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520화 (521/527)

제91장. 진주 말고 미스릴(3)

잠시 들렀다며 찾아와서는 가질 않는다.

특별히 바쁠 일은 없었지만 짐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밤이 되면 카이리시스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게 된 까닭에 며칠새 풀어 두었던 옷가지며 수첩이며 자잘한 짐들이 적지 않았다.

때문에 특별하게 바쁜 것은 아니었지만 부지런히 움직이기는 해야 했다.

- 오랜만에 봐요.

하지만 히나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제서야 찾아온 것으로도 모자라 문 앞에서 두어 번 쯤의 깊은 숨을 쉰 뒤 조심스레 손을 움직이다 몇 번을 주저하고,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린 뒤에야 노크 소리를 냈을 사람을 앞에 두고 어떻게 바쁜 기색을 보이겠나. 그냥 조금 더 부지런하게 짐을 정리하면 될 일인 것을.

"나 오랜만이야?"

- 자상한 왕자님 말고, 왕자님 기분이, 좋아 보이는, 날이요. 기분 좋은 일, 있었어요?

"응. 좋은 일 있었어."

바스락, 바스락.

히나의 옆에 서서 말린 레몬과 생강을 빈 찻잔에 조금씩 담아내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력을 운용해 곁에 두었던 찬 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도록 만들었다.

물이 든 병을 들어 곧바로 찻잔에 부으려는 칼리안을 말리듯, 히나가 손을 움직였다.

- 아주 조금만, 이따가요.

"바로 넣는 게 아니야?"

- 레몬에서, 쓴 맛이, 올라와요.

"아······ 얀은 그럼 팔팔 끓는 물을 부어 오나 봐. 맨날 써. 가끔은 떫기도 하고 쓰면서 떫을 때도 많아. 진짜 신기하게 매번 맛도 달라."

물병을 잠시 내려놓으며 이런 말을 한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얀이 차를 우리는 솜씨에 대해 험담을 많이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맛없다는 말은 아니야. 그래도 맛있어. 너랑 스승님의 차 다음으로 맛있어."

이렇게 말을 하더니,

"아······ 오르테랑 너랑 스승님. 그 다음으로."

그새 한 명을 늘리는 것으로 정정하고는 배실배실 웃는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우리 히나가 내가 마실 차 따위를 우리느라 말을 못 해서야 쓰겠느냐며 자신이 직접 차를 준비해주겠다 나서더니, 말린 레몬과 생강을 얼만큼씩 넣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느 정도 온도의 물을 써야 하는지도 몰라 결국은 손이 더 많이 가게 하는 3왕자를 향해 웃어보인 히나가 손을 움직였다.

- 무슨 좋은 일인지, 알 것 같아요. 그 시종님, 만나신 거죠.

"응. 차도 마시고 얘기도 하고 그랬어, 방금 전에."

아프다는 이유로 갑작스레 왕궁에서 나가게 된 상급 시종의 이야기를 메를린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준비 없이 헤어진 뒤 안부는 물론이고 생사조차 알지 못했던 이가 건강히 지내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그리고 오랜만에 기분 좋은 건 아니야, 히나. 네 키가 자란 것 보고 좋아했었잖아. 네가 백작위를 받은 것도 좋고 키리에랑 드미레아가 오러를 낸 것도 좋아. 요즘 좋은 일 정말 많았어."

조르륵······!

적당히 식은 물을 찻잔에 부은 칼리안이 그것을 쟁반에 올려두려 했다. 그러자 히나가 손을 뻗어 작은 유리병을 가리킨 뒤 말했다.

- 왕자님은 세 스푼, 저는 다섯 스푼.

생강과 레몬이 든 차에 꿀을 빼먹어서야.

아차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꿀병을 열었다. 그리고 찻잔 하나에는 다섯 스푼의 꿀을 넣고 그 다음 찻잔에는 여덟 스푼의 꿀을 넣었다.

'저렇게 많이?'

히나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든다.

