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9/48)

18

어긋나기 시작한 운명

앨리지가 온몸을 피투성이로 만들면서까지 치료하고 싶었던 이가 이 남자란 것이다.

“앨리지의 힘이라면 이 남자를 살릴 수 있을 것이야.”

물론 몸이 멀쩡한 상태여야 하지만.

“그건…….”

황제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아니요.”

다 죽어 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황제는 입을 다물고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밀라니아는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남자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남자가 퀭한 눈을 뜨고 있었다.

해쓱한 안색의 남자는, 몸이 건강했더라면 퍽 봐 줄 만했을 얼굴이었으나 살이 내려서 비쩍 마른 상태였다.

그러나 살짝 뜬 눈동자만큼은 형형한 빛을 발했다.

“안 됩니다. 뉘신지 모르겠지만 저 때문에 그녀를 더는 무리시키지 마십시오.”

무심한 밀라니아의 얼굴에서 시선을 뗀 남자가 이번에는 황제를 향해 간절히 애원했다.

“아버지,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가망이 없으니 저 말고 그녀의 안위를!”

“알고 있다, 알고 있어. 얘야, 몸에 안 좋으니 부디 흥분하지 말거라.”

황제는 지친 얼굴로 이마를 문질렀다.

“앨리지는 무사할 테니 걱정마라. 오전까지 간병을 했던 것이냐?”

“예. 한 시간 전에 겨우 잠이 들었어요.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깨우지 마세요.”

밀라니아는 뒤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남자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남자의 눈은 저쪽 방에 있는 앨리지를 그리고 있었다.

퍽 애절한 눈빛이어서, 밀라니아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황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태자와의 혼인은 그 아이가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황제에게 시선을 돌린 남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다시 설득할 수 있습니다.”

“에반,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겠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야. 앨리지를 큰애에게 보내겠다니.”

황제가 안타까운 듯이 중얼거리자 남자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아버지가 계셔서 괜찮은 것뿐입니다.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면 분명 황후가 그녀를 해칠 거예요.”

“…….”

“형님, 아니, 황태자 전하의 품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다 죽어 가는 얼굴이지만 희미하게 어린 광채는 죽어서도 결코 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밀라니아는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치정 문제이긴 치정 문제인데, 황후의 생각과 달리 황제를 사이에 둔 치정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앨리지는 황태자나 황제가 아니라, 황제의 숨겨진 아들과 사랑하는 사이고. 황제는 사랑하는 아들 내외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겐가? 황후는 황제를 사랑해서 앨리지를 미워하는 것이란 말이냐? 황자의 존재를 밝히면 될 텐데, 그건 또 다른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테니 숨기려는 거로구나.’

밀라니아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후와의 사이가 나빠진 건 이 사내 때문인 것이냐?”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가 없구려. 에반과 앨리지를 가까이 하면서부터 황후를 멀리한 건 사실이니까. 에반을 알면 죽이려 들 테니, 에반을 숨기고자 그녀를 외면했던 것도 있다오.”

밀라니아는 황제 내외의 사이가 아주 좋아 정력환까지 필요하다는 재상의 말을 상기하며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죽을 때가 되어 뒤늦게 부성애가 발휘됐다는 거라면 딱히 감동적이진 않구먼.”

“아, 그건……. 그럴 수도 있겠소만, 뒤늦게 깨달은 건 부성애가 아니라오.”

황제가 씁쓸한 눈으로 다시 잠에 빠져든 에반을 내려다보았다.

주름진 손이 에반의 마른 손을 애틋하게 쓸었다.

“에반의 모친에 대한 미안함이지.”

무슨 말인고?

밀라니아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황제가 아련한 눈을 하고 웅얼거렸다.

시선은 남자를 향하고 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눈빛이었다.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소. 그때 그렇게 놓치면 안 되었던 것이오.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소.”

떨떠름한 밀라니아의 얼굴을 흘끗한 황제가 나직하게 웃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구려.”

“솔직히 그렇구나.”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큼 나이를 먹었으니 어지간한 건 다 안다고 자신했거늘, 나 자신에 대한 것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창피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오.”

“…….”

“특히 감정에 관해서는, 신발 밑창에 파고든 압정처럼 내 가까이에 있는데도 모르는 바보 같은 일도 생긴다오.”

밀라니아는 황제의 말이 알 듯 말 듯 했다.

‘요컨대 너희들이 그렇게 부르짖는 사랑이 신발 밑창의 압정 같은 거라는 말인 것이야?’

밀라니아는 슬쩍 신발을 들어 보았다.

코사가 장만해 준 인간들의 신발이 아닌 1대륙에서 신던 신발은 밑창이 아주 얇았다.

압정이 밑창을 파고들다 못해 발바닥에 상처를 줄 터였다.

얼굴을 구긴 밀라니아가 다시 발을 내려놓았다.

황제가 쳐다보자 아무것도 아닌 척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쉽게 깨닫는 사람이 있다면 나처럼 뒤늦게 깨닫는 사람도 있지. 나 같은 사람이 후회를 하는 거라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지금, 내 유일한 후회가 그거요.”

