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황제의 주치의, 앨리지 에버리젠
들려오던 속삭임이 딱 멈추었다. 밀라니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황태자와 앨리지가 내려왔던 방향에서, 십여 명의 가신을 대동한 황제가 걸어왔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황제의 곁에 딱 붙어 입술을 빠르게 달싹이고 있었다.
‘마법사인 것 같은데?’
딱.
손가락을 튕기자 속삭임이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크게 들려왔다.
“……방금, 기의 파동을 느꼈습니다. 인간이 아닌 자가 섞여 들어온 것 같습니다.”
“누군지 찾을 수는 없나?”
“사람이 워낙 많아 탐지 마법을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요.”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곳에서 온 자겠지요.”
그들이 가리키고 있는 건 밀라니아였다.
앨리지를 만난 흥분을 가누지 못한 그 순간, 존재가 노출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짧은 시간 그걸 감지하다니 노인도 보통 실력자는 아니었다.
밀라니아는 흐음, 목을 울리며 노인을 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법사란 범인들은 손댈 수 없는 힘을 다룰 수 있으므로, 그의 몸에 가득한 마나의 냄새를 맡는 건 밀라니아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탐지 마법에 의지하는 마법사들이 자신을 알아채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만 말이다.
황제의 눈짓을 받은 마법사가 2층 계단 난간 앞에 선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에선 꽤 유명한 마법사인 듯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마법사가 날카로운 눈으로 주욱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시선은 밀라니아에게도 닿았지만, 곧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거리낌 없는 표정으로 마법사를 바라보고 있던 밀라니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결국 수상한 자를 발견하지 못한 마법사가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그레칸은 밀라니아를 따라 계단 위를 보고 있었다.
“황제와 그의 전속 마법사이니라. 처음 보는 얼굴이라 넌 잘 모르겠지만…….”
“힘없는, 뭐?”
[인간은 알다가도 모르겠군.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도 힘없는 살덩이를 휘두르고 싶어 하다니.]
밀라니아는 눈썹을 미묘하게 찌푸렸다.
이래서 어린 개체 앞에선 말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줄은 몰랐느니라. 잊어버리거라.”
“왜?”
“어허.”
밀라니아는 말없이 씁, 숨만 들이켜 보였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레칸이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축배사를 던졌다.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었음을 확인한 사람들이 손에 든 술을 들이켰다.
“힘이 없어 보이기는 하다.”
밀라니아는 인상을 썼다.
‘이놈이, 잊어버리래도.’
술잔의 술을 모두 들이켠 말란도르가 뭘 모른다는 양 손가락을 흔들었다.
“저 정도면 나이에 비해 정정한 거다, 울프 보이.”
“다시는 그따위 호칭으로 날 부르지 마라. 변태.”
“피차일반이야, 울프…….”
“크르르.”
달콤한 분홍색 술을 홀짝이며 코사도 말란도르의 말에 동의했다.
“맞아요. 저희 황제 폐하는 정정하신 편이죠. 젊었을 때는 황도의 모든 여자들을 울리셨다는 전설로 유명하시기도 하셨는데요! 지금은 나이가 좀 드셨긴 하지만 아직도 스타일 좋고 매너가 세련되셨답니다.”
황제에게 퍽 호의적인 코사의 말에 밀라니아는 시큰둥한 표정이 되었다. 그레칸은 눈썹을 까딱였다.
“그래 봤자…….”
그가 할 말을 알 것 같아 밀라니아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만, 그레칸.”
“응?”
“하려던 말 집어넣거라.”
코사 앞에서 힘없는 살덩이 운운했다가 황제 모욕죄로 얽히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프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코사를 흘끗한 그레칸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첫 춤을 추기 전 소자가 한마디 올려도 되겠습니까?”
막 활기를 띠려는 분위기에서 손을 든 사람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남색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뒤로 쓸어 넘긴 사람.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품 있는 남자는 바로 황태자였다.
“태자, 지금 이 자리는 화목을 도모하기 위한 자리라는 것을 기억하라.”
