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나는 당신에게 복종하겠습니다
르베리안즈의 붉은 눈이 서늘하게 빛나고, 곧 밀어닥칠 그레칸의 일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르베리안즈에게 향하는 듯했던 손은 닿기 직전에 밀라니아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이 조그만 놈들이 뭘 하는 건가, 하는 심정으로 구경하고 있던 밀라니아가 갑작스러운 횡액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어깨를 감싸며 끌어당겼다.
그런 동시에 르베리안즈의 뒤통수를 향해 다리를 휘둘렀다.
“헉!”
헛숨을 들이켠 르베리안즈의 눈이 일그러졌다. 타격을 입어 흔들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냄새 나는, 늑대 새끼가…….”
애초에 수면병 탓에 몸이 약해진 르베리안즈는 그레칸의 혼신의 힘이 담긴 일격을 막아 낼 수 없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자연스럽게 몸이 단련된 그레칸은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몸 구석구석 근육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죽여 버릴…….”
정신력으로 기절을 버틴 르베리안즈가 이를 가는 순간, 그레칸이 몸을 회전하며 다시 다리를 휘둘렀다.
퍽!
두 번째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르베리안즈의 눈동자가 뒤로 휙 돌아갔다.
밀라니아의 손목을 휘감고 있던 손도 스륵 풀어졌다.
정신을 잃은 르베리안즈는 딱딱하기 굳어 관으로 넘어갔다. 그 모습은 잠에 빠져 있을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
밀라니아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불현듯 몸이 묵직해져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그녀에게 점프한 그레칸이 두 다리를 밀라니아의 허리에 감은 채 매달리고 있었다.
‘며칠이나 지났다고, 전보다 더 무거워진 것 같군.’
끄응, 신음을 흘리는 밀라니아의 옷을 그레칸이 살짝 잡아당겼다.
문장을 길게 말하진 못하지만 어휘 구사력은 늘었다.
방금까지 르베리안즈의 뒤통수를 향해 흉악한 발차기를 날려 댔던 그레칸은 밀라니아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두 눈을 순진하게 깜박였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말을 무시하고, 기절한 건지 잠이 든 건지 모를 르베리안즈의 목덜미를 손으로 더듬거렸다.
‘다행히 문제는 없군.’
퍽, 하는 타격음이 하도 커서 피부가 터진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은 듯했다. 밀라니아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레칸이 못마땅한 듯 밀라니아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나가야 한다.”
“…….”
“밀라니아. 냄새 난다.”
“알았으니 조용히 하려무나.”
“응.”
“근데 이제 좀 내려가면 안 되겠느냐?”
“…….”
못 들은 척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레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됐다.”
입씨름을 포기한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그레칸은 밀라니아에게 안긴 채 방 안을 응시했다.
정확히 말하면 르베리안즈가 잠든 관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순진했던 눈동자가 모종의 광기로 번들거렸다.
“아무래도 그 호수에 다시…….”
“뭐라고 했느냐, 그레칸?”
“아무것도 아니다.”
* * *
일주일 후.
황제의 의뢰약을 조제하고 있던 밀라니아를 체라가 찾아왔다.
“밀라니아 님.”
반죽한 약재로 동그란 환을 만들며 밀라니아가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다. 체라는 웬만해서는 작업할 때 찾아오지 않는데.
“무슨 일 있느냐?”
“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무슨 일인데?”
체라는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턱을 긁적였다.
밀라니아는 만들던 환을 내려놓고 장갑을 벗었다.
“설마 그레칸의 일이냐?”
체라가 저런 식으로 구는 이는 그레칸밖에 없었다.
예상은 적중해서 체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르베리안즈도요.”
“응?”
“…….”
밀라니아는 빗자루를 소환하다가 침묵했다.
“둘이 뭐 하고 있는데?”
질문은 했지만 무슨 답이 돌아올지 예상이 가는 건 왜일까.
“박 터지게 싸우고 있어요.”
불행히도 예상은 적중했다. 밀라니아는 한숨을 쉬고 빗자루 위에 올라탔다.
“어디?”
말이 끝나자마자 밀라니아는 빗자루를 출발시켰다.
호수에 도착하자마자 소란스러운 소리가 밀라니아의 귀를 자극했다.
쾅!
드러난 상황은 가관이었다.
서로 주먹질을 해 대다가 떨어진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언제 떨어졌다는 듯 다시 붙어서 주먹질을 해 대었다.
힘적으로는 그레칸이 우세했지만 르베리안즈가 염력을 함께 사용하는지라 누가 크게 우세한 것 없어 보이는 싸움이었다.
특이한 점은 르베리안즈가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좀 전에 호수에 풍덩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맹세해. 너만큼은 내가 반드시 죽인다.”
르베리안즈는 독이 오른 얼굴로 싸늘하게 말했다.
그레칸은 히죽 입꼬리를 길게 늘렸다. 입술 사이 날카로운 짐승의 송곳니가 튀어나왔다.
“말만 많은 박쥐. 하찮다.”
짤막한 말에 묘하게 더 약이 오른 르베리안즈는 지체하지 않았다.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이 꼭 전쟁 소설의 한 장면 같았다.
어린 개체들의 싸움이었지만 분위기로는 누구 하나 죽기 전엔 끝나지 않을 듯 비장하다.
끔찍한 충돌이 일어나기 직전에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레칸과 르베리안즈 사이에 투명한 막이 생겼다.
투명한 막에 부딪친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크아아앙!” 서로를 향해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쾅쾅!
그레칸이 주먹으로 투명한 막을 내리쳤다. 그러자 르베리안즈 역시 막을 손으로 거세게 내리쳐 댔다.
“그레칸, 그만하려무나.”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른 채 그레칸을 불렀다. 그레칸의 복종의 밤이 하얗게 빛났다.
그레칸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멈추는 것에 반해 르베리안즈는 어떻게 해서는 투명한 막을 뚫고 그레칸을 공격하고 싶어 안달이 난 표정이었다.
사아아―.
살기가 소용돌이쳤다. 콕콕 찌르는 위협을 피부로 느끼는 그레칸도 점점 고양되는 표정이었다.
계속해서 시비를 거니 무시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가만두면 2차 대전이 시작될 듯했다.
그 모습이 꼭 말은 더럽게 안 듣고, 물어뜯기에만 혈안이던 초기 그레칸을 닮아 있었다.
점잖은 체하는 박쥐족이니 그레칸보다는 나을 거라고 안심했던 밀라니아의 얼굴에서 표정이 빠져나갔다.
그레칸이 슬금슬금 밀라니아의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밀라니아, 박쥐 새끼가 먼저 했다.”
“…….”
밀라니아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말란도르에게 복종의 밤이 하나 더 있으려나.’
* * *
말란도르는 여전했다. 껴안고 놓아주지 않는 그 때문에 숨이 막힐 뻔한 밀라니아가 자작나무 지팡이를 소환했다.
스아아아…….
흉흉한 지팡이의 기세를 마주한 말란도르는 입꼬리를 올려 매력적으로 웃더니, 돌연 지팡이를 뺏어서 뒤로 던져 버렸다.
“미친 게냐?”
지팡이를 놓친 밀라니아가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단순히 지팡이를 뺏었다고 화가 난 게 아니라, 흡사 물정 모르는 미친 자를 보는 시선.
말란도르가 눈을 깜박였다.
“응?”
그때였다.
슈욱!
던져 버렸던 지팡이가 뒤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회귀했다.
따악!
이상한 기미에 뒤를 돌아보자마자 이마를 얻어맞은 말란도르는 눈앞에서 각양각색 별이 튀었다.
너무 아파서 신음도 나오지 않았다.
맞은 곳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눈꼬리를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휘었다.
“너무해, 밀라니아.”
“누가 누구한테 너무하다고 하는 게냐? 내 생전, 대마녀의 지팡이에 손을 대는 미친놈이 있을 줄은 몰랐느니.”
