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48)

14

소문 속의 앨리지

말란도르를 제외하고 이런 식으로 대놓고 아름답다고 찬양한 사람은 없어서, 밀라니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코사가 부담을 드리려는 게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앨리지 님도 그런 거예요. 아름다운 외모에 한눈에 반해 제가 살롱에 초대했었죠. 몇 번 참석하지 못하긴 했지만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미인의 등장은 몇 번 되지 않아도 주목도가 남다르니까요.”

앨리지가 살롱에 나타난 건 이 여자의 뒷공작 때문이었나 보다, 라고 상황을 파악한 밀라니아의 귀에 코사가 흘린 말이 꽂혀 들었다.

“그 덕에 황태자 전하도 저희 살롱에 관심을 가지셨죠.”

“……황태자도?”

고개를 끄덕인 코사가 밀라니아의 표정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보면 그 두 분이 친밀해지는 데 저희 살롱이 한몫 거들었다고 할 수 있죠!”

“…….”

“뭐 궁금한 점이 있으신가요?”

궁금한 건 있었다. 앨리지와 황태자가 정말로 연인 사이인가.

두 사람이 서로를 정말 사랑하는가.

그러나 코사라고 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랑스러운 얼굴로 코사가 가슴을 폈다.

수건으로 가려진 가슴이 봉긋 솟아올랐다.

“믿기 힘들 만도 하죠. 황태자 전하의 소중한 분이라니. 스캔들이 하나도 없으실 정도로 레이디에겐 관심이 없는 분이셨잖아요? 하지만 정말이랍니다!”

짠, 하듯 손을 펼친 코사가 흥분한 얼굴로 콧잔등을 실룩거렸다.

“황태자 전하도 미인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의미죠! 레이디 앨리지는 굉장한 미인이니까요.”

얘기를 귀담아 듣던 밀라니아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으니.’

황태자와 앨리지가 번식을 앞둔 사이라는 건 재상의 주장일 뿐이다.

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

특히나 이미 한 번 자신을 속인 적이 있는 재상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라면 더더욱.

‘역시 앨리지를 직접 만나 봐야 하나.’

자신이 상회를 어떤 식으로 운영하는지, 자신의 살롱이 얼마나 인기 있는지를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코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떻게 말을 꺼내면 앨리지와 만날 수 있을까, 고민할 즈음.

“그래서 말인데, 살롱에 한번 방문해 보시겠어요?”

“……응?”

코사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 바람에 어깨가 살짝 부딪쳐서,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감탄하는 듯이 은근한 눈으로 코사가 밀라니아의 어깨를 쓸어 보았다.

둥그스름한 얼굴형에 귀여운 외양인데, 그 눈빛에 먹이를 놓치지 않는 독수리가 겹쳐 보이는 것은 무슨 일인고.

“레이디께선 참으로 아름다우세요. 제 살롱을 선택해 주신다면, 그 아름다움을 널리 알릴 수 있게 해 드릴게요.”

“…….”

“외국에서 이곳까지 오신 건데, 그냥 돌아가긴 아쉽지 않으시겠어요? 제국에 그 명성을 떨쳐 보셔야죠. 좋은 추억 만들어 드릴게요.”

코사는 열심히 약을 팔았다. 그런 것 따위 전혀 관심 없어서, 밀라니아는 의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이건 어떠세요? 살롱에 가시면 앨리지 님도 만나 뵈실 수 있을 거예요. 원래 앨리지 님은 거처에만 머무시는지라 다른 데서는 만나기 힘들거든요! 하지만 저, 코사의 살롱은 아니에요.”

“앨리지랑 만날 수 있다?”

“그럼요. 벌써 몇 번이나 오셨는걸요. 앨리지 님은 저희 살롱의 체리 주스를 아주 좋아하시죠. 그걸 위해서라도 오실 거랍니다.”

재상의 말처럼 이 말 역시 믿을 수 없다는 감이 온다.

자신을 꾀어내기 위해 과장법을 사용하고 있는 게 뻔히 보인다.

그렇지만.

‘앨리지를 만날 수 있단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가 보는 게 맞느니라.’

“멋진 신사 분들도 아주 많이 계시답니다.”

코사가 양손을 맞잡고 은근한 눈빛을 보내었다.

“제국에 있으신 동안 심심하진 않으실 거예요.”

‘사내들이 많은 거랑 심심하지 않은 거랑 무슨 관계누. 작고 톡톡한 것이 발랑 까져 버렸구나.’

부자들의 화려한 살롱. 그 이면은 문란한 사교의 장이었다.

그게 살롱이 인기 있는 또 다른 이유라는 것을 모르는 밀라니아는 엄한 말을 하면서도 반짝이는 코사의 눈을 보며 꼬장꼬장한 노인처럼 쯧쯧 혀를 찼다.

살짝 찌푸린 눈에 그어진 주름에 촉촉하게 물방울이 배어들어 갔다.

물에 젖은 은발과 얼굴을 구긴 미인의 조합은 도발적이고 섹시한지라 코사는 황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우실까요. 누구든 레이디의 손을 잡기 않고선 견딜 수 없을 거예요.”

“그래?”

“예에, 제 이름값을 걸고요.”

“황태자도 그러겠느냐?”

“예? 황태자 전하요?”

코사가 눈을 깜박거렸다.

밀라니아는 앨리지와 함께 언급되는 황태자에게 관심이 쏠렸다.

‘호재인지 악재인지 아직은 모르겠느니.’

몇 번의 생 동안 확실히 기억하는 건 앨리지와 르베리안즈, 그레칸의 사랑이었다.

그 관계에 누가 끼어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늘.

“설마 황태자 전하에게 관심이 있으세요?”

“아니.”

상념에 깊이 잠긴 밀라니아가 심드렁하게 고개를 젓자 코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거엔 관심 없느니.”

“그런 거? 황태자 전하인데, 그런 거…….”

밀라니아는 하하, 어색하게 웃는 코사를 내버려 두고 몸을 일으켰다.

축 젖어 무거워진 수건이 몸에서 흘러내렸다.

안 그래도 걸리적거렸던 축축한 수건을 스윽 내려다본 밀라니아가 미련 없이 무시하고 욕탕의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욕탕에 앉은 그녀를 코사가 넋 잃은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아래서 올려다보자 밀라니아의 갸름한 턱선이 도드라져 보였다.

기다란 목과 동그란 어깨, 쭉 뻗은 등과 잘록한 허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느 부위를 보아도 단 하나의 흠도 찾을 수 없자, 짧은 사이 그녀를 꼼꼼히 훑어본 코사의 눈에 하트가 솟아났다.

‘틀림없어. 살롱을 연 이래 발견한 가장 아름다운 사람. 아니, 최고의 보물이라고!’

저 멀리 이쪽을 흘끔거리는 붉은 머리 여인을 확인한 코사는 마음이 급해졌다.

경쟁 관계라고 할 수 있는 살롱의 마담이었다.

그녀 역시 이 아름다운 보물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먼저 침 발랐다 이거야.’

한 발 빠르게 움직인 스스로에게 칭찬을 퍼부으며 코사는 어느새 욕탕에서 빠져나가는 밀라니아의 뒤를 재빨리 쫓아갔다.

옷을 다 갖춰 입고 건물을 나온 코사는 밀라니아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기!’

밀라니아를 발견하자마자 냉큼 다가간 그녀는 갑자기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고개를 갸웃했다.

슬쩍 올려다보자 아담한 그녀의 두 배는 됨직한 멀대 같은 남자가 둘이나 서 있는 게 아닌가.

“밀라니아, 깨끗하게 씻고 나온 거야?”

붉은 머리에 다부진 몸의 남자가 나른한 미소를 흘렸다.

향내를 풍겨 곤충을 꾀는 독화 같은 외모였다.

“좋은 냄새가 난다.”

커다란 손으로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흑발 남자의 강인한 뺨이 불긋하게 달아올랐다.

