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6/48)

35

인간 도살자

“기억해 주시는군요. 그 말을 해 주셨던 분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말에 정신이 깨었죠. 언젠가는 마법 공방을 되찾아야 한다는 다짐에 붙어 있었지만, 실은 공방 밖으로 나서는 게 무서웠던 거였어요. 공방을 나서며 그걸 깨달았어요. 저분 덕입니다.”

그제야 밀라니아도 기억이 났다.

‘아아, 마법 공방의 말더듬이 종업원.’

스미스가 의아한 눈으로 지저분한 낡은 우리를 훑어보았다.

“한데 어째서 저분이 이곳에……?”

“도니의 뒤를 쫓아왔소. 아이들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겠다는데, 그 의도와 정체가 수상하여 가둬 둔 참이오.”

스미스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수상한 분은 아닐 겁니다. 아무 이유 없이 저를 도와주신 분이에요.”

밀라니아를 힐끗한 호루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등을 돌린 채 한참 이야기하는데, 화가 났는지 스미스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렇다고 이분을 짐승처럼 이런 곳에 가둬 두시겠다는 겁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스미스 씨는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우리 단체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보안이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미스는 분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고개를 돌린 그가 망설이는 눈으로 밀라니아를 보았다.

그녀는 그저 싱긋 웃어 보였다. 스미스가 결심한 듯 입술을 꽉 깨문다.

“이 얘기는 그만하고…….”

“마도구를 내놓겠습니다.”

홱, 고개를 돌린 스미스가 호루스를 직시했다.

“뭐라고 하셨소?”

“착용자의 소리를 담아서 들을 수 있는 마법 도구입니다.”

스미스는 품속 깊이 손을 넣어 갈색 가죽 주머니를 꺼내었다.

주머니 입구를 풀고 털자 엄지손톱 크기만 한 붉은색 구슬 두 개가 손바닥에 떨어졌다.

“한 쌍으로 되어 있어, 착용자가 담은 소리를 나머지 구슬 하나를 들고 있는 쪽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

“손님께서 수상하시다고 하시면, 이 마도구를 쓰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진심이오?”

“진심입니다. 원래는 대의를 위해 쓰려 했으나, 이번만큼은 제 양심을 위해 써도 되겠지요.”

호루스는 스미스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마침내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마도구가 있을 줄은 몰랐군요. 스미스 씨가 그렇게 마음이 쓰인다면.”

말을 멈춘 호루스가 밀라니아를 곁눈질했다.

“풀어줘도 되겠소.”

하나 그의 결정은 단순히 스미스의 기개에 감동하여 내린 것이 아니었다.

“효용이 많을 듯한데 탈착은 어떻게 하오?”

“이건 마법적 작용을 가한 겁니다. 제가 풀지 않는 한 몸에서 떼어 낼 수 없어요.”

“아주 좋군. 감시용으로도 쓸 수 있겠고, 반대로 황궁의 사정을 이쪽에서 캐내는 것도 가능하겠어.”

마도구를 빌어 그녀를 이용하겠다는 뜻. 스미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수밖에 없소.”

호루스는 밀라니아에게 들리지 않게끔 복화술을 하듯 입만 움직였다.

물론 호루스의 그런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귀를 쫑긋한 밀라니아는 숨소리처럼 쉭쉭대는 말을 모조리 알아듣고 있었으니까.

조금 괘씸하기는 하지만.

‘이왕 도와주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저 정도 무례는 눈감아 줘야겠지.’

생각보다 최악인 2대륙의 상황에 그녀는 회의감이 들었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과연 이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인간들만큼 회복이 빠른 생명도 없으니. 그것이 이들의 희망이로다.’

철컹.

자물쇠가 풀렸다.

삐걱거리며 열리는 입구.

그 바람에 우리에 끼어 있던 검은 때가 바닥으로 떨어져서, 밀라니아는 눈살을 찌푸리고 빠르게 우리에서 빠져나왔다.

“불결하구나.”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며 몸을 털자 스미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깨에도 묻어 있습니다, 손님.”

힐끗, 고개를 돌리니 정말 어깨에 먼지 뭉치가 묻어 있었다.

밀라니아는 손으로 어깨를 털고 스미스를 바라보았다.

“빗자루의 값을 치르겠다 했는데 이거, 두 배로 치러야겠어.”

스미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걸 기억하고 계셨어요?”

“많이 달라져서 못 알아볼 뻔했느니라.”

“하하. 곤경에 처하신 걸 도와드릴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스미스의 눈은 생기로 반짝거렸다. 밀라니아는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전에 봤을 때는 툭 치면 와르르 쓰러질 것처럼 힘이라곤 하나 없이 무기력했었거늘. 의지가 인간을 변화시킨다 했던가. 마음먹기를 달리하는 것만으로도 이들은 많은 것이 달라지는구나.’

밀라니아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걸렸다.

“이것부터 착용하시오.”

중년 남자가 무뚝뚝하게 구슬 하나를 건넸다.

스미스의 안내에 따라 밀라니아가 구슬을 품에 넣자, 그걸 지켜보던 호루스는 남은 구슬을 주머니에 넣어 챙겼다.

“저, 그러면 이제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건가요?”

호루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잘생긴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좋니?”

도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위제니아는 밀라니아를 응시했다.

슬며시 미소를 짓는 얼굴은 화려하지 않지만 청초했다.

“학교에 오신 걸 환영해요, 마녀님.”

위제니아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비굴해 보이지 않았다.

밀라니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연을 믿느냐?”

“인연이요?”