밀라니아가 혀를 차자 말란도르는 이마를 문지르다 피식 웃었다.
“밀라니아를 안을 수 있는데 머리 한 대 맞는 정도야 뭐.”
“…….”
밀라니아의 침묵에 불길함을 느낀 말란도르의 미소가 비뚜름해졌다.
“설마 이게 다가 아니야?”
대마녀의 지팡이는 소유자가 아닌 자가 손을 댔을 때 일정한 확률로 저주를 받게 되지만, 그녀는 말을 아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다. 할 말이 있으니 들어가서 얘기하자꾸나.”
말란도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기가 까만 토양이 깔린 지반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범인이라면 쬐는 것만으로도 몸이 굳어지고 원인 모를 소름을 느끼는 죽음의 기운이었다.
“그래. 대화하기에 적절한 곳은 아니네.”
말란도르가 밀라니아의 손을 덥썩 잡았다. 공간을 이동하려는 건 알기에 밀라니아는 이번에는 손을 빼지 않았다.
곧 그들은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의 저택 내부로 이동했다.
말란도르는 그녀를 푹신한 소파에 앉히고 맞은편에 앉았다. 두 눈이 흥미롭게 반짝였다.
“할 말이 뭐길래 바쁘신 대마녀께서 이렇게 연달아 찾아오셨을까?”
밀라니아는 할 말이 궁했다. 말란도르가 어린 마녀를 건드린 이후 몇백 년간 얼굴 보지 않았던 사이 아닌가. 이렇게 근시일 내에 다시 만나는 건 이례적이었다.
밀라니아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복종의 밤이 필요한데.”
“……복종의 밤?”
의외의 말을 들은 것처럼 말란도르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저번에 하나 가져갔잖아.”
“하나가 더 필요하단다.”
말란도르가 밀라니아를 바라보며 천천히 팔짱을 끼었다.
그가 살피듯이 눈을 들여다보자, 밀라니아는 뭘 보냐는 양 눈썹을 치켜올렸다.
말란도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뭘 키우고 있는 거야, 밀라니아?”
“…….”
뜨끔.
밀라니아는 표정을 관리하며 미간을 좁혔다.
“그런 거 없느니라.”
“널 봐 온 지 수백 년이 되었지만 이렇게 이상한 넌 처음이야.”
“괜한 마녀 몰아가지 말려무나.”
“너야말로.”
말란도르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가, 거짓말처럼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애초에 네가 개인적인 부탁을 하기 위해 날 찾아온 것부터가 이상하다는 걸 모르는 거야?”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밀라니아의 가슴께를 꾹 찔렀다.
“그것도 시체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 네 발로. 몸에도 안 좋은데.”
“…….”
“네 일족을 건드린 데 대한 경고를 하러 온 것도 아니고.”
“내가 특별히 수작을 부린 것도 아닌데.”
우측으로도 한 번 고개를 까딱였다.
“이렇게 쉽게 널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네.”
말란도르는 의심을 거두지 않을 모양이었다. 한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괴짜의 습성.
이번에는 그녀의 비밀스러운 사정에 꽂힌 눈치였다.
‘곤란하구먼.’
밀라니아는 되도록이면 그레칸과 르베리안즈, 그리고 자신의 관계가 다른 자들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다.
시스템이라도 있는 것처럼 어떻게든 원래 정해진 흐름대로 끌고 가려는 이 세계에 새로 생긴 변수가 어떤 영향을 끼칠지 확신할 수 없는 탓이다.
“말하지 않는다면?”
“내 도움이 그렇게까지 필요하진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일게.”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피로 거래하는 것도 힘들다는 듯 단호한 자세였다.
밀라니아는 머리를 굴렸다가, 이 정도 쯤은 얘기해도 될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상에 틀림이 없다.”
“…….”
“난 지금 위험한 짐승을 키우고 있느니.”
남주니 여주니 하는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곧이곧대로 믿지도 않을 테고, 말란도르가 마녀성의 골칫덩이들에게 관심을 갖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파진다.
밀라니아는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상황에 말란도르를 덧붙이고 싶은 마음이 한 톨도 없었다.
‘그거야 말로 재앙일 것이니.’
남의 일처럼 덤덤히 생각한 밀라니아에게 말란도르가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위험한 짐승이라면, 숲의 파수꾼? 아니면 칼데아?”
늑대와 박쥐다.
“둘 다 아니다. 그런 것까지 말해 줘야 하나?”
밀라니아가 단칼에 부정하자 말란도르의 눈빛이 묘해졌다.
“좋아. 복종의 밤을 빌려줄게. 안 그래도 전에 하나 빌려준 뒤 바로 제작에 들어가서 어려운 일은 아니야.”
“…….”
말란도르가 일어나서 작은 상자를 찾아 자리로 돌아왔다.
탁자에 상자를 놓고 뚜껑을 열자 검은색 목걸이가 드러났다.
언뜻 인간들이 하는 액세서리처럼도 보이지만 실은 목줄인, 복종의 밤이다.
밀라니아가 손을 뻗자 말란도르가 스윽, 상자를 그의 앞으로 당겼다.
‘응?’
“아아, 아직 아직. 내 말 끝나지 않았어.”
“뭐가 더 있누?”
“이것 또한 복종의 밤이긴 한데 제약이 있어. 어떻게 보면 품질은 저번 것보다 떨어지는 셈이야. 뇌에 직접적으로 명령을 내리고 수행하게 강제하려면 뇌파에 영향을 주는 그란데칼리늄이 필요한데, 그게 이계의 것이라 찾기 어려운 희귀 광물이거든. 충분한 양이 없어서 좀 더 하급품으로 대체했더니 심령을 금제할 방법이 필요하게 됐지. 그게 바로 제약이야.”
떠벌떠벌한 말란도르의 말을 밀라니아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대충 이 복종의 밤이 전의 복종의 밤보다 하급품이고 그래서 결함이 있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그 제약이 무엇인데?”
“그게 뭐지?”
“나는 당신에게 복종하겠습니다.”
밀라니아는 머릿속으로 해맑은 아이의 얼굴, 그러나 스산한 붉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그 음흉한 새끼 박쥐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한다고?
르베리안즈가 그레칸과 분명히 다른 한 가지는 바로 태생으로 인한 오만함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오만한 박쥐 일족의 금지옥엽 도련님으로 자란 르베리안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재수 없음을 흩뿌리고 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밀라니아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말란도르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어. 복종의 밤은 이것뿐이거든.”
“하긴 위험한 짐승이라 그랬지. 말 못하는 짐승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니.”
그대로 뚜껑을 닫으려는 말란도르의 행동을 밀라니아가 제지했다.
“이거라도 만들 수 있어서 다행인거야. 말했잖아. 아주 희귀한 재료라고. 나로서도 당장은 더 구할 수 없어.”
“…….”
“새로 만들려면 만들 수야 있겠지만 그 시일을 기약하긴 힘들어.”
밀라니아는 고민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빌려 가지.”
말란도르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사회화가 덜 되어 위험한 상태일 뿐. 말은 할 수 있느니.”
그 시각,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던 늑대와 박쥐는 사회화 덜 된 위험한 짐승이 되었다.
밀라니아는 말란도르에게서 복종의 밤을 건네받으려고 했지만 말란도르는 빙그르르 웃을 뿐이었다. 그녀는 혀를 찼다.
“그럼 이제 원하는 걸 말해 보려무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말란도르가 호탕하게 웃었다.
“말이 잘 통해서 좋아.”
“피 세병이면 되겠누?”
“아니.”
밀라니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네 병?”
“피는 됐어.”
“그럼 뭐가 필요해?”
“네 시간.”
밀라니아는 선한 표정으로 방싯거리는 그를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의뭉 떨지 말려무나. 내가 언제까지 네 애매모호한 말에 속을 줄 아느냐?”
밀라니아의 금빛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너무해, 밀라니아. 날 그렇게 못 믿어?”
