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황가의 치부
“폐하께서는 당신의 병환이 자연스러운 세월의 흐름이라고 인정하고 계십니다.”
“그래?”
“많이 바뀌셨지요. 오래 사는 것보다 중요한 걸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재상을 쳐다보자 부연 설명 없이 싱긋 웃기만 한다.
“그럼 지금 황궁으로 가고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황궁이 아니라고?”
그 위치에 그 나이에, 쉽게 숙이기 어려운 무거운 머리일 텐데도 앞으로 쏟아질 것처럼 깊이 숙인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기 전, 밀라니아 님을 만나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셔서 그곳으로 모시는 중입니다.”
“……불충이지요.”
상황을 깨달은 밀라니아는 화를 내지는 않았다.
재상의 얼굴에 탐욕이 없었던 게 일차적 이유였고, 그가 황제의 명보다 우선하는 게 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마차는 황궁에 가기 전 멈추었다.
“그럼 저는 잠깐 다른 곳에 있다 오겠습니다.”
재상이 밝지 않은 얼굴로 내려가고, 밀라니아는 마차 창틀에 기대 관자놀이를 괴었다.
“나는 가만있는데 알아서들 움직이는군.”
“그래야지요. 최대한 편히 모셔야 하는 분 아닌가요.”
혼잣말이었는데 대꾸가 돌아왔다. 살짝 열려 있던 마차 문이 완전히 열리고, 검은 베일을 쓴 여자가 계단을 사뿐사뿐 걸어 올라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밀라니아는 콧잔등을 실룩였다. 어디선가 맡아 본 향이었다.
“한 손으로 바람을 부리고 땅을 뒤엎는다는 마녀들의 수장을 이리저리 움직이게 둘 수는 없으니.”
밀라니아는 제 앞에 앉은 여자의 베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재상이 황제뿐만 아니라 황후의 줄을 잡고 있었나 보구먼.”
조금 놀란 듯, 베일이 흔들렸다. 이내 장갑을 낀 손이 베일을 위로 걷었다. 얼굴을 드러낸 황후가 미소를 지었다.
“제 가문의 먼 친척이시죠.”
밀라니아는 그 말에 눈앞의 여자를 좀 더 자세히 살폈다.
재상의 여유로우면서도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가 아니라, 칼날이 박힌 것처럼 싸늘한 미소였다.
“닮은 것 같지는 않느니라.”
“고마운 분이시랍니다. 절 위해 대마녀께 찾아가 약까지 타 올 정도로요.”
밀라니아가 눈썹을 치켜올리자 늙어서 죽어 가는 남편을 뒀다기엔 지나치게 젊은 얼굴의 황후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서, 내게 바라는 게 무엇인고?”
“…….”
“더는 황제와 정력을 북돋는 약까지 쓸 정도로 사이좋은 관계가 아니라고는 들었느니라. 황제의 눈을 피해 말하고 싶은 게 뭔지 궁금하구나.”
“제가 가진 모든 건 대마녀님께 그다지 가치 있는 게 아니겠지요. 젊은 몸이나 돈, 황후라는 허울 좋은 신분 모두 말이에요. 보여 드릴 건 제 진심밖에 없어요. 호호. 제가 이런 유치하고 빈 그릇 같은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인간이 아닌 분을 상대하려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지 뭐예요?”
“…….”
“진심을 담아 부탁드려요, 대마녀님.”
“…….”
“황궁에 들어가시면 황제가 누군가를 치료해 달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황제가 아낀다는 사람 말이냐?”
“재상께서 말씀해 주셨군요.”
황후의 차가운 목소리에 밀라니아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황후가 손을 내렸다.
검은 베일이 사락, 떨어져 그녀의 얼굴을 완전히 가렸다.
“제가 부탁드릴 건 하납니다.”
“…….”
“치료하지 말아 주세요.”
밀라니아가 고개를 까딱였다. 베일로 인해 표정을 알 수 없음에도 황후가 짓고 있을 표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어 가게 내버려 두세요.”
“…….”
“그 여자.”
밀라니아는 손가락을 힘주어 구부렸다. 파티장에서 봤던 면면들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황후의 눈을 스쳐 지나갔던 경멸과 분노 또한. 그래서 그녀의 요구가 향하는 대상도 알 수 있었다.
‘앨리지를 죽여 달라 하는 것이냐.’
