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장. 진주 말고 미스릴(2)
여유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다.
생각만 했다.
신경쓰지는 않았다.
- 휘트린에 홀로 남게 되었더냐.
- 아닙니다.
팔락!
- 허면. 소란이 싫어 귀를 닫아두었더냐.
- 아닙니다.
- 아니면.
팔락, 팔락!
- 내 곁에 어느새 모습을 감춘 마법사들이라도 보내두었더냐.
- 아닙니다.
······ 팔락!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어서 하필 나에게 말을 걸었느냐. 지금 파비안의 소식을 못 들어서 한가롭게 말이나 걸고 있느냐. 내가 지금 마음놓고 너랑 대화나 나눌 상황이 된다 생각되느냐.
곱게 말하는 법 같은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한 5층 사람의 말을 자동으로 해석해 전달하는 똑똑한 머리에도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 사람 많습니다. 소식 들었습니다. 급한 용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눈으로는 서류를 보고 손으로는 다음 장을 넘겨 서명을 하고 머릿속으로는 서류와 관련 없는 또 다른 생각을 하면서 란델에게 대답을 전했다.
다시 한 번, 팔락! 하고.
휘트린에서 확인된 정황들을 정리한 내용과 증거 목록이 적힌 서류가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 얘기하거라.
이미 적힌 아르센의 서명 옆에 자신의 서명을 남긴 플란츠가 목소리를 전했다.
- 오늘 칼리안의 옛 시종을 만났습니다. 누구인지 기억하십니까.
- 막내가 무용한 질문을 하는 법을 너에게 배웠구나.
- ······ 당연히 기억 못 하시겠지만. 오르테라는 이름을 지닌 칼리안의 시종이 있었습니다.
- 그래.
앨런에게 보내질 서류 더미 위에 방금 서명한 서류를 하나 더 올려 둔 플란츠가 새로운 종이 뭉치를 집어들었다.
카이리시스로 보낼 증인과 죄인들의 명단, 그들에 대한 세부 보고서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며 말을 전했다.
- 오늘 오르테를 만났습니다. 데이른 남작령의 지하 감옥에서 구조했습니다.
- 그러했더냐.
- 오르테가 엘프 휘트린을 알고 있었습니다.
- 그래.
- 그레이 브리센이 어떻게 검의 길에 올랐는지.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침묵이 전해진다.
그러니까 지금 플란츠는, '여기 숫자 1과 2가 있다. 그렇다면 카이리스의 세 번째 국왕 전하의 잠버릇은 무엇이었을지 추론하라.'는 식의 질문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암담해진 기분에도 신경쓰지 않을 체르밀 궁 4층 거주자에게 5층 사람이 대답했다.
- 제 조부의 무덤을 건드렸다 하지 않더냐.
무슨 사고 단계를 거쳐 그런 질문이 나왔는지 묻는 대신 대답만 전했다. 뭐가 되었든 이쪽 거주자나 저쪽 사람이나 그런 문제를 언급해가며 대화 시간을 늘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 그레이 브리센이 제 조부의 무덤을 파서 검의 길에 올랐다고. 형님께서는 이제껏 그 말을 믿으며 지내셨습니까.
쟤가 지금 싸우자는 건가.
이런 고민이 새록새록 생긴 덕에, 언제 내성 안으로 들이닥칠지 모를 놈들의 공격에 대비하느라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했던 란델이 연두색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그리고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린 뒤 말을 전했다.
- 한밤의 내성 안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곳이 묘지다.
- 압니다.
- 그곳을 우연히 찾은 행인들이 브리센 가의 무덤자리 주변에서 흙투성이 몰골의 그레이 브리센을 보았다. 그 조부의 무덤가가 어질러져 있었고.
- 네.
- 하여 그런 소문이 생겼다 들었다.
란델은 소식에 밝다.
로젤리타에 나선 칼리안이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는 물론이거니와 에반으로 하여금 레넌을 감금하게 하고 브리센 상단을 인수하게 되었던 경위까지 전부 다 파악하고 있던 사람이다.
아마도 지금은 모두 물러난 텐실의 치유사들이 전해오는 여러 소식들을 접했던 것이 아닐까, 칼리안이 그런 추측을 했었으나 정확하지는 않았다.
