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522화 (523/527)

제91장. 진주 말고 미스릴(5)

- 툭!

정신없이 써내려간 긴 보고서의 마지막 장이 서류 더미 위에 올려진다. 그렇게 전해진 것을 받아든 플란츠가, 첫 장의 첫 줄부터 마지막 장의 마지막 줄에 이르기까지 한치의 흐트러짐도 찾을 수 없는 정갈한 글씨의 나열을 쭉 훑어본 뒤 서명들을 했다.

물론 플란츠의 서명만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다. 아르센과 앨런의 확인도 필요하고 종내에는 르메인까지도 같은 것을 살펴 보게 되겠지만.

"이상 없을 겁니다."

"알아."

그래. 이상은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을 보고서에 파묻혀 살았던 것은 칼리안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왕제와 국왕의 호위 기사를 겸임하며 국왕 친위대를 이끌었다 한 데다 그 많은 새들을 직접 관리하는 와중에 시간을 남겨 스스로와 키리에의 검술을 신경쓰고 술까지 마셔야 했다는 베른이니.

그 어마어마한 경험이 어디 가겠나.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보다 낫군."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그리고 몇 시간째 놓지 못했던 펜을 내려놓으며 하얀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잊지 않았다는 것처럼 말했다.

"글씨 몇 자 썼다고 손을 푸시나. 소드마스터 씩이나 되는 분께서."

"와. 헤르츠 경이랑 스승님 만난다며 중간에 나가시더니 제가 혼자 서류 다 조작하기 전까지 안 나타나셨으면서,"

억울하다며 튀어나오던 말이 중간에 멈췄다. 답지 않은 완두콩의 저 말이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던 까닭이다.

"······ 아."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짧은 소리를 낸 칼리안이 눈을 돌렸다. 그리고 책상과 그 옆의 협탁에까지 수북이 쌓인 서류들을 쭉 둘러보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냈다.

"형님 설마 저 혼자 일하게 하려고 일부러 안 오셨던 건 아니겠죠."

"돌아오다 히나만 잠깐 만났는데. 귀걸이 돌려줘야 할 것 아냐."

"하필 지금요. 형님 동생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었는데, 형님은 우리 히나 만나서 세상이 얼마나 살만한 곳인지 새삼스레 깨닫고 계셨다고요."

"여전히 잘 짖으시고."

"아닙니다. 대체로 짖기는 하지만 히나에 대해서만은 늘 사람 말만 합니다."

플란츠가 할 말 잃은 얼굴을 해보이는데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과드릴게요, 그것도."

"뭐를."

"서운하셨던 것 같아서. 서류 몇 장이라고 한 말."

"······ 고집 강하신 내 아우님께서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뀌셨나."

진짜 서운했나보다. 살기도 내고 눈이랑 검으로 욕도 하더니 사과를 안 받아준다.

"생각이 바뀐 게 아니라 형님 칼 끝에 점점 힘이 빠져서 그랬습니다. 진심으로 한 말 아니에요."

"대련 중에 다른 생각을 안 해야 제대로 달려들 것 아냐. 돌기 직전인 게 보이는데, 그럼."

"그랬습니까, 또."

"그랬어. 또."

"주의할게요."

"해."

"네."

"고생했어. 글씨. 너도."

당연하지.

귀하디 귀한 손으로 그 많은 글씨를 썼는데.

"네."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말라빠진 희멀건 손에 들려 있던 가짜 보고서들을 도로 받아들며 말했다.

"그리고 오늘 다친 건 형님 탓 아니니 혹시라도 신경쓰지는 마시고요."

"알아. 안 써."

"네. 그래서 히나는 지금 어떻습니까. 안 괜찮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안 괜찮아. 내색은 안 해."

"······ 그렇겠죠. 형님은요."

"나도, 별로. 넌."

"저도요. 별로."

툭툭툭.

