도 여기서 주무시려고요?”
위제니아가 눈을 끔벅였다. 그레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연 설명은 없었다.
“……어.”
뭔가 이어질 말을 기대했던 위제니아가 당황했다.
“갈 곳이 없어서 예 지내야겠는데, 괜찮겠느냐?”
“아……. 괘, 괜찮아요. 많이들 그러니까. 그럼 잠자리를 봐 드릴게요.”
그 말에 그레칸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위제니아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까지 보인 반응 중에 가장 큰 반응이에요. 칸 씨는 마녀님과 정말 친하신가 봐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담요는 안 필요하세요?”
밀라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그녀의 잠자리로 향했고, 그레칸은 그 뒤를 졸졸 따랐다.
누구도 파괴신 그레칸이라고 생각지 못할 모습.
전혀 의심 못 한 위제니아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하칸이 들었다면 턱이 빠졌을 터였다.
한밤중, 밀라니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딱딱하고 불편해서 익숙하지 않았던 잠자리지만 며칠 지내다 보니 그것도 나름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녀 옆에서 관자놀이를 받치고 누운 그레칸은 그의 망토를 덮고 있는 밀라니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밀라니아를 바라본다.
기분이 좋지 않은지 그녀의 미간에 주름 하나가 생겨 있었다.
그레칸은 검지 끝으로 미간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몸을 더 가까이 붙었다.
체온 높은 몸이 닿자, 밀라니아의 표정이 슬그머니 풀어졌다.
그레칸은 그대로 있었다. 새벽녘이 되고, 해가 떠올라 주변이 어렴풋이 밝아져 올 때까지 그녀에게 온기를 나눠 주었다.
* * *
검술을 가르치는 방은 저택에서 가장 큰 방이었고, 오늘은 더미를 상대로 십자 베기를 해 볼 예정이었다.
그런 와중 훈련 시간에 맞지 않게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 당신 그거 어떻게 했어요? 다시 해 봐요, 다시. 방금 그거 오러 아니야?”
“미넬라, 물어볼 것도 없어. 오러 블레이드가 맞으니까.”
흥분한 미넬라와 트루크가 그레칸을 둘러싸고 서 있었다.
미넬라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고 도리어 불만스레 눈썹을 치켜올린 그레칸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챙그랑!
트루크와 미넬라의 표정이 동시에 구겨졌다.
“허어.”
지켜보던 밀라니아는 탄식을 뱉었다.
‘적당히 하라고 했어야 했나?’
싸울 것처럼 으르렁대는 세 사람. 시작은 트루크의 도발이었다.
아이들에게 시범을 보이던 트루크와 미넬라가 돌연 그레칸에게 칼을 겨눈 것이다.
[검 좀 쓴다고 하지 않았나? 한번 해 보지 그러시오?]
트루크는 그러고서 밀라니아와 그레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딱 붙어서 노닥거리지만 말고.]
그레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트루크가 열받아 하는 표정이라서,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시범 한번 보여 주라고 등을 떠밀었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다가온 그레칸에게 미넬라가 철검을 건네주었다.
[솜씨 한번 보죠.]
밀라니아에게 그랬듯 그레칸에게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그레칸은 철검을 내려다보고 지푸라기로 만든 더미를 힐끗했다. 이런 걸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
그걸 뭘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받아들인 트루크가 선심 쓰듯 말했다.
[십자 베기를 해 보라는 거요. 가장 기본자세이지만 무릇 숙련된 검사는 기본자세부터 다른 법. 어디, 우리를 개안시켜 주시오.]
선생들의 시범을 가장 좋아하는 아이들은 뜻밖의 상황에 눈을 반짝였다.
기대 어린 시선과 함께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눈치를 받은 그레칸은 철검의 손잡이를 가볍게 쥐고, 더미를 향해 휘둘렀다.
단 일 합.
미넬라와 트루크와 달리 자세를 바로잡지도, 기세를 흘리지도 않고 그저 대충 서 있는 자세로 휘둘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단 일격에 깔끔히 양단된 더미.
트루크와 미넬라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눈을 홉뜬 트루크 옆에서 미넬라는 더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듯 미넬라가 말을 더듬었다.
“검신을 감싼 검은 기운……. 오러를 만들 줄 안다면 마스터라는 뜻. 그런 사람이 어디서 나타나서?”
그레칸은 밀라니아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들이 왜 이렇게 귀찮게 하냐는 의문 섞인 시선이었다.
밀라니아는 끼어들까 하다가, 불타오르는 미넬라와 트루크의 표정을 보고 생각을 바꿔 먹었다.
‘귀찮을 게 분명하군.’
결국 알아서 하라는 뜻으로 손을 휘젓자 그레칸은 얼굴을 구겼다.
* * *
그레칸의 개입은 검술 시범에 그치지 않았다.
“오늘은 수계 마법을…… 칸?”
새로 들어온 아이들에게 마법을 견식시켜 주려던 밀라니아는 불쑥 방으로 들어오는 그레칸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밖에 빵 구워 놨어. 가서 먹어.”
“그건 일단 이 애들을 가르치고 나서…….”
“여긴 내가 맡을게.”
그레칸의 성화에 밖으로 나간 밀라니아는 아무래도 아이들과 그레칸을 같이 두는 게 불안해서 슬며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쯧쯧, 저럴 거면 뭐 하러 한다고 했누.’
아이들은 울기 직전이었다. 그녀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레칸이 무심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대마녀의 핑거 마법과 비슷한 형태에 밀라니아의 눈이 반짝였다.
허공에 사나운 외양의 짐승이 나타났다. 워터드래곤이었다.
물컵의 물로 빚어진 워터드래곤은 긴 꼬리를 내리치며 포효했다.
마법으로 만들었다기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역동적인 작품에 아이들이 입을 쩍 벌렸다.
“와, 와아…….”
아이들의 수준에 맞추어 물방울 정도 만들어 내려던 밀라니아는 이마를 짚었다.