위제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의 만남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다만, 이 또한 하늘의 그늘 안 아니겠느냐.”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열심히 하라는 뜻이었느니.”

그렇게 자연 마법의 전승자 대마녀 밀라니아는 레지스탕스들이 만든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소수의 환영과 다수의 경계를 받고.

* * *

학교는 그 은밀한 특성상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호루스의 학교 역시 10년간 15번 옮긴 전적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전 학교는 설립 기간이 매우 짧았는데, 그건 수인 군대, 그중에서도 인간들에겐 가장 골치 아픈 ‘날개 군대’에게 발각된 탓이었다.

떠돌다가 자리 잡은 황도에 주둔하게 된 지 이제 겨우 5개월.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축과 노예가 된 인간을 노리는 무리의 눈에 띄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둠 속에 숨은 사냥꾼.

그들은 인간 도살자 벤더스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2대륙에 득세하는 다양한 왈패 중에 가장 끔찍한 악명을 떨치는 살인 집단.

대개 비슷한 일족으로 무리를 형성하는 것과 달리 이들은 각기 다른 종족으로 이루어졌는데, 특이한 건 이들 무리의 리더가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저기군.”

중지만 한 작은 단도 칼날에 혓바닥을 대고 할짝거리는 벤더스의 리더.

테일러는 좁은 골목길 너머 보이는 낡은 문을 번들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며 입맛을 다셨다.

수인의 노예로 태어났지만 타고난 신력과 간악한 심성은 그를 밖으로 뛰쳐나오게 했다. 나름대로 잘 대해 주던 주인집 수인을 죽이고.

대다수의 연약한 인간과 수인들에겐 불행히도 악마의 탈출이었다.

그는 생명을 짓이기는 데 극상의 쾌감을 느꼈고, 노린내가 밴 수인보다는 비릿하고 향긋한 인간을 살육하는 걸 즐겼다.

무기라기엔 초라한 단도 역시 손맛을 최대한으로 즐기고 싶다는 욕망의 반영이었다.

그는 또한 목을 비틀어 죽이는 방식도 선호했다.

민소매 밖으로 드러난 팔은 근육으로 우락부락하여 희생자의 목을 졸라 단번에 황천길로 보내기에 충분했다.

힘이 세다는 곰족 수인을 능가하는 신력과 악행을 꾸밀 때만 활기차게 돌아가는 교활한 머리.

감복한 수인들의 추대로 테일러는 인간 도살자 벤더스의 리더가 되었다.

“흐으음, 냄새가 나. 야들야들한 인간 냄새 말이야.”

그 옆에서 담벼락에 찰싹 달라붙어 콧구멍을 들썩이는 남자는 왜소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손이 컸다.

돌담 위에 솟은 창살을 콱 움켜쥔 남자의 손가락 마디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불룩 불거져 있었다.

엉덩이 사이로 튀어나온 꼬리는 일족에서 추방된 대가로 반쯤 잘려 뭉툭했다.

오소리 족의 추방자.

역겨운 동족 살해자.

동족 살해를 즐기는 그는 풍요로운 삶과 안정을 원하는 일족과 달리 야생 상태 그대로 피와 살점을 씹어 삼키는 걸 좋아했다.

문명화된 2대륙에 적응하길 원하는 일족과는 추구하는 방향이 달랐다.

그리하여 추방자가 된 오소리는 동족보다 부드럽고 연약한 피부를 가진 인간 살해의 쾌감에 눈 뜨게 되었고, 같은 취향을 가진 벤더스에 가입했다.

코가 좋아 여린 인간의 냄새를 가장 먼저 알아채기도 했다.

테일러와 오소리 외에도 소수 일족 침팬지.

인어족 중 재미로 인간을 사냥하기를 즐기는 타이거 상어.

동물로 변태하여 인간을 한입에 삼키는 걸 좋아하는 아나콘다.

총 다섯 명이 허리를 수그리고 머리를 모았다.

하나하나가 최악의 범죄자인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남은 만큼 힘이 세고 교활하여 인간 한둘쯤은 손으로 찢어 버릴 수 있었지만, 살인 행각이 들키지 않게끔 거동이 은밀했다.

추적자들을 피하고 그들의 존재를 눈치챈 사냥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들은 악행의 쾌감에 미쳐 있었다. 

“저번처럼 사냥감이 도망가는 아까운 일이 또 있어서는 안 되잖아. 이번엔 신중하게 가는 거야, 신중하게.”

“오늘 한탕 하고 뜨지 뭐. 깡치인지 강치인지 하는 놈이 텃세를 부리고 있어서 얽히면 골치 아프니까.”

“그러지 말고 걔들도 털어먹으면 안 되나?”

아나콘다가 까만 눈을 끔벅거렸다. 언뜻 순진해 보였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잔혹한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인간종의 뛰어난 지능이 범죄에만 특화된 테일러는 고개를 저었다.

“이 동네 어슬렁대는 왈패들은 모두 그쪽 패거리랑 다리를 걸쳤다고 할 수 있어. 붙으면 지지야 않겠지만 소란은 피할 수 없을 거야. 일단 쪽수로 불리하니까. 게다가 그쪽도 우리를 의식하는지 눈치가 수상해.”

“그래도…… 노예 상인들이라 먹음직스러운 게 많을 텐데.”

아나콘다의 말에 나머지 동료들 눈빛이 탐욕스러워졌다. 테일러도 움찔했다.

사냥감이 드글드글 모여 있는데 벤더스가 외면한다는 건 배고픈 쥐가 질 좋은 치즈를 모른 척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우물쭈물하던 테일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지금은 안 돼. 노예 상인들이 우리를 발견하면 다른 건 제쳐 두고 우릴 추격할 테니까.”