밀라니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황후의 증오와 경멸은 황제가 아니라 앨리지를 향해 있는 걸까?
이해할 순 없지만 머리로는 알 수 있었다. 마음을 배반당한 인간은 가슴에 분노를 품게 된다.
황제의 마음이 식고, 황후가 그에게 가진 분노가 증오가 되었다 해도 어려울 건 없었다.
수장을 제외하곤 반려라는 개념이 희박한 이종족들과는 다른 인간들의 독특한 점이니까.
황후의 말을 들어줄 수는 물론 없었다.
그녀의 요구는 밀라니아의 목표와 완벽하게 상충됨으로.
“맹약을 모르느냐?”
“깰 수 없는 맹약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요. 허나 제 부탁은 맹약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황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니까요.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제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무엇이든 해 드리겠어요. 그게 제 진심입니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밀라니아가 입을 뗐다.
“왜 황제가 아닌 그 애를 죽이려는 것이냐?”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라.”
“그렇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죠.”
“…….”
“그렇다면 그 여자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중요한가요?”
황후가 고개를 기울이자 베일이 살랑거렸다. 밀라니아의 눈동자가 무미건조해졌다.
“그래. 내게는 중요하도다.”
“그건 대마녀님의 호기심 때문인가요?”
밀라니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황후는 짧게 한숨을 쉬며, 대답 대신 베일을 벗었다.
완전히 드러난 얼굴을 확인한 밀라니아는 흠칫했다.
찬바람처럼 냉랭했던 황후의 눈동자가 온통 물기에 젖어 있었다.
얼굴은 비가 떨어진 것처럼 축축했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눈으로 황후가 말했다.
“그거 아세요? 여자는 배신한 남자만 증오하지 않아요. 그가 나를 배신하게 한 여자도 같이 증오하게 되죠.”
밀라니아의 머릿속에 앨리지와 황제의 모습이 흐릿한 잔상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오래지 않아 마차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황후의 존재감이 사라진다.
달칵.
“말씀은 잘 나누셨습니까?”
밀라니아는 눈을 뜨고 재상이 어두운 표정을 지우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앨리지는 황태자와 관계가 있다고 그러지 않았느냐?”
“대마녀님께서 관심을 태자 전하께 쏟아 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게 황제 폐하께서 원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
“이런 사정입니다. 당신이 잘못되실 경우 남겨질 사람이 걱정되어, 아들에게 맡긴다 하는……. 방금 보셨다시피 앨리지 님을 노리는 사람들도 있고요. 황제 폐하의 염려가 남다르십니다. 나름대로 애틋하기는 하나 그다지 아름답진 못한 이야기죠.”
재상이 가볍게 웃는 걸 빤히 바라보던 밀라니아가 툭 뱉었다.
“황제에 대한 불만이 꽤 있는 모양이구먼.”
뚝, 미소를 지운 재상이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폐하에 대한 존경은 진심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긴 세월 그분의 측근으로서 있지 못했을 테니까요. 다만, 다른 분도 중요한 것뿐입니다.”
“…….”
밀라니아는 15년 전 자신을 찾아왔던 재상이 어땠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겉으로는 황제를 위한 척 불사의 명약이니, 정력을 증진하는 약이니 떠들어 댔지.
알고 보니 그게 다 황후를 위한 거였다는 건가.
“난봉꾼 황제가 어린 여자를 부인으로 들이는 흔한 이야기인 줄 알았느니라.”
재상을 향해 밀라니아는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권력 지향형 가문을 등에 업고.”
“비웃는 솜씨가 수준급이시군요. 맞습니다. 흔한 이야기입니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기는커녕 더 짙어지고 거대해진 황후 폐하의 사랑을 제외한다면요.”
“그래서, 너 역시 네 딸 같은 황후가 황제에게 배신당한 데 대한 복수로 앨리지를 처리해 달라는 것이냐?”
“전에 말씀하셨죠. 앨리지 님을 치료하려고 하신다고요.”
“…….”
“그렇게 해 주십시오.”
밀라니아는 이건 또 뭐, 하는 심정으로 눈썹을 꿈틀했다.
“황후와 다른 말을 하니 내 혼란스러우니라.”
“전 그저 그분의 마음에 담긴 지옥 같은 분노의 불꽃이 갈 길을 찾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자리를 주선한 것입니다.”
“…….”
