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48)

4

박쥐족의 방문

비비가 낮게 날며 비웃듯이 구구구구 울었다.

몸을 웅크린 그레칸이 아차, 하는 사이에 메뚜기처럼 뛰어올라 앞다리를 휘둘렀다.

“크왕!”

아직 짧은 다리는 애석하게 비비의 바로 아래를 스치고 지나갔다.

단단히 벼르고 있던 게 아니었는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퍽 매서웠다.

“구구구!”

날카로운 손톱에 찢길 뻔한 비비가 놀랐는지 날카롭게 울어 댔다.

“구구!”

“크릉! 컹컹컹!”

밀라니아는 창가에 기대어 한 마리의 새와 한 마리의 늑대가 난투극을 벌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왜 저러는 것인고.”

쯧쯧,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30분 후.

끼익.

자려고 누웠던 밀라니아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안대를 벗었다.

까맣고 촉촉한 코가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크릉…….”

그레칸이다.

비비와의 난투극이 만족스럽지 못했는지 거칠게 씨근덕거린다.

밀라니아는 놀랍지도 않았다.

아직 몸이 완성되지 않은 그레칸이 하늘을 유영하는 제왕 비비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비비에게 실컷 놀림만 당하다 왔을 것이다.

터벅터벅.

그레칸은 평소와 달리 좀 처져 있었다.

‘지쳐 보이네.’

하루 종일 공을 찾아다니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니 피곤할 만도 할 터.

밀라니아의 침대 아래에 앉은 그레칸이 밀라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독기가 빠진 눈이다.

밀라니아에게 대들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걸 깨달은 얼굴.

밀라니아는 훈련의 성과에 흡족해졌다.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해 보세요.]

체라의 조언이 생각났다.

그레칸에게 손을 내밀자 그레칸이 그녀의 하얀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퉤.

그레칸은 손을 무는 대신, 얌전히 공을 뱉어 냈다.

밀라니아는 다른 손을 천천히 움직여 그레칸의 머리 위에 올려 두었다.

그레칸은 조금 움찔할 뿐 가만히 있었다.

밀라니아는 바람을 일으켰다. 부드러운 바람이 그레칸의 몸을 씻겨 주었다.

“그릉?”

난데없는 바람에 놀란 듯했던 그레칸은 곧 기분이 좋은 듯 눈을 반쯤 감았다.

밀라니아는 육포를 소환하여 그레칸의 입에 물려 주었다.

배가 고팠는지 잘 받아먹는 그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비비에게 할 때처럼 했는데 느낌은 퍽 달랐다.

‘비비보다 그레칸이 머리가 더 크군.’

새삼스러운 사실을 떠올린 밀라니아는 멍하게 그레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약간 까칠하면서도 복실복실한 게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그르릉.”

육포를 다 먹은 그레칸은 눈을 굴리며 얌전히 앉아 있었다.

한참 그레칸의 머리를 쓰다듬던 밀라니아는 졸음이 밀려왔다.

“자야겠구나.”

그레칸에게서 손을 떼고 자리에 누워 안대를 썼다.

그레칸은 독방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건만, 그레칸은 너희들이랑 있기 싫다는 듯 독방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잠이 고팠던 밀라니아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규칙적인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 그레칸의 까만 눈동자가 반질반질해졌다.

“크릉…….”

눈동자에 고민이 어렸다.

‘물까? 말까?’

망설이길 한참, 이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다.

터벅터벅.

문까지 걸어간 그레칸이 돌연 고개를 돌려 자고 있는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밀라니아의 몸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그레칸은 까만 눈동자로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 * *

일주일 후.

밀라니아는 훈련장에서 그레칸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공을 던지자 그레칸이 빠른 속도로 달려가 공중에 있는 공을 낚아챘다.

마법을 쓰지 않고 공을 던지면 그레칸이 낚아채느라 공이 바닥에 떨어질 새도 없었다.

“우와.”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어린 마녀들이 탄성을 질렀다.

개를 패밀리어로 삼는 마녀는 종종 있었지만 늑대는 드물었던 탓에 신기한 모양이었다.

밀라니아는 흡족하게 그레칸에게서 공을 받아들었다.

이제 공 던지는 것 정도는 명령을 하지 않아도 가지고 온다.

하고 싶지 않아도 복종의 밤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밀라니아는 당연한 수순처럼 그레칸의 입에 육포를 물리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레칸이 눈을 반쯤 감은 채 손길을 받아들였다.

꽤 귀여운 모습이었다.

“와아…….”

어린 마녀들의 눈이 반짝였다.

“밀라니아 님, 저도 한번 만져 봐도 돼요?”

용기 있는 마녀가 나섰다. 밀라니아는 조금 고민했지만 이참에 그레칸이 어떻게 구는지 알고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마녀가 설레는 표정으로 그레칸에게 다가갔다. 그레칸이 마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어린 마녀는 기대 어린 얼굴이었다. 막 손을 내밀어 그레칸을 쓰다듬으려는 순간.

“크르르르…….”

평온했던 뭉특한 콧잔등에 주름이 잔뜩 갔다. 그러자 귀여웠던 새끼 늑대는 거친 맹수의 얼굴이 되었다.

새카맣고 반질반질한 눈동자.

‘감히 너 따위가 나를?’

흠칫. 돌처럼 굳어진 어린 마녀의 표정이 울듯이 변했다.

밀라니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리는 마녀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밀라니아 님!”

체라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와 밀라니아의 앞에 당도했다. 빗자루에서 내릴 때 살짝 삐끗하기는 했지만 무사히 내렸다.

밀라니아는 눈썹을 올렸다. 마법 제어력이 떨어지는 체라는 어지간해서는 빗자루를 잘 사용하지 않았다.

빗자루를 사용할 때는 급한 일이 있을 때다.

“무슨 일이니?”

“와, 왔어요!”

체라가 눈을 크게 뜬 채로 마녀성의 입구를 가리켰다.

“누가 와?”

“박쥐족이요!”

* * *

마녀족의 영역을 찾은 스칼렛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맸다.

햇빛을 싫어하는 그녀답게 챙이 넓은 검은 모자는 그림자가 얼굴을 완전히 가렸고 몸에 붙는 검은색 드레스는 발목 부근까지 왔다.

멀리서 보면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저벅저벅.

흙바닥이라 그런지 그녀의 구두 소리가 조금 더 둔탁하게 들렸다.

“스칼렛.”

어린 마녀들은 떼어 놓고 체라와 함께 입구까지 나간 밀라니아는 빗자루 위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박쥐족이 왔다는 소식에 또 싸움이 일어나는 거냐며 호들갑을 떨던 어린 마녀들의 재잘대던 소리로 아직도 귀가 멍멍하다.

한 손으로 귀를 꾹 눌렀다가 뗐다. 고도를 낮추자 스칼렛과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밀라니아. 나와 주었군요.”