인간을 사고파는 노예 상인들과 인간 도살자 벤더스는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할 수 없었다.

테일러의 논리적인 말에 다들 아쉬운 얼굴을 하면서도 토를 달진 않았다.

테일러의 말을 따르면 보다 안전하게 사냥감을 취할 수 있다.

그는 그들의 제동 장치였다. 그가 리더가 아니었다면 벤더스는 진즉 하나둘 나자빠져 와해되었을 터.

“흠. 좋아. 그건 일단 나중에 생각하고 오늘은 간만의 축제를 즐겨봐야지.”

침팬지는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말로 여지를 두었다.

간만이라고 해 봤자 이전 사냥과 삼 일밖에 차이 나지 않았지만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의 사냥은 수인들의 수탈에 질려 지하 벙커에 자리 잡은 인간 가족이었다.

야들야들하고 맛은 좋았지만 사냥감의 수는 애매한 일곱, 딱 떨어지지 않은 수에 서로 먹겠다고 싸우다 그중 둘을 놓쳐 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아쉽군. 오늘은 호로록 다 털어먹는 거야. 그러기 위해서 은밀하게 행동해야 하는 거고. 몰래 들어가서 일단 목부터 꺾어. 소란 없이 제압하고, 만찬은 그다음. 오케이?”

“오케이.”

눈빛을 교환한 그들은 어둠에 녹아들 수 있는 복면을 쓰고 가슴에는 피에 젖은 금장을 달았다.

벤더스의 사냥 표식이었다.

덩치에 비해 발은 쾌속하고 움직임은 조용했다.

다섯의 흉악한 그림자는 곧 인간들의 학교로 녹아들 듯 숨어들었다.

* * *

번쩍.

밀라니아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따끔따끔한 기운이 피부를 찌르고 있었다.

흑계의 말란도르가 가까이 있을 때의 감각과 비슷하나, 그보다 훨씬 저열하고 더러운 기분.

‘삿된 것이 들어왔구나.’

밀라니아는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일단 주변을 살폈다.

그녀는 현재 위제니아와 미넬라와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촛불 등의 물자를 아끼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실은 그녀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평생 독방을 써 왔던 밀라니아는 갑작스레 생긴 룸메이트가 낯설었다.

맞은편 벽에 붙은 침대 위에서 누군가 뒤척였다. 미넬라였다.

그녀 역시 침입자의 정체를 눈치챈 듯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민하는 눈치.

먼저 위제니아를 깨운 그녀가 밀라니아에게 다가왔다.

딱딱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일어나요. 누군가 침입했으니.”

밀라니아는 고개를 돌려 미넬라를 응시했다. 허리에 찬 검집에 손을 올린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속삭이는 소리 역시 경계심을 가득 품고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 침입자가 나타났다라. 참 공교롭지 않나요?”

“공교롭긴 하군.”

밀라니아는 여상히 동의했다. 미넬라가 눈썹을 치켜떴다.

“하! 내 앞으로 와요. 당신에 대한 의심은 풀리지 않았으니까.”

“날 방패로 쓰려 함이냐?”

“그거야 당신 행동에 따라 달라지겠죠. 무고하다면 지켜줍니다, 내가.”

‘일단 상황을 파악해 봐야 하니.’

밀라니아는 순순히 일어났다. 미넬라는 그녀를 앞세우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촛불 끈 복도는 어두컴컴했지만 침입자의 존재 때문인지 뭔가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음산했다.

밀라니아는 뒤를 흘끗했다. 미넬라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그녀에 비해 기감이 약한 위제니아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요.”

미넬라는 밀라니아의 옷깃을 붙잡고 조용히, 그러나 거침없이 움직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허튼 생각은 하지 말아요. 당신 정도는 손 하나로 제압할 수 있으니까요.”

“이미 죄인 취급이로구나.”

밀라니아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미넬라는 무시하고 앞을 탐색하는 데 주의했다.

곧 그들은 아이들이 머무는 방 앞에 멈춰 섰다.

숨을 죽인 미넬라는 조심스럽게 문에 귀를 댔다.

* * *

학교에 숨어든 벤더스 일당은 창문을 열고 방에 침입했다.

모든 멤버가 일당백인 그들은 효율성을 위해 각각 하나의 방을 맡기로 했는데, 말은 효율성을 따지지만 실은 남보다 더 많은 사냥감을 확보하려는 욕심 때문이다.

테일러는 사방에 가득한 어린 숨소리에 속으로 럭키를 외쳤다. 대박이었다.

‘느껴지는 숨소리만 다섯.’

이 방에 아이들이 다섯 명이나 있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단도를 휘둘렀다. 작은 침대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자는 아이들 위로 죽음의 칼날이 떨어졌다.

피슉!

화살이 나아가듯 피륙이 잘리는 소리와 함께 피가 뿜어졌다.

혈 향. 그 짙고 황홀한 냄새. 테일러는 코를 벌름거렸다.

살심이 자극된 가슴이 벅차올랐다. 머릿속이 벌겋게 물들고 심장이 미친 소처럼 날뛰었다.

‘크으으으! 끝내주는군. 죽인다, 죽여!’

초기 벤더스 멤버는 총 스물, 그들 태반이 살인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날뛰다 죽었다.

테일러는 그들에 비해 이성적이었지만 살인 욕구에 지배당한 건 마찬가지였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것이 그의 실수였다.

사악!

“……!”

뒤늦게 몸을 튼 테일러의 어깨를 두꺼운 칼이 쑤시고 들어왔다.

