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놓지 않을 건데
그는 고개를 쭉 빼서 밀라니아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 정도는 아니니라. 넌 예나 지금이나 얄미운 언행이 변한 게 없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밀라니아는 의자에 앉았다.
말란도르는 손등으로 축축한 눈가를 훔치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듯, 감격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는 그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밀라니아는 본론부터 꺼냈다.
“그래서 그레칸이랑 싸우게 된 게냐? 네 저택이 엉망으로 무너진 걸 보고 오는 길이니라. 흑계도, 원래 이런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으이.”
“……그래. 밀라니아는 그 얘기가 궁금할 거야. 보시다시피 단순히 싸우기만 한 건 아니야.”
말란도르가 정신을 차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냉랭해진 얼굴에서 냉기가 풍겨 나왔다.
“그가 나를 쫓아냈어. 이곳 흑계에. 다시 대륙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하면서.”
가볍게 이를 간 말란도르를 보며 밀라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맞는 말이야.”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수긍한 말란도르는 순순히 대꾸했다.
“……뭐라고?”
그의 눈에 싸늘한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쉬이 대꾸한 것과 달리 흘러나온 말의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아서, 밀라니아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왕이라고 하면, 흑계의 왕을 말하는 것이냐?”
“그래.”
다리를 꼰 말란도르는 심각해진 밀라니아의 얼굴을 보며 작은 웃음을 흘렸다.
“흑계의 왕은 인간 세상의 왕처럼 바꾸고 싶다고 바꿔지는 존재가 아니야.”
“…….”
“내 신체의 일부를 떼서 만들어 낸, 나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존재거든.”
“?”
“밀라니아 너도 이곳까지 왔다면 봤을 텐데.”
“뭘 봤다는 것이야?”
“도처에 깔려 있잖아. 사라지지 않는 검은 기운.”
그 말에 밀라니아는 탑에 당도하기 전, 마물과 흑계인이 필사적으로 그러모으던 검은 기운을 떠올렸다.
그녀의 표정이 달라지자 말란도르는 고개를 끄덕여 의심에 확신을 주었다.
“그게 그놈이 찢어 낸 왕의 몸이야.”
“…….”
“왕의 몸은 여러 조각으로 찢어져 입구를 막는 봉인에 쓰였어. 아마 밀라니아 넌 내가 만든 개구멍으로 들어왔겠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레칸이 개구멍의 존재를 몰라서 그런 거야. 봉인되지 않은 유일한 문. 몰라서 다행이야. 그 덕에 밀라니아가 이렇게 왔으니까.”
히죽 웃는 말란도르를 보며 밀라니아는 들은 정보를 되새겼다.
‘그러니까 저택이 엉망이 된 건 역시 그레칸의 소행이었고…… 심지어 입구를 봉인하기까지 했다는 게 아니냐.’
죽음의 기운이 어려 있던 그 검은 돌이 말란도르가 말한 흑계의 왕의 영혼 조각이리라.
그 왕은 말란도르가 직접 그의 몸을 이용하여 만든 존재. 말란도르와 관련이 없을 수 없었다.
“그 일이 네 무기력함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거로구먼.”
심각한 그녀의 말투에 말란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은 실질적으로 흑계를 다스리는 내 분신이었으니까. 흑계인들은 슬픔에 미쳐 버렸지.”
묘하게 감정 없는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찢어진 왕의 몸을 밟고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
“나도 이렇게 영향을 받고 있는데.”
밀라니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레칸이 그 모든 일을…….”
말을 끝맺길 망설이자 말란도르의 공허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놈은 미쳤어. 미쳐 버렸지. 네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거야. 나처럼.”
“…….”
질린 목소리에 밀라니아는 슬며시 눈을 뜨고 말란도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에서부터 시작해 머리를 길게 쓸어 넘겼다. 지치고 피로한 얼굴이었다.
“그날 그렇게 되고 나서 나나 새끼 박쥐나 새끼 늑대나…… 멀쩡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지만 그레칸은 정도를 넘어섰어. 어떻게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고.”