스칼렛의 말투는 독특했다.

혀를 굴리는 것 같으면서도 붕 뜬 어투.

흔히 인간 사교계의 영부인들이 저런 식으로 말한다고 했는데, 박쥐족은 인간과 심심찮게 교류를 하는 편이니 말투가 비슷해진 걸지도.

“환영하느니.”

“당신의 편지를 받고 일주일간 고민했지만…… 올 수밖에 없었어요.”

스칼렛은 무표정했지만 모자의 그림자와는 다른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수심이 깊은 얼굴이다.

그런 얼굴도 유혹의 박쥐답게 아름다웠다.

“일족이 모두 온 건가?”

밀라니아는 스칼렛의 뒤를 흘끗했다.

현 박쥐족의 수장 가문은 스칼렛의 혈족들이다. 밝은 금발 머리에 창백한 피부, 붉은 눈동자가 특징이었다.

‘과연.’

스칼렛의 일행은 총 셋으로. 여자 하나와 남자 둘이었다.

모두 스칼렛의 직계손이자 그녀의 수행원으로 박쥐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이목구비만 다를 뿐 외양적 특징이 비슷하다.

‘르베리안즈가 생각나는군.’

금처럼 우아하게 반짝이는 금발과 피로 염색한 것처럼 빨간 눈동자는 비슷하다.

르베리안즈는 유혹의 박쥐족에서도 특출나다고 알려질 정도로 외모가 뛰어났기에,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그들에게서 르베리안즈와 닮은 곳을 찾고 있었다.

세 명의 박쥐족들은 스칼렛처럼 표정이 없었지만 밀라니아를 경계하는 듯 눈을 매섭게 빛내었다.

그간 박쥐족과 늑대족의 경계를 한 몸에 받고, 수없이 많은 싸움을 중재했던 밀라니아는 적대하는 눈빛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저거.’

밀라니아는 남자 박쥐족이 안고 있는 검은색 관을 보고 눈을 빛내었다.

‘르베리안즈.’

새끼 박쥐가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요동쳤다.

“나를 따라오려무나.”

탁, 빗자루에서 내린 밀라니아가 스칼렛에게 눈짓한 후 몸을 돌렸다.

그녀의 걸음이 향한 곳은 마녀의 성 하부 층.

쌉싸래하나 싱그러운 풀꽃의 향기. 체라가 가져다 놓은 허브의 향긋한 내음을 풍기는 곳.

손님을 맞이하는 마녀의 응접실이다.

싸움이 벌어져도 망가지지 않게 돌로 마감한 응접실은 늘 서늘했다.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간 밀라니아의 미간이 보일 듯 말 듯 찌푸려졌다.

‘얼음 굴 같군.’

밀라니아는 대리석 의자에 앉으며 생각했다.

늑대족은 박쥐들을 시체 냄새가 난다고 비하하지만 밀라니아는 그들에게서 겨울의 냄새를 맡았다.

시린 얼음과 보기에는 예쁘지만 서늘한 눈처럼, 뼈가 시리는 냉기가 냄새로 맡아진다.

박쥐족들도 밀라니아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박쥐족 청년들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이런 식의 만남은 드물었다. 낯설고 긴장될 수밖에.

잠시 침묵이 그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체라는 그들을 경계하는 눈으로 힐끔거리며 다기 세트를 꺼냈다.

그때였다.

자박자박.

네 발이 땅을 걸어오는 이질적인 소리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옮겨졌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오는 네 다리 짐승. 반질반질한 눈동자가 아니라면 전체적으로 무광택인 검은색 풍성한 털.

그레칸이었다.

밀라니아는 움찔했다.

‘저놈이 여길 왜 들어오누!’

내놓았기는 하지만 그레칸은 늑대족 수장 발칸의 막내아들.

아직 발칸의 자식이 여기 있다는 건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발칸이 그레칸을 천덕꾸러기 취급한다고 해도 대마녀의 수중에 아들이 있다는 걸 알고도 묵과할 자는 아니었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밀라니아의 아름다운 눈썹이 꿈틀거렸다.

‘실수다.’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아니면 하다못해 마녀숲에서 놀고 오라고 명령을 내렸어야 했다.

박쥐족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그레칸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레칸의 예측 불허 성격을 알고 있는 밀라니아는 혹여 그가 사고라도 칠까 봐 초조해졌지만, 그녀를 경계하는 박쥐족이 있기에 별다른 내색을 하지 못하고 그레칸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레칸은 입에 꽃을 물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레칸의 등장에 눈에 의문을 떠올린 사람들의 시선이 지금 상황과는 이질적인 꽃에 모여들었다.

‘?’

긴장하던 밀라니아도 의아해졌다.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필요한 물건을 찾아오라는 명을 내렸었는데.

‘웬 꽃?’

그레칸은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은지 태연자약한 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밀라니아에게로 다가왔다.

그레칸의 움직임에 따라 박쥐족의 눈동자도 이동했다.

가장 젊어 보이는 박쥐족 청년이 중얼거렸다.

“늑대?”

그레칸이 그들을 힐끗하고 밀라니아의 손에 꽃을 뱉어 냈다.

단순히 소리에 반응한 듯 그들에게 관심은 없는 눈치였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밀라니아는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레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릿속으로는 그레칸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숲속에서 길을 잃어서 얼마 전에 데려온…….”

“밀라니아.”

그레칸이 툭 뱉었다. 밀라니아는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데려온 아이로…….”

목소리가 스리슬쩍 떨려 나왔다.

평범한 늑대가 인간의 말을 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

늑대가 말을 한다면 떠올릴 가능성은 한 가지 뿐이다.

평범한 늑대가 아니라는 것.

그레칸의 말을 듣지 못했기를 바랐지만 그럴 리가 있나.

“늑대족?”

그레칸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던 박쥐족의 젊은 일족이 벌떡 일어났다.

다른 박쥐족들의 눈에도 의아한 기색이 한가득이었다.

박쥐족이 혈족의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만큼 늑대족도 그랬다.

특히 새끼 늑대에 대해서는 전쟁도 불사하려고 한다.

그런 새끼 늑대가 대마녀의 곁에 있는 건 당연히 매우 이상했다.

밀라니아는 침묵했다. 이마에 땀이 한 방울 맺혔다.

‘……그레칸, 너는 내게 어릴 때나 클 때나 똑같이 두통이로구나.’

골칫덩이가 따로 없다.

말이라도 안 하면 그냥 늑대라고 잡아뗄 텐데.

대마녀가 새끼 늑대를 납치했다는 게 알려지면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이상한 냄새가 나.”

그레칸이 박쥐족을 노려보며 말했다.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였다.

그르르르, 위협적인 목울음이 흘러나왔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머리를 쓰다듬는 척 꾹 눌렀다.