“…….”

“살아 있을 때, 말해 줬어야 한다고 말이오.”

밀라니아는 황제의 말이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천 년을 살아온 그녀에게 누군가의 죽음은 후회가 아니었다.

너무 오래 살아와서, 누군가의 죽음으로 후회를 느껴 본 적이 까마득했다.

그녀에게 죽음이란 하루 동안 상대방을 그리워하고, 이후로는 추억 속으로 넘기는 거였다.

게다가 황제에겐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다면 다른 여인을 사랑하면 될 게 아닌가. 그렇다면 후회할 필요도 느끼지 못할 터다.

“황후가 있지 않느냐. 그녀를 사랑하면 되는 것을.”

“그렇게 간단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황궁이 이렇게 뒤숭숭하지도 않을 거요. 그렇다고 그녀를 애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외다.”

“…….”

“단지 좋아하는 거요. 황후를 아낍니다. 내게 그렇게 잘하는데,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하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프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망설임 없이 대꾸할 수는 없소. 이 나이가 되니 내게 사랑은 같이 있을 때 타오르는 불같은 감정이 아니라, 생각하면 가슴 아파지고 애틋해지는 그런 것이라오.”

“……너희 인간들은 말을 너무 복잡하게 해.”

황제의 말을 귀담아 듣다가, 결국 이해하기를 포기한 밀라니아가 투덜거리자 황제가 후후 낮은 웃음을 흘렸다.

밀라니아는 자신의 반도 살아 보지 못한 황제가 저를 보며 짓는 온화한 미소에 눈썹을 치켜올랐다.

“그 표정은 무엇인고?”

“대마녀의 수명도 무한이 아니라고 들었소이다.”

“그래. 내 끝도 머지않았다. 아마 그대와 비등비등할 것이야.”

‘어쩌면 더 짧을지도 모르고.’

황제는 밀라니아의 주름 하나 없는 얼굴을 보며 놀라운 얼굴을 했다가 이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 시간을 살았지만, 귀하의 말을 들어 보면 사랑을 느껴 본 적이 없는 것 같소이다.”

“…….”

밀라니아는 인간 앞에서 ‘모른다.’는 말을 쓰기 싫어 잠시 망설였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느니라.”

“허허. 사랑만큼 필요성이나 당위성 같은, 합리적인 개념과 거리가 먼 단어가 없을 것이오. 그 위대한 감정 앞에서는 어떠한 이해득실도 따질 수 없게 되니까.”

한때 제국의 로맨티시스트로 명성이 자자했던 자답게 황제는 사랑 예찬론자였고, 진심으로 밀라니아를 안쓰럽게 여기고 있었다.

“귀하에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게 안타깝소.”

“그대의 복잡한 상황을 보면, 그다지 안타까울 일은 아닌 것 같느니라.”

“지난날의 실수를 후회하고는 있지만 에반의 어미를 만난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오.”

“…….”

“고통스럽지만, 모두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황홀하거든.”

또다. 밀라니아는 저를 어린애 보듯 하는 황제의 시선에 고개를 비딱하게 틀었다.

아주 약간, 오기가 속에서부터 꿈틀대고 대가리를 내미는 것이 느껴졌다.

“내 평생 사랑만큼 기괴한 감정은 보지 못했느니.”

“그렇소?”

“감정에 눈이 멀어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파괴적으로 구는 게 사랑이 아니더냐.”

밀라니아는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를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공격을 퍼부어도, 살을 저미어도 개의치 않고 자신에게 달려들던 두 사람을 떠올리자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렸다.

살면서 공포라고는 한 순간도 느끼지 못했던 그녀에게 공포를 알려 준 건 바로 그 사랑이었다.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 사람의 사랑 방식일 뿐이오. 모든 사랑의 모습이 그와 같지는 않으니 편견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소.”

황제는 그러고선 밀라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귀하 같은 이는 어떤 사랑을 할지 궁금하외다.”

“쓸데없는 궁금증이로다. 평생 볼일 없을 것이니라.”

밀라니아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사랑 방식은 무슨 놈의 사랑 방식.

‘대관절 사랑이 무엇이관데.’

살면서 별다른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던 그녀지만 하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에 빠진 존재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양식.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만드는가.

무지가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그녀는 갈증이 났다.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열망하는 수많은 탐험가와 모험가처럼.

‘건방진지고.’

밀라니아는 괜히 쓸데없는 말로 속을 들쑤시는 황제를 흰 눈으로 쏘아보았다.

‘신경 쓸 것 없느니.’

황제에게 화를 내는 건 그의 말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밀라니아는 끓는 속을 가라앉히며 억지로 시선을 다른 데 돌렸다.

파리한 얼굴의 에반을 내려다보며, 밀라니아는 문득 앨리지를 떠올렸다.

그녀에 대한 얘기를 꺼내려는 순간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휙, 뒤를 돌아보자 초조함을 두 눈에 가득 담고 앨리지가 달려오고 있었다.

“에반!”

기겁한 황제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앨리지의 몸을 받아 냈다.