말란도르가 상처받았다는 듯 느른하게 눈을 뜨자 밀라니아는 가차 없이 대꾸했다.
“널 믿을 바엔 인간의 왕을 믿겠느니.”
“……심하네.”
전대 인간 대륙의 왕은 사리사욕을 위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자였다.
말란도르가 혀를 차며 슬프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악랄한 사기꾼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다 보니 깨닫는 게 많아졌단다.”
말란도르를 만나기 전만 해도 온순하고 세상일에 관심은 없지만 순진했던 밀라니아. 그녀는 말란도르의 갖은 사기와 거짓말에 당한 뒤 의심으로 똘똘 뭉친 대마녀가 되고 말았다.
애초에 이 마녀숲의 경계에 말란도르의 저택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만 해도 말란도르의 기름칠한 혓바닥이 열심히 일한 덕이었다.
“흑계의 불청객을 막기 위해 누군가 있어야 하긴 하지만 그게 너일 필요는 없었다.”
“나만큼 적당한 인물이 어디 있다고.”
말란도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능청을 떨자 밀라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명확하게 얘기하거라. 시간을 달라니. 뭘 하려는 거냐?”
“너무 그렇게 의심하지 마. 마법적인 일이 아니야. 밀라니아 넌 그냥 여기 앉아 있기만 하면 돼. 딱 10분만.”
생각했던 것과 다른 엉뚱한 요구에 밀라니아는 여전히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
“10분간, 널 내게 맡겨 줘.”
말란도르가 고개를 기울이자 붉은 머리카락이 까무잡잡한 피부 위로 흘러내렸다.
달콤하게 웃는 그를 향해 밀라니아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는 밀라니아의 금빛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란도르가 키득거렸다.
웃음을 멈춘 그의 입가가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걱정 마. 해를 끼치려는 건 아니야. 키스하려는 거니까.”
말란도르가 밀라니아의 얼굴에 바싹 다가왔다.
“자, 이제부터 10분 시작.”
입술을 살짝 무는 그를 바라보던 밀라니아는 눈동자가 가운데로 몰리는 기분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밀라니아가 중얼거리자 말란도르가 밀라니아의 붉은 입술에 입을 살짝 맞추며 부드럽게 물었다.
농염하게 감싸는 음성에 대비되는 무심한 목소리로 밀라니아가 대꾸했다.
“볼 때마다 누군가와 입을 맞추고 있었던 걸 보면 말이다.”
“……내가?”
당황한 말란도르가 고개를 뒤로 물리자 밀라니아가 가볍게 눈꺼풀을 떨었다.
눈을 뜨려는 그녀의 눈 위에 손을 올린 말란도르가 혀를 찼다.
“아직 안 끝났어. 하여간 밀라니아는 분위기 깨는 데 뭐가 있다니까.”
“무슨 분위기?”
지금의 이 야릇한 분위기가 정녕 그녀에겐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한다는 걸까?
어리둥절한 목소리에 전의가 꺾인 말란도르가 중얼거렸다.
“난 평생 네가 누군가와 연애하는 걸 상상하지 못할 거야.”
투덜거리는 내용과 달리 부러 그녀의 입술 위에서 입술을 달싹이며 슬쩍 웃는 말란도르였다.
“그래서 더 좋은 거지만.”
밀라니아가 뭐라고 얘기를 하려는 찰나 말란도르가 그녀의 입을 입술로 틀어막았다.
밀라니아는 속으로 시간을 셈하며 얌전히 그의 입맞춤을 받았다.
시종 담담한 밀라니아는 꿀이라도 발라 둔 양 달라붙는 말란도르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런 게 뭐가 좋다는 거지?’
말란도르의 움직임에 새끼 뱀이 엉키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한 밀라니아는 지루함을 느끼며 10분을 착실히 셌다.
그 순간, 말란도르가 그녀의 혀를 가볍게 빨았다. 밀라니아는 미간을 좁혔다. 손가락이 움찔했다.
말란도르가 눈을 번쩍 떴다. 붉은빛 도는 눈동자가 반짝인다.
“좋아?”
말란도르는 다시 입술에 달라붙었다.
집요하게 물고 빨고 핥는 움직임에 밀라니아는 당혹감을 느꼈다.
착실히 시간을 센 밀라니아가 말란도르를 밀어내자 말란도르가 아쉬운 듯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비호같은 움직임으로 밀라니아의 뒷목을 때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가느다란 흰 목에 닿는 찰나, 두 사람의 시선이 짧게 부딪쳤다.
“…….”
“…….”
그럴 줄 알았다는 양 담담한 밀라니아의 눈빛에 이번에는 말란도르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말란도르의 손은 밀라니아의 목에 닿자마자 빛처럼 튕겨져 나갔다.
“윽!”
말란도르가 튕겨 나간 손을 붙잡으며 밀라니아에게서 물러났다.
정말로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를 바라보며 밀라니아가 긴 은빛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저번에 그리 당한 게 있는데 아무 대비도 안 할 줄 알았느냐?”
말란도르는 강한 방탄력에 빨갛게 변한 손을 움켜쥔 채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말해 봐라. 날 기절시켜 놓고 뭘 하려는 거지, 말란도르?”
그녀의 분위기까지 날카로워지자 말란도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맹세코, 밀라니아를 해하려고 했던 건 아니야.”
“저번에 내가 찾아왔을 때, 일주일간 무슨 일을 벌였는지 말하거라.”
밀라니아는 기대하는 바가 있는 듯한 말란도르를 보며 잠깐 침묵했다.
“네가 내 피를 가져간 뒤, 오히려 피의 효능이 좋아졌느니. 우연의 일치인가 했지만 생각해 보니 짚이는 건 너밖에 없더구나.”
생각에 골몰하며 침묵에 잠긴 말란도르를 밀라니아가 재촉했다.
“말란도르?”
“사실 네게 진짜 원하는 게 있어. 내가 긴히 연구해 보는 일이 있거든. 네게 키스한 건 연구의 일환이야. 어떤 게 더 효과가 좋은지 알아야 하니까.”
밀라니아는 미간을 좁혔다. 언뜻 붉은색 컵처럼 보였지만 붉은 음료가 가득 담긴 컵이었다.
“이게 내 진짜 요구야.”
밀라니아는 말란도르가 내민 붉은 음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란도르를 흘끗했다.
“이거?”
“마셔.”
말란도르가 사르르 웃었다. 색 강한 붉은 머리카락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이게 뭔데?”
“건강 음료.”
“…….”
“너무 의심하지 마, 밀라니아. 내가 네게 해가 될 일을 할 리가 없잖아.”
밀라니아는 컵을 가져가며 코웃음을 쳤다.
“그건 네가 날 꺼지지 않는 화염의 바다에 밀어 넣기 전에 했어야지 않냐는 생각이 드는구나.”
“…….”
결정타 한 방에 말란도르는 불시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라는 이름에 간신히 묶이고 있긴 하지만 지나간 몇백여 년의 시간 동안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웃고 있던 얼굴이 가면처럼 어색해진 말란도르가 앙탈을 부렸다.
“400년도 더 전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면 어떡해.”
그걸 어떻게 잊으라고? 하는 표정으로 말란도르를 힐끔한 밀라니아가 컵을 코에 가져다 대 냄새를 맡았다.
‘음?’
눈썹을 꿈틀하고 말란도르를 쳐다보자 말란도르는 분홍색에 가까운 선홍빛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아무런 악의도 없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듯 지나치게 해맑은 눈이 더 의심스러운 걸 모르는 건지.
밀라니아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컵에 입을 댔다.
홀짝.
한 입 머금자 말란도르의 눈빛이 짙어졌다.
밀라니아의 목이 한차례 움직였다. 그리고 홱, 고개를 돌리고 바닥에 붉은 액체를 뱉어 냈다.
“……읏!”
밀라니아가 놀란 눈을 말란도르에게 돌렸다.