두 눈은 밀라니아에게 고정되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자니 코사는 어쩐지, 커다란 짐승이 꼬리를 흔드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그리고 가운데 그녀가 있었다.

아직 다 말리지 못한 긴 은발을 뒤로 넘기며 무심하게 서 있는 밀라니아.

화려한 드레스도 없이 얇디얇은 원피스 한 벌만 입고 있었지만, 수수한 옷차림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외모의 파급력이 컸다.

믿을 수 없게도,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의 외모 역시 꿀리지 않았다.

스륵. 코사의 손에 들린 손가방에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걸쳐졌다.

짧지만 결 좋은 속눈썹이 사정없이 진동했다.

“이래서 ‘그런 거’엔 관심 없다고 하신 거군요.”

넋 나간 중얼거림에 말란도르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밀라니아를 흘끗하며 손가락으로 코사를 가리켰다.

“누구야, 이 인간은?”

그레칸은 관심 없다는 듯 밀라니아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밀라니아는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고민하며 목을 끌어안은 그레칸의 손등을 떼어 냈다.

“저 개새끼는 때를 가리지 않네.”

말란도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코사는 밀라니아의 등에 달라붙은 그레칸과 그의 정강이를 차는 말란도르를 보며 입을 가렸다.

비명을 삼키려는 것 같은 태도였지만 묘하게도 눈은 한층 강렬하게 반짝거렸다.

밀라니아는 귀찮은 얼굴로 달라붙는 그레칸의 허리를 밀다가 코사를 응시했다.

“지체할 필요 없이, 살롱으로 가는 게 좋겠느니라.”

안 그래도 일행을 얼른 살롱으로 데리고 가고 싶어 안달이 났던 코사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미인이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있다.

“보물 상자가 여기 있었네, 여기 있었어.”

코사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양 주먹을 꽉 쥐었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뒤에 단 채로 걸음을 옮겼다.

말란도르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지팡이로 그레칸의 등을 쿡쿡 찔러 댔다.

“으르르.”

그레칸이 사나운 표정으로 홱 돌아봤지만 말란도르는 못된 표정으로 지팡이만 더 거칠게 놀릴 뿐이었다.

그레칸이 팔을 뒤로 휘두르는 사이,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품에서 쏙 빠져나가 걸음을 옮겼다.

“쯔쯔,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애같이 구누.”

고소하다고 낄낄 웃는 말란도르에게 으르렁거린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옆으로 다가갔다.

“근데 가는 길은 알고 먼저 가는 거야?”

우뚝, 밀라니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레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덤덤한 표정을 지었고, 말란도르가 웃으며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밀라니아는 길치라니까. 내가 나침반이라도 새로 만들어 줘?”

“어딘지를 모르는데 나침반이 쓸모가 있겠느냐.”

머쓱하게 중얼거린 밀라니아가 뒤를 슬쩍 바라보자 다인용 마차를 새로 수배하고 있던 코사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제가 모실게요, 여러분―!”

코사의 살롱은 입구에서부터 먼지 하나 없이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고, 내부 역시 깨끗했다.

전체적으로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꾸며진 살롱을 둘러보자 코사는 “최대한 찾는 분들의 취향을 맞춘 거랍니다.” 하고 자랑스러운 얼굴로 설명했다.

‘예전에 황궁에서 봤던 디자인이군.’

옛 기억을 되새긴 밀라니아는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에서 나고 자란 그녀에게 인공적인 손길이 가득한 이곳은 그다지 매력적인 곳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코사가 문을 열자, 벽 하나 뒤에 있었다기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푸릇한 풍경이 나타났다.

밀라니아는 파릇파릇하게 풀이 돋아난 땅을 밟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큰 나무가 군데군데 자연스럽게 심어져 있고, 그 주위를 풀과 꽃이 장식하고 있었다.

너른 공간의 중앙에는 허공으로 물을 뿌리는 분수가 작동하여 정원의 공기를 한층 청량하게 만들었다.

이미 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지금 나타난 밀라니아 일행에게 쏠렸다.

“이곳은 살롱의 정원이에요. 특별히 엄선한 향 좋은 식물들을 들여와서, 예민하신 분들이 많이 찾으시죠. 어떠세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향기가 좋음을 설명하던 코사가 멈칫하고 코를 킁킁거렸다.

밀라니아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코사를 보며 눈썹을 올렸다.

“어머? 밀라니아 님에게서 아주 좋은 향기가 나네요. 꽃향기보다 훨씬 좋은데요?”

코사는 계속해서 코를 킁킁거리며 밀라니아의 냄새를 맡다가, 갑자기 사라진 밀라니아의 향기에 눈을 깜박 떴다.

밀라니아를 낚아챈 그레칸이 코사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코사는 분홍빛 입술 사이 뾰족한 송곳니를 보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으르렁, 그레칸의 목에서부터 소름 돋는 목울음이 흘러나왔다.

깜짝 놀란 코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제야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그레칸의 눈빛에 신경이 미쳤다.

“아, 안 건드릴게요?”

밀라니아에게 손대지 않는다는 뜻으로 양손을 번쩍 들자 비로소 송곳니가 입술 안쪽으로 들어갔다.

“밀라니아 님……?”

간절한 눈으로 밀라니아를 쳐다보자 밀라니아는 목을 껴안은 그레칸의 손을 떼어 냈다.

“얘는 신경 쓰지 말려무나.”

“그래도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저렇게 무섭게 쳐다보시는데.”라고 중얼거린 코사가 어색하게 자세를 바로 했다.

“마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부채를 든 몇 명의 여자들이 미묘하게 웃고 있었다.

“어머, 영애! 여기 있으셨어요?”

“친구들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짤막하게 설명한 여자가 밀라니아와 그레칸, 말란도르를 응시했다.

특히 말란도르에게 시선이 길게 머물렀다.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대중탕에서 만나게 된 분들인데, 제국을 소개해 드리고 싶어서 모셨어요.”

“외국에서 오셨나 보죠?”

쳐다보는 시선에 밀라니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얘기들을 하고 계셨어요?”

코사는 자연스럽게 여자들을 이끌고 자리에 앉았다.

제국에서 제일가는 상회의 주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대로, 코사의 진행 능력은 탁월한 편이었다.

덕분에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은 밀라니아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 대화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요. 황태자 전하께서 이런 상황에 신붓감을 찾는다는 발표를 할지, 누가 알았겠어요. 일단 황태자 전하의 결혼이 어떻게 될지가 초미의 관심사네요.”

“아무래도 가문을 따지시지 않겠어요?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전하에게 힘이 되어 줄 가문이니까요.”

“황후 폐하의 눈 밖에 날 것을 각오하고 나설 가문이 많을까요?”

“야망 있는 가문이 뛰어들 수도 있지요.”

“레이디께서도 마음이 조금은 있으신 모양이죠?”

“하하, 그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웃고 있지가 않는구나.’

밀라니아는 여자들의 면면을 살피며 차를 홀짝였다.

콧속까지 올라오는 꽃향내에 얼굴을 찌푸렸다.

약초 달인 물을 즐겨 마시는 그녀의 취향에는 썩 들어맞지 않는 차였다.

“듣기로는 에버리젠 남작의 수양딸과 남다른 관계를 맺고 있다던데요?”

관성적으로 한 모금 더 홀짝였다가 얼굴을 구겼던 밀라니아는 말란도르가 어깨를 툭 치자 눈살을 찡그렸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말란도르가 웃으면서 입을 뻐끔거렸다.

‘에버리젠 남작?’

“그게 왜?”

되뇌었던 밀라니아는 코사까지 눈을 끔벅이며 자신을 보자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헛소문이 아니라 사실인가요? 한낱 의원의 딸로는 전하의 곁을 차지하기가 힘들 텐데요.”

이어지는 대화 내용을 듣고 있노라니 하나 생각나는 게 있다.

