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48)

3

복종의 밤 

“크왕!”

그레칸이 날카로운 손을 휘둘렀다. 

한 발을 들어 손톱 공격을 피한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쉬익!

허공에서 소환된 튼튼한 누런 밧줄이 그레칸의 몸을 휘감았다. 

저항이 심해 조금 걱정스럽긴 했지만 그럭저럭 몸이 결박되었다.

팔다리가 꽁꽁 묶인 그레칸은 성질을 못 이겨 몸을 뒤틀었다. 

“크라앙!”

밀라니아는 한 발 물러서서 그레칸이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로부터 30분 후.

그레칸은 30분 동안이나 밧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난동을 부렸다.

“크르릉, 크릉…….”

지쳤는지 혀를 늘어뜨리고 눈을 반쯤 감는다. 게게하게 풀린 눈빛을 보니 탈진 직전이다.

지켜보던 밀라니아는 혀를 찼다. 

‘먹이도 잘 먹지 않아 힘이 없는 상태인데도 제압하기가 힘들다니.’

육체파가 아닌 밀라니아로서는 결코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 크기 전에…….’

말란도르를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심란해졌다. 

완전히 눈을 감고 탈진한 그레칸을 내려다보았다.

‘그냥 죽일까?’

유혹적인 생각에 밀라니아의 금안이 샛노랗게 짙어졌다.

이제까지는 무슨 조화인지 절벽에 밀어 넣어도 바다에 빠뜨려도 기어코 살아 돌아왔지만 이대로 죽여 봉인한다면 아무리 이 모양인 세계라도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

밀라니아는 고민을 거듭했다. 

만약 잘못된 판단을 한다면 꼼짝없이 한 번 더 심장을 뜯기고 회귀해야 하기 때문에 신중했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벌써 포기할 수는 없느니.’

인내가 쓴 만큼 보상은 달콤하겠지. 

침착하게 살심을 억누른 밀라니아는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그레칸의 거칠었던 숨소리가 잔잔해졌다. 

밀라니아의 눈이 번뜩였다.

‘설마 자는 건가?’

이번에는 욕심을 이겨 내지 못했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손바닥에 짧은 단검이 생겨났다.

밀라니아는 단검의 손잡이를 조심스레 움켜쥐고 그레칸을 향해 초점을 맞추었다.

속전속결.

눈을 뜨기 전에!

휘이익.

그레칸의 심장 부근을 향해 칼이 쏘아져 나갔다. 

날카로운 칼끝이 그레칸의 가슴에 닿으려는 순간.

지이이잉.

기겁한 밀라니아가 단검을 눈앞까지 올려 보았다. 

끄트머리가 휘어진 검. 단검은 곡도가 되었다.

그 순간 그레칸이 눈을 번쩍 떴다. 

눈을 크게 뜬 밀라니아가 구부러진 단검을 등 뒤로 숨겼다.

눈이 마주쳤다.

“…….”

“…….”

그레칸의 까만 눈이 의심으로 번들거렸다.

밀라니아는 혹시 속내를 들켰을까 싶어 억지웃음을 지었다.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그레칸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들키면 큰일이었다.

속내를 감춘 밀라니아의 미소가 다정해졌다.

그레칸의 눈이 반짝였다. 

입이 벌어지고.

“크르르르르르. 크르릉! 컹컹컹컹!”

사납게 벌어진 주둥이 안으로 드러난 이빨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밀라니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개새끼. 성질 한번 진짜 더럽구나.”

마침내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까지 쉰 건 이러기 위해서였다는 듯 미친 듯이 짖어 대는 소리에 귀가 멍멍했다.

밀라니아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말란도르를 찾아야 할 듯싶다.

* * *

암흑계. 혹은 마계.

어떤 인간들은 벌을 받으면 간다는 지옥이라고 착각하기도 하지만 지하 세계에 위치한 엄연한 실존하는 세계다.

암흑계에 터를 잡고 사는 흑계인은 까무잡잡한 피부와 죽은 자를 부리는 사령술로 이름난 종족이다.

죽음의 기운을 품은 흑계는 밀라니아와 상극이었다.

그중 암흑계의 공작으로 스스로를 소개한 말란도르는 수백 년 전, 그가 마녀숲에 자리 잡았을 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밀라니아는 내내 마음이 심란했다.

“이 옷 입으세요.”

체라가 밀라니아의 어깨에 붉은 망토를 걸쳐 주었다.

“불도마뱀의 옷이구나.”

“거미줄은 열에 약하니까요.”

마녀숲에는 유황불이 흘러나오는 동굴이 있다.

인간들의 성서에 기록된 지옥으로의 입구. 실제로는 암흑계의 연결 통로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600년 전 그 입구에 자리를 잡은 이가 말란도르였다.

“같이 가 드릴까요?”

“…….”

“보필할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밀라니아가 재차 묻자 체라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꾸했다.

“입구까지만요.”

밀라니아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됐느니. 혼자 갔다 오마.”

“제가 보필을 해 드려야 하는데……. 산에서 신기 편한 신발도 가져다드릴게요.”

말로는 아쉽다 하지만 전혀 아쉽지 않은 표정이었다. 

밀라니아가 떨떠름하게 쳐다보자 그제야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다.

“사실 제가 돌봐야 할 애기 마녀들이 많아요.”

“…….”

“패밀리어도 있고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홀라당 가 버리면 안 되잖아요.”

그것도 그렇겠지만 시체 썩는 냄새가 싫어서 그런 걸 테다.

“그래. 잘 돌봐라, 잘.”

늑대족과 박쥐족에 비하면 낫다 정도지, 체라는 마녀를 제외한 다른 종족들은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흑계인은 사령술로 인한 특유의 시취가 싫다며 진저리를 쳤다.

체라가 도움이 될 물건들을 가져온다며 방을 쏙 빠져나가자 밀라니아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여 걸친 옷에 방어의 술을 걸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데.’

뒤를 돌아보았다. 그레칸이 조용한 것이 이상했다.

솜씨 좋은 대장장이를 불러 새로 만든 새장은 고리에 걸려 있는 채였다.

그레칸은 그 안에서 튼튼한 창살을 움켜쥔 채 밀라니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까맣고 반질반질한 눈동자가 밀라니아의 금안을 정확히 응시했다.

움찔.

‘왜 저렇게 쳐다보누?’

찝찝해진 밀라니아가 인상을 썼다. 

평소라면 밀라니아의 그런 작은 반응에도 미친 듯이 짖어 댔을 그레칸이 조용했다.

인간의 형태로 탈태한 손은 그대로였다. 

몸은 영락없는 늑대의 것인데 손만은 마르고 작은 인간의 손이라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저거 때문에 새장도 고리를 밀어 여는 구조에서 열쇠로 따는 형태로 바꿔 제작했다.

‘어휴, 신경을 쓰지 않는 게 낫겠구나.’

고개를 돌리려는 참이었다.

“……야?”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 가는 거야?”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 쉬고 부정확하지만 어쨌거나 알아들었다.

