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제국의 황가
지친 눈으로 밀라니아와 그레칸을 번갈아 보던 코사는 돌연 그레칸을 향해 눈에 불을 켰다.
“파티장에 들어가셔서는 절대, 절대 황후 폐하께 했던 것처럼 그러면 안 돼요!”
“…….”
“황후 폐하만큼이나 칼 같으신 분들이거든요.”
“누가?”
“…….”
“물론 두 분을 만날 기회조차 없겠지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입니다. 정말 혹시나 하는 건데, 왜 자꾸 불안해지는 거죠?”
밀라니아에게 그런 말이 감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레칸은 뉘 집 개가 짓나 하는 표정으로 눈을 반쯤 감고 밀라니아의 어깨에 슬그머니 머리를 기대기까지 했다.
“황후라면서 왜 저쪽 방향에서 오는 것이냐? 황궁은 반대편에 있지 않누.”
“최근까지 친정인 공작저에서 지내셨다고 알고 있어요.”
밀라니아의 지긋한 시선에 코사가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사이가 많이 안 좋으셔서, 종종 자리를 비우시기는 해요.”
“제가 잘은 모르지만요. 들리는 소문으로는 공작저에 관리하는 사병이 많으시다고 하네요.”
물론 소문일 뿐이라고 강조하는 코사의 말을 흘려들으며 밀라니아는 점점 가까워지는 황궁의 뾰족한 지붕을 응시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전에 앨리지를 데리고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도다.’
이래서야 앨리지가 황태자와 특별한 사이이기를 바라야 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 골치가 아프다.
밀라니아 일행이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을 땐, 이미 상당수 입장해 친분이 있는 이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입구로 쏠렸다.
처음엔 한 명, 두 명 쳐다보았으나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린 사람들까지 입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주변을 슥 둘러보던 밀라니아는 그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남자를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엇인고?’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의 눈초리가 따가운데 무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밀라니아는 자신에게 닿는 시선이 옆으로 옮겨 가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흐음.’
그레칸은 목을 덮는 옷깃이 답답한 듯 옷깃을 매만지다, 맨 위의 단추를 툭 풀었다.
어제 드레스숍에서 입었던 기성복을 입었을 때는 가슴이 끼이고 소매도 짧아서 영 우스운 꼴이었는데, 맞춤복은 아니어도 몸에 맞는 옷을 입자 놀랄 만큼 말쑥했다.
보통의 성인 남성보다 족히 머리 하나는 큰 그레칸은 시선을 살짝 내리까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를 올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자연스럽게 둔 머리카락이 이마에서 부드럽게 살랑였다.
살짝 탄 피부와 큰 눈, 오뚝하고 날카로운 콧날과 분홍빛 도톰한 입술이 조화로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에 들어오는 건 무미건조한 눈동자였다.
눈이 부시게 아름답거나 사교계의 세련된 신사들 같은 외모는 아니었지만 그를 감싼, 어딘지 거친 분위기가 귀족들에게 독특하게 다가갔다.
물론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옷차림이 이상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밀라니아의 미심쩍은 시선을 눈치챈 그레칸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덤덤했던 눈동자가 환하게 밝아졌다.
“어머…….”
어디선가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
그레칸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밀라니아는 정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냥.”
“…….”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응? 무슨 말이야?”
‘너.’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거듭 던지는 질문에는 대꾸하지 않으며 밀라니아는 주변을 훑었다.
아직 앨리지로 보이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았어요. 좀 전에는 다 망했구나 싶었지만.”
예기치 못하게 황후를 만나는 사고를 겪었던 코사는 언제 지쳤냐는 양 비를 맞은 식물처럼 파릇파릇하게 살아나 자랑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이 짧은 사이, 그녀는 벌써 꽤 많은 귀족들에게 밀라니아 일행에 관련된 질문을 받았고, 그들에게 살롱을 홍보하여 기분이 매우 고무된 상태였다.
“뭐 드시고 싶으신 건 없으세요? 마음껏 드세요.”