* * *
“칸 씨는 사람 놀라게 하는 데 선수예요. 미넬라와 트루크 봐요. 두 사람이 교수님 다음으로 검술 실력이 제일 뛰어난데, 두 사람도 놀라는 걸 보면 대단한 실력자라는 거잖아요.”
한참 그레칸의 칭찬을 늘어놓던 위제니아가 밀라니아에게 요리를 같이하자고 제안했다.
“일종의 환영식을 여는 거예요.”
‘손이 많이 가는 일은 딱 질색이니라.’
잘 씻은 과일이나 채소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는 밀라니아에겐 위제니아의 제안이 썩 달갑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가만, 그레칸에게 감정을 가르쳐 주기로 하지 않았는고.’
소속감을 느끼게 하려면 공동체가 같이 뭔가를 하는 것만 한 게 없지.
학교의 인물들을 향한 그레칸의 눈빛은 건조하고 삭막했다.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그레칸은 일말의 고민 없이 능히 학교를 없애 버렸을 거라는 걸.
다 같이 요리한다는 건 비효율적이다.
밀라니아는 요리를 시작한 지 오래지 않아 그 사실을 깨달았다.
미넬라와 트루크에게 재료를 손질하라 했더니 도리어 부러뜨리거나 식기구를 망가뜨리는 일이 많아서, 차라리 없는 게 나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결국 밀라니아는 애초에 위제니아가 제안했던 대로 둘이서 요리를 하게 되었다.
완성된 요리는 그녀의 귀찮음과 달리 퍽 훌륭했다.
“너무 맛있어요.”
“충분히 있으니까 많이 먹어.”
와구와구. 걸신들린 것처럼 먹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위제니아 옆에서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레칸은 요리를 할 때부터 그 앞에 앉아 있었는데, 밀라니아가 움직일 때마다 방긋방긋 웃어 댔다.
그녀가 요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위제니아의 말처럼 음식은 많았다.
알게 모르게 학교로 들어오는 식재료의 양이 많아진 상황.
음식의 출처는 뻔했다.
‘도니가 검은 포대를 갖고 온 것도 그레칸의 작품이었구먼.’
안 그래도 이상했었다.
밀라니아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레칸이 볶은 채소를 포크로 쿡 찍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먹어, 밀…….”
주변을 흘낏한 그레칸이 미간을 좁히고 말을 삼켰다.
포크를 더 앞으로 내밀었다.
어서 먹으라는 듯하여 밀라니아는 얼떨결에 입으로 받아먹었다.
그레칸의 얼굴이 환해졌다.
“너부터 먹어라.”
그녀는 시무룩하게 고기를 썰어 먹는 그를 물끄러미 살펴보았다.
아이들이고 선생이고 상관없이 섞여 앉아서 먹는데, 그 틈에서 그레칸은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다. 위화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 이대로 어울려 지내다 보면 그레칸의 심성도 부드러워지지 않겠누.’
파도가 쉴 새 없이 내리쳐 마모되어 동그랗게 변하는 조약돌처럼.
흐뭇한 미소를 짓는 밀라니아는 그레칸과 눈이 마주쳤다.
척!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받아먹은 밀라니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험, 헛기침을 했다.
“맛있느냐?”
“맛있어.”
그레칸이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이…… 해 준 요리는 처음 먹어 봐.”
부드러운 미소가 걸린 얼굴에 밀라니아는 마음이 뜨끔했다. 재차 헛기침했다.
‘내가 못 해 준 게 많구먼.’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는 공놀이를 빙자한 훈련이나 도맡았지 나머지 살림은 다 체라가 맡았던지라, 그녀는 그레칸과 르베리안즈의 싸움 중재 정도만 했었던 것 같다.
근엄하게 생각한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흘끗했다.
그는 아직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형언할 수 없이 충만한 눈빛으로.
“기분이 어떠냐?”
“……좋아. 많이.”
그레칸이 입꼬리를 올렸다. 천천히 턱을 움직여 입 안에 든 음식을 음미하듯 씹는다.
“네가 지금 느끼는 것. 그게 행복감이라는 것이니라.”
“…….”
“좋은 이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 그게 무리 짓는 지성체가 느낄 수 있는 행복 중 하나인 게야.”
‘자, 어떠냐.’ 하는 듯한 밀라니아와 달리 그레칸의 표정은 묘하게 이지러졌다.
“이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뭐라?”
그레칸은 손을 들어서, 옅게 미소가 걸린 얼굴을 더듬거리고 가슴께를 만지작거렸다.
“난 당신과 있으면 항상 이런 느낌이었는걸.”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려면 행복해지는 수밖에 없다는 게 그녀의 결론이었다.
행복과 사랑이 가득한 마음은 남을 해할 생각을 하지 않을 테니.
‘행복하다니 다행이기는 한데, 이게 맞는 방향일까?’
똘망똘망한 그레칸이 대답을 요구하고 있어서, 밀라니아는 흠 헛기침을 했다.
밀라니아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잊고 있었구나.’
감정을 가르치기엔 밀라니아 역시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도 인간들이나 느낄 법한 그런 다채로운 감정은.
애초에 100년 전 그레칸에게 사랑을 설명해 주었던 것도, 다른 이들이 말하는 사랑의 정의를 똑같이 읊어 댄 것뿐이지 않았는가.
복잡한 표정의 밀라니아를 보고 그레칸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선생의 자격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느니라.”
“당신 말고는 안 돼.”
밀라니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레칸이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혹시나 자신이 포기할까 봐 저어하는 얼굴이다.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밀라니아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이걸로 그만두는 건 너무 성급하지. 나 말고 누가 너를 감당하겠느냐.”
“그래. 그게 맞아. 당신 말고는 아무도 못 해.”
그레칸이 입꼬리를 길게 늘이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아기자기한 느낌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목구비인데 그러는 모습은 늑대가 아니라 강아지 같았다.