황제의 엄중한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황태자가 계단을 걸어 올라가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기대 어린 시선을 받은 황태자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다들 즐길 준비가 되신 것 같소. 이런 상황에 말을 길게 하는 건 딱 욕먹기 좋을 짓이지.”
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은 없소. 다만 친구들도 그렇고, 친지들도 자꾸 문의를 주시는 게 있어 이 자리에서 발표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여 잠시 시간을 축내게 되었소.”
요즘 황태자에 대한 문의라고 하면 황태자비와 관련된 것밖에 없다.
사람들, 특히 젊은 여자와 그들의 가족들이 눈을 반짝였다.
황태자가 뭐라고 하든 말든, 장내의 분위기가 술렁이건 말건 밀라니아는 시종일관 앨리지를 관찰했다.
앨리지는 황태자가 딛고 선 계단보다 두 계단 아래에 서서 손을 맞잡고 있었다. 시선은 황태자가 아니라 바닥을 향했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듯 낯빛은 여전히 창백했다.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는 좀 다르구먼.’
전생에서 그녀를 봤을 때보다 1, 2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다. 그때는 병색 때문에 아프기는 해도 마냥 귀여운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풍파를 견디고 있는, 작지만 단단한 나무 같은 기운이 풍겼다.
전과 달리 귀족 가문에 입양된 것 하며, 이런 곳에서 만나는 것까지 의외의 일투성이다.
‘변한 거라고는 내가 재상의 일을 받아들여 정력환을 만든 것뿐이거늘.’
미래는 작은 변수 하나, 심지어 아침에 물을 먹은 것 같은 사소한 새로운 거 하나에도 바뀔 수 있다.
‘황제에게 약을 만들어 준 것이 앨리지에게 무슨 영향을 미쳤는고?’
앨리지가 황제의 주치의라는 수군거림에 밀라니아의 생각이 닿았다.
‘나를 향한 호기심이 앨리지에게 향했다든가?’
“자, 다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아는 것 같은 표정이오. 내가 다른 말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이제 그만 황태자비를 맞이하려 하오.”
황태자의 선언에 웅성거림이 커졌다.
누군가는 실망의 탄성이었고 소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탄식을 흘렸다.
대부분은 놀란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앨리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제야 호기심이 생긴 밀라니아는 황태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좌중을 훑어본 황태자가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내 신부를 맞이하는 건 미래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한 터. 미적거리는 것보다는 빨리 발표하고 진행하는 게 좋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오.”
웅성거림이 착 가라앉았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황태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미래를 함께할 여인은 바로 오늘 내가 에스코트한 요정처럼 아름다운 사람……. 이런, 이렇게만 말했는데도 다 눈치챈 얼굴이오. 더는 시간을 끌 필요 없을 것 같군.”
황태자가 고개를 돌렸다. 앨리지가 있는 방향이었다.
시선이 집중된 앨리지가 딱딱하게 굳어졌고, 황태자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벌써 번식을 할 만큼 진전된 사이라는 건가?”
인간들에게 결혼이란 제도가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밀라니아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앨리지를 보고 밀라니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왜 저런 얼굴이누?’
황태자는 기뻐하지 않는 앨리지를 보면서도 손을 거두지 않았다.
건조한 회색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어진 앨리지를 품었다.
쐐기를 박겠다는 듯 그의 권위적인 입술이 분명하게 움직였다.
“내 아내가 될 여자는 에버리젠 남작의 따님이자 놀라운 의술 실력으로 유명한 명의, 앨리지 에버리젠이오.”
밀라니아는 상반된 표정을 짓고 있는 황태자와 앨리지를 확인하고, 고개를 돌려 황후와 황제를 찾았다.
살짝 눈을 크게 떴던 황제는 복잡한 표정이었고 황후는 미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려던 많은 이들이 황후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한미한 가문 출신의 황태자비. 과연 황후가 상황을 기꺼이 여기는 걸까, 의구심이 번졌다.
