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48)

11

덩치만 커졌는데요

평화를 사랑하는 밀라니아의 특질은 둘을 기르는 동안 파도에 쓸린 절벽처럼 거칠어진 지 오래였다.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보였다. 광풍이 둘을 휘몰아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찌나 싸움을 격렬하게 하는지 주변에 남아나는 게 없었다.

방금, 또 한 번 나무가 통째로 뽑혀 날아가는 걸 피한 밀라니아가 카랑카랑한 사자후를 터뜨리며 아래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대체 오늘은 뭐 때문에 싸우는 것이냐?”

둘이 막 격돌하는 중간에 서 결계를 치자, 투명한 막에 부딪힌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뒤로 튕겨 나갔다.

정확히 말하면 힘으로 밀어붙였던 그레칸은 쾅! 굉음을 내며 뒤로 날아갔고, 르베리안즈는 다급하게 날개를 뻗쳐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땅에 사뿐히 착지했다.

10점 만점에 10점.

“밀라니아!”

“밀라니아!”

고개를 홱 들어 밀라니아를 발견한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입을 벌려 동시에 외쳤다.

둘은 어릴 때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거칠게 올라간 머리카락의 그레칸이 크게 뜬 눈을 사납게 일렁였다.

“오늘은 말리지 마, 밀라니아.”

육체의 늑대족답게 근육질 몸매는 육감적이었다. 부풀어 오른 근육과 몸집이 위압감을 풍겼다.

“딱히 싸운 것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 밀라니아.”

반면 르베리안즈는 그레칸만큼 키가 컸지만 얄쌍하고 호리호리했다.

부드러운 금발 머리와 와인을 담은 듯한 눈동자가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마녀들 사이에서 연일 화젯거리이지만 그녀에겐 예나 지금이나 사고뭉치에 불과한 둘.

“이게 싸운 게 아니라면 이 세상엔 싸움이란 단어가 없어져야 할 게다. 무슨 일로 일을 벌인 것이야? 르베리안즈, 네가 말해 보려무나.”

밀라니아가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묻자, 부드러운 금발을 쓸어 올린 르베리안즈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보면 더없이 부드럽고 매너 좋아 보이는 얼굴. 그러나 그녀는 속지 않았다. 그레칸과 싸우던 얼굴은 악귀가 따로 없었으니.

밀라니아가 표정을 풀지 않자 르베리안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밀라니아가 그렇게 부를 때마다 심장이 떨어진다니까요.”

“르베리안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딴청을 피우다 밀라니아를 흘끗했다. 그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즉시 그레칸을 가리킨다.

“늑대가 먼저 잘못했습니다.”

“저 박쥐 새끼가 돌았군.”

그레칸이 기다렸다는 듯이 욕설을 퍼부었다.

르베리안즈는 귀찮은 파리가 왱왱거린다는 표정으로 귀를 꾹 눌렀다가 밀라니아를 보며 ‘봤죠?’ 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밀라니아, 냄새 나는 늑대가 아니라 나를 믿어요.”

르베리안즈가 손을 가슴에 올리며 특유의 관능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마녀 여럿을 홀려 마녀성의 트러블메이커로 자리매김한 르베리안즈.

그의 목소리에는 천성적인 마력이 담겨 있었다.

흔히 말하는 바람둥이의 마력이 아니라, 정말로 마법적인 마력.

허나 천 년의 대마녀에겐 어림도 없었다.

밀라니아는 손을 내저으며 르베리안즈의 유혹을 튕겨 냈다.

“무슨 일 때문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똑바로 얘기해.”

“차가워라.”

르베리안즈가 눈웃음을 치며, 한편으로는 무뚝뚝한 밀라니아가 재미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레칸이 발정기라잖아요. 도와주기 위해 여자 하나 소개시켜 줬더니만 저 지랄입니다.”

“간악한 새끼 같으니. 정확히 얘기하지 못해?”

흥분한 그레칸의 눈이 귀신처럼 날카로워졌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에게 침묵 마법을 쐈다.

그레칸이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레칸이 조용해지고, 밀라니아는 꼴좋다는 표정을 짓는 르베리안즈에게 진상을 캐물었다.

엄격한 분위기에 르베리안즈가 눈을 옆으로 또르륵 굴렸다.

“하는 수 없느니.”

밀라니아의 주위로 마력이 휘몰아쳤다.

품위 없는 모양새를 질색하는 르베리안즈는 재빠르게 진상을 토해 냈다.

“……이렇게 된 일이라고요.”

‘벌써 때가 그렇게 됐나.’

일의 전말을 파악한 밀라니아는 난처한 마음을 숨겼다.

일주일 만에 일어난 이번 다툼의 원흉은 다름 아닌 그레칸의 발정기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진짜로 발정기인 건 아니었지만.

밀라니아는 르베리안즈의 빈약한 설명만으로도 상황을 이해했다. 이미 어느 정도 짐작 가는 일이 있기도 했고.

며칠 전의 일이었다.

밀라니아는 허구한 날 사고를 치는 둘에게 면벽 수련을 시켰다.

각각 서로 다른 동굴에 가두어 들끓는 혈기와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라앉히려는 의도였다.

물론 동굴만 바라보고 있게 하지 않았다. 얌전히 그 명을 수행할 수 있다면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아닐 테니까.

책은 마음의 양식. 독서를 통해 차분해지라는 염원을 담아 밀라니아는 인간 세상에서 유명한 동화를 하루에 한 편씩 읽어 주었다.

인어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 사랑을 노래하는 책을 다양하게 선보였다.

둘의 반응은 명백하게 나뉘었다.

르베리안즈는.

[알몸으로 발견됐는데도 왕자를 꼬시지 못했다는 말인가요?]

의아하게 묻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거, 다시 태어나는 게 낫겠어요.]

예나 지금이나 거만한 건 변함이 없는 르베리안즈였다.

그레칸은 또 달랐다.

[유리 구두를 놓고 가다니,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거지? 운동 신경이 부족한가 보군.]

다른 이유로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동화를 읽어 주든 그런 식으로 한마디를 툭툭 던지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던 그레칸이, 유독 그날만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왕자의 키스를 받은 공주는 저주에서 깨어나 행복하게 살았느니라.]

그레칸은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아무 말도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평소와 사뭇 다른 반응.

[질문 있느냐?]

그녀가 묻자, 그레칸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키스가 뭐지?]

막 하루 전에 르베리안즈에게도 같은 책을 읽어 주었던 밀라니아는 뜻밖의 반응에 침묵했다.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구연 후, 르베리안즈의 반응은 이러했다.

[키스라, 좋네요. 저주를 파훼할 수 있는 키스라면 어떤 종류였을까요. 입술만? 아니면 혀를?]

자신을 야릇하게 바라보던 르베리안즈를 떠올리니 밀라니아는 더더욱 순수한 그레칸에게 할 말이 없어졌다.

그레칸이 궁금하다는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순진무구 그 자체인 눈빛.

그녀는 시선을 비켜 내며 대충 턱짓을 했다.

[거기, 거기.]

[거기?]

그레칸이 주변을 돌아보며 영 감을 잡지 못했다.

답답해진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입술을 손등으로 툭 쳤다.

[거기다 입 맞추는 거란다.]

[응?]

그래도 영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이렇게?]

입술을 쭉 잡아당긴다. 오리 주둥이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입술. 뻐끔거리는 꼴이 퍽 우스웠다.

[입술과 입술을 부딪쳐 비비는 것이란다.]

보다 깔끔한 설명.

[아!]

알겠다는 얼굴로 그레칸이 그녀의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갔다.

[이렇게?]

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어내린다. 온도 차로 손가락이 따뜻해졌다.

묘한 감각.

그레칸은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아…….]

그 반응에 괜히 머쓱해진 밀라니아가 손을 털어 내고 일어나려는 순간, 그레칸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왜?]

쳐다보니 자신도 왜 잡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놓거라.]

밀라니아가 손목을 털자 머뭇거리며 손을 내린 그레칸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밀라니아.]

자꾸 왜 이러나 싶어 눈을 맞춘 순간, 그레칸이 들뜬 눈으로 밀라니아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저 멀리 쏘아져 가는 훈련용 공을 노려보거나 르베리안즈에게 살기등등한 안광을 뿜어 댈 때와는 어딘지 다른 이글이글한 눈빛.

풍랑이 이는 바다처럼 거친 눈빛과 달리 그레칸의 입술은 퍽 얌전히 열렸다.

[나, 발정기인 것 같다.]

[무슨 그런…….]

무슨 그런 해괴한 소리를 하느냐…….

밀라니아는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한편으로는 때가 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는 벌써 성인이 된 것이다.

‘그레칸은 르베리안즈보다 늦되어서 아직은 아닐 줄 알았는데.’

그레칸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그 역사적인 순간.

밀라니아는 기분이 묘했다. 제 어린 자식이 사내가 되었다는 걸 깨달은 이 세상의 어머니들처럼 군 것은 물론 아니었다.

다만 저도 모르게 마법을 난사했을 뿐이다.

퍼펑! 퍼퍼퍼펑!

[왜 그러는 건가?!]

난사 마법을 피하느라 근육이 흉흉하게 올라선 그레칸은 갑자기 왜 이러냐는 듯 억울한 고함을 질렀다.

[모르겠느니. 나도 모르게 그만.]

[내가 뭘 잘못했는가? 갑자기 밀라니아를 보니까 여기가 간지러워진 것뿐…… 으아악!]

[입을 다무는 게 좋겠느니.]

[……크르릉.]

좋지 않은 건 마녀 하나가 그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머나?]

그게 바로 ‘그레칸 발정기 사건’의 시초였다.

[여자가 필요해졌다며?]

이미 알 거 다 아는 르베리안즈는 좋은 건수를 잡았다는 양 그레칸을 놀리기 일쑤였고, 그레칸은 열받은 표정으로 르베리안즈의 날개를 물어뜯기 위해 발돋움을 했다.

그게 지금의 혈투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성교육을 일찍 해 줬어야 했느니.’

물론 육욕이 제로에 수렴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전담 마녀에게 맡겼어야 했겠지만.

‘이걸 어이 할꼬.’

밀라니아는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의 속도 모르고 르베리안즈가 얄밉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말했다시피, 전 그레칸이 발정기라 도와주려 한 것뿐입니다.”

“…….”

“본신이 늑대라 냄새는 좀 나도 그레칸이 생긴 건 쓸 만하니, 도와주겠다고 한 친절한 친구들이 많았어요. 어렵진 않았죠.”

호의를 베푼 자신이 뭘 잘못했냐며, 르베리안즈가 당당한 태도로 스스로를 변호했다.

“그냥 소개만 시켜 줬다 했느냐?”

밀라니아는 열받은 얼굴로 소리 없이 발광하는 그레칸을 흘끗하고 물었다.

르베리안즈는 으음, 손가락으로 입술을 툭툭 치며 활짝 웃었다.

“뭐, 친우로서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긴 좀 그렇잖아요. 발정기를 푸는 데 도움을 주려 했지요.”

“…….”

“키스만 하라고 했어요, 키스만. 다만 여자애가 좀, 적극적이라 아주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달까.”

밀라니아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르베리안즈가 억울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레칸이 씩씩거리는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다.

‘약간의 문제’의 범위에 대해서는 생각 차가 큰 모양이고.

“후우…….”

밀라니아는 은빛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가느다란 은색의 실타래가 폭포 치듯 등허리에서 출렁거렸다.

그레칸과 르베리안즈. 성인이 되었는데도 어릴 때랑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몸집이 커진 만큼 사고를 치면 골치가 배는 아프다는 게 차이점이라면 차이점.

“리비, 넌 그레칸이 싫어하는 일은 하지 말거라.”

“알았어요.”

“그레칸, 너는 이번 일로 앙심을 품지 말고. 아니, 내가 이런 기본적인 것도 말해 줘야 해?”

그레칸의 심통 맞은 표정이 눈에 띄었다. 밀라니아는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눈을 맞췄다.

