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아무도 모르게
밀라니아는 학교에서 마법을 가르쳤다.
처음에 아이들은 신비한 힘인 마법을 배우고자 의욕이 넘쳤다.
마법을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도니를 포함하여 12명으로, 학교에 오는 아이들 모두였지만 삼 일이 지나자 남은 건 단 세 명이었다.
[너무 어려워요. 전 검술이 더 맞는 것 같아요.]
예상 못 한 문제였다.
스미스는 밀라니아가 마법을 펼치는 것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가 이내 난색을 표했다.
[저도 나름대로 마법을 쓸 줄 알지만, 마녀님의 마법은 뭐랄까. 인간의 마법이 아니네요.]
[나의 마법은 너희의 마법과 궤를 달리하느니라.]
[이대로라면 아무도 마법을 배울 수 없을 거예요.]
[그건…… 흠, 부정할 수 없구나.]
대마녀 휘하에 들어와 그녀의 마력을 내려 받는 일족들과 달리 인간들은 마녀의 마력이 없었다.
따라서 마녀족이 공유하는 저주의 술이나 대마녀가 펼치는 자연 마법을 배우기에 난항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던가. 밀라니아는 천 년을 산 대마녀.
그만큼 많은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고 있었다.
[내 너희들의 마법을 연구한 적이 있도다. 심장 근처에 마력을 모으고, 마법을 쓰기 위한 회로를 지팡이와 같은 사물, 또는 신체에 새겨 넣으며 캐스팅이란 방법으로 마력을 발현하는 게 아니냐.]
[맞습니다. 이 손목을 보세요. 제 마력 회로입니다. 주문을 저장하면 훨씬 빠르게 마법을 쓸 수 있죠. 하지만 이건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라면 할 수가 없는 일이라…….]
[흥, 걱정 말거라. 걱정해야 할 건 이곳에 재능이 있는 아이가 있는지 뿐이다. 마력을 느끼지 못하고 머리가 좋지 않은 아이라면 마력 회로가 무용지물일 테니.]
그런 이유로 현재까지 그녀에게 마법을 배우겠다고 나선 이는 셋뿐이었다.
그중에서도 도니의 재능이 두드러졌는데, 도니는 레지스탕스들이 각지를 돌며 얻은 책을 모아 만든 도서관에서 어지간한 책은 그냥 읽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머리가 명석했다.
문자는 기본으로 뗀 상태. 캐스팅을 쓰고 읽는 데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도니는 쩔쩔매며 바싹 마른 나무를 노려보았다.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은 밀라니아는 팔짱을 낀 채 그를 주시했다.
“내게서 기인한 열기를 네게로 전하노라, 타오르는 불이여.”
푸싯, 마른 나무에서 한 줄기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도니의 얼굴에 실망이 스쳤다.
그것도 잠시, 그는 재빨리 옆에 펼쳐 둔 책을 힐끗했다.
“마녀님이 말씀해 주신 바로는 나무에 불이 붙어야 하고, 이 책에서 본 바로도 성냥 불꽃만큼의 불은 생겨야 하는데.”
“…….”
“연기는 피어올랐고, 심장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도 느꼈어요. 마법은 발현되었는데 결과가 이렇다면, 실패 원인은 마력 부족일까요?”
무표정하던 밀라니아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맺혔다.
순간 어두운 밤에 켠 촛불처럼 주변이 은은하게 환해졌다. 놀란 도니가 혀를 깨물었다.
“네 말이 정확하도다.”
정신을 차린 도니는 넋을 잃은 게 창피한 듯 얼굴을 붉혔다. 혀끝이 얼얼했다.
그의 반응일랑 상관없이 밀라니아는 긴 손가락을 들어 연기마저 그친 나무토막을 가리켰다.
“성냥만큼의 불빛을 원한다고 했느냐? 작은 불이라 우습게 여기지 말거라. 심장의 마력 움직임과 피어오른 불꽃을 비교해 봐.”
“아!”
진지하게 고민에 잠겼던 도니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방금 사용한 마력의 두 배, 아니, 적어도 세 배는 있어야 하는군요!”
“정답. 체질 타고난 마녀와 달리 인간 마법사의 자질은 끊임없는 탐구. 그 점에서도 정답이니라. 자, 보거라.”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나무토막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활활 타오르는 불에 휩싸인 나무토막. 도니의 입이 벌어졌다.
“너희 인간들이 말하는 마력의 서클이 두 개쯤 생긴다면 이 정도는 가능할 것이야.”
“와아.”
“너는 아직 회로가 없으니, 당분간은 마력을 모으는 데 집중하거라.”
“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마법은 의지의 산물이라는 것. 마력 또한 마찬가지다. 너는 마력을 느끼는 재능은 있으나 의지가 나약하다면 마력은 결코 네 곁에 머물지 않을 게야.”
“명심하겠습니다.”
밀라니아는 창문을 힐끗했다.
암막 천으로 꽁꽁 감싸서 빛은 새어 나오고 있지 않지만, 그녀는 창 바깥에 웅크린 햇빛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인어족 아이는 뭐 하고 있누.”
“도나티 님은 깡치 패거리에게 갔어요. 요즘 점점 욕심 사납게 굴고 있어서, 자주 불려 다녀요.”
도나티 얘기가 나오자 도니의 얼굴이 금세 걱정스러워졌다.
“저도 따라가고 싶지만 깡치는 인간을 싫어해서요. 제가 가면 도움은커녕…….”
속상한 듯이 중얼거리던 도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공부가 끝났으니 나가 봐도 될까요? 물고기라도 많이 잡아놔야겠어요. 마녀님이 알려 주신 방법을 사용하니 고기가 더 잘 잡히고 있거든요.”
“가 보거라.”
밀라니아의 인사를 받은 도니는 씩씩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도니가 떠난 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싱그러운 물 냄새가 물씬 풍겼다.
위제니아는 밀라니아의 앞에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내려놓았다.
“뭐어, 나쁘지 않다.”
나직이 웃는 위제니아를 흘끗했다.
“솔직히 말해 주랴? 여기서 마력 회로를 새길 만한 놈은 도니밖에 없느니라.”
시큰둥한 밀라니아의 말에도 위제니아는 실망하지 않았다.
“도니라도 재능이 있다면 다행이죠. 다른 아이들은 연금술이나 검술, 그게 아니라면 기술을 배우면 되니까. 아직 자기가 뭘 잘하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이니까요.”
밀라니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그녀를 응시했다.
인어족과 인간의 혼혈로, 어릴 때 교수에게 거둬져서 자라다가 지금은 레지스탕스에 속한 학교의 선생으로 일하는 위제니아는 천성이 따뜻하고 긍정적이었다.
타인을 믿을 수 없는 이 척박한 세상에서 아이들이 학교에 마음을 열게 한 존재.
“둔재였던 저도 교수님 밑에서 열심히 배웠는걸요. 배운 것을 돌려주는 게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지…….”
싱긋 웃는 위제니아를 눈만 굴려 힐끗한 밀라니아는 찻잔을 기울였다. 따뜻한 게 기분 좋았다.
“너 같은 이가 여기 있어 다행이구나.”
다양한 인간을 만나 왔던 밀라니아는 위제니아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 무리의 정신적 구심점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무리의 수장은 다른 자일지라도 정신적 구심점이 없으면 무리는 오래가지 못한다.
“이곳의 희망인 게지.”
“희망이라, 과찬을 하시네요. 하지만 진짜 희망은 아이들이랍니다. 도니처럼 재능 있는 아이뿐만이 아니라,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하는 모든 아이들. 어느 일족이든 아이들이 없는 곳은 지속되지 않으니까요. 특히 우리 같은 상황에는 더하죠. 진흙탕 같은 세상의 진주. 그들이 인류의 희망이에요. 저 같은 선생은, 진주를 품는 조개의 역할이라고나 할까요?”
위제니아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그건 ‘인간’의 명맥을 이어 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냐?”
“이 인류는 인간들만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수인들도 포함되죠.”
“화합하는 세상을 원하느냐? 모두 다 행복한 세상을 원하느냐? 너희 인간이 인간인 이상 너무 이상적인 꿈이로다. 이제 와서 인간이 수인들과 손을 잡는 게 가능하다고 보아?”
밀라니아는 위제니아의 생각이 궁금했다.
“이상적일 수, 있죠. 그래도요. 인간들만이 존재하는 세상은 있을 수 없어요. 단순히 수인 절대주의 체제를 뒤집는 것도 답이 될 수는 없고요. 그때는 입장이 바뀐 수인들이 상황을 뒤집기를 바라며 칼을 갈 테니까요. 그래선 안 돼요. 다툼이 영원히 이어질 뿐이죠.”
“…….”
“저는 인간과 수인의 혼혈이에요. 이 학교에는 혼혈이 많지 않지만, 다른 학교에는 혼혈이 꽤 섞여 있지요. 다행히도 그들은 꽤 중립적인 성향이에요.”
위제니아의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전 그들이 인간과 수인의 중간 다리가 되어 줄 거라고 믿어요.”
‘어느 정도 이들을 알 것 같구나.’
이상적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폭력만이 답이라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지만…… 그들은 다 쓸모없는 방해꾼일 뿐인 것을.]
망령처럼 들러붙은 그레칸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100년 전 그때, 차라리 계속해서 설득하는 것이 나았으려나.
인간 때문에 내가 죽는 게 아니라고. 그들이 아니더라도 내 수명은 이미 다했노라, 그렇게.
‘아니다. 그때의 그레칸은 말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게야.’
그레칸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 왔다.
도니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것처럼 그레칸도 길이 명확히 보이면 좋으련만.
그는 그녀에게 일생일대의 고민이자 풀리지 않는 매듭 같은 존재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말간 눈빛의 위제니아가 눈에 들어온다.
‘이 아이는 그레칸을 원망하고 있겠지.’
그레칸을 지탄했지만, 막상 모두의 적이라 생각하니 속이 쓰리다.
그래. 속상한 마음이다.