칼리안이 두터운 서류 뭉치를 책상 위에 몇 번 떨어뜨리며 모서리를 맞췄다. 그 모습을 보던 플란츠가 툭 던지듯 말했다.

"육포 있어."

만병통치약 있다고.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안 그래도 여쭤볼까 했는데. 오늘도 소금 든 겁니까."

"아니. 루시랑 안네 가져다 주라고 맡기려던 건데."

"진짜로 루시랑 안네 것을 저한테 줄 생각을 하십니까."

"기분이 별로라 하시니."

"그럼 저는 루시한테 더 미움 받는 대신 소금 안 든 육포 먹고 기분 풀고. 그럼 형님은요."

"파비안 일 끝나면 대련이나 다시 하지. 제대로."

"그래요. 알겠습니다."

"휘트린은."

"보고서 적느라 아직 못 만났습니다."

"팔찌 도로 줘. 내가 갈 테니까."

"위험합니다. 제가 만날 겁니다."

"아우님이 만나면 휘트린이 위험할 것 같은데. 계속 화 나 있잖아, 휘트린한테."

이런 대꾸에 잠시 생각을 해 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전 수련장에서 플란츠에게 돌려받았던 변장용 팔찌를 다시 건네며 말했다.

"또 감옥 문 활짝 열고 용감하게 앞장서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저 히나한테 한 약속 깨기 싫습니다. 휘트린 살려놔야 돼요."

"또 붙들릴 일 안 만들어."

"네. 어쨌든 그래도 설득하는 게 힘들지는 않을 겁니다. 어떻게든 왕궁에 가면 그레이 브리센을 만날 가능성이 생기는 일이니까요. 조심하는 것만 잊지 마십시오."

"알았어."

"아무튼 빨리 만나보고 싶네요."

"또 누구를. 휘트린은 내가 만난다는데."

"아뇨. 라시드 브리센이요."

"왜."

"파비안에 갈 때가 되니까 궁금증이 계속 들어서요. 왜 하필 파비안인지."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러자 칼리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라시드가 저를 거슬려 하는 것은 알겠습니다. 휘트린을 건드린 이유까지는 알겠는데 죽을 뻔하다 도망친 뒤에 갑자기 파비안으로 갔다 하는 게 찜찜하잖습니까."

"손을 뻗는 대상이 안 맞는단 소리인가."

"네. 곧바로 다시 휘트린으로 달려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원수를 못 갚으면 밀밭이라도 망쳐둬야 속이 시원하다 할 놈인 줄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참 너그럽게도 밀밭은 내버려두더니 본래부터 그렇게나 탐을 내오던 진주 말고 미스릴에 갑자기 눈독을 들이는 듯이 행동하고. 알다가도 모르겠어서요."

"나는 마지막에 만날 생각인가보지."

"글쎄요······ 아무튼 얼굴은 안 보이고 계속 신경이 쓰입니다. 형님을 고립시키려는 수를 놓는 건가 싶다가도 다른 이유가 있을까봐서요."

플란츠가 잠시 느릿하게 숨을 쉬다 입을 열었다.

"라시드 브리센이 아델리아를 이용해서 일부러 이쪽 시선을 파비안으로 돌린 건 아닌지 생각해 봤는데."

"네."

"차라리 아우님께서 세레이아나 왕궁으로 가는 건 어떠신지. 지금 아우님이 나한테서 떨어져서 혼자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 안할 테니까."

"그럼 형님은요."

"계획대로 파비안으로."

이 말을 들은 칼리안이 고민할 여지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생각을 해왔던 것처럼.

"네. 그럼 형님께서 다른 일행들을 데리고 파비안으로 가 계시면."

- 왕자님.

"제가······ 우선 세레이아에."

- 방금 로난시테 경에게 연락이 왔습니다만.

말을 멈춘 칼리안이 손목에 채워진 팔찌에 눈을 가져갔다. 본래에는 앨런과 연결되어 있던, 그러나 지금은 잠시 드미레아가 지니고 있게 된 통신용품이 빛을 내고 있었다.