“알겠느냐, 그레칸?”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가 저를 직시하니 그 눈빛을 거부할 수 없는 그레칸이 마지못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의 대답을 받아 낸 밀라니아는 손가락을 튕겨 결계를 해제했다.

“내가 이러니 매일 피곤하지.”

방해받은 낮잠 시간으로 뒤늦게 짜증이 슬그머니 올라온 밀라니아가 투덜거렸다.

아직 물러가지 않은 잠기운이 은색 눈썹 끝에 아롱아롱 달려 있었다.

손등으로 눈을 지그시 비비느라 밀라니아의 시야가 잠시간 차단되었다.

그 모습이 아쉬운 듯 입술을 핥던 르베리안즈의 눈에 들어왔다.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밀라니아가 몸에 힘을 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르베리안즈는 한 발의 화살처럼 그레칸에게 짓쳐 들었다.

“크륵!”

짐승의 본능으로 르베리안즈를 인식한 그레칸의 입술이 벌어지고 손톱이 길어졌다.

심령을 울리는 으르렁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귓가의 솜털이 곤두선 르베리안즈가 귀를 긁적였다.

“제대로 한번 해 봐야지, 그레칸.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애들 장난이나 할래.”

르베리안즈가 눈웃음을 치며 공중에서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웃는 얼굴과 달리 그의 주변 공기가 광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레칸이 입을 벌리며 크게 웃었다. 그야말로 광기가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니, 저것들이.’

밀라니아도 빠르게 가까워지는 둘을 인지했다. 맞부딪치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반성하는 척하던 것들이 눈만 떼면 저 지랄들이다.

어이가 없어서, 화를 내는 타이밍을 놓친 밀라니아는 뒤늦게 노화를 터뜨렸다.

“단단히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손가락을 튕기자 결계가 무섭게 솟구쳤다. 그러나 르베리안즈는 능란하게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여 목전에 생겨난 결계를 쉽사리 우회해 앞으로 나아갔다.

슉, 슉, 슉!

진로를 향해 생겨나는 끈질긴 결계를 요리조리 쏙쏙 피하며 그레칸과의 거리를 좁혔다.

마침내 손을 뻗으면 잡힐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자 르베리안즈가 그레칸에게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레칸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격돌이 일어나기 일촉즉발이었다.

‘덩치가 커진 만큼 잡기도 힘들어지는구나!’

밀라니아는 작은 결계를 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자잘한 결계보다는 압도적인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 부딪치는 건 기정사실일 듯싶으니 폭발을 막을 거대한 결계를 칠 생각이었다.

밀라니아의 두 눈이 그들 주변의 공간을 점하는 동안 르베리안즈는 이미 그레칸에게 바싹 다가가 있었다.

그의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레칸의 거친 머리칼을 스쳤다.

크아앙!

그레칸이 이빨을 드러낸 순간, 날카로운 송곳니를 피해 손을 기묘한 각도로 돌린 르베리안즈가 그레칸의 개목걸이, 정식 명칭 복종의 밤을 움켜쥐었다.

창백한 손목에 푸른 핏줄이 사납게 도드라졌다.

르베리안즈의 입꼬리가 거칠게 올라갔다. 평소에는 부드러운 표정을 짓지만 화가 날 때면 악귀와 다를 바 없어지는 그 표정이었다.

투둑!

“이제 이런 거 할 나이는 지났잖아.”

그레칸은 기묘한 눈으로 복종의 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결계를 치려던 밀라니아도 그 광경을 보았다.

검은 몸체의 귀물이 조각이 나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슬로 모션이라도 걸어 둔 것처럼 느리게 낙하하여 바닥을 만나 사방으로 비산한다.

십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레칸을 억압하고 강제로 명령을 듣게 만들었던 귀물이 수명을 다했다.

“…….”

밀라니아는 할 말을 잃었다.

15년 전에 예상하기를, 길어야 10년 갈 거라고 생각했던 물건이지만 무효화라 아니라 아예 망가져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런.”

머릿속에 말란도르가 스치자 그녀의 잇새로 난감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레칸의 시선이 밀라니아에게 닿았다.

대마녀의 직감상, 상당히 불길한 눈빛이었다.

“무엇인고?”

갑자기 그레칸이 있던 곳이 흐릿하게 보였다. ‘초점이 나갔나?’ 했지만 착각이라는 것을 소름 끼치는 바람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그레칸이 너무 빨리 움직여 눈이 그레칸의 잔상을 본 것뿐이었다.

밀라니아는 어느새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그레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본능적으로 손이 심장 부근으로 갔다.

복종의 밤이 효력을 잃자마자 심장을 노리는 건가!

‘아직 앨리지는 나타나지도 않았거늘!’

전생에 비교해 봐도 벌써 심장을 뜯기기에는 상당히 이르다.

‘아직 때가 안 되었지 않은가?’

억울해하던 밀라니아는 문득 이번 생은 예전 생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 증거로, 그레칸은 전생과 달리 아직도 힘을 각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 그렇지.’

지금의 그레칸은 자신의 심장은커녕 몸에 손을 대기도 힘든 무력 상황이다.

패닉에서 벗어나 여유를 되찾은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가슴 앞에 심장을 보호하는 결계가 생성되었다.

이제 그레칸이 심장에 손을 댄다면 가해진 힘만큼 뒤로 튕겨져 나갈 것이다.

빠르게 다가오는 그레칸을 보는 밀라니아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15년간 애지중지 키워 줬거늘, 앨리지가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뒤통수를 때리려고 해? 이번에야말로 마법을 쓰든 뭘 하든 정신 개조를 해야겠구나.’

밀라니아가 배신의 상처에 이를 갈 무렵 그레칸은 어느새 지척에까지 왔다.

웃통은 싸움 도중 갈가리 찢겨 날아가 버리고 바지 하나만 껴입은 그레칸의 근육이 폭발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한 대 맞으면 그대로 날아갈 것처럼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밀라니아는 약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레칸을 여유롭게 응시했다.

‘아무렴 네가 아무리 컸다 할지라도 내게 비하겠느냐.’

천지 분간 못하고 날뛰면 몽둥이로 때려 줄 작정으로 지팡이까지 소환해 두었다.

가까워진 그레칸과 눈이 마주쳤다.

순하고 열정적인 눈망울. 그녀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살기는커녕 투쟁심도 보이지 않는 얼굴.

‘응?’

그레칸이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눈빛이 불길하도록 진지했다.

“박쥐놈에게 농락당할 때 결심했다. 이런 짓은 밀라니아와 하겠다고.”

“무슨 헛소리를…… 읍!”

눈앞으로 확대된 그레칸의 얼굴. 밀라니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건 무슨!’

밀라니아가 움직이지 못하게 목덜미를 꼭 잡고는 그레칸이 입술을 비볐다.

밀라니아는 반사적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손바닥 아래, 맞닿은 근육질 가슴이 꿈틀거렸다.

‘이 미친놈이 또 무슨 짓인고.’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긴장한 스스로가 허탈하기도 하고 짜증스럽기도 하여 슬쩍 미간을 구겼다.

그레칸이 눈을 반짝 떴다.

유리알처럼 까만 눈과 눈이 마주치자 밀라니아가 그의 가슴을 툭 밀었다.

전과는 달리 그레칸은 순순히 밀렸다. 그는 눈을 깜박이며 탐색하듯 밀라니아를 살폈다.

반짝 뜨인 눈이 초롱초롱했다.

“밀라니아?”

한 손으로 입을 가린 밀라니아는 대꾸하지 않고 눈썹을 찌푸렸다.

당혹스럽기도 하고 은근히 기분이 나쁘면서도 황당한 것이, 말할 수 없이 이상한 느낌이었다.

얼굴을 구기고 입술을 박박 닦아 내었다.

‘발정기가 왔다더니 이상한 장난이나 치는구나.’

르베리안즈에게 나쁜 물이 들었는가.

단단히 교육시켜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하, 저 미친놈이.”

르베리안즈였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밀라니아와 그레칸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저건 왜 저러는고.’

르베리안즈의 얼굴에 떠오른 기막힌 표정에 밀라니아가 눈썹을 위로 치켜세웠다.

왠지 민망하고 떨떠름했다.

“이런 꼴을 볼 줄은 몰랐네?”

저 홀로 심각해진 르베리안즈에게 신경을 끄고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레칸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

부러 무뚝뚝하게 묻자 탐색하는 눈을 거둔 그레칸이 뭘 잘했다고 당당하게 대꾸했다.

“첫 키스는 소중한 사람이랑 해야 한다고 했다.”

“…….”

“박쥐 놈이 보낸 여자가 달려들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레칸이 진저리를 쳤다.

그러고는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칭찬해 달라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입술은 뺏기지 않았어.”

밀라니아는 묘한 눈으로 그레칸을 응시했다.

‘내가 미래의 늑대 수장이 아니라 바보 개를 키운 건가.’

그레칸이 좀 전보다 촉촉한 눈으로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눈빛만 반짝거린다.

“왜 그렇게 쳐다보누?”

떨떠름한 물음에 그레칸이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밀라니아는 첫 키스인가?”

뒤통수를 때리는 질문이었다. 밀라니아는 침묵했다.

‘얘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아까부터 속이 울렁거린다고 했더니 왜 그런지 깨달았다.

첫 키스니 뭐니, 그런 단어가 그레칸과 자신 사이에 통용될 수 있는 단어긴 하느냔 말이다.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속내는 하나도 모른다는 양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레칸이 고집을 부릴 때 하는 특유의 눈빛이다.

답을 듣기 전에는 물러나지 않을 태도였다.

답하는 대신 밀라니아는 표정을 엄하게 굳혔다.

“첫 키스는 소중한 사람과 하고 싶다면서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야?”

그레칸의 얼굴이 멍해졌다.

“소중한 사람.”

“그래.”

“나 아닌가?”

“뭐?”

“밀라니아에게 소중한 사람, 나.”

그레칸이 스스로를 가리켰다. 당당한 모습에 밀라니아가 웃자, 그 모습이 퍽 의미심장해 보였다.

그레칸은 눈을 깜박였다.

밀라니아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게다가 첫 키스도 아니다.”

까만 눈에 금이 갔다. 초롱초롱했던 눈동자가 금세 삭막해졌다.

“아니라고?”

그레칸만이 아니었다. 르베리안즈가 금빛 눈썹을 치켜올린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희한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를 번갈아 바라보고 밀라니아는 눈을 찌푸렸다.

‘눈빛 한번 불쾌한지고.’

“너희는 내 나이가 몇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10대 소녀처럼 뽀뽀 하나에 깜짝 놀라며 전전긍긍할 줄 아느냐.

그러자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영 떨떠름한 얼굴이라 밀라니아는 혀를 찼다.

“어쨌든 이제는 하다 하다 이상한 장난까지 쳐. 어디까지 하려고 그러는지, 쯧쯧.”

밀라니아는 아직도 돌처럼 굳어 있는 그레칸을 지나 르베리안즈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멍하니 있는 르베리안즈의 발치에서 부서진 복종의 밤 조각을 들고 한숨을 쉬었다.

‘말란도르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힐끗 르베리안즈를 보자 어느새 그녀보다 훨씬 커진 르베리안즈가 묘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꼭 전생의 르베리안즈가 떠올라서 밀라니아는 새삼스러운 기분에 젖었다.

그때와 다른 점은 살의를 품었던 눈빛에 호기심이 차 있다는 거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진 궁금하지 않았다. 물어봤자 본전도 찾지 못할 것이다.

상황이 정리됐단 판단에 그녀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숲 정리는 깨끗이 하고 나오려무나. 확인할 것이니 농땡이 피울 생각은 말고.”

한마디를 남긴 밀라니아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올랐다.

쌩, 하고 쾌청한 하늘을 가로지르며 사라지는 밀라니아를 올려다본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각자의 생각에 잠긴 시선이 미묘하게 어긋났다.

“내가 기대한 건 이런 게 아닌데. 네놈이 그녀에게 입을 맞출 때까지만 해도 재밌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군.”