밀라니아는 혀를 찼다.
“뭘 잘했다고 웃는고.”
즉답한 그레칸은 의아한 듯이 눈썹을 올렸다.
“당신은 왜 웃어?”
웃고 있었던가?
그제야 입꼬리가 양쪽 모두 올라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표정을 굳혔다.
“……어허, 어디서 자꾸 당신, 당신 그러는 게야. 네가 그러니까 어이가 없어 웃는 게 아니냐.”
“그거야, 이름을 말할 수 없으니까?”
그레칸이 돌연 귀를 쫑긋했다.
“말해도 돼?”
“되겠느냐?”
밀라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쩔 수가 없구나.”
“그럼 당신…….”
“조용히 하고 먹던 거나 먹거라.”
그의 손에서 포크를 빼앗은 밀라니아는 고기를 푹 찍어 그레칸의 입에 넣어 주었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그레칸이 이내 씨익 웃으며 음식을 씹었다.
“당신이 먹여 주니까 더 맛있네. 당신도 줄까?”
밀라니아는 말없이 그의 입에 음식을 가득 넣어 주었다. 말 한 마디 할 수 없게끔.
* * *
그레칸은 의외로 진지하게 감정 수업에 임했다.
도나티의 고향으로 떠난다는 도니가 돌아오지 않은 상태여서 그레칸에게 집중할 시간이 충분했다.
“일단은 네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야겠느니라.”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그레칸은 몽롱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밀라니아는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를 뒤로 멀찍이 밀었다. 눈살을 찌푸렸다.
“집중하라지 않았누.”
“……알았어.”
손으로 이마를 문지른 그레칸이 그제야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생명을 경시하는 게 네 문제인데……. 이건 단기간에 고칠 수 없느니라. 그렇다면 네 마음과 생각의 세세한 흐름을 알아봐야겠지.”
“응.”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그레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1대륙에 갔었던 때부터 시작해 보자꾸나.”
그레칸은 눈치를 보고, 느릿하게 말을 시작했다.
“그때는…… 화가 났지.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텅 빈 방을 보니까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어. 그레칸은 담담히 말했다. 흥분한 기색은 없었다.
“그놈들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화가 나는 게, 그놈들 때문이라고. 화가 나서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랬어.”
“그 말은 나에게 화가 났었다는 말이군.”
그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당신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나한테 화가 난 게야. 100년 전에는 왜 그랬느냐. 그때의 참상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라고 그러더구나.”
“누가?”
“말란도르와 르베리안즈와 체라. 거짓말할 생각은 말거라.”
그레칸은 얼굴을 굳혔다.
“그놈들이…….”
으르렁거리는 주둥이를 두 손가락으로 붙잡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바짝 치켜떴던 눈이 유순해졌다.
입술을 풀어 주자 투덜거린다.
“그때 얘기는 하기 싫은데.”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기다리마.”
표정이 사라진 그레칸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밀라니아는 말없이 기다렸다. 그녀의 묵묵한 시선을 받던 그레칸은 고개를 살짝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때 그레칸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흘러나왔다.
“잘 기억 안 나.”
“…….”
“하지만, 어쩔 줄 몰라 했던 건 기억 나. 어떻게 할 줄 몰라서, 화가 나고 슬프고 미칠 것 같은데 어떻게 할 줄 몰라서, 날 놓아 버렸던 것 같아.”
“분노했느냐?”
“응. 당신을 그렇게 만든 모든 것에.”
“그 결과가 괴롭진 않았느냐.”
그가 다시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별로.”
“…….”
“그렇게 되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으니까.”
“…….”
“당신이 사라진 이후, 내 세상은 잿빛이었어. 당신과 있을 때는 대충 만든 육포조차도 맛있었는데 뭘 먹어도 맛이 느껴지지 않았어. 하늘은 늘 잿빛이었고, 꽃은 무채색. 세상에 홀로 남은 기분…….”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린 그레칸은 발작적으로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아. 기분 나빠.”
손등에 닿는 온기에 그레칸이 고개를 들었다. 밀라니아가 그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어느 순간 덜덜 떨리고 있던 손이 차차 안정을 찾아갔다.
“알겠다. 그만 생각해도 된다.”
“…….”
“넌 내가 발단이 되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것 같구나.”
찌푸린 얼굴로 심각한 밀라니아를 보며 그레칸은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뭐가?”
생각에 골몰하느라 대수롭잖게 질문한 밀라니아는 이어진 대답에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내 생각과 마음을 알 수 있었으면 좋겠어, 당신이. 그렇다면 다툴 일도, 화를 내는 일도 없을 텐데.”
“나도 당신의 생각과 마음을 알고 싶어. 그럼 당신이 원하는 거, 화나는 거, 미리 알고 행동할 수 있을 테니까.”
“…….”
그레칸이 고개를 갸웃했다. 눈을 느릿하게 끔벅이던 밀라니아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마법이 있다 할지라도, 생각과 마음을 알 수는 없느니라.”
“그렇겠지? 아쉽네.”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표정에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자연스럽게 그레칸이 고개를 숙여 주었다. 그의 머리를 헤집고, 밀라니아는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좋다. 어차피 감정은 느끼라고 느껴지는 게 아닌 것을. 지성체가 이루는 집단, 특히 인간의 무리는 나로서도 예상 못 하는 변수가 많이 일어나느니라. 예 있다 보면 네 상태가 바뀔 일도 생길 것이야.”
“노력할게.”
“그래. 착하구나.”
밀라니아가 부드럽게 속삭이자 그레칸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머리 위에 얹어진 그녀의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그녀는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싼 채로, 시선을 마주했다.
당황하여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레칸이 놓아주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시선을 피할 수 없어 가만히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그 순간이었다.
쾅!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렸다. 침입자인가? 밀라니아는 그레칸에게서 손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손을 붙잡았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일어나 밀라니아의 옆에 섰다.
“쉿!”