밀라니아는 그녀가 만난 그레칸을 떠올렸다.
‘이상하긴 했느니라.’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느니라. 물론 예전과 기운이나 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은 했으나 그래도 천성적으로 본성이 나쁘지는 않은 아이였어. 고작 분노에 미쳐 날뛸 만큼 심성이 악하지도 여리지도 않은 아이였는데.”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던 말란도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이 상황에도 ‘하긴 그놈이 되살아난 너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겠지.’라는 생각이 들다니 이런 빌어먹을. 그놈 때문에 내가 타격을 입긴 입었나 봐.”
씁쓸한 얼굴로 말란도르가 짓씹듯 말했다.
“그놈이 보기보다 멀쩡해 보였다면 그래서일 거야. 밀라니아 네가 곁에 있어서.”
“물론 그레칸과 내가 나름대로 친밀한 관계긴 하도다. 하지만 말란도르, 설사 나 때문에 그레칸이 분노하고 슬퍼했다 할지라도 그게 이렇게까지 행동한 이유는 되지 못하느니라. 셀레나에게 홀린 인간 남자도 아니고.”
셀레나는 마녀족의 일원으로, 남자를 홀리는 페로몬을 흘리는 일족의 여자와 인간 남자의 혼혈이었다.
그녀가 2대륙행에 나섰을 때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 남성체들의 결투로 온 대륙에 유혈이 낭자했을 정도였다.
말란도르는 딱하단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밀라니아는 어리둥절해졌다.
“왜 그렇게 보는고?”
“밀라니아가 둔하단 건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니 새삼스럽게 지적하진 않을 거야.”
“…….”
“분명한 건 그놈이 미친놈이라는 거야. 너한테 미친 개자식 말이야.”
“…….”
“늑대는 개과니까.”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게냐?”
말란도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도 미묘하게 미친놈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네가 그렇게 된 이후엔, 후우, 내가 잘못 판단했지. 미묘하게 미친놈이 아니야. 상상하기 싫을 정도의 미친놈이라고. 미리 알았더라면 진즉 싹을 잘라 놨을 텐데.”
말란도르의 묵직한 목소리가 먼지 쌓인 바닥에 스산히 깔렸다.
“그놈을 다시 만난다고 생각하니 인간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서, 이곳에 틀어박혀 있었을 만큼.”
“…….”
“난 그놈이 싫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밀라니아가 일어나자 말란도르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
“내가 해결해 보겠느니라.”
“어떻게?”
“이제 상황은 파악했느니라. 2대륙의 체제가 불안정하게 뒤바뀐 것, 인간들이 모조리 노예로 살고 있는 것, 화마에 휩싸인 땅. 거기다가 네 말까지. 모든 문제의 원인은 그레칸인 게 아니냐?”
“…….”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 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그 아이를 만류한다면 해결할 수 있지 않겠누.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나 버렸다. 이대로 산골에 틀어박혀 자연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거늘, 네 얘기를 들어 보니 내게 아직 사명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말란도르의 말을 듣고 밀라니아는 확신을 얻었다.
그레칸. 그녀가 영면에 들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였다.
“네가 그놈을 만류한다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내 말은 좀 듣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말란도르는 ‘뭐라는 거야?’ 하고 쳐다보는 밀라니아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힘으로는 그놈을 제압할 수 없어. 가지 마.”
“그럼 이대로 갇혀 있을 것이냐? 너, 인간 세상 좋아했잖느냐. 나가고 싶지 않누?”
“별로.”
말란도르는 무기력해 보이는 표정으로 심드렁히 대꾸했다.
밀라니아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가 살더라도 삶의 재미나 의지 따위가 느껴지지 않을 환경이었다.
“상관없어. 난 너 때문에 외부 세계에 머물러 있던 거였으니까.”
“…….”
“여기 있어, 밀라니아. 간다면 내가 보내지 않을 거야.”
