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아슬아슬한 숲속의 평화
“밀라니아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달려가겠어. 친우로서도 좋아.”
“마녀숲으로 가려는 거지? 나가거든 조심해. 지금의 그레칸은 네가 생각하는 그 시절의 울프 보이가 아니니까.”
밀라니아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을 나와서 오히려 그레칸에 대해 잘 알게 된 것 같았다.
100년간의 그레칸에 대해서 말이다.
“알아 두겠느니라.”
말란도르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며 눈매를 걱정스럽게 접었다.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따라가 버려?”
“날 죽일 셈이냐?”
며칠 딱 붙어 있었다고 기절한 몸을 가리키며 말하자 말란도르는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렇지……. 그래도 밀라니아가 밖에 있는데 몸이 근질근질해서 여기서 어떻게 기다려.”
“기다리거라.”
“하아, 냉정해.”
말과 달리 밝은 얼굴의 말란도르는 다시 걱정스러워했다.
“아무튼 밀라니아는 예전부터 은근히 그 자식에게 약했으니까……. 걱정이야.”
“…….”
“하지만 그놈도 밀라니아에겐 함부로 하지 못하겠지. 그놈이 제 욕심만 채우려고 들면, 콱 죽는다고 협박해. 알았지?”
“그런 거 없는데?”
조심히 가라는 제법 정상적인 작별 인사를 받고, 밀라니아는 흑계의 개구멍을 빠져나왔다.
1대륙으로 귀환한 밀라니아는 제 꼴을 확인하고 황당해졌다. 그녀의 육체는 사냥꾼의 집 개구멍에 박혀 있었다.
개구멍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온 밀라니아는 주변을 살피며 옷의 흙먼지를 탁탁 털었다.
흑계와 인세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지만 시간이 지체된 건 명확한 사실이었다.
밀라니아는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도 어두운 밤 시간대라니, 타이밍 한번 적절하도다. 구름이 잔뜩 껴 별빛과 달빛도 흐릿하고, 이보다 좋을 수 없느니.’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빗자루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마녀숲의 마녀성이다.
밤이 좀 더 수월하리라는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사방을 경계하는 늑대족 전사들은 시야가 좁아져서, 밀라니아가 가까이 다가감에도 기민하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게다가 무슨 행운인지 한군데는 한 명밖에 경비를 서고 있지 않은 데다 그 한 명도 그때 보았던 불성실한 늑대 수인이었다.
“아, 이 짓도 며칠 하니 슬슬 지치는구마.”
늑대 수인은 주변의 눈치를 보고,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선 몸에 긴장을 풀었다.
아예 낮은 곳에 위치한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기까지 한다.
‘어리석은 놈이라서 다행이로다.’
밀라니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연 동화술을 펼쳤다 거두었다를 반복하며 숲으로 들어갔다.
숨어든 거대한 아름드리나무의 움직임에 따라 살랑살랑 몸이 흔들리는 여전히 기묘한 광경이었지만 밀라니아는 집중하느라 제 모습이 남사스러운 꼴인 줄도 몰랐다.
“후아암.”
늑대 수인의 입 찢어질 듯한 하품 소리를 뒤로 하고 그녀는 숲 깊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유독 말을 다정하게 하여 애정했던 사철나무라든가, 오랜만에 왔으니 가지에 가득 달린 도토리를 따가라는 푸근한 도토리나무까지, 그녀가 기억하는 모습이었다.
{밀라니아 님! 밀라니아 님!}
{이제 돌아오신 거예요? 너무 안 돌아오셔서 얼마나 걱정을 많이 했다고요!}
{비비가 매일 밀라니아 님이 그리워서 울었던 거 아세요?}
“비비는 잘 있느냐?”
{비비는 죽었어요. 슬프지만 그래도 비비의 새끼들이 또 새끼를 낳았어요! 이제는 리틀 비비랍니다.}
{앨리지 님께 들었던 분이시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전 이제 오십 년 된 아기 나무지만, 앞으로 자주 뵐 수 있겠죠!}
나무들이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하는 말에 밀라니아는 정신이 없었지만 뭐라고 하는지는 다 알아들었다.