어찌됐건 에우리아의 정보망이 펼쳐지기 이전까지의 정보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란델이라는 뜻이다. 물론 칼리안도 베른의 기억을 통해 수많은 정보들을 알고 있기는 했으나 그 정보들은 최근부터 이후까지의 일에 한정되지 않나. 그레이가 검의 길에 올랐을 그 즈음의 정보는 아직 어린애였던 베른이 아닌 데블란이 관리했으니 말이다.
- 실제로 어떻게 해서 검의 길에 올랐는지는 모르십니까.
- 전해지지 않았다.
- 알겠습니다.
짧게 답한 플란츠가 곧바로 통신을 끊으려 했다.
더 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 여긴 것이다. 안부인사는 커녕 '브리센의 일을 네가 나에게 묻느냐'는 식의 비꼼 없이 대화가 오가게 된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 아닌가.
- 그것을 이제 와 왜 묻는 것이냐.
그런데 란델이 생소한 말을 했다.
'왜' 라는, 익숙하지 않은 말을 들은 플란츠가 서류에서 눈을 뗐다. 그리고 조금 긴 이야기를 전했다.
- 오르테가 말하기를······.
오르테와의 대화.
그가 휘트린을 알고 있더라는 사실, 그레이 브리센이 칼리안의 마법 재능을 확인해보려 했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가 실리케에게 전해져 그레이 브리센이 변경백령으로 내쳐지고 오르테가 왕궁을 나가게 되었던 이야기를 모두 함께 전했다.
- 오르테가 왕궁에서 나간 직후, 휘트린이 오르테를 찾아와 칼리안을 돕겠다는 말을 똑같이 했다 합니다. 마법 재능이 없다 하더라도 마법을 부릴 방법이 있다면서. 다행히 오르테가 이미 왕궁에서 나온 처지라 무산되었습니다만.
- 그래.
- 그래서. 칼리안을 도우려던 방법이 그 돌을 심장에 심는 것이었는지, 왜 도우려 했는지. 그것을 묻고자 휘트린을 다시 만났습니다. 형님의 심장에 그 돌을 넣은 것이 휘트린인지와 휘트린이 그레이 브리센과 적대하는 사이가 맞기는 한지에 대해서도 물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란델의 말이 곧바로 들려왔다.
- 여전하구나. 그것을 물어보면 그 엘프가 곧이곧대로 대답을 해주리라 여겼더냐.
- 사실을 떠 보고 반응을 살피는 것은 저도 할 줄 압니다.
- 그럼 반응을 살폈을 것 아니더냐. 나에게 거듭 묻는 이유가 무엇이냐.
- 못 들었습니다.
- 어째서.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창에 비쳐 보이는 자신의 목에서 상처가 다 사라진 것을 쳐다보며 말했다.
- 저를 공격한 뒤 당장 그레이 브리센을 죽이도록 왕궁으로 보내달라 시위했습니다.
- 인질 노릇을 했더냐.
- 잠시, 했습니다.
비웃는 소리나 비아냥거리는 말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 오늘 밤에 휘트린을 왕궁에 돌려보낸다 들었다만.
대신 전해진 침착한 말에 플란츠가 답을 전했다.
- 그래서 급히 여쭈는 겁니다. 그레이 브리센과 휘트린의 관계를 확신할 수 없어서 그럽니다.
- 휘트린이 그 당시 이미 돌을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면, 그레이 브리센을 검의 길에 올린 것이 휘트린이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냐.
- 가짜 오러였겠습니다만. 맞습니다.
그렇다면 휘트린이 정말로 그레이 브리센을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나.
서로 적대하는 척, 오래 전부터 은밀히 손을 잡고 있던 그레이 브리센을 돕기 위해 오늘같은 연극을 하며 왕궁에 가겠다 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레이 브리센이 칼리안의 별장에 그렇게 쉽게 증거를 만들어 둘 수 있던 이유도 설명이 되니까.
물론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또 다른 원이 있어 그레이를 직접 죽이겠다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됐건 섣불리 장담하기는 어려울 일이다.
- 내가 지닌 돌을 브리센 후작도 가졌다면 발칸의 치유사가 알아보았겠지.
- 히나는 브리센 후작의 심장을 살펴 본 일이 없습니다.
- 막내 역시 의심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내는 오러의 색을 막내가 알아보았을 것이 아니더냐.
- 몸 속에 담아 둔 오러가 보인다 했지 그레이 브리센이 오러를 내는 모습은 못 봤습니다.