“그럴 수 없느니라. 너는 이곳에서만 박혀 있어서 모르는 모양인데, 바깥도 엉망이니라. 마녀숲 주변은 늑대족이 경계까지 서고 있더란 말이야. 내 모습이 이 모양 이 꼴이라 마녀숲에도 못 들어가고 일단 여기부터 들른 것만 봐도 뭔가 느껴지지 않느냐?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느니라. 2대륙은 어찌나 엉망인지 당장 열거할 수 없는 정도고.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느니.”
그래도 안 된다는 듯 말란도르가 고개를 저어, 밀라니아는 말문이 막혔다.
“밀라니아가 간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
“가지 마.”
“…….”
“가지 말라니까.”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기던 밀라니아는 결국 인상을 쓰고 홱 고개를 돌렸다.
“안 된다고 했지 않누. 너마저 그레칸과 르베리안즈에게 옮기라도 한 것이냐? 그런 억지를 쓰게.”
상황도 알았겠다,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완전히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촤르르!
쿵!
천장에서 내려온 철창이 밀라니아를 가두었다.
순식간에 갇혀 버린 밀라니아가 반짝이는 금안을 부릅뜨며 저도 모르게 외쳤다.
말란도르가 찝찝한 얼굴을 했다.
“그건 무슨 감탄사야?”
밀라니아는 차가운 철창을 움켜쥐며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하핫, 그럼 난 밀라니아 같은 일이 일어난 건가? 기적이 일어났을 때 쓰는 말이야. 좋은데?”
예전처럼 해맑게 웃는 그를 향해 그녀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열어라.”
말란도르도 무표정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싫어. 이젠 놓지 않을 건데.”
“…….”
“가지 마, 여기 있어.”
밀라니아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니다.
곤란하게도 말란도르의 위로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겹쳐 보였다.
“왜.”
일단 지성체이니만큼 대화는 시도해 보자.
말란도르가 두 원수처럼 논리 없는 억지는 쓰지 않기를 바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험한 놈에게 보내기 싫다는데 이유가 필요해?”
“…….”
“그게 이유네. 사랑하니까.”
이게 무슨 신파 통속극 같은 대사란 말인가.
밀라니아는 말란도르가 한 점 부끄럼 없이 뱉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제 와서 또 왜 이러는지, 약간의 짜증을 동반한 경악이었다.
사실상 말란도르와는 악우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건 그때의 대화로 결론이 났지 않았나?
사랑에 빠지는 건 3초만으로도 가능하다고, 내가 네게 그렇다고 했었을 때.
“끝났지. 하지만.”
말란도르는 철창으로 가까이 다가와 밀라니아와 눈을 맞추었다.
어둡고 탁한 눈동자로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이렇게 돌아온 밀라니아를 다시 보니 가슴이 뛰네.”
“…….”
“아직 안 끝났나 봐, 나.”
밀라니아는 들고 온 빗자루 막대로 말란도르의 머리통을 후려치려 했다.
말란도르가 잽싸게 뒤로 몸을 물리지 않았다면 시원하게 갈길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쉬운 얼굴을 하는 밀라니아에게 말란도르가 애원조로 말했다.
“밀라니아가 여기 들어왔잖아. 흑계에, 내 공간에. 밀라니아의 발로 직접.”
“…….”
“이런 기회를 내가 놓칠 것 같아?”
‘하나 잊어서는 안 되는 건, 말란도르는 믿을 수 없는 종자라는 점이니라.’
그래도 적어도 지금은 말란도르가 진심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걸, 그녀는 호소하는 눈동자를 보며 깨닫고 말았다.
심란하다.
말란도르는 그녀를 더욱 심란하게 할 말을 쫑알거렸다.
“여긴 너무 외로워, 밀라니아.”
“…….”
그가 건조하게 웃었다.
“완전히 지쳐 버렸어.”
“…….”
“그러니까 옆에 좀 있어 줘.”
“…….”
