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48)

13

제2대륙, 인간의 땅

말란도르는 성인 남성이 겨우 끌어안을 거대한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있었다.

상극인 기운을 가진 그를 찾는 건 밀라니아에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말란도르는 하얀 꽃씨를 품고 있는 민들레를 꺾어 후 불었다.

꽃씨가 바람에 실려 다가오자, 밀라니아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사뿐히 내려앉은 꽃씨에 시선을 주는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말란도르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내가 보아 온 네 모습 중에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날이야.”

“뭐가 그렇게 이상해?”

“전부 다. 네가 저 꼬맹이들을 왜 데리고 있는지, 대체 뭘 하는 건지.”

“…….”

“영면이 다가온 지금 와서 소꿉놀이를 하려는 거야? 갑자기 심심해졌어?”

밀라니아는 다소 화가 난 것 같은 말란도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가 네 끝이 언제인지 셈하고 있는 동안, 밀라니아 넌 저 어린놈들이랑…….”

하, 하고 헛웃음을 흘린 말란도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소꿉놀이를 하고 있네.”

“…….”

“좋아. 난 네가 즐겁다면 상관없어, 정말이야. 그런데 이상한 일이야. 네가 딱히 즐기는 것 같지도 않거든.”

“사정이 있느니라.”

밀라니아가 차분히 말하자 말란도르의 시선이 그녀의 속내를 꿰뚫어 볼 것처럼 날카로워졌다.

밀라니아의 무덤덤한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이윽고 위험하게 넘실거리던 공기가 차차 가라앉았다.

말란도르는 한결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네가 원한다면 됐어.”

“…….”

“난 방해하지 않을게. 궁금해 미칠 것 같지만, 보고만 있을 거야. 난 네게 많이 관여할 수 없으니까.”

서글픈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흩어졌다.

한걸음에 밀라니아에게 다가온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서늘한 공기로 피부는 차가웠다. 말란도르가 만지작거려도 체온은 오를 기미가 없었다.

말란도르는 혈색이 오르기는커녕 오히려 창백해지는 것 같은 밀라니아의 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손가락이, 손바닥이 닿는 곳마다 차가워지는 듯했다.

그의 눈이 복잡하게 흐려졌다.

손을 떼기 싫다는 양 진득하게 뺨을 어루만지다가 혈색 옅은 뺨에 입을 맞추었다.

“뭘 하는 것인고?”

묻는 말에는 답하지 않고, 말란도르는 심란한 한숨을 쉬었다.

“가끔은 세상의 섭리가 신물 나도록 불합리하게 느껴져.”

“…….”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해가 되는 관계라니. 그런 관계라면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나았을 거야.”

말란도르의 어두운 목소리에 밀라니아는 얇은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날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하는 것이냐?”

“…….”

“하나 말해 둘 게 있는데, 날 찾아온 건 너란다. 내 탓하면 안 되느니.”

말란도르는 진지하게 말하는 밀라니아를 보며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종종 밀라니아 네 뇌를 반쯤 꺼내서 고쳐 넣고 싶다는 생각을 해.”

“쓸데없는 소리.”

밀라니아는 여직 뺨에 붙어 있는 말란도르의 손을 떼어 냈다.

말란도르는 입맛을 다시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건 짐승 하나가 알아서 떨어져 나가니 다행이네.”

“나도 하나 물으마. 말란도르, 넌 왜 날 따라오려는 것이냐?”

질문하며 밀라니아는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묻기는 했지만 이유를 추측하고 있었으므로, 단지 그의 속내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일 뿐이었다.

말란도르가 그녀를 따라붙으며 대꾸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추억이나 쌓자고.”

밀라니아는 흥, 코웃음을 쳤다. 역시 예상한 그대로였다.

그레칸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말란도르는 어느새 몸을 훌쩍 위로 날려 사라지고 없었다.

‘난 네가 죽을 때까지 곁에 있을 거야. 너의 마지막을 보는 건 나의 권리라고 생각해. 내가 참지 않았다면, 지금 네 곁을 떠나는 일은 결코 없었을 테니까.’

빠른 속삭임이 귓가를 스쳤다.

죽음의 기운이 강해지는 밤. 말란도르는 밀라니아의 생명력을 약화시키기 싫어 밤마다 그녀를 떠난다.

그 인내심에 대한 권리를 원하는 그의 요구가 과연 정당한가, 생각하며 밀라니아는 그레칸에게 다가갔다.

그레칸은 모닥불을 피워 놓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만 더 늦었으면 찾으러 가려고 했다.”

“그래. 예쁘게 기다렸구나.”

불퉁했던 얼굴이 밀라니아의 그 말에 부드럽게 풀렸다. 그러고는 머뭇거리며 고백했다.

“사실 좀만 더 멀리 갔으면 따라갔을 거다.”

밀라니아는 가까운 곳에서 대화했던 걸 다행으로 여기며 그레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밤이 늦었느니라. 그만 자자꾸나.”

그레칸이 고개를 끄덕이고 늑대로 변했다.

15년간, 거의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르베리안즈의 부재는 조용한 숲을 더 조용하게 만들었다.

타닥, 탁.

모닥불이 타오르는 앞에는 말란도르가 만든 움막이 있었다.

밀라니아의 온순한 숨소리가 모닥불 타오르는 소리에 섞여 들어갔다.

늑대화한 그레칸이 잠든 밀라니아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킁킁, 냄새를 맡고는 까만 코를 찡그렸다.

그르릉. 위협적인 목울음이 흘러나왔다.

“이상한 냄새.”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내밀어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빰을 할짝였다.

밀라니아가 몸을 가늘게 떨자 풍성한 꼬리가 그녀의 다리를 휘감는다.

온기에 파묻힌 밀라니아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그레칸은 바닥에 머리를 대고 평온히 잠든 밀라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툼한 앞발을 그녀의 머리 뒤에다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자세를 편히 잡아 주자 표정을 풀고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었다.

그레칸은 숨소리에 귀를 쫑긋하고 눈을 감았다. 행복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르베리안즈가 떠난 밤, 밀라니아는 말란도르가 만든 움막 안에서 그레칸의 털에 파묻혀 잠이 들었다.

* * *

“사람들이 쳐다본다.”

그레칸이 말하지 않아도, 그건 밀라니아 역시 의식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왜지?”

아침 일찍 일어나 이종족용 신분증을 받고 제국의 수도까지 입성하는 길이었다.

오랜만에 온 2대륙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으나 새로웠는데 사람들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는 듯했다.