‘앨리지를 가문으로 들인 게 에버리젠 남작이라 했나?’

“그것보다도 전하께서 당신에게 힘을 실어 줄 리가 없는 여자를 배우자로 들일 리가 없잖아요. 황태자 전하의 야심, 다들 아시잖아요?”

“가문의 힘은 없지만 에버리젠 남작 딸은 특별하잖아요. 지금은 좀 조용해도 신의의 환생이라고까지 불렸던 여자인 걸요. 그래서 황제 폐하의 신임도 받고 있잖아요? 그 총애는 끝나지 않았답니다.”

호들갑을 떠는 말에 냉랭한 반박이 돌아왔다.

“그녀가 힘이 있으면 뭘 해요. 황후 폐하의 세력에 비하면 미약하기 짝이 없는 것을.”

밀라니아는 대화를 들으며 상황을 파악했다.

번식을 염두에 둔 진지한 관계이기는 하는데, 맺어지기엔 여러 모로 제약이 있는 모양이다.

‘인간들의 결합은 여러 가지 걸려 있는 게 많으니까, 그런 상황인가 보구먼.’

“그래도 폐하께서 힘을 실어 주시면 영 가능성 없는 일도 아니죠.”

“그것도 그래요. 황후께서 가만있으시겠어요? 이제 둘째 황자님도 연치 열이 되셨으니까, 순순히 황위를 넘기려고 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아무래도 민감한 얘기가 나온 듯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두 분 폐하의 사이가 예전 같지는 않다는 거, 다들 알고 있으시잖아요.”

둘째 황자를 언급했던 여자가 눈을 내리깔며 말을 맺었다.

“예전에는 부러울 정도로 사이가 좋으셨던 분들이…….”

누군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제 폐하다우시죠. 그분의 손에 쥐어진 꽂이 채 5년을 못 넘기신단 말이 괜히 나온 말이겠어요. 이번에는 황후 폐하께서 아직 젊고 아름다우신 만큼, 이전보다 좀 더 믿어지지 않지만 말이에요.”

‘지금의 황후가 그때 그 여자인가? 황제가 정력환을 필요로 했던 이유.’

재상이 자신을 찾아와 정력환을 의뢰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말이다.

정력환까지 필요했던 그 열정이 벌써 식은 상황인 듯했다.

어쨌든 지금까지 들은 걸 정리하자면 한마디로 이건가.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저런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멀어졌고, 황태자와 2황자 사이의 권력 다툼이 벌어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

2황자가 아직 어리니 실질적으로는 황태자와 황후 사이의 권력 다툼. 정리 끝.

“호호, 이 얘기는 이제 그만해요, 우리. 아무리 우리끼리만이라지만 혹시나 말이 새어 나갈까 봐 무섭네요.”

중간의 여자가 부채를 흔들면서 대화를 정리하고는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내일 있을 파티는 다들 가시는 거죠?”

“당연하죠. 저는 벌써부터 내일이 기대돼서 오늘 잠이 안 올까 봐 걱정되네요.”

“아닌 척하시더니, 역시 황태자 전하를 노리는군요?”

누군가 짓궂게 눈을 찡긋하자 파티가 기대된다고 했던 여자가 당황하며 부채를 흔들었다.

“말이 왜 그렇게 되나요?”

“황궁에서 열리는 파티니까, 당연히 황태자 전하도 참석하시지 않겠어요? 신붓감을 찾는다고 말씀하셨으니 내일 있을 파티가 얼마나 중요하겠어요. 내일 전하와 춤을 춘 여자가 미래의 황태자비가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에요.”

밀라니아는 대화를 들으며 어떻게 하면 앨리지를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다.

‘앨리지도 올까?’

부담스러운 향내가 나는 찻잔을 흔들면서 밀라니아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인간들의 파티라면 초대장이 있어야 할 텐데. 지금 참석할 방법이…….’

코사에게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들었다가 이쪽에 쏠린 시선에 흠칫했다.

“……무엇인고?”

묻자, 여자들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까르륵 웃었다.

“다른 생각 하셨군요. 마담에게 타국의 고귀한 분이라고 들었어요. 어디서 오신 건가요?”

누군가 앞서 묻자 다른 여자들이 안 그런 척하며 눈을 빛내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양 눈을 빛내는 강렬한 시선을 마주한 밀라니아가 입술을 뗐다.

“이곳으로부터 아주 먼…….”

“먼?”

“북쪽에 있는 나라에서 왔느니.”

“낮춤말이 이리 자연스러우신 걸 보면, 평범한 분이 아니신 것 같은데요?”

집중된 시선을 태연하게 흘려내며 밀라니아는 고개를 까딱였다.

“이 몸은 수장의 위치에 있느니라.”

한 일족을 책임지는 수장 말이다. 인간들은 아마도 백성들을 거느리는 왕을 생각하고 있겠지만.

과연 밀라니아의 말을 들은 여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럼 이곳에는 왜 오신 건가요?”

“찾고 싶은 자가 있단다.”

“그게 누구지요?”

“그것까지 말해야 하느냐?”

귀찮은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자 말을 꺼낸 여자가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코사가 경직된 분위기를 풀고자 웃음을 흘렸다.

“비밀인 거군요! 그렇다면 더 물을 수는 없죠. 오신 김에 제국 구경도 하고 가세요.”

탁.

중앙의 여자가 컵을 내려놓으며 싱긋 웃었다.

“구경을 하려면 제대로 하셔야죠. 내일 있을 파티에 오시는 건 어때요?”

‘옳거니. 일이 아주 잘 풀리는구먼.’

내심은 그랬지만 겉으로는 고민하는 척 미간을 좁혔다.

“일이 좀 바쁜데…….”

“그래도 황궁에서 주최하는 파티라 후회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하루만 시간을 내 주세요. 제가 책임지고 구경시켜 드릴게요.”

코사의 설득에 밀라니아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한다면 알겠느니라.”

“오, 잘 생각하셨어요! 그렇다면 에스코트할 파트너는 누구로 하시겠어요?”

“파트너?”

“파티에 참석하시려면 파트너가 있어야 하거든요.”

설명하는 코사의 시선이 밀라니아의 양옆을 향했다.

밀라니아 일행의 등장 처음부터 알게 모르게 시선을 흡입했던 그레칸과 말란도르였다.

코사의 행동에 기다렸다는 듯이 시선이 쏠렸다.

상황 파악이 빠른 말란도르가 먼저 농염한 미소를 짓고 대꾸했다.

“나밖에 없겠네.”

심드렁하던 그레칸은 에스코트나 파트너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게 분명했다.

그러나 말란도르가 나서는데 가만히 있을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으므로 곧장 반박했다.

“네가 아니고 나다.”

“너? 여자를 에스코트하는 방법이나 아는지 모르겠는데.”

곤란한 분위기를 감지한 코사가 눈치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파트너를 정하기 전에 드레스부터 정해야겠어요.”

“허례허식은 원하지 않느니라.”

밀라니아가 얼굴을 찡그리자 코사가 웃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옷차림으로는 절대 파티에 입장하지 못하시거든요.”

* * *

당장 파티가 내일이니 오늘 드레스를 골라야 한다는 코사의 성화에 밀라니아는 코사가 안내하는 드레스숍에 가게 되었다.

“밀라니아 님은 키가 크시고 늘씬하시니까 요런, 요런 드레스가 잘 어울리실 거 같아요.”

코사는 신이 난 얼굴로 순백의 드레스와 은빛의 드레스와 푸른 빛의 드레스를 보여 주었다.

밀라니아는 드레스로 가득한 코사의 손을 보며 말했다.

“아무거나 주려무나.”

귀찮은 말투에 코사의 표정이 무너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듯.

“아무거나란 게 어디 있어요! 이 외모에!”

코사가 척, 용케 드레스가 가득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켰다.

떨떠름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코사는 전투적인 손짓으로 밀라니아의 몸을 가리켰다.