칼리안이 히나의 수어를 알아듣지 못한 까닭이 아님을 알아서였다. 꿀이 많이 들어간 찻잔이 히나의 것이면, 꿀이 많이 많이 들어간 나머지 차가 누구의 것일지도 뻔한 일이다.

- 좋은 일, 많았다 하셔서, 기분 좋으신 줄, 알았는데요.

칼리안의 차 취향을 안다.

히나도 당연히 배웠었다. 칼리안이 주로 무엇을 마시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찬 음료를 달라 해도 겨울에는 절대로 내어주지 말라는 것도, 따뜻한 음료를 마법으로 차게 식히지는 않는지 잘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도, 밀크티를 달라 할 때는 말린 귤을 한 두 조각 넣어 주면 아주 좋아한다는 것도 배웠다.

꿀을 넣는다면 대체로 세 스푼. 그런데 가끔씩 다섯 스푼, 또 때로는 열 스푼. 칼리안이 '꿀 많이 많이'를 주문할 때에는 목이 따가울 만큼 달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도 얀과 메를린에게 배웠었다.

"응. 그냥······ 단 게 먹고 싶어서."

그럴 때에는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지 묻지 말고 그냥, 차를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나면 된다고. 그리 들었었다.

- 그럼 저도, 세 스푼 더, 넣어주세요.

"그럴까?"

- 네. 저도, 꿀, 많이 많이.

그래, 하고 대답한 칼리안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차 두 잔을 조심스레 들고 테이블로 걸어와 내려놓은 뒤 자리에 앉았다.

방금 전 오르테를 만나 붉고 달고 향긋한 차를 이미 한 잔 가득 비우고 온 칼리안이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말갛고 알싸한 차에 꿀까지 잔뜩 넣었다. 그것을 들어올려 한 모금을 마셨다.

"와, 맛있다."

놀랍게도 내 새끼 코끼리의 차보다 맛이 좋다. 새끼 코끼리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말아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실소하고 있으려니 히나의 말이 눈에 들어온다.

- 좋은 일이, 많았는데, 안 좋은 일도, 있었어요?

아무 말 않고 넘어갈 생각 말라는 것처럼 히나가 다시 물었다. 그렇게 물어봐 줄 사람임을 알면서 찾아와 다디단 차까지 앞에 두었으니 당연스런 순서다.

그러니 히나에게 무어라 입을 열면 좋을까, 하다가.

"이번에 네 공로에 대해서는 치하하지 않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내 생각에는 그래."

이렇게 운을 뗐다.

"당연히 보상은 있을 거야. 전하께서 왕실 금고를 더 여시든 네 생일 선물을 주시든 보상은 있을 거야. 그런데 귀족들 앞에서 너를 칭찬하지는 말자고, 전하께 그렇게 말씀을 드릴까 해."

히나가 까만 눈을 들어 칼리안을 쳐다봤다.

한동안 그 얼굴을 마주보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대단했어. 고생 많이 한 것도 알고 덕분에 그 큰 싸움을 치르고도 죽은 놈들 없이 무사히 지나간 것도 알아. 정말 대단했어, 히나."

- 너무, 대단했어요?

"응. 눈에 띌 만큼 대단했어."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을 이긴 칼리안의 검술 실력을 숨기고, 귀족들의 앞에 선 르메인은 칼리안의 마법이 여전히 3서클에 머물러있어 걱정이다 거짓말을 하고, 제온과의 그 숱한 싸움에서 이긴 일들을 전부 다 비밀에 부치고.

그것과 같은 선상의 말인 것이다.

"이제는 숨길 때가 된 것 같아. 나는 그렇게 생각해. 되도록 네 생각도 묻고 네가 원하는대로 해주고 싶은데, 이 일에 대해서만은 내 생각대로 따라줬으면 해."

왕세자의 정혼자가 가진 고유하면서도 엄청난 능력을 카이리스의 귀족들이 시기하는 수준을 벗어난다. 고작 그 정도의 경계가 아니라 리베른과 텐실에서마저 히나의 가능성에 대해 궁금해할 만큼이 되었다. 다누가 신경을 쓸 만큼이 되었다.