위제니아는 눈을 깜박였다. 당황한 걸까. 어쩌면 그레칸을 언급해서 놀란 걸지도 모른다.
“네?”
“답하기 어려운 문제인고?”
밀라니아가 미간을 좁히자 위제니아는 어색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라서요. 마녀님께 그런 질문을 받을 줄 몰랐어요.”
입을 다문 위제니아는 ‘으음.’ 고민하더니 고개를 살짝 떨어뜨렸다.
“어떤 의미로 물어보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녀는 조심스러웠다. 아마도 황궁에서 온 밀라니아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질문했다고 생각한 듯 한 마디, 한 마디가 신중하다.
“그냥 네 생각이 궁금하구나.”
“좋지는 않죠.”
“…….”
“기회가 있다면 죽이고 싶으냐?”
위제니아의 눈동자가 확장되었다.
“너희들에게 총통은 인세에 강림한 재앙과 다름없는 자. 그러니 기회가 있으면 없애고 싶을 테지.”
“…….”
“왜 그렇게 보누?”
“놀라운 말만 하셔서요. 잠깐만요, 이건 생각을 많이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청순한 얼굴이 고민에 잠겼다. 좌우로 고개를 갸웃하고는 한숨을 쉰다.
“뭐가 그리 어려우냐?”
“글쎄요. 어렵네요, 하하.”
의아하게 쳐다보는 밀라니아의 시선에 그녀는 멋쩍은 듯 목덜미를 두어 번 쓸어내렸다.
“총통을 죽인다라……. 이런 말 하기 좀 이상하지만, 총통을 상대로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불가능한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요. 총통을 죽인다는 건 그런 범주예요.”
“불가능한 일이라…….”
“마녀님은 곁에서 보셨으니 잘 아시겠죠? 사실 그는 평범한 인간이나 수인의 범주를 벗어났잖아요. 신에 가까운데, 누가 그런 존재를 죽이려고 하겠어요.”
“그럼 너희 무리의 무장 단체는 뭘 목표로 하는 게냐?”
이전과 달리 위제니아는 즉답했다.
“미래요.”
밀라니아는 눈썹을 꿈틀했다.
“현재로선 총통을 공격하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해요. 하지만 그는 수인이에요. 파괴의 신 같지만 실제 신은 아니죠. 그렇다면 언젠가는 노화하여 죽을 테니까요. 우리는 그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힘을 모으면서.”
“…….”
“물론 그때가 너무 길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겠죠? 총통은 인간을 증오하고 있잖아요. 그가 바라는 걸 우리가 들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총통이 뭘 좋아하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아마 사악한 새 하칸도 모를 거예요.”
아쉬운 투로 중얼거리던 위제니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우리에게 바라는 게 없어요. 그냥 미워할 뿐이에요.”
밀라니아는 안타까운 표정의 위제니아를 파헤칠 듯이 응시했다.
푸른빛이 도는 은발에 푸른 눈동자. 일반적으로 파랑은 차가워 보이기 쉬운 색인데 위제니아의 색깔은 따뜻하고 온화했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은근한 기시감.
외모적으로는 닮은 곳이 한 군데도 없으나 위제니아는 어딘지 전생의 앨리지를 생각나게 했다.
아끼는 무언가를 위해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이.
“총통을 만나 본 적이 있느냐.”
“예? 만났으면 저는 여기 있지도 못했을걸요.”
손사래를 치는 위제니아의 눈빛이 일순 진지하게 변했다.
“저는 진정한 싸움은 총통의 사후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
“그때야말로 원시적인 영역 다툼이 일어날 테고,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저희는 노력하고 있어요. 수인들이라고 무조건 배척하지 않아요. 싸우는 것보다 중요한 건 손을 잡는 거니까요. 싸워서 다 죽는 것보다는 손을 잡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게 당연하잖아요.”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확신하건대 모두 너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 아닐 것이다.”
선악이 흐릿하여 선한 존재들도 많지만 놀라울 만큼 악한 이들도 있다.
그러한 부조화의 모순이 인간의 정체성이라고, 밀라니아는 생각했다.
고심하던 위제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도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물어보거라.”
“마녀님은 그를 가까이서 본 적이 있으시겠죠. 총통은 어떤 사람인가요?”
위제니아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밀라니아가 뭐라고 대꾸하려는 찰나였다.
쾅!
“트루크! 문 부수려고 작정했어? 살살 닫으라니까.”
늘씬한 여자가 투덜대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살살 닫는다고 닫은 건데. 너무 그러지 마라, 미넬라.”
자석의 극과 극처럼 다소 순하고 침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보통의 성인들보다 덩치가 반 배는 큰 남자는 얼굴의 흉터 때문에 인상이 사나웠다.
“좀, 의식적으로 힘 조절을 해. 문짝 또 망가지면 네가 새로 만들어 달아야 한다. 교수님도 그렇게 말한 거 잊지 않았겠지.”
“알았어. 다음부터는 더 살살 닫을게.”
밀라니아는 자신에게는 으르렁거리며 위협적으로 굴던 사내가 고양이에게 쩔쩔매는 개처럼 구는 꼴을 희한하게 바라보았다.
“……저기.”
가느다란 목소리가 우물쭈물 흘러나왔다.
미넬라와 트루크 뒤로는 쉘터를 처음 방문하는 아이들이 서 있었다. 겁먹은 얼굴에 미넬라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이구, 놀랐겠네. 걱정할 거 없어. 이 아저씨가 생긴 건 무서워도 실력은 확실하거든. 검을 배워 보고 싶다고 했잖아.”
“네. 깡치 패거리에게 맞는 건 더는 싫어요.”
“그래. 여기 실력 있는 검사들 많거든? 다른 것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어. 열심히만 한다면 말이야.”
짐짓 다정하게 말한 미넬라가 위제니아에게 다가왔다.
“왔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밀라니아를 흘끗거리며 미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 떨떠름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밀라니아를 아직도 경계할 정도로 신중한 성품이었다.
인간 도살자를 처리한 후로는 왜인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움찔거리고 있지만.
과연 미넬라는 이번에도 밀라니아를 오래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새로 학생들 데려왔어. 며칠간 지켜봤는데 심성이 착해.”
“잘했어. 애들에게 기본 수칙을 먼저 설명해 줄래? 나도 곧 따라갈게.”
“알았어.”
또 한 번, 밀라니아를 힐끗한 미넬라가 트루크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가운데 훈련방으로 걸어갔다.
아이들은 긴장과 설렘으로 뒤죽박죽인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두 명은 밀라니아와 위제니아가 신기한지 자꾸만 뒤를 바라본다.
위제니아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가, 얼굴을 찌푸린 밀라니아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밀라니아는 일행이 모두 사라진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지? 이 느낌은……?’
불현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녀님?”
한발 늦게, 위제니아의 시선을 깨달은 밀라니아는 의구심을 한 편에 밀어두었다.
위제니아가 궁금하단 눈으로 쳐다본다.
밀라니아는 건조해진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 총통이 어떤 자이냐 하면.”
어렵잖게 입을 열었던 밀라니아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다물었다.
‘그레칸은 어떤 아이지?’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역시, 말씀해 주시기 어려운 건가요?”
위제니아의 눈빛이 실망으로 흐려졌다.
“그게 아니다.”
가볍게 고개를 저은 밀라니아는 한숨을 삼켰다.
“잘 알고 있다 여긴 적도 잠깐 있었으나 이제는 모르겠어. 순진하다 여겼으나 교활하고, 어리다 생각했으나 어느새 거대해져 버렸으니. 그를 정의 내릴 수가 없구나.”
“…….”
“하나 확실한 건…….”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맹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이기적일 만큼.”
그녀의 눈빛이 전에 없이 복잡했다.
* * *
황궁의 밀실 문 앞. 조심스러운 걸음이 다가왔다.
“하이로드, 하칸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밀실의 문이 열렸다. 빛 하나 없이 어둠에 가려진 밀실은 공허했고 열린 문밖으로는 서늘한 기운만이 흘러나왔다.
탁, 문을 닫은 하칸이 고개를 돌렸다.
짜증스러운 눈빛에 대기하던 시종이 움찔했다.
“하이로드는 어디 계시지?”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여길 드나든 사람은?”
“계속 지키고 있었는데 아무도 오가지 않았습니다.”
공손히 대꾸하는 시종을 보며 하칸은 미간을 좁혔다.
“됐어. 가 봐.”
하칸은 밀실 문을 다시 열고 등불을 붙여 보았다. 그러나 역시 텅 빈 공간만 그를 반길 뿐이었다.
하칸은 답답한 심정이었다.
* * *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속도가 꽤 빠르구나. 나이가 들어 기운이 탁한데도 이 정도 성취면.”
밀라니아는 말을 멈추었다.
멍하게 얘기를 듣고 있던 도니가 시선을 느끼고 흠칫했다.
한심하다는 눈빛. 도니는 침을 삼켰다.
“그게요, 마녀님.”
처음엔 집중력이 떨어졌겠거니 했던 밀라니아는 연신 침을 삼키며 머뭇거리는 그를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말해 보거라.”
한참을 망설이던 도니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마녀님은 귀신을 믿으세요?”
“뭐라? 귀신?”
웬 생뚱맞은 이야기냐는 시선에 도니는 괜히 말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붉어진 얼굴로 벌떡 일어난다.
“저 잠깐 밖에 갔다 올게요. 마녀님도 산책하실래요?”
밀라니아는 혀를 쯧쯧 찼다. 그러나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고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았다고, 꽤 오랜 시간 앉은 자리에서 빈둥거렸더니 몸이 뻐근한 참이었다.
“꽃이 제법 피었구나.”
“위제니아 선생님이 관심 있게 가꾸시거든요. 남들 눈에 띄지 말아야 하니까 줄기 높은 건 키우지 못하지만 작은 꽃은 많이 심어 두셨어요.”
근방에서 제일 큰 저택답게 담장 안쪽 정원도 꽤 넓었는데, 담장 아래에는 낮은 식물들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었다.