그래. 칼리안은 그레이의 오러가 무슨 색이었는지 본 적 없었다.
보지도 않고 두드려 팼다.
- 보지 못했다 한들, 그레이 브리센의 허리가 부러졌고 간신히 치료를 받아 걷게 된 일을 모르느냐. 돌의 힘이 있었다면 그렇게 위험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테지.
- 그 힘을 잠시 없앨 수는 없습니까.
플란츠가 물었다.
- 당시 그레이 브리센은 제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수도로 오던 길이었습니다. 그러니 제 어머니에게든 에반에게든, 자신의 능력을 섣불리 드러내지 않고자 일시적으로 없애두고 왔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란델이 대답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대답을 하지 않았다.
-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팔락!
서류를 다시 넘겼다.
때를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휘트린에 대한 보고가 다음 장에 적혀 있었다.
- 만에 하나라도 그런 가능성이 있다면 휘트린을 수도로 보낼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처형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꿀 겁니다.
툭. 툭.
플란츠의 손가락이 보고서에 적힌 휘트린의 이름을 몇 번 건드렸다.
그 사이에도 란델로부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꽤 오래도록 전해지지 않다가,
- 고단하구나.
짧은 말이 돌아왔다.
- 고단하십니까.
- 그래.
그것이 플란츠에게는 맹세의 인에 묶여 답을 해줄 수 없다는 말로 들린다. 심장에 든 돌의 효과를 숨기거나 잠시 없앨 방법이 있다는 말로 들린다.
툭!
휘트린의 이름을 조금 더 세게 두드린 플란츠가 말했다.
- 참고하겠습니다.
- 그래.
대화가 일단락 되었다.
이대로 통신을 마치려던 플란츠가 문득 생각난 말을 전했다.
- 안 그래도 제가 약하다 오해받는 날이 많아 짜증나는 일 많습니다.
- 애석하구나.
주저없는 대답이 여지없이 돌아온다.
긴 숨을 들이쉰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 제 흉내 내고 계시는 것 잊지 마십시오. 그 오해, 형님이 나서서 늘려놓지 말아달라는 말씀입니다.
다치지 말라는 소리다.
그러자 잠시 침묵하던 란델의 대답이 들려왔다.
- 함부로 붙들리지 말거라. 왕족의 목숨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니.
너나 조심하라고.
* * *
체리 나무가 많은 곳에서 자랐다 했다.
체리를 좋아한다는 얀이 생각났지만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듣기만 했다.
이제서야 듣게 된 오르테의 이야기에 그렇게 비로소 귀를 기울인다. 이제라도 들어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체리꽃을 말려두었다가, 천둥이 치고 번개가 하늘을 밝히는 무서운 밤에 그것으로 차를 내어 마셨습니다. 좋지 않은 꿈을 꾸고 일어나거나 오랜 낮잠에 잠이 오지 않았던 밤에도 같은 차를 마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네, 왕자님. 제가 어렸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때로는 어머니가 챙겨주기도 했고 또 때로는 아버지가 건네주기도 했습니다."
쓴 맛이 조금 도는 그것을 마시고 나면 신기하게도 어느새 솔솔 잠에 빠져들었다고, 그리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도 준 거구나."
"그렇습니다."
"체르밀 궁으로 간 뒤로 내가 잠을 잘 못 잤었지."
"네. 그러셨습니다."
프레이야가 죽은 뒤 칼리안은 곧바로 체르밀 궁에 오지 않았다.
체르밀 궁의 왕자들은 개인 호위 기사를 두지 못하도록 정해져 있었지 않나. 아주 오래전 언젠가 왕자의 호위 기사가 다른 왕자들을 모두 살해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다던 그 때부터 말이다. 때문에 오로지 왕궁의 기사들만 체르밀 궁을 지킬 수 있었다. 물론 르메인의 명으로 지금은 사라지게 된 규율이지만 칼리안이 어렸을 때에는 그랬었다.
르메인은 그런 이유로 칼리안을 체르밀 궁에 보내지 않았다 했다. 체르밀 궁의 왕자는 개인 호위를 두지 못하지만 프레이야가 머무르던 베르시아 관은 그렇지 않았던 까닭이다. 물론 이제서야 오르테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 덕에 칼리안은 베르시아 관에서 따로이 호위를 받으며 지냈다. 란델이나 플란츠와 달리 뒷배가 없던 후궁의 아들이 소리소문 없이 죽지 않도록.
