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장. 벌(2)
버릇이 들게 마련이다.
루시가 찾아와 곁에 누우면 고롱고롱 소리를 내다 새근새근 잠들 때까지 가만가만 쓰다듬는다. 복도 먼 곳에서부터 안네의 다급하고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려오면 잘 챙겨 입은 재킷에 거품이 또 묻지 않도록 얼른 벗어 레릭에게 건넨다. 그런 버릇이 들었다.
우다다다, 하고. 집무실 밖에서부터 소란한 소리가 들려오면 열어 두었던 잉크병을 서둘러 닫는다. 만약 그 소리를 한낮의 빌헬름 관이 아닌 이른 새벽의 체르밀 궁에서 듣게 된다면 얼굴이나 목젖이나 배가 밟히지 않도록 재빨리 옆으로 돌아 눕는다. 애석하게도 눈을 떴을 땐 이미 늦은 뒤라면 그 무자비한 추격전에 휩쓸려 밟히더라도 의연한 척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곧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는다. 조심스레 손을 움직여 이불이나 배, 혹은 머리를 대고 남은 베개 위에 고양이들이 누워있지는 않은지를 먼저 살핀다. 이불 속 어딘가가 볼록하게 튀어 나와 있으면 이불을 걷어내다 고양이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한다.
소파의 쿠션 틈새로 고양이 꼬리가 삐져나와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고 앉는다. 자리에 앉으려다 팔걸이 아래의 쿠션 틈에서 동그란 눈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보고 기함한 뒤 얻게 된 버릇이다. 물론 그런 곳에 고양이가 들어가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새 브로치와 커프스, 타이 핀 세트가 들어있던 정교한 주석 상자 안에 고양이 두 마리가 대체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지 않는다. 궁금해하든 고민해보든 어차피 모른다.
그 모든 것이 버릇이 됐다.
짧은 기간동안 어느새 버릇이 됐다.
싫다는 말을 포기하는 버릇이 들기까지, 세상의 모든 꽃 앞에서 숨을 참는 버릇이 들기까지, 질문하기보단 입을 다무는 버릇이 들기까지, 들려오는 말과 찾아드는 시선의 앞에서 눈을 감기까지.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렇게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웅크리고 있던 고양이가 막 떠난 자리에 손바닥을 올려놓고 고양이가 남겨두고 간 온기를 기억에 담아두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날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왜."
"네?"
"왜 쳐다보냐고."
"아닙니다, 왕세자이신 사실이 부럽기는 처음인 부군단장님."
그런데 이건 아마 오래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파란머리 미친 마법사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보이지 않고 넘어갈 버릇이 들기까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게 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말을 포기하고 숨을 참고 입을 다물고 눈을 감게 되었던 것만큼이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향기가 들지는 않는다. 똑같이, 혹은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버릇을 들여야 할 일임을 알지만 향기는 들지 않는다.
"하라고. 할 말 있으면."
물론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향기가 들지 않는 대신 짜증이 드니까.
"잘못 써진 글씨가 정말 없습니까?"
"없어."
"이렇게 긴 보고서를 만드는데 잘못 써서 버리게 된 종이가 한 장도 없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없다고."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마력의 기운도 안 남은 것을 보면 클린을 쓴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어떻게 잘못 써서 버리게 된 종이가 한 장도 없을 수가 있습니까?"
"마법사."
"아니면 설마······ 놀랍게도 저하께서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동생을 아껴주고 계셨던 까닭에 동생의 따까리에게마저 그런 종이 한 장도 못 넘겨주고 직접 보관하겠다 결심하셨다거나."
"너. 적당히, 좀."
시원한 바람이 창가로 불어드는 밤. 작은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 놓아 둔 정물 같던 얼굴에 해맑은 웃음이 드러난다. 그런 모습을 마주하고 나서야 양 손바닥을 든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그렇게 많은 양의 보고서를 쓸 동안 글씨를 실수해 버리게 된 종이가 단 한 장도 없다는 말을 드디어 믿기로 한 것이다. 믿기로 한 것인지 믿어주기로 한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 드르륵!
손에 들린 서류가 구겨지지 않도록 서류 용으로 따로 챙겨 다니는 마법사 주머니 속에 잘 넣은 아르센이 몸을 일으켰다. 지하 감옥의 경계를 강화하라 말한 일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왕자님의 옆에서 지켜보고 계시다가 팔이라도 한 번 툭 쳐봐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만 하라고 한 것 같은데. 마법사."