밀라니아가 불신이 어린 눈으로 그레칸을 응시했다.

말을 했다.

‘……처음인가?’

밀라니아는 기분이 묘했다. 

전생에는 처음 만나면 하는 말이 ‘심장을 내놔.’였기 때문이다.

조금 찝찝해서, 엄한 얼굴을 했다.

“얌전히 있거라.”

너를 복종시킬 물건을 가지러 간다, 라고는 할 수 없었으므로 적당한 말을 뱉어 냈다.

체라가 안 오는 걸 보면 또 창고를 한참 뒤지고 있는 모양이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내려가려 했다.

빠각.

‘이건 또 무슨 소리인고.’

고개를 돌린 밀라니아는 새장의 잠금 부분이 망가진 것을 보고 입을 벌렸다.

그레칸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망가진 잠금 부분을 만지작댔다. 

잠금을 열고 새장을 나오려는 움직임이었다.

‘……!’

밀라니아는 재빨리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녀의 의지에 따라 새장이 허공에 떠올랐다.

멈칫한 그레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잠금장치가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다.

밀라니아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잠금장치 위로 생긴 끈이 대롱거리는 잠금장치를 꽁꽁 묶었다.

그러나 이건 임시 장치에 불과하다.

벌써 정신을 차린 그레칸이 콧잔등에 인상을 쓰고 입구를 잡아 뜯었다.

“크와아아앙!”

‘지금! 빨리!’

밀라니아가 다급하게 문을 열고 뛰어나가자 새장이 둥둥 뜬 채로 뒤따랐다.

“밀라니아 님?”

때마침 올라오고 있던 체라가 그 희한한 광경을 보고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밀라니아는 설명할 시간이 없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독방!”

“아, 거긴! 청소하느라 자물쇠는 풀어놨어요!”

놀란 체라도 다급하게 소리쳤다.

타다다닥.

위로 이어진 계단으로 올라갔다. 새카만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의 옥상이나 마찬가지인 실질적 최상층이다. 

밀라니아는 손가락을 튕겨 닫힌 문을 열었다.

철커덩!

독방 안쪽은 천장과 가까운 부분에 창문이 달려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밀라니아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마법이 걸린 새장이 둥둥 뜬 채 독방 안으로 이동했다.

철컹!

그레칸이 창살을 움켜쥐고 밀라니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밀라니아는 소름이 오싹 돋았다.

심장을 노리고 끊임없이 달려들던 그때와 비슷한 눈빛이었다.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독방의 문이 저절로 닫혔다.

막 폭발 직전인 폭탄을 처리한 사람처럼 밀라니아는 한 손을 가슴에 올리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십년감수했다.

“무슨 일이세요? 독방을 여시다니.”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된 체라가 물었다.

“휴우!”

밀라니아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그레칸이 내가 보는 앞에서 새장의 입구를 잡아 뜯고 나오려고 하지 않느냐.”

“그, 그게 가능해요? 제가 잡아 뜯었을 때도 꿈쩍도 안 하던 새장이었는데!”

밀라니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장으로는 안 되겠구나. 이상한 일이야. 아직 육체의 힘을 발휘할 시기가 아니거늘.”

“역시…… 발칸의 아들이라 가능한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레칸은 평범한 늑대족과는 조금 다르단 말이지.”

그레칸이 잠재된 본연의 능력을 되찾는 건 약 20세 전후. 

완전한 탈태가 이루어지지 않은 지금은 시기상조다.

“하마터면 말란도르에게 가기도 전에 힘을 뺄 뻔했잖누.” 

밀라니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서둘러 복종의 밤을 손에 넣어야겠느니.”

체라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독방 문에 달린 식사 투입구를 슬쩍 열었다.

그러자마자 쑤욱 까만 주둥이가 튀어나왔다.

“크르릉!”

“엄마, 깜짝이야!”

당장 출발할 생각이던 밀라니아가 체라의 비명에 고개를 돌렸다. 

하마터면 그레칸에게 물릴 뻔한 체라가 엉덩방아를 찧은 채 씨근덕대고 있었다.

“이런 미친 늑대!”

“그러게 그걸 뭐 하러 건드리느냐?”

“사납기는. 새장으로는 이놈을 가두기에 한참 부족하겠군요. 독방이 딱이에요.”

체라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처치 곤란한 동족이나 외부 생물을 둘 때 사용하는 독방은 대마녀의 감시 아래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다만 근 몇백 년간 그 정도로 곤란한 생물은 없었으므로 기억에서 잊히기 직전이었다.

“나 없을 때 밥 챙겨 줘야 한다.”

행여나 심기가 틀어진 체라가 굶길까 걱정이 되었던 밀라니아가 당부했다.

체라는 고민하더니 마뜩잖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밀라니아는 자작나무 지팡이를 쥐고 숲에 들어갔다. 

마녀숲은 마녀의 성을 접하고 넓게 펼쳐져 있는 형태였다.

생명의 산이라 불리는 산의 일부로서, 자연에서 태어난 대마녀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마녀를 탄생시키는 마녀목이 마녀숲에 있기 때문이다.

말란도르는 마녀숲, 정확히 말하면 마녀의 영역을 약간 벗어난 생명의 산에 자리 잡고 있었다.

평평한 대지의 숲을 지나자 경사가 생기기 시작했다. 마녀숲의 영역이 끝났다는 의미다.

‘그레칸 때문에 예정에도 없는 등산까지 하게 되는구나.’

이렇게 된 이상 그레칸을 그녀의 명령이라면 죽는 시늉도 하는 충견으로 만들어야 만족이 될 것 같다.

산을 어느 정도 오르고, 육체파와는 거리가 먼 밀라니아의 흰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질 즈음 냄새가 났다.

단순히 무언가 썩는 냄새와는 차원이 다른, 뼛속까지 시리게 하는 죽음의 냄새.

피부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밀라니아와 상극인 공기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본능적으로 불쾌해진 밀라니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으음.’

꺼림칙해서 걸음이 느려진다. 밀라니아는 그녀가 밟고 있는 땅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이래서 오기 싫었거늘.’

이 아래에는 썩어 문드러진 각종 사체가 쌓여 있을 터였다.

주인의 명령을 받으면 뼈만 남은 팔을…….

생각하기 무섭게.

푸욱!

밀라니아의 바로 앞 땅이 치솟았다. 뼈만 남은 팔이다. 

달그락거리던 해골이 이정표처럼 어느 한 방향을 척, 가리켰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비명을 지르고 도망갈 광경. 

밀라니아는 찝찝한 표정을 했지만 물러나지는 않았다.

‘이 악취미는 그대로구먼.’

손가락은 정면을 가리켰다. 

밀라니아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은 채 뼈마디를 지켜보았다.

정면을 가리켰던 손가락이 이번에는 왼쪽을 가리켰다. 

밀라니아가 움직이지 않자 다시 오른쪽을 가리킨다.

달그락달그락.

왜 움직이지 않냐는 듯 뼈마디가 호들갑을 떨었다. 화를 내는 것도 같았다.