뒤늦게나마 눈치채지 못했다면 목이 잘렸을 터였다.

살인 욕구로 들떴던 마음에 찬물이 쏟아졌다. 정신을 차린 테일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통증으로 어깨가 쑤셨다. 신경질이 났다.

어린 애들만 가득하다고 생각했던 방에 웬 어깨 다부진 남자가 있었다.

테일러가 신중해지기도 전에 칼이 휘둘러졌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지만 검로는 상대방을 거꾸러뜨리는 데 최적화되어 있었다.

테일러는 가까스로 뒷걸음질 쳐 칼을 피했다.

“이 개새끼가 아이를!”

카닛트는 노성을 터뜨렸다.

테일러를 아이들에게서 떼어 낸 데 성공한 그는 코끝에 스며드는 피 냄새에 이를 악물었다.

이 난세에서도 살아남았던 귀한 아이의 죽음.

분노에 휩싸였지만 카닛트는 냉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냥 달려들기에 침입자의 근육은 흉기처럼 흉악하여 심상치 않았다.

‘잘 단련된 자야.’

테일러와 카닛트는 서로를 노려보며 공격의 기미를 엿보았다.

“아, 이러다간 다른 방의 놈들보다 늦어 버리겠는데.”

별거 아닌 놈이면 쓱싹하면 될 텐데, 카닛트의 기세가 테일러는 부담스러웠다.

“내기는 내가 지겠군.”

상대방을 도발할 작정으로 중얼거리자 카닛트는 귀가 번쩍 뜨였다.

“너 말고 침입자가 더 있는 거냐?”

“글쎄, 어쩔까? 궁금하면…….”

느물거리던 테일러가 입을 크게 벌렸다.

“날 죽이고 알아봐라!”

육중한 몸이 카닛트에게 빠르게 짓쳐들어왔다.

검이 맞부딪쳤다.

챙!

“크윽!”

뒤에 아이들이 있었던 탓에 몸을 피할 수 없었던 카닛트는 신음을 흘렸다.

첫 합으로 알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힘이다.’

검에 실린 힘이 상상 이상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자신 있었을 것이다.

상대방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학교의 선생들도 만만치 않다.

영역 다툼을 하는 수인들을 상대로 인간의 대표를 자처하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나빴다.

몸을 빼고 기회를 틈탈 수가 없었다.

‘몸을 빼는 순간 뒤에 있는 아이들이 위험해.’

남자에게서 풍겨 나오는 피 냄새에 카닛트는 점점 몸이 굳어졌다. 살고자 하는 본능을 자극하는 죽음의 냄새.

그때를 놓치지 않고 테일러가 달려들었다.

챙!

카닛트의 몸에는 순식간에 몇 개의 칼집이 났다.

고기 맛을 위해 칼집을 놓듯 테일러는 아슬아슬하게 급소를 비켜 나가며 카닛트의 몸을 썰어 댔다.

“크으.”

“아이, 장난에 너무 몰두했군. 이제 끝내야겠어.”

단도의 칼날에 혀를 날름하여 피를 핥아 낸 테일러의 입술이 길게 찢어졌다.

많은 출혈과 긴장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진 카닛트는 미간을 강하게 눌렀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내가 죽더라도 애들은 살려야 해.’

테일러가 달려들었다. 카닛트도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미넬라!”

카닛트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눈치를 채고 구하러 왔구나!’

한편 카닛트의 기대와 달리 미넬라는 얼이 빠져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밀라니아의 등에 꽂혀 있었다.

‘이 여자 뭔데 이렇게 당당해?’

처음 침입자를 눈치챘을 때 그녀는 긴장했다.

카닛트와 자신의 실력은 비등비등했다. 그렇다면 카닛트가 고전하는 침입자의 수준은 낮지 않을 것이었다.

각오하고 전투력을 끌어올리려는 바로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

안쪽에서 부닥쳐 오는 시선에 미넬라는 기함했다.

범인은 인질로 잡고 있던 밀라니아.

‘아니, 이 여자가 미쳤나!’

“불결해서 소름이 돋는구나. 저자는 내가 상대하겠다.”

못마땅한 목소리가 귀에 쏙 들어왔다.

‘무슨 소리. 닭 모가지 하나 비틀지 못할 것처럼 연약한 온실 속 화초가 뭘 한다고!’

벌컥 화를 내려는 찰나 여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뭐 하는 거야?’

답은 곧 알 수 있었다.

침입자의 험악스러운 얼굴이 거대한 물방울에 감싸였다.

“응?”

미넬라는 검을 움켜쥔 채 눈을 깜박였다.

“우웁, 우, 우우우!”

‘이, 이게 뭐야!’

누구보다도 당황한 사람은 테일러였다.

숨이 막혀 입을 벌리자 꼬르륵, 물방울이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둥근 물의 막에 가로막혀 다시 아래로 내려온다.

보기에는 예쁜 광경이지만 숨이 막힌 테일러는 죽을 맛이었다.

그의 얼굴이 점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수, 숨 막혀!’

숨을 쉬기 위해 손을 허우적대는데 머리를 헬멧처럼 감싼 물방울은 이리저리 꿀렁댈 뿐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허우적대는 틈을 타 아이들을 피신시킨 카닛트는 테일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숨이 막혀 바르작대는 꼴이 꽤 고통스러워 보였다. 손이 뻗어졌다.

“사, 살…… 꼬르륵!”

곧 눈을 하얗게 까뒤집은 남자가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다가 그마저도 멈추었다.

익사.

죽은 남자의 주변으로 물방울이 퍼졌다. 인간 도살자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침묵 사이로 청량한 목소리가 못마땅하게 흘러나왔다.

