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526화 (527/527)

제92장. 벌(4)

글쎄요. 어땠더라······.

특별히 더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불기만 하면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헤집어지는 까닭에 귀찮아 하기도 하고 그러다 더운 날엔 반가워 하기도 하고 바다 위에 폭풍이 몰아칠 때에는 무서워 하기도 하다가. 그랬습니다. 물론 바람을 싫어하고 꺼렸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 않았다가 아니라 않았던 것 같다 하십니까.'

'잘 모르겠어서요. 제가 술을 좋아했는지 그저 버릇이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바람이라.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특별히 더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싫어하지도 않은. 그런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스승님.'

'그럼. 불은 좋아하십니까.'

흰 불꽃이 사방을 감쌌다.

새벽 어스름에 소리없이 피어난 안개같은, 그러나 그보다는 훨씬 많은 침묵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한 새하얀 불꽃이 피어 올라 온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불과는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모닥불에 머리카락을 태운 적이 있었기도 하고, 검의 길에 오르기 전에는 더위를 꽤 많이 탔었는데도 벽난로에 불을 피워 둬야 하는 날이 많았어서요. 스승님은 좋지만 불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은······ 싫어하실 테지요.'

'네. 숨이 막혀서.'

'허면. 땅은 어떻습니까.'

너른 땅 위에 발을 디딘 이들의 눈이 공포에 잠겨든다.

정체를 알 수 없을 불꽃이 마치 생명을 얻은 것처럼 움직여 발치로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는 물론이거니와 눈동자 하나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으니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겠나.

'제 말, 이제는 체이스 형님께서 타시게 된 그 순한 말이 바닥을 박차는 소리를 썩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만 좋아했어요. 어릴 때에는 지겹도록 바닥을 쳐다보며 살았어서, 생각이 필요할 때에는 여전히 습관처럼 바닥을 내려다보게 되어서. 평소에는 땅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몸에 흰 불꽃이 닿는다.

희지 않은, 모든 것을 태우는 안개같은 불꽃이었다. 지극히 아름다운 것 안에 지극히 잔혹한 힘이 들었다.

- 따악!

- ······ 화르륵!

소리 내기를 허락하지 않은 대마법사의 뜻을 어기지 못한 이들의 몸이 타들어간다. 늘 그랬듯 언제나와 같이 고요하게.

'어디보자······ 그럼 전기를 일으키는 것에는 관심이 가시는지요.'

'카스트린 경의 시신이 다 타버렸다 했습니다. 그 보고를 처음 받았을 땐 불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어요. 검보다 빠른 전기에 그리 되셨다 들었습니다. 그래도 차라리 다행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이 아니라 전기였으니까요.'

차라리 전기였으니 몸 속으로 들이닥친 그 힘이 심장과 뇌를 태워낼 때까지만 버티면 될 일이었을 터다. 베른의 스승 테일란은 그 공격을 허용한 뒤 오래지 않아 곧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아, 물론 제가 제대로 보았던 불이 스승님의 불 뿐이었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얘기하다 보니 어쩐지 전부 다 싫다 소리밖에 안 하고 있네요.'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상관이 있겠습니까. 알게 되니 좋을 따름이지요.'

그러나 앞에 선 이들은 달랐다.

전기가 아닌 불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앨런의 불은 전기와 다르다. 밖에서 안으로,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신경을 자극시키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만족했다는 듯 심장을 태워내지 않던가. 심장이 타들어가는 소리를 고스란히 들으며 죽음을 맞이하게 하지 않던가.

- ······ 절그럭.

한 쪽에 모여 서 있던 이들 중 한 명이 나지막한 소음을 냈다. 사일런트의 막에 갇힌 채 산 제물이 되어가는 적의 모습에 새하얗게 질린 이들, 파비안의 병력 중 한 명이 참지 못하고 한 발을 뒤로 물리려다 멈추는 소리였다.

사실은 멈춰 섰다 하기보다는 그들 역시 움직임을 강제당했다 하면 맞을 터였다. 아직 칼리안은 파비안의 군사들이 그들을 찾은 왕세자에게 등을 돌린 것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했으니까. 혹여 도망이라도 갈까, 발을 묶어놓으라 앨런에게 명령하지 않았던가.

"가만히 계시게. 아직은 그대들에게 손을 뻗을 생각이 없으니."

갑작스런 소음 덕에 오래 전 어느 날의 회상에서 잠시 벗어난 앨런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런 말을 전하며 파비안의 군사들을 쳐다봤다. 방금 전 소리를 낸 병사, 그리고 아마도 이곳의 영주 대리인이 아닐까 싶은 이의 눈에 어린 깊은 공포감을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앞을 쳐다봤다.