르베리안즈의 미간이 좁아들었다. 불쾌해하는 그와 달리 그레칸은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르베리안즈의 혼잣말은 전혀 귀에 담고 있지 않고 있었다.

“나는 첫 키스인데 밀라니아는 첫 키스가 아니라면, 이건 뭐가 되는 거지?”

그레칸의 혼잣말을 캐치한 르베리안즈가 아름다운 얼굴로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시커먼 장난기가 꿈틀거리는 낯짝.

“그건 말이야…….”

의미심장한 말머리가 그레칸의 신경을 잡아끌었다.

확연히 굵어진 목울대가 불거졌다.

집중하는 시선을 받으며 르베리안즈가 사르르 웃었다.

“네가 물고기가 됐다는 거야.”

“……물고기?”

“전혀 생각 못한 점이긴 하지만, 오늘 보니 밀라니아에게 나와 비슷한 면모가 있는 것 같아. 그럼 뻔한 거 아니겠어.”

오해였으나, 생각에 잠긴 그레칸의 얼굴은 뭘 떠올렸는지 흙빛이 되었다.

“농락당하기 전에 알아서 발 빼.”

“그럴 리가. 밀라니아가 난봉꾼이라는 거냐?”

“난봉…….”

무심코 그레칸의 말을 따라 하던 르베리안즈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자유분방한 연애주의자란 거란다. 덜떨어진 늑대 자식아.”

그레칸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죽고 싶나 보지, 박쥐 새끼.”

“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해사한 미소가 번져 나가는 르베리안즈의 얼굴을 비춘 그레칸의 까만 눈이 반질거리기 시작했다.

르베리안즈의 붉은 눈동자 역시 거울처럼 번들거렸다.

쾅!

빗자루를 타고 마녀성으로 복귀하던 밀라니아는 손목이 삐끗했다.

하마터면 떨어질 뻔하지 않았는가.

혀를 차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쾅!

숲 한가운데서 뿌연 연기 같은 먼지가 피어올랐다.

안 봐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에 선했다.

밀라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정 미친놈들이로고.”

마녀성의 꼭대기 층으로 들어간 밀라니아는 빗자루에서 내리고 빗자루를 빗자루 걸이에 걸어 두었다.

방 안에는 먼저 온 마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용 의자에 앉아 있던 체라는 밀라니아의 등장에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이 시간이면 마녀들을 보고 있어야 시간 아니냐? 무슨 일 있느냐?”

“아, 말씀드릴 게…… 윽.”

체라가 코를 움켜쥐었다.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밀라니아에게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밀라니아 님이야말로 무슨 일 있으셨어요? 오늘따라 개 냄새가 짙게 나네요. 아이고, 코야.”

이제 붉은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까지 기른 체라가 괴로워하는 얼굴로 콧잔등을 실룩이고는 망토에서 약초 물뿌리개를 주섬주섬 꺼내 칙칙, 칙칙 분사했다.

밀라니아는 사방으로 퍼지는 약초 냄새에 제발이 지려 입술을 만지작대고 괜히 목을 울렸다.

“으음.”

향긋하고도 씁쓰레한 약초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자 체라가 그제야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고드려야죠. 좀 전에 제 패밀리어가 도착했어요.”

밀라니아가 쳐다보자 체라가 품에서 작은 노란색 카나리아를 꺼내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있던 카나리아가 까만 눈을 끔벅였다.

푸득, 날개를 살짝 떨치고 얌전히 갈무리한다.

“죄송해요. 날아오느라 피곤하다고 자고 있었거든요.”

미소를 짓고 밀라니아가 작은 새에게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잠기운을 몰아낸 카나리아는 가만히 다가오는 밀라니아의 검지를 보고 고개를 쑥 내밀어 황금색 부리를 비벼 댔다.

“귀족들의 살롱에 심어 둔 아이인데, 얘가 밀라니아 님이 말씀한 여자를 보았대요.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바로 찾아뵌 거예요.”

“뭐?”

밀라니아가 눈썹을 치떴다. 놀란 기색에 카나리아가 포로롱 날아가 체라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것도 모르고 밀라니아는 심각해졌다. 체라에게 말한 여자라면 한 명밖에 더 있겠는가.

그녀의 대계에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는 인물!

“앨리지?”

“예, 그 여자요!”

체라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밀라니아가 얼굴을 구기자 그녀가 좋아하리라고 예상했던 체라가 의아하게 물었다.

“안 기쁘세요? 무슨 문제라도.”

밀라니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귀족의 살롱이라 했느냐?”

“예.”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누.”

어리둥절해하는 체라에게 재차 확인했다.

“그 아이가 앨리지를 봤다는 게냐? 확실히 앨리지가 맞다던?”

밀라니아의 시선은 노란 카나리아에게 못 박혀 있었다.

체라가 카라니라의 둥그런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앨리지란 이름도 똑똑히 들었대요. 얼추 비슷한 것 같다고는 하는데, 확신은 못 하겠다네요.”

“어떻게 그 여자가 앨리지인 줄 알았는고?”

“그거야 밀라니아 님이 말씀해 주신 인상착의와 똑 맞아떨어졌으니까요. 사랑스러운 금발 머리에 깨끗한 숲처럼 맑은 초록색 눈. 이건 기본이고요.”

카나리아가 부리를 움직여 노래하듯 지저귀었다.

카나리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체라가 새소리를 해석했다.

“가까이 가면 기분이 좋아졌대요. 공기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고. 이건 밀라니아 님이 말씀하셨던.”

“그래. 치유와 정화의 능력이지.”

순수한 영혼의 짐승이 그렇게 느꼈다면 틀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카나리아의 증언을 사실로 잠정 결론 내린 밀라니아의 표정이 여전히 밝지 않자 체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이상하니까. 귀족의 살롱에 앨리지가 나타났다면 재상이 모를 리 없느니. 근데 다른 곳도 아니고 귀족의 살롱에 앨리지가 나타났다?”

밀라니아는 팔짱을 끼며 의자에 앉았다.

“예?”

어릴 적에 1대륙으로 온 체라는 인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밀라니아는 불가해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재상의 직위에 대해 아느냐? 황제를 위해서, 아니 제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귀족들을 감시하는 데 특화되어 있는 이가 재상이야.”

“귀족들 감시를 한다고요?”

“이권이 개입되면 이해득실을 따지며 어제 어깨동무를 하던 호형호제하는 친우끼리도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는 이들이 인간. 하물며 그들의 정점에 선 귀족들이야 상상도 못할 만큼 냉정하지.”

“아.”

“아무튼 근자에 보내온 재상의 전갈을 생각해 보거라. 분명 앨리지를 찾지 못했다고 했느니. 그런데 귀족의 살롱에 앨리지가 왔다라. 이상하지 않으냐?”

물음표로 말을 맺은 밀라니아의 금빛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이해한 체라의 눈꼬리에도 분노가 묻어 나왔다.

“그건 일이 이상하게 틀어졌다는 뜻이지.”

재상이 귀족들을 감시하지 못할 만큼 형편없어졌거나, 앨리지를 발견했지만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거다.

 두 가지 외에 다른 이유는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이것 봐라.’

밀라니아가 입술 끝을 의미심장하게 말아올렸다.

어찌 된 일이냐고 재상에게 당장 서신을 날릴 수도 있다.

그러나 혹여 그가 다른 꿍꿍이속이 있을 경우, 되레 앨리지를 꽁꽁 숨기는 사태만 벌어질 수 있기에 그 방법은 접어 두는 편이 현명할 터.

생각을 마친 밀라니아가 우아하게 일어나자 체라가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앨리지는 내가 반드시 찾아야 하는 인물이야. 문제가 생겼다면 직접 움직일 수밖에.”

손가락을 튕기자 벽에 걸려 있던 빗자루가 그녀의 손에 잡혔다.

창가로 다가가 빗자루에 올라타며 밀라니아는 체라에게 당부했다.

“말란도르에게 갔다 오마. 돌아온 뒤에는 곧장 2대륙으로 갈 테니, 미리 채비 좀 해 놓으려무나.”

“예? 이렇게 갑자기요?”

창가로 바짝 다가선 체라가 이미 하늘로 떠 버린 밀라니아에게 소리쳤다.

“밀라니아 님!”

공중에서 홱 빗자루를 돌린 밀라니아가 말했다.

“시간이 많지 않느니라.”

바람을 가르며 비행하는 밀라니아의 표정은 무심했지만 속내는 복잡하게 뒤엉키고 있었다.

‘르베리안즈와 그레칸을 거두는 건 어느 정도 성공했지. 게다가 아직까지도 앨리지와 만나지 않았어. 이 정도만 해도 큰 수확이나……. 역시 앨리지가 변수로구나.’

이 세계의 운명은, 시나리오는 명확했다.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는 앨리지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연인을 보며 가슴 아파한 둘은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불치병의 치료약인 대마녀의 심장을 노리게 된다…….

‘언제 봐도 3류 통속극 같은 이야기로고.’

여기서 문제는 그렇게 죽게 될 경우 회귀한다는 사실이었다.

무사히 영면에 드는 것만이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앨리지의 병을 낫게 하려면 그녀를 만나 봐야 하거늘.’

어떻게 보면 간접적인 원수인 앨리지지만, 밀라니아는 그녀를 치료하기로 결심했다.

문제의 원인인 앨리지의 마녀병을 치유하게 되면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달려들 일도 없게 될 거라는 계산이었다.

병을 치료하는 것도 다 생각이 있었다. 자신이 영면에 들기 직전, 그때가 적기.

영면에도 들 수 있고 앨리지를 치료할 수도 있는 방법을 곱씹었다.

문득 밀라니아는 잠잠해진 숲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는 어디에 있을까.

찜찜한 마음에 혀를 찼다.

‘눈에 보여도 골치, 안 보여도 불안이니 원.’

이대로 가다간 최초로 스트레스로 영면을 당긴 대마녀가 될 듯하여 밀라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른 앨리지의 병을 고치고 그녀의 품에 둘 다 던져 버려야지 이대로는 곱게 죽지도 못하겠느니.’

숲을 넘어가면서, 그녀는 동화책을 읽고 난 뒤 그레칸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날 그레칸은 다른 때와 달리 복잡한 표정으로 조용히 물었다.

[요정이란 게, 실제로 있는 건가?]

[그건 왜 묻는 게냐?]

[악몽에 나온다.]

[그게 무슨 말이고?]

[요정이 꿈에 나와.]

진지한 얼굴로 그레칸이 하는 말을 듣는 순간 밀라니아는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레칸은 이상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밀라니아의 충격에 쐐기를 박았다.

[얼른 만나러 와 달래. 왤까? 기분이 이상하다.]

밀라니아가 알기로 앨리지에겐 꿈에 간섭하는 능력은 없었다.

온 자연과 세상이 사랑하는 앨리지.

그 사랑에 보답하듯이 생명을 치유하는 능력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랑스럽고 소중한 요정.

그런고로 그레칸이 꾼 꿈은 앨리지의 영향이 아니라고 볼 수 있지만, 밀라니아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단일 개체로서 운명을 거스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이렇게 알려 준다, 이것인가.”

어떻게든 원래의 운명대로 돌아가게 하려고 세상이 농간을 부린 게 분명했다.

아주 기껍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제 손으로 키워 낸 그레칸과 르베리안즈에게 억울하게 심장을 뺏기지 않으려면 이제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이 세상의 강제력에 저항하기 위해 밀라니아는 본격적으로 행동할 것을 다짐했다.

한편, 밀라니아가 떠난 방에서는 체라가 시키는 대로 여행 가방에 밀라니아의 짐을 챙기고 있었다.

약간 다른 점이라면 옷가지를 챙기는 보통의 여행 짐과 달리 체라는 약초 꾸러미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다는 거였다.

창문을 통해 훅 들어온 바람을 느낀 체라가 고개를 들었다. 밀라니아가 서 있자 놀라 눈을 끔벅거렸다.

“왜 벌써 오셨어요?”

순식간에 말란도르의 저택까지 갔다 온 밀라니아는 체라가 싼 짐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없더구나.”

“없었어요?”