그레칸이 이상하다는 듯 밀라니아를 흘끗했다. 밀라니아는 속이 탔다.

‘제발 조용히 해다오.’

“밀라니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늑대족의 일원이 마녀성에 있다니.”

스칼렛이 침착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장으로서의 직감인지 이 일을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눈치다.

밀라니아는 고민에 빠졌지만 생각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번쩍.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들어 품에 안았다.

무거웠다.

‘처음에 데려올 때만 해도 가벼웠는데.’

훈련 탓인지 먹는 양이 늘어 달라는 대로 줬더니 이제는 같은 크기의 돼지보다 무거운 것 같았다.

게다가 돌덩이처럼 묵직하다. 손목이 후들거렸다.

갑작스럽게 그녀에게 안겨진 그레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탐스러운 검은 꼬리가 밀라니아의 팔목을 살랑살랑 휘감았다.

밀라니아는 놀란 박쥐족을 바라보며 그레칸의 턱을 간질였다.

“숲에서 길을 잃은 걸 도와줬더니, 돌아가지 않고 따라오지 뭔가. 허어, 인연이 이렇게도 이어지니…….”

인연 타령을 하던 밀라니아는 슬쩍 박쥐족 쪽을 바라보았다.

“…….”

눈에 의심이 가득하다. 밀라니아는 헛기침을 했다.

“말을 하는 것도 얼마 전에야 알았느니. 몸을 좀 더 회복하면 돌려보낼 생각이다.”

“그럼 왜 발칸에게 바로 말하지 않았죠?”

스칼렛은 순순히 믿지 않았다. 심계가 깊은 박쥐족이니 말 몇 마디 한다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알지 않누. 발칸의 성격.”

“하긴, 그 개새끼가 시도 때도 없이 왈왈거리는 거야 유명하지만.”

“뭐……. 마녀가 늑대를 데리고 있다는 건 의심을 사기 쉬우니 일부러 말하지 않았느니.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텐데, 스칼렛 그대라면.”

전쟁에는 명분이 필요하다. 반대로 말하면 명분이 없으면 전쟁이 일어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녀가 늑대의 아이를 납치했다’라는 명분만 주지 않으면 되었다.

‘가령 납치한 게 아니라 새끼 늑대가 먼저 따라왔다든지 하는 식으로.’

“글쎄요. 나라면 새끼 늑대가 길을 잃었든 말든 무시할 것 같은데요.”

스칼렛은 그게 당연하지 않냐는 듯 말했다.

의심하는 박쥐족을 보며 밀라니아는 내심 땀을 흘렸다. 미심쩍은 눈빛을 거두지 않는 박쥐족 때문이 아니다.

그레칸의 시선이 그를 감싼 자신의 손에 향해 있다는 게 느껴져서였다.

‘물지 마. 물지 마라.’

박쥐족에게 얘가 날 따라와서 그랬다, 라고 한 참이다.

그레칸이 물어 버리면 변명이 물거품이 될 터. 그럼 더한 의심을 사게 된다.

밀라니아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수면병에 걸린 아이는 상태는 어떠한고?”

르베리안즈는 과연 박쥐족에게 있어 중대한 문제였는지 밀라니아와 그레칸을 번갈아 보던 시선이 관에 꽂혔다.

거의 동시에.

콱!

‘흐읍!’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손을 물었다.

밀라니아는 손으로부터 번지는 화끈하고도 아찔한 고통에 눈앞이 어찔거렸다.

화가 치솟았으나 박쥐족의 앞이라는 걸 잊지 않았다.

차를 준비하던 체라만이 그 꼴을 보고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박쥐족의 눈치를 본다.

밀라니아는 아직 관심이 관에 있는 박쥐족을 곁눈질하고 다른 손으로 그레칸의 머리를 힘주어 쓰다듬었다.

“자, 착하지. 우리 이번에는 벌을 받기 위해 가장 필요한 도구를 찾아와 보자꾸나.”

상냥하지만 명령이었다.

그레칸은 스스로 찾아온 형벌 도구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미래를 예감한 그레칸의 검은 눈이 파들거렸다. 손등을 파고들었던 날카로운 이빨은 슬그머니 입 안으로 감춰졌다.

그레칸이 가련한 눈으로 밀라니아를 응시했다. 얌전해진 까만 눈은 귀여웠다. 그러나 밀라니아는 자비 없이 문 쪽을 고갯짓할 뿐이었다.

복종의 밤이 반짝였다.

그레칸은 눈을 구겼지만 귀물에 의해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타닥타닥.

응접실 밖으로 뛰어가는 그레칸을 보며 밀라니아는 상처가 난 손을 뒤로 숨겼다.

슬금슬금 밀라니아의 뒤로 다가간 체라는 물건을 찾는 척 몸을 숙였다.

박쥐족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빠른 손놀림으로 품속의 약초병을 꺼내 피가 나는 손등의 상처에 약을 발랐다.

응급 처치를 받은 밀라니아는 태연한 얼굴로 박쥐족을 바라보았다.

뛰쳐나간 그레칸의 뒷모습에 잠깐 시선을 줬던 박쥐족이 밀라니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특이하군요. 아무리 새끼라도 늑대가 마녀를 따르다니.”

“세상엔 별의별 일이 다 있으니까.”

아직 의심은 남았겠지만 상황을 이해했는지 스칼렛은 그레칸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밀라니아의 상처를 치료한 체라가 자연스럽게 일어나 제자리에 앉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

“내 아이가 수면병에 걸려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죠?”

스칼렛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밀라니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마녀에겐 짐승의 귀가 없지만 수많은 짐승들이 마녀의 귀가 되어 주는 걸, 알고 있지 않누?”

“…….”

“몇 년 전부터 박쥐족이 용한 의사와 치료술에 능한 마법사, 그리고 귀한 약초를 수소문한다는 것은 이미 진작 알고 있었느니.”

“…….”

“그건 모두 수면병에 효험을 보이는 게 아닌가?”

밀라니아는 미리 준비한 말을 술술 뱉어 냈다.

거짓으로 꾸며 내는 건 아니다.

몇 번째인지 모를 회귀에, 적을 알면 백 퍼센트 이긴다는 확신으로 그레칸과 르베리안즈의 정보를 긁어모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의 치료사 물망에는 나도 있었을 테지.”

밀라니아가 그렇지 않냐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가만히 듣고 있던 스칼렛은 한숨을 쉬었다.

“……당신 말이 틀림없어요, 밀라니아. 당신이 치료술에도 능하다는 소식을 들어 관심을 가진 적은 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치료술에 능한 게 아니라 신체 자체가 훌륭한 치료재인 것뿐이다.

그러나 신체의 특성과 관련된 민감한 정보를 여기저기 뿌리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기에 밀라니아는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를 보낸 이유부터 말해 보세요. 나는 밀라니아 당신이 내 아이의 치료를 위한 도움을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내게 편지를 보냈겠죠?”