"도무지 아쉬워서 그럽니다."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인 아르센이 굉장히 아쉽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칼리안의 글씨를 볼 일이 언제 또 생기겠나. 서명이든 보고서에 적는 반려 사유든 글씨를 적을 일이 꽤 많은 플란츠와는 완전히 다르지 않나. 차라리 아르센의 몸뚱이 어딘가에 멋드러진 칼자국 하나를 남겨줄 일이라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금세 생길 수 있겠지만 글씨라니. 그러니 '그 칼리안이 평범한 사람 같은 실수를 했다는 증거'를 곱게 수집해 둘 기회를 놓쳤음에 대한 아쉬움이 들 수밖에.
"아쉬워서. 마력까지 낭비하며 불만을 꺼내나."
플란츠의 말대로였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는 아르센의 주변에 어느새 사일런트 막이 둘러져 있었다.
그 속에 자신과 같은 집무실의 왕세자를 넣어 둔 아르센이 투덜투덜 말을 이었다.
"네. 아쉽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종이 한 장만 저에게 건네 주셨다면, 성능과 부작용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수면향을 과감하게 뿌려주시고 차디찬 대리석 바닥 위에 눕혀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로브까지 훌러덩 벗겨서는 자리 떠나셨던 왕세자 저하께 사과를 들을 생각 같은 것도 곧바로 접었을,"
"미안하게 됐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해진 사과의 말에, 아르센의 이마에 자잘한 주름들이 떠오르다 사라졌다.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엘프들의 도시에 가기 전, 아르센의 모습으로 칼리안을 따라 나선 일을 이제야 묻고 있었다. 조용히 둘이 앉아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이제야 생겼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누를 속이겠다며 저까지 속일 필요는 없는 것 아닙니까. 저한테 제대로 말씀을 해주셨으면,"
"설득할 시간 없었어."
"설득할 시간이 왜 없습니까. 그때 시간 많았습니다."
"반대했을 거잖아. 싫어했을 것 아냐."
복도에서 둘을 마주친 발칸의 대원들이 조용히 묵례만 건네며 멀찍이 떨어져 지나쳐갔다. 두 부군단장이 입은 벙긋거리고 있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혹시라도 사일런트 막 안으로 들어가 비밀 얘기를 듣지 않도록 알아서 조심해주는 것이었다.
계단을 향해 발을 디딘 아르센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리고 터벅터벅 내려가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반대할 것 같으면 계속 그렇게 할 생각이십니까? 그리고, 반대도 아니고 싫어하는 건 또 뭡니까."
"싫어하잖아. 내 아우님한테 또 방해 될 거라면서. 키리에는 그래도 조용히 따라갈 줄 아는데 부군단장 너는 막을 게 뻔한데."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잠시 발을 멈추고 뒤에서 따라오던 플란츠를 쳐다보던 아르센이 긴 숨을 들이쉬었다.
"왕자님께서는 저하를 믿게 되셨으니까, 기사 베른 경은 그런 왕자님을 믿으니까. 그러니까 저하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 일단 두고 보게 됐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질 않아서, 믿고 따라줄 놈은 아니고 설득하자니 말이 안 통할 것 같고 직급으로 누르자니 눌릴 놈도 아니어서. 그래서 저는 그냥 재워두고 가야 되겠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그래서 사과했잖아."
"저하."
"왜."
"세크리티아 왕제의 가슴팍에 제가 얼음창을 꽂아넣었다는 건, 제가 거기까지 억지로 쫓아만 간 게 아니라 어떻게든 그 때 제가 모시기로 한 왕을 믿고 따라가기로 저 스스로도 결심을 굳혔다는 얘깁니다. 지금도 그렇게 무서운 왕자님이신데, 지금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할 리가 없었을 그 서슬퍼런 사람 앞에 용기있게 나설 정도로는 그때의 왕을 믿었다는 얘깁니다."
한 계단 위.
아르센보다 한 계단 위에 선 채 그 말을 듣던 플란츠가 발을 움직였다. 한 칸을 내려와 아르센을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자신의 것보다 조금 더 높이 있게 된 미친 마법사의 새파란 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 아우님이 나 때문에 전부 다 내려놓고 산다고, 내 아우님이 나 때문에 남들 앞에서 마법사 너한테 드러내놓고 벌도 못 내리면서 산다고, 그렇게 생각하잖아. 그런데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설득을 해."