‘비비가 죽었다니.’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를 거두기 전에 손수 키웠던 비비의 죽음에 밀라니아는 마음이 슬퍼졌지만, 죽음은 순리이므로 약간의 씁쓸한 기분만 남기고 슬픔을 거두었다.
‘앨리지의 이름이 나오는 걸 보면, 무사히 마녀숲에 와서 지냈던 모양이구나.’
그러고 보니 다른 곳에 비해 이곳 숲의 기운이 융성했다.
대마녀와 앨리지가 함께 있다면 숲의 생생함이 충분히 이해가 가서, 밀라니아는 심란한 가운데서도 안심이 되었다.
흑계에서 지쳐 있던 그녀의 몸이 숲의 청량한 기운을 받고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걸어가자, 마녀성이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걸음을 빨리하려던 참이었다.
“누구냐!”
날카로운 목소리가 밀라니아의 걸음을 멈추었다.
밀라니아는 우뚝 선 채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얇게 차려 입은 여자가 흉흉히 눈을 빛내며 그녀를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설마 여기까지 경계하는 전사들이 있었던 겐가?’
당황했던 밀라니아는 여자를 찬찬히 살펴보고 머릿속으로 의문을 떠올렸다.
‘저 차림은…… 나의 일족 같은데.’
기억에 없는 얼굴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여자는 매서운 시선으로 밀라니아를 경계하며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밀라니아가 약간이라도 움직인다면 화살이 팔다리 중 한 군데는 꿰뚫을 거라는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만큼 기세가 흉험했다.
그 여자뿐만이 아니었다. 밀라니아를 중심으로 속속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이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들고 밀라니아를 겨누었다.
누군가는 저주를 발현하려는 듯 술을 쓰려는 자세를 취한다.
그 모습에 밀라니아는 확신했다.
‘마녀족이 맞구먼.’
예전에는 이렇게 삼엄하게 경계 태세를 취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상황일꼬.
‘멀리서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늑대족과 관련이 있는 겐가.’
마녀족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밀라니아는 다소 마음을 놓고 사람들의 면면을 관찰했다.
모르는 얼굴이 대부분이었으나 눈에 익은 얼굴도 있고, 심지어는 검은 피막이 달린 날개를 펼친 박쥐족도 있다.
‘……이건 예상하지 못하였거늘. 놀라운 일인지고.’
마녀족과 박쥐족과 늑대족은 1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이종족 집단으로, 삼파전의 양상을 보였었다.
양립할 수 없는 관계였는데 지금 보니 같이 생활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밀라니아는 놀라워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마녀족과 박쥐족이 입고 있는 의상을 확인했다.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묘하게 비슷한 차림이었다. 같은 사람이 만든 것처럼.
“정체를 밝혀라. 늑대족이냐? 차림을 보면 늑대족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레칸이 보냈나?”
2대륙에서는 하이로드, 하이로드 하면서 경칭을 붙이는 것만 들어서 적의 어린 부름이 낯선 밀라니아는 한발 늦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여기까진 왜 들어왔지? 마녀족의 영역인 줄 몰랐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그레칸이 보낸 자라면 돌아가서 똑똑히 전해라. 우리는 우리의 영역을 개방하지 않는다. 탐욕스러운 자가 왜 이곳까지 원하는지는 몰라도, 뜻대로 하고 싶다면 우리 모두를 상대해야 할 거다!”
날카로운 창끝으로 밀라니아를 겨냥하며 여자가 사납게 윽박질렀다.
밀라니아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난감하여 가만히 있었다.
‘허어,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를 모르니 난감하도다. 다짜고짜 이전 세대의 대마녀라고 밝힌다 한들, 믿어 줄 분위기가 아니로고.’
그때였다.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밀라니아는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파란 눈동자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미심쩍다는 듯 미간을 좁힌 여자의 눈이 이내 홉뜨였다.
이윽고 흔들리는 눈동자. 흔들림은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털썩.
활이 떨어지고 몸이 무너졌다. 옆에 있던 여자가 밀라니아를 경계하며 외쳤다.
“테사 언니! 왜 그래요?”