스칼렛이 밀라니아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박쥐족이 늑대에 비해 마녀를 우호적으로 여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다른 종족에 비한 거다.

기본적으로 마녀족은 알 수 없는 수를 쓴다고 하여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대 생각이 맞느니.”

밀라니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대의 일족…….”

뭐라고 불러야 하나, 모르는 척 관을 힐끗하자 스칼렛은 의심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르베리안즈.”

“그래, 르베리안즈. 그를 치료하려고 하느니.”

“……정말인가요?”

스칼렛은 의심스러운 눈이었다. 다른 박쥐 일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밀라니아는 미심쩍은 시선에도 표정 변화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쥐족 여자가 스칼렛에게 고개를 기울여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

밀라니아는 대놓고 귓속말을 하는 걸 보면서도 태연히 차를 홀짝였다.

‘아마도 믿을 수 없다는 얘기를 하는 거겠지.’

박쥐족 여자가 물러나고 스칼렛이 다시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왜죠?”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목소리였다.

“밀라니아. 당신에게 우리와 척지려는 의도가 없는 건 알아요. 냄새나는 늑대 무리와는 다르죠.”

“…….”

“자연과 1대륙의 수호자라는 것에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당신들의 음흉한 속내는 믿지 않아요. 이렇게 웃으며 대화해도, 며칠 뒤 언제든지 우리 일족을 잡아들일 수 있는 게 당신들이니까요.”

밀라니아는 찔끔했다.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까지 하누.’

더 할 말이 없어지는 건, 스칼렛의 말에 딱히 반박할 거리가 없어서였다.

꽤 과격한 성향의 전대 대마녀는 자연을 위한 생물종의 정화를 원했다.

그런 대마녀와 마녀 일족의 총공세에 늑대족과 박쥐족은 멸족의 위기까지 갔던 적이 있으므로, 그들이 그 일을 기억하는 한 마녀족에 대한 경계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걸 따질 정도로 여유로운 처지인고?”

밀라니아의 말에 스칼렛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박쥐 일족의 고귀한 후계가 10년 간 수면병을 앓고 있는 건 그녀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목숨을 잃는 것보단 낫겠죠.”

그 말은 역시 마녀족을 믿지 못하겠다는 거다.

밀라니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 호의에 대한 이유를 묻겠다니 할 수 없지.”

“…….”

“그대 예상대로 아무런 셈 없이 그를 치료해 주겠다는 건 아니야.”

“말해 보세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스칼렛이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눈짓했다.

“나는 전대 대마녀와 성향이 다르지만, 이 땅에 질서가 필요하다는 건 동의하느니.”

“…….”

“그대도 알다시피 지금은 혼란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야. 다툼을 줄이고 평화를 찾으려면 모두가 인정하는 질서가 필요하지.”

“밀라니아, 설마 당신은 전대 로드 위치처럼 전쟁을 하려는 건가요?”

스칼렛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약 1000년 전, 일족이 멸족 직전까지 갔던 그 일은 박쥐족의 트라우마였다.

밀라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전대 대마녀와 나는 다른 사람이다. 전쟁을 원하는 게 아니야.”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는 스칼렛.

“하지만 마녀가 질서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맞다.”

그럼 그렇지, 하는 눈.

밀라니아는 한숨을 삼켰다.

“지금처럼 각 종족들이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운다면 언젠가는 전쟁이 벌어질 터. 난 각 종족의 영역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싶구나.”

“…….”

“그러기 위해선 전체를 어우를 수 있는 한 명의 로드가 필요한 바.”

밀라니아의 말이 이어질수록 박쥐 일족들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말도 안 된다는 뜻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스칼렛만은 변화 없이 밀라니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스칼렛, 나는 그대가 한 일족의 로드로서 내 제안을 지지해 주길 바라느니.”

“……길게 말했지만 결국은 전쟁 없는 싸움을 하겠다는 거군요.”

“그대들의 문화와 영역은 건드릴 생각 없어. 다만 굳게 닫힌 성문을 열어젖히고 교류하길 바랄 뿐.”

“꼭 인간 대륙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맞아. 인간처럼.”

밀라니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서늘하고 하얀 얼굴이 확신에 찬 미소를 짓는 모습은 설득력이 있었다.

박쥐 일족들은 혼란스러워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우리가 당신을 지지한다고 해도 늑대족은 쉽지 않을 거예요. 발칸의 더러운 성격은 당신을 자신의 윗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요.”

스칼렛이 고심하는 표정으로 의견을 내놓았다.

“그건 걱정 말아. 늑대족에겐 그 나름의 해결 방법이 있으니.”

시종 여유로운 자세로 대꾸하는 밀라니아를 관찰한 스칼렛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사실상 밀라니아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긍정의 한숨이었다.

“좋아요. 당신이 내 아이를 정상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해 준다면, 우리 일족은 당신이 추후 이 대륙의 로드가 되는 걸 지지하겠어요.”

“믿어 줘서 고맙군.”

“하지만 손자는 세상의 모든 약을 써 보아도 효과가 없었어요. 그래서 마지막 방법으로 요정족을 찾고 있었지만, 요정족은 아무리 찾아도 머리카락 하나 안 보이더군요. 당신은 어떻게 내 아이를 치료할 거죠?”

밀라니아는 생각에 빠졌다.

‘르베리안즈의 병을 고친 건 앨리지였겠지.’

만나는 건 아마도 몇 년이 지나서였을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박쥐족의 노력 때문이었을까? 그랬다면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이해가 된다.

‘그렇게 사랑에 빠졌던 건가.’

사랑이든 뭐든,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사랑의 제물로 자신의 심장이 선택되었다는 것이 괘씸해도 아주 괘씸했다.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르베리안즈가 있을 관을 노려보았다. 곧장 의심스러운 시선이 와닿았다. 간신히 여유로운 안색을 되돌렸다.

“밀라니아?”

밀라니아의 침묵에 스칼렛이 의아하게 물었다.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아직도 의심하는 기색이다.

밀라니아는 자연스럽게 스칼렛의 의문에 답했다.

“……그래. 그래서 그의 병은 나로서도 고치기 쉽지 않아. 하지만 내 치유술이라면 못 할 것도 없을 거다.”

“…….”

“그런 의미에서 제안할 게 있느니. 그대의 마음에 차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치료를 위해선 꼭 받아들여야 할 일이야.”

“그게 뭐죠?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협조하겠어요.”

적극적인 스칼렛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제안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밀라니아는 짧게 숨을 들이켜고 빠르게 말했다.

“그를 내게 맡겨 줘.”

과연 스칼렛이 멈칫했다.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겠군요.”

“그를 내 성에 맡기고 내게 치료를 일임하란 뜻이니라.”

밀아니아가 특별할 것 없다는 듯 여상하게 말하자 스칼렛의 얼굴이 굳어졌다.