“이 몸매에! 아무거나라뇨!”

코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진 게 있으면 최대한 반짝반짝 닦아 놔야죠. 그게 맞죠. 라리코사 상회의 주인으로서 이 피사체에 아무거나 입혀 놓는 건 제 능력에 대한 모욕이에요!”

밀라니아는 이건 또 무슨 종자인가 싶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제 말이 맞죠?”

콧김을 뿜으며 눈을 빛내는 그녀를 보며 밀라니아는 입을 열었다.

코사는 서서히 벌어지는 밀라니아의 입을 기대 어린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거나, 주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코사의 눈빛 열정이 팍 식었다.

“좋아요. 그럼 제가 골라 드릴 테니까, 우리 신사 분들이 의견을 주세요. 아셨죠?”

그레칸과 말란도르를 돌아본 코사가 할 일을 시작하겠다는 듯 짧은 다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드레스룸으로 사라진 코사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뗀 그레칸이 한마디 했다.

“이상한 인간.”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유일하게 말란도르만이 다른 반응이었다.

“왜? 난 재밌는데.”

“이런 거에 쓸 시간 없느니라.”

밀라니아는 과연 이런 짓거리가 앨리지를 만나는 데 도움이 될까 고민하며 중얼거렸다.

말란도르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옆을 돌아보자 붉은 눈을 반짝이며 입술을 제 혀로 핥는다.

“난 좋아.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이렇게 쓸 수 있어서.”

“무슨 소리야?”

“데이트하는 기분인 걸?”

말란도르가 눈을 휘며 웃자, 그의 의뭉스러운 눈매가 다소 순진해 보였다.

시큰둥했던 밀라니아는 그의 해맑은 얼굴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웃음에 말란도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 더 가까이 밀라니아를 끌어안으려는 순간, 강한 힘이 팔을 쳐 밀라니아에게서 떨어뜨렸다.

그레칸이 무뚝뚝한 얼굴로 말란도르를 밀어내고 밀라니아의 옆을 차지했다.

“밀라니아에게 묻지 마라, 말란도르.”

질문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살결, 향 모두를 밀라니아에게 묻히지 말라는 의미라는 걸, 말란도르의 팔을 툭 때려 떨어뜨리는 그레칸의 행동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레칸에게 밀린 말란도르는 밀라니아를 껴안은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웃는 상이었지만 눈빛은 서늘했다.

“가끔은 너 때문에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와.”

“…….”

“일단 그거, 그거.”

말란도르는 얼굴을 구긴 채 더러운 것을 가리키듯 밀라니아를 끌어안은 그레칸의 팔을 손가락질했다.

“밀라니아가 네 것인 줄 알아?”

말란도르의 목소리는 지옥에 깔린 운무처럼 스산했다.

밀라니아는 따끔거리는 팔을 내려다보았다.

말란도르에게서 새어 나오는 기운이 그녀의 청량한 기운을 밀어내고 있었다.

손으로 팔을 문질렀지만 선득한 느낌은 가시질 않았다.

“내가 하다 하다 너까지 달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말란도르. 그레칸에게 기 세울 필요 없다. 날 엄마로 여기고 있는 것뿐이니라.”

“엄마? 진심이야, 밀라니아?”

황당한 얼굴로 말란도르가 되묻자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표정인 것이냐?”

불가해한 표정의 말란도르가 밀라니아에게 따개비처럼 붙어 있는 그레칸을 힐끗했다.

달갑잖은 빛이 그의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아니. 밀라니아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레칸은 자신을 보며 묘하게 웃는 말란도르의 표정이 불쾌했지만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어 얼굴만 구겼다.

기이한 열패감으로 심장이 꿈틀거렸으나 어휘력 짧은 그로서는 지금의 기분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기분이 나빠. 싸우고 싶은데. 안 돼?”

“안 되느니라. 자중하거라, 다들. 여기 놀러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밀라니아가 엄하게 훈계를 하는 그 순간 코사가 드레스룸의 커튼 사이로 고개를 쑥 뺐다.

“여러분, 이리로 오셔요! 제가 드레스 다 골라 놨어요.”

기대를 담뿍 담은 코사의 눈을 보고, 밀라니아는 과연 이러고 있는 게 맞는 건지 다시 한번 의문에 휩싸였다.

코사가 첫 번째로 건넨 드레스는 하늘거리는 은빛 천을 몸에 칭칭 감는 스타일의 옷이었다.

“격식을 갖춘 우아한 스타일에, 몸매도 은근하게 드러내는 옷이에요. 요즘은 이런 스타일도 잘나간답니다. 어떠세요?”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걸로…….”

코사는 밀라니아에게서는 기대할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녀의 긍정을 무시하고 그레칸과 말란도르를 바라보았다.

소파에 앉은 채로 밀라니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두 사람이 각자 입을 열었다.

“아름다워서 눈이 멀 것 같아.”

“무지 예쁘다.”

코사는 뿌듯한 얼굴로 다른 드레스를 꺼내었다.

밀라니아는 코사의 손에 들린 흰색 드레스를 보며 그녀가 설명하기도 전에 입고 있는 옷을 가리켰다.

“이걸로 하자꾸나.”

해맑게 웃으며 코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되어요, 안 되어요. 물론 그것도 참 아름다우시지만 하나만 입고 선택하는 것만큼 아까운 것도 없죠!”

밀라니아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코사를 응시했다.

시선을 받은 코사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해를 좀 해 주세요, 밀라니아 님. 제 업무가 바로 고객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끌어내는 거예요! 파티에서 외국인으로서 주목받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앨리지 님을 만나셔야 하는 거 아니세요?”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고?”

“상관이 있죠.”

코사의 확신 넘치는 말에 밀라니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코사는 비밀 얘기라도 하는 양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황제 폐하가 미인을 좋아하시거든요. 황제 폐하는 앨리지 님도 아끼시니, 밀라니아 님이 황제 폐하와 친분을 다지시면 함께 만날 수 있는 자리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겠어요?”

밀라니아가 눈동자를 위로 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쓸데없는 짓이로다. 인간의 황제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는 것을.’

마녀족의 수장임이 밝혀진다면 당장 무슨 일로 2대륙에 왔냐며 황제와 대면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다행히 황제는 그녀를 구별할 능력이 없으니, 재상의 입만 단속한다면 황제와 수장으로서 대면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래도 파티에서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이니.’

밀라니아는 코사의 장단을 조금쯤은 맞춰 주기로 결정했다.

“좋아.”

“좋은 결정이세요.”

“단, 앞으로 세 벌.”

밝아지던 코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예?”

“세 벌만 입어 보겠느니.”

“어, 그럼 계획이 달라지는데.”

코사가 울상을 지었다.

“앞으로 입어 볼 드레스를 서른 벌은 준비해 놨단 말이에요! 이를 어째, 당장 다시 추려야겠어요. 다 예쁠 거 같은데 뭘 고른담?”

호들갑을 떨며 드레스를 확인하는 코사를 보며, 밀라니아는 눈살을 찡그렸다.

“성가시구나.”

드레스에 파묻힌 코사는 고작 옷 세 벌을 고르는데 무려 한 시간이나 소모했다.

밀라니아는 빨리 입고 해치우자는 심정으로 코사에게서 드레스를 뺏듯이 받아들었다.

“시간이 여유로웠다면 디자이너를 불러 드레스를 맞췄을 텐데 아쉬워요. 그래도 이건 작년 1등 디자이너 상을 받은 디자이너의 최고 걸작이에요. 순백의 신부가 부럽지 않죠!”

허리가 잘록하게 드러난 하얀색 드레스는 반짝이는 하얀 색이었다.

밀라니아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자 다리를 꼰 채 기다리고 있던 말란도르가 입을 살짝 벌렸다.

“……너무 좋아.”

놀란 눈동자에 말란도르 특유의 밝은 웃음이 번져나갔다.