그는 찌푸린 눈으로 바닥을 적시는 붉은 액체를 보고 있었다.
“너!”
“역시 아무리 향이 강한 재료를 섞어도 밀라니아를 속일 수는 없네. 직접적으로 섭취하는 것보다는 키스가 나을지도 모르겠어.”
아쉽다는 양 중얼거리는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밀라니아가 물을 소환해 입을 헹구었다.
그러고도 진저리를 치다 붉은 액체가 남은 유리잔을 테이블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탁!
“제대로 설명해라. 안 그러면 이 일대가 날아갈 각오를 해야 할 거야.”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스칼렛이 아니라면 몰랐을 것이야. 실제로 본 건 처음이니까. 설명해, 어서.”
“무엇을?”
“이건 붉은 꽃이 아니냐! 아니라고 할 생각 마라. 내 온몸의 감각이 맞다고 하고 있으니까.”
엄중한 경고에 말란도르는 힘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서릿발 같은 질문이 말란도르의 귓가에 꽂혔다.
“왜 이런 불결한 걸 내게 먹이려는 게냐?”
붉은 꽃은 시체들 사이에서 마지막 생기를 빨아들이는 저주받은 생물.
죽은 자를 되살린다는 건 아무래도 과장된 이야기일 터. 그러나 새끼손가락 양초만 한 목숨 줄이 중지가 될 만큼의 효과는 있었다.
대상의 생명력을 증진시키는 대신,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효과에도 불구하고 꺼림칙한 귀물로 분류되었다.
워낙 보기 힘들어 붉은 꽃을 전설로 치부하는 이도 많았다.
‘실존하는 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나도 처음이거늘.’
한 번도 본 적 없음에도 이 붉은 용액이 붉은 꽃이라는 걸 아는 이유는 온몸의 세포가 찌릿거리는 신체의 반응 덕이었다.
치유력을 가진 밀라니아와 생명력을 부여하는 붉은 꽃은 언뜻 같은 계열인 것처럼 보이지만 정반대라고 할 정도로 상극이었다.
붉은 꽃은 그 효능과 달리 말란도르와 비슷한 계통의 생물이었던 것이다.
‘매우 사악한 기운이도다.’
자연에서 태어난 밀라니아가 제일 꺼려 하는 것은 반자연적인 모든 것으로서, 시체 위에 지어진 말란도르의 저택도 불편한데 역천의 붉은 꽃을 기꺼이 여길 리가 없었다.
붉은 액체를 혐오스럽게 쳐다보는 그녀를 보는 말란도르는 무표정했다.
“내가 너를 안지 수백 년이 넘었어, 밀라니아. 네가 지금 천 살에 가까워졌다는 것도 알고 있지. 몇 년 남지 않았을 거야. 30년? 20년?”
이제야 말란도르의 의중을 이해한 밀라니아는 숫제 무지몽매한 범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냈다.
“영면은 평온한 안식인 것을. 네가 생각하는 죽음과는 다르지.”
“그래 봤자 널 다시 못 보는 건 마찬가지잖아.”
몇 번의 회귀를 겪으며, 영면을 지독히도 바라는 밀라니아를 타인이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침묵하는 밀라니아의 속내를 알고 있다는 듯 말란도르가 슬픈 듯, 화가 나는 듯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난 네가 오래 살길 바라.”
“…….”
한쪽 무릎을 꿇은 말란도르가 컵을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러고는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사심 없는 입맞춤이었다.
“…….”
“이게 내 부탁이야.”
밀라니아는 말란도르의 얼굴과 붉은 액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스칼렛이 걱정하던 말란도르의 기행이 자신 때문이었다는 걸까.
그녀는 고민에 잠겼다.
‘어차피 이걸 마셔도 달라지는 건 없을 터인데.’
그녀의 영면을 막는 건 운명뿐이다.
세상이 사랑하는 주인공들에게 심장을 뜯기는 일만 아니라면 변하는 건 없을 터였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입에도 대기 싫을 만큼 붉은 꽃이 혐오스럽게 다가온다.
‘말란도르가 원하는 대로 해 주려면 토악질을 해야 할 판이야.’
액체를 입에 넣는 순간 확 느껴지던 눅눅한 죽음의 냄새.
동시에 부닥쳐 오는 강력한 힘. 죽음을 매개로 한 불길한 힘이다.
밀라니아는 자신과 상극인 붉은 꽃이 거북스러웠다. 입에 머금는 상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마시지 않는다면.”
밀라니아의 무게추가 ‘마시지 않는다’ 쪽으로 기울어질 무렵 말란도르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밀라니아가 꾸미고 있는 일을 파헤쳐 보겠어.”
“뭐?”
이게 무슨 소리인가. 눈살을 찌푸리자 말란도르는 생글생글 웃으며 폭탄선언을 했다.
“눈치를 보니 뭔가를 하려는 것 같은데, 그게 뭐든 간에 밀라니아에겐 아주 중요한 일이겠지? 그렇지 않다면 마녀족을 관리하는 것조차 겨우 하는 밀라니아가 자발적으로 나설 리가 없으니까.”
역시 복종의 밤을 요구한 것이 의심을 샀나 보다.
밀라니아는 덤덤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렸다.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뭐든 간에 성공하기는 힘들 거야.”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 아니냐?”
“…….”
“게다가 복종의 밤도 필요하잖아?”
말란도르의 꿀을 바른 듯, 칼을 품은 듯 능수능란한 말솜씨에 밀라니아는 심란한 눈으로 한숨을 쉬었다.
컵을 꽉 쥐고, 한입에 붉은 액체를 입에 털어 넣었다.
밀라니아의 고운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팽개치듯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자 그녀와 달리 화색을 띤 말란도르가 그녀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울렁거리는 속 때문에 예민해진 밀라니아가 그의 이마를 후려쳤다.
“아야!”
방금까지 번들번들한 눈으로 협박했던 주제에 말란도르는 너무하단 표정으로 불쌍한 척을 했다.
“누가 멋대로 입을 맞추라 했느냐?”
“잘했단 의미였는데.”
뚱한 말란도르의 대꾸에 밀라니아는 퉁명스럽게 화답했다.
“물건이나 내놓으려무나. 더는 여기 있기 싫으니.”
“여기.”
말란도르가 복종의 밤이 든 상자를 그녀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상자를 옆구리에 낀 채, 아직도 텁텁한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후우.”
속을 가라앉힌 밀라니아는 지친 눈으로 말란도르를 응시했다. 말란도르가 냉큼 입을 열었다.
“사탕 줄까?”
“됐어. 그보다 추가로 부탁할 게 있다.”
“얼마든지. 요즘 들어 내게 부탁하는 일이 많아져서 아주 흡족해.”
말란도르가 묘한 눈으로 히죽거렸다.
“뭐든지, 어서어서 말해 봐.”
무슨 일이든 대가를 바라는 주제에 말투만은 자애롭다.
“발칸? 늑대족의 수장 말이야?”
“그래.”
“사이가 안 좋다고 알고 있는데, 무슨 일로 도와줘?”
“뭐어, 안면이 있는 사인데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누.”
밀라니아는 대충 대꾸했지만 속셈은 있었다.
원래의 운명대로라면 발칸은 그레칸이 성년이 되는 시점에 죽는다. 반려를 잃고 이미 불안정해진 상태인 탓이다.
문제는 그가 죽고 나면 그레칸이 늑대족의 수장이 된다는 것이었다.
앨리지를 만나 그녀의 병을 낫게 하기 전까지 그레칸은 자신의 곁에 있어야 한다.
“늑대족, 늑대족의 수장이라.”
혼잣말을 중얼거린 말란도르가 밀라니아의 뺨에 입을 맞추고, 그녀가 손을 휘두르기 전에 물러났다.
“좋아. 그건 서비스로 해 줄게.”
“참, 고맙구나.”
밀라니아가 뺨을 문지르며 대꾸했다.