다만 높은 담장이 그늘을 드리워 웃자라 있는 게 흠이었다.
도니는 조잘거리는 것도 잠시, 다시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또다시 멍해진 얼굴. 눈밑이 퀭했다.
밀라니아는 혀를 쯧쯧 찼다.
도니는 학교에서 공부하랴, 밖에서 낚시하랴 하루에 몸이 두 개여도 모자라서 종종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정원을 한 바퀴 쭉 산책한 밀라니아는 유독 생기가 없어 보이는 식물 군집을 발견했다.
축 늘어진 보랏빛 꽃잎이 시들시들했다.
밀라니아는 손을 내려 꽃과 잎을 한번에 쓸어 보았다.
‘물이 부족해서 그렇군.’
밀라니아는 저택 뒤편의 우물에서 물 한 바가지를 떠와 금란초 주변으로 뿌려 주었다.
투명하리만큼 흰 손으로 촉촉이 젖은 금란초를 쓸자, 금란초의 꽃잎이 눈에 보일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몽롱한 금란초의 목소리에 밀라니아는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다가온 도니가 그녀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우와, 예쁘네요.”
“…….”
“아, 그러고 보니 이 풀, 생선이랑 같이 구워 드렸더니 도나티 님이 좋아하셨는데. 이렇게 보니까 꽃도 예쁘군요.”
간만에 흥취가 오른 밀라니아가 옆에 핀 꽃까지 건드리자 살짝 수그리고 있던 꽃잎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활짝 피었다.
“이것도 마법인가요?”
“아니다.”
도니는 다시 꽃을 바라보고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넉넉하게 먹지 못해 여전히 홀쭉한 뺨이 방긋 올라간다.
“예쁘다…….”
밀라니아는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로운 시간을 누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예쁘구나.”
도니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마녀님도 예쁘세요.”
“뭐?”
얼굴이 빨개진 소년은 제 말에 제가 더 놀란 듯 대경해서 벌떡 일어났다.
밀라니아가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걸음이 더 빨라진다. 부리나케 사라지는 뒷모습에서 시선을 뗀 밀라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때까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도니가 종일 어수선했던 이유를.
* * *
그날 밤, 호루스 교수는 저택 안에서 아이들에게 검술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검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도니는 밀라니아 옆을 잽싸게 차지했다.
돌연 그가 씨익 웃고는 밀라니아를 곁눈질했다.
“꽃이 예쁘시면 저한테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나른함에 젖어 있던 밀라니아의 시선이 도니를 따라 창가에 닿았다.
“이거요. 마녀님이 꺾어 오신 거 아니에요?”
도니가 가리키는 곳. 암막 천으로 달빛을 가린 창가에 꽃이 무더기로 놓여 있었다.
오전 나절에 정원을 산책하며 눈여겨보았던 금란초와 노란 알라만다였다.
밀라니아는 눈썹을 올렸다. 가득한 꽃이 기꺼워서는 물론 아니었다.
“쯔쯔, 간신히 살려 놨더니. 보는 것만으로도 예쁜 것을 누가 꺾어 왔누.”
예쁘다고 말하려던 도니는 꿀꺽 말을 삼켰다.
* * *
다음 날이었다.
다이닝룸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창가를 보고 꼭 한마디를 했다.
동료들을 돌아보자 다들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을 보아도, 역시 고개를 젓는다.
어리둥절하게 어깨를 으쓱인 트루크가 천천히 걸어오는 밀라니아를 보며 쭈뼛거렸다.
“왜 아침부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쳐다보누.”
밀라니아가 시큰둥하게 핀잔을 주자 우락부락한 얼굴이 오묘하게 변했다.
“아닙니다.”
스쳐 지나가며 트루크가 중얼거렸다.
“꽃 예쁘네요.”
“응?”
무슨 꽃?
밀라니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기이한 시선을 느꼈다.
그녀를 어색해했던 이들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헛기침을 했다.
밀라니아는 관심이 집중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 꽃이 다발로 놓여 있던 그 창가. 지금은 투명한 유리 화병에 꽃이 꽂혀 있었다.
삭막한 학교에 핀 꽃. 별거 아닌데도 모두가 작게나마 웃음을 띠었다.
밀라니아만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 * *
배 속이 허했다.
“배가 고프구나.”
위제니아가 미안한 얼굴을 했다.
“식재료가 다 떨어져서 좀 기다리셔야 해요. 미넬라와 트루크가 사냥을 나갔거든요. 곧 올 거예요.”
밀라니아는 머쓱해져서 입을 꼭 다물었다.
레지스탕스는 늘 자금이 부족했다.
무장 단체의 무장, 학교와 쉘터의 식료품 조달, 간혹 노예로 잡혀 있는 혼혈이나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도 재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식재료는 사냥이나 낚시로 충당하는데, 그 양이 넉넉할 때가 드물었다.
하는 수 없이 밀라니아는 위제니아가 갖다준 찻잔에 입을 댔다.
‘황궁에서는 초콜라떼를 물처럼 마셨었지.’
금안이 아련해졌다.
물론 마시고자 하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 황궁에 들어가면 한 동이는 갖다줄 것이니.
그러나 그럴 마음은 들지 않아서, 밀라니아는 향긋하지만 무미한 차로 배를 채우고 몸을 일으켰다.
“위제니아, 집에 낚싯대가 있느냐?”
“낚싯대요? 창고에 있을 텐데, 그건 왜요?”
자신만만하게 창고로 가려는 그때, 발소리가 쿵쾅거리며 가까워졌다.
“분명히 트루크일 거예요.”
이러다간 안 그래도 낡은 저택 바닥이 꺼지겠다며 걱정하는 위제니아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도니였다.
“도니? 무슨 일이니? 당분간은 일을 해야 해서 못 올 것 같다고 했잖아?”
어지간히 숨이 가쁜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도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요. 빌렸던 책을 돌려드리려고 왔는데 오는 길에 제가 뭘 발견했는지 아세요?”
도니가 어린아이 하나는 충분히 들어갈 법한 볼록한 포대를 들어 올렸다.
힘에 부친 듯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포대를 바닥에 내려놓았는데 무게가 꽤 나가는지 소리가 퍽 묵직하다.
“그게 뭐야?”
궁금해하며 다가간 위제니아는 포대의 입구를 열고 그대로 굳어졌다.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사람들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뭔데 그래요?”
함박웃음을 지으며 도니가 입구를 크게 열어젖혔다.
“이것 보세요!”
보잘것없어 보였던 포대 안에는 각종 먹을거리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다들 식사 전이죠? 어서 먹어요, 우리!”
모두가 기뻐하는 가운데 포대 안을 유심히 살핀 밀라니아는 신중했다.
다소 뭉개지고 섞이긴 했지만 형태가 온전한 칠면조 구이와 몇 겹으로 겹쳐진 미트 파이, 파이 소스가 묻은 먹음직스러운 흰 빵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허어?”
그녀의 외마디에 어린 의구심은 뒤늦게 1층으로 내려온 아이들이 내지른 기쁨의 환호성에 묻혔다.
식탁 가득 음식을 차릴 무렵, 꿩 두 마리를 잡아 온 트루크와 미넬라가 돌아왔다.
“엥? 이게 웬 거야?”
사정을 들은 그들은 고생해서 잡아 온 사냥감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에 섭섭해했지만 그것도 잠시, 눈 깜짝할 사이에 무리에 합류하여 음식을 주워 먹었다.
미넬라는 갈빗대에 붙은 고기를 뜯으며 한발 늦은 의심을 제기했다.
“누가 우리를 노리고 독 탄 거 아닐까? 이럴 때 교수님이 있으시면 잘 판단할 수 있을 텐데.”
“아무 이상 없는데? 맛있어.”
신중한 그녀에 비해 트루크는 성급하게 칠면조 다리를 뜯고 있었다.
미넬라는 혀를 찼지만 트루크가 너무나도 맛있게 먹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아이들도 쉼 없이 입을 오물거렸다.
트루크는 진심으로 행복해했다. 다른 이들보다 월등히 큰 덩치만큼 먹는 것도 많이 먹는 그였다.
허기를 배부르게 채운 적이 많지가 않았으므로, 다른 이들을 신경 쓰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게 그저 좋은 듯했다.
“어떤 멍청한 놈이 깜박 놓고 간 거겠지. 어쨌든 운이 좋았네.”
음식 하나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밀라니아는 식탁을 가득 채운 음식을 응시했다.
‘길바닥에서 주웠다기엔 지나치게 고급 음식들이지.’
“차라리 길 가다가 황금을 주웠다는 게 더 말이 되겠구먼.”
위제니아가 풋, 하고 입을 가렸다.
위제니아의 눈이 처졌다.
“독은 안 든 게 확실해요. 누가 실수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요. 배가 많이 고팠는데 잘됐다고 생각해요. 많이 드세요, 마녀님.”
밀라니아는 마음이 찝찝했지만 위제니아가 쥐어 주는 빵까지 마다하지는 않았다.
입 안에 들어가자 사르르 녹는 크림이 미각을 달콤하게 자극했다.
입 안을 가득 채운 빵은 신선했고, 눈으로 보는 것보다도 상등품이었다.
꼭 황궁의 화덕에서 난 빵처럼.
“흐응.”
* * *
저택은 암막 커튼이 있어서 마당이 아니고서는 볕을 쬐기 힘들었다.
일광욕을 하는 고양이처럼 소파에 눕듯이 앉아 햇빛을 받는 밀라니아는 나른하게 풀어져 해파리처럼 흐물거렸다.
햇빛 부스러기가 밀라니아의 피부 위에 내려앉아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달칵.
문을 열고 나온 호루스 교수가 그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곧 이어진 묵직한 걸음 소리가 밀라니아의 옆에서 그쳤다.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은 거요?”
“내가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 같구나?”
“솔직히 그렇소.”
호루스는 밀라니아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가 뭐라 하든 무관심했다. 하암. 하품까지 한다.
그녀의 나른함이 전염되기라도 했는지, 호루스의 표정도 약간이지만 풀어졌다.
