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523화 (524/527)

제92장. 벌(1)

빛이 저물면 어둠이 와야 할진대.

오히려 더 밝아진 것만 같은 느낌에 히나가 잠시 눈을 찌푸렸다.

더운 열기가 얼굴로 확 끼쳐든다.

"이런 몰골을 보았나······."

낮게 혀를 찬 앨런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 말에 칼리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히나는 다시 천천히 눈을 뜨며 주변을 둘러봤다.

앨런의 말대로였다.

제대로 된 군대도, 마법사도 없는 곳에 들이닥친 제온의 가짜 오러가 벌여 둔 상황은 그야말로 몰골이었다. 잔혹하고 처참한 몰골이었다. 이곳 저곳에 정도를 알 수 없을 부상자들이 즐비했고 눈 닿는 곳마다 시신이 있었다.

싸움이 일었다는 내성 안으로 곧장 워프해 온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 ······ 자박.

히나가 한 발을 내딛었다.

어느새 맺힌 밝은 빛이 히나의 손 끝을 맴돈다.

그런 히나의 손목을 칼리안이 다시 잡았다.

"치료하라고 데려온 것 아니야. 히나."

부상자를 치료하기보다는 외면해오며 살았던 히나다. 냉정히 말한다면 어차피 어디에서나 싸움은 일고 싸움의 끝에선 누구든 죽게 마련이며 치유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이들을 다 살려야 할 의무까지 지니는 건 아님을 이미 잘 아는 히나다. 데블란을 치료하지 않겠노라 이야기하던 날에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말리는 것이었다. 부상자들을 보자마자 앞뒤 상황을 살필 겨를도 없이 곧바로 나설 히나가 아닌데 이곳에 온 이유도 잊은 채 움직이는 모습을 본 까닭이었다.

"여기도 치료사들 있어. 네가 필요해서 데려온 게 아니라 키리에 걱정할까봐 데리고 온 거야. 아무것도 안 해도 괜히 데려왔다 안 할 거니까 치료하고 싶으면 나중에 해. 그래도 돼."

키리에를 걱정하다 겁을 먹어서.

그래서 평소와 달리 행동하는 것을 우선 막았다.

- 툭툭.

히나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앨런이 칼리안을 쳐다보다 말했다.

"제가 어디까지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이를 불러냈다.

- 드미레아.

- 내성에 도달했다 합니다. 진입하라 할까요.

기다렸다는 듯한 답이 전해진다.

- 아니. 외부에서 봉쇄하라고. 명령을 바꿔줘.

- 알겠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영주성 너머를 살피듯 북쪽을 바라봤다.

안전한 곳을 찾아 워프했기에 주변이 조용할 뿐임을 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지금 이 순간에도 싸움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듯한 차분한 목소리가 앨런을 향했다.

"내성 북쪽에 많이들 모여있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저곳에 있는 파비안의 병력을 묶어주세요."

"알겠습니다."

"제온과 연관된 병력은 전부 없애주시면 됩니다, 마나실 후작."

"생포를 할까요."

"두 명만. 살려놔 주세요."

칼리안이든 앨런이든 상관 없이 누구 한 명이 나서도 홀로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하지요."

그런 일에 대해 앨런은 일부러 의견을 묻고 칼리안은 일부러 명령을 내렸다. 안전을 위협받는 형제를 구조하려 나선 3왕자로서, 발칸의 군단장이 아닌 후작 앨런 마나실에게. 발칸의 군단장이나 자신의 마법 스승을 부리는 일에 대해서는 칼리안이 충분한 책임을 지기 어려우니까.

걱정스런 얼굴로 잠시 히나를 쳐다본 앨런이 손을 움직였다.

- 따악!

경쾌한 소리가 든다.

그와 함께 앨런의 모습이 사라졌다.

- ······ 우웅.

내성을 침입한 제온을 마지막 한 놈까지 찾아내어 모조리 죽이는 일. 앨런이 아주 잘 할 수 있을 일을 그렇게 맡긴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이곳 어딘가에 있을 란델과 시오나 그리고 키리에를 찾는 일을 하기 전에 실드부터 하나 만들었다.

일부러 더 많이 만들어낸 잔바람을 가득 담은 실드가 히나를 감쌌다. 끊이지 않고 짓쳐드는 연기와 그 사이에 스민 피 냄새를 조금이라도 가렸다.