놀란 미넬라가 검을 빼 들고 입구를 향해 겨누었다.
날카로운 눈이 번뜩였다. 트루크는 거대한 덩치에 걸맞지 않고 신속하고 조용히 움직여 벽에 바짝 붙었다.
타닥타닥!
거친 발걸음 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긴장감도 부풀어 올랐다.
미넬라와 트루크가 눈빛을 주고받았다. 입 모양이 뻐끔거렸다.
‘밖에 경비 서던 애들은 어쩌고 침입자가 안까지?’
‘잠깐만, 가만있어 봐.’
미넬라가 슬그머니 검을 내렸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인영 하나가 튀어나왔다.
땀으로 범벅된 잘생긴 얼굴. 거칠게 흘러나오는 밭은 숨. 옷자락이 펄럭거리는 깡마른 몸.
“도니?”
겁먹고 술렁이는 아이들을 보호하던 위제니아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도니가 달아오른 눈으로 위제니아를 바라보았다.
고르지 않은 숨 사이로 성마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무슨 일인데 그래?”
검집에 검을 넣은 미넬라가 도니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침착하게 얘기해.”
“도나티, 도나티 님이…….”
허억, 허억. 부족한 숨을 몰아쉬며 도니가 말을 쏟아 냈다.
“도나티 님이 잡혀갔어요. 깡치 패거리들에게……. 노예로 팔아 버린다고 그랬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일단 진정하고 차근차근 설명해야지. 그렇게만 말하면 도울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미넬라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도니는 정신을 차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진정한 도니는 어두운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팔짱을 낀 미넬라가 위제니아에게 눈짓했다.
고개를 끄덕인 위제니아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어쩌다가 도나티가 깡치에게 잡혀가게 된 거야?”
“오늘 아침에 도나티 님이랑 돌아오게 된 것부터가 문제였어요. 일단 고향에서는 도나티 님의 재산을 가져오지…… 못하게 됐어요.”
중간에 한 번 코를 훔친 도니는 손등으로 얼굴 전체를 문지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자리 잡은 다른 무리가 재산을 다 가져간 상태였더라고요. 도나티 님은 그 돈으로 다른 지역에 자리 잡을 예정이었어요. 여기는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돈만 있으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곳이 있대요. 저랑 같이 거기 가려고 했는데, 물론 저는 어쩔 수 없으니 너무 상심 말라고 위로해 드렸어요. 배도 고프고, 거기 있는 것도 위험해서 돌아왔는데 깡치 패거리가 기다리고 있지 뭐예요. 상납금을 안 내고 튀었다고요.”
일의 내막은 허무할 정도로 별거 아니었지만 도니와 도나티처럼 가진 힘 없이 잡초처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잔인한 현실이었다.
밀린 상납금을 대체하겠다며 도나티를 데려가고, 도니는 간신히 마법을 써서 시간을 벌고 도망쳤던 것이다.
“제 힘으로는 도나티 님을 구할 수 없어요. 이 세상천지에 의지할 사람이라곤 도나티 님밖에 없는데……. 도나티 님을 도와주세요. 생각나는 곳이 여기밖에 없었어요. 치안대는 말이 치안대지 황궁 수인들의 말만 들으니까요.”
말을 하다 보니 감정이 북받쳤는지 도니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가에 가득한 눈물이 떨어질 듯 말 듯 했다.
도니가 감정을 추스르길 기다리며 남은 선생들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다른 왈패들이라면 사정이 나았겠지만 상대는 이 구역 실세 깡치 패거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교수님은 언제 오시지?”
“시일이 걸릴 거라고 하셨어. 이번 일은 우리 힘으로 해결해야 해.”
위제니아는 미넬라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호루스가 늦는다는 소식에 미넬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의심은 했었지만, 정말 인신매매까지 하는 줄은 몰랐네. 깡치 패거리를 이대로 내버려 두면 더 큰 문제가 생길 거야.”
강퍅한 인상의 데릭이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카닛트도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깡치 패거리는 계속 주시하고 있었어. 그들이 얼마나 사람들을 괴롭히는지도 계속 봐 왔지. 이 기회에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해.”
“당연히 그래야지.”
깡치 패거리를 쳐야 한다는 데릭과 카닛트의 의견에 미넬라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깡치 패거리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잖아. 깡치는 신력이 있는 자야. 별다른 실력은 없어도 그 신력만으로 장정 서넛을 상대한다고. 깡치뿐이야? 다른 수인들도 만만치 않아.”
“나는 데릭과 카닛트 말대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생각에 잠겨 있던 트루크가 말했다. 미넬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미넬라, 우리도 깡치가 사람들을 괴롭히는 걸 걱정했잖아. 난 언제고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고.”
“깡치를 내버려 두자는 게 아니야. 신중해야 한다는 거지.”
“알아, 알아. 하지만.”
트루크의 눈이 강인하게 빛났다.
평소 미넬라에게 한 수 접어주던 순박한 모습은 간데없고, 바위처럼 굳건하고 단호했다.
“레지스탕스가 사람들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정의는 동의를 얻지 못할 거다.”
“…….”
좌중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이들은 도니를 위로하는 한편 고요해진 선생들의 눈치를 보았다.
“도니와 도나티를 도와야 해.”
위제니아였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긴장한 사람들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도니를 처음 만났을 때 약속했어. 어려운 일에 처할 때 너를 도와주는 사람이 될 거라고, 우리는.”
미넬라가 한숨을 쉬었지만 입꼬리는 어쩔 수 없이 올라갔다. 다른 이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깡치 패거리가 황궁의 수인들과 연결되어 있는 건 알고 있어. 그들과 대적한다면 황궁에서도 우리를 눈치챌 거야. 어쩌면 총통이 찾아올지도 모르지.”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힐끗했다. 그가 왜 쳐다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
“그러니까 우리가 고민해야 할 건, 나설지 안 나설지가 아니라 어떻게 피해를 최소화하여 도니를 도울지야. 안 그래?”