밀라니아는 눈에 익지 않는 건축물이나 인간의 복식에서 눈길을 뗐다.

“네 꼴을 봐야지. 알몸으로 돌아다니는데 누가 안 보고 배길까.”

“알몸 아니다.”

그레칸이 바지를 가리키자 말란도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롱했다.

“젖꼭지가 다 보이는 건 마찬가지야.”

이곳까지 오는 내내 말 몇 마디 나누지 않은 두 사람의 사이는 눈 내리는 한겨울처럼 냉랭했던지라, 나누고 오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시가 돋쳤다.

르베리안즈도 떠났는데 밀라니아는 여전히 피곤함을 느꼈다.

그레칸이 말란도르에게 시비를 걸기 전 밀라니아는 그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어깨에 손을 올리자 그레칸이 눈을 깜박였다.

“옷부터 입어야 하겠느니.”

그레칸이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 차려입은 사람들에 비해 그레칸은 불룩한 근육을 다 드러내 놓고 있었다.

쳐다보는 시선 중 유난히 여인들의 것이 진득한 이유엔 그레칸이 있을 터였다.

“근처에 옷 가게가 있나 찾아보자꾸나.”

멀지 않은 곳에 옷 가게가 있어, 그레칸은 옷을 갖춰 입을 수 있었다.

인간처럼 차려입은 그레칸이지만 약간의 문제는 있었다.

불행히도 기성복밖에 없는 옷 가게에서는 그레칸의 체구를 커버할 옷이 없었다.

“좀 이상하지 않아?”

말란도르가 그레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그레칸이 입은 건 평범한 흰색 셔츠였다. 그러나 그레칸이 입으니 소매가 손목 근처에도 한참 못 미쳐 마치 아동복 같았다.

“풍채가 있으셔서 맞는 옷을 찾으시려면 기성복으론 안 될 거예요.”

옷 가게 주인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밀라니아 일행은 일단 그 상태로 나왔다.

그레칸이 투덜거렸다.

“답답하다.”

“좀만 참거라.”

“…….”

“귀찮은 관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소의 불편함을 감수할 줄 알아야 하느니.”

밀라니아는 근엄하게 달랬다. 주변을 둘러본 말란도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계속 쳐다보는 걸.”

그런데 그레칸의 옷을 입혔는데도 사람들의 시선은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다.

이쪽을 흘끗하며 수군대는 무리들을 발견한 밀라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우뚝.

그녀가 걸음을 멈추자 그레칸과 말란도르도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린 밀라니아가 두 사람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보기 드문 까만 피부에 다부진 몸, 빨간 머리칼과 눈.

시선을 받은 말란도르가 “왜?”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다음에는 그레칸이었다. 꽉 끼는 옷이 불편하여 얼굴을 찌푸리던 그레칸이 눈을 깜박였다.

밀라니아는 그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오뚝한 콧날과 사나운 분위기가 있지만 매끄럽고 단정한 콧날. 분홍색의 도톰한 입술.

이렇게 객관적으로 보니까 두 사람 다 상당히 잘생긴 얼굴이었다.

‘쓸데없이 곤란한 일이로다.’

사실 그녀의 외모 또한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밀라니아는 다 그레칸과 말란도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밀라니아의 얼굴에 귀찮아하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저기요.”

휘황찬란한 망토를 끌며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들을 보며 수군거리던 무리 중의 한 명이었다.

갈색 머리칼에 뺨에 점점이 박힌 주근깨가 두드러지는 남자는 두 눈 가득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시선으로 밀라니아가 쳐다보자 남자가 그레칸을 가리켰다.

“저거, 수인이죠?”

‘저거?’

밀라니아의 고운 눈썹이 밟힌 뱀처럼 꿈틀거렸다.

“저 덩치나 외모가 인간일 리는 없잖아요. 얼마에 샀어요?”

‘점점.’

밀라니아는 차가운 눈으로 남자를 보다가 수군대는 소리에 그 뒤로 시선을 던졌다.

남자의 일행이 그레칸과 말란도르를 번갈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밀라니아는 기분이 불쾌해졌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불쾌감의 이유를 인식했다.

‘구경거리가 된 것 같구나.’

무리는 그들을 ‘구경’ 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유독 조용한 한 명이 눈에 띄었다.

허리까지 오는 하늘빛 긴 머리카락에 흰 얼굴을 드러낸 여자는 땅에 끌릴 정도로 긴 얇은 물빛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옷차림은 약간 남사스러운 데가 있었으나, 부끄럽지 않은지 여자는 옷이 살짝 내려가 있음에도 추켜올리지 않았다.

밀라니아는 코를 킁킁거렸다.

‘물비린내가 나는군.’

그녀의 시선을 오해한 남자가 갈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자를 흘낏했다.

“아, 우리 쪽 물건에 관심 있어요?”

‘우리 쪽 물건…….’

밀라니아는 아까부터 거슬리던 남자의 말을 머릿속에 새겼다.

거슬리는 단어가 뭘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사실 이질감은 2대륙의 관문을 밟을 때부터 신경을 갉작갉작하고 있었기에 인지하는 건 쉬웠다.

마침 저쪽 건너편으로, 목줄을 찬 사슴 뿔 달린 남자가 인간 여자를 졸졸 따라가고 있었다.

‘이곳 수인들은 모두 노예화가 되었는가.’

상황을 깨달았지만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대륙 간 맹약이 맺어지기 전, 2대륙은 계층 구조가 완벽히 이원화되어 있었다.

주인과 노예.

딱 둘로 나누어져 있었으니까.

‘맹약을 맺은 이후에는 사라진 줄 알았는데 다시 부활했나 보구먼.’

“관심 있을 만하죠. 비싸게 산 물건이라서. 멀쩡히 걸어 다닐 수 있는 인어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거 알죠?”

뭐가 그렇게 자랑스러운지 뻐기듯이 말하는 남자였다.

밀라니아는 남자의 뒤를 흘끗했다.

얌전히 선 하늘빛 머리 여자는 남자의 물건 취급에도 시종 담담했다.

햇빛이 비추자 관자놀이 부근에 미색의 비늘이 돋아났다.

“그쪽은 어디 종족이에요? 관리가 꽤 잘되어 있는데.”

그레칸을 훑어보며 남자가 입맛을 다셨다. 그러더니 눈살을 찌푸린다.

“근데 옷차림이 왜 저렇죠? 아, 혹시 가문 노예예요? 세가 약해진 귀족들은 가전 노예를 팔기도 한다던데.”