언뜻 불쾌한 기색이 싸늘한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무엇인고?”
그레칸이 밀라니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앨리지가 등장했을 때, 잠시 홀린 것처럼 그녀를 쳐다본 이후 그레칸의 시선은 밀라니아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밀라니아는 흥미롭다는 듯 불가해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앨리지와 황후, 모두.”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다.”
“그건 네가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야.”
그레칸은 부정하지 않았다. 밀라니아는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숨겨진 사정이 있는 모양이구먼.”
머리를 굴리다가 밀라니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레칸이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나는 복잡하지 않아.”
“그래, 그래.”
밀라니아가 대충 대꾸하자 그레칸의 표정이 불만스러워졌다. 말란도르가 낄낄거리며 비웃었다.
그레칸이 말란도르를 향해 으르렁거리건 말건 밀라니아는 현 상황으로 변화할 것들을 생각했다.
‘앨리지가 결혼을 받아들인다면, 황태자비가 되는 것인데. 대체 어떻게 되려는 게냐?’
그때였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크게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밀라니아는 황태자의 손을 거부하는 앨리지를 볼 수 있었다.
“싫어요. 저는, 저는…….”
입술을 깨문 앨리지가 황태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초록색 눈동자가 눈물로 습해졌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앨리지가 입을 열었다.
“저는 황태자 전하와 평생을 함께할 수 없어요.”
그녀가 선언하는 순간,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보다 극적인 순간이 없으리라는 것을 모두가 직감했다.
황태자의 청혼을 한낱 하위 귀족의 수양딸이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런 치욕스러운 상황을 맞이한 황태자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러나 앨리지를 향해 노성을 터뜨린 건 얼굴을 굳힌 황태자가 아니었다.
“앨리지 에버리젠!”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황제였다.
황제의 노기 어린 얼굴을 확인한 밀라니아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뭐지? 황제가 나설 타이밍이 아닌데.’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과 달리 황태자와 황후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황후는 비웃기까지 하며, 어린 아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 상황과 자신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기라도 한 태도였다.
앨리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창백했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녀가 이 자리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걱정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쓰러진 건 앨리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분노를 터뜨린 황제의 얼굴은 여전히 붉은 채였고, 심지어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었다.
결국 황제가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켰다.
경련하는 손에서 떨어진 잔이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깨졌다.
피처럼 붉은 와인이 황금색 바닥 위로 번져 나갔다.
“폐, 폐하.”
앨리지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황제가 쓰러지기 전 달려든 근위 기사들이 황제의 몸을 부축했다.
나이가 꽤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풍채 좋은 황제를 부축하는 데는 근위 기사가 둘이나 달라붙어야 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황태자가 날카롭게 묻자 마법사가 당황한 얼굴을 숙였다.
“무리하시어 몸 상태가 나빠지신 듯합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 일이 아니라는 듯 무관심했던 황후가 굳은 표정으로 앨리지를 재촉했다.
“앨리지 에버리젠. 자네는 폐하의 주치의잖나. 어떻게 좀 해 보게.”
근위 기사와 마법사를 비롯한 사람들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앨리지를 응시했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서 있는 앨리지의 손이 달달 떨렸다.
그녀의 시선은 황제에게 못 박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있는 그녀가 이상한지 누군가 속삭였다.
“분위기가 영 이상하지 않아? 폐하와 에버리젠 영애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낭설이 설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하지만 황후 폐하의 표정을 봐. 앨리지 영애를 잡아먹을 듯 보고 계시는데.”
밀라니아는 이런 상황에서도 관심 없는 얼굴로 있는 그레칸을 힐끗했다.
앨리지가 처음 나타났을 때 보였던 경악과 달리 담담한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니라.”
그레칸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병마가 이미 깊이 그녀를 파고들었으니, 약해진 몸으로는 치유의 힘을 쓸 수 없는 게야.”
피, 신체, 신체를 구성하는 모든 것, 생명을 기반으로 하는 치유술은 행하는 것만으로도 몸에 무리가 된다.