그 뒤에 조용히 눈을 내리 뜨고 주변을 살폈다.

시신과 부상자와 불타는 건물이 즐비한 곳의 한가운데에 선 채로, 함께 데려온 히나를 제 등 뒤에 둔 채로. 내성의 북쪽 방향에서 들려오기 시작하다 거짓말처럼 뚝 끊기는 비명소리를 귓가에 담으면서.

"나 무서워하면 안 돼, 히나."

말을 전했다.

- 우웅.

- 우우웅······.

붉은 칼날이 빛을 띄웠다. 어둠 속에 든 맹수들의 수많은 눈동자 같은 붉은 오러가 수도 없이 만들어진다. 허공에 떠오른다.

- 쌔애액!

- 쌔애애애액!

그리고 곧 일제히 날아가기 시작했다. 영주성 안에 숨어 밖을 살피던 놈들의 목을 향해, 그들의 심장을 향해.

* * *

안 하는 거다.

못 하는 게 아니라.

'베른.'

'네. 전하.'

'어제 잠시 아리안느를 보았다만.'

'어제 아리안느가 잠시도 맨정신이 아니었을 텐데요.'

'······ 그렇더구나.'

'제가 곱게 업어다 어머님의 별궁에서 몰래 잘 재웠는데 어떻게 보셨습니까.'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아.'

'그런데 아리안느가 처음 들어보는 말을 나에게 하더구나.'

'아리안느가 술김에 형님한테 욕했습니까? 아니 형님 뭘 잘못하셨기에.'

'······ 베른.'

'네. 전하.'

'도대체 그런 말을 누구한테 배워다 가르쳐 놓은 것이냐.'

'키리에요.'

- 카가강, 카앙!

- 캉! 카아앙!

'그 아이가 너를 보며 욕설을 입에 담을 리는 없을 것인데.'

'제 앞에서 다른 기사들을 보며 잘 담습니다. 술집에서 저를 보는 놈들한테도 잘 담습니다. 아, 한 번은 저한테도 했네요. 욕이 아팠는지 주먹이 아팠는지 알 수가 없던 날에.'

'그래서 그걸 아리안느에게.'

'칼로든 주먹으로든 입으로든, 뭐 하나로는 이기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장래에 왕비님이 될 지도 모를 분이신데요.'

'베른.'

'네. 형님.'

'······ 나가보거라.'

'알겠습니다, 전하.'

키리에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러했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었던 그 말을 베른이 배웠다. 기사들에게도 참 많은 험한 말을 배운 베른이지만 험한 말의 진정한 극치는 키리에에게 배웠다. 정말 열심히 차곡차곡 잘 배웠다.

그랬던 키리에였으니 지금이라 해서 다를 것이 있나. 똑같았다. 앞에 선 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신기하게도 칼리안이 먼저 잘 뱉어주는 경우가 태반인데다 본디 과묵하기까지 하여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 험한 말을 못 하지는 않았다.

베른, 그리고 칼리안을 만나기 전까지 히나와 함께 지냈던 곳이 세상의 그 어떤 말보다 험한 곳이었지 않나.

- 카가각, 캉!

그렇게나 험한 곳에서, 자랐다 하기보다는 살아남았다 해야 할 시간을 보낸 까닭에. 무엇으로든 지면 안 될 곳에서 살아남으며 버텨 온 까닭에.

"곱게 자란 세자 저하도 아니시고, 흔적도 안 남은 왕제도······ 아니시고. 그럼 누구실까."

"개새끼 조련사."

- 카강! 캉!

말보다 험한 살기가 서로를 향했다. 언젠가의 칼리안이 얼었다 녹은 상추 같다 했던 녹빛의 눈을 보며, 언제나의 칼리안이 완두콩 같다 하는 연두색의 눈을 빛냈다.

그러자 당장의 검을 겨루는 것보다 앞에 선 이가 누구인지를 더 궁금해하는 듯한 녹빛 눈의 남자, 라시드 브리센이 자신의 검을 길게 뻗었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그리고 플란츠의 모습을 대충대충 꾸며내며 앞에 서 있던 키리에를 향해 말과 검을 보냈다.

- 부웅······!

- 카가각!