“폐하, 에반은 어떤가요? 꿈결에 에반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일어났었나요? 일어나서 말을 했던 건가요?”

헐떡이는 앨리지는 황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불안으로 떨렸던 초록빛 눈동자에 누워 있는 에반의 모습이 한가득 담긴다.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에반에게 바짝 다가온 앨리지가 에반의 얼굴 여기저기에 코를 가져다 댔다.

그녀의 오뚝한 콧망울이 에반의 뺨을 비벼 댔다.

에반이 살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듯 코와 심장에 귀를 댄 앨리지가 마침내 길고 긴 한숨을 쉬었다.

상대방이 살아 있는 걸 진심으로 안도하는 듯한 그 모습에 밀라니아는 마음에 묘한 감흥이 번져 나갔다.

‘예전에도 이랬었던가?’

전생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그레칸과 르베리안즈의 뒤에서 보호받고 있던 앨리지는 마냥 여리고 연약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군가 창칼을 쥐고 뛰쳐 들어와도 용감히 맞서 싸울 수 있을 듯했다.

황제가 말하는 그 사람만의 사랑 방식이란 게 머릿속을 스쳤다.

‘앨리지. 지금의 네 변화가 그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냐.’

밀라니아는 에반을 정신없이 쳐다보는 앨리지의 턱을 움켜쥐어 자신에게로 돌렸다.

불시에 공격당한 앨리지의 눈동자가 밀라니아를 발견하고 확 커졌다.

“만약 병이 낫는다면 뭘 할 생각이누?”

다짜고짜 묻는 말에 앨리지는 당황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곧 침착하게 대꾸한다.

“대마녀님이시죠. 저에 대해선, 황제 폐하께 전해 들으셨나요? 제 병마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 거고요?”

“묻는 말에나 답하거라.”

앨리지의 눈빛이 흔들렸다. 흔들림을 숨기고 싶은지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다시 돌아온 시선은 깨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다.

“에반을 살릴 거예요.”

“…….”

밀라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앨리지의 말이 혼란스러웠다.

밀라니아는 앨리지의 눈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맑고 투명한 초록색 눈동자.

요정의 일족임을 반영하듯 눈동자 저 안쪽엔 성스러운 생명력이 넘실거렸다.

비록 지금은 병마의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지만 치료받은 후에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푸르른 생명력을 주변에 흩뿌릴 게 분명했다.

“살려 주세요, 대마녀님.”

‘나의 생명을 바탕으로 살리게 될 존재.’

밀라니아는 시간을 다 소진해 스러져 가는 자신과 달리 이제 갓 꽃을 피우는 앨리지의 대비가 흥미로웠다.

“내가 누군지는 누가 말해 줬느냐?”

“황제 폐하께서 말씀해 주셨죠.”

“…….”

“하지만 그분의 말씀 전에,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재상과 황제가 말해 줬겠거니 생각했던 밀라니아는 그녀가 덧붙인 대답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앨리지가 온화한 표정으로 밀라니아의 이곳저곳을 훑어보았다.

“그래요. 이미 알고 있었어요.”

“…….”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떠올렸다.

그레칸은 앨리지를 꿈에서 보았다고 했다.

밀라니아 자신이 열 번의 회귀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과 달리 다시 돌아와 만난 이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생의 그레칸은 이변을 보였다.

혹시, 혹시라도 단편적인 기억이라도 남아 있는 거라면.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를 알고 있느냐?”

밀라니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그러나 앨리지는 눈을 깜박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였누.’

밀라니아는 실망인지 안도인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누군지 몰라요.”

“…….”

“하지만 누군지 알 것도 같아요.”

밀라니아는 이게 무슨 장난질인가 싶어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내게 말장난을 치려는 게냐?”

“장난치려는 게 아니에요. 제가 예전부터 꿈을 통해 봤던 사람들이, 대마녀님이 말하는 사람들일 거 같거든요.”

반신반의하지만 거의 확신하는 말투였다. 밀라니아의 눈이 슬며시 가늘어졌다.

밀라니아가 밀실에서 나오자,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레칸이 눈을 반짝 떴다.

한달음에 달려와 어디 상한 곳이라도 찾는 양 몸 이곳저곳을 살피는 그레칸을 밀라니아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앨리지의 말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장난치려는 게 아니에요. 제가 예전부터 꿈을 통해 봤던 사람들이, 대마녀님이 말하는 사람들일 거 같거든요.]

방금 전, 밀라니아는 회귀한 뒤로 처음으로 전생에 관한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었다.

* * *

한 시간 전.

“이상한 말이지만, 대마녀님과 만날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예지력이라도 있느냐?”

“그럴리가요. 그냥, 그냥 알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나를 지켰던 사람들.”

앨리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 사람들이죠? 말씀하신 이름. 그레칸과 르베리안즈.”

밀라니아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기억하기는 기억하는데 명확하게 기억하진 못하는 상태인 겐가.’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밀라니아는 현재 앨리지의 상태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회귀라는 건 단지 시간을 되돌렸다는 말 하나로는 설명할 수 없다.

모든 물리적인 법칙을 무시하고 시간을 돌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가지 예로, 완벽한 회귀가 가능했다면 그녀에게 전생의 기억이 남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야.’