“그래. 뭐, 늘 있는 일이지. 노예로 만들고 싶은 여자라도 발견한 게 아니겠느냐.”

“거참, 흑계인에 대한 평가가 박하시네요.”

쩝, 입맛을 다시는 체라에게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밀라니아가 물었다.

“근데 체라, 냄새 제거제는 왜 챙기는 게냐?”

“예? 당연히, 필수품이니까요?”

체라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밀라니아는 의구심에 휩싸였다.

“그게 왜 필수품이냐?”

“그거야 당연히 그레칸과 르베리안즈 때문이죠.”

“무슨 소리냐. 이번 원정은 나 혼자 갈 것인데.”

“예?”

당황스러워하는 체라에게서 밀라니아는 가방을 뺏어 들었다.

안을 흘끗 보고는 필요한 건 넣고 아닌 건 빼고는 가방을 등에 맸다.

“얼마나 걸린다고 골치 아픈 놈들까지 챙겨. 나 혼자 갔다 올 테니까 성이나 잘 보고 있으려무나.”

“하이고, 밀라니아 님. 그럴 수는 없어요. 마녀족의 수장을 수행원도 없이 혼자 보낸다고요?”

체라가 완강히 거부했지만 밀라니아는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사실 고민이야 많았다. 물가에 애를 내놓으면 걱정이 되는 게 인지상정.

천방지축을 둘이나 내버려 두고 가는데 불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2대륙의 동태만 살피고 올 터인데 별일이야 있으려고.’

더더군다나 마녀성에만 있어도 사건 사고가 터지는데 나가면 얼마나 골치가 아플지, 그걸 생각하면 도저히 둘을 대동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느니라.”

“혼자 가시면 누가 밀라니아 님을 보필한다고요? 저라도 무조건 따라가야 해요.”

“너 없으면 마녀성은 누가 보누? 마녀성의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으려무나. 낯선 이가, 특히 요정족이 나타나면 무조건 나에게 연락하거라. 그레칸과 르베리안즈에게도 패밀리어를 붙여 둬야 한단 거 잊지 말고.”

“예? 그건 또 왜요?”

“무슨 사고를 칠지 몰라서 그러느니.”

체라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밀라니아 님,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미 밀라니아는 창을 빠져나가 거친 빗자루 꽁무니만 보일 뿐이었다.

체라는 허탈한 얼굴로 못다 한 말을 이었다.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창가로 다가가자 어찌나 빠르게 비행하는지 밀라니아는 벌써 손바닥 크기만큼 작아져 있었다.

체라는 저도 모르게 창밖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15년 넘게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를 길렀던 밀라니아다.

무심한 성격 때문에 그녀는 눈치채지 못한 듯하지만, 체라에겐 선명히 보였다.

수인 본연의 귀소 본능.

수인들은 그들의 영역으로 돌아가려는 본능이 매우 큰 편이다.

그건 그레칸과 르베리안즈에게도 통용되는 본능이었다.

문제는 그레칸과 르베리안즈에게 그들의 영역이란…….

가까워지는 하나의 검은 점을 본 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검은 점은 점점 가까워져서, 곧 하늘을 덮을 듯이 커다란 날개가 되었다.

검은 날개는 체라가 있는 마녀성을 지나쳐 밀라니아가 사라진 방향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평소에 밀라니아를 감시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속도였다.

“르베리안즈가 가만히 있을 리 없지.”

그렇다면 날개가 없는 그레칸은 어디 있을까?

만날 아옹다옹하는 사이니 르베리안즈가 그레칸을 데리고 갈 리 없고, 방금 지나간 르베리안즈도 홀몸이었다.

그 순간.

바스락! 쿵! 바스락! 쿵!

귀를 자극하는 소리에 체라는 시선을 쑥 내렸다. 나무들이 움찔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저기 있었네.’

얼마나 거세게 돌진하면 나뭇잎이 풍 맞은 것처럼 흔들릴까.

나뭇가지 위에 앉아 한가로이 털을 뽑고 있던 새들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예상이 모조리 들어맞았다. 체라는 신음 같은 찬성을 흘렸다.

‘처음에야 냄새 때문에 기피했지, 이제는 저 둘에게 익숙해졌단 말씀이야. 당연히 밀라니아 님을 쫓아갈 줄 알았어.’

밀라니아는 아마도 기겁하겠지만.

“혼자 가시는 것보다는 나으려니 해야지 뭐.”

아무리 강력한 대마녀라지만 온갖 암투와 음모가 휘몰아친다는 인간 대륙이 목적지. 그러니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라도 따라가는 게 낫지 않겠는가.

‘폭탄 같긴 해도 어지간한 인간들은 덤비지도 못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왜 이렇게 불안해지는 걸까.

체라는 손을 살짝 폈다. 노란 카나리아는 손바닥 위에서 파닥파닥 날갯짓을 했다.

체라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밀라니아 님을 살펴봐 주렴.”

화답하듯 체라 주변을 한 바퀴 돈 카나리아가 마지막으로 밀라니아를 쫓아 날아가기 시작했다.

* * *

거침 없이 쭉쭉 날아가던 밀라니아는 망망대해처럼 넓게 펼쳐진 숲 위에서 빗자루를 멈추었다.

정면을 향하는 그녀의 눈이 적을 발견한 것처럼 날카로워졌다.

그 입에서 난감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로 가야 하느냐.”

그녀는 주섬주섬 짐을 풀어냈다. 체라가 미처 챙기지 못한 그녀의 필수품. 바로 마법 나침반이었다.

대마녀는 인간, 늑대족, 박쥐족, 요정족과 더불어 세계의 균형 한 축을 담당하는 존재지만 마법은 만능이 아니었다.

방향을 가늠한다든지, 공간 확장 물건을 만든다든지, 그런 편리한 마법은 보통 마녀보다는 마법사에 의해 발전되었다.

밀라니아는 나침반을 작동시키고 방향을 가늠했다.

“워낙 오래전에 가 본 길이라 기억이 나야지, 원.”

괜히 혼자 간다고 그랬나.

비비가 있다면 길잡이로 부렸을 텐데, 하필이면 짝을 찾아 떠나 버려 며칠째 보이지도 않았다.

아직 인간 대륙에 도착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길을 잃은 데 대한 불안감을 품고 밀라니아는 다시 출발했다. 아니, 출발하려고 했다.

밀라니아의 빗자루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구름이 꼈나?’

그러나 구름의 그림자라기엔 지나치게 선명하고 협소했다.

살짝, 위를 올려다본 밀라니아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날개를 활짝 편 르베리안즈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날개를 펄럭이자 그림자도 날개가 움직이는 모양에 따라 변화했다.

날갯짓이 일으킨 바람에 밀라니아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렸다.

새빨간 입술이 옆으로 길게 찢어진다.

마녀들이 아름답다고 찬양하는 그 미소였으나 호선을 그리는 입술과 달리 얼어붙은 눈은 붉게 번뜩였다.

“어디 가요, 밀라니아?”

꿀꺽.

팔꿈치 아래 살결에 소름이 오도도 돋아나서, 밀라니아는 스윽 팔목을 문질렀다.

“때마침 밀라니아의 방을 보고 있어서 다행이었지 하마터면 놓칠 뻔했잖아요.”

태연하게 투덜거린다.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핀잔을 주었다.

“놓치다니 뭘 놓친다고 그러느냐. 채집할 약초가 있어 가는 중인 게다. 뭐 궁금한 게 있다고 쫓아와.”

지레 찔려서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중얼거렸더니 르베리안즈의 눈초리가 묘해졌다.

불현듯 아래가 소란스러웠다.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자 수풀이 들썩이고 있었다. 밀라니아의 입술이 설핏 일그러졌다.

“그레칸까지 끌고 왔느냐?”

확실히 짐승은 짐승이었다. 촉이 어찌나 날카로우면 이리 바로 쫓아올까.

2대륙행에는 물론 앨리지의 행방을 찾기 위함이지만, 지긋지긋한 사육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한 티스푼 정도 있던 밀라니아는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제가 끌고 온 거 아니에요.”

르베리안즈가 시큰둥한 시선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날개를 펄럭였다.

팔락, 팔라악.

쿵! 사사삭! 쿵! 쿵쿵!

느릿한 날갯짓 소리와 수풀 들썩이는 소리가 밀라니아의 귀를 연달아 쿡쿡 쑤셔 댔다.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는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각각 땅과 하늘에서 밀라니아를 압박하고 있었다.

‘거머리가 따로 없구나.’

늑대족 수장 발칸과 박쥐족 수장 스칼렛의 위협에도 무심을 유지했던 밀라니아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리고 밀라니아, 그 짐은 약초를 채집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

르베리안즈가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뜨끔한 밀라니아가 등 뒤를 흘끗했다.

제법 큼지막한 것이 누가 봐도 여행용 가방이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였다.

“약초란 게 다 손가락 크기만 한 줄 아느냐. 어린애 몸집만 한 것도 있느니.”

“어딜 가려는 건 아니고요?”

밀라니아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펄쩍 뛰었다.

“생사람 잡는구나. 마녀족의 수장인 내가 어딜 간다는 것이야. 가 봐야 마녀숲이지.”

“다정하고 무결한 밀라니아.”

르베리안즈의 표정이 부드러워지자 밀라니아는 통했나 싶으면서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혼신의 사육으로 키워 낸 이 두 놈은 집요하기가 이를 데 없어 안심을 하다가도 뒤통수를 쳐 대기 때문이다.

특히 순박한 그레칸에 비해 뇌가 베베 꼬인 게 분명한 르베리안즈는 자다가도 안심을 하면 안 된다.

숙면 중에도 어딘지 기분이 이상하여 눈을 뜨면 어김없이 르베리안즈가 쳐다보고 있지 않았던가.

음험하고 음습한 것 같으니. 내심 중얼거렸다.

“밀라니아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니 알겠어요. 할 일이 있는 모양이니 저는 얌전하고 예쁘게 기다릴게요.”

그러고 스윽, 르베리안즈가 정말로 몸을 돌리자 밀라니아는 눈을 깜박였다.

‘저놈이 웬일이고?’

그녀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배려하려는 모습 아닌가.

마치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어 효도를 하는 다 큰 자식놈을 마주하는 어머니가 된 기분으로 밀라니아는 감동해 버렸다.

반쯤 몸을 돌렸던 르베리안즈가 고개를 홱 뒤로 돌렸을 때는 부드러운 미소까지 지어 주었다.

르베리안즈가 배배 꼬인 목소리로 투덜거리기 전까지만 해도.

“근데 평소보다도 너무 다정하잖아요. 그것만큼 이상한 게 없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르베리안즈가 밀라니아를 덮쳤다.

쉬익!

간신히 그를 피한 밀라니아는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다시 쫓아 들어오는 르베리안즈의 행태에 분노했다.

“다정하게 대해 줘도 지랄이구나, 이건!”

안심시키는 척 뒤통수를 치는 게, 역시 음흉한 르베리안즈답다.

밀라니아가 이를 갈자 르베리안즈는 묘하게 더 기뻐 보이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요, 그게 더 밀라니아다워요!”

“그럼 됐잖느니. 왜 따라오는 것이야?”

밀라니아는 빗자루가 허락하는 최대치로 출력을 높였다.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지그재그 전술까지 써 봤지만 과연 날개 달린 족속이라, 르베리안즈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밀라니아가 그렇게 하면서까지 어딜 가려는지 궁금해서요.”

태연한 대꾸에 밀라니아는 속이 답답해졌다.

“어디 가는 거 아니라니까.”

달래듯이 말하자 르베리안즈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와중에도 손을 뻗어 빗자루를 낚아채려는 것에 밀라니아는 끄응, 힘을 주어 위로 솟구쳤다.

“그럼 왜 나를 이렇게 떼어 놓으려고 해요?”

“그건…….”

“거봐요, 말 못 하네.”

2대륙으로 간다는 말을 한다면 대륙 끝까지 따라붙을 기세였다.

떠나기 전에는 곁에 두고 감시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아주 조금은 있었으나, 이 집요함을 보니 다시금 생각이 확고해진다.