“황후 폐하의 마음은 진심이나, 그 마음과 소망이 옳은 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전 황후 폐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르안나 제국의 재상이라는 주요한 위치에 오른 저는 그럴 수 없지요. 그런 제 입장에서 앨리지 님은 살아 있어 주시는 게 좋습니다. 살아서 황태자 전하의 비가 되셔야죠.”
“…….”
“황태자 전하께서는 아마 폐하와 모종의 거래를 했을 겁니다. 앨리지 님을 비로 거두는 조건으로 뭔가를 얻어 내셨겠지요. 제 예상으로는 황위의 선양이 아닐까 싶습니다.”
“…….”
“하지만 선양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 그 전에 시간을 벌 수 있겠죠. 제 입장에서는 황태자 전하가 강력한 처가를 얻는 것보다 더 경계되는 건 없으니까요.”
“반역이라도 꾸미고 있는 게냐?”
“르안나 제국을 위해서입니다. 황제 폐하의 장자로 고귀한 혈통이시지만, 전 그분이 성군으로서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력이 뛰어나시니 대장군이 된다면 그 능력이 더 잘 쓰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분의 사상과, 그걸 이룰 수 있는 능력과 혈통은 이 르안나 제국에 너무나도 위험합니다.”
마차가 덜컹거렸다. 밖을 확인한 재상이 밀라니아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황궁에 도착했군요. 내리시죠.”
먼저 마차에 내린 재상이 턱을 괴고 있는 밀라니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밀라니아는 주름진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인간들은 참 신기하구나.’
육체적 젊음, 힘, 능력 모두 자신이 뛰어난데 보호받을 생각이 아니라 보호를 하려고 한다. 그게 시늉뿐일지라도.
인간들이 말하는 예의가 이런 건가 보다. 생각한 밀라니아는 꼭 인간들만이 그런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밀라니아 님?”
가만히 있는 밀라니아를 보며 고개를 갸웃한 재상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응?” 하며 고개를 든 재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주름이 모두 팽팽해질 정도로.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고 뒤로 넘어진 재상이 눈을 크게 뜬 채로 마차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나뒹구는 재상을 본 밀라니아는 진지한 얼굴로 ‘늙은 인간은 정말 둔하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차 위에서 뛰어내린 그레칸이 밀라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인다.
“밀라니아, 손.”
“응?”
“저 노인 손 말고 내 손을 잡아야 한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뒤로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는 재상을 바라보았다.
재상은 가슴이 벌렁대는 듯 가슴 부근에 손을 올리고 허어, 한숨을 쉬고 있었다.
“왜?”
“놀라는 것만으로도 죽을 수가 있는 가련한 생물체로다.”
밀라니아가 진지하게 충고하자 재상이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렴 어떻겠냐며 어깨를 으쓱인 밀라니아가 그레칸의 손을 붙잡았다.
그레칸은 기쁘게 웃으며 밀라니아의 허리에 팔을 감고 번쩍 들어 올려 조심히 땅에 내려놓았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올라가 있던 마차 위를 흘끗했다.
달그락달그락. 뒤늦게 마차 한 대가 덜컹거리며 멈추었다.
그레칸과 말란도르에게 타고 오라고 했던 그 마차가 쓸쓸히 도착한 것이다.
“편하게 저 마차를 타고 오면 됐잖으냐.”
“난 여기가 가장 편한데.”
밀라니아는 딱 봐도 불편해 보이는 마차 위를 유심히 살폈다가 그레칸에게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다.
“진정 천장이 편했단 말이냐?”
그레칸은 고개를 붕붕 흔들더니 밀라니아의 손을 꽉 붙잡았다.
“아니. 밀라니아의 곁. 그게 난 가장 편하다.”
마냥 좋다는 얼굴로 활짝 웃는 그레칸이다.
밀라니아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레칸의 해맑은 얼굴을 응시했다.
르베리안즈가 없어서 그런가, 요즘 그레칸이 웃는 얼굴을 유독 많이 보는 것 같다.
‘앨리지가 있어서 뭔가 달라질 줄 알았더니.’
그 반응이란 게 생각보다 밋밋해서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과연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게 효과가 있었던 건가, 심각하게 생각에 잠기려는 찰나.
밀라니아가 타고 온 마차 뒤꽁무니에서 뛰어내린 말란도르가 기가 막히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먼저 내리려고 내 신발을 갖다 버려?”