말란도르는 괴상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길을 잃어 본인의 영역까지 흘러들어 온 이가 있다면 저런 식으로 놀리고는 했다.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해골만 남은 뱀 굴을 마주치게 될 것이고, 썩은 늪을 지나게 될 것이고, 또는 괴조의 놀잇감이 될 것이다.

말란도르는 제 장난에 괴로워하는 이들을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쯧쯧. 아직도 저 버릇을 고치치 않았누. 큰일 날 인사로다.”

밀라니아는 생리적으로 찝찝해져 얼굴을 구겼다. 

자연과 생명의 기운을 품은 그녀에게 말란도르의 영역은 상극이다.

손가락을 튕겼다.

팍!

얼른 움직이라고 화를 내던 뼈 이정표가 툭 꺾이고 부서져 나갔다. 

곧 하얀 가루가 되어 검은 땅 위에 수북이 쌓였다.

잠시 후, 가루가 솔솔 날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말란도르의 영역에서 저런 현상이 의미하는 것은 뻔했다.

주인이 등장했다는 신호.

“미이이일라니아!”

어찌나 기뻐하는지 환호성처럼 들리는 부름이었다.

어두운 하늘을 찢고 나타난 것은 새빨간 머리칼의 남자였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체는 울퉁불퉁한 근육으로 볼록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객관적으로 잘생긴 얼굴의 남자가 밀라니아를 껴안았다.

밀라니아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끄응, 신음을 흘렸다. 

지팡이를 휘두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말란도르가 밀라니아를 껴안은 채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기쁨으로 반짝이는 얼굴과 달리 얼굴 아래 손은 거칠고 재빠르다.

언행 불일치의 공작.

말란도르 앞에서는 긴장을 풀면 안 된다.

밀라니아가 실수로 그의 영역에 들어가 엉엉 울며 나오는 어린 마녀들에게 하는 충고였다.

“오랜만인데 여전히 아름다워, 나의 밀라니아.”

달콤한 초콜릿 같은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수많은 노예들의 사랑을 받는 얼굴다웠다.

노예들의 주인.

말란도르는 종족에 상관없이 여자를 꼬셔 그의 노예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의 달콤한 눈이 나를 향할 때면, 도저히 들어주지 않고는 못 견디겠어요. 밀라니아 님은 이 애타는 마음을 모르실 거예요, 흑흑…….]

말란도르의 부탁으로 한밤중 몰래 밀라니아의 머리카락을 잘라 가려던 어린 마녀 아이는 체라에게 붙잡혀 울음을 터뜨리며 그렇게 말했다.

밀라니아는 애매한 표정으로 서럽게 우는 마녀의 어깨를 토닥이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마법에 걸린 거라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지만…….’

오랜 세월을 살았으나 사랑이 뭔지 모르는 그녀는 보답받지 못할 사랑의 슬픔에 애달파하는 마녀를 위로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아름다운 밀라니아.”

밀라니아는 자연스럽게 키스를 하려는 말란도르의 입을 막았다.

손바닥에 입이 막힌 말란도르가 투덜거렸다.

“3백 년 만에 보는 건데 너무해.”

밀라니아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벌써 그렇게 됐느냐?”

“내가 네 마녀를 건드릴 때마다 파르르 화를 내며 쫓아왔잖아, 밀라니아.”

머리카락을 잘라 가려던 마녀 이후, 밀라니아는 말란도르가 뭘 하든 철저히 무시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 

복종의 밤만 아니었다면 말란도르를 만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영면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나는 거라면 모를까.’

“말란도르, 들어 봐라. 내가 여기에 온 건…….”

“잠깐잠깐. 급할 거 뭐 있어.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지. 여긴 시귀가 가득해서 밀라니아에게 좋지 않잖아.”

말란도르가 밀라니아의 손을 덥석 잡고 한 걸음 옮겼다. 

공간은 순식간에 그의 집 안으로 이동되었다.

저택 내부는 말란도르의 기괴한 마당과 달리 꽤 멀쩡했다.

“많이 바뀌었지?”

“…….”

“예전에 봤던 인간 귀족의 집이 괜찮더라고. 고풍스러운 게, 나랑 잘 어울리지 않아?”

밀라니아는 바뀐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말란도르의 말을 흘려들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복종의 밤은 어딨지?’

밀라니아가 처음 복종의 밤이라는 귀물을 알게 된 건 300년 전이었다.

말란도르가 자꾸만 마녀를 꾀어내 울리기를 반복하자 경고를 하기 위해 그의 저택을 찾았을 때였다.

그때 처음 말란도르의 노예들을 알게 되었다.

밀라니아가 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는 침대에 늘어진 채 노예들의 시중을 받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천 살 먹은 어린 드래곤도 있었다.

새끼 드래곤. 해츨링이라고 부르는 존재였다. 

‘아무리 어려도 드래곤인데 그걸 노예로 부린다는 사실에 얼마나 놀랐던지.’

그 해츨링의 목에 복종의 밤이 걸려 있었다.

시전자의 말에 절대 복종하게 만드는, 세상에 다시없을 귀물.

안타깝게도 지금 노예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말란도르가 거실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밀라니아에게 눈짓을 했다.

“앉아. 뭘 찾는 거야?”

속내를 들킬까 봐 밀라니아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의자에 앉았다.

“노예들이 안 보이는구나.”

“밀라니아가 오는데 너저분한 것들을 늘어놓을 수는 없지.”

“그…… 해츨링은 어디 있느냐?”

“응?”

“네가 노예로 거두고 있던 어린 드래곤 말이다.”

말란도르는 대답 없이 밀라니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빨간 눈동자가 속을 꿰뚫어 볼 것처럼 날카로웠지만 그 안에 비친 밀라니아는 평온한 안색이었다.

침착한 얼굴을 가장한 보람을 느끼며 밀라니아는 혀를 찼다.

“그렇게 보지 말거라. 괜히 드래곤의 화를 부를까 걱정이 된 것뿐이니. 드래곤에게 새끼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고 있지 않누.”

“나를 걱정해 주는 거야? 그 도마뱀들이 날 해칠까 봐?”

해사하게 웃는 말란도르에게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게 두는 편이 의심을 사는 것보단 낫다.

“걔는 지금 여기 없어.”

“없다는 게 무슨 말이냐?”

“친척이라는 드래곤이 며칠 전에 날 찾아와서 흥정을 걸더군. 내게 필요한 걸 주기에 돌려보내 줬어.”

“드래곤……. 용이 찾아왔다고? 누가 찾아왔느냐?”

예상외의 말에 밀라니아는 순간 평정을 잃어버렸다.

“심해의 존재였어.”

바다 일족이라는 말이다. 밀라니아는 실망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왜? 찾는 드래곤이라도 있어?”

말란도르의 물음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찾는 드래곤. 있다.

혜안으로는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하며, 그로 인해 창조주의 대리 역할을 한다는 지혜로운 골드 드래곤.