“내 고민을 부끄럽게 만드네, 다들.”
미넬라가 풀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위제니아가 손을 저었다.
“전혀. 미넬라가 신중하게 굴지 않으면 피해를 입는 건 학교인걸.”
“……좋아.”
책상을 가볍게 친 미넬라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동료를 둘러보았다.
“일단은 아이들을 내보내자. 우리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혹시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서 언제든지 거처를 옮길 준비를 해야 돼.”
카닛트가 아이들을 학교 밖으로 내보내고, 미넬라는 아직 앉아 있는 도니를 바라보았다.
“도니는 남아 있어.”
“네.”
선생들의 대화를 들으며 마음을 진정시킨 도니의 얼굴은 결연했다.
다음으로 미넬라는 밀라니아와 그레칸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쪽은 어떻게 할 건가요?”
“호루스 교수도 없는 판국에 사람 한둘이 아쉬운 처지가 아니냐? 한 손을 거드마.”
숱하게 이름 들었던 깡치 패거리가 궁금하기도 했고, 이들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지도 흥미롭다.
흔쾌히 대꾸하자 미넬라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안 그래도 어떻게 부탁할까 했는데, 고마워요.”
다른 이들의 시선에도 온기가 더해졌다. 밀라니아가 합류한다니 적이 안심한 눈치였다.
저택에 남은 사람은 밀라니아, 그레칸, 위제니아, 미넬라, 트루크, 데릭, 카닛트, 그리고 비전투 인원인 도니까지 총 여덟 명이었다.
깡치 패거리를 주시해 왔던 데릭이 작전을 설명했다.
“잠행을 할 때 입었던 복면과 검은 옷이 있어. 위험을 감수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정체와 이곳은 최대한 드러나지 않는 게 좋으니까. 두 명씩 짝지어서 역할을 정할 거야. 나와 카닛트가 잠입조의 역할을 맡지.”
“그럼 나랑 트루크는 깡치와 주변 수인들을 막겠어. 위제니아는 중요한 물건을 안전한 곳에 옮겨 줘.”
위제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칸은 가만히 있었고, 밀라니아가 말했다.
“나와 그레칸은 후방에서 엄호하겠다.”
좋은 생각이라며 위제니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곳에서 원거리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마녀님뿐이니까요. 그게 가장 효율적일 거예요.”
“오케이. 그럼 역할은 정했고. 도나티가 잡혀간 이상 시간을 끄는 건 좋지 않아. 당장 몇 시간 후에 잠입할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게 중요해.”
데릭은 책상 위에 낡은 양피지를 펼쳐 깃펜으로 스윽스윽 선을 그었다.
“대충 도시의 중요 건물을 그려봤어. 내 생각에는 이 중에 놈들의 근거지가 있을 것 같거든.”
초조한 얼굴로 도니가 입을 열었다.
“이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도망친 곳은 카린스트릿의 붉은 지붕 근처예요. 다 왔으니 허튼짓하지 말란 소리를 들었어요. 분명 도나티 님은 그 근처에 있을 거예요.”
깃펜으로 카린스트릿을 표시한 데릭이 얇은 눈을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늘게 뜨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놈들의 근거지는 카린스트릿 가장 구석에 있는 창고일 거야. 이름은 없지만 사람 사는 흔적이 있는 곳은 거기밖에 없으니 바로 눈에 띄는 곳이지. 지난번에 놈들을 쫓을 때 꼬리가 그곳으로 들어가는 걸 봤어.”
밀라니아는 그들의 눈빛에 흐르는 긴장과 결의, 서로를 향한 신뢰가 흥미로웠다.
미넬라가 눈짓했다.
“그럼 움직이자.”
카린스트릿 창고.
근처에 30분 정도 잠복한 결과, 깡치의 직속 수하가 창고에서 빠져나가는 걸 확인한 학교의 선생들은 이곳이 깡치 패거리의 거점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안의 상황을 확인하고 수신호를 줄게. 다섯 손가락은 인, 주먹은 아웃이야. 알겠지?”
작전대로 복면을 쓴 데릭과 카닛트는 어둠에 녹아들 듯 움직여 창고에 잠입했다.
“데릭과 카닛트를 엄호해야 해. 거리를 좁혀야겠어.”
미넬라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자 트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넬라는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위기 상황이 되면 창고를 향해 가장 강한 마법을 날려 줘요. 난장판이 되면 몸을 빼내기도 쉬우니까요.”
“그러마.”
창고에 가까이 다가가려던 미넬라는 멈칫하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팔짱을 낀 밀라니아는 왜 자꾸 돌아보냐는 의미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정말 위험한 상황이 되면 나설 생각 말고 도망쳐요.”
“그건 또 왜?”
“이것까지 이유를 물어볼 필요가 있어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미넬라가 톡 쏘아붙였다.
“그쪽이라도 도망가라는 거예요. 정식 동료도 아니니까,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요. 혹시나 도니의 친구가 밖으로 나간다면 그 애를 도와줘요. 부탁할게요.”
그 말을 끝으로 미넬라와 트루크가 돌담 밖으로 나섰다.
최대한 몸을 낮추어 창고로 이동하는 그들을 지켜보던 밀라니아는 어깨에 와닿는 온기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몸에 망토를 둘러 준 그레칸이 옷깃을 꼼꼼히 여미고 있었다.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어.”
망토는 보온 효능이 뛰어나서, 체온을 보존하게 된 밀라니아의 얼굴이 유순해졌다.
“별로. 재밌어서 그런 거 아니야?”
밀라니아는 한심하다는 듯 눈살을 구겼다.
“귀찮게 이런 짓을 왜 재미로 하겠느냐.”
에잉, 쯧쯧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밀라니아가 창고로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그레칸은 입을 열었다.
“저들이 수인들을 몰아내고 황궁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 아니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거야?”