어둠에 완전히 잠겨들어 형태는 물론이거니와 검 끝이 향한 방향조차 보이지 않는 잿빛의 검이 라시드를 향했다. 가볍게 한 팔을 휘둘러 키리에의 공격을 막아낸 라시드가 남은 한 팔을 바닥 쪽으로 뻗었다.

- 철컥!

- 쌔애액!

라시드의 소매 속에서 단검이 튀어나왔다. 잠시도 지체하지 않은 라시드가 그것을 휘둘렀다.

- 휘익!

이미 지나친 청력만으로도 그 움직임을 좇을 수 있었다. 때문에 재빨리 제 손을 비튼 키리에가 손목으로 치닫던 공격을 빗겨 피했다.

그러나 라시드의 손이 생각보다 더 빨랐다.

- ······ 서걱!

키리에의 손목에 채워진 두 개의 팔찌 중 한 개가 매끈하게 잘려나갔다.

- 툭!

- 주르륵······.

분홍빛의 작은 마석이 달린 팔찌. 히나와 연결된 통신용품이 변장용 팔찌를 대신해 끊어져 바닥에 닿는다. 짧게 베인 상처에서 떨어진 피가 팔찌를 적신다.

키리에의 외모가 바뀌지 않는 것을 눈치챈 라시드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제 검을 뒤로 물리며 한 발을 멀어졌다.

"아깝지만, 그래도 누구인지는 알겠군."

- 카앙!

그러더니 심장을 도려낼 것처럼 날아드는 키리에의 서늘한 검을 한 팔로 쳐내며 말을 이었다.

"3왕자의 자루걸레."

- ······ 우우웅!

- 카앙, 캉!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아야 할 어둠 속에서 붉게 피어오른 오러의 빛에 눈이 부신다. 정답이 맞는지를 확인하고 싶어하듯 설레하는 라시드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 설렘을 어떻게도 무시하고 넘길 수 없다 여긴 키리에가 작은 웃음을 지었다.

"처음 듣는 별명인데."

"칼리안 왕자가 도박장의 오물들을 손도 안 대고 닦아냈다 하기에 고민해서 직접 한 번 지어봤지. 앞으로도 넌 계속 비슷한 일을 하며 살게 될 텐데 그런 사실을 이제라도 배운다면 좋은 일 아닌가."

"헛고생을 했나."

이미 더 그럴싸한 별명이 있다.

충직한 따까리라고.

그런 설명을 해줄까 말까. 새 별명을 듣게 되어 한없이 너그러워진 마음에 짧은 고민을 하던 키리에가 시선을 내렸다. 예민하게 증폭된 시야 덕에 붉은 피 얼룩이 밴 팔찌가 보였다.

덕분에 마음이 조금 더 너그러워진다. 그러니 아무래도 설명을 해줄까 말까, 다시 한 번 고민을 하다가.

"왕자님의 손을 더럽힐 수는 없으니 쓰레기를 치우는 것이야 누가 하든 하면 될 일인데 무슨 그런 당연한 말을 입으로 싸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 ······ 툭.

조용히, 소리를 죽였다.

천천히 바닥을 밟으며 말했다.

"칼리안 왕자님께서 손에 쥔 유일한 검이라는 게 어떤 건지 네가 먼저 배웠으면 좋겠군. 보고 있기 딱해서."

청하지 않는 이에게 멋대로 전해졌을 땐 오로지 폭력일 수밖에 없는, 오지랖 넓은 조언과 칼날로 포장된 가르침.

그런 것을 라시드에게 돌려주기 시작했다.

- ······ 툭.

세상의 그림자를 모아도 그보다 어둡지 않을 잿빛의 검이 모습을 감춘다. 일렁이는 붉은 오러에 비춰지던 연두색의 눈동자가 눈앞에서 사라진다.

길고 좁은 비밀 통로의 안. 어디로도 마음 편히 검을 뻗기 어려울 곳에 선 키리에가 서슴없이 속도를 냈다.

- 카가강!

반가운 마음에 플란츠를 만나러 왔을 뿐이었던 라시드가 검을 치켜들었다. 긴 불똥이 다시 튀어오르고 두 검이 사납게 떨어지다 강하게 얽히기를 반복했다.