“그런 상태에서 저 지경의 황제를 치유하는 건 매우 어려울 것이야.”
밀라니아는 고통스러운 표정의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생명의 심지가 흔들리는 것이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그 손이 황제에게 닿기 직전, 황제가 몸을 뒤로 물려 그녀의 손을 피해 냈다.
“폐하!”
치료하길 거부당한 앨리지가 눈을 크게 뜨자 황제는 눈을 지긋하게 감았다가 떴다.
자신을 부축하는 근위 기사를 밀어낸 황제는 어느덧 고통스러운 기색이 사라진 평소의 신색을 되찾아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그래. 괜찮아. 괜찮아. 호들갑 떨지들 말게.”
황제가 그렇게 말하자 사람들의 얼굴에 안도가 퍼졌다. 그러나 밀라니아는 황제의 관자놀이에 곤두선 핏줄을 놓치지 않았다.
황제는 황제라고, 고통을 숨긴 얼굴은 퍽 근엄했다.
다른 이로 하여금 황제가 정말로 괜찮아졌나 보다고 착각할 만큼 능숙한 표정 관리였다.
‘황제의 자리를 거저 유지한 건 아니라는 것이니라.’
곧 죽을 인간이 고통을 숨기면서까지 아등바등하는 걸 지켜보는 건 꽤 묘한 기분이었다.
인간은 복잡하지만 지켜보기 나쁘지 않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렀다.
근방에 있던 귀족 남자가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밀라니아를 응시했다.
밀라니아는 언제 휘파람을 불었냐는 양 뚝 시침을 뗐다.
이 상황에서 무슨 휘파람? 하고 반신반의하던 남자는 곧 밀라니아의 아름다운 얼굴에 넋이 나가 의문을 잊었다.
“으르르릉.”
사납게 목을 울린 그레칸이 남자의 시야를 차단하고 밀라니아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밀라니아는 근위 기사들과 함께 황제를 부축하는 재상과, 황후와, 황태자와, 앨리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가만있자.’
“이게 무슨 상황인고?”
혼잣말에 답변이 돌아왔다.
“아마도 복잡한 상황?”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말란도르가 밀라니아를 부둥켜안았다.
그의 힘에 떠밀린 그레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간들 얼굴 좀 봐.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네.”
“…….”
“밀라니아, 말란도르는 이런 치정 싸움 무서워.”
짐짓 흥미로워하는 투로 말하면서도 말란도르는 고개를 앞으로 쭉 빼고 황제의 가족을 반짝이는 눈으로 응시했다.
완벽한 언행 불일치에 밀라니아는 한심한 얼굴로 혀를 쯧쯧 찼다.
* * *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잠이 들락 말락 했던 밀라니아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위화감에 슬그머니 눈을 떴다.
시선을 몸으로 옮겼다. 이불이 기괴한 모양으로 불룩, 솟아올라 있었다.
마녀성에선 매일 밤마다 있었던 일이어서, 밀라니아는 놀라지 않았다.
이불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밀라니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밀라니아는 이불 밖으로 튀어나온 그레칸의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었다.
“궁금한 게 있어. 밀라니아.”
“말해 보거라.”
“……어떻게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여자가 꿈에 나타날 수 있는 거지? 살아 있는 여자라고는 생각 못 했다.”
곧바로 앨리지를 떠올린 밀라니아가 천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주변에 무관심한 그레칸이 지금까지 곱씹고 있는 사람.
역시, 그레칸에게 앨리지를 만난 일은 보통의 일이 아니었던 걸까.
‘당연한 일이니라. 그레칸이 앨리지를 사랑하게 되는 것 또한 이 세상이 정한 운명일 테니.’
“그 여자, 마법사인가?”
“마법사는 아니란다. 순수한 인간도 아니지만.”
“…….”
“눈치챘느냐?”
무덤덤한 그레칸의 반응이 이상해 묻자 그레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까만 머리카락이 밀라니아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응. 냄새가 달라. 그 여자에게선 달달한 냄새가 났어. 꼭…….”