그러나 오래도록 머무르지는 못했다.
그것이 귀족들에게 국왕의 총애로 보여질까 우려한 실리케와 브리센의 '요청'이 계속된 탓에 결국은 체르밀 궁으로 오게 되었다.
"잠자리가 갑자기 달라져서."
"그렇겠지요. 많은 것이 달라졌으니 말입니다."
격자 창 사이로 스미던 햇살과 밤새 들려오던 분수 소리와 프레이야가 침대 맡에 매두었다던 작은 인형들을 대신해 눈부시고 적막하고 만져서는 안 될 것들 투성이인 체르밀 궁에서 살게 된 어린 왕자는 쉬이 잠에 들지 못했다.
왕자의 시종은 그때부터 말린 체리꽃으로 차를 냈다.
그렇게 하면, 단잠을 잘 수 있을까 하여서.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지만 그때에는 차의 쓴 맛을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꿀을 넣고, 그러다 말린 딸기를 넣고, 딸기 향은 좋아하셨지만 딸기 맛은 꺼리신 탓에 사과와 레몬을 더 넣어 보고, 그렇게 하여 드리게 되었습니다."
붉은 빛이 감도는 달고 향긋한 차를 내려다보던 오르테가 그리 말했다.
찻잔을 이미 반쯤 비운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보낸 뒤 오르테를 쳐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얀이 바이올린을 잘 켜."
"아······ 그것은 몰랐습니다."
"침대 커튼을 내리고, 침실 커튼도 내리고, 창문을 다 닫고. 그렇게 하고서도 손에 힘을 다 빼고서 조심조심 바이올린을 켜줬어."
체리꽃으로 차를 내어 왔던 시종이 체리꽃을 좋아하는 시종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작게 웃었다.
"그래서 잘 잤어. 네가 아파서 나갔다는 말에 놀라고 걱정했어도 잠을 못 자지는 않았어."
천천히, 오르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없었어도 괜찮았다는 말이 아니라 미안해 하는 것 같아서 하는 얘기야. 나는 잘 잤어."
"네, 왕자님.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응. 지금도 잘 자. 아침잠이 많아서 얀은 곤욕인 것 같지만. 나는 괜찮아."
"괜찮으시다니 다,"
오르테의 말이 멈췄다.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무슨 말을 하려다 멈췄을지 눈치를 챘다.
그 말을 왜 멈췄을지.
누구에게 그 말을 금지당했을지.
고민할 것도 없는 일이다.
"쓴 건······ 지금도 별로 안 좋아해. 커피도 싫어해."
그러나 오르테가 삼킨 말을 칼리안이라 해서 대신 꺼내놓을 수는 없는 일이라.
가만가만.
포근한 오리털 이불 위로 토닥토닥 내려앉던 시종의 커다란 손바닥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그런데 술은 좋아해."
오르테에게서 커다란 웃음 소리가 났다.
마치 이곳이 체르밀 궁인 것처럼.
지금의 체르밀 궁인 것처럼.
플란츠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처럼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이라 웃은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칼리안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아서 웃는 소리였다.
"하지만 왕자님."
"응."
칼리안의 말을 듣자마자 그렇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한참동안 멈추지 못하던 오르테가 짐짓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해 보이며 말했다.
"술을 드신 채로 말에 오르면 안 됩니다. 큰일납니다."
"응. 주의할게. 아마 레이븐도 싫어할 테고."
"그 검은 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봤어?"
"지난 밤에, 왕자님께서 보내셨다 했던 푸른 머리의 기사가 말을 들여놓을 때 함께 있었습니다. 검고 큰 말이 있기에 눈길이 갔는데 기사가 주의를 주었습니다. 왕자님의 말이지만 성미가 사나우니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입니다."
에일라가 이미 레이븐을 구경시켜 주었나보다.
"응. 레이븐이 나만 좋아해서."
"말을 무서워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탓에······ 많이 놀랐습니다."
달칵, 하고.
조금 더 많이 비워진 찻잔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긴 미소를 지었다.
"그치. 내가 많이 바뀌어서 그래. 많이 바뀌었어, 내가."
끄덕끄덕.
오르테가 동의하는 뜻을 보였다.
"네. 정말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행동거지며 얼굴 표정이며 눈빛이며, 말투까지.