정말로 궁금하다기보다는 그저 말을 붙이고 싶은 눈치였다. 밀라니아는 허어, 탄식했다.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하기는. 안 본 사이에 꽤 의뭉스러워졌구나.”
“말 그대로.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밀라니아가 이런 짓을 왜 하겠어. 인간 세상이 이렇게 된 걸 안타까워했잖아.”
그렇게 된 데 제 영향이 상당수 있음에도 그레칸은 남 얘기를 하듯 덤덤했다.
“반만 맞느니라.”
“틀린 건 뭔데?”
“난 저들이 수인들을 쫓아내고 황궁을 차지하길 원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만든 질서는 지금과 다를 바 없고 도리어 엉망진창이 될 뿐이니.”
창고 입구에 자리를 잡은 트루크와 미넬라가 안쪽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이 숨어든 입구 양옆으로 어둠을 틈타 수인들이 접근하는 중이었다.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수면의 술을 맞은 수인들이 픽, 픽 제자리에서 쓰러졌다.
“하아…….”
“괜찮아?”
마력이 달려 숨을 몰아쉬는 밀라니아는 부축하려는 그레칸의 손을 마다하고 돌담에 등을 기대려 했다.
그 순간 그레칸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제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왜 굳이 밀라니아가 나서? 몸도 약하면서. 당신은 그게 문제야.”
“그럴 걸 그랬나?”
그레칸은 눈을 끔벅였다.
“무시하는 거냐며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그럴 힘도 없느니. 마력이 없으니 게으름 병이 더 심각해진 듯하구나.”
푸념을 늘어놓은 밀라니아는 기력이 좀 회복되자 덤덤히 입을 열었다.
“세상이 이리된 것에 내가 책임감을 느끼는 건 사실이다. 어찌해야 할지 망설임이 컸으나, 그 답을 저들 스스로가 갖고 있더구나. 이미 저들은 서로를 배제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해 있다. 그러니 그들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손을 잡게 된다면, 이 세상은 또 다른 질서를 세우게 되지 않겠느냐. 비가 오고 땅이 굳듯이.”
“…….”
“난 그들이 가는 길이 헷갈릴 때 방향을 제시해 주고 어지러운 길을 정리해 주려는 역할을 해 주고 싶구나.”
그레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단지 그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몸에서 힘을 뺄 뿐이었다.
* * *
한편 창고 안으로 진입한 데릭과 카닛트는 조용한 내부를 의식하며 의아하게 소곤거렸다.
“왜 이렇게 쉽지?”
“조심해. 함정이 있을지도 몰라.”
사실은 밀라니아와 그레칸이 손을 써서 밖의 인원을 모조리 재운 것이지만 이를 모르는 데릭과 카닛트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창고라고 부르지만 단순한 직사각형의 거대한 건물이 여러 개 연결된 창고는 엄폐물도 많고 공간도 널찍하여 침입하는 입장에서는 경계를 풀기 어려운 곳이었다.
마침내 꽤 깊이 들어간 두 사람은 통로 끝에서 입구를 온통 가리는 커튼과 마주했다.
각각 벽에 붙은 데릭과 카닛트가 서로에게 눈짓했다. 고개를 끄덕인 데릭이 칼끝으로 커튼을 조금 젖혔다.
안에서는 촛불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다소 조용했다.
‘뭐지?’
의아해진 데릭이 커튼을 조금 더 젖히려고 했을 때, 갈고리가 튀어나왔다. 날카로운 날붙이에 커튼이 펄럭였다.
“누구냐!”
‘들켰구나!’
데릭은 이를 악물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카닛트를 숨기고자 요란스럽게 나섰다.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벽에 처박힌 해머를 떼어 내고 있었다. 데릭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깡치!’
트루크만큼이나 덩치가 큰 사내였다. 본신은 힘센 청새치로 불끈 솟아오른 팔뚝 근육이 위협적이었다.
“으아아아아!”
데릭이 숨 한 번 고를 틈도 없이 깡치가 해머를 휘둘렀다. 데릭은 옆으로 빠르게 몸을 피하며 얼굴을 굳혔다.
‘반응 속도를 보아하니 우리 기척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군.’
“왈패들이라 하나 운으로 우두머리를 차지한 건 아니란 거지.”
괴성을 지른 깡치가 구석 천장에 길게 내려온 밧줄을 쥐고 흔들었다.
짜르르르, 짜르르르!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소리에 데릭은 물론이고 통로에 숨어 상황을 살피는 카닛트의 얼굴도 굳어졌다.
“타종을 막지 못했으니 곧 놈들이 밀고 들어올 테구나!”
카닛트를 의식하고 크게 외친 데릭이 깡치에게로 짓쳐들어왔다.
“네놈은 내 차지다!”
카닛트는 창문으로 달려가 바깥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처음 약속한 바에 따르면 진입이 아니라 도망치라는 것이었다.
트루크와 미넬라가 수신호를 보았는지 채 확인하지도 못하고 카닛트는 데릭을 돕기 위해 커튼 안쪽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롱소드는 데릭이 상대하는 깡치가 아니라, 살금살금 다가와 데릭을 치려던 곰 수인에게 향했다.
“크라아아아! 이 새끼가!”
고함에 놀란 데릭은 곰 수인을 상대하는 카닛트를 보고 핀잔을 주었다.
“왜 들어온 거냐? 내가 용을 쓰며 상대하고 있는데.”
“다른 놈이 공격하려는 줄도 몰랐잖아.”
“깡치를 쳐내고 손봐 주려 했어.”
“퍽이나? 어서 둘을 처리하고 빠져나가야 해. 소리가 크게 났으니 패거리가 몰려올 거야.”
데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폐활량이 좋아 특유의 소음 공격으로 유명한 인어족의 습성과 달리 깡치는 인어족이면서도 신력으로 유명하여 근거리 전투로도 성가신 상대였다.
“크아아아아!”