* * *
밀라니아가 복종의 밤을 가지고 마녀성에 도착했을 때, 마녀성은 난리가 나 있었다.
밀라니아는 부서진 마녀성 한쪽 벽에 모여 웅성거리는 마녀들을 반쯤 감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손수 수리하기까지 한, 나의 평화로운 마녀성이…….’
부질없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파스스 흩날렸다.
대부분의 이종족들은 일족의 수장의 성향에 따라 그 대의 분위기가 갈린다.
밀라니아가 수장으로 있는 마녀족은 대개 느슨하고 평화로운 데다가 고요한 분위기였다.
그런 마녀성이 요즘 들어 시끄러운 일이 잦은 것엔 명확한 원인이 있었다.
“밀라니아 님!”
마녀들의 중앙에서 골머리를 앓는 표정으로 수리 지시를 하고 있던 체라가 밀라니아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또 일주일간 안 오실 줄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일찍 오셨네요. 안 그래도 어떻게 할지 고민이었어요.”
체라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누구 짓인고?”
상황 설명을 듣지도 않고 묻자 체라도 체념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이번에는 르베리안즈요.”
“그레칸이 아니라?”
‘힘’ 하면 르베리안즈보다는 그레칸이기에 밀라니아가 눈살을 찌푸리자 체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간만에 차 마시면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굉음이 나지 뭐예요. 급하게 나와 보니까 라베리안즈가 돌덩이, 아니 암석을 던지고 있더라고요.”
“그레칸을 향해?”
밀라니아가 당연하다는 듯 묻자 체라도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염력으로요.”
“아.”
“그레칸 고게 어찌나 얄미운지, 사납게 던지는데도 요리조리 피해서 하나도 맞지 않더군요.”
“하아.”
“르베리안즈는 독방에 가둬 놨어요. 잘못에 대한 대가는 받아야지요. 그레칸은 갇힐 걸 알았는지 애저녁에 도망갔고요.”
밀라니아는 다시 한번 한탄했다.
‘내 평화로운 마녀성이!’
몇십 년간 흠집 하나 가지 않았던 우아한 성이 파괴된 모습에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솟아올랐다.
“알았다. 내가 가 보마.”
“그냥 제 의견을 말하는 건데요, 밀라니아 님.”
체라가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깔자 성으로 들어가려던 밀라니아가 체라를 바라보았다.
“두 놈들, 자기네 일족으로 돌려보내는 거 어떨까요.”
“…….”
“계속 있다가는 우리 쪽 살림이 거덜 나겠어요. 저번에는 마당을 초토화시켰다니까요.”
밀라니아는 슬픈 눈으로 체라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러고 싶구나.’
“하아.”
밀라니아는 축 처진 몸을 돌려 성으로 걸어 들어갔다.
10년에 한 번 열릴까 말까 했던 독방이 요 근래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열리고 있었다. 모두 그레칸과 르베리안즈 때문이었다.
밀라니아는 익숙하게 독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르베리안즈는 독방의 상단에 달려 있는 작은 창문을 올려다보며 날개를 펴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썹을 치켜뜬 얼굴로 뒤를 돌아본 르베리안즈의 낯빛이 확 밝아졌다.
방금까지 붉은 눈을 스산하게 빛내던 르베리안즈의 해맑은 얼굴.
“밀라니아.”
르베리안즈의 금색 눈썹이 나비 날갯짓처럼 움직였다.
수면병의 병마에서 얼추 벗어난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병약미를 벗어던지고 본연의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찾아가고 있었다.
“날 보러온 건가요?”
방금까지 탈출하기 위해 날개를 꺼내 놓고 있던 애가 맞는지, 등 뒤에 돋아났던 날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쪼르르 달려온 르베리안즈가 달콤한 미소를 흩뿌렸다.
밀라니아가 부담을 느끼며 한 걸음 물러서자 르베리안즈도 한 걸음 다가왔다.
“흠, 르베리안즈.”
밀라니아가 헛기침을 하고는 일명 ‘잠자는 왕자님’. 지금은 ‘마녀들의 왕자님’이 되어 버린 르베리안즈를 내려다보았다.
“리비라고 불러 줘요, 밀라니아.”
르베리안즈는 태생이 유혹하는 존재로, 미소 하나에도 유혹이 배어 나와 있었다.
“당신만이 날 그렇게 부를 수 있어요.”
밀라니아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피를 먹여 병을 낫게 해서 그런가. 전생과 달리 사근사근한 르베리안즈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렇게 협조적인 게 차라리 나을 수 있겠어.’
속내를 알 수 없이 의뭉스럽게 굴던 전생의 그가 생각나 찝찝하기는 했지만, 이번 생에서는 최대한 친밀한 관계를 구축하는 게 좋다.
밀라니아는 완벽한 가로를 그리고 있던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벽을 부셔 놓았더구나.”
“냄새 나는 늑대 놈 때문이에요.”
르베리안즈가 하아, 한숨을 쉬며 촉촉한 붉은 눈을 끔벅였다.
“같은 공간에 있기가 힘들어요. 코가 예민한 편이라. 숨 쉬는 공기에 그놈의 노린내가 섞여 들어와서…….”
르베리안즈는 자신의 고초를 알아 달라는 듯 시무룩하게 얼굴을 옆으로 기울였다.
“모든 건 그놈 때문이에요.”
[저놈이 잘못했다.]
그레칸이 불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르베리안즈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겹쳐졌다.
둘 다 어쩜 저렇게 똑같은 말을 늘어놓는지.
새삼 머리가 아파 온 밀라니아는 얼굴을 구길 뻔했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미소를 유지했다.
“많이 힘들었겠네.”
감정을 담아 보려 했지만 공허함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밀라니아는 공감하고 있다는 뜻으로 눈을 아래로 휘었다. 표정으로나마 표현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통했는지 르베리안즈의 얼굴이 한층 다정하게 변했다.
“달콤한 피를 보아 예상하기는 했지만, 밀라니아는 역시 교양 있고 친절하네요.”
저보다 한참 어린 박쥐에게서 듣는 칭찬에 밀라니아의 표정 일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계약의 언어를 들어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하느니.’
침착하게 표정을 복구한 밀라니아가 무릎을 굽혀 르베리안즈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선물이 있단다, 리비.”
“선물?”
“눈을 감아 보렴.”
몸 안에 있는 다정함을 바득바득 긁어모은 밀라니아가 부드럽게 말하자 르베리안즈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별다른 의심 없이 순순히 눈을 감았다.
밀라니아는 빠르게 손을 놀려 복종의 밤을 르베리안즈의 흰 목에 채웠다.
철컥!
붉은 눈을 반짝 뜬 르베리안즈가 의아한 눈으로 목을 더듬었다.
“……이게 뭐죠?”
“목걸이 선물.”
힐끗, 눈을 아래로 굴려 복종의 밤을 확인한 르베리안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서늘한 목소리에 설마 들켰나 싶어 밀라니아의 눈이 흔들렸다.
“그레칸과 같은 걸 선물이라고 하다뇨.”
르베리안즈가 못마땅하게 말하자 밀라니아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눈썰미도 좋아라. 이 선물이 그레칸이 목에 달고 있는 그것과 같다는 것을 바로 알아채다니.
“그레칸의 것과는 조금 다르단다.”
르베리안즈는 섬세한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스칼렛의 핏줄이었다. 의심병 증세를 극심히 보이는 스칼렛 말이다.
“응?”
“무릇 선물을 한다는 건 응당히 바라는 게 있다는 뜻이죠.”
르베리안즈는 일족의 후계자답게 냉철한 눈빛을 빛내었다.
밀라니아는 마녀족의 어린 마녀들과는 영 다른 르베리안즈의 성숙한 태도가 적응이 되질 않았다.
“한마디만 해 주면 된단다.”
“말해 봐요.”
“눈을 감고.”