- 가능한 빠르게 파비안으로 가 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 무슨 일인데, 드미레아.

- 내성이 봉쇄된 채로 내부에서 전투가 벌어진 듯 합니다. 지그프리드 기사들은 아직 거리가 멀어 성내 진입이 불가하고 힐 경 쪽의 상황도 확인이 안 된다 보고 받았습니다.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대답을 전했다.

- 지금 갈게. 고마워.

- 네.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 세레이아에. 갈까, 했는데."

"파비안에 일이 생겼나."

- 저쪽이 원하는대로 일단 움직여야 되겠습니다.

눈치 빠르게 전해진 질문에 대한 대답이 플란츠의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칼리안이 손에 들린 서류를 조용히 테이블에 내려놓는 동안 입으로는 다 전하지 못할 긴 말이 뭉텅 건네지고 있었다.

- 내성 안에서 싸움이 일고 시오나 쪽 상황 확인이 안된다 합니다. 저 말고 다른 인원은 여기 있는 죄수들과 증인부터 왕궁에 옮겨 둬야 움직일 수 있으니까 제가 먼저 파비안에 갈게요. 휘트린 설득하고 왕궁에 갈 인원들 옮긴 뒤에 파비안으로 와 주십시오.

"알았······."

대답하려던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문을 열고 뛰쳐나가는 칼리안의 뒷모습이 보인 까닭이다.

- 알았어.

- 네. 스승님 편에 제가 먼저 가고, 스승님이 돌아오시면 그때 움직여 주십시오. 그리고 저와 스승님을 불러낸 뒤에 휘트린을 다시 꺼내려는 계획일 수도 있으니까 스승님께서 다시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휘트린 만나지 말고 경계만 강화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상황 파악 후에 연락 다시 드릴 테니 헤르츠 경이나 세이렌 경이랑 같이 계셔 주세요.

- 그래.

- 조심히 계십시오.

- 너도.

- 네.

곧 플란츠가 서류를 들고 방을 나섰다. 지금 상황을 파란 머리 미친 동종업자에게 전해야 했으니까.

- 벌컥!

그 사이 어느새 앨런의 방 앞에 도달한 칼리안이 급한 손길로 문을 열었다.

"저 좀 도와주세요."

그리고 방 안에 발도 들이지 않은 채로, 칼리안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탓에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드는 대마법사를 보며 말했다.

"아버지."

앨런이 몸을 일으켰다.

대답은 필요치 않았다.

* * *

문을 다시 닫았나.

그냥 열어 두었나.

정신없이 달리는 와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 마음이 급해서 란델 왕자님의 방 문을 노크도 없이 열어버렸는데 그 문을 닫았나. 그냥 나왔나. 왕자의 방 안을 아무나 보게 하면 안 되는데. 발칸의 대원들밖에 없는 곳이라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인데.

- 오빠.

진주 같은 구슬 쪽으로 목소리를 잘못 보낸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대답이 없나보다, 듣지 못해 대답을 못 했나 보다, 억지로 만들어낸 안도감 속에 다시 제대로 키리에를 불렀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 오빠. 안 들려?

대답이 없다. 방 문을 닫았나. 그냥 열어둔 채 나왔나. 그러고 보니 구슬을 그냥 두고 왔는데 돌아가면 잊지 말고 돌려 받아야지. 란델 왕자님의 방 문을 닫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열어둔 것 같기도 하고. 돌아갈 때까지도 문이 아직 열려 있으면 다시 얼른 닫아 두고 구슬도 돌려받아야 되겠다.

- 오빠. 영주성에 있는 거야? 싸움이 난 거야?

오르테라는 그분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는데 계속 기다리고 계시면 어떡하지. 내가 잘못 전한 말을 듣고 놀라셨으면 어떡하지. 방 문을 열어뒀으면 어떡하지. 오빠가.