차라리 자신을 비롯해 다른 관련된 사람들에게도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터였다.

“그래. 그들이 바로 너와 사랑했던 자들이다.”

앨리지의 존재에서 익숙함을 느끼는 그레칸보다 앨리지는 기억하고 있는 게 많은 듯해서, 밀라니아는 숨기지 않고 대꾸했다.

앨리지는 놀라지 않고 침착한 표정이었다.

“과연, 그것까지 기억한 모양이구나?”

“고마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까지는요. 사랑을 했었던 것도 같아요. 하지만 그 사랑은 내가 에반을 사랑하는 것과는 달라요.”

가슴을 움켜쥔 앨리지의 혼란스럽던 얼굴이 애달프게 변했다.

“다를 수밖에 없어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고 과거를 부정하는 게냐. 밀라니아는 앨리지의 말을 비웃었다.

“그 문제에 관해선 내가 더 정확히 기억하고 있느니라. 너는 분명히 그들과 사랑을 했다.”

“그래요. 사랑했어요. 하지만 지금처럼은 아니에요.”

앨리지가 한숨을 쉬었다.

밀라니아는 인간도 그러더니 왜 앨리지까지 말을 이렇게 복잡하게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얼굴을 굳혔다.

앨리지는 밀라니아의 못마땅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한숨 쉬듯 웃었다.

“그 마음이 기억나요. 언젠가부터 외로워졌던 거.”

“…….”

“그들이 날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목소리도 생각이 나요.”

“…….”

“그리고 대마녀님이 있었죠.”

“이상하게 말을 끌어가는구나. 갑자기 내 얘기가 왜 나오는 것인고?”

“그들이 찾아다니던 존재가 당신이었으니까요.”

밀라니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통렬한 비웃음에도 담담한 앨리지의 표정. 그녀는 속에서부터 뭉근한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앨리지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게 뭔지, 제대로 듣지도 않았건만 기분이 퍽 불쾌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고? 그놈들은 널 살리기 위해서 날 찾아다닌 게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어 왔는지, 이 여자는 결코 모를 것이다.

밀라니아가 싸늘히 일갈하자 앨리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단편적인 기억일 뿐이에요. 대마녀님의 기억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도 제가 선명히 기억하는 건.”

밀라니아는 눈을 똑바로 맞춰 오는 앨리지를 보며 눈썹을 꿈틀했다.

“입은 날 향한 사랑을 속삭이는데 내 곁엔 아무도 없었어요. 그들은 늘 당신을 찾아다녔죠. 눈이 날 향해 있지 않았는데, 그런 그들을 보고 제가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대마녀님께선 아시겠어요?”

“네 얘기를 듣고 있노라니 최악의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는 건 알겠느니라.”

어디로 숨든 끈질기게 찾아와 싸움을 걸던 두 사람이 생각나서, 밀라니아는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다.

자세한 얘기는 모르는 듯 의아한 얼굴을 하는 앨리지를 치료하고, 이 무의미한 생을 치워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늦었다, 밀라니아.”

반가운 기색을 숨긴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밀라니아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밀라니아의 몸을 살피고, 아무런 문제도 발견 못 한 그레칸이 한 걸음 물러나고 있었다.

어느새 가느스름하게 못마땅해진 눈으로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먼.’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생각나지 않았던 전생의 그레칸의 모습을 되새겼다.

앨리지와의 대화가 과거의 기억을 쿡쿡 쑤셔 대어 수면 위로 끌어올렸고, 기억은 땅에 숨겨진 감자처럼 줄줄이 튀어나왔다.

“밀라니아, 안에서 무슨 말을 했어? 많이 늦었다.”

“……별다른 거 없었느니라.”

“다음부터는 나도 데려가라. 따로 떨어져 있으니까 싫었다.”

뭐라고 대꾸하려던 밀라니아는 입술을 달싹이다 말고 꾹 다물었다.

‘귀찮구나, 이 모든 게.’

왜 날 죽인 원수에게. 원수를 먹여 살리고 놀아 주고 거처를 제공하는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지.

지금도 왜 이 모든 질문을 받아 주고 있는지.

당위성을 궁구하던 그 허탈했던 감정은 10년 전에 없어진 줄 알았는데, 없어진 게 아니라 무뎌졌던 거였던가.

‘생각해 보면 이제 그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냐.’

운명은 어긋났다. 아직 더 살펴봐야 할 건 있지만 지금 봐서는 앨리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그레칸은 앨리지에게 무관심하니. 그게 딱히 변할 것 같지는 않았다.

상념에 잠긴 밀라니아가 빤히 쳐다보자 그레칸이 고개를 갸웃했다.

“집에 가지 않을 건가? 또 만날 사람이 있어?”

대꾸하지 않는 그녀의 무반응에 그레칸은 눈을 깜박이더니 밀라니아를 향해 고개 숙여 냄새를 맡았다.

“밀라니아. 왠지 기분이 나빠 보인다.”

다소 시무룩한 목소리에 밀라니아는 그제야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별로 그런 건 아니느니.”