“나무 열매처럼?”
“응.”
“그래…….”
그레칸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허리에 달라붙은 그레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던 밀라니아가 한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앨리지를 봤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
“응?”
“앨리지에 대해 궁금해했지 않니. 무슨 생각을 했냐는 말이다.”
그레칸은 곧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그 여자…… 이상해.”
“왜?”
“분명 처음 보는 여자인데, 지켜 줘야 할 거 같았어.”
밀라니아는 품으로 더 파고드는 그레칸의 어깨를 어정쩡하게 끌어안았다.
“이건 뭐지, 밀라니아?”
“…….”
“밀라니아는 모르는 게 없잖아.”
밀라니아는 이걸 말해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밀라니아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이불 속에서 그레칸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 순간, 밀라니아는 대답해도 문제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느니.’
“사랑이도다.”
“뭐?”
“네가 박애주의자도 성자도 아니거늘. 아무 관련 없는 자를 괜히 지켜 주고 싶겠느냐.”
“…….”
“앨리지가 네 마음에 들었나 보구먼.”
‘사육했던 시간이 헛것은 아니었구나.’
밀라니아의 마음을 차지한 생각이었다.
그레칸이 앨리지를 마음에 품어도, 무작정 자신을 공격하지는 않겠지.
밀라니아가 마음 편하게 대꾸해 주자, 그레칸의 눈빛이 흔들렸다.
밀라니아는 그의 반응을 대수롭잖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내일은 또 할 일이 있으니 얼른 자거라.”
“사랑이 뭔데?”
눈을 뜨지 않은 채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의구심 섞인 본질적인 질문을 귀담아 들었다.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 왜 밀라니아가 그런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 말을 듣는데 기분이 왜 이상해지는지도 모르겠다.”
“…….”
“대답해 줘. 밀라니아는 모르는 게 없잖아.”
모르는 게 없다니.
물론 천 년을 살아왔으니 아는 게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레칸이 묻는 건 하필이면 ‘사랑’의 본질이었다.
밀라니아는 그녀에게 ‘사랑은 이런 거예요.’라고 말해 주었던 이들의 말을 되짚어 보았다.
“지켜 주고 싶은 것이니라.”
“…….”
“맛있고 좋은 것만 먹여 주고 싶은 마음이고, 또…….”
“…….”
“내가 아프더라도 사랑하는 상대는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느니라. 희생하는 행위는 사랑하는 상대에게만 기꺼이 할 수 있는 것이야.”
“…….”
밀라니아는 금방 흥미를 잃었다.
모르는 것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니만큼 길게 주절댔지만, 말이 길어지니 특유의 게으름증이 돋아난 것이다.
“더 듣고 싶다.”
눈치 없는 요청에 밀라니아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하는 수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항상 같이 있고 싶고, 싫은 것도 사랑하는 상대와 같이 하면 즐거우며, 잿빛 하늘도 화창해 보이고, 뭘 먹어도 맛있어 보이고, 꽃잎이 날아다니고 뭐, 그런 환상을 보는 것인가 보더구나.”
끝으로 갈수록 대충 주절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잠기운이 묻어 나왔다.
더 설명하길 포기한 밀라니아에게서 오래지 않아 규칙적인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조심스럽게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곁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향이 콧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고, 밀라니아가 한 모든 말을 머릿속에 꼭꼭 새겨 두었다.
새겨 둘 수밖에 없었다.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익숙한 설명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사랑이라고?”
대답은 없었다.
밀라니아의 곤히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레칸이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고요한 방에 죽음 같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상하다, 밀라니아.”
“…….”
그레칸의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방 안에 쓸쓸히 번져 나갔다.
* * *
다음 날, 밀라니아는 체라의 패밀리어, 노란색 카나리아로부터 앨리지에 대한 보고를 듣고 있었다.
{울고 있어요.}
“울고 있어?”