- 오빠.

대답을 안 하면. 계속 대답을 안 하면.

- ······ 대답 좀 해······.

어떡하지.

어떡하지.

"······ 나."

걱정을 미루려 다른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의 사이에 다시 걱정이 들고 그 걱정을 지워내려 또 다른 생각을 하고.

"히나. 나야."

란델의 방이 있는 곳에서 반대편 복도 끝까지. 고작 그만큼의 거리를 달리는 동안 그다지도 많은 걱정과 생각에 뒤얽혀 들리지 않던 소리가 한꺼번에 찾아들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 얘기 들었어. 지금 바로 갈 거야."

그 수많은 소리들의 물꼬를 트듯 손목을 살짝 감싸 잡은 이의 차분한 목소리가 그제야 들린다.

"키리에 괜찮아. 괜찮아. 내가 가잖아."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앨런의 방 앞, 이미 열린 문을 등지고 선 이가 보였다. 어느새 저도 모르게 내민 손을 붙든 이의 붉은 눈을 보게 됐다.

"같이 갈까? 그렇게 할래? 히나."

히나가 늘 지니고 있던 웃음은 커녕 울 겨를도 찾지 못한 얼굴로 새파랗게 질린 이유가 무엇일지, 앨런을 찾아 정신없이 달려온 이유가 무엇일지. 필요없는 질문 대신 그런 것을 물어 왔다. 안전하게 기다리라 말하지 않고 그리 물었다.

손을 놓은 칼리안이 히나의 눈을 들여다봤다. 급히 나오는 앨런을 보던 히나가 고개를 움직였다.

끄덕끄덕.

도리도리.

걱정이 된다. 당장 따라가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할 수 있을 만큼 걱정이 된다. 그렇지만 싸움도 못 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를 곳에 자꾸 가면 안 된다. 짐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혹시 누군가 다쳤다면. 오빠가 다쳤으면.

내가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 끄덕.

끄덕끄덕.

"그래. 같이 가자."

곧장 대답하는 칼리안의 뒤로 걸어와 같은 모습을 본 대마법사가 손가락을 튕겼다.

- 따악!

빛이 든다.

* * *

사람이 언제나 이성적일 수는 없는 일이다.

"함께 피하는 것이 낫겠느냐, 아니면 따로 움직이는 편이 낫겠느냐."

당황하는 날도 있고 때로는 어리석게 행동하거나 감정적으로 굴기도 하는 것이 사람이다. 누구나 다르지 않다.

"생각 같아서는 어차피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테니 무리하지 말고 벗어나라 하고 싶다만."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불을 꺼 둔 방 안에 선 채, 소란한 함성과 밤을 밝히며 치솟는 화염을 창 너머로 확인하면서도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는 사람. 스스로의 위치도 이성적으로 가늠할 줄 알고 지금의 상황 역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사람.

자신의 안위를 챙길 줄 알고 더 이상 검을 거꾸로 쥘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지만 썩 마음에 들 만큼 우선하고 있지도 않은, 다분히 왕족다운 것인지 조금도 왕족답지 않은 것인지 구별이 어려운 그런 사람.

란델을 향해 키리에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란델 왕자님."

"얘기하거라."

"우선 변장부터 없애십시오. 라시드 브리센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이가 저하입니다. 변장을 고집하다 그자의 표적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레이 브리센이 어떻게 하여 검의 길에 오르게 되었는지. 플란츠의 그런 질문에 대답을 해 줄 때까지만 해도 큰 이상이 없었다. 물론 서로에게 있어 매우 번거롭고 마뜩지 않은 대화였다는 문제는 있었으나 그 외에는 모두 괜찮았다.

그 뒤 키리에가 영주성 내를 숨어 다니며 라시드 브리센이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지에 대해 확인하고 시오나가 란델의 인근에서 호위를 하는 동안에도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파비안의 영주 대리인 바르지안이 두 번을 더 찾아와 내성을 봉쇄하고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는 상황을 알리고, 영주성의 기사들이 방문 밖을 둘러싸 호위를 시작할 무렵까지도 그랬다.