“…….”

“네놈들이 내 원수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을 뿐이로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밀라니아의 뒷모습을 멍하게 보던 그레칸이 재빨리 옆으로 다가왔다.

빤히 쳐다보던 좀 전과 달리 이번에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 그녀를 보며 그레칸은 목이 타는 듯한 초조함을 느꼈다.

“밀라니아?”

그레칸은 고개를 내밀고 밀라니아와 눈을 마주치려고 노력했지만 밀라니아의 무심한 눈은 정면만을 향해 있었다.

조급증이 치민 그레칸이 밀라니아에게 대답을 독촉했다.

“밀라니아, 밀라니아.”

“이 지긋지긋한 관계도 곧 끝이니라.”

밀라니아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바닥에 낮게 깔렸다.

기가 죽어 조용히 따라오던 말란도르의 귀가 쫑긋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히는 그레칸에게 밀라니아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꽂혀 들어왔다.

“언젠가는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지. 지금 보니 왜 말하길 망설였는지 모르겠구나. 생각난 김에 말해야겠느니.”

“…….”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난 곧 죽을 것이야. 애초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고, 그 대부분을 네게 썼다.”

“무슨 소리야.”

“할 만큼 했다고 생각이 드는구먼. 나를 위해서나 마녀족을 위해서나,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느니라.”

“그거 말고, 죽는다는 게 무슨 소린지, 난 모르겠어. 모르겠다, 밀라니아. 농담을 하는 건가? 그, 그건 별로 재밌지 않다. 기분이 나빠. 이상해. 하지 마라.”

그레칸의 유리알처럼 까만 눈은 충격을 받아 확장되어 있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밀라니아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 네 갈 길 가거라. 너와 나의 악연은 여기서 끝을 고하자꾸나.”

그레칸이 우뚝 멈추었다.

밀라니아는 그를 아는 체하지 않고 쓱, 스쳐 지나갔다.

그 뒤를 그레칸 대신 말란도르가 따라붙었다.

그레칸을 지나치기 전 그를 흘끗한 말란도르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말란도르가 밀라니아를 쫓아가는데도 그레칸은 화를 내며 따라오지 않았다.

말란도르는 밀라니아의 뒤에 바싹 따라붙었다.

뱀처럼 간사한 목소리로 그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이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

“무슨 소리인고.”

“화풀이를 하는 밀라니아라니! 그것도 저런 핏덩이에게.”

밀라니아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래서 눈치 빠른 작자는 꺼림칙하고 재수 없다.

밀라니아의 어깨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처졌다.

“그레칸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그만 보는 게 맞느니라.”

“오, 화풀이가 아니라 심사숙고의 결과였다?”

“그만 빈정거리거라. 이제 그레칸도 혼자 살아갈 나이가 되었어. 내가 죽은 후에 그 애가 어딜 가겠느냐? 새로운 대마녀가 생길 마녀성? 아니면 추방된 상태로 늑대족의 영토를 방랑할까? 재상에게 편의를 봐주라 이를 것이다. 그러면…….”

‘당분간은 여기를 거처로 삼다가, 발칸이 죽으면 수장으로서 2대륙으로 귀환할 것이야.’

마지막 말은 꾹 삼킨 밀라니아는 묵묵히 갈 길을 재촉했다.

말란도르는 이해할 듯 말 듯 한 얼굴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다 피식 웃었다.

“근데 정말로 네 영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나 봐? 새끼 늑대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야.”

“…….”

“근데 이상하네. 이제껏 영면에 대한 언급은 신중하게 생각했잖아. 갑자기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구는 건 또 뭐야? 그레칸을 위해서라도 그러면 안 되었던 거 아닌가? 울프 보이, 꽤 충격을 받았을 텐데.”

“너와는 상관없고, 알 것도 없느니라.”

밀라니아는 조금 짜증이 나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말란도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안에서 앨리지라는 여자를 만났잖아. 그게 네 심경을 변화시킨 거지? 그거 말고는 갑자기 이럴 리가 없지. 무슨 대화를 했어? 말해 봐. 나 지금, 궁금해서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아.”

황궁의 문턱을 넘어 시종이 대기시킨 마차를 향해 걸어가며 밀라니아는 말란도르를 흘끗했다.

붉은 홍채에 넘실거리는 호기심 가득한 눈이 밀라니아의 속을 들여다볼 듯했다.

밀라니아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하고 말을 않자 말란도르가 웃는 가면 같던 얼굴을 벗어던졌다.

정색한 얼굴로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역시 뭔가 있는 거지.”

“…….”

“귀찮은 걸 싫어하는 네가 골치 아픈 수인 둘을 거두지를 않나, 마녀족과는 별로 관련도 없는 일로 2대륙에 오지를 않나…….”

“…….”

“예전에 너 그랬지. 대마녀는 영면을 앞두고 있을 때 마녀성을 떠나지 않는다고 했잖아. 마녀성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다가 마녀목으로 떠난다고 했잖아. 근데 이게 뭐야? ……지금 뭐 해?”