호기심이었을 관심이 경악이 되고 경악이 두려움을 낳는다. 지나친 능력을 지닌 한 명의 무력없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곧, 칼을 부른다.

- 군단장님께서, 주신 차가, 엄청 많아졌어요. 그것을 놓을, 자리가, 없을 만큼, 많아졌어요.

히나가 답을 전해왔다.

- 집무실 테이블을, 더 크고, 좋은 것으로, 바꿔주세요. 전하께서 내려주신다 했던, 백작저에, 예쁜 새집들을, 놔 주세요.

그리 필요치 않던 요구조건을 만들어 건넸다. 이번 일에 대한 큰 치하를 받지 않는 대신으로 받을 수 있는 대가를 요구했다. 칼리안의 말대로 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또. 또 뭐가 가지고 싶어, 히나?"

아르피아 궁에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가구를 구해다 들여놔 줘야지. 크고 작은 새집들을 구해서 히나 대신 노래해줄 새들이 머무르게 해 줘야지.

안도감이 반, 미안함이 반. 무조건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에게 히나의 대답이 보였다.

- 제가 가진 치유력을, 병에 담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그래. 알아봐줄게. 나도 생각해보고 스승님께도 물어보고, 아리안느랑 베로니카와도 얘기를 해볼게. 꼭 알아봐줄게. 또 있으면 다 얘기 해. 뭐든 다 해줄게."

신이 났다. 공로를 숨긴다는 것을 핑계로 그동안 못해준 것을 싹 다 챙겨 줄 심산인가보다.

들꽃 위에 올려진 첫 빗방울처럼 웃은 히나가 손을 움직였다.

- 자상한 왕자님 때문에, 기분이 좋았던 일을, 얘기해주세요.

"······ 나 때문에?"

- 네. 자상한 왕자님 때문에요. 주변 사람 말고, 어릴 때의 왕자님도 말고, 지금의 자상한 왕자님 때문에, 기분 좋은 일이요.

생강을 넣고 레몬을 넣고 꿀을 아주 많이 넣은 찻잔에 붉은 눈이 가 닿았다. 무슨 질문을 받든 오래지않아 대답할 거리를 생각해내던 능력 좋은 머리에 알싸한 향이 드는 기분이라.

"글쎄······ 뭐가, 있을까."

키리에와 드미레아가 오러를 낸 일, 저 혼자 무럭무럭 자란 옥수수를 보게 된 일, 이제는 덜 시들게 된 완두콩에게 생굴을 얻어 먹은 일, 다시 함께 세레누스를 마실 수 있게 된 에일라에게 기사 서약을 받기로 한 일, 앨런에게 하대를 듣게 된 일, 팔을 다친 채로 술을 마신 것을 들킨 탓에 얀에게 혼이 난 일, 그 많은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다 입을 열었다.

"왕궁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

- 왕궁에요?

"응. 돌아가서 흰 장미가 핀 곳도 찾아가 보고, 그렇게 맛있다는 아스트리샤 거리의 딸기 아이스크림도 먹어보고, 아리안느에게 세뉴강도 구경시켜 주고, 호숫가에 앉아서 시간도 보내 보고."

- 그게 좋아요?

"좋아. 시간이 지나면 카밀론에도 가고, 개도 키우고. 더 오래 지나면 아르피아 궁에 내 책상을 들여놓고. 형님한테 다 미뤄놓고 스승님이랑 몰래 세크리티아로 놀러가서, 바닷가도 가고 체이스 국왕 전하와 루이즈님께 인사를 한 뒤에 텐실의 장미가 얼마나 잘 자랐나 참견도 하고. 이곳에 잠시 들러 차를 마시고 그렇게 다시 돌아가면 또 몰래 도망쳤다고 너랑 얀한테 혼이 나고. 그렇게 해보고 싶어. 그게 좋아, 히나."

끄덕끄덕.

히나의 고개가 움직인다.