“기분이 좋아 보이오.”
호루스는 어이가 없어졌다.
“누가 보면 이곳이 당신 집인 줄 알겠소만?”
“이 땅에 내가 발 대지 못할 곳이 없도다.”
거만한 대답. 그것을 진실이 아닌 그녀의 뻔뻔함으로 받아들인 호루스의 얼굴에서 완전히 힘이 빠졌다.
“하아. 당신이 황궁에 돌아가면 황궁의 사정을 알 수 있을 거라 기대를 했소. 이렇게까지 이곳에 딱 붙어 있을 줄은 몰랐지.”
“황궁보다 이곳이 좋구먼.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거라. 이미 많이 말해 주지 않았느냐.”
‘황궁으로 돌아가면 내가 대마녀란 것이 밝혀질 텐데,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으이.’
호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말대로 충분히 들었소. 그보다는 아이들의 성취가 궁금하군. 듣기로는 도니가 재능을 보인다고 하던데.”
“그래. 나머지 두 아이는 마법을 쓰는 덴 재능이 없어. 기도 여간 약한 게 아니더구나.”
밀라니아는 도니를 제외한 두 명의 아이를 떠올리곤 혀를 찼다.
“아무튼 심약한 것이, 성공하기는 글렀느니라.”
“딱히 마법사가 아니라도 되오.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을 테니.”
밀라니아는 한심하다며 고개를 젓다 말고 피식 웃었다.
“그래. 그것도 그렇구나. 마력을 느낄 줄 알고 명석하니 뭐라도 되겠지. 그 둘에겐 마법진을 가르치고 있다.”
“……감사드리오.”
뜻밖의 인사였다. 밀라니아가 턱을 뒤로 젖혀 호루스를 응시했다. 호루스가 진지한 얼굴로 중얼댔다.
“당신이 전수하고 있는 건 우리에게 매우 가치 있는 지식이오. 라즈흘 평원의 참사 때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전멸하여, 지금 남은 이들은 전해져 오는 유산을 이용하는 것밖에 마땅한 방법이 없었으니까.”
“본래 너희 인간들의 지식이었으니 돌려주는 것뿐이다.”
“그래도 말이오. 당신이 없었으면 알 길 없었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호루스는 입을 다물었다. 밀라니아는 내심 웃음을 흘렸다.
‘꼬장꼬장한 인간이 저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을꼬.’
흠칫한 호루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력 회로는 아무나 새길 수 없는 걸로 알고 있소만.”
“심장에 서클이 생겼으니 회로를 만들어도 문제는 없을 게다. 내게 인간의 마법을 알려 준 마법사의 말에 따르면 몸을 보호할 마력이 그 정도쯤 되면 회로에 생명력을 빨리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더군. 대신 마력이 바닥나면 부족한 마력을 채우기 위해 회로가 생기를 사용할 수 있으니 무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야.”
“따로 단단히 이르도록 하겠소.”
할 말 없으면 가라고 말하려던 밀라니아는 생각을 바꾸었다.
“……혹시 요즘 뭐 이상한 게 느껴지지는 않느냐?”
호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없소만, 왜 그러는 것이오?”
“없다면 됐다.”
궁금하다는 시선에도 밀라니아는 손만 휘휘 저었다.
‘저 정도 경지의 검사도 눈치채지 못한 침입자라. 내가 과민 반응하고 있는 것인가?’
* * *
도니에게 마력 회로를 새기기로 한 날이 되었다.
도니는 기대하면서도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몸에 만드는 마력 회로는 마력으로 마력의 통로를 뚫는 것이라 필연적으로 고통이 동반되기 때문.
“넓적다리 안쪽에 새겨 주세요.”
의아해하는 밀라니아에게 도니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도나티 님 모르게 하려고요.”
“마법을 할 줄 알면 낚시에도 도움이 될 텐데도?”
가벼운 농담이었다. 도니는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깡치 패거리를 무서워하니까요. 제가 마법을 배웠다는 걸 알면 깡치 패거리가 찾아올까 봐 잠도 못 잘 거예요.”
“골목의 왈패들이 여럿 잠 못 이루게 만드는구나.”
밀라니아는 혀를 찼다. 황도의 골목이 무법 지대가 된 이유에는 질서의 부재가 가장 크지만, 깡치 패거리 같은 왈패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저 준비됐어요, 마녀님.”
주섬주섬 바지를 벗은 도니는 속옷 하나만 남겨 두고 있었다.
소년과 청년의 중간에 선 그는 키는 청년 못지않게 컸지만 충분히 먹지 못한 팔다리는 여물지 못한 소년처럼 가늘었다.
결심한 도니의 눈빛은 긴장감이 감돌았고, 또한 결의에 차 있었다.
“예전이면 그다지 어렵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내게는 다소 힘에 부치는 일.”
팔짱을 끼고 고민하던 밀라니아는 조용한 방 밖을 힐끗했다.
“혹시 모르니 위제니아를 여기 두어야겠다. 문제가 생기면 처치해 줄 자가 필요하니까.”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밀라니아는 방을 나서서 위제니아를 찾았다.
위제니아는 도니를 걱정하여 바로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밀라니아의 부름에 금방 응했다.
“어려울 건 없느니. 그저 회로를 새기는 동안 도니가 고통을 못 참을 것 같으면 내게 이야기를 하면 돼. 회로는 다음에도 새길 수 있으니…… 음?”
위제니아와 함께 도니가 있는 방으로 들어온 밀라니아는 멈칫했다.
축축한 습기처럼 피부에 달라붙는 이질감.
‘무엇인고?’
그녀가 멈춘 사이 위제니아가 다급히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도니? 어디 아프니?”
기이한 감각을 떨쳐 낸 밀라니아는 도니를 바라보았다.
아까까지 멀쩡했던 도니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
“무슨 일이 있었느냐?”
영혼이 빠져나간 듯 핼쑥한 안색의 도니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아니에요. 막상 회로를 새긴다니까 긴장이 많이 됐나 봐요. 밤에 잠을 설쳐서 그런가 자꾸 환청이 들려서…….”
“걱정 마. 스미스 씨도 그랬잖아. 참으려면 참을 수 있다고.”
안심한 위제니아가 따뜻하게 웃으며 도니의 어깨를 두드렸다.
간신히 안색을 회복한 도니가 그녀에게 감사의 미소를 되돌렸다.
한 발 뒤로 떨어진 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밀라니아는 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암막 천으로 꽁꽁 싸매 촛불의 빛에만 의지하는 방은 어둑했고, 환기가 되지 않은 공기는 눅진했다.
밀라니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뭔가 숨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로군.’
밀라니아는 다시 한번 방을 둘러본 뒤 진정한 도니를 바라보았다.
“문제없으면 시작하자꾸나.”
다리에 회로를 새기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위제니아는 아무리 제자고 어린 나이라지만 성년이 가까워지는 도니의 속옷 차림이 민망한 듯 시선을 비껴 냈지만 밀라니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도니의 마른 다리가 나무토막으로 만든 석상인 양 무미건조한 눈빛이 피부 위로 회로를 그렸다.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느리게 그으면 그 궤적대로 도니의 허벅지 안쪽에 붉은 실선이 생겼다.
피가 흐를 듯 말 듯 붉어지는 실선. 다 익은 석류에서 빨간 알갱이가 터지듯 빨간 핏방울이 툭 튀어 올랐다.
실선이 울컥 피를 토해 냈고 곧 그쳤다. 피가 멎은 부위는 이내 은색으로 물든다.
밀라니아의 마력 색이었다.
언젠가 밀라니아가 인간 마법사에게서 보았던 회로는 복잡한 기하학 무늬가 여러 개 겹쳐진 형태였다.
펜으로 따라 그리기도 어려운 문양이었지만 밀라니아는 신중하게, 그러나 거침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마침내 도니의 마른 허벅지 안쪽에 성인 남성 손 크기 정도 되는 회로가 새겨졌다.
“회로를 새긴 주체가 나이기 때문에 지금은 회로가 나의 마력 색을 띠고 있느니라. 네가 너의 마력으로 마법을 사용할수록 회로의 색깔도 바뀔 것이다. 호루스에게도 말했지만 생기를 뺏겨 일찍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마력 관리를 잘해야 할 게다.”
“감사……합니다. 이제 저도 마법사가 됐네요.”
허벅지의 회로를 내려다보는 도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침착했던 눈이 감격에 겨워 넘실거렸다.
생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도 신음을 끙끙 참아 냈던 도니였다.
스미스의 “회로를 새길 때 소리를 내면 마력이 빠져나갈 수도 있다.”라는 거짓말 섞인 엄포를 단단히 믿고 있었으므로 필사적으로 신음을 참은 눈가에 눈물이 아롱아롱 맺혀 있다.
그건 비단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가 열심히 노력하면 사람들을 많이 도울 수 있게 되는 거겠죠.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도나티 님도…….”
의연하고 어른스러웠던 도니는 쉬이 격정을 참지 못했다.
그동안 인간 노예로서 바닥을 구르며 살아왔던 설움이 북받친 모습이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박박 닦은 도니가 바닥에 떨어진 바지를 주워 들고 재빨리 다리를 끼웠다.
“약 발라야지 옷부터 입으면 어떡해.”
위제니아가 상처가 난 허벅지에 연고를 바르고 그 위에 미리 준비해 둔 깨끗한 천을 둘러매는 동안 도니는 낮게 훌쩍였다.
왠지 모를 고단함이 서린 얼굴을 밀라니아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렇게 아팠느냐?”
“긴장이 풀리니까 자꾸 눈물이 나네요.”
상처를 처치한 위제니아는 걱정스럽게 도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안색이 나빠. 오늘은 낚시터에 가지 말고 집에서 푹 쉬어야 할 것 같아.”
“아마 가능할 거예요. 도나티 님이 고향에 갔다 오자고 하셨거든요. 오늘은 그러니까 쉴 수 있어요. 당분간은 못 오겠지만…….”
도니는 후련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위제니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공부가 생각보다 힘들었나 보구나?”