공포를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손가락을 두 번 튕기는 것으로 눈 앞에 지옥을 만들어 두었으니.

그러나 앨런은 제온의 병력을 쉬이 죽여 없앨 마음이 없었다. 대마법사가 그들에게 내려지는 벌이 잔혹해야 한다 결정했으니 공포감을 느낀다 한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나저나. 카스트린 경의 검보다 빠른 전기라 하셨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런 것에 제 옛 스승님께서 숨을 놓으셨습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씀을 하시니 눈치도 못 채고 지나칠 뻔했습니다.'

'특별할 것이 아니니까요.'

'언제든 참 태연하게도 말씀하십니다.'

'저와 관련된 이들에 대한 생각과 크게 다를 것 없지 않겠습니까. 있지도 않은 일을 두고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냥. 자몽이 든 케이크를 맛있게 만들고 우리 히나가 좋아하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솜씨 좋은 사람을 동생으로 뒀구나. 그 이상의 생각이 먼저 들지는 않습니다.'

'······ 그래요. 좋게 여기겠습니다.'

'네. 아, 그러고 보니 그 자몽 케이크. 브리센 후작저에 붙들려 있다 왕궁에 돌아왔을 때 먹게 되었는데 꽤 맛있었습니다. 아스트리샤 거리에 가실 일이 있다면 한 번 드셔 보세요. 스승님 쓴 맛 싫어하셔도 입에 맞으실 겁니다.'

'쓴 맛이 안 납니까?'

'조금요. 아주 조금 납니다. 괜찮으실 거예요.'

'그렇다면 저도 한 번 들러보지요.'

'네, 스승님. 그런데 안 쓰다 했으면서 쓰지 않느냐 역정내시면 안 됩니다. 제 입맛에는 안 썼다 하는 거니까요.'

'이런. 발뺌을 하십니까.'

'빠져나갈 구석은 만들어 둬야죠. 커피가 아니라면 쓴 것은 전부 다 싫어하시니.'

마주앉아 차를 마셔 주고, 입에 맞을 디저트가 화두에 오른다면 잊지 않고 권해 주고, 그렇게 언제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눠 주고.

'그러나저러나······ 이대로 계속 바람 마법을 배우다 마법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지는 않을는지.'

'괜찮습니다. 스승님께서 보셨을 때 저에게 특별히 맞는 속성이 없다 하시니 별 수 없다 하는 게 아니라 바람이 좋습니다.'

'그렇다 하시면 다행이겠으나 도무지 마법에 재미를 못 붙이시는 듯 보이니 그렇습니다. 혹여 바람을 꺼리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어.'

'아닙니다. 걱정 마세요. 검을 드는 버릇이 더 길어 그렇지 바람 속성이 싫은 것도 아니고 마법을 꺼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다른 걱정 없이 자몽 케이크 맛만 궁금해하며 지내셔도 제가 마법을 놓을 일은 없을 겁니다. 30년이 지나든, 50년이 지나든.'

그저 지켜만 주고 싶은 웃음을 짓는.

'빠져나갈 구석도 없을 장담을 그리 하십니까.'

'당연히요. 아버지. 장담해야죠. 누구 아들인데 마법을 놓습니까, 제가.'

그런 아들에게 온기 없는 칼날을 보내오는 자들을 온건히 대해야 할 이유가 없다 여긴 것이니. 대마법사의 결정을 두고 누가 무슨 말을 하겠나.

- 사아아아······.

따라서 모두가 죽었다. 화려하고 고요하고 잔혹하게, 모두가 그렇게 생을 놓았다. 칼리안의 뜻에 따라서, 앨런의 의지에 따라서.

'두 명만. 살려놔 주세요.'

두 명.

칼리안이 부탁한 두 명을 제외하고서.

* * *

조절하는 법을 알지 못해 그랬다.

아르나이젤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있던 심해와 칼리안이 있던 바다 위의 거대한 배를 포함한 정도의 공간 속에서 흐르던 시간만 잠시 멈추게 하였다. 시간의 축이 지닌 힘을 칼리안보다 더 잘 다루지 못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잘 다스릴 수 있기 때문에 그리했다. 일부러 마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칼리안은 그렇지 못했다. 바닷속으로 용감히 뛰어들어가 두 번 째로 만나게 된 아르나이젤이 전해 준 힌트로 말미암아, 급한 상황에 이르른 김에 어찌저찌 조각을 쓰는 법은 깨우쳤다. 그러나 적당히 쓸 줄을 깨우칠 만큼 제대로 익히지는 못했다.