아마도 웃으려고 했던 듯, 눈꼬리를 휘려던 말란도르는 웃기는커녕 얼굴을 거칠게 일그러뜨렸다.

“내가 귀찮은 일까지 감수하며 너를 따라온 이유는 네 영면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어.”

“지금이라도 돌아가든가 하려무나.”

“네 영면을 함께하기 전에는!”

말란도르가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걷잡을 수 없는 기운이 말란도르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근처에 있던 꽃과 풀이 한순간에 죽은 것처럼 시들고, 나뭇가지에 내려앉으려던 새가 비명을 지르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피부를 아프게 찔러 대는 기운에 밀라니아가 눈살을 찌푸리자 말란도르가 숨을 고르며 기운을 갈무리했다.

“네 마지막을 보기 전에는 난 어디에도 안 가.”

“부질없는 짓이다.”

“참, 사람 허탈하게 하는 말을 주저 없이 하지.”

힘없이 웃은 말란도르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첫 만남에 약속했어. 기억 나? 네 마지막은 내가 함께할 거라고. 다른 건 다 포기해도 네 마지막 순간은, 네 죽음의 순간은 내가 가질 거라고.”

“…….”

“알아들어, 밀라니아? 네가 죽을 때, 네 곁에는 내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돌아가자. 네 마지막을 이런 곳에서 보내고 싶진 않아.”

마차에 올라탄 밀라니아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말란도르를 보고, 시선을 돌려 그레칸을 응시했다.

그레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밀라니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원망하는 듯한 눈빛이다.

밀라니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나를 방해하지 말거라, 말란도르.”

“…….”

“난 내 영면뿐만 아니라, 내 사후에도 마녀족이 문제없기를 원하느니라. 나는 그 목적을 가운데 두고 있는 것뿐이야.”

밀라니아는 움직임 없는 그레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마부를 향해 출발하라 명령했다. 곧 마차가 가벼운 진동과 함께 움직였다.

밀라니아의 말을 듣고 나름의 답을 얻었는지 말란도르는 입을 다물고 밀라니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신이 미래를 보여 주기라도 했어? 네가 죽은 후에는 마녀족이 멸족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네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걸.”

“그걸 알 수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것이다.”

심장을 꿰뚫려 죽은 후로는 세상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른다.

자신이 죽었다면, 자신의 심장을 이용해 앨리지는 병이 낫게 됐을까?

더는 마녀족과 관련이 없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것까진 모르지만, 하나 확실한 건 마녀족은 혼란스러워졌을 거라는 거다.

대마녀가 비정상적으로 세상을 뜬다면, 마녀목은 방어 본능을 발휘한다.

그리하여 새로 태어난 대마녀는 포악한 성정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대마녀는 난폭한 방법으로 마녀족을 다스리게 될 테니, 자신이 죽은 후 남겨질 마녀족에게는 불행한 일이다.

밀라니아는 개인적인 바람으로도, 마녀족의 수장으로서도, 스스로의 온전한 영면을 바랐다.

“울프 보이는 저대로 놓고 갈 거야?”

밖을 힐끗한 그레칸의 중얼거림에 밀라니아는 못 들은 척 눈을 감았다.

“이제부터는 제 갈 길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니라.”

“데리고 있었던 이유가 있었을 거 아냐?”

“……나에겐 이제 필요 없느니라.”

뒤따라오지 않는 그레칸을 묘하고 살피던 말란도르는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밀라니아를 돌아보았다.

“필요 없다고?”

“앨리지가 새로운 사랑을 만났느니라. 그레칸도 앨리지에게 관심이 없지.”

“또 알 수 없는 말을 하네, 나 불안하게.”

불만스러운 기색에 반응하지 않고 밀라니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더는 그레칸이 내 심장을 노릴 일은 없도다.’

이 세상이 어떤 묘수를 부리더라도, 앨리지가 사랑하는 황자를 버리고 그레칸을 선택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만큼 앨리지가 보이는 헌신적인 태도는 사랑의 ‘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녀가 의식할 만큼 강렬했다.

‘위협적이지 않은 그레칸에겐 관심 없구먼.’

냉정하게 생각했지만, 황궁 앞에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던 그레칸의 눈빛이 떠오르자 밀라니아는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졌다.

“정말 이대로 버려두고 가는 거야?”

게다가 말란도르는 자꾸 속을 들쑤신다.

“그레칸을 싫어했으면서, 왜 아쉬운 소리를 하느냐?”

“아쉬운 소리가 아니야. 이대로 버려진다는 게…… 이상해서 그렇지.”

“…….”

“너, 아끼고 있잖아? 건방진 놈이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밀라니아는 짧게 일축했다.

입을 딱 닫는 그녀를 보고 말란도르는 흐응, 손에 관자놀이를 괴었다.

선선한 바람이 그의 붉은색 머리카락을 스치며 들어와 밀라니아를 위로하듯 휘감았다.

밀라니아는 팔짱을 좀 더 단단히 끼고 마차 좌석에 등을 기대었다.

“이랴!”

황궁을 벗어난 마차는 좀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밀라니아를 태운 마차는 그레칸을 버려두고 유유히 황궁을 떠났다.