라시드의 검을 막아낸 키리에의 검이 사라졌다. 그것을 들고 있던 키리에의 모습 역시 자취를 감췄다. 그러자 라시드가 곧바로 제 등 뒤를 향해 검을 뻗어냈다.

- 휙!

- ······ 카아앙!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다시 한 번 불똥이 튄다.

어느 한 곳으로든 검을 잘못 놀리면 곧바로 벽에 막혀들어 빈틈이 생길 법한 좁은 곳이다. 그런 곳에서도 키리에는 망설임없이 몸을 움직이고 검을 뻗고 있었다.

그것이 칼리안과 같은 검술임을 라시드가 알아봤다. 칼리안의 검술을 고스란히 따라 쓰고 있다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인다. 검의 길에 오를 날이 근접한 것인지, 그렇게나 빠른 속도까지도 곧잘 따라하고 있었다.

- 우웅, 우우웅!

이런 사실을 확인한 라시드가 검을 다잡았다. 인사치레를 마쳤으니 소득없는 말 싸움을 이어나가진 않았다.

- 카앙, 카강!

- 카가각! 카아아앙!

라시드가 자신의 팔꿈치 쪽으로 검날이 오도록 검 손잡이를 거꾸로 잡았다. 그 뒤 키리에의 목을 향해 짧게 휘둘렀다.

상체를 뒤로 물리며 공격을 피한 키리에가 발을 뻗었다. 플란츠의 체형에 맞추느라 함께 줄어들게 된 팔과 다리 길이를 잊지 않고 가늠해가며 라시드의 명치를 걷어찼다.

- 퍼억!

둔탁한 타격음이 좁은 통로를 울린다.

무시할 수 없는 충격 때문에, 키리에의 어깨를 내리 그으려던 라시드의 단검이 허공을 벴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키리에가 검의 손잡이를 휘둘러 단검의 면을 후려쳤다.

- 타앙!

- 캉!

중심을 회복한 라시드가 단검을 고쳐쥐었다. 팔찌를 잘라 변장을 없애보고자 꺼내든 단검이었으나 그것을 버리지는 않았다. 비좁은 공간에서 긴 검을 계속 놀리기보다는 단검을 함께 쓰는 것이 훨씬 편하니까.

- 쉬이익!

라시드가 허리를 틀었다. 그리고 물이 흐르듯 유연한 움직임으로 키리에를 향해 훌쩍 다가섰다. 되돌아오는 잿빛 검을 제 검으로 올려치며 눈꼬리를 구부렸다.

등 뒤로 돌려 잡고 있던 단검을 똑바로 고쳐 쥔 라시드가, 그 짧은 칼날을 벼락같은 속도로 들어 올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휘둘렀다. 서로의 검이 맞닿은 까닭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키리에의 허벅지를 그대로 내리찍었다.

- ······ 콰직!

서늘한 소리가 들린다.

라시드의 웃음이 조금 짙게 변하고 키리에의 얼굴이 조금 굳는다.

- 툭, 툭.

- 투둑······ 툭.

떨어진 분홍 마석의 팔찌 위에 이전보다 조금 더 짙고 붉은 핏줄기가 떨어져 내린다.

- 카아아앙!

칼리안의 검술이 무서운 것은 어느 쪽에서 달려들지 모를 칼날에 있으니까. 어둡고 좁은 곳에서 이어지는 소리없는 공격을 상대하기가 어렵다면 발을 묶으면 될 일이니까.

그런 이유로 가해진 공격에 다리를 깊이 찔린 키리에가 팔을 휘둘렀다. 라시드의 긴 검에 막힌 자신의 검을 강하게 밀어친 뒤 곧바로 내리찍었다.

- 타앗!

라시드가 어깨를 틀며 공격을 피했다. 키리에가 그 틈을 타고 한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제 다리에 박힌 단검을 힘있게 쥐고 망설임없이 뽑아냈다.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다시 달려든 라시드가 그 검을 비틀어 빼내려 들 테니까.

- 촤아악!

- 후두두둑!

순간적인 비릿함이 좁은 통로를 가득 메운다.

"이런."

다소 아쉽다는 얼굴이 된 라시드가 사라진 단검을 대신해 두 손으로 검을 쥐었다. 그것을 본 키리에가 한 손에는 방금 뽑아든 단검을, 그리고 남은 한 손에는 자신의 잿빛 검을 잡았다. 한 발을 내딛었다.