"대사막에서 지냈을 때. 더이상 대사막에 가지 말라는 스승님 말씀을 어기고 저 혼자 대사막에 다녀왔을 때, 돌아와 보니 스승님께서 당신 짐을 다 싸두고 계셨습니다. 저를 두고 카이리시스로 돌아가겠다면서요. 그걸 보고 제가 스승님한테 화를 냈습니다. 말 좀 안 들어 처먹는다고 그렇게 쉽게 버리고 갈 생각을 하느냐고, 억울하고 서운해서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께서 저한테, 그런 게 아니었다고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그냥 스승님 몸이 힘들어서 먼저 가겠다 한 것일 뿐이라고. 그렇게 설명해주셨습니다."
"······ 그래서."
"스승님께서도 서운하셨을 겁니다. 제가 스승님을 고작 그런 놈으로 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정말 많이 죄송했었습니다. 사과도 못 드렸습니다. 차라리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먼저 물어볼 걸, 멋대로 따져보지 말고 얘기를 나눠볼 걸, 스승님 돌아가시고 나서 그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저하는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조용히 자신을 쳐다보는 플란츠에게서 눈을 뗀 아르센이 다시 발을 옮겼다. 그리고 한 칸 한 칸 아래로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말을 이었다.
"저에 대해 저하께서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압니다. 저하께서 처음으로 부군단장 직함 받으셨을 때, 저하 때문에 우리 왕자님께서 손에 쥔 것들을 다 내려놓고 있다고. 제가 그렇게 말했던 것도 분명히 기억합니다."
"그래."
"그래서, 저한테 물어보신 적 있습니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없어."
"밑도 끝도 없이 재워 놓고서. 왜 그러셨는지에 대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이 앞으로 할 일만 주르륵 써 있는 종이 뭉치 내려놓고 가버리셔도 제가 그대로 따라 줄 거라고, 그렇게는 생각 하셨으면서. 왜 먼저 설명할 생각은 못 하셨습니까."
저벅, 저벅. 뒤따르는 발소리만 들려왔다.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뒤늦은 플란츠의 목소리가 먼저 전해졌다.
"싫다고 할 까봐."
"저하 면전에 대고 거절하는 말 듣기 싫어서 그러셨습니까."
"그래."
"사람 생각은 바뀌는 겁니다."
"안 바뀐 적이 더 많았어."
"많았던 것이지 많은 건 아니잖습니까. 체르밀 궁에 사는 브리센의 그 플란츠, 그렇게 생각하며 발칸에 들어왔던 놈들이 소라 껍데기 주워다 주는 걸 보셨잖습니까."
"······ 그래."
저벅, 저벅.
"왕자님이 아무 것도 가질 생각 없이 지내는 것에 가진 불만도 여전하고 일이 틀어지게 된 시작이 저하였다는 걸 잊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저하께서 하는 말에 무조건 반기를 들고 거절하지는 않게 될 수도 있는 겁니다. 말도 짧고 인성도 짧고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 해도 생각까지 짧은 게 아니라는 걸 알 정도가 될 수는 있다는 겁니다."
저벅, 저벅.
발칸 부군단장의 새하얀 로브가 계단을 스치며 아래로 내려간다. 그것을 밟지 않게 한 발을 옆으로 피한 플란츠의 하얀 구두가 그 뒤를 따라 함께 내려간다.
언젠가는 반대로 서 있었을, 플란츠가 앞에 서고 아르센이 뒤를 따랐을 그 때를 잠시 상상해보던 플란츠에게 아르센의 말이 이어져 들려왔다.
"과거의 제가 따르기로 했던 과거의 그 왕은, 적어도 거절에 대해 겁을 내거나 거절 받는 꼴이 보기 싫어서 사람을 재워놓고 끌고가는 성정은 아니었을 겁니다. 제대로 설명했고 제대로 설득했으니까 제가 거기까지 따라가서 죄없는 왕제의 가슴에 얼음창을 내려보냈을 것 아닙니까. 그렇게 미쳤었다던 왕도 그 정도는 되었는데, 그랬으면 저하께서도 거절 받을까봐 뒷걸음질부터 치는 버릇을 버려보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알았어. 해 볼게."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벅, 저벅.