거친 반응은 그녀의 옆에서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우시죠.”

아까부터 불만이 있어 보이던 가장 젊은 박쥐족 청년이 관 위에 손을 올리며 밀라니아를 쏘아보았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곳은 적진입니다. 이런 곳에 후계자를 두라니, 그 말을 우리가 수용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박쥐족 청년의 입술이 사납게 비틀렸다. 창백한 피부와 대비되어 유달리 붉어 보이는 입술이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입술 사이로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자카린, 나서지 마라.”

스칼렛이 낮은 목소리로 명령하자 박쥐족 청년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눈빛에 가득한 적대감은 여전했다.

“내 아이가 과격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에요.”

“…….”

“밀라니아 당신이 이유 없이 우리를 해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후계자를 당신의 곁에 두는 위험한 짓을 감수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밀라니아는 박쥐족이 흥분을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박쥐족의 염려는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그의 병은 뿌리가 깊어 단시일 내에 치료하기 어려워. 꾸준히 치료해야 하지.”

“…….”

“게다가 내 마법은 곁에 두고 치료해야 효과가 있느니.”

밀라니아는 시종 태연하고 침착했다.

마법이 아니라 피를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곁에 둬야 하는 건 사실이다.

‘곁에 두고 감시하는 목적이 크지만.’

치료를 한다고 르베리안즈가 당장 나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수면병을 앓고 있을 것이고, 만약 박쥐족에 두었다가 어느 날 눈을 떠서 앨리지를 만나게 되면.

‘피도 쓰고 심장도 뜯기는 꼴이다.’

과연 그런 우연이 있을까 싶지만 밀라니아는 이 세상을 믿지 않았다.

단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일단 차단하고 볼 일이다.

“그렇게 말해도 꺼려지게 되네요.”

“…….”

스칼렛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찻잔을 바라보았다.

박쥐 일족들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수장이 고민을 끝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마침내 스칼렛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증명해 줘요, 밀라니아.”

“…….”

“당신이 르베리안즈를 치유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그때 당신 말대로 하겠어요.”

고민을 끝낸 스칼렛의 눈은 단호하고 싸늘했다.

밀라니아는 의심이 가득한 박쥐족의 시선을 강하게 느꼈다.

‘쯧쯧, 치료해 준다고 해도 난리구나.’

안 그래도 울며 겨자 먹기로 하는 셈이었던 밀라니아는 빈정이 상했다.

자신이 아니라면 르베리안즈는 몇 년일지 모르는 시간을 잠을 자며 보내야 할 터였다.

‘때려치울까.’

짧은 시간 진지하게 고민한 밀라니아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르베리안즈는 몇 년 잠을 잘 뿐이지만 자신은 몇십 년을 이미 겪어 본 시간 속에 있어야 했다.

회귀라면 지긋지긋하다.

‘에휴, 어쩌겠누. 조금만 참아 보자꾸나.’

저 정도의 무례함은 좋게 넘어가줄 수밖에.

사실 입장을 바꿔서 늑대족이나 박쥐족이 잘 키워 줄 테니 마녀 하나 달라고 한다면, 자신 역시 들은 척도 안 하고 묵살할 것이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의심하는 것도 이해는 되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밀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좋아.”

“…….”

“일단 르베리안즈를 봐야 하느니.”

“…….”

“너무 심각하면 나라도 안 될 수 있다는 건 알아 두려무나.”

밀라니아는 괜히 박쥐족을 긴장시킬 말을 툭 던지고 일어났다. 빈정이 상해 심술을 부린 것이다.

젊은 박쥐족 청년이 그의 반밖에 되지 않는 관을 대리석 상 위에 올렸다.

청년은 밀라니아를 흘끗 본 후 관의 뚜껑을 열었다.

동시에 아카시아 향처럼 향긋한 향이 응접실 가득 퍼져 나가고, 온도가 낮아졌다.

‘춥다.’

안 그래도 체라가 몸을 가볍게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쥐족은 기본적으로 체온이 낮은 데다가, 수면병은 한기를 품고 있는 병이다.

수면병을 앓고 있는 르베리안즈는 얼음 굴보다 찬 상태였다.

“…….”

박쥐족 청년은 머뭇거리다가 관의 뚜껑을 들고 뒤로 물러섰다.

밀라니아를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러난 박쥐족을 흘끗한 밀라니아가 관에 가까이 다가갔다.

관 안을 들여다보았다.

퇴폐적인 마력이 실타래처럼 피어올랐다.

‘……르베리안즈.’

꿀과 금실을 엮은 듯 달콤하고 아름다운 금발.

창백하지만 귀공자처럼 하얀 피부.

매끈한 이목구비.

유혹의 박쥐족답게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수없이 반복된 회귀에서, 익숙해진 남자의 얼굴.

밀라니아는 르베리안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리군.’

이목구비는 비슷하지만 훨씬 어렸다.

신장은 자신의 반밖에 되지 않을 듯하고, 어른스러웠던 턱은 아이답게 둥글다.

푸른 핏줄이 비치는 눈꺼풀이 눈동자를 가리고 있지만 피처럼 붉고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거기 있을 것이다.

밀라니아는 이 어린 박쥐족의 후계자가 나중에 어떻게 클지, 머릿속으로 선명히 그릴 수 있었다.

“밀라니아.”

밀라니아가 가만히 있자 스칼렛이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초조함을 감출 수 없는 목소리다.

태연하고 여유로운 척 밀라니아를 몰아쳤지만 역시 가장 걱정되는 건 후계자의 안위일 터.

“시작한다.”

밀라니아는 검지와 중지를 붙여 손가락에 댔다.

‘새삼 르베리안즈가 수면병을 앓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어린 그레칸을 사육하는 것도 이렇게 애를 먹고 있는데 르베리안즈까지 깨어날 생각을 하니 소름이 오싹 끼쳤다.

르베리안즈는 그레칸과 다른 타입의 집착 남주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그레칸에 비해 르베리안즈가 더 골치 아플 수도 있었다.

치료를 한다 하더라도 르베리안즈는 여전히 수면병을 앓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치료는 병을 앓는 기간을 줄일 뿐, 병 자체를 기적처럼 없애지는 못한다.

‘그레칸이 좀 진정된 후에 일어나거라.’

내심 기원하며 밀라니아가 손목에서 손가락을 떼자, 손목으로부터 핏방울이 몽글몽글 뿜어져 나왔다.

‘그래도 체온이 올라가는 효과 정도는 생길 것이니.’

당장 완쾌되지는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치료법이 없어 좌절한 박쥐족에게 희망이 될 거다.

밀라니아는 손가락으로 르베리안즈를 가리키며 주문을 외우는 척 입술을 달싹였다.

치료의 효과를 위해서라면 피를 사용하기만 해도 되지만, 치료술을 쓰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일종의 쇼였다.