카나리아는 밀라니아가 쓰다듬어 주는 것이 좋은지 둥그스름한 머리를 손가락에 비벼 대며 부리를 벌렸다.
{계속 쓰다듬어 주세요, 대마녀님.}
“그래.”
{헤헤, 좋아요, 좋아. 아, 맞아요. 요정 아가씨는 울고 있어요, 계속 계속. 내내 울고 있어요. 울고 있어.}
“흠?”
밀라니아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앨리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이미 상당히 진행된 병마로 인해 창백한 얼굴이 더 창백해져서는, 황제의 건강을 걱정하는 듯했다.
고민에 잠긴 밀라니아를 그레칸과 말란도르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밀라니아…….”
그레칸이 시무룩한 얼굴로 이름을 부르자 포도 한 송이를 입으로 가져가 한 알을 입술로 떼먹던 말란도르가 흐응, 웃음을 흘렸다.
“밀라니아, 지금 앨리지의 치정 사건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치정 사건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느니.”
중얼거린 밀라니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그레칸도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 일어났다.
말란도르는 의자에 눕듯이 앉은 상태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야릇하게 웃었다.
“복잡한 치정물 냄새가 풀풀 나는데, 왜. 황태자란 놈과 앨리지는 일단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모종의 계약이 있다면 모를까. 그 상황의 분위기로 보건대 황제와 황태자 사이의 계약이지 않을까…….”
말꼬리를 늘인 말란도르는 밀라니아에게 눈을 찡긋했다.
“싶은데?”
밀라니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어디 가?”
“앨리지를 만나야겠구나.”
지금의 앨리지가 이전에 만났던 순수 그 자체인 앨리지와 다르다는 것은 밀라니아도 익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확인해야 한다.
‘무엇이 변했는고.’
그리고 그것이 과연 전생에서의 인연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밀라니아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가던 걸음을 멈칫한 밀라니아가 새끼 새처럼 따라오는 그레칸을 힐끗했다.
그레칸이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밀라니아는 그녀가 왜 쳐다보는지도 모르면서 눈이 마주친 게 좋다고 환하게 웃는 그레칸을 보며 답을 도출해 냈다.
‘운명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는 겐가.’
그렇다면 하늘의 별도 따다 줄 것처럼 굴던 그레칸의 앨리지에 대한 반응이 미지근한 것도 이해가 가는 일.
아직 르베리안즈의 반응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이 상태라면 나쁜 일은 아니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역시 그녀가 왜 웃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레칸이 더 밝게 웃었다.
‘지긋지긋한 회귀가 끝날 날이 머지않았느니라.’
힘차게 걷다가 문을 앞두고 마지막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양발이 모두 땅에 닿고, 문고리를 잡는 순간 밀라니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심장에서부터 타오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흡.”
밀라니아의 이마와 관자놀이에 두꺼운 힘줄이 올라섰다.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밀라니아가 멈추자 의아해하던 그레칸과 말란도르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밀라니아.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불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밀라니아는 눈을 지긋하게 감았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뜨거웠던 심장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문고리를 꼭 붙들고 다른 손으로 심장 부근을 더듬거렸다.
언제 아팠냐는 양 멀쩡히 뛰고 있지만, 불구덩이에 처박힌 것처럼 뜨거웠던 감각이 손끝에 만져지는 것 같았다.
‘설마.’
밀라니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허리를 펴고 그레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의 굳었던 얼굴이 다소 완화되는 것을 보며 그녀는 옆을 흘끗했다.
평소와 달리 말란도르가 조용했다. 가라앉아서 까맣게 보이는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파?”
말란도르가 조용하게 물었다.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자신의 끝이 머지않았다는 걸 알고 있는 말란도르에게 숨겨 봐야 의심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가 너무나도 태연해 보여, 말란도르는 화가 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전조일 뿐이야. 별거 아니니라.”
그레칸과 말란도르, 둘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도 마냥 태연하지는 않았다.
설마 지금이 영면하는가 싶어 순간적으로 긴장했던 밀라니아는 안도했다.