"왕자님이 잘못 쓴 종이, 정말 없습니까?"
"없어."
"어떻게 사람이. 정말 없습니까?"
"없다고."
오랜 버릇을 물리고 새 버릇을 들이기까지 다시 오랜 시간이 걸릴지, 아니면 생각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을지. 그것까지 알 수는 없을 일이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나 든다 해도 그 사이에 향기가 함께 드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것은 분명히 안다.
"그걸로 왕자님 놀릴 생각 없습니다. 저도 제 목숨 아까운 줄은 압니다. 그러니까 고이 보관만 할 겁니다. 혹시라도 태워 없애 달라 하신 거면 제가 비밀 잘 지켜 드리겠습니다. 정말 없습니까?"
"마법사. 적당히, 좀."
저벅.
저벅.
* * *
영주성의 구조는 대부분 비슷하다.
카이리스와 세크리티아에서 건물을 짓는 재료가 다소 다르고 그러다 보니 양식이 또 조금씩 다르고 내부를 꾸며놓는 장식도 차이가 있지만 구조는 비슷하다.
- 자박, 자박.
무기 창고는 어디에 있는지, 하인들이 묵는 곳은 어디인지, 주방과 식당과 응접실은, 서재는, 연회장은 어디에 자리했는지. 식량 창고와 실내 훈련장과 대피소의 위치는 어디일지, 감옥과 기사들의 숙소와 마굿간은 어디에 있을지. 영주의 집무실과 서재, 침실 따위는 또 어디에 있을지.
가장 좋은 귀빈실은 어디에 있을지.
- 자박, 자박.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영주성에 들른다 하여도 응접실과 식당과 연회장, 그리고 귀빈실만 들르게 마련인 여느 왕족들과는 머릿속에 든 영주성의 구조부터가 달랐다.
그 영주성에 대한 자료를 준비해 볼 여유 따위도 없이 무작정 쳐들어가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내지 않기 위해서는, 영주성의 어디를 어떻게 뒤져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어야 했으니까.
"이런 것 많이 봤었지, 히나. 다시 보기 싫어도 조금만 참아야 해."
- 자박, 자박.
둘이 걷고 한 명의 발소리만 흘러나오는 곳에 가느다란 미성이 흘러나온다. 그 목소리에 대한 대답은 전해지지 않았다.
히나가 진주 구슬을 두고 왔다 한 데다 지금 히나를 등 뒤에 두고 걷고 있는 탓이다. 덕분에 무슨 얼굴로 주변을 보고 있을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버릇처럼 사라진 자신의 발소리 대신 히나의 작은 걸음 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만 온 신경을 다해 듣고 있었다.
- ······ 스릉.
- 쌔애애액!
작은 발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더 작은 칼날 소리.
그것이 들리기가 무섭게 붉은 빛의 단검이 대기를 갈랐다.
- 콰직!
숨죽인 살기를 다 숨기지 못한 채 검을 뽑아들던 제온의 검사 한 명이 생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온다.
- 자박······ 자박.
히나의 발 소리가 잠시 멈췄다 이어진다.
괜찮느냐 묻는 대신 걸음을 옮겼다. 영주성의 정원을 가로질러 입구로 들어섰다. 중앙의 큰 계단을 오르는 대신 서쪽의 작은 계단 쪽으로 향했다.
- 휘잉!
계단 아래 만들어진,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숨겨진 창고 쪽으로 칼리안의 바람이 인다.
- 덜컹, 덜컹······ 벌컥!
- 서걱!
란델의 행방을 수색하다 갑작스레 영주성으로 찾아든 3왕자를 발견한 뒤 급히 몸을 숨겼을, 계단 창고 속에서 눈을 빛내고 있던 기사의 목이 어느새 제 발치로 떨어진다. 청소에 필요한 긴 사다리에 길이 막혀 멈출 때까지, 데구르르. 소리가 난다.
- 우웅······ 휘이잉!
히나를 감싼 실드의 위를 맴돌던 바람이 아주 잠시 큰 소리를 냈다. 사람의 목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보다는 훨씬 듣기 좋은 소리를 만들어내다 사라졌다.
- 자박, 자박.
한 명의 왕자와 한 명의 백작이 계단을 오른다. 복도를 걷는다. 방과 방 사이에 만들어진 비밀 공간 속에 숨어든 이들에게 칼날을 담은 바람이 분다.