“이런 게 한둘이 아니군. 공기가 썩는 기분이니라. 얼른 치우지 않으면 잠자리가 사납겠어.”

밀라니아가 밖으로 나갔다. 카닛트와 미넬라, 위제니아의 경악에 찬 시선이 그녀를 쫓았다.

남은 침입자는 네 명이다.

호루스와 크루트, 데릭이 상대하고 있었다.

그중 침팬지처럼 생긴 침입자는 호루스의 검에 고혼이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끼리 싸우고 있었는데 육탄전까지 불사할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놈들이?”

호루스의 어깨에 난 상처를 발견한 미넬라의 안색이 변했다.

학교의 선생 중에서 그 실력이 수위를 다투는 호루스가 상처 입을 정도라면 침입자의 수준이 생각보다도 높다는 의미였다.

“이놈들, 강해!”

크루트가 미넬라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어깨를 다친 카닛트 대신 미넬라가 뛰쳐나가 크루트가 상대하고 있는 남자의 채찍을 받아쳤다.

미넬라는 곧 동료들이 고전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강하다.’

채찍은 뱀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였고, 침입자는 내부의 세간을 이용하는 등 교활하게 움직였다.

숨을 고른 크루트가 다시 싸움판에 뛰어들려는 순간.

“비키거라.”

흠칫한 크루트가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다.

밀라니아가 다가오자 미넬라는 그녀를 흘끗했다.

“비켜.”

미넬라 역시 크루트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한쪽 구석, 마실 물을 담아 둔 양동이에서 물이 솟구쳤다.

물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미끈한 뱀 수인의 피부에 감겨들었다. 

“쉬익. 뭐야, 이건!”

뱀 수인 아나콘다가 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손을 휘저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중첩된 물방울은 곧 머리통만 한 큰 물방울을 이루었다.

“한 번 봤지만 여전히 당황스럽네.”

미넬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와 달리 이 광경을 처음 본 호루스와 데릭은 경악하고 있었다.

“커, 커억, 커!”

“사, 살려…… 꼬르륵.”

침입자들의 꼴은 비참했다.

물방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머리를 땅에 박아도 물방울은 출렁일 뿐 풀어지지 않았다.

숨이 막혀 발광하는 침입자들을 피해 학교의 사람들은 멀찍이 물러났다.

살기 위한 버둥거림.

비명을 잡아먹는 물방울 속에서 치러지는 고요한 삶과 죽음의 전투.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광란의 몸짓.

모골이 송연해지는 광경이었다.

지켜 주지 못한 아이의 죽음에 분노했던 카닛트도, 시간이 지날수록 표정이 빳빳해졌다.

“살려…….”

침입자가 위제니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위제니아가 뒤따라온 아이들의 눈을 가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침입자는 한둘씩 바닥으로 쓰러졌다.

5분이 지나자 바르작거리던 마지막 침입자마저 숨이 넘어갔다.

팍!

물방울은 그제야 침입자의 머리를 놔주고 풀어졌다.

젖은 머리카락 아래 스멀스멀 물 자국이 번졌다.

순식간에 생겨난 시체 세 구.

인간 도살자라는 악명에 비하면 지나치게 허무한 결말이었다.

모두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무슨.”

호루스가 아연해하며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영혼이 지옥 밑바닥까지 타락한 놈들의 최후는 이것도 과분하지.”

고개를 저으며 밀라니아는 주먹으로 허리를 퉁퉁 쳤다.

“늙은 나이에 힘을 썼더니 피곤하구나.”

고개를 돌린 그녀와 눈이 마주친 미넬라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저도 모르게 자세가 미묘하게 공손해졌다.

“먼저 들어가 잘 테니 정리는 알아서 해 다오.”

“아, 알았어요.”

경직된 목을 끄덕이자 밀라니아는 하품을 하며 2층 방으로 쏙 들어갔다.

남은 사람들은 말없이 시선만 교환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익사체들이 온기를 잃고 완전히 식었을 무렵, 카닛트가 중얼거렸다.

“그란젤 님이 생각나는데.”

“예사롭지 않은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대단한 마법사였군.”

호루스가 미간을 문질렀다. 멍한 얼굴로 미넬라가 입술을 달싹였다.

“늙었다는 건 무슨 소리죠?”

“……그러게?”

개중 나이가 제일 많은 호루스의 표정이 불편해졌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군.”

아니었다.

천 년, 더 정확히는 천백 년의 대마녀 밀라니아는 청결해진 공기에 만족하며 잠이 들어 있었다.

* * *

대대로 르안나 제국의 황제만이 이용해 왔던 밀실은 달랑 하나 밝힌 화촉만이 은은히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눈앞의 사물도 겨우 식별할 수 있을 만큼 어둑한 밀실에 누군가 홀로 침잠했다.

미동하지 않는 그의 발아래는 어둠이 가득했는데, 불빛도 침범하지 못하는 어둠이 밀실의 끝까지 뻗어 있었다.

거대한 소파에 파묻힌 그레칸은 어둠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은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똑똑.

“하이로드, 하칸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밀실 문이 열리자 바깥에서부터 들어온 빛이 밀실을 비추었다.

시선 하나 돌아오지 않았지만, 하칸은 익숙한 듯 개의치 않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왜.”

사포로 간 것처럼 까슬까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옥의 그것처럼 음산하여, 본능적으로 흠칫한 하칸의 뒷목에 털이 바싹 곤두섰다.

곧 바닥에 부복한 그의 하얀 머리 위로 그레칸의 까만 시선이 흩어졌다.