과연 밀라니아가 주문을 빙자한 아무 말을 뱉자 박쥐족의 눈에 긴장이 어렸다.

체라만이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밀라니아는 곁눈질로 분위기를 살폈다.

‘이 정도면 되겠군.’

여전히 입술을 달싹이며, 손가락을 르베리안즈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체온을 높이는 거니까 머리에 흡수시켜야 하나?’

이마로 가려던 손가락을 급 리턴시켰다.

‘그래도 먹이는 게 더 효과가 클지니.’

밀라니아는 치료를 위해 그녀에게 가장 익숙한 방법을 택했다. 바로 피를 먹이는 것.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핏방울 다섯 방울이 바람에 움직이는 것처럼 미세하게 변화하게 시작했다.

한쪽으로 쏠린 핏방울이 또르륵 움직이고, 마침내 손가락 끝에 다다랐다.

대롱대롱 달린 핏방울은 밀라니아의 의도에 따라 르베리안즈의 창백한 입술로 떨어졌다.

뚝.

뚝.

뚝.

뚝.

뚝.

정확히 다섯 방울이었다. 파랗게 질린 매끄러운 입술에 피가 묻었다.

입술 껍질이 보일 만큼 마른 입술에 불협화음처럼 묻은 피. 퍽 괴기스러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아.

지켜보던 박쥐족의 눈이 커졌다. 입술을 적셨던 핏방울이 안으로 스며들듯 사라진 것이다.

“…….”

“…….”

좌중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관 안의 르베리안즈에게 집중되었다.

수 초의 시간이 흐른 후, 르베리안즈의 창백한 피부에 옅게나마 혈색이 돌았다.

입술이 발그레해졌고, 얼어붙은 피부처럼 생기 없는 뺨에 홍조가 올랐다.

아름답기만 한 인형이 생명을 얻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변화는 충격적이었다.

“이럴 수가. 르베리안즈!”

기품을 유지하던 스칼렛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밀라니아를 경계하던 박쥐족 청년들의 눈에도 놀라운 기색이 역력했다.

밀라니아는 약간의 뿌듯함을 느끼며, 겉으로는 차분하게 말했다.

“이 치료술은 내 생명과 관련된 마법이라 쓸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느니. 내가 르베리안즈를 맡겨 달라고 한 건 그 때문이로다.”

‘절대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라는 걸 강조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피를 사용하는 거니, 내 생명과 관련이 있지 않누.’

감격한 스칼렛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마워요, 밀라니아.”

말은 밀라니아에게 하고 있지만 시선은 생기를 띤 인형 같은 르베리안즈에게 못 박혀 있었다.

밀라니아는 그녀가 맞이하는 감동스러운 순간을 고려하여 너그럽게 이해해 주었다.

“당분간은 이 정도가 한계야. 치료를 계속하면 눈도 뜰 거고. 점점 일어나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호전될 것이니.”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놀라워하는 박쥐족의 시선을 받으며 밀라니아는 쐐기를 박기 위해 쇼맨십을 발휘하기로 마음먹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르베리안즈에게 손을 뻗은 것이다.

발그레한 뺨에 슬쩍 손을 올렸다.

“봐 보려무나. 지금은 이런 식으로 혈색이 얼굴에만 돌지만 나중에는…….”

그 순간 르베리안즈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우우…….”

전문가처럼 여유롭게 말하던 밀라니아는 우뚝, 석상처럼 굳어졌다.

손끝에서 흩어지는 차가운 숨결.

‘설마.’

설마가 마녀 잡는다.

번쩍.

르베리안즈가 눈을 떴다.

기억에 있는 것보다 앳된 빨간 눈동자. 눈이 마주친 밀라니아는 헛숨을 터뜨릴 뻔했다.

꿀꺽.

경악성 대신 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

스륵, 르베리안즈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다소 멍한 시선이 주변을 향했다가 다시 밀라니아에게로 돌아왔다.

쿵, 심장이 떨어졌다.

“어머, 르베리안즈!”

밀라니아의 경악은 까맣게 모르고 박쥐족 처녀가 소리쳤다. 밀라니아와 달리 기쁨이 가득한 비명이었다.

르베리안즈의 눈은 여전히 밀라니아를 정확히 직시하고 있었다.

“…….”

밀라니아는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며, 속으로 땀을 한 방울 흘렸다.

‘다시 감아. 눈 다시 감아.’

바람이 통했을까.

눈을 뜬 건 일시적인 현상인 듯, 르베리안즈의 눈꺼풀이 다시 닫혔다.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눈을 감은 르베리안즈의 모습에 박쥐족이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반면 밀라니아는 깊이 안도했다.

르베리안즈는 아직 깨어나면 안 된다.

박쥐족의 시선이 밀라니아에게 향했다. 밀라니아는 짐짓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치료 효과가 생각보다 빨리 나타나는군.”

“밀라니아.”

손수건으로 눈가를 톡톡 두드린 스칼렛이 자세를 바로 하더니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전에 없이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였다.

결연한 표정으로 말한다.

“우리 박쥐 일족은 당신이 이 대륙의 로드가 되는 걸 지지하겠어요.”

시종 밀라니아를 의심하던 박쥐족 청년들도 한 손을 가슴에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맹세의 표시였다.

“그러니 부디 내 아이가 나을 수 있도록, 부탁할게요.”

스칼렛까지 고개를 숙였다.

한바탕 감동의 물결에 휩싸였던 박쥐족이 돌아간 뒤, 진이 빠진 밀라니아는 딱딱한 나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체라가 기분이 나빠 보이는 밀라니아의 눈치를 보았다.

“일은 잘됐는데…… 왜 그런 표정이세요?”

“일이 잘됐다고 했느냐?”

기겁하는 그녀의 반응에 체라는 엉거주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잖아요?”

박쥐족, 특히 로드 스칼렛이 고개를 숙이지 않았는가.

체라는 마녀족이 박쥐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듯한 기분이었다.

펄쩍펄쩍 뛰며 기쁨을 표현하려는 마음을 참아 내느라 어찌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게 잘된 게 아니면 뭐란 말이지?

의아한 체라의 시선에 밀라니아는 허탈한 표정이 되었다.

“르베리안즈가 깨어날 뻔했지 않누.”

밀라니아의 음산한 대꾸에도 체라는 어리둥절했다.

“깨어나게 해야지요? 그래야 박쥐족의 지지를 계속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체라를 지그시 보던 밀라니아가 푹 한숨을 쉬었다. 뒤늦게 기뻐하려던 체라는 다시 엉거주춤해졌다.

‘이게 아닌가?’

생각이 복잡해 보이는 밀라니아를 흘끗거리며 체라가 은근히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런데 언제 그런 생각을 가지신 거예요? 대륙 일통이요! 제가 아무리 말해도 싫다고 하시더니.”

