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521화 (522/527)

제91장. 진주 말고 미스릴(4)

- 철컥!

일부러 더 크게 만들어낸 것이 분명한 소리가 수련장을 울렸다. 심기가 편치 않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듯 검을 집어넣은 플란츠가 앞을 쳐다봤다.

길게 난 상처에서 배어 나온 핏방울이 방울방울 흘러내린다.

공격을 막지도 쳐내지도 않고 서 있더니 목으로 치닫는 검을 고개만 틀어 그대로 받았다. 그나마 고개는 틀었으니 저 정도인 거다. 아니었다면 저 미친 동생 새끼의 귀하신 목을 내 손으로 싹뚝 잘라낼 뻔했다.

그런데 그 사달을 내고서는 기껏 꺼내놓는 말이, 부탁이란다.

"내 미친 아우님께서."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부탁을 이딴 식으로 하느냔 말이다.

"이제 나도 안 하는 짓으로 협박을 하시나."

검을 집어넣는 것보다 더 날카로운 듯한 낮은 목소리가 칼리안을 향했다.

- ······ 탁.

곧 플란츠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대로 서 있다가는 아무래도 시나스타를 또 꺼내들 것 같아서였다. 시나스타를 말아 쥔 손이 새하얗게 질렸든 말든, 갑작스런 상황에 땀이 배었든 말든.

칼리안의 붉은 눈이 새하얀 검과 시나스타의 검집을 몇 번씩 오가며 조용히 움직였다.

"아······ 죄송합니다. 의도한 게 아닙니다."

"그럼. 뭐냐고."

"에일라를 다시 만났을 때."

거뭇하게 퇴색된 꽃잎 같은 목소리가 전해진다.

"살려놓고 싶었습니다만. 에일라는 잘못을 했고, 제가 그것을 봤고. 아쉽다 한들 눈을 감아줄 수는 없어서 결국은 레니시타 위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휘트린 얘기를 하다 그날이 생각나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미안하다는 듯,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한동안 그 모습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말고. 진짜 이유."

"이유 맞습니다. 거짓말 아니고요."

"진짜, 이유."

"다른 이유도 말씀 드렸잖습니까. 휘트린을 레니시타 위에 세우지 말자는 게 아니라 이곳 말고 광장의 레니시타 위에 세워 달라는 겁니다. 당장 말고 조금만 미뤄달라, 부탁드리는 겁니다. 차라리 휘트린과 브리센 후작을 서로 만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테니,"

"칼리안."

"네."

"묻잖아."

"형님."

"왜."

"그냥. 동생 부탁 좀 들어주시면 안 됩니까."

"말부터 해."

"무엇을 더 말씀드립니까."

"칼리안."

"히나가 엄마 살려달래요."

가느다란 대답이 그제야 나온다.

"······ 그 말이 아득해서."

휘트린에게 직접 배울 것이 있으니 도와달라고.

혼자 오래도록 고민하다 만들어냈을 그런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내놓고 앞으로 더 강해질 제 능력을 인질삼아서, 휘트린을 살려놔 달라는 부탁을 했다. 손잡이 없는 칼날 같은 '엄마'라는 말을 굳이 찾아 꺼내들고 칼리안과 저를 함께 겨누듯 그런 말을 제 손 끝에 담았다.

"히나가."

"네. 히나가."

"뭐라고 했는데."

"휘트린이 쓰는 능력을 직접 배울 테니 도와달라 했습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무언가에 욕심을 내고 억지를 부린 적 없던 히나가 그렇게까지 해 가며 부탁을 했다. 그것에 그만 옷깃을 잡혔다. 발이 묶였다.

"휘트린이 무슨 잘못을 얼마나 했는지는 저도 당연히 잘 압니다. 형님을 공격한 일을 없던 것으로 셈한다 하더라도 다른 죄가 이미 많은 것도 압니다. 그것을 히나도 잘 알 텐데, 그런데도 살려놔 달라고 합니다."

그런 부탁을 히나가 했다.

그런데 그 부탁의 의미를 칼리안이 알아들었다.

그만 어쩔 수 없이 알아듣게 되고 말았다.

"······ 그래서."