“…….”

“이거 실례가 되는 말이었나요?”

물끄러미 쳐다보는 밀라니아의 눈치를 보며 남자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모욕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그쪽 노예가 궁금해서 그래요. 사자? 치타? 아니면 재규어? 인간화가 완벽히 되어 있네요. 아무리 봐도 모르겠네. 훈련을 잘 시켰나 봐요?”

사자. 치타. 재규어.

모두 1대륙에서는 그 수가 많지 않은 희귀 종족들이었다.

밀라니아는 그들의 수장을 생각했다.

몇 안 되는 일족이 2대륙에서 이런 꼴을 당하는 걸 보면 화병이 나도 단단히 날 터였다.

“말씀이 많이 없으시네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그럼. 돈은 충분히 드릴게요. 그쪽 노예, 하루만 빌려주세요.”

“뭐라?”

“아, 당황했나 보네요. 이런 거래는 처음인가요? 전 꽤 익숙해서…….”

남자가 다시 한번 뒷머리를 긁적였다. 머쓱하거나 민망할 때의 습관인 듯했다.

돌연 남자가 품에서 나무패 하나를 꺼내 밀라니아의 목전에 들이댔다.

“나, 드리머스 가문의 식솔이에요. 이 정도면 믿을 만한가요? 물건도 곱게 쓰는 편이죠. 잘 쓰고 돌려줄게요.”

딱딱해진 밀라니아의 표정은 기묘했고 가라앉은 눈빛에선 불쾌감이 풍겼다.

남자는 눈치가 없었지만 밀라니아의 반응의 의미를 못 알아챌 정도는 아니었다.

“아, 혹시 공유 안 하는 취향이에요? 돈 받고 빌려주는 게 좀 그러면, 교환은 어때요? 우리 물건에게 관심 있죠? 교환해요. 저 애, 내 컬렉션 중에 가장 아끼는 노예거든요.”

“…….”

“원래 내가 이렇게 질척거리는 타입은 아닌데 이번에는 정말로 탐이 나서 그래요. 저런 물건은 처음 보거든요. 내 동생 입맛에 딱 맞는 스타일이기도 하고. 내일이 생일이라 오라비 노릇 좀 하려고요.”

남자가 끝없이 나불거렸다.

밀라니아는 그가 어디까지 얘기할 지가 궁금하여 가만히 내버려 두었지만 오래 그럴 수는 없었다.

‘뒤가 따갑구나.’

뒤에 시립한 그레칸에게서 뾰족한 가시 같은 기운이 쏘아지고 있었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대로변에서 남자의 몸에 구멍을 내기 전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친분도 다져 보고…….”

“꺼지거라.”

“에?”

“죽기 싫으면 꺼지라고 말했느니.”

남자는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졌다.

“이봐요, 아무리 내 제안이 싫어도 그렇지 무슨 말을 그렇게…….”

“크르르르르.”

모골이 송연해지는 소리.

죽음을 향한 인간의 본능을 건드리는 목울음에 남자의 얼굴이 삽시간에 해쓱해졌다.

그가 고개를 뻣뻣하게 꺾어 그레칸을 응시했다.

확장된 갈색 동공에 금방이라도 사지를 찢어 버릴 것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그레칸의 무시무시한 얼굴이 담겨 있었다.

남자는 혼이 빠져나가는 극심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레칸의 위협도 위협이지만 그의 주위를 죽음의 기운이 은은히 떠돌고 있는 탓이었다.

말란도르가 은밀히 뿌린 기운이었다.

‘가만히 있더니, 듣기는 싫었나 보구먼.’

미묘한 웃음을 띤 말란도르를 곁눈질한 밀라니아의 입꼬리가 올라갈 듯 말 듯 했다.

“가, 가자.”

“갑자기 왜 그러는데요?”

“가자고!”

버럭 성질을 내더니 일행을 내버려 두고 남자가 떠났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일행도 곧 남자의 뒤를 쫓아갔다.

“하여간 천지 분간 못 하는 놈이 꼭 하나는 있다니까.”

아무 일 없었다는 양 기운을 거둬들인 말란도르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그레칸을 향했다.

그 시선의 의미를 눈치 못 챈 그레칸은 묵묵부답이었다.

여전히 기분이 나쁜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2대륙이 이런 상황이라면 이대로 거리를 활보하는 건 나쁜 선택일 것 같구나.”

“기분 나쁜 시선.”

그레칸은 제게로 꽂히는 시선을 이전보다 강하게 의식하며 말했다.

“굳이 시선을 끌 필요는 없느니.”

중얼거리며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밀라니아는 마녀의 저주술에도 능하지만, 자연에서 태어난 자로서 태생적으로 자연 마법을 부릴 수 있었다.

마법은 천천히 진행되었다. 휘어지지 않는 빛의 특성상, 곧게 뻗어 세 사람을 비추던 빛줄기가 조금씩 굽어지기 시작했다.

생명체가 눈으로 대상을 감각하는 건 빛이 필수적이다.

바꿔 말하면, 시야에서 사라지고 싶을 때에는 빛을 조절하면 된단 말이었다.

마침내 햇빛이 완전히 방향을 바꾸었다.

빛으로부터 교묘히 차단된 그레칸과 말란도르의 얼굴이 흐리게 보였다.

밀라니아의 시야에는 흐려진 정도지만 범인들에게는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일 터였다.

‘딱 좋구나.’

밀라니아는 하는 김에 제 얼굴에도 빛을 차단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쪽을 향해 있던 시선이 분분히 흩어졌다.

“호오.”

말란도르가 흥미로운 눈으로 밀라니아를 살폈다.

빛이 비켜 나간 밀라니아는 눈으로 보아도 기억되지 못할 모습이었다. 그림자를 보고 있는 듯했다.

빛을 부린다는 건, 어둠의 일족인 그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능력이라 말란도르는 경탄의 마음을 담아 조용히 중얼거렸다.

“과연. 밀라니아만이 할 수 있는 위장술이야.”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상태로 몇 걸음 앞서 나간 밀라니아가 문득 먼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다 왔느니라.”

그레칸과 말란도르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성처럼 뾰족한 빨간 지붕의 대저택이었다.

그 주변을 높은 담과 울타리가 빙 둘러져 있었다.

“저기가 재상의 집이라더구나.”

문지기에게 정체를 밝히고 방문을 알리자 오래지 않아 잘 차려입은 늙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공작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저택의 총책임자라고 밝힌 노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담장 너머엔 분수가 있는 푸르른 정원이 깔려 있었다.