“벌써 삼 일째 이러고 계시잖아요. 요기라도 하시지요. 몸이 상할 거예요.”

그레칸은 무심하게 시선을 비켜냈다.

“밀라니아 님이 나가신 것 때문에 그러신 거라면, 직접 찾으러 가시지요.”

텅 빈 것처럼 검은 눈동자에 빛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이를 악문 그레칸의 눈이 일그러졌다.

“어디 있는 걸까. 벌써 며칠째 들어오고 있지 않잖아.”

긴 대꾸에 하칸이 반색했다.

“그러니까 찾으러 나가시면…….”

그레칸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네? 약속이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하칸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약속 같은 건…….”

‘어기셔도 되잖아요?’라는 뒷말을 삼킨 하칸은 뭔가를 참는 것처럼 씩씩거리는 그레칸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분노하는 그를 곁에서 본 적이 있던 그로서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두려운 것이 그레칸의 분노였다.

첫 번째는 노예처럼 살아온 예전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다.

“약속했다. 뒤를 쫓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그레칸이 중얼거렸다. 못마땅한 기색이 그득 담긴 음성이었지만.

머릿속에 그녀의 엄포가 재생되었다.

[당분간 밖에서 생활할 게다. 전처럼 날 쫓아올 생각은 하지 말거라. 만약 또 한 번 그렇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너와 나의 인연을 끊어 버릴 것이야.]

‘그건 진심이다. 진심으로 나를 버리려는 거야.’

소파 팔걸이에 놓인 주먹이 경련했다. 그의 내면은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당장 밀라니아를 찾아 그녀의 손이 머리를 쓰다듬게 하고, 부드럽고 향기 나는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

그리고 밀라니아에게 버려질까 봐 두려운 마음이 충돌한다.

그에게 있어 가장 공포스러운 일은 밀라니아에게 버려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필사적으로 참고는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레칸은 마음이 힘들어졌다.

인내는 바닥을 드러낸 술잔처럼 바닥나 있었고 마음속에선 괴물이 일어나 포효했다.

흉중에 어린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가서,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주변의 모든 것들을 다 찢어발길 것만 같았다.

‘밀라니아가 필요해.’

‘그녀의 곁에 있고 싶다.’

간절한 기원이 속에서부터 휘몰아친다.

피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그레칸에게 하칸의 간교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적군 수괴의 꼬리를 찾아냈어요. 서북부가 아니라 황궁의 북쪽 숲입니다. 인간들이 교활하게 우리 군대의 눈을 속여 시간을 낭비해 버렸어요. 원하신다면 당장 안내하겠습니다.”

짐짓 신중한 말의 내용과 달리 하칸의 눈빛은 그렇게 하고 싶다는 의중으로 안달복달했다.

스윽, 그레칸이 일어나자 하칸이 굳은 턱을 움직여 그를 올려다보았다.

“앞장서라.”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기괴하게 울렸다.

두려움에 질렸던 하칸의 흰 얼굴에 환희가 떠올랐다.

사라락, 미처 다 뽑지 못한 깃털이 모조리 곤두섰다.

북쪽 숲으로 이동하며 하칸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인근에 자리 잡은 화전민 무리에서 그의 흔적이 발견되었어요. 황도에 있었다니. 발아래 있는 물고기를 보지 못한 셈이지요. 지금은 부하들이 억류하고 있으니 하이로드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북부에서 허접한 군대를 일으켜 제 눈을 가리다니……. 성가시기 짝이 없는 놈들이에요. 이번에야말로 인간 놈들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 인세의 재건이라는 가당찮은 목표를 버리게 될 거예요.”

하칸이 열성적으로 떠들었지만 정작 그레칸은 관심이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건 오로지 하나였다.

‘레지스탕스의 수괴는 황태자의 핏줄이다.’

밀라니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황태자의 핏줄.

그것 하나만이 중요했다.

* * *

황궁에 꼭두각시로 세워 둔 허수아비 황제는 르안나 제국 황실의 정통 핏줄이 아니었다.

그레칸이 아무 인간이나 골라 황제로 세운 것은, 황태자의 핏줄에게 보여 주는 먹음직스러운 미끼.

‘네 자리가 정통성 없는 자에게 주어졌으니 어서 나와 네 자리를 차지해 봐라.’

‘미꾸라지처럼 숨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

황태자는 야심만만한 자였으니 금세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으나 예상은 빗나갔다.

그놈의 혈통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워서, 발견할 수 있는 건 흔적뿐이었다.

교활한 자.

‘원수는 모두 죽인다. 죽여서, 다시는 밀라니아를 위협하지 못하게 할 거야.’

그의 눈이 새카맣게 가라앉았다.

그레칸은 등성이를 넘어 산 중턱에 내려섰다.

쿵. 

주변에 울타리처럼 둘러선 수인들이 그레칸과 하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눈치를 보던 화전민들은 해쓱해졌다.

죽음의 사신을 대하는 양 이마를 땅에 박고 벌벌 떤다.

그 위로 하칸의 교활한 시선이 닿았다.

큼, 목을 문지른 그가 엄중히 말했다.

“내가 묻는 말에 사실만을 말해야 할 것이다.”

화전민들이 주춤주춤 일어섰다.

무장한 수인 전사들이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화전민들에게 겨누었다.

목전에 넘실거리는 위협에 화전민들은 감히 거짓을 고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너희를 도와줬던 놈이 있단 걸 알고 있어. 그놈이 여기서 뭘 했던 건지 말해. 하나도 빠짐없이.”