* * *

그레칸은 소금 기둥처럼 서 있었다.

“저, 그레칸 님. 다리가 아프실 테니 어서 마차에 오르시는 게…….”

아까부터 깔짝거리던 시종의 말이 그레칸은 그저 귀찮았다.

재상 나리가 보냈다는 말을 하면서 뭐라 뭐라 말을 했는데, 그레칸의 귓가로 멀쩡히 흘러들어온 소리는 없었다.

그레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황궁 입구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밀라니아를 태운 거대한 마차 뒤꽁무니만 눈앞에 아른거려 보였다.

금방이라도 흑마를 앞세운 마차가 이리로 올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를 스치고 지나갔던 밀라니아의 눈은 한 점 온기도 없었고, 단호했었다.

그녀는 그녀의 결정을 되돌리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레칸이 여기 서서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다.

제발 다시 돌아와. 나를 데려가 줘. 이대로 나를 버리는 게 아니라고, 말해 줘. 심한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말해 줘, 밀라니아.

그레칸은 그런 마음으로 꿋꿋이 서 있었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인정한 건 해가 뉘엿뉘엿 지고 달이 떠올랐을 때였다.

계속 어디론가 가자고 재촉하던 시종은 마차 안에 쏙 들어가 있었다.

그레칸은 비척거리며 움직였다. 오랫동안 미동 없이 있던 다리가 삐걱대는 것 같았다.

화원의 긴 나무 의자에 앉은 그레칸의 표정이 멍하니 가라앉았다.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얼굴엔 표정이랄 게 없었다.

밀랍인형처럼 굳어진 얼굴로 그레칸은 머릿속으로 밀라니아가 남긴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 말을 할 때의 밀라니아의 표정, 시선, 눈빛. 향기마저 서늘하고 끔찍했던 시간. 뇌를 긁어내리는 것 같았던 잔인한 말들.

[이 지긋지긋한 관계도 곧 끝이니라.]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난 곧 죽을 것이야.]

[이제 그만 네 갈 길 가거라. 너와 나의 악연은 여기서 끝을 고하자꾸나.]

그렇게 끔찍했었던가? 자신에겐 하루하루 재미있고 즐거웠던 그 나날들이 그녀에겐 그렇게 지겹고 끔찍했던 시간이었는가? 왜? 내가 귀찮게 굴었긴 했지.

그녀가 귀찮은 걸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계속 치대고 짜증 나게 굴기는 했어.

밀라니아는 다 받아 줬어. 귀찮고 짜증 난다고 말하면서도 다 받아 줬어. 그 인내심이 이제 바닥난 거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할 때까지 계속 귀찮게 군 자신의 잘못.

한참 자책하던 그레칸은 밀라니아를 감싸던 냉정한 공기와 차가운 태도가 생각이 나 자꾸만 견딜 수 없이 괴로워졌다.

‘버려졌다. 조금도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레칸을 진정 괴롭게 하는 건 그거였다.

밀라니아는 한 점 고민 없이 그를 저버렸다. 필요 없는 것처럼. 짧게 이어진 인연을 끊는 데 아무런 미련이 없는 것처럼.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을 텐데.’

자신은 밀라니아에게, 가 버리라고 절대로, 농담으로라도, 빈말이라도 할 수가 없는데.

왜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건가.

‘가슴이 아파.’

그레칸은 눈살을 찌푸렸다.

‘르베리안즈와 말란도르 때문인가?’

퍼뜩 든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녀 곁에는 사람이 많다. 쓸데없이, 짜증 나게, 사람이 많다.

자신한테는 밀라니아 하나밖에 없는데. 유일하고 절대적인 사람인데. 유일하고 절대적인 사람인데.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

그래서 그럴지도 몰라. 그래서 나를 버리려고 하는 거야.

내가 하나도 아쉽지 않으니까. 나 하나 정도는 없어도, 되니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어휘력이 짧은 그로서는 이 이상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파괴되듯이 아팠다.

끙끙, 실제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죽는다는 소리는 또 뭐야.

그레칸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럴 리 없어. 그렇게 젊은데…… 그럴 리 없어.

버려졌다는 의식이 조금 밀려났다.

밀라니아가 죽는다면.

그녀는 가끔 거짓말을 하고, 자신을 속이려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진실을 말했다. 그 표정은 진실이었다.

진실로 그녀는 죽을 날을 예감하고 있었다.

‘밀라니아가 죽는다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심장은 두근거렸다. 최악이었다.

밀라니아가 죽는다면. 그거야말로 영원히 버려지는 것이었다.

그레칸은 입술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절대로,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막을 거라고.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 설사 그 자신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 *

밀라니아는 돌아오자마자 곧장 침대에 누웠다.

피로가 쌓인 몸이 무거워 침대에 푹 파묻히는 것 같았다.

한창때는 하루에 피를 한 컵을 뽑아도 멀쩡했는데.

몇 년 전만 해도 르베리안즈의 치료 때문에 장기간 피를 쓰기도 했지 않았던가.