'저하. 습격입니다. 우선은 이곳을 지키겠습니다. 다만 만에 하나의 상황이 된다면, 비밀 통로는······.'

그리고 세 번째의 상황 보고. 바르지안으로부터 갑작스런 말이 전해졌다. 그가 일러주고 간 비밀통로가 있는 쪽을 잠시 바라보던 란델이 입을 열었다.

"라시드 브리센이 둘째를 노릴 테니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라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그자는 누구든 상관치 않을 것이다. 둘째는 그자와 사이가 나쁘고 나는 그자의 어미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 누구의 모습을 하든 검을 집어넣지는 않을 듯하구나. 물론 막내의 모습을 취하면 가장 빨리 그자의 검을 보게 될 것 같고."

"텐실의 공작가에서 란델 왕자님을 섣불리 해치려 하지는 않으리라고, 칼리안 왕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진짜 세르제인이 죽었으니 란델 왕자님과 손을 잡으려 들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안다. 그러나 확신하지 못할 일이다. 더욱이 왕족이, 아무리 형제라 하나 타인인 이의 얼굴을 하고 그 흉내를 냈음을 쉬이 알려서야 되겠느냐. 자칫하면 차후의 귀족들이 막내를 보며 제 앞에 선 이가 자신들의 왕이 맞을지 아닐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되는 일이 아니더냐."

아직은 조용한 복도, 그와 달리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창 밖을 바라보던 란델이 고요한 얼굴로 대답을 전했다.

"그렇게 되면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막내가 나를 향해 소란히 굴게 될 텐데 섣불리 책을 잡혀서야 되겠느냐. 그러니 우선은 이대로 머무르다 경각에 서면 그리 하마."

란델이 섣부르게 변장 사실을 알려 귀족들이 향후의 칼리안까지 믿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칼리안이 얼마나 시끄럽게 불평을 하겠느냐고. 농담을 담은 듯 하지만 키리에에게는 다 늙은 왕족들이 꺼낼 법한 말이라고밖에는 여겨지지 않는 대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왕자님."

지금이 바로 그 경각이라는 의심은 들지 않는 것인지. 이런 생각이 든 키리에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때.

- 덜컹!

"이제 곧 그 경각이다. 란델 왕자."

마치 키리에의 마음 속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한 말이 전해졌다. 잠시 밖을 살피겠다며 창 밖으로 사라졌던 시오나였다.

- ······ 절그럭.

드미레아가 입는 가벼운 검은 갑옷에서 사슬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얼굴을 대부분 가린 검은 복면 위로 드러난, 지그프리드 특유의 청회색 눈을 마주보던 키리에가 문 밖을 가리켜보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영주 대리인이 보낸 호위 기사들이 동요하는 기색은 없습니다. 경각이라면, 혹시 내성 안에 침입한 이들과 저들이 한 패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바르지안인가 하는 그 자는 지금 검을 들었다. 반역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한 시오나가 블론즈 색 곱슬머리를 풀었다가 다시 묶으며 빠른 말을 전했다.

"이곳의 영주 대리인이 왕세자를 좋아하진 않지만 어리석지도 않은 모양이다. 귀빈실 건물을 앞뒤로 둘러싸고, 밀려드는 놈들을 상대한다며 직접 나섰던데."

"외성 밖에 모여든다던 검은 갑옷의 병력이 벌써 이곳에 들이닥친 것이더냐."

"아니. 그들은 적이 아니라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인 것 같다. 지그프리드의 로난시테가 영주 대리인에게 서신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주워 들었다. 영주 대리인이 지그프리드를 믿고 지원을 부탁해도 좋을지, 아니면 내성 안에 들이닥친 놈들과 한 패로 여겨 함께 경계해야 할지를 고민하더군."