‘지혜의 용이라면 내게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해 줄 수 있을 터인데.’

말란도르는 관심 있는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말란도르에게 할 필요 없는 말이라 밀라니아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나도 흥정을 걸러 왔느니.”

“……우리 밀라니아가 숨기는 게 많은 것 같네.”

용에 대해 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밀라니아의 속내를 눈치챈 말란도르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무슨 흥정을 하고 싶지? 밀라니아가 필요로 할 게 이곳에 있던가?”

“복종의 밤. 그 귀물을 빌려줄 수 있겠느냐.”

“예상하지 못한 말을 하는 걸?”

밀라니아는 ‘말은 꺼내지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는 뜻을 어필하기 위해 심드렁한 척했다.

“쓸 곳이 있어서. 없으면 하는 수 없고.”

“이제 보니 새끼 드래곤 얘기를 꺼낸 것도 복종의 밤과 관련이 있어서였나 봐?”

‘눈치 빠른 작자.’

밀라니아는 뜨끔했지만 겉으로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양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건 용이 분노할까 봐 그랬느니라. 네가 어련히 수위를 조절했겠지만 그래도 상대는 드래곤. 예측하지 못한 일이 생길 수 있지 않느냐.”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밀라니아. 새끼 드래곤이 자기 아빠가 왔는데도 안 가겠다고 떼를 써서…… 곤란하긴 했지만 덕분에 괴롭혔다는 혐의는 벗었거든.”

“복종의 밤을 썼잖아? 그런데도 안 가고 싶어 했다는 것이냐?”

“그건 자기가 알아서 찬 거야.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면서.”

밀라니아는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했다. 말란도르는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사랑을 모르는 밀라니아. 이해하려 하지 마. 네겐 어려운 문제일 거야.”

“……정을 모르는 이에게 사랑을 바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느니.”

한 방씩 주고받았다. 이번에는 말란도르가 씁,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복종의 밤이 필요하다면, 다루기 어려운 것이라도 손에 넣었나 봐?”

은근히 캐내려는 투에 밀라니아는 표정 관리를 했다.

“그런 건 아니란다. 빌려줄 수 있는지 없는지나 말해 주렴.”

“밀라니아를 위해서는 뭐든 아깝지 않지만……. 복종의 밤은 나로서도 힘들게 만든 거라.”

밀라니아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복종의 밤은 하나밖에 없으니 힘들게 만든 게 맞기는 하겠지만 지금 이 시점에 저 얘기를 하는 것은 거래가 쉽지 않을 거라는 걸 뜻했다.

“내 피를 주마.”

밀라니아의 말에 말란도르가 흐음, 목을 울리며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그러고는 밀라니아를 물끄러미 응시한 채 물었다.

“얼마나?”

자연에서 태어난 마녀의 피엔 생명력이 가득하다. 특히 대마녀의 피는 자연의 힘을 담고 있다.

말란도르는 피를 좋아하는 박쥐족은 아니었지만 생명력을 흠모했다.

사령술을 특기로 삼는 그가 생명력을 좋아한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가장 작은 물병으로 세 병 분량.”

“으음…….”

애매한 듯, 턱을 괴고 고민하던 말란도르가 말했다.

“세 병 분량 받고.”

“…….”

“대마녀의 입맞춤 한 번.”

“대마녀의 입맞춤이란 게 뭐지?”

혹여 복종의 밤처럼 알지 못하는 귀물인가 싶어 묻자 말란도르가 재밌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네 입맞춤.”

“……차라리 한 병을 더 주마.”

“싫다면 됐어. 난 네 모든 것을 사랑하지만 밀라니아에게 무리가 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입이 웃고 있구나, 말란도르.”

언행 불일치의 공작답게,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말하면서 입술은 활짝 벌어져 있는 것을 지적했다.

“아, 나도 모르게.”

아차, 하며 입을 가린다. 하지만 이젠 눈꼬리가 휘어져 있어 소용없는 일이었다.

밀라니아는 한숨을 쉬었다. 이미 말란도르에게 말려 버렸다.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안 된다니 아쉽네.”

말란도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밀라니아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도도한 태도로 몇 걸음 옮기던 밀라니아가 멈칫했다.

머릿속에 크릉크릉 짖어 대는 새끼 늑대 그레칸과 곧 장성하여 심장을 노릴 그레칸이 번갈아 떠올랐다.

밀라니아가 다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입맞춤 한 번이면 되느냐?”

“……충분해.”

말란도르의 입술이 흥분으로 잘게 경련했다.

* * *

밀라니아는 손목에서부터 피를 뽑아내 물병에 담고 말란도르에게 건넸다.

말란도르가 물병을 흔들자 안에서 붉은 피가 찰랑였다. 말란도르가 환희가 깃든 눈으로 물병을 들여다보았다.

“오늘은 운이 좋네. 세상 가장 강력한 치료제도 얻고.”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느냐? 그렇다면 요정을 찾으면 되지 않누.”

“요정은 나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수가 적어. 게다가 난 마녀가 더 좋아. 강직한 요정보다 마녀는 짜릿한 맛이 있거든.”

빨간 눈을 반짝이는 말란도르를 보자 밀라니아는 머릿속이 번뜩였다.

“혹시 누구 하나 찾아 줄 수 있느냐?”

“오늘따라 특이한 말을 많이 하네. 누구를 찾길 원해?”

“지혜의 용.”

“……응?”

“개인적으로 고견을 구할 일이 있느니.”

피가 담긴 물병을 서랍으로 옮긴 말란도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눈을 찡긋했다.

“어렵긴 하지만 시도는 해 볼게. 감히 누가 바라는 건데.”

의자에 앉은 채 밀라니아는 이 일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줘야 할까 고민했다.

말란도르가 그런 그녀에게 성큼 다가왔다. 밀라니아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가까워진 얼굴에 밀라니아는 눈을 깜박였다. 말란도르의 퇴폐적인 얼굴에 관능미가 흘러넘쳤다.

이 얼굴에 몇 명의 마녀들이 홀렸는지 알고 있는 밀라니아는 넘어가지 않고 말란도르의 얼굴을 살폈다.

말란도르에게 유혹당한 사람과 달리 탐구적인 눈빛이었다.

침묵하던 말란도르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뭐 해, 밀라니아?”

“네 얼굴에 마법이 걸려 있지는 않은지 확인 중이란다.”

“그런 건 없어. 밀라니아는 정말 바보야.”

투덜거리면서도 밀라니아를 응시하는 말란도르의 눈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흑계인치고 순수한 눈빛에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경계심을 풀었다.

“넌 정말 아름다워, 밀라니아.”

“…….”

“사내라면 널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야.”

사랑은커녕 이 세상 남주들에게 수없이 공격받은 바 있던 밀라니아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말란도르가 손을 뻗어 반짝이는 밀라니아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여 밀라니아는 의아해졌다.

입맞춤은 밀라니아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린 마녀들에게 축복의 의미로 수없이 해 주던 것이었으므로.

‘흑계인에게 내 축복이 도움이 되나?’