살살 웃으며 음식과 음료를 가리킨 코사가 곧 목소리를 낮추었다.
“근데 조금만 드셔야 해요. 여기선 먹는 거보다 사람들 만나는 게 중요하거든요.”
“어차피 뭘 먹을 생각도 없었느니라.”
밀라니아가 음료 하나를 손에 들자 그레칸도 똑같이 음료 잔을 손가락에 끼웠다.
그러는 사이, 코사를 아는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코사, 오랜만이네요.”
“어머, 아가씨! 정말 오랜만이네요! 약혼 준비로 바쁘시단 소리는 들었어요. 약혼자 분이랑 살롱에 들러 주세요. 저는 언제나 살롱에서 기다리고 있답니다.”
“알았어요.”
후후, 웃으며 코사의 환대를 넘긴 여자의 시선이 그레칸과 밀라니아를 향했다. 흥미로운 듯, 눈빛이 번뜩였다.
“내가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외국에서 오신 분이에요. 아주 귀한, 아시죠?”
코사가 묘하게 웃으며 두루뭉술하게 말하자 여자는 눈을 깜박이다가 호호,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코사의 수완은 나쁘지 않아서 그녀를 알아본 사람들은 그녀에게 인사를 할 겸, 새로운 사람들에게 말을 걸 겸 슬금슬금 다가왔다.
물 만난 고기처럼 팔딱팔딱 뛰며 코사는 밀라니아와 그레칸을 자랑하는 한편 자신의 살롱을 자랑했다.
밀라니아는 코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흘려들으며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아직 파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인 듯, 황족으로 보이는 사람은 물론이고 재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기다리기 지루하구먼.’
음료를 홀짝이며 시간을 흘려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을 상대하던 코사가 입을 벌렸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분위기에 밀라니아가 소란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그레칸이 그녀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그레칸은 굳은 얼굴로 밀라니아의 몸을 끌어당겼다.
“어머어머, 밀라니아 님!”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호들갑을 떤 코사가 상석을 가리켰다.
“황녀 전하세요!”
“황태자도 아니고 왜 황녀 가지고 그러느냐. 넌 매사에 호들갑이구나.”
“그게 아니라요.”
코사가 눈을 연신 깜박이며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란도르 님이 저기 계시는데요?”
“무슨 소리누. 갑자기 말란도르가 왜…….”
대꾸하며 코사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린 밀라니아의 눈에 말란도르가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황녀의 옆에서 그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은 말란도르를 보았다.
“황녀 전하의 파트너는 황태자 전하 아니었어? 저 남자는 누구지?”
“누군지는 몰라도 굉장히,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신사 분이시군요.”
말을 줄이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코사가 밀라니아에게 말했다.
“저런 옷은 어디서 구하셨을까요?”
광택이 도는 질감의 긴 망토를 끌고, 몸에 딱 맞는 연회복을 입은 말란도르는 붉은 머리까지 위로 깔끔히 빗어 넘긴 모습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얼굴은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 받아넘기고 있었다.
“게다가 황녀 전하의 파트너는 또 언제 되셨고요.”
코사는 자신의 남다른 수완으로도 짐작을 하지 못하겠다는 양 중얼거렸다.
대답을 구하듯 밀라니아를 쳐다보자 밀라니아는 놀랄 거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해 주었다.
“저런 편이라는 뜻은?”
“괴짜 짓에 정성인 인사이니라.”
“아…….”
코사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녀는 파트너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수줍은 미소를 보내었다.
밀라니아는 혀를 쯧쯧 찼다. 황녀는 말란도르의 마수에 홀려 그의 노예를 자처한 숱한 노예들과 비슷한 표정과 눈빛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용케 빠져나온 말란도르가 밀라니아에게 다가왔다.
경계하는 그레칸을 싹 무시하고는 밀라니아를 꽉 끌어안는다. 황녀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갑자기 내가 사라져서 놀랐지? 너무 오랜만이라서 눈물 난다.”