“네? 그, 그런 건 아니고요. 좀 쉴 필요가 있는 거 같아서……. 아, 일단 옷부터 입을게요!”
후다닥 바지를 꿰입는 도니를 지켜보던 밀라니아는 불시에 입을 열었다.
“마녀님?”
‘아까부터 거슬렸었지. 대체 어떤 놈이냐.’
분홍빛 입술 사이로 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 불, 태양, 풀잎, 풀꽃, 세상의 모든 신성한 것들을 빌어 오래된 마녀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특한 것들은 신성 앞에 그 존재를 드러낼지어다.”
파아!
어둑했던 방 안이 밝아진다.
어둡고 눅눅한 방에 신성한 빛이 흘러넘쳤다.
위제니아와 도니의 눈이 부릅뜨였다.
은은한 빛은 그들의 머리카락 사이에도, 어둠이 얼룩처럼 남은 방구석에도 샅샅이 스며들었다.
오래지 않아 빛은 사그라졌다.
밀라니아는 가늘게 뜬 눈으로 방을 살폈다. 변한 것은 딱히 없어 보였다.
“흐음.”
가벼운 침음. 정신이 돌아온 위제니아와 도니는 얼떨떨한 눈으로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마, 마녀님? 방금 그건?”
턱을 쓰다듬으며 밀라니아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설명했다.
“기분이 영 찝찝하여 뭔가 숨어든 게 아닌가 싶어서 탐색을 해 보았다. 걸리는 건 없구나. 정말 아무것도 없거나, 내 탐색으로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은밀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후자의 가능성은 희박하겠지.’
생각에 빠진 그녀를 도니가 경외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갓 만들어진 마력 회로가 따끔거렸다.
옷 위로 상처를 꾹 누른 도니는 책상 위의 촛불을 불안한 눈으로 응시했다.
책상을 둘러싼 다른 두 명의 소년 역시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주변을 흘끗거렸다.
도니가 속삭였다.
“틀림없어.”
“맞아. 틀림없어.”
“분명해. 더는 지켜볼 것도 없지.”
세 사람의 눈빛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도니가 눈에 힘을 주었다.
“확실해. 여기 학교에…… 귀신이 있어.”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릴 듯 말 듯 하여 이마가 닿을 듯 가까운 두 사람에게만 인식되었다.
세 사람은 무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긴장한 눈빛의 도니가 속삭였다.
“너희들도 내 말이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해?”
“아니.”
카스틴이 고개를 저었다.
“동의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집에 있을 때는 그런 적이 없는데 학교에서만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는 게. 갑자기 몸이 오싹해지는 거나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이 떨려 오는 거.”
“이상한 기분도 들지.”
에쉬가 말을 보탰다.
“그래서 요즘 학교 오기가 싫어. 마법을 배우는 건 좋지만 무서워서 의욕이 안 솟는다고.”
개중 가장 열심히 학교를 드나들며 마법을 배웠던 도니의 낯빛도 우중충했다.
“이상한 건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우리만 같은 현상을 겪었다는 거야. 날이 이렇게 멀쩡한데 갑자기 냉골처럼 추워진다는 게 말이 돼? 이상한 건, 나만 그랬다는 거야. 그 자리에서 나만!”
“누군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목을 조를 것 같은 공포감은 또 뭐고.”
“진짜 이상한 일은 소리야. 소리가 들려. 입을 다물고 있으라거나 질문하지 말라거나. 질문해야 공부가 되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수업에 집중이 되겠냐고.”
그 말에 세 사람의 몸이 다시 부르르 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하나뿐이야.”
“귀신.”
안색이 파리해진 도니가 입술을 달싹였다.
“근데 왜 우리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 * *
귀신.
그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구릿빛 피부의 사내답게 잘생긴 얼굴에 그늘이 짙게 드리웠다.
“교수님, 슬슬 깡치 놈들에게 상납금을 줘야 하는데요. 이거 언제까지 줘야 할까요? 아이들 먹이기에도 아까운 것들을 그놈들 입에 처넣으려니 분통이 터져서…….”
“마음은 알겠다만 마찰이 일어나느니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게 나아. 소란이 일면 황궁이 여길 주시할 거다.”
“하지만 그놈들 요즘 도를 점점 넘어서고 있어요.”
“당분간은 면밀히 주시해 보자꾸나. 예사 왈패는 아니라 신중해야 해.”
미넬라와 호루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그가 앉아 있는 창가 앞으로 지나갔다.
트루크만큼이나 덩치 큰 그가 대놓고 앉아 있는데도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보통 인간은 대상을 인식하는 데 오감을 사용하는데, 오감의 작용은 유기적이었다.
오감 중 단 두 개라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눈앞에 무엇이 있어도 무심코 지나가는 경우가 왕왕 있기 마련.
밀라니아의 자연 동화술이 그렇고, 남자가 제 모든 기운을 갈무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말 그대로 공기와 같은 상태가 된 그는 누구의 감각에도 걸리지 않은 채로, 누군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관계도 곧 끝이니라.]
[이제 그만 네 갈 길 가거라. 너와 나의 악연은 여기서 끝을 고하자꾸나.]
[당분간 밖에서 생활할 게다. 전처럼 날 쫓아올 생각은 하지 말거라. 만약 또 한 번 그렇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너와 나의 인연을 끊어 버릴 것이야.]
‘두 번 버려질 수는 없다. 그러니 눈에 띄지 말아야 해.’
귀신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쯧쯧, 얘야. 내가 이 부분은 확실히 외워 오라 하지 않았느냐? 너희 인간들은 언어를 통하지 않으면 마법을 발휘하기 힘들다고 했잖누. 언어 없이 의지를 발휘할 수 있다면 외우라고 하지도 않느니라.”
풀잎 위 떨어지는 이슬 같고 때로는 건조한 이파리 선단처럼 뾰족한 목소리.
그를 지배하는 음성이었다.
“그, 그게……. 하루 종일 밭일을 하느라 시간이 없었어요.”
“시간을 줄 테니 후딱 외워 보거라.”
“이렇게 많이요?”
“에쉬, 넌 양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다정하네.’
그는 눈매를 어그러뜨렸다.
그녀는 다정했다. 말을 하지 않으면 마법을 쓸 줄도 모르는 멍청이들에게도.
유치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쓸모없었다.
마법을 잘해도, 빗자루에서 오러를 뽑아낼 줄 알아도 그녀는 그를 칭찬하지 않으니까.
한때는 그랬었는데. 충만하게 행복했던 그때가 아스라했다.
상실감을 느낀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
“도니, 벌써 마력을 꽤 모았구나. 이대로라면 회로를 새길 날도 머지않았느니.”
“헤헤, 감사합니다. 마녀님 칭찬을 들으니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대로 내게서 멀어지려 하는구나.’
그녀가 웃고 있었다.
‘나를 버리려 드는구나.’
너그러운 표정으로 다른 남자를 칭찬하고 있다. 그 분위기가 지극히 화목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생각보다 성취가 느려서 걱정이에요.”
“상심 말거라. 충분히 잘하고 있느니라.”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다 예전의 자신에게 해 주었던 것들이니.
그녀가 웃으며 도니의 어깨를 두드렸다.
학교에 숨어든 귀신, 그레칸은 무표정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새카만 분노 대신에 붉은 피를 뿜어낸다.
피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그레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서 흐려지기를 기다렸다.
울컥울컥 새어 나오는 분노와 슬픔에 몰입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흔들릴 테고, 평정을 잃을 것이며 기운이 새어 나갈 것이다.
‘밀라니아에게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들킬 수 없어.’
쫓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온몸이 오싹할 만큼 써늘한 표정으로 말할 것이다.
그래서 주먹으로 심장을 빻는 것처럼 아파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버림받기 싫으니까.
그러나 밀라니아가 도니에게 몸을 기울일 때는 주먹이 꽉 쥐어졌다.
팔꿈치 안쪽에서부터 힘줄이 세 개로 갈라져 도드라졌다.
“너는 가르칠 맛이 나는구먼.”
그에게서 거둬진 것들.
그레칸의 몸이 물에 녹는 먼지처럼 흐릿하게 사라졌다.
저택 밖으로 나온 그레칸은 앞으로 허리를 구부렸다.
허억, 헉!
힘줄이 팔딱팔딱 곤두선 손으로 가슴을 쥐어짤 듯 잡았다.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는 와중에도 기감이 예민한 밀라니아에게 들킬까 봐 숨을 죽이고 기운을 갈무리했다.
민감하게 달아오른 피부가 찌릿찌릿했다. 밖으로 분출 못 한 기운이 몸 안에서만 맹렬히 회전했다.
결국 심화가 심장에 미쳤다.
울컥.
바닥에 피를 토해 낸 그레칸이 찌푸린 눈을 감았다. 눈시울 주변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그레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더는 못 참겠어.”
눈 맞춤 하고 싶다.
손잡고 싶다.
안고 싶다.
입 맞추고 싶다.
그 모든 것을 당신과.
* * *
누가 그레칸을 감지하고 볼 수 있었다면 그는 학교에 또 한 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만큼 그레칸의 움직임은 대범하고 태연했고, 타인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날은 카스틴과 도니가 생업으로 학교에 오지 못하고 에쉬만 찾아온 날이었다.
에쉬는 도니보다 한 살 많은 남자아이였지만 키는 비교할 수 없이 작았다.
거미 수인의 아래서 옷감을 짜는 일을 하는 그는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집에만 박혀 일만 했던 터라 피부가 희었다.
게다가 운동을 못 하여 근육이 없는 몸은 깡마르고 키도 작아서 여자애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남성적인 매력이 없는 개체인지는 그레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에쉬에겐 불행히도, 그레칸은 밀라니아와 가까운 모든 사람을 짜증스러워하고 신경 쓰는 괴팍한 성미였다.
붉은 질투심 가득 품은 그레칸의 마음은 대롱 입구보다도 좁고 백지장보다 얄팍했다.