이렇게 말한 시오나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우직한 방패 지그프리드는 다른 영지와 왕세자의 목 따위를 탐낼 이유가 없으니 그대들의 왕세자를 살리고 싶으면 빨리 들여보내기나 하라 언질해주고 오는 길이다."

남몰래 조용히 정황을 확인하고 오겠다며 나간 뒤 영주 대리인 바르지안의 앞에 당당하게 나타나 신뢰를 종용하고 다시 남몰래 창문을 타고 돌아온 소드마스터가 뿌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방법이야 어찌됐건 잘못된 처신은 아니었다 여긴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창 밖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저들은 누구인가."

봉쇄된 내성 안에 들이닥친 놈들.

또 다른 검은 갑옷의 기사들을 가리켜 보이면서.

"제온이다. 붉은 오러를 쓰는 놈들이 있다."

"데이른의 병력인가."

"아마도."

"어떻게 이곳까지 그리 빠르게 도달한 것인지를 아느냐."

그러자 시오나가 긴 숨을 들이쉬다 키리에를 쳐다봤다. 그리고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어머니 나무가 정말 저들과 잡고 있던 손을 놓은 것이 맞나."

"······ 숲의 길이 열린 것 같습니까."

"그 외에는 다른 것이 선뜻 생각나지 않는다. 저들이 내성 안의 사냥터에서 쏟아져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 아니라면 그 백발의 마법사. 라시드 브리센을 데리고 공간이동을 했으니, 여러 명도 옮길 수 있다면 그 자의 소행일 수도 있다."

키리에가 비슷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려 보였다. 그리고 지금 생각난 또 하나의 가능성을 입에 담을까 고민하다 다시 닫았다. 그와 함께,

- 콰아아앙!

굉음이 울렸다.

높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흔들리며 창 밖에서 드는 불빛을 반사시켰다. 불길이 한층 더 치솟고 매캐한 연기가 들기 시작한다.

제온의 병력이 들이닥쳤고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란델이다. 왕세자의 행세를 하던 란델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진다. 물론 그 이상의 사고가 생긴다면 더더욱.

"란델 왕자님."

"그래."

"이유가 무엇이든 란델 왕자님께서 해를 입으시면 안 됩니다."

그것이 칼리안을 위함일지, 카이리스와 텐실의 관계를 위함일지, 어차피 잘 모르는 복잡한 것은 달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치유력은 있다지만 제대로 검을 쥘 줄도 모르는 놈을 일단은 살려 놔야 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만 했다.

창 밖의 붉음이 잠겨드는 연두색의 눈을 쳐다보던 키리에가 재빨리 손을 뻗었다.

- 달칵!

그리고 란델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빼앗았다. 고집불통 왕자에게 무어라 더 설명할 시간이 있지는 않은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다시 깃드는 금빛 머리카락과 짙푸른 눈을 보던 키리에가 그 팔찌를 제 손목에 찼다. 그리고 품 속에 두었던 마법사 주머니 속에서 길고 검은 로브를 꺼내 란델에게 건넸다. 그렇게 움직이는 키리에의 머리색이 조금씩 옅은 에메랄드 빛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얼굴을 모두 온전히 꾸며내지는 않았다. 어둠 속이었으니 대충대충, 대략적인 외모만 바뀐다면 모두가 속을 테니까.

"왕세자 저하께서는 검을 쓰십니다. 지금이라면 모를까 달리기라도 하신다면 누구에게든 곧장 거짓 외모임이 드러날 겁니다. 저하의 역할은 제가 하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 툭.

- 찰칵!

시오나의 목소리와 금속음이 함께 울렸다. 제 목걸이를 풀어낸 시오나가 그것을 란델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내 얼굴은 아는 이가 적다. 내가 쓰는 구부정한 검도 없으니 나를 알아볼 이들이 더 적어졌을 뿐더러 알아본다 한들 큰 문제가 생길 일도 없다. 그러니 적당히 다른 아무나의 모습으로 바꾸도록."