그러나 그 질문에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 그란젤 님은 고, 고마운 분일 뿐이세요. 배곯은 저희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사냥한 짐승을 놓고 가셨을 뿐…… 꺄아악!”

쿵!

“사아악!”

발을 거칠게 구른 하칸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감정이 앞서니 몸에도 변화가 일어나서, 하칸의 관자놀이와 목덜미에 깃털이 돋아났다.

인간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

두려움에 질린 화전민이 시선을 땅으로 떨어뜨렸다.

“누가 그놈이 어떤 놈인지가 궁금하다 했어? 묻지 않아도 뻔하군. 분명 군대를 숨기고자 함이겠지. 너희 인간들이 숨겨 준 거 다 안다. 어디 있는지 말해.”

확 손을 내밀어 어린아이의 목덜미를 잡아챈 하칸이 잘 벼린 손톱을 아이의 연약한 목에 가져다 댔다.

“이 어린 인간 놈을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화전민 아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숨겨 준, 숨겨 준 게 아니에요, 나으리. 그란젤 님은 저희 따위가 숨겨 드릴 분이 아니에요. 마, 마법도 부리시고 대단한 분이라 저희도 그분이 어디 있는지는…… 제발!”

아낙이 비명을 질렀다. 하칸의 손톱이 땟국물이 흐르는 아이의 여린 목을 지긋하게 누르고 있었다.

그가 조금 더 강하게 손톱을 놀리자, 툭 터진 핏방울이 날카로운 손톱을 따라 흘러내렸다.

하칸이 잔인한 목소리로 쉭쉭거렸다.

“애새끼 목 하나쯤은 따야 입을 열겠다는 거지?”

자칫 잘못하여 아이가 죽어 버릴까 걱정하는 화전민 아낙이 꺽꺽거렸다.

“…….”

그레칸은 하칸의 뒤에 서 있었다.

화전민이 벌벌 떨든, 어린아이가 오줌을 지릴 정도로 두려워하든, 관심 없었다.

다만 하칸의 쨍알거리는 목소리는 거슬렸다.

입을 닥치라고 할까.

그러나 그랬다간 인간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다.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화전민들을 향한 하칸의 위협은 점점 강도를 더해 갔다.

“바로 목을 따는 건 너무 쉬운가? 손가락, 발가락부터 시작해 봐?”

“나으리,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사람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바들바들 떨수록 하칸의 미소는 짙어졌다.

그란젤의 행방을 찾기보다는 인간들을 위협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는 그 자체를 더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두려워하는 인간들을 가지고 놀며 하칸은 히죽거렸다.

“에이, 다 귀찮네. 그냥 죽여 버려야지.”

‘……거슬린다.’

지루한 연극을 보는 것처럼 무료했던 그레칸은 문득 모든 게 짜증스러워졌다.

방금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마음이 풍랑을 맞은 바다처럼 사납게 일렁였다.

그의 기분은 이상할 정도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쉽사리 죽음을 언급하는 하칸. 천박해 보였다. 하찮았다.

혹시, 밀라니아에게는 자신도 하칸처럼 보였을까?

분노에 휩싸인 눈빛이 곧 깨질 유리처럼 위태로워졌다.

감정을 제어하기 힘들수록 그는 밀라니아의 부재를 절실히 느꼈다.

‘화가 나.’

그레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디 있는지 모르는, 찾아가고 싶지만 찾아오지 말라고 경고한 밀라니아에게.

‘당신이 없어서 화가 나. 왜 지금, 내 곁에 없는 거야?’

사랑을 갈구하며 버림받을까 떠는 어린아이처럼 그레칸은 울고 싶어졌다.

연약하고 아슬아슬한 마음과 달리 그의 기세는 온 세상을 찢어 낼 듯 파괴적이었다.

가득 찬 물잔이 찰랑이듯 살의가 꿀렁 넘쳤다.

“으르르…….”

삐죽 입꼬리가 올라갔다. 송곳니가 튀어나와서, 입술이 들려졌다.

지나치게 날카로운 치아는 뭐 하나 걸리면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했다.

바닥을 향한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제어하지 못한 살기와 분노로 경련이 이어졌다.

스윽, 스윽.

인간처럼 둥그스름했던 손톱이 세모꼴로 뾰족해졌다. 다시 둥그스름해지고, 뾰족해진다.

“하, 하이로드?”

광기에 취해 있던 하칸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공기가 급변했다. 살기가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다가오는 죽음처럼 흘러나오는 기세에 몇몇 심약한 이들이 혼절했다.

남은 이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괴, 괴물…….”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불꽃처럼 춤을 춘다.

그로부터 시작된 그늘에서 농도 짙은 살기가 새어 나왔다.

직격하면 심장이 멈출 듯 강대한 살기였다.

방금까지 찌짓, 찌짓 울던 벌레들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짐승은 각각 나무의 옹이구멍 안으로 파고들었고, 필사적으로 땅을 파 아래로 숨어들어 갔다.

방금까지 사나운 기운을 뿜어내던 수인 전사들이 ‘끼잉’ 연약하게 울며 뒤로 물러났다.

“하, 하이로드…….”

죽을 거야.

직감 빠른 이들은 엉덩이를 끌며 뒤로 물러났다.

“흐, 흐억…….”

방금까지 아이의 목숨을 구걸하던 아낙이 주춤거렸다.

공포스러운 기세가 그들을 잠식해갔다.

새하얗게 질린 하칸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 바람에 바닥에 나뒹굴게 된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정신을 차린 아낙이 가까스로 온몸을 날려 아이를 감싸 안았다.

“하이로드.”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이 쏙 들어간 하칸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긴장이 역력하게 어린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화전민들을 협박하여 그란젤의 위치를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도 머릿속에서 싹 사라졌다.