붉은색 두 눈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밀라니아가 박제되었다.

말란도르는 좀 더 오래 보고 싶다는 듯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이런 옷도 어울리는 줄 알았으면 진작 인간 세상에 나와 보는 건데.”

“말란도르 님은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코사는 뿌듯한 얼굴로 손뼉을 짝짝 쳤다. 밀라니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거울을 응시했다.

“그럼 이 옷으로 하자꾸나.”

그때 갑자기 그레칸이 벌떡 일어나 상의를 벗었다.

소매가 짧아 서글픈 옷이 훌러덩 벗겨지고 탄탄한 구릿빛 살결의 근육질 상체가 드러났다.

벗은 옷을 들고 한걸음에 달려든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어깨에 옷을 얹었다.

“어머, 어머!”

코사가 입을 가렸다.

당황스러워하는 눈치였지만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양 입꼬리가 올라갔다.

“변태가 자꾸 쳐다본다. 기분 나쁘게.”

그레칸은 단순히 위에 얹은 걸로는 안 되겠다는 양 밀라니아의 드러난 살을 꼼꼼하게 감쌌다.

“아주 낭만적이지만요, 그레칸 님. 요즘은 이런 게 또 유행이에요. 게다가 밀라니아 님은 이렇게 살짝씩 드러내는 게 좋다구요. 젊은 신사 분들이 특히 좋아하는 디자인인데요?”

“난 싫어.”

그레칸이 얼굴을 구기고는 옷으로 밀라니아를 더 꽉 감쌌다.

번들거리는 까만 눈이 말란도르를 향했다.

“보지 마라, 말란도르.”

으르렁거리는 그를 보고 말란도르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뱉었다.

그것도 잠시, 곧 그의 미소가 자취를 감추었다.

“자기 것처럼 구는 거, 점점 거슬리네.”

중얼거린 말란도르가 옷을 내려다보는 밀라니아를 흘끗했다.

“이래도 엄마라고 생각한다고, 밀라니아?”

그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밀라니아가 코사를 바라보았다.

“흐음, 좀 더 얌전한 스타일의 옷이 있느냐?”

“있긴 하지만요…….”

밀라니아의 등 뒤에서 그레칸이 이빨을 드러냈다. 찔끔한 코사는 재빨리 꼬리를 내렸다.

“여기 있습니다, 얌전한 옷.”

옷을 입기 위해 밀라니아와 함께 의상실에 들어온 코사는 옷시중을 들며 그레칸과 말란도르가 앉아 있는 방을 흘끔거렸다.

“아주 혈기 왕성한 신사 분들이시네요.”

“혈기 왕성?”

밀라니아는 드레스를 입으며 되물었다.

“두 분의 질투로 제 몸이 활활 타 버리겠어요.”

“질투는 무슨.”

시답잖은 소리를 한다는 듯 무심하게 중얼거린 밀라니아가 옷을 다 입고 방을 나섰다.

코사는 나가는 밀라니아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래요. 미인에게 없어도 되는 한 가지가 바로 눈치랍니다!”

새로 입은 두 번째 드레스 역시 그레칸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팔을 너무 드러냈다는 이유였다.

결론적으로 밀라니아가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는 세 번째 드레스가 되었다.

앞선 두 드레스와 달리 새카만 드레스는 스커트가 발목을 덮고, 소매도 손목까지 오는, 몸을 다 가리는 드레스였다.

다만 몸에 착 달라붙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고, 가슴 윗부분부터는 실이 거미줄 같은 형태로 뻗어난 망사 재질이라 안쪽의 살결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그레칸은 그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지만 다른 두 옷보다는 나은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이 옷으로 하지.”

코사에게 언질한 밀라니아는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그레칸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얼굴을 굳힌 그레칸의 눈치를 보고 있던 코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떠세요, 그레칸 님?”

“예쁘다.”

그레칸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소년처럼 빛나는 눈이 밀라니아를 온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예뻐.”

“…….”

“나, 이미 기절했다.”

두 눈 모두 멀쩡히 뜨고 있으면서 하는 말이 우습기도 하련만 밀라니아는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모든 신경을 자신에게로 뻗은 듯한 그레칸의 시선에, 그녀는 우두커니 서서 눈만 깜박였다.

[엄마처럼 생각해서 그러느니라.]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 이질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너무 커다래져서?’

밀라니아는 제 키를 훌쩍 뛰어넘는 그레칸의 신장과 떡 벌어진 어깨를 가늠했다.

지금의 그레칸은 전생의 그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저 시선. 시선뿐이다.

그래. 자신을 향한 저 눈이 어딘지 예전과 다르게 느껴지는 건, 그레칸이 더는 새끼 늑대 그레칸이 아니게 됐기 때문일 터.

‘왠지 곤란한 예감이 드는구나.’

* * *

구두와 부채, 목걸이와 귀걸이까지 모두 갖추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코사는 마지막이라는 듯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에스코트 상대를 고르셔야 해요. 품격 있는 파트너를 정하는 게 중요하거든요. 보통은 형제나 약혼자를 파트너로 정하긴 하는데, 이번에는 조금 특이한 상황이에요.”

코사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도톰한 입술에 손가락을 올렸다.

“황태자 전하께서 신부를 구한다고 하신다니까요. 전하를 노리는 레이디는 아마 형제를 파트너로 정할 거예요!”

“그런 건…….”

“네, 관심 없으셔도 좋아요!”

코사가 손뼉을 짝 치자 밀라니아는 말을 줄이라는 뜻으로 미간을 좁혔다.

“밀라니아 님은 파트너가 두 분이나 계시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코사가 황홀한 얼굴로 밀라니아의 양옆을 번갈아 보았다.

“한 분은 타오르는 붉은 머리에 고혹적인 미소가 피부를 오싹하게 하는 신사 분.”

말란도르는 코사의 시선을 태연하게 받아 넘기며 밀라니아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웃기는 여자야.”

“재밌느냐?”

“응, 너무 재밌는데?”

밀라니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 이런 놈이니 새삼스레 고개를 젓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다.

코사가 이번에는 그레칸을 보며 외쳤다.

“다른 한 분은 야성미 넘치는 몸매에 소년 같은 미소를 장착한 햇살 같은 신사 분!”

그레칸은 코사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밀라니아의 허리에 둘러진 말란도르의 손목을 꽉 쥐었다.

말란도르는 핏줄이 불거진 그레칸의 손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을 주며, 그레칸이 말란도르의 손을 밀라니아의 허리에서 떼어 냈다.

“뭐 하는 걸까, 이건?”

“밀라니아에게서 손 떼.”

그레칸의 목소리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게 귀엽다, 귀엽다 하니까 점점. 건방지게 굴 수 있는 자격이 없어. 아직 넌 나한테 안 되거든. 울프 보이.”

말란도르는 빙그레 웃으며 다른 손으로 그레칸의 손을 떼어 냈다.

그레칸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저항하는 그레칸의 눈꼬리가 위로 확 치켜 올라가고, 어깨가 흉흉하게 부풀어 올랐다.

위협적인 모습에도 말란도르는 피식 웃기만 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넌 나한테 안…….”

말란도르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설핏 굳어졌다.

그레칸이 말란도르의 손을 밀어내며 그의 손목을 다시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팔뚝에서 근육이 단단하게 부풀었다.

“하?”

말란도르는 ‘이것 봐라?’ 하는 시선으로 그레칸을 쏘아보았다.

밀라니아를 가운데 두고 벌어지는 살벌한 힘겨루기에 코사는 “어머어머!” 탄성을 지르며 손을 부르르 떨었다.

가운데서 힘의 파동을 그대로 느끼고 있는 밀라니아의 표정은 점점 썩어 들어갔다.

“손 떼.”

“싫은데, 어쩌지?”

그레칸의 이 가는 소리와 말란도르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이것들이 미쳤는고.’

생각해 보면 둘 다 원래 정상은 아니었다.