“어젯밤에 봤느니라.”
놀라지도 않았고, 눈물이 나지도 않는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기 전 말란도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쭉 밀었다.
“내가 없어진 잠깐 사이에 우리 밀라니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봐 얼마나 걱정됐는지 몰라. 울프 보이는 도움이 하나도 안 될 테니까.”
걱정 많은 표정으로 눈물을 찍어 내는 시늉을 하는 말란도르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밀라니아가 툭 뱉었다.
흑계라는 말은 생략했다. 2대륙 사람들에게 있어 1대륙보다 낯선 세계가 흑계.
말해 봤자 알아들을 사람은 없을 테지만 굳이 말을 꺼내 의문을 안길 필요는 없었다.
말란도르가 찔끔한 표정으로 눈을 데구루루 굴리다 자신의 옷을 가리켰다.
“이거 갖고 오려고. 모처럼의 파티인데 옷이 영 마음에 안 들어서 말이야.”
그러고는 밀라니아에게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드래곤 가죽으로 만든 옷이거든. 멋지지?”
“어쩐지 재수 없는 기운이 느껴진다 했느니라. 허튼 짓을 하고 돌아다녔구나.”
“밀라니아는 정말, 말도 참 예쁘게 한다니까.”
피식 웃은 말란도르가 “아.” 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동안 우리 밀라니아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게 있는지 생각 좀 했어. 생각 없이 따라다니기만 하지, 일절 도움 안 되는 누구와는 차별점이 있어야 하잖아.”
어떻게 들어도 자신을 가리키는 말에 그레칸의 무뚝뚝한 미간에 주름이 깊게 새겨졌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말란도르에게 덤빌까 봐 예의 주시 했지만, 그레칸은 말란도르를 노려보며 밀라니아를 끌어당길 뿐이었다.
그레칸을 진정시키기 위해 밀라니아가 그에게 얌전히 몸을 맡기자, 이번에는 말란도르의 눈매가 못마땅하게 찡그려졌다.
“들어 봐, 밀라니아. 내가 왜 뜬금없이 황녀의 파트너가 되어서 나타났겠어?”
“너의 괴짜 짓을 이해하고 싶진 않느니라.”
“무슨 소리야. 밀라니아에게 도움이 되려고 그런 건데.”
“날 전혀 안 믿는구나.”
“너무 늦게 깨달은 사실이로다.”
온화하지만 열받는 밀라니아의 말에 말란도르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났다.
‘이건 놀랄 수밖에 없을 걸.’
밀라니아의 반응이 기대된다는 듯 말란도르가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다시금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또 무엇인고. 2대륙은 예나 지금이나 복잡하고 소란스럽구나.’
밀라니아가 말란도르의 뒤로 시선을 던지는데, 말란도르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앨리지라는 여자라던데. 앨리지 에버리젠.”
“…….”
“네가 찾는 여자잖아.”
밀라니아는 2층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오는 한 쌍의 커플에 시선을 못 박았다.
약간 긴 듯한 남색 머리를 가진 키 큰 남자는 금실로 짠 옷을 입고, 교양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완벽한 자세로 움직이고 있었다.
밀라니아의 시선은 남자가 아니라,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계단을 밟는 여자에게 고정되었다.
“그래. 찾았느니라.”
앨리지.
‘수십 년간. 이 순간을 고대했었도다.’
밀라니아의 금색 눈이 먹이를 발견한 거미처럼 기광을 번뜩였다.
황태자의 등장과 그의 의외의 파트너에 놀랐던 사람들은 돌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인지 뭔가 뒤에 도사리고 있는 기분이다.
뒤를 흘끗거렸으나 별다를 건 없어서, 괜히 팔을 문질렀다.
“갑자기 소름이 돋는데. 왜 이러지?”
“추워?”
“아니, 추운 건 아닌데…….”
어딘가를 바라보는 밀라니아의 주변으로 정체 모를 미풍이 일렁이고 있었다.