스산한 눈으로 말란도르가 그레칸을 노려보자, 그레칸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깜박거렸다.
“온갖 강직한 척은 다 한 주제에 이런 추잡한 머리도 쓰네. 의외성에 한 방 먹었어. 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 때문에 말란도르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미소처럼 보이지 않았다.
밀라니아는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듯했다.
‘그레칸이 장난질을 쳤는가 보구먼.’
밀라니아는 혀를 쯧쯧 차고는, 이걸 어떻게 요리할까 하는 시선으로 그레칸을 요리조리 쳐다보는 말란도르의 어깨를 툭 쳤다.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려무나.”
황궁으로 걸어가는 밀라니아의 곁을 그레칸이 착 달라붙었다.
“저 어린놈의 자식이…….”
그레칸의 뒤통수를 한참 노려보다가 말란도르는 은밀히 사기를 쏘아 보냈다.
보통의 인물이었다면 당장 걸음을 멈추고 시름시름 앓을 기운이었다. 그레칸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어깨가 뻐근한 듯 팔을 휘두르고, 다시 밀라니아를 쫓는다.
그것이 끝이었다.
“하. 기가 막히는군. 뭐 하는 놈이야?”
황제의 공간으로 들어서자 시녀가 밀라니아에게 다가와 뭔가를 내밀었다.
자주색 벨벳 받침대 위에 얌전히 올라가 있는 건 검은색 안대였다.
“무엇이냐?”
밀라니아는 시녀가 아니라 재상을 돌아보며 물었다.
황궁의 시종으로부터 얘기를 미리 전해 들은 재상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황제 폐하의 명이십니다. 지금 뵙는 분의 존재는 극비리로 하고 싶으시다고…….”
“그래서 이걸 쓰라?”
밀라니아가 받침대에서 검은 안대를 들고 흔들자 재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르륵.
밀라니아의 손끝으로부터 불꽃이 피어올랐다.
안대로 옮겨 간 불꽃이 순식간에 안대를 태웠다.
잘 교육받은 탓에 비명을 못 지른 시녀는, 대신 떨어질 것처럼 크게 뜬 눈으로 허공에 날리는 얼마간의 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밀라니아는 눈을 홉뜬 재상을 바라보며 손을 털었다.
“간이 큰 건 인정해 주겠노라. 감히 내게 눈을 가리라 한 놈은 처음이었느니.”
대상은 흩어지는 재를 응시하며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거, 찢어지지 않는 옷감을 사용한 걸 텐데 말입니다.”
“어쩐지 잘 안 타더군.”
“타는 거 자체가 이상한 일…….”
다시 한번 밀라니아가 2대륙의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한 재상이 몸을 부르르 떨다가, 몸을 돌려 걸어가는 밀라니아를 황급히 따랐다.
어느 정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후, 재상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부터는 황제가 허락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어서, 저는 출입할 수 없어요. 여기서 돌아가야겠군요.”
그가 멈추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얼굴로 들어가는 그레칸과 말란도르를 보고 재상이 당황해서 손을 들었다.
“아니, 아니, 다른 두 분도 들어가실 수 없어요. 저도 못 들어간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팔에 가로막힌 말란도르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레칸은 몸을 유연하게 틀어 재상의 팔을 피하고 밀라니아를 따라갔다.
기색을 눈치챈 밀라니아가 손을 턱, 직각으로 들었다.
“나만 들어갈 것이야. 그레칸 너도 돌아가서 쉬고 있으려무나.”
‘앨리지를 만나게 할 필요는 없느니.’
그레칸은 인상을 팍 찌그렸다.
“위험하다.”
“내가 황제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듯이 이쪽 역시 마찬가지니라. 걱정할 것 없느니.”
그레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납득하지 못하자 밀라니아는 걱정 말라는 뜻으로 그레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과거의 맹약은 쌍방향이니 걱정할 거 없도다.”
뚜벅뚜벅.
밀라니아가 시녀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그레칸은 그 자리에 서서 밀라니아가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았다.
곧 밀라니아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묘하게 시무룩해진 분위기로 그레칸이 몸을 돌렸다.
말란도르가 신기하단 눈으로 그레칸을 살피다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주인을 잃은 개 같군, 울프 보이.”
탁, 말란도르의 손을 사납게 쳐낸 그레칸이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끼었다.