궁금증이 돋을 뿐이었다.

그리고 말란도르가 입을 맞추었다.

뜨겁고 말캉한 혀가 밀라니아의 입술을 야릇하게 쓸었다.

“?”

애초에 눈을 감고 있지 않았던 밀라니아는 눈을 둥글게 휘는 말란도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미쳤는고?’

말란도르가 웃으며, 예고 없이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다.

“윽!”

밀라니아가 손을 들어 말란도르의 가슴을 밀어냈다. 단단한 가슴팍을 꾹 눌렀지만 말란도르는 꼼짝도 않았다.

말란도르가 입술만 뗀 채 닿을락 말락 하는 거리에서 다시금 혀를 내밀어 밀라니아의 입술을 건드렸다.

“말란도르.”

밀라니아는 그와 입술이 맞닿지 않게 조심하며 진지하게 물었다.

“나와 발정기를 보내고 싶은 것이냐?”

“……발정기.”

말란도르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밀라니아. 흑계인은 발정기 같은 거 없어.”

“나도 아느니.”

“근데 왜 물어?”

“혹시나 해서.”

당당한 대꾸에 말란도르가 고개를 밀라니아의 어깨로 툭 꺾었다.

빨간 머리칼이 밀라니아의 턱을 간질이자 밀라니아는 ‘얘가 왜 이러지’ 하는 눈으로 말란도르를 흘끗했다.

“밀라니아는 정말 낭만이 없어.”

“…….”

“이렇게 달콤한 향을 풍기면서.”

말란도르가 밀라니아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자 밀라니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불쾌하군.’

그 순간, 명치에 통증이 찾아들었다. 숨이 막힌 밀라니아가 눈을 크게 떴다.

머릿속에 남주들에게 심장을 뜯길 때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지금의 통증은 남주들로 인한 게 아니었다.

“너…….”

정신이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말란도르의 안타까운 얼굴이 보였다. 아니다. 눈은 축 처져 안타까워하는데 입술은 웃고 있다.

‘이런, 경계심이 풀렸구나.’

말란도르에게 경계를 푸는 일. 명백한 실책이었다.

“당분간 나랑 있어 줘.”

“으윽…….”

“네가 아무런 이유 없이 날 찾아온 건 처음이잖아.”

처진 눈매 안, 붉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사실 나 지금, 밀라니아가 찾아와서 흥분으로 죽어 버릴 것 같거든.”

말란도르.

암흑계의 공작.

언행 불일치의 공작.

노예들의 사랑받는 주인.

그를 수식하는 많았지만 밀라니아에겐 하나였다.

‘이 또라이 자식이…….’

* * *

밀라니아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감각이 아주 느리게 돌아왔다.

콧노래 소리가 들려, 눈을 굴렸다.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는 말란도르가 보였다. 명치를 후벼 파던 통증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말란도르의 저택에 들어오지 말 것을 그랬다.

유황불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이곳은 마녀의 마법이 잘 들지 않는 곳이었다.

“너 같은 놈을 인간 말로 개자식이라고 하더구나.”

쉰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말란도르가 고개를 들었다.

‘버르장머리 없이 날 때리다니.’

밀라니아는 그가 쓸데없이 혀를 내밀어 할짝거린 것보다 그게 더 화가 났다.

어떻게든 저주를 퍼부을 생각을 하는 그녀를, 말란도르가 끌어안고 품에 머리를 비볐다.

“밀라니아, 어쩔 수 없었어. 안 그랬으면 밀라니아가 금방 가 버렸을 거 아니야. 무려 300년 만인데!”

“……됐느니라.”

밀라니아가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어찌 된 일인지 말라비틀어진 붉은 꽃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물끄러미 말란도르를 보았다. 그가 수줍은 얼굴로 살포시 미소 지었다.

“밀라니아는 꽃이 잘 어울리더라.”

“…….”

왜 300년 전에 말란도르를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는지 새삼스럽게 이해가 갔다.

‘됐어. 어차피 예상했으니까.’

명치를 얻어맞을 줄은 몰랐지만.

“몇 시인고?”

“새벽이슬이 맺혔어.”

말란도르의 대답에 밀라니아는 깜짝 놀랐다.

“벌써 하루가 지났느냐?”

“…….”

“말란도르?”

말란도르가 스윽 자세를 곱게 했다. 밀라니아가 쳐다보자 어색하게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일주일…….”

명치를 맞고 기절했을 뿐인데 뭘 어떻게 했기에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나가 버린 걸까?

밀라니아가 말없이 손을 들었다. 마녀의 지팡이가 위풍당당하게 소환되었다.

유황불의 입구를 지키는 자격으로 내버려 두고 있지만 대마녀가 마음만 먹으면 이 저택을 없애 버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밀라니아 주위로 바람이 몰려들었다. 가늘고 긴 은발 머리카락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잠깐잠깐!”

밀라니아의 고요한 분노를 깨달은 말란도르가 손을 들었다.

할 말이 있는가 싶어 밀라니아가 멈칫한 사이, 그는 재빨리 수인을 맺어 공간을 열었다.

“다음에 봐, 달링.”

지팡이 한 번 휘두르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공간 이동의 전조였다.

“아, 복종의 밤은!”

밀라니아는 순식간에 시체의 마당으로 이동되었다.

“하.”

밀라니아는 허탈한 마음에 헛웃음을 흘렸다.

이곳은 말란도르의 영역. 그가 공간을 열지 않으면 저택으로 들어가는 건 힘들었다.

복종의 밤을 얻지 못했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난 밀라니아의 아래로 무언가 떨어졌다.

밀라니아가 떨어진 것을 주워 들었다.

검은색의 매끄러운 외피를 가진, 목줄의 형태를 한 귀물.

복종의 밤.

“체라가 걱정하겠구나.”

밀라니아는 다시는 말란도르를 찾아가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왜인지 이것도 익숙하다.

‘300년 전에 이 저택을 떠나며 했었던 생각이군.’

“쯧쯧.”

혀를 차며 마녀의 성으로 들어갔다.

“밀라니아 님!”

거대한 나무에 걸터앉은 채 마법 연습을 하고 있던 어린 마녀들이 손을 흔들며 밀라니아를 반겼다.

성까지 걸어가자 체라가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뭐 하다가 이제 오신 거예요?”

“말란도르가 말란도르 짓을 했느니.”

“말란도르 짓이라면…….”

체라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설마 그 작자의 노예로 일하다 오신 거예요? 아무리 복종의 밤이 중요하셔도 그렇지!”

“…….”

분을 참지 못한 체라의 얼굴이 점점 새빨개졌다.

“흑계인과도 전쟁을 할 때가 됐지요. 감히 마녀족의 수장을 건드리다니.”

“잘못 짚었다.”

딱!

밀라니아는 얼음주머니를 소환하여 체라의 이마에 척, 대 주었다.

바들바들 떨며 화를 내던 체라가 눈을 크게 떴다.

“넌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애가 왜 그렇게 전쟁을 좋아하느냐.”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게 아니라 아이랑 동물을 예뻐하는 거예요.”