데려갔다간 될 일도 망할 것 같다.

“그건, 그건…….”

“억지로 생각해 내지 마요.”

르베리안즈의 여유로운 말투에 밀라니아의 눈썹이 꿈틀했다.

마녀 하나를 완전히 매도하는 말투이지 않은가.

사실 르베리안즈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무례한 말투에 빈정이 상한 밀라니아는 거센 바람을 얼굴로 맞으면서도 엄숙하게 일렀다.

“억지로 생각하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네가 상처받을까 봐, 그게 걱정되어서 그런 것이로다.”

“별 걱정을 다 하는군요, 난 상처 안 받아요.”

그렇게 말해도 밀라니아가 상황을 피하기 위해 그런다고 생각한 듯, 르베리안즈는 애잔한 웃음까지 흘렸다.

밀라니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사실대로 말해 주련?”

빗자루를 타고 날아가며 밀라니아는 그를 뒤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르베리안즈가 눈매를 휘며 눈웃음을 쳤다.

“얼마든지요.”

그 얼굴에 대고 밀라니아는 크게 외쳤다.

“네가 너무 귀찮구나!”

흠칫.

밀라니아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이게 아니거늘.’

원래 머릿속으로 생각한 건 이거였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구나.’

열받고 짜증 오른 마음이 멋대로 솔직해져 버렸다.

마법으로 시간을 돌릴 수 없는 것처럼 한번 뱉은 말도 돌이킬 수 없다.

르베리안즈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졌다.

“뭐라고요?”

날개를 움직이는 것도 잊은 듯, 떨어질 뻔했다가 다시 위로 올라온다.

수습이 될까.

“……잘못 말했도다.”

씨알도 먹히지 않는 얼굴.

“그래. 나도 내가 이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요?”

더 안 좋아지는 표정. 밀라니아는 슬쩍 몸을 뒤로 뺐다.

“에잉, 쯧쯧.”

예기치 않은 사고였지만 이미 벌어진 일.

르베리안즈의 반응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속도가 늦춰진 틈을 타 그녀는 빠르게 날아갔다.

르베리안즈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가 귀찮아?”

‘이 내가?’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는 듯 가느다랗게 경련하는 목소리였다.

하얗고 긴 손가락 사이로 꿀 같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얽혔다 풀어졌다.

매끄럽게 빠진 눈매 속 동그란 눈동자가 새빨갛게 번뜩였다.

“어이가 없군요.”

밀라니아는 펄럭이는 소리가 커지자 깜짝 놀랐다.

벌써 쫓아왔다고?

혹시나 하여 곁눈질을 하자 바람이 날갯짓에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생생히 났다.

아까보다도 훨씬 빨라진 속도에 그녀는 혀를 내둘렀다.

아무래도 그녀의 빗자루보다 신체 부위인 르베리안즈의 날개의 성능이 더 뛰어난 건 어쩔 수 없는 듯했다.

곧이어 바싹 약이 올랐는지 스산한 목소리가 밀라니아의 귓가를 간질였다.

“평생 귀찮을 텐데 벌써 귀찮아하면 어떡해요, 밀라니아.”

밀라니아는 바로 옆으로 다가온 그의 얼굴에 귀신이라도 본 듯 식겁했다.

상냥하게 속삭이는 것은 평소와 같았지만 그림처럼 굳어진 미소와 희미하게 들리는 이 가는 소리가 르베리안즈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저러다 발작하겠구먼.’

밀라니아는 침착하게 르베리안즈의 상태를 가늠하고, 빗자루에 마력을 퍼부었다.

최대치로 출력한 빗자루가 쑥, 앞으로 뽑혀 가듯 나아갔다.

눈 깜짝할 새 없이 사라진 밀라니아의 모습에 르베리안즈는 이를 갈고 그녀의 뒤를 쫓았다.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늘에는 이소를 하기 위해 삼각형 대형을 유지하며 날아가던 물새 떼가 있었다.

유유자적하게 하늘을 나는 물새 떼 옆으로 바람이 불었다.

물새 떼가 어리둥절하게 지저귀는 순간.

쌩, 밀라니아가 지나갔다.

그 뒤를 이어 르베리안즈가 슉, 하고 지나갔다.

째액―!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에 새 떼는 혼비백산했다.

특히 끝에서 따라가던 비교적 어린 새들의 몸은 빙그르르 돌아가기까지 했다.

흘끗, 뒤를 확인한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마법으로 일으킨 바람이 새 떼들을 원상 복귀시켰다.

“짹?”

넋이 빠진 새들이 다시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휘말리지 않으려는 듯 날갯짓 속도가 배가 되었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느니.’

밀라니아는 대책을 강구했다.

‘하늘은 르베리안즈가 더 유리한 터. 환경을 바꿔 보자.’

결정한 밀라니아는 지체 않고 땅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갑자기 사라진 밀라니아를 따라 밑을 내려다본 르베리안즈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성큼성큼. 1초가 다르게 나뭇잎 푸릇한 숲이 가까워지는데도 밀라니아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푸드드득!

새들이 놀라 날개를 털어 냈다.

울창한 나뭇잎을 통과하고서야 빗자루를 노련하게 움직여 속도를 늦춘 밀라니아는 나뭇가지 사이로 여유롭게 날아갔다.

‘장애물 많은 숲에서는 르베리안즈의 속도를 늦출 수 있을 것이니.’

하늘처럼 속도를 빠르게 내지 못하는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르베리안즈를 떨쳐 내려면 하늘길보다 숲길이 더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었다.

과연 수가 잘 통했는지 뒤따라오던 날개 소리가 멀어졌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날개가 달렸대도 몇백 년 빗자루를 타고 다닌 자신을 이길 수가 있겠는가.

피식, 미소를 지은 밀라니아가 막 커다란 나뭇가지 위를 지나가려는 찰나였다.

확!

육중한 무게감이 그녀를 덮쳤다.

위에서 떨어져 내린 하중까지 더해진 무게를 짊어진 빗자루가 크게 흔들렸다.

무겁고 단단한 뭔가 목을 부둥켜안는다. 밀라니아는 일단 빗자루를 진정시키는 데 애를 썼다.

그러나 이곳은 뻥 뚫린 하늘이 아니고 복잡한 숲속이었다.

밀라니아의 진행 방향에 거대한 도토리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쾅!

결국 빗자루의 끝이 정면에 있는 나무의 몸통을 치고 뒤로 크게 튕겨 나갔다.

우당탕!

그대로 숲 바닥에 떨어진 밀라니아는 누군가에게 꽉 끌어안긴 채 바닥을 굴렀다.

데구루루루.

한참 굴러가던 몸은 나무 밑동에 닿아 그제야 멈춰 섰다.

강력한 마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체력은 평범을 간신히 웃도는 밀라니아는 몸이 멈추었음에도 머리가 빙그르르 돌았다.

‘……정녕 이러다가 죽겠구나.’

어지러운 머릿속을 가라앉히려는 그녀의 귀로 후욱, 후욱 낮은 숨소리가 꽂혀 들어왔다.

‘이 숨소리, 체온, 기척.’

밀라니아는 자신을 꽉 끌어안은 그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진즉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던 듯 투명하지만 까만 눈과 마주쳤다.

밀라니아는 한숨을 삼켰다.

“비키거라, 그레칸.”

혹여 밀라니아가 머리를 다칠까 뒤통수를 소중하게 안고 있던 그레칸은 손을 슬금슬금 움직였다.

머리를 쓰다듬는 기색에 밀라니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다치치는 않았다.”

그레칸이 진지하게 말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밀라니아는 안도하는 그레칸의 가슴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빗자루는 떨어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짐은 낙하의 충격으로 짜부라진 것 같았다.

“네가 나무에서 뛰어내리지만 않았어도 구를 일도 없었느니.”

밀라니아가 엉망이 된 머리를 쓸어내리며 말하자 누워 있던 그레칸도 벌떡, 상체를 일으켜 책상다리를 하고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밀라니아는.”

“…….”

“어딜 가려고 했던 거지?”

순박했던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밀라니아는 멈칫하고 그를 지그시 응시했다.

평소와 같은 적당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약초를 채집하러 가는 길이란다.”

비웃던 르베리안즈의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약초?”

그레칸은 빗자루와 여행 가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순수한 눈망울에 의구심이 번져 나가는 걸 보면서도 밀라니아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마녀숲의 외진 곳으로 가려는 거였느니. 르베리안즈도 그렇고, 내가 어딜 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야? 내가 그레칸 너를 두고 어딜 간 적 있었느냐?”

밀라니아가 뻔뻔하게 말하자 그레칸은 눈을 끔벅였다. 고개를 젓는 얼굴이 퍽 무구했다.

“아니.”

“그렇지? 그러니까 돌아가서 착하게 기다리고 있으려무나, 착한 늑대야.”

밀라니아의 목소리가 아주 약간 다정해졌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게 눈에 보이는 르베리안즈와 달리 양순한 그레칸을 보자 마음이 움직였다.

내친 김에 그레칸의 탐스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그레칸이 특유의 기분 좋아하는 얼굴로 눈을 살그머니 감았다.

밀라니아는 좋아하는 얼굴을 살피고 슬쩍 손을 뗐다. 그리고 살금살금 걸어가 빗자루를 챙겼다.

떠나려는 순간.

사박.

“어디가요, 밀라니아?”

뒤에서 들려오는 해맑은 목소리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 과하게 산뜻한 목소리. 얄밉기가 그지없다!

‘벌써 따라온 것인고?’

옷자락이 잡아당겨지는 감각에 고개를 슬쩍 떨어뜨리자 납득시킨 줄 알았던 그레칸이 망토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밀라니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 * *

잠시 후, 밀라니아는 뚱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등에는 배낭이 있고 발치에는 빗자루가 놓였다.

여차 하면 당장 빗자루를 들고 도망갈 수 있겠지만…….

그녀는 슬쩍 좌우를 곁눈질했다. 각각의 퇴로에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절묘하게 자리하고 있다.

‘내가 무슨 극악한 범죄자도 아니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돌아가거라.”

“싫다.”

그레칸이 대꾸했다.

그는 밀라니아가 자신을 두고 떠나려 한다는 걸 확실히 깨닫고는 돌을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통이 난 그레칸을 본 밀라니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가도 돼요, 밀라니아.”

날개를 곱게 접은 채 말하는 르베리안즈. 반신반의하게 쳐다보자 그가 붉은 입술을 씨익 들어 올렸다.

“우리도 따라가면 되죠. ‘보디가드’로서.”

‘그럼 그렇지.’

보디가드야 말장난이고, 귀찮게 따라붙는다는 것이 아닌가.

“감히 누가 나를 해하겠느냐. 그런 건 필요 없느니.”

밀라니아의 냉랭한 말에 둘은 즉각 대꾸했다.

“필요해요, 밀라니아.”

“필요하다.”

매번 싸우면서 이럴 때마다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왜?”

“밀라니아는 할 줄 아는 거 빼고 다 못하니까요.”

“약하다, 밀라니아는. 그래서 내가 필요해.”

대답은 달랐지만 둘 모두 미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밀라니아는 삐뚜름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밀라니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실랑이를 하느라 시간이 다 가서 벌써 어슴푸레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닌데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새어 나오는 한숨을 바람결에 흘리며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떼어 내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 어쩔 수 없다.

‘차라리 데리고 다니며 감시할 수밖에.’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하거라.”

“약속?”

어리둥절한 시선과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대륙으로 가면 전에는 만난 적 없는 수많은 이들을 만나게 될 거란다. 그래. 그들 중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야.”

“으응?”

르베리안즈와 그레칸의 눈빛이 미묘해졌다.

해괴한 소리를 한다는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밀라니아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일이로다. 그러나 만약 사랑하는 여자를 만난다면 뭔가를 하기 전에 내게 먼저 얘기를 하려무나. 그게 내가 너희들에게 유일하게 바라는 것이니.”