정원을 지나자 드러난 대문은 번쩍거리는 황금이었다.

 세월 인간들과 교류한 경험이 있는 말란도르는 전체를 황금으로 만든 대문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번 대의 제국은 꽤 태평성대인가 봐.”

2대륙의 세는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지금은 그 중간이라 할 수 있었다.

말란도르와 달리 이렇게 화려한 전경은 처음 보는 그레칸은 동공이 평소보다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

자연과 어울리는 늑대족과 마녀족만 보고 자라 왔던 그로서는 재상의 집 하나하나가 낯선 것투성이였다.

“늙은 황제가 너무 오래 집권하고 있느니라. 무리의 수장은 교체되어야 하는 법. 평화가 고여 있으니 내부는 썩어 있을 것이니.”

집사가 안내한 응접실에 앉으며 밀라니아가 말란도르의 말에 대꾸했다.

그녀의 말을 들었겠지만 집사는 그녀를 잠깐 보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차를 내오겠습니다.”

집사가 나가고, 밀라니아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옆에 앉으려던 그레칸이 얼굴을 찌푸리고 다시 일어났다.

“왜 앉지 않고?”

밀라니아가 묻자 그레칸이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너무 푹신거려.”

“느낌이 안 좋아?”

“별로.”

잠깐 침묵한 그레칸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너무 복잡한 건 좋아하지 않아.”

그러고는 밀라니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녀성으로는 언제 갈 수 있는 거지?”

“…….”

“일이 있다면 얼른 끝내자. 여기는 별로, 마음에 안 들어. 돌아가고 싶다.”

진지한 말에 밀라니아는 곧바로 대꾸하지 못했다.

일이 모두 끝나 앨리지를 찾는다면 귀환하지 못할 수도 있다.

돌아가더라도, 그녀는 사라질 터였다.

‘그렇게 될 거라고, 조만간 말해 줘야 하는데.’

아직 앨리지를 만나지도 못한 시점이라 말하기가 애매했다.

‘곤란한지고.’

그저 말똥말똥 쳐다보는 그레칸에게 고개만 끄덕일 뿐.

끼익.

열린 문으로 키가 매우 작은 남자가 들어왔다.

차 시중 드는 하인이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려던 밀라니아는 왠지 모를 이질감에 다시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의 이마에서 뭔가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더듬이?’

“차를 따라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셋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두꺼운 유리로 만든 주전자를 들고 남자는 채색 유리잔에 차를 따랐다.

값비싸 보이는 물건에 비해 남자의 손목은 앙상하고 너무나도 볼품이 없었다.

한눈에 봐도 좋은 대접 받는 처지는 아니었다.

밀라니아는 그가 따라 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볼품없는 생김에 비해 차 맛은 일품이었다.

“……맛있구나. 솜씨가 좋아.”

한마디 하자 수인일 게 분명한 남자가 흠칫 놀라더니 입가에 작은 미소를 매달았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남자가 등을 보이지 않으며 종종걸음으로 방문을 빠져나갔다.

“구해 줄까?”

차는 입에 대지 않고 침묵하고 있던 그레칸이 말했다.

밀라니아는 찻잔 손잡이에 손가락을 건 채 되물었다.

“불쌍해 보이느냐?”

“조금.”

찻잔을 가져가며 말란도르가 웃었다.

“새끼 늑대는 마음이 약하구나. 원래 저런 게 인간의 본성이야. 꼭 인간만은 아니지. 약한 놈을 아래에 두고 부리고 싶은 건 지성체라면 어느 정도 품고 있는 욕망이거든.”

끼익. 다시 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집사가 들어왔다.

“차 맛은 괜찮으십니까?”

“그래. 근데 그 시종은 인간이 아닌 것이냐?”

“예. 인간이 아니라 수인입니다.”

순순히 대답한 집사는 미묘한 분위기에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혹시 노예는 처음 보시는 건가요?”

“처음은 아니다. 꽤 오래전이었지만. 언제부터 이랬느냐?”

“노예 제도가 본격화된 지 오십 년이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집사는 좀 전보다 공손히 대꾸했다.

“그렇다면 못 볼 꼴을 보여 드렸군요.”

“…….”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재상에게 방문을 다시 아뢰겠다며 집사가 나가고, 방 안은 차를 홀짝이는 소리만 났다.

얼굴을 굳힌 그레칸은 처음 와 보는 2대륙의 첫인상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듯했다.

재상은 꽤 시간이 지나도 응접실로 들어오지 않았고, 불편한 기색이 사라지지 않는 그레칸의 딱딱한 얼굴을 보며 밀라니아는 입을 열었다.

“낯설게만 볼 것 없다.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끊임없이 원할 만큼 탐욕스럽지만, 인간들도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느니라.”

“장점?”

“무엇보다 수가 많고. 머리가 좋은 이들이 있어 가끔 쓸 만한 것을 만들어 내지.”

끼익.

“사람을 찾는 것도 잘하고 말이야.”

문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한마디를 보탰다.

“그렇지 않나, 재상?”

집사를 뒤에 대동하고 나타난 수수한 차림의 노인이 싱긋 웃었다.

“……맞습니다. 뛰어난 두뇌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이 바로 저희의 장점이지요.”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는 노인을 보며 밀라니아는 시간의 흐름을 실감했다.

분명 15년 전에 거래를 틀 때만 해도 화려한 중년이었는데 말이다.

“나이가 드니 취향도 바뀌었나 보구먼.”

그의 옷차림을 응시하며 말하자 재상은 잔잔하게 웃었다.

그 표정도 기억과는 달랐다. 자신만만했던 옛 표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군.’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좋지 않구나.’

지금은 속내를 하나도 드러내지 않는 능구렁이가 되었다.

어쩌면 이번 2대륙행이 그다지 순탄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나이가 드니 잠도 줄고 좋아하는 음식도 바뀌고 다 바뀌어 버렸네요.”

“…….”

“참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 이렇게 늙어 버렸는데 하나도 달라지지 않으셨네요. 여전히 우아하십니다.”

혀에 꿀을 바른 재상답게 과하기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칭찬에 밀라니아는 감흥 없는 표정으로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밀라니아의 앞자리에 앉은 재상은 그녀의 양옆에 있는 그레칸과 말란도르를 보고 “호오.” 탄성을 질렀다.

“참으로 헌앙하십니다 그려.”

다른 일로 시간을 지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밀라니아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재상은 민망한 기색도 없이 싱긋 웃었다.