‘이제 육신의 시간이 다해서 그런 걸 테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앨리지의 기력을 한 번 돋운 것만으로도 기력이 달리다니. 밀라니아는 혀를 쯧 찼다.

밀라니아는 마녀목의 커다란 잎사귀에 감싸였던 그때처럼 이불 속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러나 인간의 이불은 온기만 전해 줄 뿐, 마녀목의 안온한 평온은 선물하지 못했다.

앨리지의 기력을 보하기 위해 당분간은 피를 계속 사용해야 할 듯하니, 지금 체력을 비축해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밀라니아가 잠에 빠지기까지는 순간이었다.

몇 시간 후.

밀라니아는 잠기운이 훅 빠져나가는 기분에 눈을 깜박거렸다.

‘이상하구먼. 아직 일어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눈이 왜 뜨였을꼬?’

눈꺼풀에 돌덩이를 매단 것 같았다.

확실히, 너무 이르게 일어났다. 주변이 어둡다.

달이 떠오른 위치로 시각을 가늠하려던 밀라니아는 문득 근처로 달빛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유독 이 주변이 어두웠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무엇인고?’

눈을 가늘게 뜬 밀라니아가 창문을 가린 거대한 날개를 인지한 순간.

서늘한 숨결이 훅 밀려들어왔다.

“밀라니아.”

꿈결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밀라니아의 귓가 솜털이 오소소 돋아났다.

하아, 떨리는 숨을 맞은 밀라니아는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귀찮은 일을 회피하고 싶은 그녀의 본능이었다. 칭얼대는 소리가 뒤따랐다.

“눈떠 봐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보아하니 이 방으로 들어온 지 한두 시간은 훌쩍 넘은 기색이다.

어쩐지 깰 때가 아닌데 일어났다 싶었다. 밀라니아는 내심 끄응, 침음을 흘렸다.

“내가 왔어요. 밀라니아 보려고요.”

“…….”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눈떠 봐요. 응?”

눈을 뜨면 피곤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건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밀라니아는 잠이 든 척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었다.

눈을 감은 상태건만 르베리안즈의 시선이 느껴졌다.

열심히 외면하며 밀라니아가 눈을 꼭 감자 주변 기온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은 아닐 것 같아 밀라니아는 더더욱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나 르베리안즈는 그레칸과 다른 의미로 대책이 없었다.

“눈뜨지 않으면 키스할 거예요.”

“……아, 왔느냐?”

밀라니아는 막 잠이 깬 것처럼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네가 왜 여기 있냐는 것처럼 밀라니아가 의아하게 눈까지 깜박여 보이자, 르베리안즈가 그런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불안함에 밀라니아는 눈꺼풀이 빠르게 끔벅였다.

이내 싱긋 미소를 지은 르베리안즈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아, 좋다.”

“…….”

“밀라니아 눈 보니까 살 것 같아요.”

그의 목소리가 한층 감미롭게 낮아졌다.

“내가 돌아왔어요.”

“리비.”

르베리안즈는 침대에 팔꿈치를 대고 손에 턱을 괸 상태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밀라니아가 제대로 깨어나 자신을 상대하자 신이 난 듯 천장을 가릴 것처럼 펼친 날개를 펄럭였다.

그것만으로도 묵직한 바람이 방을 휘몰아쳤다.

밀라니아는 떨떠름한 눈으로 방을 가득 채우는 날개를 응시했다.

수장 의식을 치르고 온 탓인가. 날개가 이전보다 거대해진 것 같았다.

“의식은 잘 치르고 왔느냐?”

갔다 온 거면 갔다 온 거지 뭘 이렇게 요란하게 찾아오나, 라는 말은 꿀꺽 삼키고 묻자 르베리안즈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저었다.

‘?’

의미 불명의 고갯짓이었다.

수인족의 수장 의식은 인간들의 즉위식보다 특별하다.

후계자는 수장 의식을 치루고 난 다음에야 진정한 성체로, 수장으로서 거듭났다고 할 수 있었다.

심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수장 의식을 통과하면 일족을 이끌 수 있는 수장으로서의 힘을 얻는 것이 보통이었다.

‘느껴지는 기운을 보면 성공한 것 같은데.’

어딘가 문제가 생겼을까?

“잘 치르고 왔다는 것인고, 아니라는 것인고?”

“…….”

“수장 의식은 만만히 볼 게 아닌 것을. 네가 실패했더라도 이상할 건 없느니라.”

물론 르베리안즈가 실패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당히 위로를 건네자 르베리안즈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수장으로 인정은 받았지만 의식이 다 끝난 건 아니에요.”

“마무리를 짓지 않았단 말로 들리는구나.”

“맞아요.”

“왜?”

그럼 그걸 마무리 지어야지, 왜 여기 왔냐는 말을 외마디로 축약했다.

르베리안즈는 그녀의 의중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달리 이유가 있겠어요?”

“…….”

“밀라니아가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더는 떨어져 있는 게 싫어서.”

이번에야말로 밀라니아는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르베리안즈를 찬찬히 살폈다.

변한 건 한층 거대해진 날개만이 아닌 듯하다.

‘애가 더 이상하게 변해서 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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