“그냥 일주일 정도 기절했던 것뿐이란다. 별일은 없었는고?”

별일이란 그레칸을 말하는 것이었다. 밀라니아가 묻는 바를 알아들은 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시간이 길어 혹여 탈출이라도 했을까 봐 불안했던 밀라니아는 안도했다.

“조용히 있었어요. 가끔 밤에 하울링을 하기는 했지만요.”

“조용히 있었다니 의외구나.”

“독방에서 자기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그레칸을 단순히 평범한 새끼 늑대족이라고만 생각하는 체라와 달리 그레칸의 본신을 알고 있는 밀라니아는 조용히 있었다는 말에도 찝찝했다.

“복종의 밤은요?”

“여기.”

목줄 모양을 한 복종의 밤을 흔들었다.

“당분간 그 미친 늑대가 짖는 꼴은 보지 않아도 되겠네요.”

흡족해하며 체라가 성을 가리켰다.

“얼른 들어가세요. 밀라니아 님이 자리를 비운 동안 늑대와 박쥐가 서신을 보내왔어요.”

“서신?”

“저도 뜯어보지 않아서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요.”

무슨 일일까. 잠깐 고민했지만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이 시기가 대륙 협정을 맺었던 때던가?’

회의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렸으니 얼추 비슷하다.

서신을 확인하기 위해 성으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쨍그랑!

어디선가 유리가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거친 파공음이 그 뒤를 이었다.

먼저 고개를 들었던 체라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저, 저 미친……!”

밀라니아도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성의 옥상에서부터 검은 덩어리가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크와아아아아아아앙!”

허공을 가르며 떨어지는 검은 덩어리는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그레칸이다.

체라의 말대로 미친 게 분명했다. 밀라니아는 저를 노리며 떨어지는 그레칸을 보며 딱딱하게 굳어졌다.

육체파가 아닌 그녀로서는 민첩하게 움직여 그레칸을 제압하는 일 같은 건 불가능했다.

그레칸의 하얀 이빨이 밀라니아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는 양 날카롭게 번뜩였다.

밀라니아는 굳어 버렸다. 복종의 밤이 손가락에 걸렸다. 정신이 번쩍 든다.

밀라니아는 복종의 밤을 꽉 붙들고 떨어지는 그레칸을 향해 쳐들었다.

그레칸의 몸이 부딪칠 듯 가까워졌다.

밀라니아는 눈을 부릅뜬 채 복종의 밤을 단단히 붙들었다.

쫙 벌려진 목줄이 털로 뒤덮인 그레칸의 목을 감쌌다. 복종의 밤이라는 귀물의 검은 몸체가 일순 새하얗게 빛났다.

둘이 충돌하기 직전.

철컥!

복종의 밤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크엉?”

공중에서 몸을 뒤튼 그레칸이 땅으로 떨어졌다.

“크, 크르르?”

목을 감싼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발로 목을 긁었다. 그렇게 한다고 여간해서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복종의 밤을 떨쳐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레칸에게 깔리는 불상사를 모면한 밀라니아가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하마터면 심장 마비가 올 뻔했다.

“크아앙!”

그레칸이 바닥을 굴렀다. 발톱으로 목줄을 긁었지만 긁히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뭐, 뭐야아……!”

마침내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은 그레칸이 밀라니아를 노려보았다.

“이거, 뭐냐고!”

갈라진 목소리로 어눌하게 말한 그레칸이 밀라니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밀라니아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앉거라.”

하얗게 빛나는 복종의 밤.

철퍼덕!

달려들던 그대로 엎어진 그레칸이 눈을 뻐끔뻐끔 떴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크르릉!”

이 일의 원인이 밀라니아에게 있음을 깨달았는지 이윽고 눈을 매섭게 치떴다.

밀라니아는 밀라니아대로 놀라웠다. 아직 새끼 늑대에 불과한 그레칸이 독방을 탈출했다.

마법 생물에 특화되어 있는 곳이 독방이라 육체의 늑대를 가두기엔 역부족이었을까?

그래도 그렇지 고작 새끼에 불과한 늑대를 다루기가 이렇게 쉽지가 않다니.

“딱 적당한 때에 복종의 밤을 얻었느니.”

어찌나 화가 났는지 그레칸의 눈이 검푸르게 보일 정도로 새카맣다.

“내게, 무슨 짓을, 무슨 짓을 했어! 크왕!”

그레칸이 달려들었고, 밀라니아는 재빠르게 명령했다.

“앉거라!”

철퍽!

이번에는 바닥에 주둥이를 찧은 그레칸이 엎어진 채 미동이 없었다.

“…….”

“…….”

‘벌써 포기한 건가?’

이놈이 그럴 리가 있나!

밀라니아는 이게 꾀를 쓰는 건 아닌가 싶어 조용한 그레칸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체라가 슬그머니 다가가 그레칸의 목덜미를 들어 올렸다.

“기절했는데요?”

* * *

밀라니아가 말란도르의 저택에서 돌아온 일주일 후.

마녀의 성 패밀리어 훈련장에서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앉거라.”

밀라니아가 명령하자 그레칸이 엉덩이를 바닥에 깔고 앉았다.

“일어나. 누워. 다시 앉거라.”

밀라니아가 빠르게 명령했다. 그레칸은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섰다가 배를 까뒤집어 누웠다가 다시 엉덩이를 땅에 대고 앉았다.

그레칸이 하는 양을 관찰하던 밀라니아가 손을 들어 총 쏘는 시늉을 했다.

“빵야.”

그레칸이 앉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바닥에 누운 그레칸의 얼굴은 불만으로 가득했으나.

“다시 일어나.”

벌떡.

몸은 충실히 밀라니아의 명령을 수행했다.

그레칸의 얼굴이 우중충해졌다.

“복종의 밤, 말란도르가 언제까지 빌려준대요? 굉장히 유용하네요.”

새롭게 패밀리어 계약을 맺은 부엉이를 훈련시키고 있던 체라가 진지하게 물었다.

“기간에 대해서는 말 안 했는데. 아마도 더 이상 이게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가 아니겠느냐.”

밀라니아가 그레칸의 주둥이로 손을 가져다 댔다.

눈을 굴려 가까워지는 밀라니아의 손을 바라보던 그레칸은 손이 아주 가까이로 다가오자 입을 크게 벌렸다. 밀라니아가 재빨리 손을 빼내었다.

딱!

조금만 늦었으면 손을 물릴 뻔했다. 그레칸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이게 악어인가 늑대인가.

밀라니아가 공을 들고 멀리 던졌다.

마법을 걸자 공은 더 멀리 날아갔다.

“주워 오렴.”

그레칸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복종의 밤은 충실히 그레칸을 이끌었다.

우다다다!

달려가는 그레칸을 지켜보며 밀라니아가 체라에게 우아한 태도로 말했다.

“아마 꽤 오래 대여해야 할 것 같구나.”