은발이 허공에 살짝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데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은 그녀는, 사실 자신이 여기 있는지도 까먹은 듯했다.
“왜 그래?”
이런 그녀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꼭 밀라니아가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워졌다.
밀라니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레칸의 얼굴이 굳어졌다.
“밀라니아가 이렇게 흥분하는 건 처음 보는데.”
말란도르의 기묘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려들자, 초조함이 극에 달한 그레칸은 더는 참지 못하고 팔을 뻗어 밀라니아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거대한 파도가 칠 것처럼 무언가 도사렸던 밀라니아의 공기가 순식간에 착 가라앉았다.
밀라니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짐승의 것처럼 반짝였던 금색 눈동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곧 평소의 무심한 눈동자로 돌아온 밀라니아를 그레칸이 파헤치듯 응시했다.
“왜 그러느냐?”
밀라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침착한 표정을 보는 그레칸의 눈이 혼란스러워졌다.
“방금 이상했다.”
“…….”
“뭘 하려고 한 거야, 밀라니아.”
긴장된 목소리에 밀라니아는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응?”
그레칸이 조심스럽게 밀라니아를 끌어안았다. 그레칸의 가슴에 얼굴이 묻혔다.
짜증을 내려던 밀라니아는 쿵쾅거리는 그레칸의 심장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쿵쾅쿵쾅. 크게 움직이는 심장 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오자 도리어 밀라니아의 심장 고동 소리가 침착해져 갔다.
‘내가 너무 흥분했었구나.’
모든 걸 끝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눈에 앨리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 영면이 도래했더라면, 스러져 없어질 육체에서 심장의 피를 빼내어 앨리지의 병을 치료했을 텐데.
그 환희와 흥분과 긴장감이 짐승 같은 감을 가진 그레칸에게 읽힌 셈인가.
미심쩍어하는 그레칸의 눈빛이 떠오르자 밀라니아는 약간 머쓱해졌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머릿속이 차차 정리되어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흥분할 필요 없느니. 지금은 때가 아니니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그녀의 육신은 영면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밀라니아는 멀쩡하게 움직이는 손을 내려다보고, 그레칸의 가슴을 살짝 밀어냈다.
“예민 떨 거 없느니라. 잠깐, 반가운 사람을 봐서 그런 것이니.”
“반가운 사람이 누군데. 밀라니아는 아는 사람 없다.”
딱딱하게 말한 그레칸은 아까 밀라니아가 계속 쳐다보던 계단을 응시했다.
“저 남자인가? 아니면…….”
시선을 황태자 옆으로 옮긴 그레칸은 말을 흐렸다.
말을 잇지 않는 그레칸이 이상한 밀라니아는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앨리지!’
그레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앨리지였다. 지난 긴긴 생, 그레칸이 곁을 지켜 왔던 그녀, 앨리지.
“어떻게 두 분이서 함께 오신 거예요?”
밀라니아는 얼어붙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레칸과 사람들의 시선이 엇갈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황태자에게 집중하고 있다며 그레칸의 시선은 앨리지에게 고정되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레칸? 왜 그러누. 뭐가 이상하느냐?”
꿀꺽, 긴장한 밀라니아의 목젖이 흔들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레칸의 작은 반응 하나 놓치지 않을 것처럼 날카롭게 살폈다.
앨리지를 만난 흥분이 가실 만큼 그레칸의 반응이 신경 쓰였다.
이번 생에서는 처음으로, 그레칸이 앨리지를 발견한 순간이다.
‘앨리지를 보고 뭘 느꼈는지 말해 보거라.’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눈빛, 숨소리, 행동, 그 어떤 반응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레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혼란이 잘 꾸민 얼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
문득 그레칸이 팔을 움찔했고, 귓가에 꽂히는 비명에 밀라니아의 시선이 돌아갔다.
“꺄악! 어머, 에버리젠 영애!”
앨리지의 앞에 있던 여자의 목소리였다. 앨리지가 창백한 얼굴로 황태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시선이 집중된 여자는 비명을 지른 연유를 설명하며 얼굴을 붉혔다.