떨어져 있던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여겼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키가 자라고 손가락이 길어지고 목소리에는 여유가 들고 눈에는 칼날이 섰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리 달라지는 동안 겁이 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달라진 칼리안을 보며 오르테는 걱정을 했다.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았다.
이곳에 온 뒤 처음으로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그 속에서 만난 아이를 바라보듯 생각하며 대답을 전했다.
"났지. 나만큼 겁 많은 사람이 겁을 왜 안 냈겠어."
"여전히 그러십니까······."
"겁 나. 그때도, 지금도. 아마도 언제까지고."
오르테가 잔잔히 웃었다.
"그나저나. 강아지를 키우게 되면 이름을 그리 짓겠다 하시더니 강아지를 못 기르셔서 말에게 그 이름을 주셨습니까."
멈칫.
달콤한 향기를 내는 붉은 차에 가 닿던 손가락이 아주 잠시 허공을 짚었다.
그러나 곧 다시 손을 움직인 칼리안이 찻잔을 들어올렸다. 오랜만에 맛보게 된 편안한 차를 마시며 새로 드는 기억을 삼켜냈다.
"······ 그랬지, 참. 어쩐지 머릿속에 맴돌더라니."
레이븐은 세크리티아의 옛 언어가 아니었다. 사람을 태우고 날아다닐 만큼 크다던, 이야기 속 까마귀를 칭하는 말이었다.
칼리안의 검은 말은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을 짓는 것에 소질도 없고 무언가의 이름을 그리 빨리 지어본 적도 없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름이 누구의 생각이었는지, 어린 시절의 칼리안에게 강아지를 기르는 것이 무슨 의미였을지.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된 까닭이다.
"그 이름을 말에다 붙였으니 강아지 이름은 내가 다시 생각해봐야 되겠네."
"강아지를 말씀이십니까."
"응. 강아지를 키울 거거든. 두 마리 쯤."
"체르밀 궁에서 강아지를요."
"아니."
살짝 웃은 칼리안이 말을 덧붙였다.
"체르밀 궁에는 이미 고양이가 살아."
"고양이가요?"
"응. 두 마리. 한 마리는 하얗고 짧은 털에 두 눈 색이 달라. 나보다 플란츠 형님을 더 좋아하고 울음소리가 예뻐. 손바닥 발바닥이 말랑말랑한데 나는 제대로 만져보질 못했어. 또 한 마리는 조금 긴 회색 털이야. 하얀 고양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데 멀리 뛰는 것도 서툴고 벌레를 잡는 것도 서툴고 가끔 층을 헷갈려서 내 방에 잘못 들어와선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그래도 그 애는 나한테도 손바닥 발바닥을 잘 내줘. 가끔 배도 만지게 해 주고. 그런데 털이 더 많이 빠지더라. 잘 빗어 줘야 하고 손도 더 많이 가. 그래도 예쁘지만."
상상도 못 했을 거다.
그 체르밀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오르테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을 거다. 때문에 적잖이 놀란 얼굴을 해 보이는 오르테에게 칼리안이 생글 웃으며 말했다.
"고양이들이 있어서 체르밀에서는 강아지 못 키워. 그래서 카밀론에서 기를 거야. 형님들께도 허락받았어."
놀라는 김에 조금 더 놀라라고.
큰 숨을 한 순간에 집어 삼킨 오르테가 긴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은 편안한 얼굴로 붉은 찻물이 조금 남은 찻잔을 내려다 봤다.
어린 시절의 내가 빨간색을 왜 좋아하게 되었을지, 새로 알게 된 사실이 다행히도 포근하여서. 그것만은 정말이지 다행한 일이라 여겨져서.
그리고 이미 결심했던 마음을 굳힌 뒤 오르테를 쳐다봤다.
"오르테."
마주하지 못했던 기간 만큼이나 길었던 이야기를 모두 마쳤으니 그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를 이제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네. 왕자님."
"여기는 내 어머니의 영지야."
"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휘트린이 다 망쳐놨고 그레이가 휘저어두고 라시드가 오물을 덮어뒀지만 좋은 곳이야. 바람이 좋아서,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에게는 좋은 곳이야. 꿈에서나 상상해봤던 꿈 같은 곳이야."
"······ 네. 좋은 곳입니다."
"응. 그래서 다시 좋은 곳으로 만들 거야. 이곳에서 머무르던 귀족들을 전부 다 수도로 올려 보내서 감옥에 가둬놓든 레니시타 위에 세워두든 할 거야. 내 어머니의 영지를 이대로 지저분하게 남겨놓고 모르는 척 지내기는 싫으니까."