유심히 지켜보던 체라가 말했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밀라니아 님의 훈련 방법은 문제가 있어요.”

“어디가 잘못됐어?”

“그렇게 명령만 하면 안 돼요. 훈련에는 채찍과 당근이 필수라구요.”

막 부엉이가 돌아왔다. 체라의 명령대로 그녀가 숨겨 둔 훈련용 깃털을 찾아온 부엉이였다.

체라가 부엉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리에 가늘게 찢은 고기를 가져다 댔다.

“비비 때를 생각해 보세요.”

“걔는 처음부터 내 말 잘 들었느니.”

“그건 밀라니아 님이 살려 줘서 은혜 갚는 거고요. 비비에게 육포도 주고 그러셨잖아요.”

“…….”

“그레칸에게도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사용하면 훈련이 될 거예요. 게다가 아직은 새끼니까 훈련의 성과도 더 있을 걸요?”

밀라니아는 체라의 말을 들으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그레칸을 응시했다.

그레칸의 입에는 밀라니아가 던진 공이 물려 있었다.

앞까지 다가온 그레칸은 똥개 훈련을 시켜 화가 많이 난 듯 뚱한 얼굴로 공을 퉤, 뱉어 냈다.

데구루루.

침 묻은 공이 밀라니아의 신발 앞코까지 다가왔다.

‘보상을 하라고?’

힐끗 그레칸을 보았다. 이번에는 또 뭘 시킬 거냐는 듯 그레칸의 눈동자는 불만으로 가득했다.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녀의 손 위에 주머니가 생겨났다.

비비에게 주던 육포를 넣어 두는 주머니다.

“……자.”

밀라니아가 주머니에서 육포 하나를 꺼내 그레칸에게 내밀었다.

그레칸이 경계하며 육포와 밀라니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슨 수작이냐는 눈빛이다.

밀라니아가 육포를 흔들었다. 최고급 고기의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그레칸의 눈에 갈등의 빛이 어렸다.

밀라니아가 육포를 한 번 더 흔드는 순간.

“왕!”

전광석화처럼 움직인 그레칸이 빠르게 육포를 낚아챘다.

밀라니아는 정신없이 쩝쩝대며 먹는 그레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멈칫.

그레칸이 육포를 씹는 것도 멈춘 채 눈을 굴렸다. 그 얼굴이 제법 멀끔하고 귀여웠다.

그레칸이 마녀의 성에서 지낸지 벌써 2주일이 넘었다. 그동안 사냥할 필요 없이 먹이를 꼬박꼬박 줬던 탓에 왜소했던 몸에는 살이 붙고 거칠게 엉켜 있던 털에는 윤기가 흘렀다.

그래. 칭찬이라도 해 줘 볼까.

“잘했…….”

콰직!

이번에는 미처 피하지 못한 밀라니아는 밀려드는 고통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밀라니아는 특히나 아픈 게 싫었다.

손의 통증은 심장을 뜯길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별거 아니었지만 아픈 건 아픈 거였다.

밀라니아의 주위로 바람이 몰려들었다.

“어이구.”

구경하고 있던 체라는 불똥이 제게 튈까 싶어 서둘러 부엉이를 데리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손을 문 채로 눈을 굴렸다.

사나웠던 표정이 점차 사라지고 이내 순해진 얼굴로 밀라니아의 눈치를 보았다.

밀라니아는 마법으로 공을 띄웠다. 그레칸의 눈동자가 공을 따라 움직였다.

높이 떠오르던 공이 한순간 사라졌다.

쉬이익!

공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너무 빠른 속도라 눈이 따라가지 못해 사라진 것처럼 보인 것뿐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 듯 그레칸의 털이 바르르 떨렸다.

“……주워 오렴.”

밀라니아의 명령하며 눈을 번뜩였다. 금색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탁! 손을 거칠게 털자 그레칸이 입을 벌린 채로 검은 눈망울을 끔벅였다. 아쉬운 건지 눈치를 보는 건지 입맛을 쩝쩝 다셨다.

복종의 밤은 연신 하얗게 빛나며 그레칸을 독촉했다. 그레칸이 공이 사라진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빠르게 멀어진 공은 어느새 점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힘을 잃지 않고 날아가는 중이다.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다.

아마 아주, 아주 먼 곳에 도착하게 될 터였다.

그레칸이 밀라니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머뭇거리며 멀어지는 공을 재차 흘끔했다.

“……멀다.”

의기소침한 항변에 밀라니아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주워 와.”

자비 없이.

그레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넓은 마녀의 숲에서 공을 찾으려면 하루 온종일을 돌아다녀야 할지 모른다.

복종의 밤에 의해 조금씩 움직이는 몸을 멈추려고 노력하며 밀라니아를 힐끔거렸다.

 봐 달라는 듯.

“멀다…….”

“주워 와.”

가차 없다.

연이은 명령에 복종의 밤이 그레칸을 잡아끌었다.

“크아아아아아앙!”

결국 제 의지와 상관없이 달리기 시작한 그레칸의 주둥이에서 성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공을 찾기 전에는 쉴 수도 먹을 수도 없을 것이다.

밀라니아는 비로소 만족한 얼굴이 되었다.

* * *

하루 종일 그레칸에게 훈련을 빙자한 똥개 훈련을 시킨 밀라니아는 저녁이 되어서야 방으로 들어왔다.

책상 위에는 두 개의 편지가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밀라니아가 읽기만 하고 내버려 두었던 편지였다.

의자에 앉은 그녀는 편지 내용을 다시 살폈다.

거친 필체로 죽죽 적힌 편지.

<밀라니아, 박쥐족 처녀 몇 명이 우리 늑대족을 희롱한 거 알고 있소? 더는 못 참겠소. 거만한 박쥐족이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게 하는 방안을 강구할 테니 그런 줄 아시오.>

늑대족 수장 발칸에게서 온 편지였다. 박쥐족을 건드려도 눈 감으란 얘기다.

밀라니아가 이번에는 다른 편지를 들었다.

필체는 교육을 잘 받은 귀족처럼 우아했으나 길게 뻗은 문자의 필치는 강퍅한 기운을 풍겼다.

<스칼렛이에요. 밀라니아, 늑대족이 썩은 고기를 우리 영역에 버리고 가는 일이 수차례 반복되고 있어요.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해요.

……(중략)……

하여 우리 일족의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따져도 아니라고 오리발만 내미니 더 이상 못 참겠군요.

늑대족의 건방진 행태를 벌하는 협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에요. 답장을 기다리겠어요.>

이건 박쥐족 수장 스칼렛의 편지.

“음.”

밀라니아는 가볍게 목을 울렸다. 세 종족의 갈등은 하루가 다르게 발생하고 있는데, 규모는 자잘한 것부터 골치 아픈 것까지 다양했다.

이대로 가다간 큰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전생에도 그랬고 전전생에도 그랬다. 협약을 맺지 않았을 때 벌어졌던 대륙 전쟁을 떠올린 밀라니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남주들을 상대할 생각을 하는 것도 벅찼는데 전쟁까지 나자 정신이 하나도 없어 최악이었다.