밀라니아와 에쉬는 원형 책상 주변에 둘러앉아 있었다.
빈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은 그레칸은 팔짱을 끼고 에쉬를 노려보았다.
불청객이 끼어들었다는 것도 모르고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에쉬 너는 머리도 똑똑하고 마법의 원리도 잘 이해하기는 한데, 문제는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이 둔하구나.”
“아……. 그럼 전 마법사는 될 수 없는 건가요?”
“일단 내가 도와줄 테니 내 인도를 따라 보거라. 옷자락을 걷어 봐.”
에쉬가 옷을 걷었다. 뱃살 하나 없이 흐물흐물한 몸통이 드러났다.
눈썹을 꿈틀한 그레칸은, 밀라니아가 에쉬의 가슴에 손을 대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그는 실핏줄 돋은 눈으로 지켜보았다.
“마력을 불어넣어 줄 테니 심장 주변으로 이끌어 보거라.”
“네!”
에쉬는 마력을 제 의지대로 거두는 것이 힘든지 땀을 뻘뻘 흘리기는 했지만, 밀라니아가 손을 떼어도 집중을 흩트리지는 않았다.
심장 주변으로 마력을 두어 번 돌린 에쉬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반면 그레칸의 얼굴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와! 느껴져요! 이렇게 마력을 저장할 수 있는 건가요?”
“내 마력이니 곧 흩어져 버릴 테지만, 시간을 두고 모으면 서클을 만들 수 있을 게다. 밖에 네게 도움이 될 마도구가 있는지 물어보고 오마.”
밀라니아가 자리를 뜨자 에쉬는 설레는 얼굴로 가슴을 문질렀다.
그레칸의 시선은 방을 나서는 밀라니아의 뒷모습에 못 박혀 있었다.
곧 스윽 유령처럼 에쉬에게로 시선이 돌아온다.
불쌍한 에쉬는 아무것도 모르고 중얼거렸다.
“정말 친절하시구나. 후아, 떨려 죽는 줄 알았네. 아직도 심장이 떨려.”
흰 얼굴을 붉게 물들인 에쉬가 주먹으로 가슴을 쿵 쳤다.
긴장과 설렘이 감도는 표정. 단순히 마력을 강하게 느껴서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그레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흠칫 놀란 에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레칸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소리는 흘러나가지 않았다.
에쉬가 의미를 이해한 것은 청각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그레칸은 말이나 언어가 없어도 제 뜻을 남에게 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에쉬는 그것이 환청인지 귀신의 소린지 몰라 혼비백산했다.
정확히 따지자면 에쉬는 공부가 어려워 가만히 있고 다가온 건 밀라니아였지만 그레칸에겐 통하지 않았다.
무조건 에쉬가 문제의 원인이다.
밀라니아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그레칸은 에쉬만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달칵.
우아하게 걸어온 밀라니아가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던 그레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의지와 기운을 회수했다.
허억, 허억.
에쉬는 무릎을 손으로 꽉 붙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당장 마도구를 찾을 수는 없다고 하느니라. 당분간은 내가 마력을 잘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마.”
에쉬는 숨 쉬는 데 집중하며 고개를 저었다.
“너 왜 그러느냐? 계속 마력을 돌렸던 것이야? 그렇게 급하게 해 봤자 도움이 되지 않아.”
“그, 그게 아니라…….”
에쉬는 억울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리다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에요. 저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부, 부모님이 일찍 들어오라 하셔서요.”
갑작스러운 말이 이상할 만도 하지만 밀라니아는 그저 그렇구나 했다.
그녀는 호기심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관심 또한 짧았다.
괜히 서운해진 에쉬는 꽁지에 불붙은 짐승처럼 학교를 뛰쳐나갔다.
그레칸은 비로소 평온해졌다.
눈꼴신 거머리 하나를 떼어 냈다.
그러나 행복감은 짧았다.
며칠이 지나서 에쉬는 다시 학교에 나오기 시작했다.
인간이 가축 취급받는 이 세상에서는 과거 문명의 한 조각인 학교는 드나드는 것만으로도 위험성을 동반하는 행위.
학교에 오는 아이들은 겉으로는 깡마르고 볼품없어도 나름의 강단이 있었다.
에쉬 또한 그러했다.
‘저 인간 놈이 죽지도 않고 또 왔군.’
그레칸은 싸늘한 눈으로 다시 나타난 에쉬의 일거수일투족을 노려보았다.
“이상하게 추운걸.”
해쓱한 안색의 에쉬가 손으로 양팔을 쓰다듬자 그의 곁에서 뜨거운 물에 푼 곡물 가루로 식사를 하고 있던 카스틴도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그래? 나도 그래.”
“사실 요 며칠 계속 그랬어.”
“어? 나돈데…….”
“어, 나도 그래!”
에쉬가 카스틴은 서로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그들을 벽에 기대서 있는 그레칸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기만으로도 생물체의 심장을 멈추게 하는 위압이 담긴 그레칸의 기운이었다.
아무리 그가 죽일 생각이 없고, 기운도 희미하다지만 마법사도 아닌 일개 소년들이 견딜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결국 밤잠을 설치는 에쉬와 카스틴은 점점 밀라니아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이 일이 밀라니아와 관련되어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에쉬와 카스틴은 밀라니아에게 과제만 받아 수행하고, 다른 선생들에겐 검술과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핑계로 밀라니아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나 단 한 명만은 여전히 밀라니아에게 수업을 받고 있었다.
세 거머리 중 제일 크고 거슬리는 거머리였다.
“마력이 쌓이는 속도가 꽤 빠르구나. 나이가 들어 기운이 탁한데도 이 정도 성취면.”
칭찬에도 도니는 얼빠진 얼굴이었다.
그레칸의 기운에 노출된 그는 밤잠을 설친 상태였다.
그레칸의 눈빛에 가시가 돋아나 있었다. 도니는 땀을 뻘뻘 흘렸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기에 정신을 못 차리누.”
“그게요, 마녀님.”
“말해 보거라.”
“마녀님은 귀신을 믿으세요?”
“뭐라? 귀신?”
잠시 황당한 침묵이 흘렀다.
“저 잠깐 밖에 갔다 올게요. 마녀님도 산책하실래요?”
밀라니아는 그러자고 몸을 일으켰고, 그레칸은 당연한 것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꽃을 쓸어 보는 밀라니아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미묘하게 힘이 빠져 부드러웠다.
손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심장이 빠르게 피를 토해 내고 있었다.
몸을 웅크리고 시든 꽃을 살리는 그녀의 거미줄 같은 머리카락이 희미한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손가락이 저절로 움찔거려서 그레칸은 다른 손으로 손을 붙잡아 막았다.
“우와, 예쁘네요.”
“…….”
“아, 그러고 보니 이 풀, 생선이랑 같이 구워 드렸더니 도나티 님이 좋아하셨는데. 이렇게 보니까 꽃도 예쁘군요.”
“…….”
“이것도 마법인가요?”
“아니다.”
쉴 새 없이 밀라니아에게 말을 거는 도니는 다른 때였으면 그레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겠지만 지금은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밀라니아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평온함에 젖어 부드럽게 깔리는 목소리가 귀에 휘감기니 자꾸만 목이 탔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감로수와 같았다.
내리깐 눈빛에 그레칸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예쁘구나.”
그레칸은 꽃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밀라니아와 도니가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간 후, 그레칸은 뒤늦게 밀라니아가 보던 곳에 시선을 두었다.
보랏빛, 노란빛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그의 마음처럼.
* * *
“꽃이 예쁘면 저한테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무슨 꽃?”
“쯔쯔, 간신히 살려 놨더니. 보는 것만으로도 예쁜 것을 누가 꺾어 왔누.”
반짝였던 그레칸의 눈빛이 탁해졌다. 밀라니아가 지나간다.
그녀가 보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커튼 뒤에 몸을 숨겼다.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레칸은 곧장 꽃집으로 향했다.
각양각색의 화려하고 단아한 꽃이 가득했지만 그레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화병이었다.
그중 투명한 유리 화병이 눈에 들어왔다. 심플한 무늬가 양각되었고, 질이 좋은지 반짝거리는 게 꼭 밀라니아의 머리카락을 생각나게 했다. 마음에 들었다.
그레칸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로드가 된 후 돈 주고 뭘 사 본 적이 없었던 그에게 동전이 있을 리 없었다.
대충 소매에 달린 커프스링크 하나를 안으로 던져 놓고는 화병 하나만 달랑 들고 자리를 떴다.
“거기 누구 있어요?”
뒤늦게 꽃집에서 튀어나온 주인은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커프스링크를 발견하고 튀어나올 듯 눈을 크게 떴다.
저택으로 돌아온 그레칸은 꺾은 꽃을 물을 담은 화병에 꽂아 두었다.
유리 화병 안에서 한층 곱게 보이는 꽃을 바라보는 눈빛이 복잡했다.
‘난 당신이 좋아할 줄 알고.’
안 그래도 미운털이 박혔는데 예쁜 짓만 하고 싶었다. 미운 짓 말고.
그래도 이미 꺾은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가능하다면 아예 없던 일로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한 일.
뒷수습하는 어깨가 축 처졌다.
“오, 꽃이네. 센스 있어. 누가 가져다 둔 거야?”
“내가 한 게 아니거늘.”
중얼거린 밀라니아는 창가 앞에 서서 널찍한 노란색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햇볕이 아닌 촛불이 스민 그녀의 서늘한 얼굴은 신비스러움이 더해져 한층 아름다웠다.
팔짱을 낀 그레칸은 뒤통수를 딱딱한 돌벽에 슬쩍 댄 채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밀라니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엄지로는 꽃잎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 * *
이곳,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칸이 그렇게 찾아다니는 레지스탕스가 운영하는 학교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열악하고 볼품이 없었다.
밀라니아가 없었다면 형편없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그녀가 있어 그레칸은 모든 것이 신경 쓰였다.
오래된 짚이 깔려 딱딱한 침대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쉬이 잠들지 못하는 밀라니아를 확인한 그는 교수란 놈의 침대를 덮은 짐승의 가죽을 옮겨다 주었다.