눈을 감은 모습이 밀라니아가 나올 때까지 그렇게 기다리려는 듯했다.
“성질 또한 개 같고.”
휙, 휘파람을 분 말란도르는 그레칸과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재상은 돌아간 후였다.
사라진 밀라니아와 눈을 감은 그레칸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란도르는 미동 없는 그레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입술을 할짝인 그의 눈이 미묘하게 가늘어졌다.
“저놈, 멀쩡한 척하지만 어지간히 미친놈이 아니야. 그런 냄새가 나.”
* * *
황제의 밀실로 들어서자 밀라니아는 거대한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황제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의원으로 보이는 자가 그에게 이것저것 약을 건네자 그가 지친 눈을 뜬다.
밀라니아는 약을 먹는 황제의 앞으로 다가갔다.
황제는 놀라지도 않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왔느니.”
반말에 놀란 의원이 눈을 부릅뜨고 흠흠, 헛기침을 했지만 밀라니아는 태연하게 황제를 내려다보았고, 황제도 밀라니아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밀라니아는 아무도 없는 밀실을 둘러보았다.
“병자는 안쪽 방에 있소.”
다시 황제에게 고개를 돌린 밀라니아가 그의 혈색 없는 안색을 보고 말했다.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구나. 그대의 상태를 봐 달란 말은 하지 않느냐? 내 기꺼이 호의를 베풀 수도 있느니.”
“이 병환은 나을 수 있는 병환이 아니오. 아무리 대마녀라고 할지라도 세월의 흐름을 이겨 낼 수는 없지 않겠소?”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잠깐 기력이 돌아오는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 건강은 생각하지 않고 있소이다.”
“정력환을 요구한 것치고 의외로 상식적이구나.”
“이렇게 나이를 먹으니 이것저것 깨달은 것이 많소.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 말이오.”
허허, 웃은 황제가 문득 신기하단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대마녀는 짐보다 수배는 많은 세월을 살아왔을 텐데, 듣던 대로 세월의 흐름을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이구려.”
신기해하면서도 씁쓸한 황제의 눈빛에 밀라니아는 고개를 까딱였다.
“부러워할 것 없느니라. 나의 세월 역시 끝을 바라보는 중이니.”
“…….”
“병자에게나 안내하거라. 저기 있는 것이냐?”
아무것도 없는 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황제가 눈을 끔벅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의 부축을 받은 황제가 벽에 붙어 있던 촛대를 비틀자 벽이 양옆으로 열렸다.
“그렇소이다. 현재 내가 가장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여기 있으니.”
황제의 진정한 밀실은 바깥이 아니라 벽 안에 숨겨진 이 공간이었다.
바깥보다 공기가 한층 따뜻했고, 평소에 신경을 많이 쓰는 듯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발레리안과 유칼립투스의 향기까지 났다.
밀라니아는 그 향기 속에서 코를 톡 쏘는 독특한 약초 냄새를 맡았다.
황제는 커튼이 길게 드리워진 한 침대 앞에서 멈추었다.
커튼 때문에 안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는 구조였다.
밀라니아가 안대를 쓰지 않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상대방의 정체를 감추려는 듯했다.
밀라니아가 앨리지를 안다는 것을 황제가 모르기 때문에 하는 노력이었다.
‘쓸데없는 짓이거늘.’
“궁금한 건 하나요. 고칠 수 있는가, 없는가.”
황제의 말을 흘려들으며 밀라니아는 침대 밖으로 나와 있는 가느다란 팔을 내려다보았다.
황제의 시선이 느껴졌다. 밀라니아는 이를 꽉 물었다.
흥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느라 퍽 힘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앨리지!’
황제는 수심 어린 눈이었다. 밀라니아는 기뻐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부러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가락에 앨리지의 따뜻한 손목이 닿자 마음이 오싹했다.
이런 식으로 아무 문제 없이 앨리지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을 줄이야.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있을까!’
밀라니아는 황제의 관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앨리지의 상태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더 좋지가 않구먼.’
대마녀의 심장, 자신의 생명이 아니라면 스무 살에 죽는 운명인 앨리지였다.
스무 살이 넘는 지금 살아 있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건만, 이래서야 1년도 채 살지 못할 것이다.
“기절한 게냐?”
“자고 있소. 며칠 동안 눈을 붙이지 못한 상태라 기절한 상태나 마찬가지오.”