“무슨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그 똑똑한 머리로 이미 알고 있지 않누.”

재상이 잠깐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죄송합니다. 최근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아 거래를 소홀히 해 버렸네요.”

“그때로부터 벌써 15년이다. 잠깐 소홀히 했다고 아무 소득도 없을 만큼 짧은 시간은 아니야.”

빠져나갈 구멍을 틀어막자 재상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다 알고 오신 것 같군요.”

밀라니아의 금빛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래. 네가 그림자도 찾지 못했다는 그 애가 왜 귀족가의 살롱에 나타났는지.”

“…….”

“잘 설명해야 할 것이야.”

밀라니아의 부드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열린 창문 하나 없는 닫힌 방에서 웬 바람?’

의아해하는 재상의 귀로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꽂혔다.

“그렇지 않다면 감히 나를 기만한 대가를 받아야 할 테니.”

밀라니아의 착 가라앉은 눈동자를 마주한 재상의 주름진 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자신이 상대하는 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눈으로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다.

“아, 알겠습니다. 제가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분이 연관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밀라니아의 주변을 휘감던 바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네 말은 너희의 황제라도 관여되어 있다는 거냐?”

“폐하는 아닙니다.”

“이리저리 빠져나가려고만 하는구나. 언제까지 시간 낭비를 할 거지?”

밀라니아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자 재상은 한숨을 삼키는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저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대마녀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수장은 황제입니다.”

“…….”

“폐하와 관련된 말에는 말을 아낄 수밖에 없는 것이 신하의 의무입니다. 이종족의 무력이 기상천외한 만큼 인간의 군대는 강력하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한낱 인간이 하는 경고였으나 밀라니아는 마법으로써 그를 벌하지 않았다.

재상은 일개 힘없는 노인이지만 그가 대표하고 있는 건 그의 말처럼 인간의 군대였다.

재상이 위협한 것만큼 무시무시하진 않겠지만 충분히 성가실 수는 있는.

“그래. 과거 대륙 간 전쟁이 끝을 맺지 못한 이유를 잊지 않고 있느니.”

“…….”

“다만 네가 새치 혀를 놀리고 있는 대상이 누군지는 기억하거라.”

밀라니아의 눈이 반짝이자 재상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이 한층 깊어졌다.

“알겠습니다. 신중하게 행동하실 줄 믿고 말씀드리죠.”

“…….”

“밀라니아 님께서 말씀하신 아이, 아니, 이제 훌륭한 레이디가 되셨죠.”

밀라니아는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앨리지를 떠올렸다.

대충 만든 싸구려 옷을 걸치고 있어도 신의 가호를 받는 양 어디서든 빛나던 여자.

‘이 세계의 주인공.’

처음 그녀의 존재를 깨달았을 땐 기가 막혔지만 수없이 많은 걸 경험한 이제는 덤덤했다.

지금은 그 주인공이 어디에 있는지만이 중요했다.

주인공이든 나발이든 자신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존재이니.

재상이 말했다.

“그분을 찾은 지는 짐작하셨다시피 꽤 되었습니다. 다만 대마녀님께 보여 드릴 수는 없습니다.”

“…….”

“현재 황태자께서 그분을 보호하고 계시니까요.”

“황태자?”

밀라니아는 뜬금없는 단어에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에게 아들이 있는지 딸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으므로 황태자는 낯설기까지 했다.

“왜?”

“왜냐고 물으신다면, 젊은 남녀 사이의 일이라 제가 어떻게 말씀을 드릴 수가 없겠군요.”

밀라니아는 흠, 헛기침을 하는 재상을 보며 떨떠름해졌다.

“제가 찾기에 앞서 이미 황태자 전하와 알고 계시는 사이셨습니다. 이를 말씀드리면 혹여 밀라니아 님과 황태자 전하 사이에 충돌이 있을까, 노파심에 말씀을 못 드리고 있었습니다.”

재상의 말을 들으면서도 밀라니아는 어안이 벙벙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젊은 남녀 사이의 일?

“그러니까 앨리지와 황태자란 자가 교제하고 있다는 말인가? 번식을 목표로 하고?”

“대마녀님,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 전하신데 번식이라는 단어는 좀…….”

재상의 아연한 표정에 정정했다.

“진지한 관계냐는 말이야.”

다소 조급한 그녀의 태도에 재상은 눈을 깜박이더니 조심스러워했다.

“말씀드렸다시피 남녀 간의 일은 정확히 알기가 쉽지 않은 데다가, 황태자 전하의 사적인 일이니만큼 쉽게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는 점을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어찌 됐든 만나고 있는 건 기정사실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그 앨리지가 연애?

다른 남자?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아니라, 다른 남자와?

기가 막힌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옆을 흘끗했다.

시선을 의식한 그레칸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이 자리에 있는 게 귀찮은 듯한 표정이 그녀를 보자마자 미세하게나마 밝아졌다.

‘전생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느니.’

밀라니아는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는 앨리지와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 될 미래였다.

‘너무 늦게 만나서인가?’

앨리지에게 다른 사랑이 생기면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앨리지를 위해 자신의 심장을 탐하려 하지도 않을 테니까.

혹하려던 밀라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해지기 전에는 무엇도 속단할 수 없느니라.’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찜찜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

열 번을 회귀하고 남자 주인공들을 사육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이번 생의 진행 방향이 꽤 이상한 쪽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내가 앨리지를 만날 수 있느냐?”

“그건 쉽지 않습니다.”

재상은 바로 난색을 표했다.

“아름다운 분이시라, 전하께서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이 대단하시거든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인간 사내들은 제 연인을 함부로 내돌리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게 방법을 묻고 있지 않느냐.”

밀라니아는 냉철하게 말했다.

“어렵다면 방법을 만들어. 불가능하면 가능하게 하거라.”

“황태자 전하의 의심을 살 필요는 없으니 좀 더 자연스러운 방법이 필요할 겁니다. 혹시나 해서 여쭙는 겁니다만…….”

재상이 주저하며 밀라니아의 눈치를 살폈다.

“어쩐 일로 그분을 뵙고자 하시는 건지요.”

“아이였던 앨리지를 찾아 달라 부탁한 게 나이니라. 무슨 의심을 하는 거지?”

“아, 죄송합니다. 앨리지 님께서 워낙 미모가 출중하시고 능력도 뛰어나셔서, 이제껏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사람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재상이 빠르게 사과하자 밀라니아는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그 애를 찾고 싶어 하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

“앨리지는 오랜 지병을 앓고 있다. 나는 그 병을 치료하려는 것이니라.”