체라가 눈을 반짝였다. 밀라니아는 손등에 턱을 괸 채로 설레어 하는 체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박쥐족의 지지를 등에 업고 늑대족을 발아래 둘 수 있는 거군요! 드디어! 그 야만적인 종족을 발아래에!”

체라가 급기야 주먹을 쥐고 환호했다. 끼욧, 끼욧! 온갖 기쁨의 함성을 터뜨리려는 체라를 향해 밀라니아가 툭 뱉었다.

“그럴 일 없느니.”

“대륙 일통을…… 네?”

주먹을 쥔 채로 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덧없도다.”

“예에?”

“곧 영면에 들 내가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느냐.”

밀라니아는 계속 시큰둥했다.

“귀찮기만 하지.”

그녀와 달리 살날이 백여 년은 족히 넘은 체라는 대놓고 실망했다.

“그럼 박쥐족들에겐 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런 게 필요 없으면 굳이 박쥐족의 후계자를 치료해 주실 필요도 없잖아요!”

“순서가 바뀌었느니.”

“네?”

“저놈을 치료하기 위해 대륙 일통 핑계를 댄 거란다. 그래야 의심을 안 할 테니까.”

체라가 대리석 상 위의 관과 밀라니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왜요?”

굳이 왜 그런 핑계까지 댄단 말인가?

그것도 박쥐족의 후계자를 치료하기 위해?

대륙 일통보다 박쥐족의 후계자를 치료하는 게 더 중요하단 뜻인가?

‘아니, 왜?’

의문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체라에게 밀라니아는 여전히 맥 빠진 목소리로 설명했다.

“필요하니까. 치료를…… 아니, 굳이 치료도 열심히 할 필요 없느니. 르베리안즈는 최대한 늦게 일어나는 게 도와주는 거란다.”

‘앨리지와 만날 날을 늦추기만 하면 되니까.’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물음표가 더 늘어나는 체라와 달리 밀라니아는 열심히 계획을 짜며 머리를 굴렸다.

‘생각보다 수면병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은 것 같은데. 피 몇 방울에 눈을 뜬 걸 보면 말이지. 그렇다면 앞으로의 치료는 하루에 피 한 방울 정도……. 아니, 일주일에 한 방울이 나으려나?’

심각하게 고민하는 밀라니아를 흘끗한 체라가 김이 빠진 듯 관을 가리켰다.

“그럼 박쥐족 후계자는 어디다 갖다 놓을까요?”

흡사 물건을 취급하는 듯한 말투다.

대륙 일통을 위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하니 체라의 안에서 르베리안즈의 가치가 급격하게 하락했기 때문이었다.

르베리안즈가 어떤 취급을 당하든 관심이 없는 밀라니아는 귀찮은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냥 아무 데나…….”

“아무 데나요?”

멈칫한 밀라니아가 말을 바꾸었다.

“아니, 내 방으로 가져다 놓거라.”

“밀라니아 님의 방이요? 추울 텐데요.”

“그래도 내 방으로 두렴. 내 방이 안전할 것이니.”

‘아무 데다 놨다가 누가 훔쳐 가면 큰일이지.’

그래서 앨리지를 만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럴 리 없을 것 같지만, 이제껏 겪어 본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

주인공들 위주로 돌아가는 이 세상의 규칙을 생각해 보면.

밀라니아는 고급스러운 흑단목으로 만들었지만 그녀에겐 흉물스럽게만 보이는 관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세상.”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니란다.”

* * *

체라가 르베리안즈의 관을 밀라니아의 방으로 옮길 무렵, 밀라니아는 아까부터 들었던 의문을 풀기 위해 약제실로 향했다.

‘내 피가 이렇게 효험이 좋을 리 없는데?’

마녀의 수호목. 일명 마녀목에서 태어난 대마녀의 피는 세상 더없을 진귀한 약재이나, 방금 르베리안즈에게서 보았던 효과는 아무래도 과한 감이 있었다.

약제실의 문을 열어젖히자 약간 꿈꿈하면서도 새콤한 냄새가 코를 톡 쏘았다.

연금술사탑이 탐낸다는 마녀의 약제실에는 없는 게 없다.

정력에 좋은 말린 도마뱀의 꼬리, 피부 미백에 효과가 있는 심해에서만 사는 산호초 등의 상업적 마법 재료부터 개인 연구를 위한 재료까지 다양하다.

“생명력을 시험하기 위해선 죽은 꽃을 사용하는 게 제일이지.”

밀라니아는 찬장에서 시든 꽃이 심어진 화분 하나를 꺼내 왔다.

말라서 비틀어지기 일보 직전인 꽃잎 위에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뚝!

피를 흡수한 꽃의 시든 이파리가 살짝 흔들렸다.

약간이나마 해사해진 꽃을 밀라니아는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확실히…….”

피가 달라졌다. 딱히 나쁜 쪽은 아니었다. 효능이 증진한 것이니.

문제는 ‘어째서?’이다.

“어떻게 된 일이지?”

밀라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약제실에서 빠져나왔다.

‘몸에 좋은 걸 먹었나?’

특별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건강이 안 좋아졌다면 모를까.’

그레칸과 르베리안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곳이 없다.

생각에 잠긴 채 마녀성을 걸어 나오자, 훈련장 쪽에 마녀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뭐 하느냐?”

“아, 밀라니아 님! 오셨군요.”

마녀 한 명이 밀라니아에게 알은체를 했다. 그러고는 훈련장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마녀가 가리킨 곳에는 그레칸이 있었다.

“말을 걸어도 요지부동이라 저희는 밀라니아 님이 뭘 시키셨나 했어요.”

그레칸은 입에 웬 나뭇가지를 물고 훈련장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르베리안즈가 눈을 떴다는 사실에 심란해진 밀라니아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명령을 떠올렸다.

[자, 착하지. 우리 이번에는 벌을 받기 위해 가장 필요한 도구를 찾아와 보자꾸나.]

‘아, 그랬지.’

박쥐족이 있어 억지로 상냥하게 말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명령을 받들어 얌전히 기다리는 그레칸을 보자 이빨이 손등에 박혔던 통증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듯했다.

그러나 일도 잘 끝냈고 박쥐족도 돌아갔으니 화가 난 것도 심드렁해졌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지.’

버릇이 없어질 거다.

게다가 체라는 훈련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밀라니아는 귀찮았지만 올바른 사육의 길을 걷기 위해 그레칸에게로 다가갔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구나.’

죽이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하거나, 또는 다른 대륙으로 이동시키거나. 그런 간단한 방법에 비해 남주들의 마음을 돌리겠다는 이 계획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다가 섬세한 작업까지 필요했다.

‘인내의 결과물은 달콤한 열매일 것이니.’

밀라니아는 벌써부터 그레칸이 귀찮아지기 시작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레칸의 앞에 서자 그레칸이 고개를 들었다.