황태자의 부축을 받은 앨리지는 걱정하는 얼굴로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아, 괜찮아요. 제가 요즘 몸이 좀 안 좋아서요. 파티 때문에 점심을 걸러서 그런가 봐요. 민망해라.”
금발을 한쪽 어깨로 모아 내리고, 숲의 요정처럼 푸른 초록 눈의 앨리지는 아담한 체구로 인해 더 약해 보였다.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모습에 곁에 선 사람들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밀라니아는 앨리지의 아름다움보다 그녀의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에 주목했다.
‘마녀병이 심장을 파고들고 있는 상황이구나.’
원래라면 앨리지는 스무 살이 되는 기점, 더는 살지 못하고 죽게 될 상태라고 했다.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그걸 막기 위해 자신에게 달려들었으니.
그러나 지금의 앨리지는 병약해 보이기는 하나 멀쩡히 살아 있었다. 당장 죽을 것 같지도 않았다.
다음으로 밀라니아는 그녀를 부축하고 있는 황태자를 관찰했다.
새로운 황후의 아들이 태어나기 전만 해도 유일무이한 황자로서 자랐을 황태자는 부의 장막을 드리우고 있는 것 같았다.
야망이 어린 냉철한 눈. 앨리지를 부축하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나 눈빛만은 변하지 않았다.
‘저런 눈을 한 자를 알고 있느니.’
몇백 년 전, 황제였던 인간이다. 복잡하긴 해도 나름의 질서를 지켜 평화롭게 살아가던 2대륙의 나라 간 전쟁을 일으킨 자.
‘어리석은 탐욕으로 말로가 좋지 않았지.’
인상이 좋지 않다.
앨리지가 저 남자와 엮여 있다는 게 미심쩍었다.
다른 한편으로, 앨리지의 상태가 최악이 아닌 이유로 황태자의 존재를 꼽을 수 있을 듯도 했다.
‘황족이 보살핀다면 살아 있는 것도 이상하진 않느니라.’
병의 완치는 불가능할지언정, 황궁의 수많은 영약으로 목숨을 연장하는 건 가능했을 테니까.
그러나 짙은 화장으로 가려도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완연한 병색을 보면 약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도 한계가 온 게 분명했다.
‘딱 적당한 시점에 찾아서 다행이구먼.’
아니, 세상이 찾을 수 있게 만든 걸지도 모른다.
이 세상이 정한 운명은 앨리지가 그냥 죽도록 둘 만큼 만만하지 않으니까.
어쨌거나 상태를 자세히 진단하기 위해서는 앨리지를 만나야 한다.
‘어떻게 대화할 상황을 만들어 볼까.’
“전에 봤을 때보다 심각한 것 같은데?”
“병이 났다는 게 사실인가 봐요.”
“그래서 황제 폐하가 온갖 명의를 황궁으로 불러들인다는 말도 있어요.”
“본인의 주치의를 살리기 위해 다른 명의를 불러들인다?”
“고비를 넘기셨을 때, 그게 앨리지 때문이라고 가족처럼 아끼시잖아.”
“아니면 황태자 전하의 입김일 수도 있지. 폐하께서 에버리젠을 아끼시는 건 사실이니까. 그럼 황태자 전하와 성혼하는 것도 허락해 주시려나?”
“가족처럼 아끼는 거랑 정말 가족으로 들이는 건 다르겠지.”
주워듣는 것뿐인데도 쓸 만한 정보가 꽤 있다.
‘흥미로우니.’
밀라니아는 팔짱을 낀 채 귀를 열었다.
바람길을 조정하자 파티장에서 도움이 되는 속삭임들이 밀라니아에게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황후께서는 한시름 놓으실 텐데. 황태자에게 강력한 우군이 생길 일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니까.”
황후의 존재를 찾기 위해 시선을 움직이려는 순간, 황궁의 근위 기사가 파티장이 울리도록 우렁차게 외쳤다.
“황제 폐하 납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