- 정신 바짝 차리고, 지내야 되겠네요. 왕자님 도망갔다 오면, 혼내줘야 하니까.

"아······ 그렇겠다. 무르게 넘어가지 않도록 네가 늘 정신 바짝 차리고 지내야겠네, 히나 너도."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 좋은 얼굴로 한참을 웃었다.

칼리안의 웃음을 오래도록 지켜보던 히나가 긴 숨을 들이쉬었다.

- 그럼. 정신 바짝 차리고, 지낼 테니까.

그리고 이런 말을 건넸다.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 남은 붉은 시선이 히나에게 가 닿았다.

- 치유력을, 병에 담는 법, 치유력으로 저를, 지키는 법, 제가 아직 모르는, 제가 할 수 있는 더 많은 일. 혼자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못 하겠어서, 배우는 게 좋겠다고, 결정을 했어요. 그러니까, 배우게 해주세요.

이미 그렇게 하도록 돕겠노라 이야기를 했다. 때문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듣지 못한 칼리안이 히나를 쳐다봤다.

- 엄마, 에게.

"······ 히나."

잠시 멈춰있던 히나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 다른 곳에 알아보지 말고, 엄마한테요. 엄마가 제일, 잘, 알잖아요.

칼리안이 잠시 눈을 내리떴다. 가만히 손을 움직여 제가 만든 다디단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그것을 지켜보던 히나 역시도. 목이 따가울 만큼 단 차를 삼켰다.

"히나. 그 사람······ 휘트린은."

- 힘들면, 참지 않고, 그만둘게요. 떨어뜨려 달라고, 얘기할게요. 언제든지 말할게요.

상처가 되지 않도록.

흉이 지지 않도록.

톡, 톡, 톡.

칼리안의 손 끝이 무릎 위를 두드린다.

휘트린의 마지막 쓸모. 그것을 주도록 허락해도 괜찮을지. 자신에게 그것을 허락하고 거부할 권한이 있기는 할지. 고민을 했다.

톡.

톡, 톡.

고민을 했다.

* * *

폭풍전야임을 안다.

그래서 여유를 부린다. 두 번째 폭풍 속에 아직 발을 들이지 않은 상황이므로.

- 카아아앙!

잿빛의 시나스타 위로 새하얀 벼락이 내리꽂혔다. 덜컥 하고, 힘에 밀린 팔이 멋대로 내려갔다 제자리를 찾았으나 아랑곳않고 반대편 팔을 휘둘렀다.

- 카가각, 카앙!

잿빛의 검에 분명 막혀들었던 흰 빛의 검이 비틀렸다. 두 검이 맞닿은 부분을 그대로 둔 채 위아래의 방향을 바꾸었다. 잿빛 검을 그대로 받쳐둔 채로 손잡이를 위로, 칼날을 아래로, 그렇게 방향을 바꾸어 방금 휘둘러진 청은빛 검을 수월히 막아냈다.

- 덜컥!

- ······ 카아앙!

상대의 공격에 내 검이 맞았을 때에도, 멈춰있던 상대의 검에 내 검을 휘둘렀을 때에도, 반발력을 이기지 못해 덜컥 움직인 것은 플란츠의 팔이다. 공격을 보내고 막는 내내 시나스타를 들고 있는 플란츠의 팔만 휘청였다.

겉보기로는 그 힘의 차이가 절대로 이해되지 않을, 자신의 것에 비해 확연히 가는 근육 뿐인 동생 놈의 팔을 흘깃 쳐다본 플란츠가 몸을 움직였다. 이름없는 순백의 검에 똑같이 막혀든 두 자루의 시나스타를 위로 흩뿌리듯 떨쳐내며 허리를 틀었다.

- 휘이익!

- 캉, 카가강!

조금도 물러설 틈을 주질 않는다.

시나스타는 두 자루, 칼리안의 검은 분명 한 자루일진대. 둘로 나뉜 시나스타보다도 더 가벼운 새하얀 검이 대사막의 바람처럼 사방에서 몰아친다.