“그 괴물 같은 놈 옆에서는 즐겁지 않을 거야. 비록 내가 지금은 이런 꼴이지만, 네가 있으면 어떻게든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황량하고 황폐한 마왕의 탑에서, 말란도르는 약속의 말을 읊었다.
“행복하게 해 줄게.”
안쓰러울 정도로 공허하게 들렸다. 밀라니아는 그래서 네가 날 왜,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 놈이 누굴 행복하게 해 줘. 참으로 오만하다. 혀를 쯧쯧 차도 그 알맹이 부실한 약속이 안타까워 타박하질 못하겠다.
100년간 홀로 쓸쓸히.
말란도르는 지쳐 보였고, 슬픈 것 같았다. 대번에 싫다고 하는 건 냉정했다.
그렇지만.
“얼마나.”
“어?”
“얼마나 있어 줄까? 확실히 말하지만 오래는 못 있어 주느니라.”
말해야 할 건 해야지. 우는 아이에게 사탕만 물려 준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말란도르가 얼굴을 굳혔다.
“그래서?”
“사랑이 기한을 두면 끝나는 그런 거야?”
“너도 알다시피 그런 말은 나한테 아무런 의미가 없느니.”
밀라니아가 한심하다는 듯 말하자 말란도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납득했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렇지. 넌 사랑을 모르지.”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누가 할 소리.
대체 불가능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오랜 시간 군주로 살아왔을 터.
이제 와 어떻게 사랑이란 아기자기하고 달콤한 감정에 취할 수 있겠나.
심장은 무감각해지고 단단해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
서로가 서로를 잘 알았다.
어느 순간 둘은 서로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한다니까.”
이번에는 밀라니아도 딴지를 걸지 않았다. 굳이 부정하는 말을 뱉을 필요가 없어서였다.
“사랑해.”
아니다. 그에게 필요한 건 그렇게 부르짖는 사랑이 아니라 친우로서의 위로다.
‘이미 충분히 허무할 텐데 가슴을 후벼 팔 필요는 없느니라.’
“오랜만에 감정 소모를 너무 했나 봐. 일단 자자.”
철창 너머로 손을 내밀어 밀라니아를 잡아 앉힌 말란도르는 철창에 기대앉았다.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왜 이러는지 모르겠구먼.’
황궁에 있는 동안 푹신한 침대의 편안함을 깨우친 밀라니아는 약간 불만스러웠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철창을 가운데 두고 기대 있길 몇 분.
정말 숙면을 취하는지 말란도르가 옅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그레칸을 생각하고 있었다.
말란도르와는 사랑을 논하지 못한다. 재미 삼아 사지에 몰아넣는 놈이랑 못 볼 꼴 안 볼 꼴 다 봤는데 어떻게.
그런데 뭐, 사랑해서? 사랑해서 그렇다고?
[나의 사랑하는 밀라니아.]
[내 아이를 낳아 줘.]
[인간들이 그러기를, 아이를 낳은 여자는 도망가지 못한다고 해.]
머리가 아파서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을 실타래처럼 만들어 버리는 그레칸의 목소리도 흐려졌다.
‘그레칸은…….’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부모 대신에 그를 키웠다는 점, 코흘리개 시절부터 다 안다는 점.
따지면 따질수록 안 될 이유가 수두룩하다.
‘문제는 그레칸이 납득하냐는 것인데.’
문득 안 되는 이유를 생각하는 스스로의 사고방식이 인간과 비슷하지 않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한때 사랑을 연구했던 대상이 인간이라서인가. 아니면 내가 그다지 욕망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서?’
어찌 됐건 이런 이유들로는 그레칸을 설득하기 힘들 것이다.
머리가 아파진 밀라니아는 인상을 쓰고 생각을 접었다.
“내 감정을 떠나서 결합하면 곤란한 이유가 수십 가지나 되거늘. 염치가 있지. 내가 저와 어떤 관계였는데. 이것도 말해 줄 걸 그랬느니. 그럼 설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잖누.”