테사라 불린 마녀는 동료의 부름에도 대꾸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어린 마녀는 밀라니아가 무슨 수작을 부린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강렬한 살기가 쏘아져 오자 밀라니아는 흐뭇하면서도 떨떠름한 상반된 감정에 휩싸였다.
‘군기가 바짝 든 것이 잘 컸기는 컸는데…… 공격하려는 대상이 내가 되니 이걸 기뻐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구먼.’
테사를 의아해하던 이들 중에서도 곧 같은 반응을 보이는 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밀라니아가 과거에 몇 번 얼굴을 익혀 두었던 어린 마녀들이었고, 박쥐족도 서너 명 정도 있었다.
살기가 가득했던 숲이 어수선해졌다.
밀라니아는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허리를 쭉 폈다.
힘이 사라진 후 그레칸에게서나 말란도르에게서나 약골 취급을 받았던지라 간만에 옛날 느낌이 나자 어깨가 절로 펴졌다.
오랜만에 위엄을 되찾은 밀라니아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100년 만인가?”
“…….”
“이렇게 보니 다들 고충이 많았던 듯싶으이.”
밀라니아의 서늘하면서도 톡톡 터지는 듯한 독특한 말투에 눈빛이 흔들렸던 이들이 왈칵 눈물을 토했다.
제일 처음에 무너졌던 여자가 오열하며 뛰쳐나왔다.
밀라니아는 품에 안기는 일족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감정 기복이 그리 크지 않은 그녀였지만, 운명을 바꾸기 위해 우선순위에서 조금쯤 밀어냈던 일족을 다시 만난 감격에 손가락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원래라면 이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영면을 맞이했어야 할 운명인 것을. 어떻게 일이 꼬이다 보니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는구나.’
자신이 보듬었던 이들을 다시 보자, 밀라니아의 마음에 잔잔한 충족감이 차올랐다.
“전대 대마녀님……? 설마! 그분은 여기 계실 수가…….”
얼굴은 몰라도 그녀의 이름만은 아는 듯 마지막까지 밀라니아를 경계하던 이들이 눈을 토끼처럼 휘둥그레 떴다.
이미 그녀를 알아본 마녀들은 하나같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툭.
투둑.
하나둘 무기가 힘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웃음만큼 전염성이 큰 행위가 우는 것이라고 했던가. 곧이어 장내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100년의 시간이 흘러 다시 본 체라는 많이 늙어 있었다.
그녀도 보통의 인간들보다는 오래 살았지만 다른 수명 긴 이종족에 비하면 그 수명이 그다지 길지 않았다.
체라는 이미 충분히 오래 산 편이었으므로, 밀라니아는 그녀의 얼굴에 핀 주름이 놀랍지는 않았지만 착잡하기는 했다.
그녀의 가장 가까운 일족이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데, 가까이서 보지도 못했다는 일종의 자책감 비슷한 감정이었다.
“서로 늙어 가는 얼굴 보며 사는 것도 참으로 재미나는 일인데, 어째 너랑 나랑은 그게 안 되어 버렸구나. 많이 아쉬우니.”
밀라니아가 그런 마음을 담아 얘기하자 눈물을 쏟아 내어 눈이 퉁퉁 부은 체라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예전이랑 하나도 안 변한 얼굴로 잘도 그런 말씀을 하시네요.”
여전히 불같은 성격은 변하지 않은 모양.
체라의 어깨 뒤에서 튀어나온 까만 청설모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밀라니아를 관찰했다.
사육 솜씨도 일취월장했는지 곁에 머무는 패밀리어의 수도 급증한 것 같았다.
“뭘, 이미 죽어 자연으로 돌아갔어야 할 몸이거늘.”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셔야겠어요?”
“못할 말이라도 했느냐?”
밀라니아의 생환을 확인하고 펑펑 울었던 체라는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됐어요. 갑자기 100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라 아주 좋네요.”
“좋아 보이는 얼굴이 아니구먼?”
“좋아요. 요즘은, 마음 편히 웃어 본 적이 없어서요. 이 정도면 아주 좋은 거예요.”