천장의 빈 곳에 숨어 있다 칼리안의 앞으로 뛰어내린 이들을 향해 긴 채찍같은 오러가 뻗어나갔다. 숨어 있던 곳으로 되돌아 올라가라는 듯, 놈들의 목을 감은 붉은 기운의 반대편 끝이 천장에 가 닿는다. 놈들의 발이 바닥에서 멀어진다.
숨 쉴 공기를 찾아 버둥거리는 소리는 히나에게 닿지 않을 터였다.
"내가 란델 형님에게 정원 가위를 선물해드렸거든, 히나."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라.
가만가만 흘러나온 말이 히나를 향했다.
"부담 많이 가지시라고 엄청 비싼 황금색 미스릴을 어렵게 구해서 그걸로 만들어 드렸어. 어마어마하게 큰 루비로 장미도 세공해서 상자에 붙이고. 아마 그런 선물은 란델 형님도 받아보신 적 없었을 걸."
- 쌔애액!
불이 켜지지 않은 벽난로 속으로 검이 날아간다. 보기 좋게 펼쳐진 고급스러운 카펫 아래로 바람의 창이 내리꽂힌다.
"그런데 그게 알고 보니까 여기서 난 미스릴이었대. 나는 그것도 몰랐지. 란델 형님의 미스릴을 웃돈까지 주고 사서 가위로 만든 다음에 란델 형님께 드렸던 거야. 그것도 몰랐어, 내가."
- ······ 서걱!
- 콰직!
"내가 그래, 히나. 세심하질 못해서. 뭐든 말을 해줘야 알아. 아니면 몰라."
- 콰드득!
- ······ 쿵. 쿠웅!
눈을 감고 걷게 할 수도 없고. 등에 업고 갈 수도 없고. 결국은 히나도 함께 걸어야만 할 어두운 길을 천천히 앞서 걸어가면서, 조용조용 말을 전했다.
"그래서, 히나. 얘기를 꼭 해줬으면 좋겠어. 휘트린을 보는 게 버거워지면 버거워졌다고, 괜찮으면 아직 괜찮다고. 해줬으면 하는 게 있으면 있다고. 얘기를 해줬으면 좋겠어. 네 일에 대해서까지 놓치고 지나가기는 싫어, 나는."
- 자박, 자박.
"휘트린을 살려두는 게 무리한 부탁이었던 것 맞아. 네 부탁을 내가 거절하지 못해서 들어준 것도 맞아. 그런데 그 부탁을 들어준 건 네 능력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네가 귀해서야. 네 힘이 나한테 필요해서가 아니라 네가 나한테 귀한 사람이라서야.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 그것도 얘기해줘."
- 자박, 자박.
"이런 상황에 다른 놈들 치료하겠다고 무리하려 들지 말고,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말해줘. 그럼 내가 오해하지 말라고 대답해줄게. 아니라고 얘기를 해줄게."
- 자박······ 자박.
왕궁 밖을 제대로 돌아다녀 본 적도 없을 어린 왕자가, 도박하는 법을 알았다. 남매가 먹고 자고 쉬는 며칠 동안 얼마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를 알았다. 그의 형제는 제 부하가 쓰다 남은 향수 한 병을 얼마에 사야 할 지도 몰랐는데 그보다 몇 달을 더 늦게 태어난 왕자는 제 주머니 속에 든 돈의 가치를 알았다. 모닥불 가에서 잠드는 법을 알고 사람의 입을 어떻게 막고 여는지를 알았다.
칼리안은 티내지 않았고 말하지도 않았으나 히나는 칼리안이 그런 것들을 알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 칼리안이 말을 건넨다.
성의 하인들이나 알 곳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 그 속에 숨어든 이들이 적인지 아닌지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칼을 보내면서, 히나를 향해 날아드는 검을 쳐내고 그 검을 보낸 이의 심장을 갈가리 찢어낼 바람의 화살을 보내면서. 중앙 계단도 아닌 서쪽 구석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서도 어둠에 잠긴 복잡한 영주성의 어디로 가야 귀빈실이 나오는지를 이미 잘 안다는 듯이 걸으면서.
"나는 거짓말 못 하니까. 언제 어느때 물어보든, 몇 번을 물어보든, 언제고 어느때고 몇 번이고 내가 늘 아니라고 대답해줄게."
- 끄덕끄덕.