당시에 그렇게 안 했던 이유가 뭐였더라.
아, 그래. 그 얼굴이 너무 쓰라려 보였던 탓에.
만약 그 이유를 빌미로 그를 공격했다면 그는 스스로의 심장을 터뜨릴 것 같았다.
딱 그런 표정이었다.
밀라니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이미 용서했다는 말도 해 버렸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거늘. 확실히 그놈에게는, 어지간히 무른 게 아니야.’
지랄 맞았던 전생이 잊힌 것도 아닌데 어리숙하게 쫓아오던 어린 그레칸이 두 눈과 뇌리에 콱 박혀 버려서.
그레칸에 대한 자신의 무른 마음을 깨닫자 밀라니아는 다시금 심란함이 몰려왔다.
하도 골치 아픈 놈이라 생각을 안 할 수 없는 것뿐이라고 애써 위안한 뒤 그녀는 눈을 감았다.
흑계의 기운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숨이 턱 막히고 두통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허어, 딱 죽을 것 같도다. 차라리 자는 게 낫겠구먼.’
밀라니아는 눈을 감고, 이전보다 편안해진 말란도르의 숨소리에 묻어 잠을 청했다.
그리고 3일이 지났다.
“밀라니아, 식사 시간이야.”
“초콜라떼는 없느냐?”
“그거라도 다오.”
말란도르는 식음료만 제공할 뿐, 철창을 열어 주지 않았다. 밀라니아도 더는 꺼내 달라 요구하지 않았다.
깨끗한 흰 피부 위로 땀이 촉촉이 배어 나오고 있었고, 안색은 창백했으며 뺨은 기이할 정도로 불긋하게 변했다.
“드디어 왔다! 밀라니아, 내 부하가 디저트를 갖고 왔어. 초콜라떼는 아니지만 입맛에 맞을 거야.”
“……하아.”
“밀라니아?”
밀라니아는 철창 밖에 몸을 기댄 말란도르와 등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몸을 꼿꼿이 세워 그를 지탱해 주던 그녀의 팔에서 힘이 스륵, 빠져나갔다.
팔이 꺾인 밀라니아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져 마침내 떨어졌다.
털썩.
이상함을 느낀 말란도르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밀라니아?”
흑계의 독기가 잠식당한 밀라니아는 한계에 달해 있었다.
하아, 하아. 옅게 숨을 헐떡이며 그녀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그녀가 흑계에 들어선지 정확히 4일.
덜컹.
마침내 철창이 열렸다.
* * *
“흡, 흐읍. 난 정말 큰마음 먹고 널 보내 주는 거야.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났으면서, 내 기운과 상극인 그 체질은 어째서 조금도 변하지 않는 거야?”
“…….”
“정말 보내기 싫어. 네가 없는 세상은 인간 세상이든 흑계든 끔찍하게 지루했으니까.”
“…….”
“그래도 네가 하려는 일을 응원할게. 뭐가 어떻게 되든, 네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어.”
말란도르는 눈물을 그렁그렁 흘리며 밀라니아를 배웅해 주었다.
밀라니아로서는 그가 눈물을 글썽이는 것 역시 이번 일을 무마하기 위한 시늉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지만, 좋게 마무리되려는 참에 재를 뿌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언행 불일치의 믿지 못할 놈이라는 인식이 톡톡히 박혀 있어 그가 눈물을 흘리며 친애의 말을 뱉어도 온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는 했다.
“몸이 그 지경이 됐는데도 나와 있어 줘서 고마워, 밀라니아. 역시 넌 나의 천사고 사랑이야.”
예를 들어 이런 말 말이다.
‘너무 과장되지 않은고. 그래도 사랑한다고 찡찡거리는 것보다는 낫구먼.’
사랑이란 단어에 전과 같은 고집이 어려 있지 않아서, 밀라니아는 질색하지 않고 덤덤하게 그를 대했다.
사랑.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