깡치가 입을 크게 벌렸다. 귀가 찌릿찌릿한 소음이 방 안을 휘몰아쳤다.
데릭과 카닛트는 한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무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죽어라, 이놈들!”
소리를 멈춘 깡치가 달려들었다.
소음 공격으로 상대의 균형 감각을 망가뜨리고 반응이 느린 틈을 타 공격하는 건 익히 알려진 깡치의 공격 수법이었다.
데릭과 카닛트는 굳은 다리를 움직여 땅을 굴렀다.
쾅!
텅 빈 바닥에 해머를 내리친 깡치의 관자놀이에 굵은 힘줄이 튀어나왔다.
“미꾸라지 새끼 같으니!”
데릭과 카닛트는 식은땀을 흘렸다.
‘겨우 피했네.’
힘이 센 반면 덩치가 커서 움직임이 둔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때 숨넘어갈 듯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흐윽!”
“으으으으…… 엄마아.”
날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공격을 피한 데릭은 곁눈질을 통해 방 안을 살폈다.
놈들이 경계심도 없이 촛불을 환하게 밝혀 놓은지라 사물을 분별하는 건 쉬웠다.
‘울음소리가 들려서 설마 했는데.’
이 창고 건물 안에는 족히 다섯 개가 넘는 창살 우리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열다섯이 넘지 않을 것 같은 아이들이 우리 구석으로 몸을 붙인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데릭은 이를 갈았다.
‘이런 개 같은 일이 있나.’
가장 왼쪽의 소년은 큰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관자놀이에 난 비늘을 본 데릭은 눈을 번쩍 떴다.
‘도나티겠군.’
“가만있지 못하겠느냐!”
깡치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서 더 열을 받게 만든 데릭은 깡치의 눈을 피해 품에서 단도를 던졌다.
자물쇠가 나무로 되어 있다는 점을 노린 것이었지만, 단도는 창살을 허무하게 때리고 떨어져 내릴 뿐이었다.
두툼한 주먹이 어깨 바로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데릭의 이마에 땀 한 방울이 맺혔다.
‘한 명만 더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초조함을 느낄 무렵, 갑자기 깡치가 멈추었다. 그는 데릭과 그 뒤의 우리를 번갈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보니 노예들을 빼내 가려고 한 것이로군.”
우리로 가까이 간 깡치가 넓적한 입술을 벌리고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몸을 놀려 봤자 데릭과 카닛트를 잡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멈춘 것이었다.
“빌어 처먹을 인간 도살자는 아닌 것 같고. 요즘 내 구역에 새로이 노예 상인들이 나타났다고는 들었지. 거래처를 뚫으려고 한 거냐? 찾아보면 숨어 있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 멍청하게 이 깡치의 아지트를 털려고 들어?”
“뭐가 이렇게 수다스러워?”
카닛트가 중얼거렸다.
“뭐 이 새끼야?”
날카로운 뻐드렁니를 드러낸 깡치가 카닛트의 옆을 흘끗했다. 키 작고 뚱뚱한 곰 수인이 엎어져 있었다.
“어우, 저 멍청한 놈.”
고개를 저은 깡치는 그래도 여유로웠다.
“내 부하가 저놈 하나뿐인 줄 알아? 밖에 깔아 둔 놈만 해도 열 명이 넘는다. 그 시간 동안 얼른 나를 처리하는 게 좋을 거다. 부하들이 오면 너희들은 곱게 죽지 못할 거거든.”
“그래? 그럼 그 열 명도 넘는 부하들이 왜 아직까지 오지 않고 있을까?”
데릭이 입구를 엄지로 가리키며 말하자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깡치의 얼굴이 굳어졌다.
“누가 누구보고 비겁하대?”
이죽거리며 대답하기는 했지만 데릭은 적잖이 초조했다.
‘왜 아무도 안 들이닥치는 거지? 미넬라와 트루크가 뭔가를 한 건가?’
어쨌거나 다행이었다. 데릭은 카닛트에게 눈짓을 했다.
아이들을 가둔 우리를 가리키고, 다른 손가락으론 깡치를 가리켰다.
‘내가 깡치를 맡을 테니, 네가 자물쇠를 풀어.’
카닛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데릭이 깡치에게로 달려들었다. 힘이 강한 놈이니만큼 직접 맞서는 것은 손해였다.
품에서 단도를 모두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고 하나씩 던지자 깡치가 해머를 휘둘렀다.
깡! 까앙!
해머에 맞은 단도가 허무하게 튕겨 나왔다. 데릭이 얼굴을 구겼다. 다행히도 카닛트가 자물쇠를 망가뜨리는 소리가 났다.
‘조금만 버티면.’
그때였다.
타다다닥! 탁탁!
다급한 걸음 소리가 크게 울려 왔다. 깡치의 얼굴이 득의양양해졌다.
“내 부하들이 왔구나!”
데릭과 카닛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데릭! 카닛트!”
데릭과 카닛트의 입가가 환히 벌어지고, 깡치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팔락!
곧 커튼을 헤치고 미넬라와 트루크가 뛰어 들어왔다.
“어떻게 온 거야?”
깡치는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간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트루크가 곧장 큰 몸집을 부딪쳐 왔다.
트루크가 힘이 세다지만 신력으로 따지자면 깡치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여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이 인간놈이 감히!”
화가 난 깡치가 그를 엎어 치려 했지만 그가 상대하는 건 트루크만이 아니었다.
미넬라가 검집으로 오금을 강하게 쳤다.
“억!”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무릎을 떠는 깡치의 몸을 트루크가 뒤로 밀어 버렸다.
우당탕!
상자 뒤로 넘어가는 그의 손발을 결박하는 건 미리 준비하고 있던 데릭과 카닛트였다.
깡치의 움직임을 봉하고 기절한 곰 수인의 손발도 묶은 네 사람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땀을 닦았다.
“생각한 것보다 금방 끝났네.”
미넬라의 중얼거림에 카닛트가 인상을 썼다.