납득한 밀라니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녀로부터 가공할 바람이 휘몰아쳐 그레칸과 말란도르를 튕겨 냈다.

“어? 지금 무슨 태풍 같은 게……?”

코사는 펄럭이는 스커트를 내려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사세요?”

눈을 휘둥그레 뜨는 코사를 모른 척하며 밀라니아는 숍 입구로 걸어갔다.

“오늘은 이걸로 마무리하는 것이냐?”

“예, 예. 다들 오늘 너무 고생하셨어요. 피부를 위해 얼른 주무셔요!”

코사의 배웅을 받으며 밀라니아 일행은 저택으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밖에서 사람들과 부대낀 탓인지, 셋을 감싼 분위기가 묘하게 적막했다.

“이만 쉬거라.”

굿나잇 인사를 건네고 방으로 들어간 밀라니아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

잠이 많은 편인지라 내내 잠도 못 자고 돌아다닌 게 피로감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정자세로 잠든 밀라니아에게서 가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둥근 보름달이 하늘 끝자락에 닿았을 즈음.

번쩍.

눈을 뜬 밀라니아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푸드덕. 날갯짓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창문 앞으로 까마귀 한 마리가 막 지나가고 있었다.

* * *

밀라니아의 방에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방은 말란도르의 방이었다.

흐응, 흥. 콧노래를 부르는 말란도르는 거울에 그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어깨에서 손목까지 딱 떨어지는 연미복을 눈으로 훑으며 슬쩍 눈살을 찌푸린다.

“인간들은 참 재밌지. 이런 것도 만들어 내고. 기성복인 게 아쉽긴 하지만.”

만족감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매끄러운 질감의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급하게 구한 것 치고는 괜찮은 옷이었지만, 대륙 방방곳곳을 돌아다니며 최고급을 접한 말란도르의 눈에 완벽히 차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적어도 새끼 늑대보단 낫잖아.”

말란도르는 꽉 끼는 연미복을 입고 얼굴을 구기던 그레칸을 떠올리고 낄낄거렸다.

기성복 중에서 맞는 옷이 없어서, 작은 옷을 껴입었던 꼴이 무척 우스웠다.

인간 여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른 옷을 찾아본다고 나섰지만 하루 만에 적당한 옷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있나.

한참을 낄낄거린 말란도르가 검지로 눈가에 고인 눈물을 쓱 닦아 냈다.

“그런 꼴로 어딜 밀라니아에게 비비려고 해?”

밀라니아가 거두었다던 위험한 짐승의 정체는 상당히 성가신 늑대 수인이었다.

“엄마는 무슨.”

저를 향해 으르렁대는 그레칸을 떠올린 말란도르의 입꼬리가 삐죽, 비뚠 선을 그렸다.

“밀라니아가 아니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 버리고 새끈한 해골 노예로 탄생시켜 줬을 텐데. 아쉽지, 아쉬워.”

‘밀라니아에게 필요한 것 같으니까 봐주는 거야.’ 중얼거리는 말란도르의 머릿속에 까만 드레스를 입고 자신을 돌아보던 밀라니아가 떠올랐다.

앞서 입었던 은색 드레스와 순백의 드레스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지만,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밀라니아를 봤을 때는 능글맞은 말도 뱉을 수가 없었다.

자연에서 살아왔고, 자연에서 살며, 자연으로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밀라니아는 흑계를 상징하는 까만색도 아주 잘 어울렸다.

‘자꾸 욕심 생기게.’

신부로서, 자신의 옆에 있는 밀라니아의 모습을.

“내 신부로서…….”

밀라니아가 앞에 있는 것처럼 속삭인다. 돌아오는 답은 없다. 말란도르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녀가 생명에서 태어난 존재만 아니었으면.

자신이 어둠에서 태어난 것만 아니었으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생명을 갉아먹는 존재가 자신이 아니었다면.

하필 그 재수 없는 놈이 내가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널 데리고 도망칠 텐데.”

계속 생각하다 보니 마음이 울적하게 가라앉았다.

쯧, 혀를 차고 옷을 벗기 위해 돌아선 순간이었다.

창가에 내려앉은 까만 까마귀가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암흑세계에서 툭 튀어나온 것처럼 새카만 까마귀가 끝이 휘어진 부리를 벌렸다.

“나의 어둠이시여.”

까만 연기가 흘러나온다. 목을 우아하게 숙이며 하는 인사에 말란도르는 대번에 귀찮은 표정이 되어 팔짱을 끼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까마귀?”

“왕이 부르십니다.”

“바쁜 거 안 보이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시간을 오래 뺏지 않을 테니 방문을 바란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말란도르가 귀찮은 표정을 짓자 까마귀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본인의 위치를 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전언입니다.”

말란도르의 선홍빛 눈동자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왕이, 나에게 그런 건방진 말을 했다는 거냐?”

까마귀는 묵묵부답이었다.

배를 잡고 낄낄 웃던 말란도르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들었다.

빨간 눈동자에서 광폭한 사기가 폭사되었다.

“응?”

모든 흑계의 권속은 그의 기운을 거부할 자격이 없다. 부들부들 떨며 까마귀가 고개를 바닥으로 처박았다.

못마땅한 시선으로 까마귀를 쏘아보던 말란도르가 언제 구겨졌는지 주름이 간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동시에 그에게서 새어 나오던 사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까마귀가 간신히 고개를 들자 말란도르는 언제 분노했냐는 양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손으로 만든 놈을 죽여 봤자 내가 할 일이나 많아지지. 비켜라. 늦기 전에 갔다 오려 하니.”

까마귀가 홰를 치며 날아오르자 말란도르는 손가락으로 공간을 그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나 곧 공간이 찢어지며 틈에서부터 새빨간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행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흑계와 인세의 공간을 이은 말란도르는 벌어진 공간의 틈으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갔다.

말란도르가 사라진 자리, 창가에 남은 까마귀의 꼬리 깃털이 바람결에 살랑였다.

말란도르는 유황불에 지져진 흑계의 검붉은 땅을 밟았다.

땅에 깔려 있던 사령들이 비명을 지르며 지하로 빠져들어 갔다.

까만 피부의 흑계인들은 말란도르를 보자마자 굳어져 땅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말란도르는 머리를 조아린 흑계인들 사이로 지나가 왕이 거하는 방에 당도했다.

쾅!

문이 부서질 듯 열리자 안에서 기둥처럼 서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정중히 팔을 휘둘러 인사했다.

“오셨군요, 말란도르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검은방의 주인, 흑계의 왕으로 불리는 남자는 말란도르처럼 붉은 머리를 갖고 있었다.

땅에 끌릴 것처럼 긴 머리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커다란 검은색 벨벳 의자에 걸터앉은 말란도르가 발을 까딱였다.

“용건만 말해라.”

왕은 말란도르의 말에 대꾸를 않고, 공간을 넘어 돌아온 까마귀의 날개에서 깃털을 뽑아 허공에 던졌다. 말란도르는 가는 시선으로 깃털을 응시했다.

깃털은 하늘하늘 허공을 날아 이내 땅으로 떨어졌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깃털이 떨어지기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던 왕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말 안 하면 가겠다.”

“그거 아십니까? 말란도르 님이 오시기 전에 이 깃털은 땅에 닿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말란도르는 비딱한 자세로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바닥에서 깃털을 주워 들고 똑바로 섰다.

모든 흑계인은 시초의 겉모습을 닮기 때문에, 왕은 까만 피부에 붉은 눈을 가진 모습이었다.

“어둠이 자리를 비운 흑계는 무질서해지다가, 점점 망가지고, 끝내는 완전히 무너집니다.”

“…….”

“외유는 이제 그만하시고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 주세요, 말란도르 님. 아니, 모든 흑계인의 군주여. 벌써 몇백 년째 인세에 머물고 계시고 있지 않습니까. 이대로 있다간 흑계가 무너질 겁니다.”