그렇다면 드미레아의 머리색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란델이 팔찌 대신 하게 된 목걸이의 힘을 움직였다. 적갈색의 짧은 생머리와 옅은 갈색 빛의 눈을 지닌 가장 익숙하던 모습, 자신의 시종 덴으로 외모를 바꾸었다. 검을 쓸 줄 아는 이들은 달리기부터 차이가 난다 하니 괜스레 드미레아의 모습을 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 테니까.

"너도, 둘째가 아닌 다른 이의 모습을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라시드 브리센은 저희에게 변장 용품이 있는 것을 압니다. 지금 노리는 것이 왕세자 저하가 맞다면 왕세자 저하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을 때 이곳의 하인이나 다른 기사들이 엉뚱하게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플란츠'가 비밀 통로를 향해 걸음을 옮기자 시오나가 말을 건넸다.

"휘트린의 별장에 마련된 비밀통로도 저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이라 하여 안전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그쪽으로 가도 괜찮겠나."

"알 겁니다. 그래도 제가 귀도 밝고 발도 빠르니 차라리 적당히 드러내며 도망치는 편이 낫습니다. 조심하여 움직일 테니 힐 경은 귀를 가리고 란델 왕자님과 따로이 빠져나가십시오.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이 있을 곳으로 곧 가겠습니다."

정말 괜찮겠느냐 물을 시간이 없었다.

- 콰앙, 콰아아앙!

또 한 번의 폭음이 일었다.

"조심하도록."

"네."

유리창이 드세게 흔들린다. 란델 대신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시오나가 창문을 열었다.

"막내가 아끼는 기사임을 안다. 주변을 잘 살피거라."

란델의 말이 전해진다.

키리에가 란델을 보며 고개를 살짝 숙인 사이, 시오나가 란델의 허리를 꽉 감아 쥐었다. 그리고 까마득히 낮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걱정 마라. 안 죽인다."

"지금 그런 걱정을 하겠느냐."

둘의 목소리.

- 타앗!

그리고 란델을 붙들어 잡은 시오나가 창 밖으로 몸을 날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 스르릉······.

어두운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망설임없이 그 속으로 발을 들인 키리에가 재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그리고 또 다른 팔찌의 힘을 움직였다.

- 히나.

- 오빠? 무슨 일 있어?

- 별 일 아니야. 괜찮으니까 놀라지 말고 들어. 파비안 내성에 제온이 들어왔어. 란델 왕자님과 힐 경과 떨어져서 피하는 중이야. 다들 아무 일 없고, 괜찮아. 그러니까 왕자님께 얘기만 전해줘. 혹시 오신다면 조심하셔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드려줘. 나 괜찮으니까 놀라지 말고, 울지 말고, 히나.

탁, 탁, 탁!

- 오빠 안 죽어. 나는 너 두고 어디 안 가. 그런 생각 이제 안 해.

짧게 이어지던 발 소리가 조금씩 줄어든다. 어둠이 내려앉듯 서서히 줄어든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 겁먹지 마, 히나. 괜찮아.

어둠 속에 그림자를 감추듯, 그림자 속에 어둠이 스미듯. 고요히 잠겨들어 사라져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 ······ 번뜩!

- 카아아앙!

사라졌던 소리가 긴 통로를 울린다. 빛 하나 들지 않은 어둠 속에 칼날이 일으킨 불똥이 인다.

"이거······ 온실 속에서 자라난 저하가 아니시군."

"그런 저하는 세상에 없어서."

"그럼. 세상에 이미 없는 왕제신가."

"글쎄. 세상에서 사라질 개새끼는 보이는군."

짙은 녹음과 신록을 담은 두 쌍의 눈이 칼날처럼 서로를 겨눴다.

- 카가강! 카아아아앙!

뒤엉킨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