그 말을 하는 순간 공기가 변했다. 흐름에 예민한 밀라니아는 그게 재상 때문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눈이 마주치자 재상이 다시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이상한지고. 내게 숨기는 게 있구나.’

밀라니아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그래요. 그분이 병이 있으셨군요.”

그 후 수 초간 침묵을 지키던 재상이 입을 열었다.

“앨리지 님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은 공식적인 행사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겠습니다. 그곳이라면 따로 독대를 요청하지 않아도 잠깐 정도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요.”

“나쁘지 않구나.”

“예. 적당한 자리가 생기면 초대장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세 분의 신분은 제 이름으로 보증할 테니, 부디 제 면을 봐서라도 신중하게 행동해 주십시오. 이번의 제 실책을 무사히 갚을 수 있도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이거면 됐다.

재상에게 더 들을 말은 없을 듯하여 밀라니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도에 따로 숙소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시종의 안내를 받으시지요.”

거절할 이유가 없는 밀라니아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집사가 말을 어떻게 전했는지 재상의 시종은 평범한 인간 사내였다.

시종은 밀라니아 일행을 숙소까지 안내한 뒤 사라졌다.

마차에서 내린 일행은 깔끔한 저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차로 오며 시종이 설명한 바에 따르면 재상이 손님 접대용으로 가지고 있는 저택 중 하나라고 했다.

밀라니아와 그레칸, 그리고 말란도르는 각자 원하는 방을 골라 들어갔다.

‘이런 건물을 짓는 것도 인간의 재주 중 하나겠느니.’

깔끔하면서도 안락한 방 내부를 둘러보며 밀라니아는 짐을 내려놓았다.

쾅!

문이 다소 세게 열렸다. 이렇게 큰 소리가 날 줄 몰랐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그레칸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마침 잘 들어왔구나. 난 지금 나갈 터인데, 따르겠느냐?”

밀라니아의 말에 그레칸이 눈썹을 올렸다.

“나간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러 가야겠느니. 재상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건 바보짓일 것 같구나.”

수도 거리를 돌아다니기에 이상한 차림인지 살펴보던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대꾸가 없다는 걸 눈치챘다.

뒤를 힐끗하자 멀뚱히 밀라니아를 보고 있었다.

“거기 서서 뭐 하는 게냐?”

“앨리지가 누구지?”

그레칸의 미간이 좁아들었다. 의아해하는 것도 같고 못마땅해하는 것도 같은 표정을 보며 밀라니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여자 때문인 건가?”

“……무엇이.”

“밀라니아가 여기까지 온 이유.”

“…….”

그레칸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땜에 그 여자가 필요한 건지 궁금하다.”

밀라니아가 대답하고자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그레칸의 뒤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도 궁금하네. 우리 밀라니아가 누군지 모를 여자를 왜 필요로 하는지.”

문이 완전히 열리고, 말란도르가 사과를 씹으며 걸어 들어왔다.

갓 들어온 주제에 저건 또 어디서 찾았는지 모르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밀라니아는 두 사람의 시선이 온전히 제게 쏠려 있음을 인식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냥 넘어갈 것 같지는 않구먼.’

물론 이런 때를 대비하여 변명거리를 만들어 두긴 했다.

다만 그레칸이라면 문제없을 터인데, 말란도르가 있으니 조금 꺼림칙했다.

하지만 시간을 지체할수록 필요 없는 의심을 받을 터였다.

‘알아보겠답시고 여기저기 조사를 하면 더 골치 아프겠느니.’

짧게 한숨을 쉰 밀라니아는 미심쩍은 듯 눈을 게슴츠레 뜬 말란도르와 순수한 궁금증을 드러내는 그레칸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의 곤란한 표정에 말란도르의 눈빛이 기묘해졌다.

“단순하게는, 일족으로 받아들일 여자를 찾는 줄 알았지. 꽤 재능이 있나 보다 하고. 그런데 밀라니아 지금 네 반응을 보면……. 뭘까?”

“그녀는 내 먼 친척이로다.”

“뭐?”

말란도르의 꺼림칙한 추리가 더 깊어지기 전에 밀라니아는 빠르게 뱉어 냈다.

눈을 홉뜬 말란도르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 듣는 소리인데. 대마녀에게 친척이 있단 건.”

밀라니아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레칸은 몰라도 말란도르는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말란도르와 그녀가 알고 지낸지 수백 년이 지난 지금이다.

자신이 말란도르의 취미라든지 고약한 버릇을 저절로 알게 된 것처럼 그도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이 있을 터.

역시나.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그의 눈빛은 ‘나무에서 태어난 주제에 친척은 무슨 친척?’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밀라니아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앨리지는 요정 나무의 가호를 받는 지성체. 이 세상을 유지시키는 실체 중 하나이므로, 마녀목과는 뿌리를 같이하느니.”

이건 온전한 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가 앨리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려고 하지 않는가.

자신은 죽어도 새로운 대마녀가 태어나지만 앨리지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였다.

그레칸은 얘기를 듣고도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지 무료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말란도르가 흥미진진해 했다.

“요정 나무라면?”

“그래. 고대 세계수에서 뻗어 나온 그건 나의 수호목과 연결되어 있느니라. 내가 뭘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알고 있겠지?”

“그거야 알지. 밀라니아는 늘 고리타분하게 평―화를 외치고 다니잖아.”

밀라니아는 그의 빈정거리는 말을 무시했다.

“나는 앨리지를 보호하여 세상의 질서를 유지시키려고 하는 것이야. 그래서 그녀를 꼭 찾아야 되느니.”

이것 역시 거짓말은 아니다.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운명의 고리를 끊고 싶은 마음이 좀 더 크지만,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 또한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중요한 일이니까.

대마녀의 성향은 전대 대마녀의 최후에 영향을 받는다.

‘만약 이번이 마지막 회귀라면 그것도 문제니라. 심장을 뜯겨 제대로 된 영면에 이르지 못한다면 다음 대 대마녀의 성정은 꽤나 포악하게 형성될 것이니.’

평화로운 세계 질서를 위해 무사히 영면에 이르는 것이 밀라니아가 현재 가장 중요하게 삼고 있는 목적이었다.

“보호라, 보호. 그 말은 지금 앨리지라는 요정족 여자가 위험한 상태라는 건가?”

과연, 말란도르가 핵심을 찔렀다.

밀라니아는 옳다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 그녀를 찾아야 하느니라. 재상을 완전히 믿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직접 상황을 파악해야겠으니 준비하고 있으려무나.”