잘 자는 얼굴을 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다음 날, 아끼는 가죽 이불을 찾는 호루스의 노성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형편없는 건 잠자리만이 아니었다.
“배가 고프구나.”
속상했다. 밀라니아는 입이 짧았다. 그런 그녀가 배가 고프단 말을 하다니.
속상하고 화가 나서 어깨가 들썩였다. 역시 쓸모없는 곳이다.
당장 밀라니아를 데리고 나와 산해진미를 바치고 싶으나 그녀는 바라지 않을 터.
애가 탔다.
“식재료가 다 떨어져서요. 미넬라와 트루크가 사냥을 나갔어요. 좀만 기다려 주세요.”
그걸로 되겠어?
혀를 차고, 그레칸은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주방으로 들어가자 생전 찾아오지 않았던 그의 등장에 시종들이 혼비백산했다.
“하이로드? 누추한 곳엔 어쩐 일로…….”
마침 식사 준비 시간이라 오르되브르, 메인 요리, 디저트 빵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그레칸은 검은 포대에다 닥치는 대로 음식을 집어넣었다.
그의 기행에 시종들이 입을 떡 벌렸다.
“그, 그렇게 손수 하실 필요 없습니다. 원하시는 게 있다면 준비해 가져다드릴게요. 하칸 님이 찾으시던데, 말씀 전할까요?”
“필요 없다.”
“그래도…….”
그레칸이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받은 시종들이 분분히 입을 다물었다.
묵직한 검은 포대를 내려다본 그레칸은 침묵했다. 예상 못 한 문제였다.
먹기 좋은 음식도 플레이팅 없이 모아 놓으니 볼품이 없다.
제대로 된 바구니를 준비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의심을 살 것 같고.
결국 포대만 덜렁 들었다. 검은 포대를 등 뒤로 턱 짊어 메고 떠나가는 그레칸은 꼭 음식 도둑 같았다.
시종들의 얼빠진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그는 유유히 황궁을 떠났다.
그레칸은 학교로 들어가지 않고 근처에 돌담 위에 자리를 잡았다. 곧 그의 눈에 누군가 들어왔다.
뼈다귀에 거죽만 붙여 놓은 인간의 탈을 쓴 거머리, 도니가 어두운 골목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하필 저놈이.’
그레칸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가 지나갈 길목에 검은 포대를 내려놓았다.
길목 한가운데 위치한 검은 포대는 누가 봐도 수상했지만, 풀풀 풍기는 음식 냄새를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도니는 굶주린 상태였다. 그레칸에겐 다행이었다.
검은 포대를 열어 본 도니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오는 길에 제가 뭘 발견했는지 아세요?”
인간 사내는 음식 전달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식탁 위에는 그가 가져온 음식으로 진수성찬이 펼쳐졌다.
“누가 우리를 노리고 독 탄 거 아닐까? 이럴 때 교수님이 있으시면 잘 판단할 수 있을 텐데.”
“아무 이상 없는데? 맛있어.”
게걸스럽게 고기를 뜯어먹는 트루크를 그레칸은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밀라니아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기력을 회복하라고 챙긴 건데 엉뚱한 놈의 입에 들어가니 속이 뒤집혔다.
“신이 선물을 주셨나 봐.”
“어떤 멍청한 놈이 깜박 놓고 간 거겠지. 어쨌든 운이 좋았네.”
정작 밀라니아는 음식에 손대지 않고 쳐다만 보았다.
‘속상하게.’
“차라리 길 가다가 황금을 주웠다는 게 더 흔하겠구먼.”
뜨끔한 그레칸은 숨을 죽였다.
밀라니아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건 확실했지만, 그녀는 그가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시간을 경험한 존재였기에 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게요. 많이 안 먹히세요? 독은 안 든 게 확실해요. 누가 실수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요. 배가 많이 고팠는데 잘됐다고 생각해요. 많이 드세요, 마녀님.”
그레칸은 그녀가 빵을 뜯어 입에 넣기까지 조마조마하며 바라보았다.
밀라니아는 맛있게 먹었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고기보단 채소를 선호하는 그녀였지만 은근히 단맛을 즐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레칸은 싱글벙글했다.
‘초콜라떼도 가져올 걸 그랬군.’
우아하게 입술을 오물거리는 밀라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순간을 잠시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 * *
“넓적다리 안쪽에 새겨 주세요.”
설마.
요 며칠 그는 이 학교를 아무도 모르게 다니는 데 희미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행복감이라고 불러도 좋을 감정이었다.
밀라니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작게 인사 한 번 못 건네는 처지였지만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찾을 수 없는 그녀를 그리워하고 화내고 괴로워했던 순간에 비하면.
그녀가 없는 황궁에서 의미 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던 순간에 비하면.
비록 말을 걸 순 없지만 지금이 훨씬 행복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그에게 눈이 뚫려 있는 한 묵과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지금일 것이다.
“저 준비됐어요, 마녀님.”
깡마른 인간 사내는 바지를 벗었다. 밀라니아의 앞에서.
피가 거꾸로 솟았다.
‘감히…….’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밀라니아의 눈을 가리고 싶었다.
다른 사내의 속살이 그녀의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있다. 움찔거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혹시 모르니 위제니아를 여기 두어야겠다. 문제가 생기면 중단해 줄 자가 필요하니까.”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다행히도 밀라니아가 자리를 비웠다. 그레칸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주먹을 풀자 몸 안에 꽁꽁 가두었던 기운이 자연스럽게 새어 나갔다.
우뚝, 석상처럼 굳은 도니의 어깨가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귀, 귀신?”
그레칸은 차갑게 굳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죽일 수 없다면 이대로 도망가게 만들려는 심산이었다.
‘이렇게 빨리 돌아오다니.’
그레칸의 얼굴이 안타까워졌다. 하는 수 없이 기운을 거두었다.
“도니? 어디 아프니?”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여자와 달리 밀라니아는 묘한 얼굴로 방을 둘러보았다.
기운을 빠르게 회수했지만 밀라니아의 기감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레칸은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밀라니아를 응시했다.
자신의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눈빛에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보는 것만도 만족스럽지만, 행복하지만, 실은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싶었다.
‘날 알아봐 줬으면 좋겠어.’
그레칸은 정말 할 수만 있다면, 100년 하고도 15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녀의 모든 관심을 독차지하고 무릎에 머리를 대고, 그녀를 끌어안을 수 있었던 그 시간으로.
밀라니아의 다정한 시선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다시금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그에게 닿지 않았고, 아름다운 금안이 비추는 건 그가 아니라 도니였다.
그레칸은 스스로를 추스르려고 노력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밀라니아가 인간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그녀의 집중한 시선이 남자의 허벅지에 닿을 때마다 불에 달군 칼로 살을 저미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호루스에게도 말했지만 생기를 뺏겨 일찍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마력 관리를 잘해야 할 게다.”
회로를 새기는 일이 끝났을 때 그레칸은 격한 감정을 너무 참아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가 고개를 꺾는 순간이었다.
“물, 불, 태양, 풀잎, 풀꽃, 세상의 모든 신성한 것들을 빌어 오래된 마녀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특한 것들은 신성 앞에 그 존재를 드러낼지어다.”
파아!
피부를 간질이는 은빛이 터졌다.
시무룩한 그레칸의 얼굴에도 은빛 기운이 쓰다듬듯 내려앉았다.
검은 눈동자가 확장되었다.
위로하는 것처럼 다가오는 사랑스러운 은빛 빛무리.
경직된 얼굴이 풀어졌다. 따뜻하고 맑다. 향수를 자극하는 빛이었다.
소원이 이루어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련한 그리움이 그레칸을 감쌌다.
태양이 뜬 것처럼 밝아진 방에서 밀라니아의 얼굴이 선명히 눈에 박혀 왔다.
곧 빛이 사그라졌다. 그레칸은 아쉬워서 눈물이 찔끔 났다.
꽉 쥔 손을 펴 보았지만 빛 한 점 남아 있지 않았다.
보물을 빼앗긴 듯 가슴이 허했다.
“기분이 영 찝찝하여 뭔가 숨어든 게 아닌가 싶어서 탐색을 해 보았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군. 정말 아무것도 없거나, 내 탐색으로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은밀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역시 그녀였다. 아무리 자신이 힘을 조절하는 데 능하더라도 밀라니아의 감각을 감쪽같이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만약, 내 존재를 눈치챈다면 대체 뭐라고…….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말할까. 아니면 역시 안 되겠으니 죽여야겠다고?’
죽는 것은 하등 무섭지 않으나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은 그녀와 연결되어 있다. 그녀에게 말하면 망상이라는 대답이 돌아오겠지만 그레칸은 확신했다.
이 심장이, 그녀와 연결되어 있다고.
그녀가 빠져나간 빈방에서 그레칸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비릿한 맛이 느껴진다. 혀끝으로 입술을 툭, 건드렸다.
인내심은 이미 진즉 바닥나 있었다.
밀라니아가 반나체가 된 인간 사내를 가까이할 때부터 생긴 욕망이었다.
밀라니아를 마주하고, 그녀와 눈을 마주하고, 끌어안고 싶다는 욕망은 급물살을 탔다.
‘이렇게 참다가, 내가 다 타 버리고 말겠어.’
이 마음이, 밀라니아를 만지고 싶어서 안달을 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든, 팔이든, 하다못해 손가락 끝이라도 그녀와 연결되고 싶었다.
욕망이 끝내 절제를 넘긴 순간 간신히 평정을 지키던 마음이 어긋났다.
고요한 수면에 파문이 이는 것처럼, 그의 기운은 존재감이 되어 저택으로 번져 나갔다.
그 순간, 거실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밀라니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 * *
“……이건.”
“왜 그러시오?”
호루스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놀람을 숨긴 밀라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이 어수선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날이 아주 좋아요.”
“훈련하기 딱 좋은 날씨구나.”
“교수님도 참, 낭만이 없으시다니까요.”