붉은 오러로 만든 검이 아니었다. 플란츠가 직접 건넸던 그 흰 빛의 검이었다. 검에 오러를 담아내지도 않았다. 그러니 빛무리가 만들어질 리가 없었음에도 흰 빛의 잔상이 눈앞을 어지럽힌다.

"평소보다 더 밀립니다."

날선 파열음 사이로 칼리안의 미성이 흘러나왔다. 그 뒤로 함께 이어진 검격을 둔탁하게 쳐낸 플란츠가 나지막이 답했다.

"바빴어."

"서류 몇 장에 서명한 정도로 칼을 쥘 힘이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 몇 장."

보는 이들이 없는 영주성 지하의 수련장.

"몇 장으로 보이셨나."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뭐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스스로를 지킬 여력이 없는 우리 첫째 형님께 호신술을 좀 가르쳐 드려야 되겠다' 하는 핑계를 댄 칼리안이 금발과 짙푸른 눈의 플란츠를 데리고 찾아온 것이 십오 분 전이다.

서류 검토를 다 마치자마자 홀랑홀랑 끌려온 완두콩이 연두색 눈으로 되돌아온 뒤 마법사 주머니 속에서 시나스타를 꺼내든 것이 십 분 전. 그것을 꺼내 손에 쥐기가 무섭게 새하얀 칼날의 벼락이 내리치기 시작한 것도 십 분 전이다. 가타부타 말도 없고 준비할 시간도 제대로 안 준 채로 싸움을 걸었다는 소리다. 언제나의 칼리안이 그러하듯이.

- 타앗!

- 카가각, 카아아앙!

술기운이 아니라서 욕을 안 한다.

대신 눈으로도 칼끝으로도 전해진 플란츠의 욕이 칼리안의 검을 거세게 쳐냈다. 칼리안의 말에 화가 좀 난 모양이다.

연병장에서 달리기를 마치고 빠져나온 뒤, 플란츠는 오후 내내 바삐 움직였다. 물론 플란츠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혼자 몇 바퀴를 더 달리고 돌아온 아르센도 마찬가지다.

발칸의 대원들 중 분대장 급의 마법사와 기사들, 히나와 드미레아, 에우리아, 에일라까지. 휘트린 영지의 일과 관련된 많은 이들이 작성해 건넨 수많은 보고서들을 아르센과 반씩 나누어 검토했다. 그리고 각자 검토한 서류를 서로 바꿔들고 다시 검토해 서명을 하거나 추가 자료를 첨부했다. 반려한 서류를 닥달해 바삐 다시 받아들고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그렇게 두 부군단장이 눈을 깜빡일 시간도 없이 서둘러가며 각자의 서명을 남긴 그 많은 서류들을 앨런에게 전달한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 캉, 카앙!

- 카아아앙!

그러니 이제 방으로 돌아가 잠시 쉬고 저녁식사를 한 뒤 앨런의 편에 파비안에 가면 되겠거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옛 시종과 대화하며 차를 마시고 히나와 이야기하며 차를 마시고 에일라와 함께 의견을 주고받으며 차를 마신 뒤 얀과 함께 휘트린의 정원을 거니는 것으로 오늘의 할 일을 마친 뒤 다짜고짜 대련을 시작한 내 동생 새끼가 저런 말을 하고 있으니 순한 플란츠라도 어떻게든 욕을 전할 수밖에.

- 탓!

가벼운 움직임으로 시나스타를 쳐낸 칼리안이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꽤 멀찍이 떨어진 곳에 발을 디딘 뒤 느긋한 목소리를 냈다.

"휘트린으로 향하던 길, 휘트린에 도착한 이후, 두 차례에 걸쳐 하피의 공격을 받았다. 라시드 브리센이 주범이고, 프레이르를 살해한 뒤 그의 행세를 하며 지냈던 엘프 휘트린이 공범이다. 도중에 이번 일에 지그프리드가 연관되었다는 조작된 증거가 있었으나 이는 이번 일을 기회로 라시드 브리센과 3왕자 칼리안, 그리고 지그프리드를 모두 연관지어 몰아내려 한 그레이 브리센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수많은 서류들의 가장 위에 올려질 최종 보고서.