- 욱씬!

칼날이 들었다 빠져나간 다리에서 날선 통증이 차올랐다. 참는 것을 익혀야 했던 에일라나 참는 법 외에는 몰라야 했던 칼리안과는 달랐던 까닭에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린 키리에가 제 자리에 멈추어 섰다.

"엉뚱한 사람에게 발이 묶여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으니. 빨리 끝내지."

- 타앗!

말을 건넨 라시드가 발을 박찼다.

- 쉬이익!

- 카앙, 캉! 카가가강!

속도를 잃은 키리에를 향해 자신의 검을 내뻗었다.

- 욱씬!

눈앞이 번뜩이는 통증이 다시 인다. 한 두 번 겪어 본 일은 아니었으나 도저히 익숙해질 길은 없을 그 감각에서 애써 시선을 뗀 키리에가 앞을 쳐다봤다. 허리를 숙였다. 날아드는 라시드의 검을 피했다.

- 카강!

다치지 않은 다리로 바닥을 디디며 몸을 틀었다. 다리와는 달리 멀쩡한 팔을 움직여 거듭 쇄도해오는 놈의 검을 막았다. 이제껏 두 손으로 잡고 있던 잿빛의 검을 한 손에 쥔 채 공격을 흘려보냈다.

- 휘익!

- 캉, 카아앙!

방향이 틀어진 것에도 상관없다는 듯 그대로 뻗어나온 검이 라시드의 목을 베어내려 했다. 손잡이를 들어 공격을 막아낸 라시드의 코앞으로 어느새 단검이 치달았다. 그것을 튕겨내고 나니 또 한 번 검을 비튼 키리에가 잿빛의 검을 내리찍었다. 그런 공격을 쳐내니 어느새 가까워진 키리에의 단검이 눈앞으로 짓쳐든다.

- 카앙, 카가가각!

비밀 통로의 벽에 부딪힌 키리에의 검이 잠시 멈춘 틈을 타 뒤로 물러선 라시드가 고개를 들었다. 이미 진작부터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에 키리에의 움직임을 새겼다.

- 카강!

- 캉, 카아앙!

발디딤이 달라졌다.

몸놀림이 달라졌다.

다리를 다친 것은 분명한데. 도대체.

- ······ 욱씬!

키리에가 이를 악물었다.

익숙하지 않다 한들 자주 겪어 보았던 일인 것은 맞았으니 한 번만 더 참아보기로 했다. 그 상태로 양 팔에 서로 달리 힘을 주었다.

그것을 보던 라시드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팔을 뻗는 각도가 바뀌고 검에 드는 무게의 중심이 옮겨졌다. 검을 쥔 태가 달라졌다. 잿빛 검에 실린 속도가 줄어들고 힘이 늘어났다. 단검에 실린 힘이 줄고 속도가 붙었다.

- 쌔액!

- 카아아앙!

칼리안의 검술을 배우고 익히고, 플란츠의 검술을 상대하며 고쳐주고. 어디를 보아도 제 것이 아닌 검을 그렇게 다루면서도 잊지 않고 수련해오던 것.

시나스타와 같은 무게를 한 손에 쥐고, 붉은 오러의 검과 같은 가벼움과 속도를 다른 한 손에 쥐고. 그렇게 양손에 하나씩을 쥐고도 무엇 하나 손해보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해오던 것.

그러나 나머지 한 쪽의 검을 란델에게 건네주게 되어, 이번에 써먹지는 못하게 될까봐 잠시 아쉬워했던 것.

- ······ 우웅······.

키리에의 검술.

그렇게 힘들게 익힌 제 검술을 거듭 새겨 넣듯, 키리에가 양손에 들린 검에 힘을 주었다.

- 우웅······.

- 우우웅!

각각 하나씩 나누어 쥔 잿빛의 검과 단검이 짙고 푸른 빛을 머금는다.

처음으로 만나게 된 상대를 향해 형형한 아가리를 벌린다. 눈을 떠 처음 만나게 된 먹잇감을 노려보듯 빛을 내뿜는다.

첫 상대를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 카아아아앙!

'칼리안이 유일하게 손에 쥔 검'이 비로소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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