“…….”
“이 아이 말이야.”
황제는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다.
“그게 왜 궁금한 것이오?”
“개인적인 궁금증이다.”
“그러면…….”
“그래도 대답해 줬음 좋겠구나.”
아무래도 그렇다면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려 했었던 듯 황제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인간이 아니거늘.”
그러니 민망해하지 말라는 뜻에 황제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정력환.”
“크흐흠, 굳이 그렇게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지 않겠소. 어쨌든 당신에게서 받아온 약을 먹은 이후로 내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오.”
“효능이 워낙 좋은지라 같은 약을 만들기 위해 재능 있는 연금술사와 약사를 발굴하는 일에 힘을 썼소.”
“내게서는 계속 약을 받아 가는 한편 뒤로는 비슷한 약을 만들려고 했다라는 뜻이로구나.”
“제국의 위대한 문명의 바탕은 인간의 모방력이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당당한 체하는 황제의 말에 밀라니아는 코웃음을 쳤다.
“어쨌든 이 아이는 그때 만난 아이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 이 아이를 거둔 가주가 죽고 나서는 그 재능을 후원하기 위해 내 곁으로 불러들였는데, 어려서부터 몸이 안 좋아 약을 먹여 치료했었소. 커서는 내 주치의로 일했고.”
뛰어난 약사, 하면 요정족만 한 존재가 없을 것이니 앨리지를 향한 황제의 욕심이 이해가 간다.
밀라니아는 앨리지의 손톱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손톱으로도 가벼운 질병을 치유할 수 있을 테니까.’
대마녀인 그녀가 피로써 치유력을 쓴다면, 앨리지의 경우엔 신체 그 자체를 사용한다.
문득 소매 안쪽으로 보이는 손목에 시선이 갔다. 불긋한 자국이 보인다.
밀라니아는 대번에 그 상처를 분석할 수 있었다. 피를 짜낸 흔적.
밀라니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 파티장에서도 이렇듯 온몸을 가리는 드레스를 입고 있지 않았던가?
요정의 몸이 이리 엉망진창이라는 건 하나를 추측할 수 있다.
“누구냐?”
“뭐가 말이오?”
“이 아이가 치료하고 있는 자를 묻는 게야.”
날카로운 눈으로 밀라니아가 황제를 쳐다보자, 놀란 그의 눈빛이 깊이 침잠했다.
“어떻게 아시었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라.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네가 이 아이의 희생을 발판 삼아 생을 연명하려고 하진 않았을 것 같고.”
“…….”
“누구인 것이야?”
밀라니아는 앨리지의 상태에 지나치게 날카로워진 스스로를 깨달았다.
죽으면 큰일 난다는 생각이었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럴 리가 없는데.
‘앨리지가 이런 식으로 죽을 리 없지.’
놀랄 필요가 없어진 밀라니아의 표정이 심드렁해지자 순식간에 풀어진 분위기에 어리둥절한 황제는 이내 한숨을 쉬었다.
“연인이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해하지 마시오. 내가 아니니. 이 아이는 연인을 위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다가 이렇게 병세가 심각해진 것이오.”
밀라니아는 황제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잠깐 침묵했다.
“그대가 이 아이의 연인이 아닌 건 확실하느냐?”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밀라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잠깐, 누가 그런 말을 했소이까?”
“그대 부인이.”
“아아…….”
알겠다는 듯 변한 황제의 표정이 묘하게 흐려졌다. 씁쓸하면서도 아릿한 얼굴.
“황후를 만나셨소?”
“…….”
“그건 사실이 아니오. 내가 딸처럼 키운 아이요. 사랑하기는 하나 그건 남녀 간의 정이 아니지. 그런 의심을 받는 것만으로도 매우 불쾌한 심정이란 걸 알아주시오.”
“황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지 않느니라. 그건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그건……. 하아, 그녀의 오해요. 내가 속 시원히 밝히지 못하고 있으니 그렇게 오해를 하는 것이겠지만. 다 내 잘못이오. 따지고 보면 그렇지. 그녀는 잘못이 없소. 내 잘못이오.”
“…….”
“어쨌든 사실이 아니오. 이 아이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소.”
무슨 사정이 있는 듯 황제의 얼굴이 울 것처럼 울적해졌다.
후우, 깊게 한숨을 쉰 황제가 우울한 눈으로 침대를 응시했다.