통증이 금세 내려앉은 걸 보니 지금 당장은 아닌 듯했다.
‘지금은 안 되느니라.’
영면을 바랐지만 그 타이밍은 지금이 아니다.
영면이 다가온 시점, 그때에 눈앞에는 앨리지가 있어야 했다.
혹여 무슨 사정이 생겨 앨리지의 사랑이 바뀌었더라도 자신의 목표는 달라지지 않는다.
자신이 죽은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므로, 적어도 앨리지의 병은 고쳐야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밀라니아의 말에 말란도르가 입술을 비틀었다.
“지금 이 상황에 너…….”
분노한 말란도르가 거칠게 말을 토해 내려는 참이었다.
“계십니까?”
밀라니아는 말란도르에게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한 손을 올리고,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검은 모자와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남자가 반듯이 서 있었다.
“누구인고?”
처음 보는 인간이었다. 뒤에는 사두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밀라니아는 황실의 문장을 단 마차를 확인하고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황제 폐하께서 초청하셨습니다.”
“……나를?”
파티장에서 얼굴을 맞대고 인사 한 번 하지 않은 자신을 황제가 어떻게 알고 부른단 말인가?
밀라니아는 이 뜻밖의 부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잠시 잠깐 고민했다.
“재상 각하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약초를 잘 다루시는 치료술의 대가시라고요.”
“그래서?”
“특별히 의견을 구하고자 하십니다.”
밀라니아가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자 남자가 마차를 가리켰다.
재상이란 말에 밀라니아는 발을 떼고 움직였다.
황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에 다가가자 마부가 정중히 문을 열었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과연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재상이 주름진 입술을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밀라니아가 마차에 올라타 맞은편에 앉자마자, 마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황궁의 파티를 방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되었느니라.”
“제가 먼저 말씀드리고 자리를 마련했어야 했는데 한발 늦었네요.”
죄송스러운 얼굴을 하는 재상을 보는 밀라니아는 덤덤했다.
반응이 없으니 재상은 큼큼 괜히 헛기침을 하고는 진지한 눈을 했다.
“황제가 날 왜 부르는 것인고?”
“폐하께서는 밀라니아 님의 존재를 알고 계십니다.”
“너인 것이야?”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는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난감한 얼굴로 입술을 오므린 재상의 입술 주름이 쫙 펴졌다.
“폐하께서는 이미 그렉 공 때문에 어느 정도는 인지하시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왜 여기 왔는지 확인하려고 부른 겐가?”
“아닙니다.”
팔짱을 끼고 재상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에둘러 말한다면 밀라니아의 분노를 살 것을 예감했는지 재상은 말을 꼬거나 하는 것 없이 고분고분하게 대꾸했다.
“경계하거나 감시하려는 목적이 아니에요. 그분은 밀라니아 님의 도움을 바라고 계십니다.”
“…….”
“와닿지 않으신 거군요. 밀라니아 님은 치유술의 대가시라 들었습니다. 그 능력을 필요로 하십니다. 폐하께서 아끼시는 분이 현재 매우 아프신 상황이에요. 폐하께서는 그분의 병세를 밀라니아 님이 봐주시길 바라십니다.”
“우스우니.”
“예?”
“그렇게 낭비할 시간이 있느냐? 조리해야 할 더 큰 생선이 있거늘.”
“…….”
늙어서 가물가물한 눈을 깜박이는 재상에게 턱을 까딱였다.
“황제에게 제 건강부터 챙기지 않고 남의 건강을 챙길 여유가 있는 것 같진 않았느니라.”
밀라니아는 15년 전, 불로장생의 약을 원했던 황제를 떠올렸다.
물론 황제에게 가장 중요한 건 수명을 늘리는 약이 아니라 아내와의 행복한 시간을 위한 정력제였지만, 황제의 위치에 있으니만큼 불로불사를 꿈꾸지 않는 건 아닐 터였다.
그것도 그 자신의 죽음이 멀지 않은 이 상황에서는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