아르센과 플란츠가 함께 작성해 앨런에게 올려지고 앨런이 수정하여 르메인에게 전달할, 이번 일의 요약 정리본 같은 그 보고서.

"때문에 휘트린을 체포하고 증거를 훔쳐 도망친 엘프를 추적하던 중에 인근 영지 데이른과 영지전이 발생했다. 이 역시 라시드 브리센의 소행으로, 공범 휘트린을 빼내고 영지성에 머무르던 왕족을 해치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그 안에 무어라 적혀 있을지 뻔하다는 듯, 보지도 않은 보고서의 내용을 줄줄 읊어내리는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3왕자와 공작가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키려 한 그레이 브리센의 후작위를 폐하고 왕족을 시해하려 한 라시드 브리센과 휘트린, 그 일을 묵인한 영주 대리인 나비아와 귀족들을 엄히 벌해달라. 이런 내용 아닙니까."

내용을 아는 것이야 당연하다.

이번 일을 가장 가까이서 추적해왔으니 어떻게 모르겠나.

물론 발칸과 제온의 싸움의 배후가 정말 라시드 브리센이 맞을지, 사실은 휘트린과 손을 잡고 있던 그레이 브리센이 휘트린을 구조하고자 벌인 일은 아니었을지. 이에 대한 의심이 드는 상황이 맞지만 휘트린은 그런 언급을 하지 않았고 그레이 브리센이 연관됐음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었다. 그곳에서 구조한 세 명의 증인 역시 라시드 브리센의 이름만 꺼내놨으니까.

덕분에 그레이 브리센에 대해서는 왕족과 공작의 명예훼손, 이 외에는 다른 죄를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것까지도 이미 다 파악했다는 듯한 칼리안이 슬쩍 웃었다.

"복잡할 것도 없는 일에 무슨 서류가 그리 많았다고 이런 엄살을 부리십니까. 형님."

······ 저 내 동생 새끼가.

- 철컥!

- 타앗!

플란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시나스타를 하나로 합친 뒤 발을 박찼다. 내 힘이 약해졌다 하시는데 하루 종일 찻물만 열심히 처마신 넌 얼마나 세졌는지 보자, 대충 이런 생각이 담겨 있으리라.

예전에는 안 긁어도 알아서 기를 쓰고 달려들더니. 요즘에는 꼭 저렇게 화를 돋워야 된다.

"아무리 대련해도 이기질 못해 그러시나······."

이렇게 중얼거린 칼리안이 검을 올려들었다.

무럭무럭 크시라고 화도 일으켜 드리고. 아무튼 나만한 동생이 또 어디 있나, 하는 마음으로.

- 카아아아앙!

칼날이 일으키는 소리부터 달라진다. 치고 들어오는 살기의 온도에도 차이가 난다.

번뜩이며 내리떨어지는 시나스타를 비틀어 흘려낸 칼리안이 플란츠 쪽으로 한 걸음을 더 들어섰다. 그리고 고개 옆으로 미끄러지는 시나스타의 검면을 자신의 검 손잡이로 밀어내듯 쳐낸 뒤 새하얀 자신의 칼날을 다시 휘둘렀다.

- 카강, 캉!

칼날의 길이보다 가까워진 칼리안과의 거리에, 제대로 공격을 하기 어려워진 플란츠가 한 걸음을 뒤로 옮겼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칼리안의 신형이 사라졌다.

예상했던 일이다.

- 휙!

- 부우웅!

급격히 거리를 좁히고 다시 급격히 방향을 바꾸고.

- 카아앙!

- ······ 철컥!

- 카가가강!

어느새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흰 빛의 검무리를, 어느새 분리해 긴 창처럼 맞붙여 잡은 시나스타를 재빨리 회전시키며 막아냈다. 우산 위에 떨어진 빗방울같은 불똥이 사방으로 비산했으나 그에 눈을 두지 않았다.