체라가 덤덤히 말하자 밀라니아는 괜히 자신이 잘못한 것 같은 기분에 어깨가 처졌다.
마녀족이 위축된 이유에도 그레칸이 있다는 추측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추측보단 사실에 가깝다.
“대마녀는 어떤 자인고?”
밀라니아는 빈 찻잔을 눈짓했다. 방금까지 이번 대의 대마녀가 앉아 차를 마시고 놓고 간 잔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살아났으니 대마녀는 어떻게 된 것인가 했는데, 이번 대 대마녀는 예정대로 마녀목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자신은 이 세계의 법칙대로라면 죽은 사람이 맞는 듯했다.
‘줄곧 의심한 대로 이 몸은 세계의 법칙에서 벗어난 것 같은데…….’
이런 경우는 그녀도 처음 보는지라 이대로 죽으면 죽을지, 아니면 안 죽고 불사로 살아갈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그걸 알아내기 위해 일부러 죽어 보고 싶은 생각도, 아직은 없었다.
‘어쨌든 이번 대의 대마녀는 내 예상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어느 정도는 차이가 있는 듯하구먼.’
본래 대마녀의 성격은 전대 대마녀의 최후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전대 대마녀가 비자연적인 방법으로 고통스럽게 죽으면, 후대 대마녀는 그 영향을 받아 폭력적인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반대로 평화롭게 영면을 맞이하면 자애로운 대마녀가 태어나는 거고.
밀라니아가 죽기 전까지 염려했던 것은 포악한 성정의 대마녀가 태어나는 것이었다.
밀라니아는 활과 저주의 술식을 갖춘 채 저를 경계하던 어린 마녀들을 떠올렸다.
그들을 생각하면 이번 대 대마녀의 성향을 추측할 수 있었다.
체라의 말에 밀라니아는 상념을 접었다.
“마냥 자애로운 성격은 아니지만, 밀라니아 님이 말씀하셨던 전대 대마녀님만큼 공격적인 성격도 아니에요. 중도를 걷는다고 하면 비슷하겠네요. 인간들이 우대하는 성군의 성격을 지니셨어요.”
밀라니아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딱 좋은 성격이로다.”
“다행이죠. 지나치게 공격적인 성격도 곤란하겠지만 평화주의자가 환영받을 시대도 아니거든요. 상황이 이러니 우리도 힘을 키울 필요가 있어서요. 밀라니아 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너희가 좋다면 좋은 것이겠느니.”
짧게 대꾸한 밀라니아는 식어 가는 찻잔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시선은 잔잔하게 흔들리는 찻잔 속을 향해 있었다.
“아시죠? 요즘 상황.”
체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칸에 대해 말하는 거라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느니라. 아까 그 아이가 한 말도 있고.”
그 아이라 함은 자리를 떠난 대마녀를 말함이었다.
밀라니아의 눈치를 살핀 체라는 부러 가벼운 투로 말했다.
“나탈리아 님이 하신 말씀은 말이에요.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
“밖으로 나가실 필요 없어요. 정말로요. 저도 그레칸이 찾아왔을 때 믿기지가 않았는데, 밀라니아 님은 그간 기억도 없으실 테니까 당연히 믿어지지 않을 거예요. 밀라니아 님이 굳이 변한 그 애를 만날 필요 없어요.”
밀라니아는 체라의 차분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돌아오셨잖아요. 저희 곁에서 편히 지내세요. 영면의 때를 놓쳐서 언제 영면에 드실지 알 수는 없지만, 그때까지 편하게 지내시면 되잖아요.”
“…….”
살짝 웃으며 말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밀라니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나이가 들더니 점잖아졌느니라.”
“이제 소환 마법을 쓸 때 의자에 맞아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것이냐?”
“언제 적 얘기를 하셔요?”
호호, 웃는 체라의 얼굴색이 머리카락처럼 빨개질 기미를 보였다. 밀라니아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이곳에 남아 달라고,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구나.”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대 대마녀, 나탈리아를 보는 순간 여기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는 걸 아주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순리에 맞는 이는 지금의 대마녀이기에 그렇게 서운하지도, 아쉽지도 않게 덤덤히 받아들였지만 체라가 건넨 말에는 마음이 따뜻해져왔다.