- 숨이 막히지는 않으십니까.

- 괜찮아. 넌.

덕분에 심장 속 서클 하나에 든 힘이 뜯겨나가듯 강제로 뭉텅 빠져나가는 손해를 보게 됐다.

- 거짓말.

- 괜찮다고. 넌.

- 저도 멀쩡합니다.

- 거짓말하지.

강탈당하듯 놓치게 된 마력이 온 몸을 건드리며 빠져나갔다. 그렇게 됐으니 가장 많은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히.

- 인이. 흔들렸는데.

칼리안의 심장이었다.

맹세의 인이 풀릴 뻔했을 만큼의 충격이 가해졌다.

- 언제는 제가 밖에서 멀쩡한 채로 돌아다닌 적 있었습니까. 익숙합니다.

- ······ 조심 좀 하라고.

- 네.

- 시간은 어떻게 풀 건데.

- 글쎄요. 그런데, 형님.

- 왜.

- 궁금한 게 있습니다.

- 뭔데.

- 지금 형님과 제가 이렇게 돌아다니는 건 형님과 제가 --- 아닐까. 그런 얘기를 한 적 있었죠.

시간의 축을 이미 한 번씩 움직였기 때문이 아닐까. 지워진 말을 신경쓰지 않고 전했다. 이제는 금기라 할 일도 아니었으니.

- 있었어.

금제가 가해지든 말든, 똑똑한 완두콩이 한 번에 잘 알아듣기만 하면 문제될 것이 없지 않겠나.

- 그럼 다른 이유도 있을까요.

- 모르겠는데. 왜.

- 라시드 브리센이랑 싸우는 중이어서요. 지금.

- ······ 지금.

- 네. 라시드 브리센이 깼네요. 신기하게도.

- 그걸 왜 이제서야 말해, 태평한 새끼야.

선견지명이 따로 없다.

완두콩한테 욕을 가르치면 결국 그 욕을 먹는 건 칼리안 본인일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나.

피식 웃는 소리만 돌려보낸 칼리안이 검을 휘둘렀다.

- 카아아앙!

주인을 따라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순백의 검이, 옛 주인의 길고 길었던 머리카락을 기리듯 순백의 긴 잔상을 남긴다.

- 상태 안 좋잖아. 시간을 풀어. 마나실 군단장이랑 같이 갔으면.

- 아뇨. 지금 풀기에는 제가 아직 회복이 덜 되어서요. 충격이 또 오면 못 버틸지도 모르겠습니다.

벼락처럼 날아드는 검을 올려쳤다.

당장이라도 라시드의 심장을 다 헤집어둘 것처럼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의 창으로 라시드의 목을 노리고 새하얀 검으로 그 심장을 꿰뚫고자 하였다.

그리 움직이며 말을 전했다.

- 그리고 라시드를 잡고 나서 시간을 되돌리는 게 낫습니다. 바로 곁에 키리에가 있는데 상태가 좋지 않아요. 싸우는 동안 히나를 근처에 오게 할 수도 없고 다친 놈을 기다리게 할 수도 없습니다. 라시드가 자리를 피해 줄 리도 없으니 차라리 시간이 멈춰있는 편이······.

카가강! 카앙!

- 낫습니다.

- 숨.

쿠궁······ 쌔애액!

- 숨 쉬기가 어려울 텐데. 너.

- 괜찮습니다.

- 서 있어도 숨이 차는데. 어떻게 괜찮아.

- 제가 그러면 라시드 브리센도 똑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더 유리합니다.

카아아아앙!

- 숨을 참는 건 제가 더 익숙할 테니까.

날아드는 검을 되받아친 뒤 몸을 날린 칼리안이 라시드의 목을 향해 검을 길게 뻗었다. 그 결에 두 걸음을 물러나며 공격을 피한 라시드가 새하얀 검을 쳐냈다. 그리고 내뻗은 검을 되돌려 반대로 칼리안의 목을 노렸다.

- 우우웅!

짧게 혀를 찬 라시드가, 제 검에 이제껏 내지 않던 붉은 오러를 담아 칼리안에게 내질렀다. 그것을 본 칼리안 역시 자신의 새하얀 검에 붉은 빛의 오러를 가득 담아 마주 휘둘렀다.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붉은 빛이 어둠 속에서 엉켜든다. 한 번, 두 번, 세 번, 끝을 모르는 것처럼 계속하여 맞붙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 카아아아앙!

그리고 어느 순간, 광폭한 음을 내며 거세게 충돌했다.

울컥!