밀라니아가 가느다란 네 손가락을 르베리안즈의 눈앞에 가져가자 르베리안즈가 스륵 눈을 감았다.
“나는.”
“당신에게 복종하겠습니다.”
“…….”
침묵이 감돌았다.
“뭔가 이상한데요.”
밀라니아는 르베리안즈가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이 다시 한번 입술을 혀로 핥았다.
“이건 너와 나를 한층 친밀하게 만들어 주는 마법의 언어란다.”
꼭 어린 마녀들에게 사기 치는 말란도르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불쾌감이 뭉근하게 올라왔다.
르베리안즈가 눈썹을 까딱였다.
“노예가 할 법한 그 말이요?”
과연 박쥐족의 후계자로서 자라 온 르베리안즈였다. 수상하기 그지없는 계약의 언어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듯했다.
밀라니아는 눈꼬리를 상냥하게 휘었다.
“그게 어째서 밀라니아와 내 사이를 친밀하게 만든다는 거죠?”
“이걸 차고 있는 한, 내가 널 먼저 저버릴 일은 없을 테니까.”
그 말에 르베리안즈의 얼굴에 고민하는 빛이 어렸다.
그 표정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밀라니아는 르베리안즈가 거절할 경우 내세울 수 있는 대안을 탐색했다.
불행히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믿을 수가 없군요.”
무뚝뚝하게 흘러나온 말에 역시 실패인가 싶은 밀라니아의 얼굴이 흐려질 찰나.
“그 막연하고 말뿐인, 실제적이지 못한 보상에 마음이 흔들리다니.”
“응?”
‘말 한번 어렵게 하는구나.’
밀라니아가 기묘한 눈으로 르베리안즈를 바라볼 때, 마음을 정한 르베리안즈가 나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만큼 밀라니아가 내 마음에 들었나 봐요.”
“…….”
‘영광이라고 해야 할 듯한 분위기구나.’
밀라니아는 빈정거리는 생각을 머릿속에 고이 접어 두었다.
분위기를 좋게 하기 위해서 ‘고맙다.’ 같은, 말 한마디 보태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차마 그렇게까지 하기는 싫어 밀라니아는 침묵을 지켰다.
르베리안즈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
“대신 나도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나에게도 그레칸처럼 당신의 시간을 내어 주세요.”
밀라니아는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의미냐?”
“그레칸과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내게도 그렇게 해 달라는 말이에요.”
두루뭉술한 대답에 밀라니아는 자신이 언제 그레칸과 시간을 보냈는지를 되짚어 보았다.
딱히 없거늘.
짚이는 거라면…….
‘설마 공 던지고 찾아오기 시간을 말하는 건가?’
그건 그저 그레칸을 훈련시키기 위한 과정의 일환일 뿐인데.
‘자발적으로 훈련을 받고 싶어 하다니, 특이하구나.’
밀라니아는 떨떠름한 얼굴로 귓불을 발그레하게 붉힌 르베리안즈를 바라보았다.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에요. 어쨌든 이 성에 있는 외부인이라곤 저와 늑대족 아이뿐인데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박쥐족의 후계로서, 제 자존심이 있지.”
“……그래. 그렇게 하마.”
“약속, 잊지 말아요.”
눈을 가린 밀라니아의 손 아래로 르베리안즈의 얄쌍한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눈부셨다.
밀라니아는 체라에게 어린 마녀들이 이 아름다운 박쥐족의 후계에게 홀리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일러 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심 쓰듯, 르베리안즈가 입술을 야살스럽게 달싹였다.
“나는 당신에게 복종하겠습니다.”
밀라니아는 귀물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영혼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말란도르가 제작한 이 귀물은 미약하게나마 시전자와 대상자의 영혼을 묶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명과 관련된 붉은 꽃도 그렇고, 감히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말란도르의 능력에 경악했지만 일단은 안심이다.
‘휴우.’
어쨌든 성공한 것이다. 이걸로 당분간 르베리안즈의 행동을 어느 정도는 제어할 수 있을 터.
밀라니아가 편안한 표정을 짓는 것과 달리 르베리안즈는 탐탁찮은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런 불쾌한 말을 내 입으로 하게 되다니. 밀라니아가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거예요.”
원래도 체력이 좋지 않았던 밀라니아는 피곤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끼면서.
* * *
아침에 따사로운 햇살이 마녀의 영역을 비추면 하나둘 깨어난 마녀들이 움직인다.
어떤 마녀는 산딸기와 사과로 식사를 하고, 어떤 마녀는 빗자루에 올라타 상쾌한 하늘을 갈라 하루를 시작한다.
밀라니아는 대부분의 마녀들보다 느지막하게 아침을 시작하는 편이었다.
아침나절.
하나둘 일어난 마녀들이 자기 활동을 하며 마녀성의 훈련장을 흘끗대며 지나갔다.
“밀라니아 님 또 저러고 계시네.”
지옥성에 영혼을 붙잡힌 것처럼 넋을 놓고 있던 밀라니아는 마녀들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투두두두!
팔짱을 끼고 의자에 앉은 채 있던 밀라니아의 귀로 거친 발자국 소리가 흘러들었다.
저 멀리서부터 흙먼지를 이끌고 뛰어오는 동물은 늑대화한 그레칸이었다.
이제는 어지간한 표범 정도 크기가 된 검은 늑대는 입 안에 공을 품고 정신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곧 밀라니아의 앞에 다가온 그레칸이 엉덩이를 땅에 내리고 앉았다.
퉤!
데구루루.
그레칸이 뱉은 공이 밀라니아의 발치로 굴러떨어졌다.
밀라니아는 공을 주우려다 말고 손가락을 튕겼다.
사악. 미풍이 훑고 지나간 공이 순식간에 먼지를 털고 깨끗해졌다.
밀라니아가 공을 주워 들자 그레칸의 꼬리가 더 거세게 흔들렸다. 탁탁, 긴 꼬리가 바닥을 경쾌하게 두드렸다.
그레칸은 분홍색 혀를 입 밖으로 내민 채 헥헥거렸다.
밀라니아는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는 그레칸을 보고 무표정하게 손을 들었다.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흰 손바닥 아래로 머리를 쑥 집어넣어 흔들었다.
그러자 밀라니아의 손이 그레칸의 머리를 쓰다듬는 꼴이 되었다.
그레칸의 검은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좁아든 눈매에 의해 반쯤 가려졌다.
“그래, 그래.”
밀라니아는 대충 대꾸하며 그레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도 좋은지 그레칸의 꼬리가 거세게 흔들렸다.
이 정도 됐다 싶을 즈음 손을 거두자 그레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칭찬.”
고개를 갸웃한다.
“칭찬 끝?”
“응. 끝.”
밀라니아의 대꾸에 그레칸이 불만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너무 짧다.”
잠시 고민한 밀라니아가 그레칸의 이마부터 콧잔등까지를 쓸어 주었다.
언제부터인지 그레칸은 밀라니아가 쓰다듬는 것을 환장할 정도로 좋아했다.
매일 아침 그레칸과 놀아 주고 쓰다듬고를 반복했던 밀라니아는 더는 어색하지도 않고 시큰둥해졌지만.
귀찮아도 그레칸과 훈련을 빙자한 놀아 주기를 건너뛰지는 않았다.
한 번은 일찍 깨기가 귀찮아 무시한 적이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올라와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 몸을 돌려 가면서 모른 척했다.
그레칸이 꼬리로 침대보를 불만스럽게 쳐 대는 것도 외면했다.
그게 그렇게 불만이었던지, 그날 벽이 하나 무너졌다. 보수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내벽이었다.
심지어 그건 끝도 아니었다. 오후엔 그레칸과 르베리안즈와의 혈투가 벌어졌다. 아주 오랜만에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생사 결전이었다.
그 이후에는 귀찮아도 꼬박꼬박 그레칸과 어울려 주고 칭찬도 해 주고 있다.
그레칸이 사고 친 걸 수습하는 게 더 귀찮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릉그릉.”