- 철컥!

- 캉, 카아아앙!

시나스타의 검은 날을 살짝 밟고 도약한 칼리안이 등 뒤에서 공격을 보내왔다. 허리를 숙임과 동시에 시나스타를 다시 분리한 플란츠가 검의 손잡이를 거꾸로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등 뒤를 향해 두 검을 찔러넣듯 내뻗었다.

허공을 베는 느낌이 든다.

이미 몸을 다시 띄운 것이리라.

몸을 일으키며 반바퀴 돌아선 플란츠의 청은빛 날에 새하얀 검이 막혀든다. 사륵, 하고. 뒤늦게 인 부드러운 바람에 길어진 머리가 잠시 떠올랐다 제자리를 찾았다.

- 카아앙!

교차시킨 시나스타의 검 한 가운데에 새하얗고 얇은 검이 맞닿았다. 드세게 건네진 공격을 막아냈으나 이번에는 팔이 밀리지 않았다.

칼리안의 눈이 둥근 웃음을 짓는다. 그제야 동생 놈이 일부러 화를 일으켰음을 안 플란츠가 눈을 가늘게 떴다.

"틀렸는데."

그리고 칼리안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힘겨루기가 이어지는 동안 짧은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무엇이 틀렸습니까."

"휘트린. 카이리시스로 안 보내."

오늘 밤에 처형할 생각이라는 뜻이다.

"······ 아까 얘기하신 그 일 때문에요."

"그래."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닙니까. 아직 휘트린이 모든 말을 다 하지 않았습니다."

"살려두면, 할 것 같나."

"장담 못할 일입니다."

"장담 못하니까. 없는 문제 더 만드는 것보단 나을 것 같은데."

"헤르츠 경이나 스승님도 같은 생각입니까."

"그래."

- 카강, 캉!

- 카아아앙!

흑백의 검이 순백의 검을 쳐냈다.

그러자 그것을 붙들어잡듯, 교차된 검이 채 벌어지기도 전에 그 위로 떨어져내린 칼리안의 검이 시나스타를 눌렀다.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뜻이다.

"증거가 없다면 만들어내게 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휘트린의 속내를 파악하고 싶다면 차라리 그레이 브리센을 만나게 하고 반응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다 더 큰 문제가 생기면."

- 캉! 카가강!

"어떻게 할 건데."

플란츠의 목에 검만 들이대지 않았어도 처형을 앞당기는 것에 모두가 동의할 일은 없었을 터다. 그렇게 강한 힘을 지닌 이가 그렇게 감정적으로 움직이는데 어떻게 마음을 놓고 살려 데려가고자 하겠나.

당연한 일이다.

"제 의견은, 반영 안 됩니까."

"미안."

- 카아아앙!

히나의 의견을 아직 입에 올리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미 처형에 대한 결정이 났다.

발칸의 일이다. 발칸이 칼리안의 것이라고는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칼리안에게는 결정권이 없다. 스스로 쥔 적이 없었으니 이제와 갑자기 생길 리가 만무하다.

플란츠가 한 발을 냈다.

더 늦어지기 전에 대련을 끝내기 위해서, 돌아가 휘트린의 일을 마무리짓고 칼리안과 식사를 하고.

파비안으로 떠나기 위해서.

- 쌔애애액!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칼리안을 향해 공격을 뻗었다. 그리하면 저 새하얀 검에 공격이 막혀들 테고, 그 뒤 검을 분리하여 다시 공격을 보내면······.

- 우뚝.

보내면.

- ······ 사락.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검을 든 손에 힘을 꽉 쥔 채로.

칼리안이 멈추어 섰다.

고개만 틀어 플란츠의 공격을 그냥 받았다. 막지도 쳐내지도 않았다.

"뭐야."

"그럼."

새하얀 목에 천천히, 실금이 생긴다.

"부탁드리면, 안 됩니까."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린다.

휘트린을 살려놔 달라고.

뚝.

뚝뚝.

시나스타에 베인 목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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