“치료하실 수는 있겠소?”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느니.”
“…….”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앨리지의 병은 평범한 방법으로는 치료할 수 없다.
오직 비슷한 근원을 갖고 있는 대마녀의 생명을 바쳐야지만 살릴 수 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에 황제가 의아하게 물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는 말은.”
“치료가 가능한 시기가 있느니라. 지금은 이 정도로만.”
그러고 밀라니아가 커튼을 젖혔다.
촤아악.
“잠깐, 지금 뭐 하는……!”
황제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밀라니아는 드러난 앨리지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뭐 하는 것이오?”
“놀랄 것 없느니라. 밀실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이 아이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느니.”
“그래. 당연하지 않느냐? 내가 이 땅을 밟은 이유이니.”
뒤를 힐끗하자 황제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홱 고개를 돌린 밀라니아는 손목에서부터 피를 내어 그 피를 앨리지에게 먹였다.
그림자가 진 앨리지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밝아졌다. 그래도 여전히 창백한 낯색이었지만.
황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임시방편이기는 하나 당분간은 이걸로 버틸 수 있을 것이야.”
“이제는 어떤 약을 써도 소용이 없었는데…….”
아연하게 중얼거리는 황제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한 밀라니아가 몸을 돌렸다.
‘앨리지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오늘은 이걸로 됐느니.’
당분간은 앨리지를 주시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 될 터였다.
“그럼 난 돌아가야겠구먼.”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밀라니아는 앞을 가로막은 황제를 바라보며 눈썹을 까딱였다. 황제는 다소 절박한 얼굴이었다.
“한 사람.”
“…….”
“한 사람 더 봐 줄 수 있겠소?”
밀라니아의 눈썹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황제는 밀라니아를 좀 더 깊은 곳까지 안내했다.
앨리지처럼 검은 커튼이 옆으로 젖혀진 침대 위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밀라니아는 황제의 간절한 눈빛에 따라 남자에게로 걸어가 핏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손목을 쥐었다.
밀라니아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치유가 가능하오?”
황제가 초조한 목소리로 묻자 밀라니아는 고개를 미약하게 저었다.
“아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이로구나.”
이 정도의 병마라면 아무리 그녀라도 모든 생명력을 다 쏟아부어야 할 것이다.
그건 자신뿐만 아니라 앨리지 역시 마찬가지일 터. 병마가 잠식한 몸으로는 불가능하다.
문득 밀라니아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이 자는 누구인고?”
적잖이 실망한 듯 황제가 수 년은 더 늙은 것 같은 지친 얼굴로 말했다.
“내 아들 되오.”
“…….”
“아는 이가 한 손에 뽑을 정도이니, 부디 귀하께서도 비밀을 지켜 주길 바라겠소.”
밀라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언젠가 재상에게 듣기로, 황제의 자식 중 사내는 둘뿐이었다.
첫 번째로 들인 황후의 아들인 황태자와, 현 황후가 낳은 2황자.
다가올 황위 쟁탈전의 두 주인공.
“자식은 둘뿐인 걸로 알고 있거늘, 아들이 또 있었느냐?”
“나도 알게 된지 몇 년 되지 않았소이다. 입 밖으로 내기엔 민망한 일이지만 말이오. 기탄없이 말씀드리겠소. 내가 황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오. 아끼던 여인이 있었는데, 고향에 가겠다고 날 떠났지. 난 그녀가 황궁을 나간 후 아이를 낳은 줄도 모르고 있었소.”
“…….”
“당신이 1대륙의 존재라 다행이오. 분란의 씨앗이 될 황자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인물이라, 비밀에 부쳐야 나라가 평화로울 수 있다오.”
“황태자는 알고 있나?”
“알고 있소. 이 아이는 오래 살지 못해 황위와는 연이 없으니, 살려 달라고 내 직접 부탁까지 했다오.”
“…….”
“앨리지를 거둬 달라고도 했지. 알고 있다시피 황후가 그 아이를 노리고 있거든. 태자의 곁에 있게 된다면 당분간 목숨은 보전할 수 있게 되겠지. 그 대가로 선양할 것을 약속했고.”
밀라니아는 황제의 아들에게 남은 생명력을 가늠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이었으나 이상하게 숨을 유지하고 있다. 이내 그것이 앨리지의 치유력 덕분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