기분이 좋은 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손길을 즐기던 그레칸은 밀라니아가 손을 떼자마자 귀신같이 눈을 번쩍 떴다.
못마땅하게 일그러지는 눈을 본 밀라니아는 하는 수 없이 다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롱, 콧소리를 내며 얌전해지는 눈매를 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쓰다듬기 마법이라도 만들어 볼까?’
하등 쓸모없는 마법의 효용성에 대해 생각한 밀라니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결국 그레칸이 만족할 때까지, 근육통이 생길 정도로 오래도록 쓰다듬은 밀라니아가 훈련용 공을 숲을 향해 날렸다.
투다다다닥!
흙먼지와 함께 사라진 그레칸은 꽁무니도 보이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그레칸의 공 찾기 실력이 좋아져서 이제는 그냥 날리면 날아가는 공을 허공에서 낚아채 돌아올 정도였다.
밀라니아는 공이 나무의 옹이 속에 꼭꼭 숨을 수 있도록 마법을 부렸다.
‘이걸로 삼십 분은 안심.’
한시름 놓았다며 옅게 한숨을 쉬었다.
‘이게 체라가 종종 말하던 육아의 고충일까?’
그래도 이렇게 아침에 힘을 빼놓으면 점심 즈음부터는 낮잠을 자니 그때까지만 놀아 주면 되어서,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광은 아직 갓 성년이 된 어린 새의 꽁지깃처럼 부드러웠다.
‘아직 점심까지는 시간이 좀 있군.’
점심이 되었다. 드디어 하품을 하며 잠든 그레칸 옆에서 밀라니아는 피곤한 눈을 깜박였다.
아직 성체가 되지 않은 그레칸의 수면 시간은 꽤 긴 편이었고, 하루 중 그레칸이 수마에 빠지는 순간이 밀라니아가 가장 편안해하는 때였다.
“나도 좀 자야겠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올리는 순간 체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밀라니아 님, 주무시려고요?”
“응. 무슨 일 있느냐?”
“인간 재상으로부터 서신이 왔어요. 황제가 밀라니아 님의 약을 기꺼이 여겼다네요. 효과가 꽤 좋았나 봐요.”
황제가 약을 어디에 쓰는지 알고 있는 체라는 메쓰꺼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나이가 되어도 씨를 뿌리고 싶어 하다니. 사내들이란 신기하네요. 어쨌든 당분간 마녀성에 황금이 풍족해지겠어요.”
“인간 대륙에 여행을 가려는 일족들에게 도움이 되겠구나.”
“여비를 듬뿍 쥐여 주려고요.”
“내가 말한 아이에 대한 소식은 있었느냐?”
이게 가장 중요했다. 예전에는 거절했던 황제의 부탁을 들어주었던 이유이기 때문이다.
재상과의 연락책이 되었던 패밀리어는 몇 달째 잠잠했다.
체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앨리지라는 아이요? 아뇨. 거기에 대한 말은 없던데요.”
“……하긴. 일찍 찾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느니.”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아직 시간이 충분히 남았으니 괜찮았다.
지금은 그레칸, 르베리안즈, 그리고 앨리지도 땅꼬마 꼬꼬마들이 아닌가.
‘게다가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도 조금은 달라졌느니. 예전처럼 쉽게 덤벼들지는 않을 거야.’
내가 얼마나 공을 들이며 놀아 줬는데.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자신에게 서슴없이 덤빈다면 그건 양심이 없는 거다, 암.
새벽을 깨우는 수탉도 아니고, 일찍 일어나는 그레칸 덕분에 덩달아 기상 시간이 앞당겨진 밀라니아는 요즈음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좀 자야겠다, 체라.”
“예, 주무세요.”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녀는 정자세로 잠에 빠져들었다.
세 시간 후, 마녀성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밀라니아.”
초콜릿을 녹인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조용하고 어두운 방 안에 종처럼 울려 퍼졌다.
“으음.”
밀라니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흔들렸다.
“밀라니아, 밀라니아.”
거듭된 부름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그녀의 신경을 슬쩍슬쩍 건드려 댔다.
차가운 손가락이 설핏 찌푸려진 은빛 눈썹을 부드럽게 찔렀다.
“밀라니아.”
밀라니아는 몽롱한 정신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레칸?”
“그레칸 아닌데.”
달콤했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리비인데요.”
“음, 그래, 리비……. 리비?”
밀라니아가 눈을 번쩍 떴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침대 옆에 얼굴만 내민 채로 르베리안즈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놈이 왜 여기에?’
그는 수면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황이었다. 병증이 다시 도지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며칠간 관에 파묻혀 있어야 할 상황일 텐데.
그녀는 그의 창백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떻게 왔누?”
“날아왔어요.”
산뜻한 응답.
밀라니아는 그제야 르베리안즈의 등 뒤로 뻗어 나온 검은색 날개를 발견했다.
날갯죽지에서 시작된 날개는 부드러운 벨벳으로 만든 것처럼 매끄러워 보였다. 안쪽의 피막은 핏물처럼 불그스름했다.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 맑아지는 머릿속. 어벙한 목소리가 남의 것 같았다.
“흠, 그래. 무슨 일로 왔는고? 삼 일 동안 잠들었으니까 배고플 텐데. 주방에 가지 않고.”
“식사는 이미 했어요.”
“……?”
밀라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르베리안즈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붉은색 입술이 도톰하게 부풀어 올랐다.
“지금 이런 대화나 할 때가 아니에요. 언제 또 잠들지 모르는데.”
“그런데?”
“아이참, 지금도 봐요.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니라니까요. 삼 일이나 잠들어 있다니. 이 빌어먹을 병이 언제나 되어야 사라질지. 당장 내일 잠들어 있을지 눈을 뜨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난 자꾸만…….”
입술을 깨문다. 흰 치아 박힌 입술이 곧 터질 석류처럼 붉었다.
“밀라니아, 아직도 모르겠어요? 내 시간이 새고 있잖아요.”
“어……, 뭐라고?”
“시간이 줄줄 새고 있다고요. 내 귀중한 시간이 말이에요.”
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 르베리안즈가 눈썹을 들었다.
섬세하게 뻗은 눈썹을 흘끗한 밀라니아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슬슬 르베리안즈의 화법에도 적응하고 있다. 그래서 저 말이 무슨 뜻인지도 추측할 수 있었다.
시간이 새고 있다. 하릴없이 흘려보내지 말고 재밌게, 의미 있는 시간을 갖자는 의중이다.
솔직하지 못하기는.
‘그레칸이라면 그냥 놀아 달라고 했을 텐데.’
“놀아 줘?”
시큰둥하게 묻자 르베리안즈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눈을 치켜떴다.
얄쌍한 눈매는 화가 난 듯 날카로웠으나 입 밖으로 뱉는 말은 신중한 투였다.
“그 표현이 과연 적절한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밀라니아.”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뭘?”
표현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의미는 크게 틀리지 않다는 뜻인 것 같다.
밀라니아는 빙빙 말을 돌려 하는 르베리안즈를 피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은 르베리안즈의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레칸보다 몇 살 더 많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수면병을 앓고 있던 르베리안즈다.
정신 연령 자체는 어릴 때부터 생존 사냥을 해 왔던 그레칸보다 어릴 지도.
“그래.”
‘놀아 준다’라는 표현은 생략하고 밀라니아는 수긍하는 척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시간이 아깝다는 거구나. 수면병 때문에 신체가 제 기능을 못할 테니 회복 훈련이라도 해 볼까.”
생각하는 척하던 르베리안즈가 미소를 지었다.
“그거 좋군요.”
르베리안즈의 회복 훈련은 그레칸의 공놀이 훈련 시간과 비슷한 듯 달랐다.
밀라니아는 손목에서 핏방울을 뽑아 구슬처럼 단단하게 만들었다. 손바닥 위에 작은 루비처럼 딴딴해진 핏방울이 둥둥 떠다녔다.