“너희들 도망치라고 했는데 왜 왔어? 수신호 못 본 거야?”
트루크가 고개를 저었다.
“봤지만, 도망칠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밖에 깡치 부하 놈들이 많았을 텐데.”
“아, 그놈들? 어떻게 된 일인지 다 나자빠져 있더라고. 그놈들도 동아줄로 줄줄이 묶어 놨어. 그것 때문에 좀 늦었다.”
“다 나자빠져 있었다고? 어떻게?”
어리둥절해진 데릭이 뭔가 더 물으려는데, 뒤에서 뭔가가 달음박질을 쳤다.
“으, 으아아아악!”
“어, 어이. 얘들아, 어디 가!”
카닛트가 자물쇠를 부수자 어린아이 몇 명이 비명을 지르며 튀어 나갔다.
재빨리 움직인 트루크가 두 명을 덥석 들어 올렸다. 미넬라와 데릭, 카닛트도 각각 한 명씩 맡았지만 모든 아이들을 저지할 순 없었다.
버둥거리는 아이들을 옆구리에 낀 트루크가 당황스럽게 소리치자 데릭이 인상을 썼다.
“우리를 또 다른 노예 상인이라고 생각한 것 같네.”
“내가 데려올 테니까 너희들은 아이들에게 잘 설명해 주고 깡치와 부하들을 챙겨. 아무리 못된 놈들이라지만 처리는 교수님의 의견을 여쭤봐야 해.”
미넬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트루크는 그녀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입구로 뛰어나갔다.
“해결이 다 된 것 같으이. 우리도 안으로 들어가 보자꾸나.”
밀라니아는 설렁설렁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어두운 밤에 길목은 달빛도 희미하여 바닥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신발 밑창에 물컹한 게 밟히자 밀라니아는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아니, 이놈들은 사방팔방에 똥을 싸고 다니나. 왜 가는 길마다 똥통인 게야.”
투덜거리며 바위에 신발 밑창을 벅벅 문질러 대고 있는데, 그레칸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뭐 하는 짓이야?”
“똥 밟기 싫잖아.”
그레칸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는 그녀의 오금에 팔을 끼워 넣었다.
“내려놓거라.”
근엄한 표정으로 밀라니아가 말하자 그레칸은 사방을 주욱 훑어보고는 태연히 중얼거렸다.
“지금 가는 방향에 크고 작은 똥 덩어리가 서른은 되는 것 같은데.”
“밀라니아가 아무리 잘 피해도 적어도 세 번은 밟을 것 같은걸.”
밀라니아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을 아꼈다.
조용해진 그녀를 품에 안고 걸음을 옮기는 그레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창고에 다다르자 불빛이 새어 나와서 사위가 분별 가능해졌다.
밀라니아는 그제야 그레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레칸이 아쉬운 얼굴로 밀라니아를 내려놓았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녀는 입구로부터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자 걸음을 멈추었다. 그레칸도 따라 멈추었다.
곧이어 입구 밖으로 어린아이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어디로 가야 하지?”
“일단 저기! 골목으로 빠지자. 안 그러면 쫓아올 수도 있어.”
“야! 너희 뭐야!”
어둠 반대편에서 우락부락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심부름을 갔다가 돌아온 깡치 패거리의 일당이었다.
혼비백산한 아이들이 밀라니아와 그레칸이 있는 쪽으로 도망쳐 나왔다.
‘이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밀라니아가 아이들에 앞서 쫓아오는 곰 수인의 발목을 붙잡으려는 때였다.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던 탓에 넘어지면 크게 다칠 듯했다.
밀라니아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뜰 참에 팔이 쑥 튀어나왔다.
강인한 팔이 넘어지려는 아이의 목덜미를 붙잡아 올리자, 겨우 넘어지는 사고를 면한 아이가 히끅거렸다.
“누, 누구세요?”
진정한 아이가 두려움에 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레칸은 말없이 눈썹만 치켜올렸다.
뒤에서 쫓아오던 곰 수인도 마침내 그들을 발견했다.
“누구냐!”
세 명의 곰 수인은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대로 달려왔다.
그레칸은 귀찮은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일수에 곰 수인이 뒤로 나뒹굴어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아이들은 움직일 생각도 못 하고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 살려 주세요…….”
“안에 사람이 있을 터인데 왜 나온 것이냐?”
그레칸의 위용에 비해 밀라니아의 목소리는 퍽 부드럽게 들려서 아이들은 밀라니아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아, 안에도 노예 상인들이 있어요.”
“뭔가 오해한 모양이군. 그들은 너희를 구하려고 온 이들이다. 도움을 받고 싶으면 들어가는 게 좋을 게야. 홀로 잘 도망갈 자신이 있으면 이대로 가도 막지는 않겠지만.”
아이 둘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도망쳐 나왔던 창고 안으로 다시 달음박질을 했다.
그레칸이 어지간히 두려웠는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그레칸과 밀라니아는 그들이 사라진 입구 쪽으로 선선히 걸음을 옮겼다.
정면을 응시하며 밀라니아가 물었다.
“어이하여 도와줬느냐?”
“무엇을?”
“그냥…….”
그레칸이 미간을 좁혔다.
“그냥 넘어질 것 같으니까.”
“…….”
“딱히 도와주려는 마음은 아니었어.”
“무의식중에 도와주려고 한 것이다.”
“그런 건 아니라니까. 그런 사소한 걸로 무슨.”
“그게 선한 생명이 본능적으로 품는 마음이다. 사소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타락하지 않은 인간들도 무릇 품고 있는 본성. 연민, 동정심, 뭔가에 안쓰러움을 느끼는 마음.”
“…….”
“그레칸 네가 증오에 휩쓸려 잃어버린 감정 말이다.”
밀라니아가 고개를 돌렸다. 미간에 주름이 간 그레칸은 얼떨결에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다행이구먼. 너는 여전히 내가 알고 있는 그레칸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