말란도르는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받치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무너지기 전에 돌아온다.”

“그 대답은 제가 바라는 답이 아닙니다.”

“대답은 변함없다.”

“대마녀 때문인가요? 문제는 그녀입니까? 그럼, 그녀가 영면에 든다면 완전히 돌아오시는 겁니까?”

왕의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말란도르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왕이 계속 쳐다보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래.”

“알겠습니다. 어차피 지금의 대마녀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으니까요.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고작 그걸 확인하게 위해 부른 거냐?”

말란도르의 눈빛이 가라앉고, 검은 기운이 그의 발밑에서부터 그림자처럼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러나 왕은 보통의 흑계인과는 다른 존재였다.

그는 부들부들 떨지도 쓰러지지도 않고 말란도르의 분노를 받아들였다.

심드렁해진 말란도르가 기운을 거둬들이고서야 파삭, 까마귀의 날개를 꼭 쥔 왕이 단호하게 말했다.

“간절히 바라건대 부디 한 가지는 꼭 기억해 주십시오. 흑계는 어둠인 당신으로 하여금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알고 있다.”

“자꾸만, 잊으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

“자연과 생명의 존재가 인세에서 없어서는 안 되듯이, 흑계에서 말란도르 님도 그렇습니다.”

마지막 말이 말란도르의 귀에 꽂혔다.

“모든 생명은 한계와 존재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든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고, 존재 의의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을 잊는다면 고통만이 있을 뿐입니다.”

외부엔 흑계의 괴짜 공작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흑계에서 작위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인간 세상과 달리 공작이니 왕이니 하는 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흑계의 절대자,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 흑계의 질서를 책임지는 자, 말란도르는 왕의 간절한 시선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생명체가 가지는 한계.

그가 가진 한계는 자연의 존재와 상극이라는 점이었다.

쓴웃음이 흘렀다.

‘아픈 곳을 찌르잖아.’

지금 가슴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는 합리적이지 않았으므로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왕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밀라니아를 아무리 원해도 변하는 것은 없을 거라는 것일 터였다.

영원히 그녀를 자신의 곁에 둘 수 없다는, 진저리 치는 사실을 깨우쳐 주려는 왕을 노려보며 말란도르가 딱딱하게 말했다.

“밀라니아가 영면에 들 때까지. 그때까지 기다려라.”

확답을 받은 왕은 말란도르의 차가운 시선에도 그저 안심한 얼굴로 고개만 깊이 숙여 보일 뿐이었다.

* * *

파티가 열리는 당일은 적당히 구름 낀 하늘이 아름다웠다.

저녁놀이 어스름하게 깔릴 무렵, 달그락달그락 말굽 소리가 집 앞을 울렸다.

옷을 갖춰 입은 밀라니아가 정문을 나서자 코사가 활짝 웃었다.

“밀라니아 님! 모시러 왔어요!”

마부가 정중한 태도로 문을 열었다.

밀라니아가 마부의 손을 잡고 마차로 오르려는데 성큼 다가온 그레칸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마부의 손이 닿을 새도 없었다.

순식간에 마차 안으로 옮겨진 밀라니아가 눈을 끔벅이자, 그레칸이 순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고는 훌쩍 몸을 날려 밀라니아의 옆에 앉는다.

코사가 목을 길게 빼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말란도르 님은요?”

밀라니아는 어젯밤 저택을 방문했던 은밀한 불청객을 떠올렸다.

짐승의 모습이기는 하나, 흑계의 짙은 사기를 꼬리처럼 달고 다녔던 흑계의 생물.

‘그 기운. 보나마나 말란도르의 손님이었을 테지.’

예상대로 그날 밤, 그의 방에서 사라진 말란도르는 파티장에 갈 시간이 되었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없느니라.”

“네에?”

“개인 사정으로 자리를 비웠느니. 그가 없어도 상관없지 않느냐?”

밀라니아로서는 이 파티장에서 앨리지를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중요했다.

말란도르의 동행 여부는 하등의 영향도 없을 것인데, 코사의 반응이 사뭇 이상했다.

“이를 어째.”

코사가 안타까운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렸다.

“무슨 문제가 있누?”

밀라니아가 묻자 코사는 눈을 깜박였다. 눈치를 보는 모양새였다.

주저하던 코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소곤거렸다.

“그때 살롱에 오셨을 때 말이에요. 그날 제가 엄청나게 많은 문의를 받았거든요. 거의 황태자 전하가 찾아오셨을 때 만큼이나요!”

손을 쫙 펼쳐 보이며 들떴던 코사는 밀라니아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구부러진 밀가루 과자처럼 손가락을 오므렸다.

“말란도르 님과 그레칸 님 소문이 알게 모르게 퍼져 나가서요. 기다리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말란도르 님이 안 오신다면 실망의 한숨이 제 귀를 괴롭게 할 거랍니다.”

“인간들은 참…….”

특이하다고 말하려던 밀라니아는 돌연 르베리안즈와 그레칸을 보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던 마녀성의 마녀들이 떠올라서 입을 다물었다.

‘거기나 여기나 다를 게 없도다.’

종족의 차이가 있을 뿐, 지성체의 삶은 어느 정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고 팔짱을 낀 밀라니아가 입을 다물자 코사는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그레칸 님은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이시네요.”

밀라니아는 그 말을 듣고 그레칸에게 고개를 돌렸다.

과연 그레칸은 방긋방긋 웃고 있다가, 시선이 쏠리자 입꼬리를 내렸다.

“웃으시니까 더 잘생기셨어요.”

얼빠진 중얼거림에 밀라니아는 미친 사람을 보는 눈으로 코사를 응시했다.

“다행이에요. 늦게나마 그레칸 님에게 맞는 옷을 찾아낼 수 있어서요. 새벽녘에 연락드려 송구스러웠는데 이제 보니 최고로 잘한 결정이었어요. 딱 맞는 옷을 입으니 정말, 야성미 넘치는 북방계 전사 같으세요.”

그레칸을 감상하는 코사에게서 납득 안 되는 말이 더 흘러나오기 전에 밀라니아는 마차를 출발시켰다.

길 안내를 도와야 한다며 코사가 마부석으로 향하자 마차 안은 조용해졌다.

간만에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밀라니아는 앨리지를 만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이제까지 앨리지랑 따로 만난 적이 없어,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다.

어찌 된 일인지 앨리지는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나타나기 전에는 눈썹 하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꼭 밀라니아가 그녀를 해치기라도 할까, 염려하는 것처럼 말이다.

‘꽁꽁 숨겨 놓겠다는 것이겠느니.’

약탈당하면 안 되면 보물 상자처럼 말이다.

앨리지는 굳이 따지자면, 인간들이 말하는 산 속의 산삼처럼 만나기 어려운 귀한 존재였다. 특히나 밀라니아에게는.

‘만나기만 해 보거라. 아예 납치를 하는 것도 좋겠느니.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쉬우니라.’

순간이라면 파티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눈을 가리고 납치할 수 있을 거다.

손가락으로 턱을 짚은 밀라니아는 진지하게 고려해 보았지만, 이곳이 황궁의 파티장인 게 마음에 걸렸다.

한 대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은 할 수 없다.

이건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대륙의 불문율이었다.

맹약을 깨뜨리려는 게 아니라면 굳이 감수할 필요 없는 일.

‘인간의 수장인 황제가 있는 공간에서 위험 행동을 하는 건 권장될 행동은 아니지.’

목표는 앨리지의 마녀병 치유.

그렇게 된다면 르베리안즈와 그레칸에게 심장이 뽑힐 일도 없을 테고, 세상이 필요로 하는 앨리지를 살려 미래의 평화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앨리지의 치료는 아무 때나 가능한 게 아니었다.

‘내가 영면에 들기 직전.’

그때가 앨리지를 치료하는 적기다.