"네, 왕자님.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네가 붙들려 있었던 데이른 남작령은 일단 왕실에 회수될 거야. 그 자리에 오기에 마땅한 사람을 다시 찾아서 그 쪽으로 보내기 전까지는."
오르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데이른 쪽도 밀밭이 그렇게 좋은데 고작 남작령이네. 아마도 실리케가 남작을 보낸 거겠지만. 이쪽 땅이 너무 커지면 안 되니까."
데이른 영지도 휘트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했다. 남작에게 주어지기에는 지나칠 만큼 좋은 곳이다.
아마도 실리케가 그리 했으리라. 휘트린에 큰 힘이 실리지 않도록 세력이 적은 남작을 보낸 것일 터였다.
그러나 이제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병력도 있고 성격도 좋고 똑똑하기도 한 사람을 데이른 남작령으로 보낼까 생각중이야."
"생각해두신 이가 있습니까."
"있어. 기사도 키우고 좋은 것도 먹으라고 돈을 줬더니 기사만 잘 키우고 자기는 호밀빵만 뜯어먹는 것 같던 백작."
데이른 역시 땅이 좋다.
그 많은 마력탄이 터졌음에도 영주성은 멀쩡하다 했다. 영주성이 그렇게 튼튼하고 밀밭은 너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알고 보니 미스릴 광산이 있었다는 파비안 영지가 있다.
기사들을 키워내기에 그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을까.
적어도 슈린츠에서 제온의 공격을 받아 스치듯이 몸을 피했던 그 소박한, 아니. 남루하기 짝이 없는 이름 뿐인 백작령보다는 훨씬 더 좋을 것이다.
그런 데이른에 백작 아이즌 에이프린을 보낼 생각이었다. 지금의 데이른을 또 하나의 에이프린 백작령으로 만들고, 왕자에게 기세 좋게 호밀 쿠키를 구워다 주었던 기사 연합의 대표 아이즌 에이프린을 밀밭 너른 데이른의 영주로 봉하겠다 마음 먹은 것이다.
백작 나부랭이면 그놈의 호밀은 그만 건드리고 이제 밀도 좀 처먹으라고. 그런 생각으로.
"전하께서 곤경에 처하셨을 때 선뜻 보호를 자처한데다 전하께서 카이리시스로 가실 수 있도록 군사를 내어 도운 공이 있으니까. 전하께서도 그 정도의 상은 충분히 내리실 수 있어."
끄덕끄덕.
얌전히 그 말을 듣던 오르테가 입을 열었다.
"헌데······ 그것을 왜 저 같은 사람에게까지 알려주십니까."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이제야 다시 만난 늙은 시종에게 왜 꺼내놓는지. 영문을 모르는 오르테가 조심스레 물었다.
살짝 웃은 칼리안이 기분 좋은 목소리를 냈다.
"휘트린 영주성이 많이 부서지기는 했지만 금방 고쳐줄게. 조금만 참으면 금방 다시 살만해질 거야."
오르테가 고개를 들었다.
생글생글 웃어 보인 칼리안이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지내, 오르테. 내 영지 대리인으로."
늙은 시종의 눈이 크게 벌어진다.
"왕자님. 그것은 과한 처사입니다."
"내 영지에 내가 내 맘대로 내 대리인을 세우겠다는데, 뭐 어때."
자신의 대리인을 위임하는 것에 대해서만은 전권을 지니고 있는 휘트린의 영주가 따뜻한 맛의 차를 가리켜 보였다.
"그렇게 해, 오르테."
들어가는 재료가 워낙 많아서, 새끼 코끼리가 이 차를 내어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손톱만큼도 생기질 않는다. 툭하면 부푼 보리빵이 되는 내 새끼 코끼리는 그런 것을 못하는 게 재주다. 암, 그렇고 말고.
"그래야 내가 마음 편히 놀러오지. 놀러와서 다시 이 차를 마시지."
그러니 어쩌겠나. 가끔 찾아와서 마셔야지.
오르테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칼리안의 앞에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오래오래 살겠습니다. 이곳에서 오래도록 지내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회중시계를 꺼냈다.
크라운을 다시 눌렀다.
- 딸깍.
- 틱, 톡, 틱, 톡.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