비릿한 피 비린내를 맡은 칼리안이 씩 웃었다. 그리고 깊은 새벽에 홀로 빛나는 맹수의 눈 같은 붉은 눈으로 라시드를 쳐다봤다.

"키리에랑 신나게 놀았나 봐."

정확히는 피 냄새를 좇았다.

라시드의 어깨에 난 깊은 상처를 쳐다봤다.

오러 한 번에 피를 내뱉었다. 키리에의 검에 찔린 뒤 잘 아물어들던 상처에서 다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상태 안 좋네, 너도. 치유력이 무한정 나오는 건 아닌가 보지."

- 휘이익!

- 카가가가강!

대답 대신 공격이 찾아든다.

그것을 다시 막아내던 칼리안이 내뱉어지려는 숨을 함께 참아냈다.

또 한 번의 공방이 이어진다. 키리에에게서 가능한 멀리 떨어지기 위한, 그런 칼리안을 단숨에 몰아붙이기 위한 둘의 검 끝에 예리한 금속음이 고막을 윙윙 맴돈다.

- 칼리안.

덕분에 플란츠가 무어라 말을 전해오는 것을 알았으나 곧장 이해하지 못했다. 생각의 덩어리가 통째로 전해진 까닭에, 귀로 듣는 목소리가 아니었음에도 듣지 못하고 지나쳤다.

"상태가 안 좋다니. 제가 드리려던 말씀을 먼저 하십니까. 왕자님."

대신 라시드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별로. 익숙해서 괜찮은데. 넌 어때."

"저도 별로. 익숙해서 괜찮습니다."

"곱게 자라진 않았나봐."

"곱게 자랐으니, 익숙하다 말씀드리는 겁니다."

똑같이 오러를 냈다. 한 명은 피를 뱉어내고 한 명은 피를 삼켜냈다. 둘 다 정상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고도 태연하게 말을 나눈다.

곧 라시드가 긴 숨을 들이쉬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추고 혼자 움직이고 있으려니 숨이 부족한 탓이다. 공기를 들이쉬는 일에 애를 먹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다.

"왜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라시드 브리센."

"저는 언제나 왕자님께 고분고분하지 않았습니까."

"아닌데."

곧 큰 숨을 들이쉰 뒤 내뱉기를 잠시 참은 칼리안이 고개를 틀었다.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라시드의 검을 위로 쳐내고 자신의 검을 내리찍었다. 훌쩍 몸을 튼 라시드가 제 검을 횡으로 그었다. 그의 검이 방금 전까지 칼리안이 서 있던 곳의 뒷벽을 찍어냈다.

라시드가 벽에 가 닿은 자신의 검을 빼내는 찰나의 순간. 기회를 놓칠 리 없는 칼리안이 손을 움직였다.

- 서걱!

깊은 침음이 들린다.

깊이 베여나간 허리를 붙들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나는 라시드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똑똑히 보인다.

그 얼굴을 칼리안이 봤다.

똑똑히 봤다.

"꿍꿍이가 있는데. 지금."

칼리안의 붉은 입술이 호사로운 미소를 만들어낸다.

어둠 속에 잠긴 벽에 남겨져 있던 검흔을 이미 봤다. 방향으로 보아 키리에의 검이 박혀든 흔적이 아니었다. 라시드의 것이었다.

그랬는데 다시 또 벽을 향해 공격을 한다.

"분명히······ 있어."

성급하다. 라시드 브리센 답지 않게 성급하다. 그것을 확신한 칼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저러는 것일까. 호흡이 수월치 않아 저러는 것일까. 도망갈 틈을 노리느라 저러는 것일까.

- 칼리안.

생각을 하던 칼리안의 머릿속에 플란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완두콩의 목소리를 그제야 들었다. 조금 전 플란츠가 생각의 덩어리를 건넸음을 뒤늦게 상기했다. 그리고 복잡하게 뒤얽힌 플란츠의 생각을 순식간에 풀어냈다. 이해를 했다.

- 시간 풀어, 칼리안.

한 발을 더 뒤로 물린 라시드와 잠시 거리를 벌린 채 얕은 숨을 내쉬던 칼리안이 눈을 내리떴다. 다시 달려드는 라시드를 막아내고 쳐내면서 생각을 했다.

살짝 고개를 돌려 키리에를 쳐다보면서. 한참 먼 곳에서 멈춘 시간 사이에 세워져 있을 히나를 떠올리면서. 바깥 어딘가에 있을 앨런, 그리고 휘트린의 지하 감옥에서 홀로 움직이고 있을 플란츠를 잊지 않고서.

- 지금 라시드 브리센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시간의 축을 움직였기 때문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칼리안. 빨리 풀어야 돼.