그레칸과 르베리안즈의 멀뚱멀뚱한 시선에 밀라니아는 그거면 됐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레칸이 흐려진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이번만큼은 나도 모르겠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죠? 암시의 일종인가요?”

“혹시 나를 해치고 싶어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보라는 얘기란다. 예를 들어 갑자기 심장을 뜯고 싶다든가…… 그러고 싶어도. 내가 너희를 키워 준 정을 생각해 보는 게야. 알았느냐?”

앨리지와 두 사람이 만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긴장이 된 밀라니아가 목소리에 힘을 주자 두 사람은 얼굴을 찌푸렸다.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에 밀라니아는 뭐라고 한마디 해 볼까 하다가 포기했다.

열심히 설명하고 설득한다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닐 테니.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세계가 유도하는 자신의 결말이, 괴물처럼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밀라니아는 느낄 수 있었다.

‘이번만큼은 다른 결말을 만들어야 하느니.’

밀라니아는 흘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야영 준비를 해야겠구나.”

한 시간 후.

틱, 탁.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붉은 불꽃이 주는 평온한 온기에 밀라니아의 날카로운 눈매도 부드러워져 갔다.

주변에서 채집했던 열매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달콤하고 씁쓰레한 과즙이 혀를 적시고 목구멍 너머로 넘어간다.

밀라니아가 열매를 반쯤 먹어치울 무렵 정면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뒤에서는 삭, 삭 덤불이 들썩이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밀라니아는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무심한 표정으로 하늘하늘 흔들리는 모닥불의 불꽃만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의 앞뒤에서 소리가 멎었다.

스르윽! 쿵!

밀라니아의 옆으로 무거운 뭔가가 떨어졌다.

“밀라니아, 내가 뭘 가지고 왔는지 봐라.”

들뜬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레칸.

“딱 봐도 보잘것없는 짐승의 사체군.”

비웃는 목소리는 하늘에서 들려왔다.

앞에서 불어온 바람 소리는 르베리안즈의 날갯짓 소리였고, 뒤에서 난 덤불 소리는 그레칸이 등장하는 효과음이었다.

밀라니아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이를 드러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밀라니아는 무념무상으로 열매만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말린다고 들어먹어야 말이지.’

어찌 된 일인지 자신이 말리기만 하면 불에 기름을 넣는 것처럼 싸움은 격화되었다.

[지금 저 자식 역성을 드는 거예요?]

[박쥐 새끼가 아니라 내가 잘못했다는 것인가? 기분이 좋지 않다.]

서로 상대방 편을 드는 거냐며 어찌나 억울해하던지.

그런 일을 몇 번 겪고 나자 마녀성과 숲을 망가뜨리는 일이 아닌 이상에야 끼어들지 않았다.

어차피 자기들끼리 투닥대다가도.

“밀라니아, 먹을거리를 찾아왔는데 뭐가 더 좋아 보여요?”

이런 식으로 자신을 끌어들이니까 말이다.

어금니 사이로 푸른 열매를 톡톡 터뜨리며 밀라니아는 르베리안즈가 들고 있는 커다란 버섯을 바라보았다.

르베리안즈가 좋아하는 건 싱그러운 혈액, 그리고 과채 종류의 음식이다.

반면 그레칸은.

“2대륙까지 가는 길인데 그런 풀뿌리 같은 걸로 되겠나. 적어도 이런 거 한 덩이는 먹어 줘야지.”

완전 육식파.

코웃음을 친 그레칸이 등에 매단 거대한 멧돼지를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쿵!

살기 위해 또래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사냥을 시작했던 그레칸은 이제 사냥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웃통을 깐 구릿빛 상체가 근육으로 매끄러웠다.

정교하고 정확하게 목을 딴 멧돼지는 당장 가죽을 벗겨 굽기만 하면 될 것처럼 완벽히 손질되어 있었다.

르베리안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냄새 나니까 너나 처먹으렴.”

“허약한 비실이는 꺼져라.”

서로를 노려보는 눈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쓰으.”

“크르릉.”

상대를 향해 이를 드러내는 두 사람을 보는 밀라니아의 눈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멱살을 잡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이 돌연 그녀를 홱 돌아보았다.

밀라니아는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두 쌍의 눈동자를 보자 편두통이 도지는 것 같았다.

“밀라니아, 뭘 먹고 싶어요?”

“약한 체력을 북돋기 위해서는 고기를 먹어야 한다.”

늘씬하고 고혹적인 르베리안즈와 덮치는 것만으로 상대를 기절하게 할 것 같은 그레칸의 큰 덩치를 번갈아 본 밀라니아가 손바닥에 남아 있는 열매를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쯧쯧 혀를 찼다.

얘들은 왜 이런 무익한 걸로 다툴까.

‘언제 클려는지.’

혀를 차면서도 밀라니아의 손가락은 정확하게 한곳을 가리켰다.

“후!”

선택을 받은 르베리안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외면받은 그레칸의 입가는 천천히 일그러졌다.

“난 고기 싫어하느니.”

멧돼지보다는 버섯이 낫도다.

밀라니아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르베리안즈가 피식 웃으며 나뭇가지에 버섯을 꽂아 모닥불 앞에 앉았다.

“아직도 밀라니아의 취향을 모르다니 한심하여라.”

“…….”

“역시 밀라니아를 가장 잘 아는 건 나밖에 없군요.”

그레칸을 놀리는 게 퍽 좋은 듯 르베리안즈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레칸은 만약 늑대의 귀였다면 축 처져 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시무룩하게 가라앉은 그레칸이 못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밀라니아, 고기를 먹어야 해. 밀라니아는…… 너무 약하니까.”

‘쟤는 왜 아직도 내가 약하다고 그러누.’

짜증이 치민 밀라니아는 고개를 들었다가 어느새 바싹 가까이 다가온 그레칸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가느다란 손목을 심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밀라니아는 어쩔 수 없이 목전에 다가온 그레칸과 자신의 손목을 비교했다.

색이 짙고 두꺼운 그레칸의 손목은 푸른색 힘줄이 크게 불거져 있었다. 그에 반해 그녀의 손목은 하얗고 가느다랄 뿐이었다.

핏줄이 보이나, 그레칸처럼 강인해 보이는 게 아니라 외려 연약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

밀라니아는 기분이 애매해졌다. 그레칸을 힐끗하자 숫제 연민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레칸은 아직도 육체의 힘이 가장 강한 힘이라고 믿는 듯했다.

밀라니아는 자신을 안쓰러워하는 그레칸과 시선을 맞추며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단순한 것. 언제 클 테냐.”

그레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을 떼려던 밀라니아는 손목이 잡혔다.

“더.”

그레칸이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더 해 줘, 밀라니아.”

살짝 당황했던 밀라니아의 잇새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덩치는 커졌지만 변한 건 그것뿐이다.

어엿한 성체가 됐음에도 여전히 머리 쓰다듬어 주는 걸 좋아하는 걸 보면.

밀라니아는 가벼운 미소를 띤 채 그레칸의 검은 머리카락을 흩트리듯 손으로 헤집었다.

쑤욱!

그 순간 거대한 버섯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커다란 버섯이 밀라니아의 시야에 가득 찼다.

그 바람에 그레칸에게서 손을 뗐다. 버섯이 치워지며 그 자리에 르베리안즈가 불쑥 나타났다.

“다 됐어요. 맛있는 버섯 드세요.”

그러면서 작게 뜯어서 넘겨주는 버섯 조각을 밀라니아는 얼떨결에 입에 넣었다.

구웠다고는 하지만 아직 물컹거리는 버섯을 씹자 르베리안즈의 뒤통수에서부터 불쾌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하는 거냐.”

불만은 알은체도 않은 르베리안즈의 눈빛은 밝게 일렁였고, 밀라니아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동시에 모닥불에서 튀어 오른 불티가 그레칸의 얼굴로 달려들었다.

“아야!”

그레칸이 아이처럼 인상을 구기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킥.

‘……?’

밀라니아가 쳐다보자 뚝 웃음을 그친 르베리안즈가 입으로 버섯 조각을 넣어 주었다.

얼핏 보았던 미소가 사악하기 그지없어 밀라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레칸은 당장 르베리안즈에게 달려들 것 같았지만 어떻게 생각을 고쳐먹었는지 멧돼지 가죽을 해체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고는 나뭇가지에 고깃덩어리를 툭툭 꿰었다.

날붙이도 아니고, 나뭇가지에 고깃덩어리를 꿰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그레칸은 어렵지도 않게 꼬치를 만들었다.

밀라니아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기 꼬치를 만드는 그레칸을 응시했다.

상의를 탈의하고 움직이는 그레칸은 마녀성에서 볼 때보다 한층 더 야성적이었다.

툭, 어깨를 건드리는 움직임에 르베리안즈를 돌아보자 그가 웃으면서 버섯 조각을 뗀다.

버섯. 30분만 돌아다녀도 구할 수 있는 흔하디흔한 식재료.

마녀성의 마녀들이 왕자님이라고 부르는 르베리안즈의 외모는 날이 갈수록 물이 오르고 있었지만, 쳐다보는 밀라니아의 시선은 다소 측은했다.

‘숲에 던져 놓으면 그레칸만 살겠구나.’

“왜 그래요?”

“아니다.”

슥 시선을 피하자 르베리안즈가 버섯을 입에 넣었다.

손길이 전과 달리 우악스러워 얼굴을 구기자 그가 살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생각을 했어요?”

“…….”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는데.”

‘악령 같은 놈.’

밀라니아는 황급히 화제를 돌릴 것을 찾았다.

버섯을 우물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으음…….”

“맛없어요?”

밀라니아의 반응에 버섯을 떼 제 입에 넣은 르베리안즈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어렸을 땐 박쥐족에게 떠받들어지고, 마녀성에선 추종자들에 의해 손 하나 까딱 안 했던 르베리안즈는 꽤 미식가였다.

“소금을 가져올 걸 그랬네.”

르베리안즈는 삼키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 비해서 밀라니아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칸의 고기도 소금을 치면 더 맛있을 게다.”

나침반은 챙겼지만 향신료를 챙길 생각은 하지 못했다.

먹는 것을 잘 따지지 않는 그녀는 과일로 족하나, 이 둘은 그것만으론 백 일도 못 버틸 터였다.

얼른 2대륙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피부가 따끔거렸다. 솜털이 바싹 곤두섰다.

그녀와 상극인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꽤 빠르게!’

놀란 밀라니아가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쑤욱!

땅을 뚫고 백골이 튀어나왔다.

“……!”

비명을 삼킨 밀라니아가 눈을 부릅떴다.

손가락뼈가 알은체하듯 달그락거린다. 밀라니아는 질겁한 표정을 지우고 손을 내밀었다.

백골이 툭, 그녀의 손바닥에 아기 손바닥만 한 천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할 일을 다 마쳤다는 양 백골은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땅 아래로 사라졌다.

르베리안즈와 그레칸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바, 방금 그거 뭐죠?”

“뼈…….”

“멍청한 늑대야. 누가 그걸 몰라서 물었어?”

어찌나 당황했는지 르베리안즈의 손에서 버섯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밀라니아는 투닥대는 둘을 내버려 두고 백골이 놓고 간 주머니를 살폈다.

주머니를 풀자 하얀 가루가 나타났다.

소금이었다.

‘설마 했거늘.’

기가 막힌 밀라니아가 휙 위를 올려다보자 과연, 누군가 앉아 있었다.

나뭇가지에 올라앉은 키 큰 남자.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는다.

“헤이, 달링. 그거 필요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밀라니아가 외쳤다.

“말란도르!”

수상한 사람의 출현에 르베리안즈와 그레칸이 스윽,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밀라니아는 참 덤벙거린다니까. 내가 없으면 안 되지?”

말란도르는 두 사람의 흉흉한 기운을 받으면서도 시종 여유로운 얼굴로 밀라니아에게 말을 걸었다.

마치 이따위 견제는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나를 찾았다며? 고향에 가 있느라 못 만났지 뭐야.”

아쉬운 표정으로 말란도르가 입술을 올려 방긋 웃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궁금해서 못 참겠는 거야. 그거 물어보려고 잽싸게 달려왔지.”