‘내게 불만이 많았을 텐데도 웃는 얼굴은 변하지 않았느니.’
체라가 입 밖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밀라니아는 그녀가 말하지 않은 속내를 어렴풋하게 짐작했다.
‘영면을 예감하셨으면서 어째서 2대륙으로 나가셨어요? 마녀족은, 저는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고요한 눈동자에서 밀라니아는 그 약간의 원망을 감지해 냈다.
기사년의 불문율을 어기고 외부로 나간 대마녀.
당연히 서운할 만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밀라니아를 생각해 주고 있었다.
옅은 미소를 띤 밀라니아는 머릿속으로 아까 들었던 똑부러지는 목소리를 떠올렸다.
[부탁드려요, 밀라니아 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 힘으로도 그자를 저지할 수 없어요. 2대륙에서 어린 마녀를 데리고 오지 못하게 된 지 삼십 년이 넘었어요. 이대로 가다가는 마녀족의 위세가 훅 줄어들 겁니다.]
[그자와 깊은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부탁드려요. 그자를 막아 주세요.]
성군의 자질.
대마녀는 자칫 껄끄럽고 못마땅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을 정중하게 꺼내며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린다고. 그레칸이 더는 대륙을 망치지 못하게 막아 달라고, 부탁했다.
‘일족이 무사한지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지만, 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실질적으로 거의 없는 상황이로다.’
일족을 봐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아득바득 여기까지 온 밀라니아로서는 다소 허무한 상황이었다.
체라는 좋게 얘기해 주었지만 대마녀 나탈리아가 일족을 잘 다스리고 있는 이상 구시대의 존재인 그녀가 여기 머물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의 대마녀가 요청한 대로 해 주는 것이, 일을 위해 이 몸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이 될 테지.’
밀라니아가 생각을 정리하며 차를 마실 때였다.
벌컥.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빛이 나는 아름다운 얼굴의 사내가 들어왔다.
순식간에 경직된 공기의 흐름에 의아해진 밀라니아는 눈을 깜박이고 남자를 살폈다.
뺨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눈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대단한 미남이었다.
밀라니아는 그를 보고, 입술에 댔던 찻잔을 떼어 냈다.
“……르베리안즈냐?”
그 나직한 부름에 굳어 있던 남자의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졌다.
끝이 갈라졌으나 여전히 매혹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밀라니아가, 살아 돌아왔다는, 얘기를 듣고, 꿈을 꾸는 줄, 알았는데.”
르베리안즈는 어딘가 힘에 부치는 듯 힘겹게 말을 이었다.
호흡이 달리는 듯한 게 이상하여 밀라니아는 그를 찬찬히 살폈다.
하얗게 질린 이마에 땀이 배어 나온다. 어딘지 무리를 한 듯한 모습이었다.
체라로부터 르베리안즈도 이곳에 있다는 걸 전해 들었던 밀라니아는 그가 올 줄 알고 있었기에 등장 자체는 놀랍지 않았지만, 다소 변해 버린 얼굴은 놀라웠다.
그레칸처럼 앳된 티를 완전히 벗어던졌고, 키도 약간 더 큰 것 같았다.
어깨는 넓었으나 전체적으로 마른 감이 있어 잘 먹고 잘 지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도, 흉터. 그리고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날개.
밀라니아의 시선은 변해 버린 그 부분에 길게 머물렀다.
[르베리안즈도 잘 지내고 있어요. 건강상의 약간의 문제는 있지만. 곧 올 거예요.]
불가해했던 체라의 말뜻은 그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건강상의 문제가 저것이었누.’
미처 안으로 집어넣지 못한 그의 검은 피막 날개를 훑던 밀라니아는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날개 하나가 정상적인 모양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윗부분이 거칠게 뜯어져 나간 채다.
칼에 베인 상처가 아니라 그대로 잡아 뜯긴 듯, 너덜너덜한 단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당시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는 상처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처참한 상흔이었다.
밀라니아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백 년은 모두에게 고통의 시간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야.’
르베리안즈에게도 사연이 있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