장장 십여 년에 걸친 이 계획의 끝은 타이밍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영면이 정확히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지금, 무슨 변수가 개입될지 모르는 상황인 만큼 어떤 것도 속단할 수 없다.

‘일단 앨리지를 만나 보는 게 우선이겠느니.’

그레칸을 힐끗했다.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었던 건지 눈이 마주친 그레칸이 미소를 지었다.

저 순박한 얼굴이 앨리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자신에게 발톱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니 밀라니아는 몹시도 심란해졌다.

“왜 그래?”

“뭘 말이냐?”

“밀라니아. 날 이상하게 보고 있다.”

그레칸이 고개를 갸웃하자 밀라니아는 그의 까맣고 복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다.

그레칸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기분은 좋은지 그녀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비적댔다.

“그냥. 마지막까지 이렇게 착하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느니라.”

눈을 깜박인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밀라니아는 제 손목을 한 손에 감싼 그레칸의 큼지막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레칸의 눈을 보자, 그레칸이 살짝 웃었다.

“착한데, 나.”

약간의 으르렁거림이 깔린 낮은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밀라니아가 피식 웃었다. 착하다고 대꾸하려던 순간이었다.

덜컹!

마차가 부자연스럽게 멈추었다. 코사가 창문으로 머리를 쑥 내밀었다.

“무슨 일이누?”

“앞에 마차가 멈춰 있어서요. 구덩이에 바퀴가 빠졌나 봐요. 비켜 달라고 말해야겠어요!”

밀라니아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코사가 종종걸음으로 앞에 있는 마차의 마부에게 다가갔다.

마부가 곤란한 얼굴로 뭐라고 말하자, 코사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무엇인고?”

오래지 않아 다시 돌아온 코사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왜 그래?”

“마, 마차 바퀴가 구덩이에 빠진 게 맞았어요.”

“근데 왜 그렇게 놀라는고?”

“마, 마차 안에, 마차 안에…….”

혼이 빠진 얼굴로 입술을 달달 떨던 코사가 탄식하듯 마지막 말을 뱉어 냈다.

“황후 폐하가 계세요.”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냐?”

밀라니아는 무덤덤하게 질문했다.

아마도 당연히 그녀가 놀랄 거라고 생각했던 듯, 코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밀라니아 님은 정말 침착하시네요. 아니, 지금 이럴 게 아니라 당장 마차를 도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레칸 님,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제 힘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아요!”

충격에서 벗어난 듯 호들갑을 떠는 코사의 말에 그레칸은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그 반응에 코사도 자연스럽게 밀라니아를 응시했다.

밀라니아는 기사들이 달라붙어 있는 앞 마차를 내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걸 치워야 우리도 움직일 수 있느니라.”

말이 끝나자 그레칸이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코사는 돌덩이 같던 그레칸의 날렵한 움직임에 눈을 깜박이다가, 마차로 걸어가는 그레칸의 뒤를 총총 따라갔다.

“기사님들, 저희도 도와드릴게요!”

“아,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땀을 끙끙 흘리던 기사가 코사와 그레칸을 힐끗하고는 대충 대꾸했다.

기사들 여러 명이 달라붙어 있는데도 꿈쩍 않는 마차를 행인 두 명이 나타나 거든다고 달라지겠어, 하는 표정이었다.

“안 되겠군. 황궁에 도움을 요청…….”

후, 한숨을 쉬었던 기사는 번쩍 들리는 마차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니 마차를 들고 있는 그레칸이 눈에 들어와서 턱이 툭 떨어졌다.

그다지 힘들이지도 않고 그레칸이 마차를 구덩이에서 꺼내 땅에 내려놓았다.

마차에 달라붙어 있던 기사들은 경악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어, 어떻게…….”

마차를 원상 복귀시킨 그레칸은 뒤돌아 걸어갔다.

그가 뭐라고 한마디라도 건넬 줄 알았던 기사는 정신을 차리고 그레칸을 쫓았다. 정중하게 묻는다.

“어디서 오신 귀인이십니까?”

그레칸은 질문의 의미를 몰라 눈썹만 까딱였다.

“곤경에 처한 저희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마법사시거나, 경지에 이른 검사이시라면 성명을 말씀해 주십시오. 필히 사례하겠습니다.”

“그런 거 없다.”

짤막하게 대꾸하는 그레칸에 비해 곁에 있는 코사는 발을 동동 구르며 입이 간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려 황후의 기사라구요, 그레칸 님!’

황후에게까지 연이 닿을 수 있는 기회는 상단주인 그녀의 입장에선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걸 그레칸이 그대로 흘려보내려 하자 코사는 아쉬워 죽을 것 같았다.

그레칸이 귀찮은 표정으로 기사를 지나치려는 찰나, 마차에서 톤 높은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레스트 경, 왜 출발하지 않은 것이오.”

기사는 한달음에 마차 옆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지나가던 어느 고인이 도와주셨습니다. 저희가 다 달라붙어 있는데도 마차를 들지 못했는데, 한 손으로도 마차를 드시더군요.”

사락. 커튼이 걷어지고 마차 안에 있는 얼굴이 드러났다.

그레칸을 보려는 의도였지만 이미 그레칸은 걸음을 떼고 있었다.

황후에게 고하던 기사가 당황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코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관심 없는 얼굴로 마차로 돌아가던 그레칸은 코사가 팔뚝을 붙잡자 미간을 좁혔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코사가 빠르게 속삭였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인사를 드려야죠.”

“왜?”

“황후 폐하가 기다리고 있으시니까요.”

“그래서?”

“화, 황후 폐하라니까요?”

‘어쩌라고’라는 그레칸의 눈빛에 황망해진 코사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떨어지는 턱을 추어올렸다.

“보통 분이 아니신 듯한데, 고맙소. 그런데 가는 길이 바쁜 모양이오?”

코사가 손을 놓지 않자 그레칸은 짜증을 내며 손을 빼고 뒤를 돌아보았다.

황후는 과거, 황제를 한 순간에 사로잡았다는 명성답게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틀어 올린 금발과 파란 눈동자는 귀족들이 칭송하는 전형적인 미인의 특징을 가졌다.

그러나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눈빛은 냉정했고, 미소를 짓고 있는 입가는 칼날 같은 기세가 풍겨 나왔다.

‘흐음.’

창밖을 통해 상황을 확인하고 있던 밀라니아는 황후의 얼굴을 살펴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15년 전 재상에게서 들었을 때는 늙은 황제가 어린 여자를 만나 정신을 못 차린다고 했었는데, 이제 보니 가련한 어린 꽃이 황궁의 권력자를 만나 힘없이 꺾인 건 아닌 모양이었다.

바람 하나에 휘둘리는 연약한 꽃이 아니라 강철 같은 가시가 돋아난 억센 꽃이다.

‘딱 보아도 복잡한 그림이 그려지느니.’

황제와 황태자, 황후를 둘러싼 왕권 다툼.

‘풍파에 휩싸이겠느니라.’

물론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다.

황후의 감사 인사는 싹 무시하고 돌아온 그레칸이 밀라니아를 보며 눈꼬리를 휘었다.

주인을 향해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은 모습에 뒤에 남겨진 코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살롱의 부흥을 위해 초대한 손님들로 인해 패가망신하게 생겼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저, 저분이 외국인이셔가지고…….”

허리를 굽혀 사과했지만 황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해서 슬쩍 고개를 들자 황후는 그레칸과 밀라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파란색 눈동자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숨을 죽인 채 황후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던 코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 * *

문제가 해결된 황후의 마차가 앞서 지나가고, 시간차를 두고 밀라니아가 탄 마차도 움직였다.

밀라니아는 넋이 빠져나간 듯한 코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표정이 왜 그러는고?”

“제 선택이 옳은지 아닌지, 계산기를 두드려 보고 있었어요.”

시종일관 흥분한 얼굴로 방방 떴던 코사는 몇 분 동안 진이 다 빠져 버린 얼굴이었다.

-3권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