투덜거렸던 것도 잠시, 르베리안즈는 핏방울에 집중했다.
장난감 같은 핏방울을 옆으로 이동시키자 붉은 눈이 도르르 쫓아온다.
밀라니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레칸이 훈련용 공을 좋아한다면 르베리안즈는 자신의 피를 좋아한다.
아무래도 수면병을 앓는 몸이라 기력에 좋은 걸 알아보는 건지.
밀라니아가 핏방울을 창문을 향해 던지자 핏방울이 밖으로 쏜살같이 쏘아졌다.
벌떡 일어난 르베리안즈의 어깨가 부르르 진동했다.
“잡아 오거라!”
기다란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키는 밀라니아의 명령에 르베리안즈는 신난 얼굴로 날개를 펼쳤다.
빠르게 날아가는 르베리안즈의 위로 보름달이 노랗게 빛났다.
홀로 남은 밀라니아의 표정이 금세 심드렁해졌다. 다시 눕기엔 이미 잠기운이 달아난 상황.
느긋하게 일어선 그녀는 창가에 기대 섰다.
아침에는 그레칸이 쫓아다니고 밤에는 르베리안즈가 따라다니는 꼴이다.
전생에는 자신의 심장에 집착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두 놈 모두 질릴 정도로 집요하고 끈질겼다.
“그래. 앨리지가 나타날 때까지 이러고 있어야 한단 말이지…….”
순간적으로 눈앞이 노래졌다.
고작 요 며칠 만에 이제껏 살아온 900년보다 더 늙은 것 같았다.
한편 마녀성의 마당, 은은한 달빛을 가르며 날아가는 르베리안즈를 발견한 마녀들은 자동적으로 밀라니아의 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창가에 밀라니아가 흡사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녀의 아득한 얼굴을 흘낏거린 마녀들이 수군거렸다.
“얼굴이 홀쭉해지셨어.”
“밀라니아 님, 저러다가 영면에 들 날이 빨라지실 것 같은데?”
“어이구, 어쩐담.”
안쓰러운 말투였지만 누구도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를 쫓아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밀라니아는 까맣게 모르는 사실.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는 각각 사납지만 귀여운 아기 늑대와 아름다운 왕자님으로서 마녀성의 마스코트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서로의 눈을 흘끗하며 모종의 뜻을 공유한 마녀들이 이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밀라니아 님이니까 괜찮을 거야.”
“밀라니아 님도 안 그런 척 둘을 아끼시는 눈치니까.”
“하긴. 그렇지 않으면 저분 성격에 둘을 가만히 뒀겠어? 매일매일 놀아 주시는 거 봐. 그러니까…….”
“마음으로는 아끼신다는 거지?”
“바로 그거야.”
절대로 오해였다.
밀라니아는 마녀들의 억울한 오해를 받으며 그레칸, 그리고 르베리안즈와 훈련인지 놀이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 아주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 * *
15년 후.
어느 볕 좋은 오후. 밀라니아는 나무 침대에 누워 평화로운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따사로운 공기가 그들이 사랑하는 대마녀의 몸을 살랑살랑 감싸고, 향긋한 꽃냄새가 코끝을 간질여 정신을 평온하게 유지시켰다.
잠에 빠져든 밀라니아의 얼굴은 마법에 걸려 잠든 공주처럼 한 점 근심도 없었다.
그러나 끝이 있기에 더욱 소중한 것이 평화라고 했던가.
쾅!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공기까지 떨리는 진동에 놀란 새가 떼를 지어 푸드덕 날아오른다.
나무 침대에 곱게 눕혀졌던 밀라니아의 신체도 소리의 파동에 휘말렸다.
번쩍.
눈시울이 좁혀졌다. 드러난 금빛 눈은 몽롱하게 반짝였지만, 곧 천천히 일그러졌다.
투명한 입술 사이로 아련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조용한 게 일주일을 못 가는구나.”
밀라니아는 빗자루를 타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쾅, 쾅!
연속해서 울리는 굉음의 간격이 짧아지는 만큼 마음이 다급해졌다.
다행히도 마녀성이 부서지는 소리는 아니었다.
밀라니아는 멀쩡한 마녀성을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젯밤 신신당부한, 마녀성에선 싸우지 말라는 명령이 먹힌 것 같았다.
복종의 밤이 아직까지도 효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허어.’
비행하던 밀라니아는 착잡한 눈으로 여전히 찬연하지만 15년 전과는 분명 어딘가 달라진 마녀성을 쓸어 보았다.
15년간 마녀성은 가히 누덕누덕 기운 누더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변해 버렸다.
여기저기 부서진 곳을 보수한 적이 백 번이 넘어갔고, 완전히 망가져 새로 만든 건 수십 번이었다.
성이 아니라 옷이었다면 너무 기워서 진즉 헤져 닳아 없어졌을 터였다.
황제에게 기력의 단약을 만들어 준 뒤 받았던 자금은 보수 비용으로 다 써 버리고 진즉 없어졌다.
‘황제가 늙어 죽어 자금줄이 끊긴다면 어찌하누. 인간들 상대로 약장사를 해야 하나.’
아주 오래전에는 그런 식으로 돈을 번적도 있었다. 마녀성을 확대 건축하는 막대한 공사를 진행할 때 그랬다.
이종족의 대륙에서는 찾을 수 없는 쓸 만한 자재와 발달된 도구를 사기 위해서였다.
다 늙은 나이에 살림 걱정을 하는 게 새삼 처량해진 밀라니아의 무심한 눈가에 그늘이 졌다.
“에휴.”
팔자에도 없는 사육인지 육아인지 모를 것을 했더니 이제는 별별 것이 다 걱정이었다.
쾅!
콰콰쾅!
숲 한가운데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밀라니아는 혀를 찼다.
1000년을 사는 대마녀에겐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이 시간은 단연코 그녀가 겪은 15년 중 제일 긴 15년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레칸과 르베리안즈의 기물 파손에 대한 금전적 손해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제 둘은 엄연한 성인.
그 말은 이제 저놈들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누가 보면 폭격이 일어난다고 착각할 법한 싸움의 현장으로 느릿느릿 날아가며 밀라니아는 며칠간 골머리를 썩었던 문제에 골몰했다.
‘거참, 이상하도다. 대체 어디에 있기에 이리도 소식 하나 들리지 않는 것이냐?’
밀라니아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건 그레칸도 르베리안즈도 아닌 앨리지였다.
앨리지. 그녀의 행방이 오리무중이었다.
현재 시점, 이미 그녀가 나타나고도 남을 시간인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인간 제국의 재상을 통해 사람 찾기 의뢰도 넣었던 걸 생각해 보면 이 상황은 확실히 이상했다.
‘예사로 볼 일은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인간 대륙에서 사람을 찾는 데는 제국의 정보력이 넘버 원.
주기적으로 재상에게서 일의 진척을 보고 받아 확인하고 있지만 돌아오는 건 곤란한 답변뿐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그도 늙었다. 재상이 은퇴한다면 앨리지는 직접 찾으러 다녀야 할지도.
곤란한 일이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고 기를 쓰는 이 세상을 생각해 보면 무슨 일이라는 게 무엇일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레칸과 르베리안즈의 혈기 왕성한 나이를 생각하니 의문은 더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때쯤 슬슬 세 주인공이 만날 타이밍인데.
반길 일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잠잠하니 이것 또한 불안했다.
아무래도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할 듯하다.
콰앙!
밀라니아는 싸움이 벌어지는 숲 한가운데에 도착해 비행을 멈추었다.
부웅!
아래에서부터 주먹만 한 돌덩이가 솟구쳐 올랐다.
슬쩍 빗자루 머리를 돌려 돌덩이를 피한 밀라니아의 고운 눈썹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향내 풍기는 우아한 단어만 뱉을 듯한 입술이 읊조렸다.
“이런 미친놈들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