보이지 않을 고갯짓으로 대답을 전했다.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기도 했고, 짐이 될까 걱정해 무리하지 않겠다는 말이기도 했고, 대체 아는 것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지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겠다는 의미의 고갯짓이기도 했다.
- 자박, 자박.
그것을 알았을지 알지 못했을지.
알 수 없을 칼리안이 등 뒤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히나의 손목을 다시 살짝 감아쥐고서 조금 더 빠르게 발을 놀렸다.
그렇게 이어진 둘의 발이 유난히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복도에 들어서게 됐다. 유난히 많은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는 그곳을 지나, 죽은 이들이 등을 보이고 서 있었던 듯한 거대한 문의 앞에 섰다.
- 달칵.
영주성 안 어느 곳에서도 란델과 시오나, 그리고 키리에를 찾지 못한 칼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서슴없이 그 문을 열었다.
- 쌔애액, 쌔액!
- 우웅! 휘이이익!
붉은 칼날이 몰아친다.
드센 바람이 방 안을 휘젓는다.
칼리안의 칼날이 지나친 자리에 혈선이 생기고 칼리안의 바람이 헤집고 간 자리에 너덜거리는 상처가 생긴다. 치유를 할 필요는 없겠으나 치유를 할 수도 없을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이들을, 히나가 말없이 지켜봤다.
- 우우웅······ 우웅······.
이미 죽은 이들과 죽어가는 이들을 지나쳐가며 방 안을 둘러보던 칼리안의 주변에서 바람이 다시 인다. 날서지 않은 시원한 바람이 다시 몰아친다.
칼리안의 눈이 다시 한 번 방 안을 살핀다. 자신이 만든 바람에 색이 있는 것처럼, 정신없이 불어대는 바람의 끄트머리가 눈에 보이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 뚝!
그러다 어느 순간 바람이 멎었다.
칼리안이 곧장 발을 옮겼다.
란델과 시오나와 키리에, 영주성 안과 밖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 이들이 일이 터지기 직전까지 머무르고 있었을 귀빈실 안. 그 안에 분명히 마련되어 있을 비밀통로에서 불어드는 바람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발을 옮겼다.
"혹시 좁은 곳 무서워 해, 히나?"
도리도리.
비로소 얼굴을 쳐다보고 물어오는 칼리안을 향해 히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 슈우우욱!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칼리안의 몸 속에서 이제까지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의 마력이 터져나왔다.
- 콰아아아앙!
폭음이 울린다.
바닥이 울리고 먼지구름이 인다.
찾을 시간 없는 비밀 통로의 버튼을 찾는 대신 반대편이 뻥 뚫려있을 벽을 부서뜨린 것이다.
다시 불어든 바람에 물러가는 돌가루와 먼지를 보던 히나가 칼리안의 손에서 제 손목을 빼냈다. 그러더니 빠르고 짧게 손을 움직여 보였다.
- 안, 무서워요.
좁은 곳을 무서워하느냐 물었지 폭음을 무서워하느냐 묻지는 않은 덜 세심한 칼리안을 보며, 히나가 비로소 말을 했다.
- 자상한 왕자님, 안 무서워요. 저는.
칼리안의 붉은 눈이 히나의 새까만 눈을 내려다봤다. 무섭지 않다 한 것이 폭음이 아니었음을 조금 늦게 깨달은 왕자의 입에 부드러운 웃음이 맺힌다.
"······ 다행이다."
짧은 대답을 전한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방금 만들어낸 거대한 구멍 속으로 발을 들였다.
히나에게 씌워 둔 실드를 계속 유지한 채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적을 대비해 계속하여 신경을 쏟으면서, 이제야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한 익숙한 기운에 반가움을 느끼면서.
- 우우웅······ 캉! 카가강!
푸른 빛.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반가운 빛의 오러가 언뜻언뜻 어둠을 밝히는 먼 곳을 쳐다보면서.
"그래. 다행이다."
키리에의 살기, 키리에의 오러. 비단 반가운 것이 그것들 뿐만은 아니라는 듯 정말로 반가워하는 목소리를 냈다.
멀리서부터 이미 짙게 풍겨나오는 제 하나 뿐인 검의 피 냄새를 맡은 까닭에.
"아직 안 죽었네. 무른 상추."
길고 긴 웃음을 지은 붉고 검은 짐승이 나긋나긋, 목울대를 울렸다. 실로 반갑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