"이제까지 스스로 잘 키워왔던 능력을 굳이 이번에는 휘트린의 도움을 받아야 되겠다 결심하게 되어서. 아니면 차라리 어머니 품이 그리웠어서, 그런 사람이어도 살아있었다니 됐다 여기기로 마음을 먹어서, 용서하고 이해하는 마음에 한 말이면 차라리 괜찮겠습니다만."

그것이 용서일까. 이해일까.

휘트린에게 있어 그것이, 그 휘트린이 제 손으로 제 유일성을 깨뜨리고 제 능력을 히나에게 직접 전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렇게 하나하나 가르쳐가면서 하루하루 자신의 쓸모를 줄여가는 한편 레니시타의 위에 오를 날을 스스로 앞당기게 만드는 일이.

그것이 휘트린에게 용서와 이해로 여겨질까.

절대로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히나가.

모를까.

"휘트린을 살려두고 다시 만나는 것이 어떤 의미가 될 줄을 정말 몰라서. 그래서 스승님도 헤르츠 경도 형님도 아닌 하필 저에게, 히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어도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저에게, 그런 부탁을 했을까······."

그 히나가.

정말 그랬을까.

······ 그럴 리가 없지.

"그랬으면 마나실 군단장이나 전하께 부탁했겠지. 아우님에게 아무 권한이 없는 걸 이미 잘 알 텐데."

"······ 네."

"그럼. 그런 생각인 걸 알면서 아우님까지 같은 부탁을 하셨나. 거절하지 못해서."

"맞는 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히나가 원하는대로 살려두자 말씀드리면서도 그것이 맞는 길인지 가늠이 되질 않습니다. 히나에게 위로보다는 유령이 될 것 같다는 생각만 듭니다."

히나와 헤어진 뒤 에일라를 만나고 얀을 보았어도 복잡해진 머릿속을 어찌하지 못해 뜬금없는 대련까지 시작하고, 그러다 결국은 사달을 낸 칼리안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용서하지 않을 시간이, 원망을 전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이대로 휘트린을 보내면 히나가 유령을 마주할 일은 없겠지만 대신 르니에리를 맡게 될 것 같아서요. 어차피 어느 쪽이든 속이 온전할 길이 없으면 차라리 원하는대로 하도록, 제 결정에 대한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도록, 히나는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어서요. 그래서 저도 같이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칼리안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길게 베인 목을 만져보다 바람이 멈춘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런 부탁을 드리려다 보니 눈앞이 깜깜해져서. 그래서 발이 막혔습니다. 검을 잠시 잊었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얘기를 했으면 됐잖아."

"히나가 아무래도 원망을 못 잊겠다는데. 제 속을 깎아서라도 저를 저버린 어미를 기어코 나락에 넣어야 되겠다는데. 못 견디겠어서 마음을 바꾸게 되더라도 당장은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그러니까 모르는 척 동의해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형님도 저처럼 같이 속아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그런 말을 어떻게 합니까."

대화도 원망도 아무것도 못 한 채로 르니에리에 파묻히게 만들어놓은 플란츠를 보면서, 히나에게는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대신 유령을 불러다 줄 각오를 했다는 말을.

"형님한테 그 말을 제가 어떻게 합니까."

막막하고 아득하여 그런 말을 어찌 하나.

"하고 있잖아."

"······ 그러니까. 묻지 말고 부탁 좀 들어달라고 했잖습니까. 저랑 히나만 나눠먹으면 될 신 귤인데요. 굳이 그걸 왜 형님께도 나눠드립니까."

퍽이나 감동적이고 환장하도록 답답한 말을 들은 플란츠의 입에 웃음이 그려졌다. 특별히 동종업자에게만 매일같이 보여주는 해맑은 웃음을 얼굴에 띄워 올리며 말했다.

"내 정혼자 일인데, 왜."

라고.

평소 같았으면 아무래도 저놈의 창창한 허리를 괜히 아껴뒀다는 둥 이참에 잘 두드려 놔야 하겠다는 둥 저 완두콩 때문에 인내심이 자랄 날이 없다는 둥 해 가며 만개한 꽃처럼 마주 웃어줬을 칼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 들어주시는 겁니까."

그리고 이렇게만 물었다.

시간이 흐른다.

가만히 선 채 생각을 이어나가던 플란츠가 눈을 들었다. 신록을 틔워내더니 세상의 빛에 그림자가 깃드는 것까지 다 끌어안아 지키겠다 말하는 붉음을 쳐다봤다.