“협약을 맺을 날을 정해야겠군.”

밀라니아는 편지지 두 장을 꺼내어 대륙 협정의 필요성을 간략하게 적었다.

협정은 정기 회의를 하던 곳에서.

“시간은…….”

밀라니아는 깃펜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협정 전에 르베리안즈를 데리고 오는 게 좋겠지.”

이 즈음 르베리안즈는 어떤 상태인지 떠올렸다.

기억에 따르면 아마도.

“……관짝에 있을 테니.”

밀라니아는 멈추었던 깃펜을 움직였다.

“시간은 한 달 후.”

맨 마지막에 ‘대마녀 밀라니아’라는 멋들어진 서명까지 하고 난 뒤에 편지지를 접었다. 밀랍을 녹여 봉했다.

마녀의 우체부 부엉이를 부르려는 순간이다.

“구구.”

창가에 비비가 날개를 접고 내려앉았다. 또 어디선가 한참 놀고 돌아온 듯했다.

마침 잘됐다.

“비비. 이 편지를 각각 늑대족과 박쥐족에게 전달해 주렴.”

비비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리 하나를 내밀었다.

다리에 편지를 묶으려던 밀라니아는 비비가 발톱으로 꽉 움켜쥔 공을 내려다보았다.

“응?”

눈에 익다 했는데 가만 보니 그레칸의 훈련용 공이다.

“이걸 왜 네가?”

비비가 부리를 쩍 벌렸다. 즐거워하는 기색에 밀라니아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성 아래에서 그레칸이 위로 올라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크라앙!”

성난 음성이 여기까지 쩌렁쩌렁 들렸다.

비비는 자랑스러운 듯 밀라니아의 손에 공을 올려 두었다.

밀라니아는 상황을 이해했다.

그레칸이 공을 찾고 돌아오던 중에 비비가 뺏어온 것이다.

잠시 고민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던 밀라니아가 공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바닥에 떨어진 공이 무서운 기세로 튕겨 나가자 그레칸이 씩씩대며 공을 쫓았다.

“구구.”

비비가 홰를 치며 즐거워했다.

“쯧쯧. 너무 그러지 말거라.”

지금이야 그레칸이 작지만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비비는 그레칸의 약을 올리는 게 재밌는 모양이다.

비비의 양 다리에 편지를 묶은 밀라니아가 멈칫했다.

“……그래. 편지를 하나 더 써야겠구나.”

창가에 얌전히 기다리는 비비를 두고 밀라니아는 다시 의자에 앉아 새 편지지를 꺼냈다.

수신인은 스칼렛.

밀라니아는 깃펜을 든 채 생각에 잠겼다. 원래는 르베리안즈도 납치를 하려고 했지만.

“르베리안즈는 납치하기 좀 곤란한 것을.”

지금의 박쥐족 수장 스칼렛은 늑대족 수장인 발칸과는 다르다.

그는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 그레칸을 냉대했지만 스칼렛은 손주인 르베리안즈를 끔찍하게 사랑했다.

‘말도 없이 납치하면 이번에야말로 전쟁일 터.’

밀라니아는 전쟁만은 정말로 피하고 싶었다.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무사히 해결한다면 20년, 길어야 30년 후에는 영면에 들 것이다.

말년을 소득도 없는 전쟁을 하며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전쟁을 하는 사이 전생과 똑같은 흐름으로 흘러가면 안 되니까.’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 그레칸과 르베리안즈에게 심장을 뜯길 수도 있지 않은가.

‘끔찍한 생각이군.’

밀라니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빠르게 깃펜을 움직였다.

<스칼렛, 긴히 할 말이 있느니. 이는 그대의 손주 르베리안즈의 수면병과 관련되어 있어. 그를 고치고 싶다면 손주를 데리고 내 성으로 오길 바라노라.>

밀라니아는 그다지 길지 않은 편지를 몇 번이고 읽어 보았다.

좀 더 길게, 르베리안즈를 데리고 와야 하는 이유를 써야 할까 싶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스칼렛은 의심이 많아서 주절주절 말이 많으면 꿍꿍이가 있다며 의심할 것이다.

밀러니아는 새로운 편지도 밀랍으로 봉했다.

‘스칼렛이 그놈을 데리고 올까?’

이건 예측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남주들로 인해 죽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밀라니아는 몇 번이고 어린 남주 살해 시도를 했었다.

그레칸은 늑대족의 천덕꾸러기였으므로 접근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르베리안즈는 다르다. 그와는 어릴 때 만난 적이 없다. 접근이 불가능했다.

스칼렛과 그녀의 일족들이 르베리안즈를 꽁꽁 숨기고 싸고돈 탓이다.

대장 하나를 제외하고는 계급이랄 게 없는 늑대족과 달리 박쥐족은 철저한 혈족제였다.

르베리안즈는 스칼렛 혈족의 가장 순수한 직계손으로, 백 년 만에 얻은 귀한 일족이다.

무사히 자라기만 해도 르베리안즈가 새로운 박쥐족의 수장이 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무사히 자라기만 해도 말이지.’

그런 귀한 존재를 아무렇게나 돌릴 박쥐족이 아니다. 그건 밀라니아의 중장기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흠.”

밀라니아는 기억을 뒤적였다.

그녀가 르베리안즈를 만난 때는 르베리안즈가 아무리 어려도 10대 중후반이었다.

현재는 열 살도 안 되는 시점일 테니, 그는 아직 수면병을 앓고 있을 것이다.

‘그건 내 피로 고칠 수 있는 병이지.’

물론 단시간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르베리안즈의 수면병은 박쥐족의 고질적인 유전병인데, 르베리안즈의 경우는 좀 특수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무려 10년가량을 수면병을 앓게 되니 말이다.

‘나로서도 어느 정도로 피를 쏟아야 되는지 모르는 일이야.’

원수인 박쥐 남주를 위해 소중한 피를 흘려야 한다니.

못마땅해진 밀라니아는 편지를 붙든 채 얼굴을 찡그렸다.

‘……어쨌든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되니까.’

10대 중후반의 나이에 르베리안즈는 앨리지를 만나는 걸로 알고 있다.

흔하게 보지 못하는 요정족을 만난 뒤, 르베리안즈는 그녀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꼈을 터.

‘세 사람을 최대한 만나지 않게 해야 해.’

아직은. 지금 여주를 만나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자신의 이 대계는 장장 20년을 예상하는 섬세한 작업이었다.

남주들을 사육하는 중에 남주들이 여주를 본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끔찍하구나.’

핼쓱해진 밀라니아가 서둘러 비비의 다리에 편지를 묶었다.

원수에게 피를 사용하는 게 아깝기는 하지만.

‘목줄을 걸어 두는 거라고 생각하자.’

은혜를 베품으로써 목줄을 채워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잘 부탁한다, 비비.”

“구구.”

비비가 거대한 날개로 날갯짓을 하며 창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는 공을 입에 물고 그레칸이 돌아오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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