생존 본능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지, 진정하세요. 지금 분노하시면 모두 죽어요. 정신을 차리셔야 해요.”

대답 대신 지옥에서 흘러나올 듯한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칸의 낯빛이 해쓱해졌다.

‘큰일이야. 이러다간 죽, 죽어. 살아남을 수 없어. 그때처럼.’

그건 약 삼십 년 전의 일이었다.

분노에 잠식된 그레칸이 이성을 잃는 사건이 일어났다.

결과는 전멸.

근방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스러졌다. 하나도 남김없이.

그때에도 그와 감히 겨뤄 볼 자가 없었으나, 그 이후로는 그레칸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게 되었다.

재빨리 땅으로 숨어들어 간신히 목숨을 건졌던 하칸은 떠오르는 악몽에 오줌을 지렸다.

당장이라도 그레칸의 손톱이 제 목을 자를 듯하여 숨이 턱턱 막혔다.

실제로도 유형화된 살기가 그의 목구멍을 조이고 있었다.

‘이, 이성을 잃었어. 이대, 로 죽을 수는 없는데…….’

하칸의 두려움과 달리 그레칸은 정신을 잃진 않았다.

‘벌레 같다.’ 

그는 제 앞에 무릎 꿇은 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대로 손을 휘두르면 다 죽어 버리는 나약한 존재들.’

그의 외양은 지옥에서 튀어나온 짐승처럼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지만 ‘생각’을 하는 이성은 유지되고 있었다.

[네가 분풀이를 위해 덧없이 죽인 그 생명들이 소중하다는 말이니라.]

왜?

밀라니아의 말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이들은 죽여도 죽여도 모두 죽이지 못할 만큼 수가 많았고, 이 중 거슬리는 몇을 죽이는 건 큰일도 아닐 터였다.

그런데 밀라니아는 화를 냈다. 화를 낼 뿐만 아니라, 그를 버리려고 했다.

고작 이런 것들 때문에.

‘왜야, 왜. 인간들은 당신을 이용하려 했고, 공격했고, 죽이려 했는데…….’

그런 그들을 벌하려는 자신을 왜 미워하는 걸까.

‘내게 얘기해 줘.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얘기해 줘. 어떻게 하면 버림받지 않을 수 있는지 말해 줘. ……보고 싶어, 밀라니아.’

그레칸은 심장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과격한 분노를 무기력한 심정으로 관조했다.

이대로 분노를 터뜨리면 저를 바라보며 벌벌 떨고 있는 이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벌레를 밟아 죽이는 것처럼 쉽게.

“으르르.”

목을 울리자 기가 약한 어린 인간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레칸의 눈이 가늘어졌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밤처럼 새카만 눈동자였다.

시선을 받은 이들은 뱀 앞의 쥐처럼 바들바들 떨며 굳어졌다.

그레칸은 입을 벌렸다. 화가 났으나, 이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이성’이 일말의 망설임으로 남아 있었다.

치아로 이들의 연약한 목을 물어뜯고 그 비릿한 선혈로 목을 축이고 싶은 욕망이 그레칸을 집어삼켰다.

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크아아아아아―!

살기가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파드득, 파드득.

산 전역에서 놀란 새들이 날아올랐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포효는 본능에 내재된 원초적 공포를 자극했다.

“으으윽!”

온전한 인간형으로 탈태한 수인 전사들이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어떤 전사들은 등을 보이고 숲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들보다 육체적 능력이 일천한 인간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공포의 시간이 지나가기만 바랐다.

“흐으…….”

그레칸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한차례 고함을 터뜨리고 나자 심장이 날뛰며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돌았다.

“아, 아아…….”

고요해진 공기에 하나둘 고개를 든 인간들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뿌리까지 뽑아낸 날개로 몸을 감쌌던 하칸이 고개를 빼꼼 들었다.

그레칸은 기이한 모습 대신 정상적인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넘실거리는 위협적인 공기는 그대로였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완전히 굴복한 화전민이 땅에 몸이 닿을 듯 엎드렸다.

“아는 건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그란젤 님은 황도에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외에는 몰라요. 정말입니다. 정말이에요, 정말…….”

하칸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수인이고 인간이고 할 것 없이 그레칸의 위세에 벌벌 떨고 있었다.

방금까지 그들과 별다를 것 없었던 하칸이지만 그 꼴을 보자, 경련하는 가슴에 미약한 쾌감이 스쳤다.

인간들은 하칸을 향해서도 겁먹은 생쥐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일순 그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칸.”

“예, 하이로드.”

씩씩하게 대꾸하는 하칸을 보고 그레칸은 입매를 미묘하게 비틀었다.

알량한 권세를 빌어 떵떵거리고 다니는 하칸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왠지 짜증이 났다.

“돌아간다.”

“예, 돌…… 예? 돌아 가신다고요?”

하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문제 있나?”

“이 인간들을 그대로…….”

무심코 부복한 인간들을 가리켰던 하칸은 싸늘한 그레칸의 표정을 보고 재빨리 태세를 바꾸었다.

“당장 복귀 준비하겠습니다.”

그레칸은 몸을 홱 돌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그레칸은 미간을 찌푸렸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았다.

고맙다고 하지 마. 너희들을 살리려는 게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다 죽이려고 했었는데.’

밀라니아가 화를 내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참으로 오만방자하구나. 이래서야 망나니와 다름이 없어!]

머릿속에서 그녀의 노성이 메아리쳤다.

무표정한 그레칸의 눈빛이 미묘하게 시무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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