"칼리안."

"네."

"그 부탁이 지극히 이기적인 내용인 건 아나."

"히나도 알면서 부탁했고 저 역시 알면서 수락한 겁니다. 알기 때문에 형님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 일로 왕궁에서 사고가 생기면 수습하기 힘들 텐데도."

"힘든 것이지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 일부러 전하께 위협이 될 사람을 데려다 놨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건."

"당연히, 압니다."

"지금 아우님이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도는 것도. 그러니까 사고가 터지면 그 누군가로 제일 먼저 지목될 사람이 아우님인 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럼. 탑에 가는 척 세크리티아로 돌아갈 각오라도 하신 건가."

"그런 각오 안 했습니다."

"그럼."

"탑에 안 갑니다. 집 놔두고 다른 곳으로 도망갈 생각도 없습니다."

"······ 그럼. 어떻게 책임질 건데."

"본래는 속 편하게 스승님 등에 업힐 생각이었습니다만······ 신 귤을 또 나눠가 주겠다 하시니."

칼리안이 손을 움직였다.

- 스르릉······.

- 철컥!

지나치게 손에 익어 더 낯선 느낌이 드는 순백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플란츠의 시나스타를 가리켜 보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님께 기사 서약 받겠습니다. 받아내서, 아르피아로 가겠습니다."

사람 좋고 무력은 적당하고 형제들과 우애 좋은 막내 왕자 말고, 왕위에 눈이 돌아 제 아비를 몰아내고 제 무력 앞에 형제를 무릎 꿇린 3왕자가 되겠노라고. 가짜라는 소문이든 무엇이든 앞길에 방해되는 것은 전부 다 물어 뜯을 맹수같은 폭군 노릇을 해보겠노라고.

느릿하게 두 눈을 감았다 뜬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느릿느릿, 나른한 목소리를 꺼내들었다.

"카밀론에서 개나 키우랬더니 아르피아 궁에 사는 짐승이 되겠다 하시는군."

"한참 자랄 때는 원래 장래희망도 자주 바뀝니다."

"그리 원대하신 포부에 내 무릎을 걸어두셨고."

"어쩌겠습니까."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형님 정혼자의 일인데."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 툭!

곧 칼리안에게 무언가 던져지듯 건네졌다. 이제껏 플란츠의 손목에 있던 물건, 슈린츠에서 체이스로 변장했던 대사막의 늑대가 지녔던 변장용 마법 물품이었다.

"휘트린한테 주고 와."

"네."

"아우님 것 내놔."

"네."

얌전히 대답한 칼리안이 제 손목의 팔찌를 풀었다.

본래 에일라의 물건인 칼리안의 팔찌를 휘트린에게 줄 수는 없으니 중간에 얻게 된 것을 넘기고 대신 에일라의 것을 쓰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제 팔찌를 플란츠에게 내민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과 헤르츠 경은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됐어. 내가 통보해."

"괜찮겠습니까."

"그러라고 있는 왕세자 자리 아니었나. 그래서 나한테 부탁한 줄 알았는데."

새빨간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쳐다보든지 말든지. 팔찌를 건네받은 뒤 마법사 주머니를 열어 시나스타를 집어넣는 플란츠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금발과 짙푸른 빛의 눈을 지닌 란델의 모습으로.

"나머지 증인들 입은 알아서 막아. 어차피 귀족들 앞에 증인들이 설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네. 막아 놓겠습니다. 협상을 하든 건너뛰고 협박만 하든."

"하고, 란델 형님 방으로 와."

"식사하시려고요."

"말고. 귀족들한테 보여줄 보고서 조작해야 할 것 아냐."

르메인에게는 사실을 알리겠으나 귀족들에게는 한 명이 여전히 살아있고 한 명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만들어 알려야 하지 않겠나.

프레이르를 산 사람으로, 휘트린은 없던 사람으로. '프레이르'를 단순한 증인으로, 이번 일의 범인은 오로지 라시드 브리센 뿐인 것으로. 그렇게 조작된 가짜 보고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 저벅, 저벅!

플란츠가 걸음을 옮겼다. 밤이 되기 전에 그 많은 서류의 내용을 다시 꾸미고 만들어내려면 시간이 촉박하다.