“뭘 하려고?”

인간 세상에 대해서 잘 모르는 그레칸이 물었다.

“정보는 인간들이 모이는 곳에 있지. 그런 곳을 찾아가려는 게다.”

“그런 곳이 어딘데? 시장?”

“일단 따라오려무나.”

잠시 후, 그레칸과 말란도르는 거대한 하얀색 건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여기?”

“응.”

밀라니아는 편한 차림의 옷을 입고 건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고 했다.

그레칸이 그녀의 손목을 휘어잡아 몸을 돌렸다.

“뭐야?”

곤란한 얼굴이었다.

“여긴 내가 못 들어간다.”

“왜? 신분패 같은 건 없어도 된다. 그대로 들어가도 되느니라.”

말을 마친 밀라니아가 다른 쪽 건물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얼굴에 홍조를 띤 남자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다.”

그레칸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답답한 얼굴을 하는 것과 달리 말란도르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확실히 목욕탕만큼 말도 많고 정보를 모으기 좋은 곳도 없지.”

“맞느니라. 예전에는 그랬었지. 변함이 없어야 할 터인데.”

밀라니아가 두 사람을 끌고 온 곳은 수도 중앙에 위치한 대중욕탕이었다.

오래전, 인세에 머물고 있을 때만 해도 수다를 떨려면 목욕탕을 갔으므로, 이번에도 밀라니아는 가장 먼저 목욕탕을 떠올렸던 것이다.

“탁월한 선택이네. 가자, 밀라니아.”

말란도르가 유쾌한 미소를 짓고는 밀라니아의 손을 잡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탁, 그레칸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딜 가는 거냐.”

말란도르가 불쾌한 표정으로 손등을 탁 쳤다.

그레칸은 한 술 더 떠 역겨워하는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거시기 달린 수컷은 저쪽이야.”

그레칸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들을 둘러본 말란도르가 메스꺼운 얼굴을 했다.

밀라니아는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이는 두 사람을 향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찬물을 뿌렸다.

“각자 흩어져 정보를 모으는 게 효율적일 것이야.”

말란도르가 빙그레 웃었다.

“그건 그렇지. 근데 사실 효율을 따지자면 적성대로 움직여야 맞는 거거든. 내 전문은 수컷이 아니야. 이쪽에서 정보를 찾는 게 더 도움이…….”

그러면서 여자들이 걸어 나오는 욕탕으로 향하는 말란도르의 손목을 낚아채며 그레칸이 밀라니아에게 말했다.

“알겠다. 저 문으로 들어가면 되겠지?”

“놔, 이 멍청한 새끼 늑대야. 정보를 찾으려면 이쪽이라고. 안 놔?”

“역시 나타샤의 말은 틀림이 없어. 변태는 변태로군. 르베리안즈의 난봉꾼 기질보다 심해.”

“그거 상당히 기분 나쁜데?”

투닥거리면서 남탕으로 걸어가는 두 남자의 뒷모습을 일별한 밀라니아도 건물로 들어갔다.

탈의를 하고 수건 하나만 두른 채 욕탕으로 들어간 밀라니아는 우선 주변을 둘러보았다.

취향껏 선택하라고 마련해 놓은 와인과 맥주, 우유, 그리고 각종 디저트와 먹거리가 진열된 테이블이 있고 크고 작은 욕탕에서는 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여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와인을 기울이며 수다를 떨었다.

‘예전이랑 좀 달라진 것도 같구나.’

훨씬 더 고급스러워졌다.

문득 입실할 때 냈던 돈이 꽤 큰 금액일 수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당당하게 금화를 요구하기에 얼떨결에 줘 버렸는데, 출입 자격은 신분이 아니라 금전인 듯했다.

하녀에게 마사지를 받는 여인에게선 기분 좋은 향기가 풍겼다.

최상급의 향유다.

아무래도 돈이 좀 있는 집안의 여자들이 모여 있는 건가.

“운이 좋았구나.”

밀라니아의 중얼거림에 몇 명의 여자들이 그녀를 힐끔거렸다.

밀라니아는 한발 늦게 그 시선을 눈치챘다.

사실 밀라니아가 욕탕에 등장했을 때부터 그녀를 힐끗거리는 시선은 많았지만, 밀라니아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내 외모가 아직도 특이하게 보이나 보구나.’

1대륙에 있을 때는 말란도르를 제외하고 외모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1대륙에선 달랐다.

신비스럽다는 말을 자기들과 다른 외양을 가졌다는 말로 알아들은 밀라니아는 외모를 가릴까 짧게 고민했다.

하지만 대로변도 아니고 이런 곳에서 빛의 방향을 트는 건 누가 봐도 수상할 터였다.

‘하는 수 없느니. 섞여 들어가는 수밖에.’

마냥 멀뚱히 서 있는 것부터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깨달은 밀라니아는 많은 이들이 욕탕에 몸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태연히 걸어간 밀라니아가 온수 욕탕에 발을 담그는 순간, 느슨했던 수건의 매듭이 풀어졌다.

사락.

하얀 수건이 밀라니아의 투명한 피부를 스치고 떨어졌다.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여자들의 시선이 밀라니아에게 화살처럼 꽂혔다.

밀라니아가 수건을 잡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묶지 않은 은발이 사슴처럼 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봉긋 솟은 가슴을 살포시 가린 은발이 하늘하늘 흔들리자 모여든 시선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목욕탕의 습한 온기로 발그레해진 밀라니아는 사랑스러운 사과를 베어 문 것 같았다.

촉촉하게 빛나는 금색의 눈동자와 물방울이 맺힌 긴 속눈썹.

눈을 한 번 깜박이자 나비가 팔랑팔랑 날갯짓을 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꽃잎을 베어 문 것처럼 생생하게 붉은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오자, 지켜보던 이들의 잇새에서도 짙은 숨이 터져 나왔다.

“귀찮게 자꾸만 흘러내리는구나. 체라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밀라니아가 수건을 들어 다시 가슴에 묶었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 늘씬한 몸매가 드러났다.

거기에 눈을 떼지 못한 여자가 저도 모르게 얼굴로 손을 올렸다가 축축한 느낌에 놀라 손을 들여다보았다.

“어머어머?”

다급하게 수건으로 코를 틀어쥔 여자였지만 아무도 그녀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도 같은 기분이었던지라.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욕탕에 들어간 밀라니아는 이상한 느낌에 주변을 돌아보았다.