호루스가 위제니아와 대화를 시작하자 밀라니아의 시선이 은밀하게 움직이다 한 곳에서 멈추었다.
한번 인식하니 보였다.
‘어찌 몰랐을꼬.’
지금까지 몰라봤다는 게 의심스러울 만큼 강렬한 존재감.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 옷에 완벽히 감싸인 몸은 매력적인 구릿빛 피부였다.
옅은 색의 입술에 비해 새카만 눈동자가 시선을 늪처럼 끌어들인다.
사슴처럼 유려한 긴 목. 덩치가 있으나 키가 크고 늘씬하여 둔한 느낌 없는 신체.
창가에 기대앉은 그의 긴 다리가 바닥에 가볍게 내려와 있었다.
그늘에 가려진 그는 어둠에서 태어난 존재 같아서, 인간들이 성서에 묘사한 악마처럼도 보였다.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악마.
지금 시대의 인간들에겐 그가 그런 악마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밀라니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도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을 제외하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밀라니아는 소름이 돋았다.
끼익.
몸을 일으키자 호루스와 위제니아의 시선이 모였다.
“잠깐 밖에 나갔다 오마.”
“예. 갔다 오세요.”
호루스와 위제니아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고 나서야 그녀는 저택의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그레칸이 있는 다이닝룸의 창가에는 시선 하나 주지 않고.
덜컹.
끼이.
문을 열고 나오자 정원엔 그늘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나인 줄 알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가?”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택의 벽에 등을 기대고 그레칸이 서 있었다.
그녀가 가만히 보고만 있자 그레칸은 성큼성큼 다가와 불쑥 그녀의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다시 뺐을 때 손에는 붉은 구슬이 들려 있었다. 손바닥에 구슬을 쥐고 말아 쥔 그레칸이 중얼거렸다.
“됐어. 이젠 무슨 말을 해도 안의 인간들에겐 들리지 않을 거야.”
밀라니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건조하고 무표정한 얼굴은 냉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레칸의 힘준 턱이 불거졌다.
“……무슨 생각해?”
“약속을 어겨서 화가 났어?”
“…….”
“그래서 날 버릴 생각을 하는 거야?”
밀라니아의 눈썹이 솟구쳤다. 그녀의 온도 낮은 시선을 받으며 그레칸의 목소리가 위험스럽게 가라앉았다.
“내가 또 다 죽여 버릴까 봐 두려워?”
“…….”
“정이 들었지. 그러니까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저 애들이 괴물 같은 내 손에 그 귀한 목숨 잃을까 봐, 무서운 거야?”
답지 않게 비꼬는 그레칸의 눈이 괴롭게 찌푸려졌다.
“…….”
“내가 싫어?”
다소 조심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기 때문이었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바라보았다.
세상 만물에 대한 증오로, 심지어 스스로까지 증오하는 남자가 보였다.
증오심과 미움으로 똘똘 뭉친 눈. 그러나 그 안엔 자신에게 미움받기 싫어하는 늑대가 있었다.
어찌 경멸할 수만 있을까.
‘그레칸이 이렇게까지 상처받을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100년 전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야.’
부질없는 후회를 또 한다.
그를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모른 척하기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레칸은 골칫덩이였지만 아픈 손가락, 또는 손가락 끝에 박힌 가시 같은 존재였으므로.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이냐, 내 말은 역시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지.
매섭게 토해 내려던 밀라니아의 의지는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레칸의 눈을 보자 한풀 꺾였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인연을 끊겠단 소리가 싫다면, 앞으로는 하지 않으마. 너와의 인연은 내가 그러겠다 해서 끊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닌 듯싶으니.”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를 앞에 두고서도 마음이 바로잡히지 않았다.
밀라니아는 그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물러나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그레칸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기대고, 팔은 부드러운 몸을 단단히 부둥켜안았다. 강인한 팔이 그녀의 유려한 등을 감았다.
하아, 떨리는 숨은 뜨거웠다.
밀라니아는 그의 어깨에 어정쩡하게 손을 올렸다.
“……미안해.”
그녀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그는 그녀를 좀 더 강하게 껴안았다.
“미안해. 그렇게 싫어할 줄 몰랐어.”
“…….”
“몰랐으니까…… 한 번만 봐줘. 앞으로는 사람을 쉽게 죽이지 않을 테니까.”
“…….”
“아무리 그들이 파리 목숨보다 하찮아 보인다고 해도 당신이 싫다면 안 할 테니까.”
어린애 같은 반성에 냉정함을 유지하던 밀라니아의 표정이 살짝 허물어졌다. 한숨을 쉬었다.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그레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드러난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정원의 꽃을 노려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날 외면할 바에는 차라리 죽여.”
“…….”
그레칸 너머, 낡은 저택의 벽돌을 응시하며 밀라니아는 손에 힘을 주었다.
검은 셔츠가 구겨졌다. 그레칸의 어깨는 돌덩이 같아서 손은 미끄러지기만 했다.
그녀의 아귀힘이 그레칸에게도 전해졌다.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미움받을 거다.
주춤, 발뒤꿈치가 어색하게 들렸다. 도망가고 싶었다.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했지만, 사실은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방패 하나 없이 화살 앞에 선 기분이었다.
아득해진 그는 밀라니아에게서 비롯될 화살을 기다렸다.
별안간 그녀가 손을 펴고 그를 껴안았다.
질끈 감았던 눈이 반짝 뜨였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네가 생각이 나더구나.”
나직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레칸의 귀는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움찔거렸다.
“너무 심한 말을 했던가. 내가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네 울 것 같은 표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적이 괴로웠느니.”
“…….”
“이곳 아이들에게 친절했던 것만큼 네게 설명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수없이 생각했다.”
그레칸은 혀끝을 깨물었다. 아릴 듯이 달콤했다.
그레칸이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어깨 옷자락이 축축해졌다.
그의 등을 쓸어내리며 밀라니아는 답답했던 마음이 얼음 녹듯 녹아내렸다.
변해 버린 그레칸에 대한 반감은 눈물로 축축한 눈동자를 보는 순간 사라졌다.
그래. 진즉 이랬어야 했다.
“이곳이 학교라는구나. 아이들에게 배움을 베푸는 곳이지. 여기 아이들은 모르는 것을 배우는 데 열정적이야. 배움이 더 나은 내일을 불러온다는 걸 아는 게지. 그레칸.”
“응.”
“응?”
당황한 그레칸이 고개를 들었다.
눈높이가 높아 내려다보자 그녀가 손을 뻗었다. 그레칸은 닿기 쉽도록 고개를 숙여 주었다.
까만 머리카락을 휘저은 밀라니아가 말했다.
“저 아이들은 학문을 배우지만, 너는 감정을 배워야겠으니. 분노와 미움과 증오를 제외한 다른 감정 말이다. 아, 분노를 제어하는 방법도 배워야겠군.”
그레칸의 눈빛이 기묘해졌다.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내가 감정을 모른다고 생각해?”
밀라니아는 그의 이상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엔 알고 있었어도 지금은 잊은 게 많을 테지. 동정심이나 연민, 죄책감이나 관용, 사랑. 네가 아무리 세상의 인과에서 벗어난 존재라고 할지라도 지성체라면 가져야 할 미덕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야.”
학교의 선생보다도 고리타분한 말이었지만 그레칸은 진지하게 들었다.
“당신이 그렇다면 그 말이 맞겠지. 그래도, 하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해.”
밀라니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엇인데?”
그레칸이 못내 쑥스러운 듯 머뭇거렸다.
밀라니아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자 시선을 비껴 내며 툭 뱉었다.
“사랑.”
뭐라고? 밀라니아는 눈을 깜박였다.
그레칸은 조심스럽게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밀라니아가 그랬잖아. 항상 같이 있고 싶은 게 사랑이라고. 난 예전부터 그랬어. 밀라니아를 지켜 주고 싶었고, 좋은 것만 먹여 주고 싶었고, 아프지 않기를 바랐어.”
그 순간 끼어든 기시감. 오래된 기억이 성큼, 그녀를 찾아왔다.
[지켜 주고 싶은 것이니라. 맛있고 좋은 것만 먹여 주고 싶은 마음이고, 또……. 내가 아프더라도 사랑하는 상대는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느니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사랑이 아니라 만물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려던 밀라니아는 허탈해졌다.
그녀의 손을 꼭 붙들고 그레칸은 들뜬 얼굴로 고백했다.
“밀라니아와는 싫은 걸 함께해도 좋아. 인간들과 부대끼는 것도 당신과 함께하면 할 수 있어. 잿빛 하늘도 화창해 보이고, 밀라니아가 먹는 건 무엇이든지 맛있어. 밀라니아가 나한테 웃어 줄 때마다 모든 게 아름다워 보이고, 심지어 꽃잎조차 날아다녀.”
“…….”
“난 아주 예전부터 그랬어.”
굳어 버린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분노로 번들거렸던 눈동자는 전에 없이 따뜻하고 말랑했다.
“100년 하고도 훨씬 전부터.”
“…….”
“밀라니아와 있으면 그랬어.”
그레칸은 우는 듯 웃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밀라니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손을 뻗어 나부끼는 은발을 정리해 주는 그레칸의 검은 머리카락도 흩날리고 있었다.
“…….”
당황스러워진 밀라니아는 숨을 깊이 몰아쉬었다.
두근.
고요하던 심장이 한차례 크게 뛰었다.
불청객처럼 다가온 기억이 문을 두드린다.
[항상 같이 있고 싶고, 싫은 것도 사랑하는 상대와 같이 하면 즐거우며, 잿빛 하늘도 화창해 보이고, 뭘 먹어도 맛있어 보이고, 꽃잎이 날아다니고 뭐, 그런 환상을 보는 것인가 보더구나.]
그것이 바로 사랑.
* * *
밀라니아의 소개에 호루스 교수를 비롯한 학교의 선생들은 의문 어린 눈으로 그레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인간이라고?”
트루크는 훤칠한 그레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내리깐 그레칸의 눈 아래 살기가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