"그럼 보고서 조작하시는 일 적적하지 않게 제가 옆에서 잘 짖어드릴게요."

"너도 해. 일."

"······ 네에."

마지못한 대답이 전해진다.

헐겁게 해 둔 타이를 다시 조이는 플란츠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플란츠의 뒤를 따라 수련장을 나서며 입을 열었다.

"형님."

"왜."

"고맙습니다."

"뭐가."

"도와주신 거."

"반말."

"죄송합니다, 죽을 뻔한 거."

"······ 알았어."

"네."

칼리안의 주변에 청량한 마력이 인다.

상처에서 흐른 피가 지워져 사라진다.

서류 몇 장이라 했던 그것이 실제로 몇 장이나 될지. 매번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기던 서류 작업을 제대로 겪어보게 될 동생 놈을 위한, 마법 못 쓰는 완두콩의 클린이었다.

"아니 대체 누가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마법을 써주는지. 그것 참 매번 진짜 신기하네요."

"짖지 마."

"네에."

저벅저벅.

타박타박.

* * *

고맙다 말하지 못했다.

'그걸 휘트린에게 배웠으면 좋겠어?'

'네.'

'꼭. 그랬으면 좋겠어, 히나?'

'······ 네. 꼭.'

미안하다 하지도 못했다.

'그래. 도와줄게.'

- 달그락.

차곡차곡 정리한 옷가지를 마법사 가방에 넣은 뒤 방에서 나와, 히나가 쓰도록 마련되었던 작은 서재로 들어갔다. 그곳의 책상으로 걸어가 파기하지 않고 가져가야 할 몇몇 자료를 꼼꼼하게 챙겨 넣었다.

잠시 허리를 펴 짧은 숨을 내쉰 뒤 서재를 한 번 둘러보곤 다시 손을 움직였다. 칼리안이 선물했던 펜, 이곳에 있는 동안 읽으려 가져왔다가 결국 한 글자도 보지 못한 책, 새하얀 꽃 그림이 그려진 히나의 찻잔과 앨런이 주었던 찻물을 데우는 마법 물품, 민트 잎과 말린 딸기, 홍차 잎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가방에 집어넣는다.

'아.'

그렇게 다시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가 서랍 속에 넣었다가, 변덕을 부리듯 책상 위로 도로 올라오게 된 작은 유리병이 눈에 들어온 까닭이다.

휘트린이 만들었다 했던 물약. 에우리아가 전해주고 갔던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손을 내어 집어들고 가방 속에 넣었다. 그리고 또 한 번 허리를 편 뒤 이번에는 조금 긴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더 챙길 것이 없나.

어느새 완연해진 밤. 조금 전에 플란츠가 돌려주고 간 귀걸이를 괜스레 만져보며 까만 창 밖을 보던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 더 챙겨가야 할 물건이 없음을 확인한 것이다.

이제 곧 아르센이, 혹은 다른 발칸의 대원이 찾아와 출발을 알려줄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 똑똑.

물론 그 전에, 이곳에서 해야 할 마지막 일을 마치고서.

- ······ 달칵.

노크 소리가 들려온 뒤 조금 시간을 두고 문이 열렸다. 히나의 집무실에 들어서는 이들은 늘 그래왔던 일이다. 빼꼼히 문을 열고 히나를 확인한 발칸 대원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뒤에야 문을 조금 더 열고 누군가를 들여보냈다.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보아야 할 사람, 앞으로 이 휘트린 영지에 오래오래 머무르게 될 것이라 했던 사람. 탁한 금발 새로 은색 머리카락이 많이 섞이고 많이 말랐지만 자세는 곧고 목소리가 고른 사람이 인사를 올렸다.

"오르티에 로즈난이라고 합니다, 베른 백작님. 왕자님께서는 오르테라 불러 주십니다."

이곳에서 떠나기 전에 오르테의 건강을 한 번만 확인해주면 안되겠느냐는 칼리안의 부탁이 있었다.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라 선뜻 수락을 했다.

"차를 드릴까요, 치유사님?"

- 저는 괜찮아요. 이분 것만, 부탁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싱긋 웃은 마법사가 조심스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돌아와 오르테의 앞에 찻잔을, 히나의 앞에 물잔을 건네준 뒤 돌아갔다.