기분 탓인지 이쪽을 흘끗거리는 시선이 확 늘어난 것 같았다.

‘왜 저러는 것이누?’

이런 상황이면 정보를 모으려 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

패밀리어라도 만들어 풀어야 할까. 고민하는 그녀에게 누군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어머! 어쩜 피부에 점 하나 없을까!”

정체불명의 인간에게 손이 잡힌 밀라니아는 눈썹이 떨떠름하게 올라갔다.

다짜고짜 밀라니아의 손을 잡은 여자는 금발을 위로 틀어 올린, 약간 후덕한 몸매의 여자였다.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여자에게서 닮은 곳 하나 없는 말란도르가 보이니 매우 꺼림칙했다.

밀라니아는 눈살을 구기고 손을 탁, 털었다.

밀라니아의 손을 놓친 여자가 입맛을 다시더니 아쉬운 대로 스스로 두 손을 맞잡았다.

“정체를 밝히거라.”

밀라니아의 서늘한 목소리에 여자의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랗게 뜨였다.

“독특한 억양이네요. 외국인이세요? 아, 이건 너무 당연한 말이죠. 이런 외모에 내국인이라면 제가 모를 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혼자 이러쿵저러쿵 말한 여자가 밀라니아의 손을 잡을 것처럼 손을 뻗었다.

밀라니아가 재빠르게 손을 올리자 결국 허공을 움켜쥔 여자가 다시 입맛을 다셨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라리코사 상회의 주인 레이디 코사예요. 라리코사 살롱을 운영하고 있죠.”

자신만만하게 저를 소개한 여자는 밀라니아가 ‘어쩌라고?’ 하는 표정을 짓자 웃으며 제 이마를 쳤다.

“어머, 나 좀 봐. 외국인이시라면 모르실 수도 있죠. 물론 제 살롱은 외국에도 유명하지만!”

“…….”

“어쨌든 멀리서 봐도 선명하게 알 수 있는 레이디의 미모에 반했답니다!”

“…….”

“그냥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어디에서 오셨나요? 작위는요? 설마!”

밀라니아의 눈에 경계심이 어렸다.

“무슨 어디의 여왕은 아니시겠죠? 듣기로는 저 먼 북쪽의 나라는 아름다운 은발 여왕이 통치하고 있다네요.”

‘무엇이고, 이 물건은.’

귀찮게 종알대는 여자를 치워 버리려던 밀라니아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에 뒤늦게 신경이 미쳤다.

“지금 살롱이라 했느냐?”

“예, 역시 들어 보셨죠? 수도엔 많은 괜찮은 살롱들이 있지만 전 그중에서도 자신 있게 제 살롱을 소개해 드릴 수 있어요. 외국인이시라도 말이에요, 한 번은 들어 보셨을 귀인들이 애용하시는 곳이거든요. 황태자 전하와 그분의 소중한 사람, 외무대신의 아드님, 그리고 또…….”

“잠깐.”

계속해서 이어지려는 말을 끊고 밀라니아는 ‘황태자 전하와 그분의 소중한 사람’에 주목했다.

‘앨리지가 살롱에서 발견됐다고 했지.’

“그럼 앨리지에 대해 아느냐?”

“어마?”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가렸다.

“어떻게, 저는 모르시면서 앨리지 님은 또 아시네요?”

단서를 잡는 데 오래 걸릴 줄 알았거늘.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에 밀라니아는 어리둥절해서 눈을 깜박였다.

“아이고, 이런 추태를. 앨리지 님은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 아는 사람만 알거든요. 그것도 레이디 같은 외국인이 아시다니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고개를 갸웃거린 코사가 밀라니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앨리지 님이랑 아는 사이신가요?”

호기심을 가득 담은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렸다.

‘이 여자가 이렇게 자신만만해할 정도의 살롱이라면 아무나 드나들 수는 없을 것 같느니. 그럼 앨리지는 지금 귀족과 끈이 닿아 있다는 것인가?’

밀라니아는 코사가 앨리지와 황태자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재상이 한 말을 생각해 보면 황태자와 앨리지의 관계가 세간에 널리 알려지진 않은 듯한데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라니, 의혹이 남는다.

“먼 친척이니라.”

“어머, 앨리지 님은 천애 고아라고 하시던데 친척이시라고요? 어머나, 이게 알려진다면 완전 핫이슈……! 아, 죄송합니다.”

“앨리지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구나.”

“하하, 꽤 아름다운 분이시라서 말이지요. 에버리젠 남작께서 그분을 수양딸로 받아들이신 건 아시나요? 지금은 에버리젠 남작 영애시랍니다.”

‘귀족과 끈이 있는 게 아니라 아예 귀족 가문에 편입했다고?’

혼란스러움을 품고 밀라니아가 반쯤 다리를 걸친 욕탕에 완전히 들어가자 코사가 그 뒤를 잽싸게 따라 밀라니아의 옆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았다.

‘새끼 개 같은 여자로구나.’

밀라니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르고, 코사는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

“제가 상회를 제국에서 열 손가락에 손꼽히는 상회로 키울 수 있었던 건 살롱 덕분이거든요, 솔직히. 장사 능력보단 사교계와 파티가 제 실력이라는 사람이 많아요, 하하.”

살롱 자랑을 하던 코사는 영 관심이 없어 시큰둥한 밀라니아의 기색을 알아채고 싱긋 웃었다.

“제가 다짜고짜 말 걸고 친한 척하는 이유가 궁금하시죠.”

떠벌떠벌 쓸데없는 말만 잔뜩 늘어놓을 기세더니 갑자기 꽉 찬 직구였다.

그러나 유일자로 살아온 밀라니아 역시 직설적인 성격이었다.

“그렇도다.”

“살롱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

“세련된 공간, 취향 맞는 인테리어, 맛있는 음식과 고급 술. 다 중요하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코사가 손가락 하나를 척 들어 올렸다.

“바로 사람이에요.”

그러고는 두 손을 모아 밀라니아를 가리킨다.

밀라니아는 통통한 코사의 손가락을 힐끗 내려다보고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코사가 입꼬리를 삐죽 올리고 웃었다.

“테이블에 맥주 한 병과 싸구려 감자칩만 놔두어도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는 사람들.”

“…….”

“바로 레이디처럼 아름다운 사람들 말이죠.”

“한미한 가문 출신의 앨리지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느냐?”

“맞아요. 제 살롱은 명망 높은 사람, 인기가 많은 사람,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은 코사가 밀라니아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씨익 웃었다.

“아름다운 사람은 절대 놓치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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