잘 먹고 잘 쉬어 길고 풍성해진 꼬리가 살랑거렸다.

탁, 탁.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뚱한 얼굴과 땅을 쳐 대며 활발하게 움직이는 꼬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체라가 말하기를 개과 동물은 꼬리를 흔들면서 반가움 또는 기쁨을 표현한다고 했다.

표정은 불만스러운데 꼬리는 왜 저렇게 난리 법석을 피우는 것일까.

밀라니아는 혼란스러워졌다.

‘기분이 나쁜 것이냐, 좋은 것이냐?’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그레칸, 손님이 있을 때는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되느니.”

“…….”

“이건 네게 미리 말하지 못한 내 책임이니 네게 잘못을 묻지 않겠다. 허나!”

말끝에 힘을 주자 그레칸의 꼬리가 흔들리다 멈추었다.

“분명히 함부로 이빨을 들이밀지 말라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쨌는고?”

밀라니아가 그레칸의 앞으로 물렸던 손을 흔들었다.

응급 처치를 받은 손은 마녀의 치유력에 의해 말끔히 치유된 상태였지만 붕대를 풀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상처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레칸이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외면하는 그레칸에게 밀라니아가 또박또박 말했다.

“넌 또 내 손을 물었느니.”

“…….”

“벌을 받아야겠지?”

머뭇거리던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발치에 나뭇가지를 떨어뜨렸다.

그가 반성하는 기미만 보여도 어물쩡 넘어가려던 밀라니아는 못내 당황했다.

“……회초리라. 벌을 받기 위한 도구로는 약간 부족하지만 나쁘지 않구나.”

‘이걸로 뭘 어떻게 하라고.’

아무래도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명령이 그를 체벌하기 위해서라고 짐작한 듯했다.

밀라니아는 내심 곤란했지만 태연하게 굴었다.

체라도 말하지 않았던가.

[훈련자는 늘 여유로운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얌전한 그레칸과 그 앞의 나뭇가지를 흘끗했다.

‘때려 달라는 거겠지?’

손을 내밀자 나뭇가지가 절로 움직여 밀라니아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밀라니아는 나뭇가지를 쥔 채 그레칸을 응시했다.

그레칸은 말갛고 투명한 검은 눈으로 밀라니아를 응시하며, 꼬리를 흔들어 댔다.

‘때려 본 적은 없는데.’

폭력적인 성향과는 거리가 먼 밀라니아는 나뭇가지가 영 꺼림칙했다.

밀라니아는 머뭇거리며 큼, 헛기침을 했다.

“내가 명한 건 네게 가장 적절한 체벌 도구였단다. 이런 나뭇가지가 털 수북한 네 몸에 통증이나 주겠느냐. 인간형에게나 효과적인 도구로는 너를 벌할 수 없으니.”

밀라니아는 곤란하여 내심 혀를 찼다. 아무래도 때리는 건 내키지 않다.

나뭇가지로 때리는 대신 체벌 훈련용 공으로 훈련장 뺑뺑이나 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너그러이 말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스르륵.

그레칸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어머나!”

마녀들이 소리를 지르며 분분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앞으로는 함부로 이빨을 놀리지 말고 말을 잘 들어라.’ 하고 말하려던 밀라니아의 손에서 나뭇가지가 뚝 부러졌다.

밀라니아의 무릎을 조금 넘는 크기였던 늑대 그레칸.

작은 몸을 뒤덮고 있던 검은 털이 슈슈슉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털이 있던 자리에는 구릿빛 피부가 나타났고 네 다리는 아직 짧지만 근육이 오밀조밀 들어찬 팔다리가 되었다.

웅크리고 있던 몸을 천천히 들어 올린 그레칸이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매끄러운 구릿빛 피부. 반질반질한 검은 눈동자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밀라니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

소년, 인간이 된 그레칸이 멍해진 그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밀라니아의 눈에 불신이 어렸다.

“말…….”

말도 안 돼.

그레칸이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끔벅.

새카맣지만 투명한 눈동자가 방금까지 여기 있던 작은 늑대와 같은 존재라는 걸 드러내고 있었다.

밀라니아처럼 놀라 눈을 토끼처럼 떴던 마녀들은 뒤늦게 그레칸의 모습을 확인하고 비명을 질렀다.

“어머어머.”

“어떡해! 이게 바로 망측하다는 거지?”

“맞아! 아주 망측해!”

“근데 좀 깜찍하지 않니? 귀여워!”

인간들의 대륙에 나가 보지 못한 어린 마녀들이다. 그녀들은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손으로 눈을 가렸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레칸을 흘끗하는 마녀들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으로 완전 탈태한 어린 그레칸은 나신이었다.

정신을 수습한 밀라니아도 문제를 깨달았다.

“정말 망측한 게 누구인 줄 모르고. 어허, 그래도? 다들 눈 안 돌리느냐!”

결국 호통을 치자 마녀들이 훔쳐보지 않은 척 딴청을 피웠다.

밀라니아는 손가락을 튕겨 즐겨 입는 망토를 소환했다.

망토를 그레칸의 몸에 둘러 주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인간으로 탈태했다고는 하지만 나이가 어린지라 인간형 역시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인간으로 따지면 여덟 살 즈음 되었을까?

작은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은빛 망토에 푹 파묻혔다.

엄마 옷을 빌려 입은 아이 같았다.

밀라니아는 망토로 그레칸의 몸을 꼼꼼히 여미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영면에 들 나이가 되면서 평온함을 잃지 않았던 그녀의 머릿속에 폭풍우가 쳤다.

르베리안즈에 이어 그레칸까지.

‘뭐가 이렇게 빨라?’

기억이 잘못된 걸까.

일전에 그레칸이 부분 탈태를 성공했다지만 그건 분에 못 이겨 순간적으로만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 탈태가 가능하려면 아직 1년이나 더 넘게 남았을 터.’

근데 이 꼴이다. 이렇게 빨라진다면 성체가 되기 전에 각성하게 되는 걸까.

밀라니아의 눈빛이 곤혹스러워졌다.

‘그건 곤란한지고.’

아직까지는 그녀가 그레칸을 대마녀의 힘으로 통제하는 게 가능한 상황이다.

그러나 그레칸이 성체로서의 힘을 되찾는 각성이 이루어진다면 통제는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소중한 심장은 팔딱팔딱 멀쩡히 뛰고 있다.

“이제…….”

그레칸이 입을 열었다. 꿀꺽.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밀라니아의 머릿속에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심장을 내놔.]

지금보다는 성숙하고 허스키하지만, 분명한 그레칸의 목소리.

밀라니아는 눈에 힘을 주고 그레칸의 입술을 노려보았다. 고집스러운 입술이 오물거리며.

“나, 벌받아야 한다?”

어색하게 말을 뱉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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