그가 쳐다보는 것도, 말을 거는 것도 밀라니아뿐이었다.

철저한 무시를 눈치챈 르베리안즈의 낯빛에 싸늘한 기운이 흘렀다.

킁, 콧잔등에 주름을 잡은 그레칸이 눈썹을 꿈틀했다.

“더러운 냄새가 나.”

밀라니아는 작은 웃음을 흘렸다.

‘역시 코가 좋구먼.’

흑계인은 죽음의 기운을 몰고 다니는, 사령술을 특기로 삼는 종족.

그중에서도 말란도르는 혼자서도 능히 천 개의 백골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암흑과 죽음의 기운이 강하다.

“호오.”

말란도르가 웃는 얼굴로 그레칸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매가 미묘하게 위를 향해 치떠 위험한 느낌을 풍겼다.

“새끼 늑대로군.”

밀라니아와 말할 때와는 사뭇 다른 말투로 말란도르가 턱을 까딱였다.

“머리카락에 벼룩을 키우고 있지는 않나. 예전에 내가 봤던 놈은 하도 안 씻어서 온몸에 벼룩이 들끓지 않겠어? 그 이후로 편견이 생겨서 말이야.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가까이 다가오면 죽을 줄 알아.”

느물느물하게 비웃는 말투. 그레칸은 평소와 달리 차분하게 응대했다.

“밀라니아, 나 악취에 코가 아려. 앞발로 짓눌러도 될까? 터뜨리면 좀 나을 것 같은데.”

“……안 되느니라.”

이걸 대답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결국 대답해 주었더니, 결론적으로 대답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그레칸과 말란도르. 분위기가 흉흉했다.

둘은 피부색만 비슷할 뿐, 모든 것이 판이하게 달랐다.

구릿빛 피부지만 태양빛에 태워 짙어진 그레칸과 달리 말란도르는 종족 특성상 더 짙은 색의 피부를 가졌다.

뿜어져 나오는 기운도 달랐다. 그레칸이 순수하게 생명력을 내뿜는 에너지덩어리라면, 말란도르는 빛 한 점 없는 그림자를 몰고 다닌다.

음험하고 속을 알 수 없는 말란도르의 느낌은 차라리 르베리안즈와 비슷했다.

그걸 느꼈는지, 르베리안즈는 아무 말 없이 말란도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란도르도 르베리안즈에게 시선을 옮겼다. 홍옥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아하, 밀라니아가 키우는 위험한 짐승들! 너희들이구나.”

그 눈에 걸린 건 르베리안즈 목에 걸린 복종의 밤. 붉은 혀가 날름, 윗입술을 핥았다.

[뭘 키우고 있는 거야?]

[난 지금 위험한 짐승을 키우고 있느니.]

일전에 나눴던 대화.

‘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었누.’

말란도르의 시선이 밀라니아에게로 돌아왔다.

“맞지, 밀라니아?”

“으음.”

곤란한 기색을 지운 그녀는 은근슬쩍 대답을 피했다.

“방문 이유가 궁금해서 왔다 했느냐?”

궁금증이나 빨리 풀어 주고 그를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불행히도 복종의 밤 하나가 망가져 버렸느니. 그거 얘기하려고 간 것이었다.”

“뭐?”

“고의는 아니었도다.”

깜짝 놀란 말란도르가 곧 얼굴을 찌푸렸다.

밀라니아는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빌린 물건을 망가뜨린 처지라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값은 꼭 치르겠느니라.”

“곤란한데. 그건 나로서도 만들기 쉽지 않은 거라.”

밀라니아는 인상을 썼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말란도르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저 얼굴은 이 일을 기회로 여기는 게로구나.’

아쉽다는 표정 너머 눈 깊은 곳 반짝이는 빛을 밀라니아는 놓치지 않았다.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말이다.

말란도르가 고개를 기울이더니 르베리안즈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어이, 너.”

갑작스러운 손가락질에 르베리안즈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감히 내게 손가락질을 하냐는 표정이다.

밀라니아나 그레칸에겐 기름칠한 혓바닥을 미끈하게 놀려 열받게 하는 데 선수인 르베리안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냉랭한 표정이 퍽 싸늘했다.

말란도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새끼 박쥐, 너 말이다.”

도리어 직접적으로 칭하지 않아 못 알아들었다는 양 정확히 그를 짚는다.

“네 목줄이라도 나에게 다오. 그것마저 망가지면 정말 곤란하거든.”

“…….”

‘새끼 박쥐’, ‘목줄’. 줄줄이 흘러나오는 모욕적인 단어에 르베리안즈의 긴 목에 핏대가 섰다.

르베리안즈는 인간 기준으로나 수인 기준으로나 충분히 성체에 해당되는 나이였지만,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보낸 흑계의 괴짜 말란도르에게는 아직 핏덩이에 불과했다.

“뜬금없이 나타난 노괴물이 다짜고짜 내 것을 강탈하려 하는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죠?”

여전히 말란도르는 상대하지 않으며 르베리안즈는 시선을 밀라니아에게 돌렸다.

고작 너 따위와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뜻을 돌려 말하는 태도.

눈치 빠른 말란도르의 미소가 얄팍해졌다.

밀라니아는 난처한 마음에 르베리안즈와 말란도르를 번갈아 응시했다.

‘노괴물이라.’

사실 흑계인은 많이 알려진 종족이 아니다.

알고 있는 자라 하더라도 죽음의 기운을 다루는 흑계인을 배척하곤 했다.

르베리안즈가 그 속사정까지 알지는 않았겠지만 본능적으로 말란도르에게서 불길함을 감지한 듯했다.

말란도르를 외면하는 르베리안즈의 흰 목덜미에 달빛이 내려왔다.

유혹의 박쥐족.

‘유혹’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과 달리 오연히 서 있는 그에게선 지배자에게서나 흘러나올 법한 위엄이 뿜어졌다.

그 점이 말란도르의 심기를 한층 더 불편하게 만든 것일까.

“박쥐족들을 좋아한 적은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넌 특히나 재수 없네. 피죽도 못 얻어먹었냐? 삐쩍 마르고 창백해서는. 검버섯이라도 피겠어?”

피식 웃으며 하는 말에 살기가 뚝뚝 흘렀다.

르베리안즈는 웬 산짐승이 짖나 하는 표정으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완벽한 무시였다.

긴장된 공기가 팽팽해졌다.

그 와중에도 그레칸은 제 싸움 아니라는 듯 노릇하게 구워진 멧돼지 고기를 죽 찢어 제 입에 넣고 있었다.

밀라니아가 황당하게 쳐다보자 눈을 반짝이며 손에 든 고기 조각을 내민다.

“됐느니.”

손을 들어 사양한 밀라니아는 한숨을 삼키고 말했다.

“리비. 주거라.”

“하지만 밀라니아, 이건 내가 선물로 받은 거잖아요. 당신에게.”

흥, 말란도르가 코웃음을 쳤다.

“선물은 무슨. 내가 대여해 준 거야, 밀라니아에게.”

르베리안즈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밀라니아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말란도르도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빌려준 물건을 저놈한테 주었냐는 뜻이 시선에서 선연히 읽혔다.

밀라니아는 무표정했지만 입 안은 은근히 말라 갔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두 시선.

한숨을 쉬고 말했다.

“주려무나, 리비.”

“밀라니아.”

말란도르는 미소를 지었고, 르베리안즈의 눈빛은 흔들렸다.

밀라니아는 르베리안즈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말머리가 나오기 전 슬쩍 혀를 빼내 입술을 훔쳤지만 그걸 눈치챈 사람은 대화 내용엔 관심 없는 그레칸밖에 없었다.

“네게는 이제 그게 필요 없느니라. 르베리안즈, 리비. 복종의 밤을 네게 준 것은 너도 이미 눈치챘다시피 널 통제하기 위함이었느니.”

“…….”

“정녕 몰랐느냐?”

르베리안즈의 얼굴빛이 오묘하게 변했다.

[이건 너와 나를 한층 친밀하게 만들어 주는 마법의 언어란다.]

[리비, 넌 나와 좀 더 친밀해지고 싶지 않느냐?]

[그게 어째서 밀라니아와 내 사이를 친밀하게 만든다는 거죠?]

[이걸 차고 있는 한, 내가 널 먼저 저버릴 일은 없을 테니까.]

사탕으로 어린애를 꾀어내는 악당처럼 속삭였던 그때처럼, 밀라니아는 부드럽게 말했다.

“말장난이었을 뿐. 통제 불능에 가까운 너희를 제어하기 위한 물건이었을 뿐이야, 그건. 아낄 필요가 없어.”

“……알고 있어요. 그래도 밀라니아가 내게 준 선물이에요. 내가 충격이라도 받아서 이걸 저 무도한 자에게 줄 거라고 생각해요?”

르베리안즈는 사뭇 불쾌한 기색이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니, 밀라니아가 말란도르에게 복종의 밤을 돌려주기 위해 이 말을 한다는 것을 눈치챘을 터였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밀라니아는 말했다.

“내가 하는 말은, 그 물건은 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니.”

“…….”

“너와 난 복종의 밤이 없어도 충분히 친밀하지 않느냐.”

르베리안즈가 눈을 깜박거렸다.

“그때 말했던 것처럼, 난 널 저버리지 않을 것이야.”

“…….”

“그러니 한낱 물건에 집착할 필요 없느니.”

밀라니아는 알고 있었다.

그레칸의 복종의 밤은 쉬이 망가뜨렸던 르베리안즈지만, 본인이 차고 있는 복종의 밤은 매일 밤 향유 묻힌 손수건으로 소중히 닦아 대는 것을.

노예들이나 할 법한 말을 뱉게 한 요망한 물건이라고, 짐짓 자존심 상하는 얼굴을 했었지만 정작 목으로 향하는 그레칸의 의미 없는 손짓 하나조차도 경계했던 그였다.

“다시 말해 봐요.”

르베리안즈는 몸을 완전히 밀라니아에게 돌리고 요구했다.

그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밀라니아는 천천히 또박또박 반복했다.

“난 널 저버리지 않을 것이야.”

“…….”

르베리안즈의 눈 깜박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금색의 긴 속눈썹이 예쁘게 팔랑거렸다.

밀라니아는 무방비하게 풀어진 자세를 보고, 한 발짝씩 걸음을 옮겼다.

르베리안즈의 앞에 당도하여 희고 긴 목에 손을 뻗었다.

손끝이 서늘한 체온을 더듬고, 검은 귀물에 닿았다.

시전자밖에 풀지 못하는 물건이었으므로, 직접 풀어 줄 생각이었다.

귀물의 이음새를 끊으려 하는 찰나.

덥썩.

르베리안즈가 찬 손으로 밀라니아의 손등을 덮었다.

‘결국 안 내놓으려는 겐가.’

르베리안즈가 안 된다면 말란도르를 설득할 수밖에 없는데.

난감해진 그녀를 보며 르베리안즈는 다른 손을 목 뒤로 가져갔다.

찰칵.

이음새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밀라니아는 풀어진 채 목에서 흘러내리는 복종의 밤을 보고 눈을 끔벅거렸다.

르베리안즈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목 안쪽 부드러운 살결에 쪽 입을 맞추었다.

“이거, 제 힘으로 풀 수 있게 된지 꽤 됐어요.”

르베리안즈가 씨익 웃으며 속삭였다.

복종의 밤은 진즉 효과가 없어졌지만, 부러 차고 있었던 거였다.

‘까맣게 속았구나.’

밀라니아가 혀를 쯧쯧 차는 순간 르베리안즈는 풀어낸 복종의 밤을 말란도르에게 던졌다.

슈욱!

한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스아아아!

염력을 사용한 듯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까짓 거’ 하는 태도로 입꼬리를 올린 말란도르는 무섭게 날아드는 복종의 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복종의 밤은 말란도르의 손을 타고 올라가 손목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순식간에 손에 들어온 물건을 들고 말란도르가 말했다.

“위험한 짐승인지는 모르겠고, 성질 더러운 짐승이긴 하네, 밀라니아.”