키리에가 위험하여 시간을 멈췄다. 지금 당장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상처가 깊어서, 그런 키리에의 목으로 향하는 라시드의 검을 막을 시간이 부족해서 시간을 멈췄다. 그렇게 하여 키리에를 살렸다. 연명시켜 두었다. 그런데.

지금 플란츠는 묶어 둔 시간을 도로 풀어야 한다 말하고 있었다. 당장 그것을 한 번 더 움직이면 버티지 못할 것 같다 말했음에도.

- 란델 형님의 붉은 장미. 그걸 생각해, 칼리안. 만약 내 생각이 맞으면. 틀리지 않으면.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 같다 생각했던 란델의 붉은 장미. 제온에 속한 놈들의 상처를 순식간에 치료했던 심장 속의 돌. 시간이 멈춘 뒤 갑작스레 치유되지 않고 있는 라시드 브리센의 상처.

그것이 만약 치유력이 아니라면.

치유력이 아니라.

"······ 혹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내리쳐지는 라시드의 검을 새하얀 검으로 막아낸 채로, 라시드의 코앞으로 얼굴을 가져간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시간을 씁니까. 지금 그래서 오러를 내다 곧바로 몸에 무리가 오고,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는 겁니까."

방금 전 플란츠가 전해 온 것의 진위를 물었다.

"생명을 깎아 비정상적인 힘을 내고, 그렇게 깎은 생명을 돌에 담긴 시간으로 채워넣고, 몸이 소실되면 돌에 담긴 시간을 움직여 상처를 원래대로 되돌려놓는 겁니까. 치유가 아니라 시간을 거스르는 겁니까. 밖에 있던 제온의 놈들이 다, 그런 겁니까."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미 벗어났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멈춘 시간 속에서 눈을 뜬 것인지. 그렇기 때문에, 거스를 수 있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강제로 운용한 오러에 해를 입고 상처가 낫지 않고 있는 것인지. 그것을 물었다.

그러자 툭툭툭.

대답 대신 라시드 브리센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이 어째서, 중요한 것을 물었을 때 란델이 돌려주곤 하던 '고단하다'는 말과 비슷한 뜻으로 들리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 형님 생각처럼, 지금 돌아다니는 게 라시드 브리센 뿐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휘트린에 잡아 둔 제온의 생존자들도 깨어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 있을 발칸 대원들이 위험합니다.

- 지금 가고 있어.

- 란델 형님도 깨어 계실 테고······ 아.

앨런에게.

두 명을 살려놔 달라고 했는데.

- 스승님도 위험합니다.

쇄도하는 라시드의 검이 칼리안의 검에 가 닿을 정도의 시간 동안, 플란츠와 서로의 상황을 주고 받았다.

라시드의 검을 흘려보낸 뒤 순백의 검을 내리그었다. 뒤로 멀어진 라시드가 다시 한 번 달려드는 사이, 칼리안은 잠시 발을 멈췄다.

서클에 가득 담긴 마나를 있는대로 끌어모았다. 그리고 그것을 시간의 축에 불어넣기 직전에 플란츠를 향해 다시 말을 건넸다.

- 이쪽의 시간이 풀려도 그곳까지 닿는 것에 얼만큼의 시간 차이가 생길지 모릅니다.

- 알아.

- 히나가 통신용 구슬을 서재에 두고 왔다 했습니다. 불안정하지만 제대로 집중해서 쓰면 히나에게 얘기를 전할 수 있을 겁니다. 서재가 가까우면 그것을,

- 가지고 있어. 레릭에게 전해 받았어.

- 네. 그럼. 방어막, 그것을 바로 써달라고. 히나에게 전해주세요.

- 곧바로.

- 네. 제가 아마······ 안 괜찮을 것 같아서.

- ······ 알았어.

- 네.

짧게 답한 칼리안이 검을 다잡았다.

- 카앙, 카아아아앙!

라시드의 검을 있는 힘껏 쳐냈다.

죽을 힘을 다해 라시드를 밀어냈다.

- 콰과과광!

바람을 폭발시켰다.

가능한 먼 곳까지.

가능한 먼 곳까지.

라시드 브리센이 물러날 수 있도록.

- 오실 때 육포 가져다 주세요. 히나 몰래 먹게.

- 가져갈 거야.

- 그럼 이따 뵙죠.

- 그래.

- 네.

살아서 다시 보자는 말과는 꽤 동떨어진 소리를 주고받은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이를 악물었다.

시간의 축.

파편 뿐인 그것에 다시 한 번 손을 댔다.

- ······ 두근!

다시 한 번, 요동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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