영주성의 하인들을 발칸이 머무는 곳까지 오지 못하도록 해 둔 까닭에 발칸의 말단 대원들이 차 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인데다 대부분 누구에게 차를 가져다 달라 말할 위인들이 아닌지라 다른 불만이 없다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 아마 맛은 없을 거예요. 그래도 열심히 내오는 차니까 혹시 이따가 다시 만나면 맛있다고 해주세요.

수첩에 글씨를 써내려간 히나가 그것을 오르테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검지손가락을 들어 쉿, 하는 제스쳐를 취해 보였다.

어쩐지 오르테가 긴장을 한 것 같아 건넨 말이었다. 노안 때문에 살짝 찡그린 눈으로 내용을 읽은 오르테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에 놓인 옅은 녹빛의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아닙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면서도 그냥 마주 웃어 준 히나가, 치유사의 로브에 달린 주머니에서 하얀 진주같은 구슬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오르테의 손에 쥐여 주었다.

- 듣기만 해주세요. 말은 평소 하시던대로 해주시면 돼요. 반대로 말을 전달하는 건 잘 안 되더라고요.

히나의 목소리가 오르테의 머릿속에 든다. 미리 이야기를 전해들었던지 손에 든 구슬을 한 번 꼭 쥐어 본 오르테가 입을 열었다.

"이것 참, 신기한 물건입니다."

- 마법사분들께서 만들어 주셨어요. 고마운 물건이에요.

"그렇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히나가 오르테를 쳐다봤다. 칼리안에게, 그리고 다른 여러 시종들에게 이야기를 들어왔던 사람을 찬찬히 살피다 말을 전했다.

- 긴장하셨나봐요.

"눈에 띄었습니까."

- 네. 조금요.

"왕자님이나 왕세자 저하를 뵐 때에도 이렇게 긴장이 되지는 않았는데, 긴장이 됩니다."

-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 무서운 사람 아니에요.

이 말에 오르테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히나의 목소리가 다시 전해졌다.

- 아픈 곳 없을 거예요. 손 주시면 제가 봐드릴게요.

끄덕끄덕.

제 속을 읽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나이 어린 치유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오르테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붙든 히나가 속을 살폈다.

황금빛의 부드러움이 인다.

따스한 기운이 몸 곳곳을 살피듯 맴돌았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머무르다 어느새 스미듯 사라진다.

- ······ 아. 다행이다.

변장을 한 것은 아닌지를 확인하느라 이미 멀리서 한 번을 보았으나 가까이서 이렇게 살피는 것은 처음이라서, 은연중에 함께 긴장했던 히나가 웃음을 보였다.

- 걱정 안하셔도 돼요. 앞으로도 왕자님이 오실 때 저도 같이 올게요. 오래오래 여기 계실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건강하다는 뜻이리라.

그제야 안도한 얼굴을 한 오르테가 사실 무슨 맛인 줄도 모르고 마셨던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히나의 말마따나 정말로 맛이 없음을 그제야 깨달은 오르테가 잔잔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왕자님의 곁에 좋은 분들이 많아 다행입니다."

- 저는 빼고요.

히나의 말이 들려왔다.

오르테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히나가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처음 본 사이에 그것을 물어도 되겠는지. 오르테가 제 기억 속의 휘트린과 꼭 닮은 얼굴의 어린 치유사를 보며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 벌떡!

이제껏 고요하던 히나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 죄송해요. 잠시만요.

더 급한 목소리가 전해진다.

그러더니 타다닥, 하고.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오르테가 손에 들린 구슬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리고 걱정스런 얼굴로 문 밖을 쳐다봤다.

- 왕자님 부르러 갈게. 조금만, 오빠. 금방 가달라고 부탁할게. 잠깐만 기다려, 오빠.

덕분에 이렇게, 귀걸이로 보내야 할 것을 다급한 마음에 잘못 건넨 히나의 말을 듣지 못했다.

재빨리 발을 옮긴 히나가 노크를 할 겨를도 없이 벌컥, 칼리안과 플란츠가 서류에 파묻혀 있다 했던 란델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연한 얼굴을 해 보였다.

텅 빈 방.

어느새 둘 모두 자리를 비운 텅 빈 방이 보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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