르베리안즈는 눈을 내리깔았다. 살짝 감았다 뜨자 살기가 갈무리된 눈이 차분해진다.

“어디 가는 길이야?”

밀라니아는 분위기를 뒤집어 놓은 주제에 저 혼자 태연한 말란도르가 골치 아팠다.

“볼일 보러 2대륙에 간다.”

“2대륙이면 안 간지 300년이 넘었지 않던가?”

“정확히 말하면 800년이 넘었느니.”

소소한 대화를 나눈 밀라니아가 본론을 꺼내 보라는 듯 고개를 모로 까딱였다.

“아무튼 원하는 것을 말해 보려무나, 말란도르. 이번 일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니.”

말란도르는 복종의 밤을 허공에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더니 돌연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밀라니아.”

“무슨 시간?”

물끄러미 쳐다보는 붉은 눈과 마주치자 밀라니아는 번뜩, 15년 전 그가 영면에 이르기까지 남은 시간을 물었던 것을 떠올렸다.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는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를 흘끗한 밀라니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영면의 시점. 그때가 앨리지의 병을 치료하는 순간이다.

‘아직 앨리지의 존재조차 모르는 두 사람 앞에서 꺼낼 말은 아니거늘.’

말란도르는 다른 때와 달리 베베 꼬는 것 없이 시원히 요구했다.

“피든, 여자든. 물질적인 건 필요 없어. 마침 나도 2대륙에 갈 생각이었으니 같이 가지. 복종의 밤을 망가뜨린 건 그거면 됐어.”

예상 밖의 요구에 반응 못 한 밀라니아에 앞서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즉각 대꾸했다.

“누구 맘대로.”

“싫다.”

밀라니아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말란도르를 응시했다.

‘여태껏 같이 있기를 꺼려 하지 않았는가.’

말란도르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의 시선을 받아 냈다.

‘상극의 기운을 가져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해가 될 뿐인데.’

말란도르에게 이 제안이 갖는 긍정적 효과를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대자연의 마녀와 죽음의 흑계인.

서로 상극인 기운을 가지는 두 종족이다.

같은 공간, 시간을 공유하는 건 서로를 공격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또 뒤통수를 맞을까 싶어 말란도르를 신중히 살폈다.

밝은 표정 아래 가라앉은 눈빛.

밀라니아의 시선이 기묘해졌다.

‘악연이라고 말해 왔지만…… 몇백 년간 쌓아 온 정이 나름 두터운가.’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도 아니고, 말란도르의 동행이 이 여정에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 그렇게 하려무나.”

콰직!

그레칸의 손에서 두 동강 난 나뭇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르베리안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밀라니아와 말란도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밀라니아, 난 저자가 누구인지 궁금한데요.”

“…….”

“동행자의 정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잖아요.”

“귀찮…….”

말하다 멈칫했다.

여기서 몰라도 된다고 하면 그레칸은 삐질 테고, 르베리안즈는 틈나는 대로 빈정댈 터.

‘차라리 조금 귀찮고 말지.’

“흑계인 말란도르다. 흑계의 입구에서 위험한 것이 나오지 않게 막고 있지.”

“아, 그 말란도르가 저자로군요.”

르베리안즈의 눈빛이 미묘해지자 말란도르가 눈꼬리를 까딱였다.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그레칸의 목소리가 절묘하게 끼어들었다.

“그 변태란 말인가?”

진지하고도 나직한 목소리가 사방에 깔리자 잠시 정적이 생겼다.

말란도르의 입꼬리가 올라간 채 굳어졌다.

“이거, 밀라니아의 위험한 짐승들과 나는 합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음산했지만 그 뒤를 잇는 르베리안즈의 목소리는 어쩐지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변태라니. 실례야, 그레칸.”

나무라는 내용의 말에 그레칸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나타샤가 흑계의 공작은 여자를 노예로 만들어 즐기는 변태라고 했다.”

“…….”

“나타샤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심각해진 그레칸의 얼굴에 밀라니아의 머릿속에도 나타샤가 둥실 떠올랐다.

나타샤.

몇백 년 전 말란도르가 꾀어냈던 마녀.

어리고 순수했던 마녀는 강대한 마녀가 되어 아직까지도 삶을 연장하고 있었다.

그 옛날, 장래가 촉망되던 나타샤가 마녀로서의 훈련도 때려치우고 말란도르의 종노릇을 하자 극도로 분개하여 말란도르와 한 판 싸우기까지 했던 밀라니아였다.

“구질구질하게 예전 일은 왜 꺼내는 거야? 성인 둘이서 잘 즐긴 일을 가지고 변태니, 뭐니…….”

“그런 면에 있어서는 변태가 맞느니.”

당장이라도 그레칸을 찢어 죽일 것처럼 보고 있던 말란도르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때를 놓치지 않은 그레칸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여자의 마음을 길바닥 돌멩이만도 못하게 보는, 기만자라고도 했다.”

“쓰레기군.”

팔짱을 낀 르베리안즈가 한마디 보태자 그레칸이 멈칫하고 그를 응시했다.

여자 문제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가 르베리안즈 아니겠는가.

그레칸의 시선에 르베리안즈가 어깨를 으쓱였다.

“난 기만한 적은 없어.”

“기만이라니, 무슨 소리냐?”

밀라니아가 눈살을 찌푸리자 르베리안즈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사람 마음 가지고 논 거요. 예를 들어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하는 척을 한다든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절 좋아하는 사람과 만난다든가. 그게 기만이 아니면 뭐겠어요?”

마녀인 것도 포기하고 말란도르의 저택에서 살 거라며 울부짖던 나타샤.

그녀는 밀라니아가 말란도르와 한판 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퉁퉁 부은 눈을 하고 마녀성으로 귀환했다.

말란도르의 저택이 있는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 그녀를 보고 밀라니아는 안심했고 체라는 기뻐했었다.

그렇게 돌아온 나타샤는 딱 한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다 끝났어요.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어요.]


역시, 말란도르가 그때 뭔가 수작을 부렸던 걸까.

밀라니아가 스산한 눈으로 쳐다보자 말란도르는 슬쩍, 시선을 비껴내어 모닥불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

“불이 꺼지겠어.”

말을 돌리는 게 하도 어설퍼 르베리안즈가 비웃으려는 순간 모닥불 주위로 백골 손이 튀어나왔다.

쑥! 다그닥, 닥닥!

어둠을 즐기는 박쥐족이라지만 시체를 기꺼워하지는 않아 르베리안즈가 인상을 쓰며 물러났다.

달그락달그락!

나뭇가지를 쥔 백골 손은 무려 다섯 개나 나타났다.

한 움큼 쥔 마른 장작을 모닥불에 넣자 꺼져 가던 모닥불이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법은 아니었지만 마법 저리가라 할 정도로 편리한 능력이라, 밀라니아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앞으로 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레칸과 르베리안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말란도르의 동행 확정이었다.

* * *

결과적으로 말란도르와 동행하기로 한 건 좋은 결정이라고 판명 났다.

“그 하늘길은 안 되지, 밀라니아. 마력장이 처져 있잖아. 황제와 이종족의 맹약에 의한.”

2대륙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그레칸과 르베리안즈와 달리 말란도르는 2대륙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었고, 오래전 일이라 2대륙의 모든 것이 가물가물한 밀라니아에 비해 아는 것도 많았다.

“그게 저기였나?”

“응. 우리 밀라니아가 들어가면 따끔할 거야. 2대륙에서도 이쪽 존재를 눈치챌 테고. 하여간 밀라니아, 기억력 안 좋은 것도 귀엽다니까.”

말란도르는 밀라니아 뒤에 딱 붙어서 방향을 안내했다.

날개를 펄럭이는 르베리안즈의 미소가 전에 없이 굳어 있었다.

한 빗자루에 타는 건 절대 안 된다고 차라리 자신이 안고 가겠다고 했지만, 저와 비슷한 체구의 말란도르를 안는 건 불가능했다.

물리적인 불가능함이 아니라 심리적인 불가능이었다.

[우욱. 이건 도저히…….]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핼쑥해진 르베리안즈는 말란도르를 안아 이동하기는커녕 쓰러질 것 같았기에, 말란도르를 안는 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말란도르는 행복하게 밀라니아의 빗자루에 탔다.

“뀌에에엑!”

말란도르의 옆에는 와이번에 올라탄 그레칸이 있었다.

하늘로 이동하는 게 빠르다는 중론에 땅에 붙어 다닐 수밖에 없는 입장이 불리해진 그레칸의 선택지는 하늘 짐승 와이번이었다.

[따라올 수 없다면 마녀성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어? 짐이 될 바에는 말이야.]

신중하게 제안하는 척 자신을 쳐내려 하는 르베리안즈의 태도에 위기감을 느낀 그레칸은 모두가 잠든 사이에 사라졌다.

아침이 되어 나타난 그레칸의 손에는 튼튼한 넝쿨 고삐를 매고 있는 와이번이 잡혀 있었다.

용의 친척이라는 와이번을 굴복시킨 게 쉽지만은 않았던 듯, 그레칸의 탄탄한 구릿빛 상체에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 있었다.

보통의 인간들이라면 약간의 상처로 와이번을 굴복시켰다는 걸 믿지 않을 테지만 그레칸의 와이번을 본 세 사람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아쉽네.]

무엇이 아쉬운지 밝히지는 않으며 르베리안즈는 혀를 찼고.

[그거, 죽여도 되려나?]

말란도르는 그레칸의 날개가 되어 줄 와이번을 향해 살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밀라니아만이 탐색하는 시선으로 그레칸과 와이번을 응시했다.

[상처가 생겼구나.]

고작 와이번을 잡는 데 상처가 생겼다는 건 그가 아직 각성하지 않았다는 반증.

전생의 각성한 그레칸이었다면 와이번은 눈빛만으로 굴복시킬 수 있었을 터이니.

그녀는 그의 미각성 상태에 적잖이 안심했다.

‘죽었어야 할 발칸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1대륙은 광활했지만 세 사람의 속도가 워낙 빨라, 해가 질 무렵에는 2대륙의 경계가 되는 해안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비교적 모래가 적은 지면 위에 발을 내려놓았다.

부우우우!

등골이 오싹한 괴물의 울음소리가 바다에서부터 흘러나왔다.

2대륙을 지키는 워터드래곤의 괴성이었다.

첨벙!

막 바다 밖으로 긴 목을 내민 회색의 워터드래곤이 활공하던 물새를 한입에 삼키고 바다로 들어갔다.

촤아아아!

육중한 몸을 집어삼킨 바다에 거대한 물보라가 일자 르베리안즈가 흥미로운 눈을 했다.

“저것이 바다의 파수꾼인가요?”

“그래. 고대의 맹약에 의해 바다를 지키는 신수야.”

1대륙 종족들은 신수라 부르고 2대륙의 인간들은 바다의 괴수라 부르는 존재였다.

“인간들이 1대륙을 엄두도 못내는 이유니라.”

밀라니아가 친절하게 설명하자 말란도르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2대륙으로 들어가려면 저쪽에서 발행한 통행증을 받아야 해.”

“그건 내일 아침에 하자꾸나.”

바다를 앞둔 네 사람은 며칠 사이 꽤 능숙하게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식사는 말란도르가 가져온 오트밀을 끓인 것에 그레칸과 르베르안즈의 고기와 버섯을 넣은 죽이었다.

말란도르의 백골 노예가 공수해 온 소금까지 뿌리자 고소한 냄새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각각의 재료를 따로 먹는 것보다 세 배는 맛있는 죽을 먹고, 빠르게 잘 준비를 마쳤다.

밀라니아는 모닥불의 불을 어제보다 크게 키웠다. 따뜻한 불꽃이 발치에서 넘실거렸다.

“에취.”

밀라니아가 작게 기침을 하자 귀가 좋은 그레칸이 재빨리 말했다.

“밀라니아, 이리 와라.”

쉬릭, 늑대로 변한 그레칸이 잘생긴 주둥이로 사람 말을 한다.

“내 털,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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