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518화 (519/527)

제91장. 진주 말고 미스릴(1)

세상의 모든 것에는 용도가 있다.

그리 배우며 살아왔고 그리 믿으며 살아왔다.

"왕자님께서 배우셨을 일반적인 검과는 많은 면이 다릅니다."

바빠진 영주 대리인을 배려해 오찬은 하지 않겠노라고. 파비안의 귀족들 없이 일행들끼리만 조촐하게 식사를 하겠노라고. 란델은 그렇게 말하며 번잡스런 식사 자리를 물렸다.

소란한 것이 싫었던 까닭도 있었고 식사 시간에까지 플란츠를 흉내낼 이유가 없다 여긴 탓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검을 쥘 때는 이렇게. 힘은······ 네. 지금 그 정도로 주십시오. 과하게 틀어 쥐면 검을 내고 되돌릴 때 검날에 베일 수 있습니다."

단검을 잡고 내뻗는 법을 속성으로 교육받을 시간이 필요했다는 이유가 컸다.

그 왕세자 성미가 얼마나 까탈스럽던지 저보다 신분 낮은 이와는 식사조차 쉬이 함께하지 않더라, 혹여 그런 소문이 날까 지레 신경을 쓰지는 않기로 했다.

결국 이곳은 파비안이고 지금 당장은 무엇을 해도 플란츠에 대한 좋은 소리가 나오지는 못할 테니까. 웃으면 웃는 대로, 참으면 참는 대로, 입을 다물면 입을 다무는 대로. 어떻게든 저들의 입맛에 꼭 맞을 날선 소문이 나지 않겠나.

"방향은 이쪽을 향해서, 아닙니다. 그렇게 공격을 하면."

- 툭.

- 챙강!

"보시다시피. 검을 놓치거나 상대에게 빼앗기기 쉽습니다."

"손이 빠르구나."

"실제로 마주하는 적의 손은 더 빠릅니다."

만약 가능했다면 굳이 이런 것을 알려 줄 필요도 없이 앨런이 당장 찾아와 자리를 지킬 터였다. 그런데 앨런은 오늘 밤 휘트린 영지의 일행들을 파비안에 데려다놓은 뒤 왕궁으로 갈 예정이라 했다.

엘프 휘트린의 앞에서야 호언장담을 했다지만 눈이 뒤집힌 라시드 브리센이 최악의 수를 선택할 수도 있음을 간과하지는 않았으니까. 때문에 만일을 대비해 앨런은 히나와 발칸의 부상자들, 그리고 죄인들과 증인들을 데리고 돌아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기본적인 내용이나마 란델에게 알려주는 중이었다. 다급한 상황이 된다면 앨런을 다시 불러올 수야 있겠지만 대비는 충분히 해 두어야 했으니까.

"들어가는 것만큼 빠져나오는 것도 빠른 것이 단검입니다. 날이 짧은 만큼 재빠르게, 상대가 목숨을 놓을 때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급소들을 가격하도록 만든 검입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으니 부러 설명 말거라."

그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 키리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상대의, 급소를. 가격하도록 만든 검입니다. 가장 급박한 경우에도 상대의 목숨을 빼앗아 스스로를 지키고자 쥐는 검입니다."

단검을 받자마자 보여준 란델의 반응 때문에 이러는 것이다. 세상의 그 누가 검이라는 물건을 보기가 무섭게 그 손잡이를 거꾸로 쥘 생각부터 한단 말인가.

왕족의 목숨이 참으로 비싼 값에 거래되기에 그리 하는 것이라 여기기에는, 글쎄. 체이스도 칼리안도 검을 보며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텐실의 죽은 왕세자 세르제인 역시 끝까지 도망치며 제 목숨을 연명했을지언정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음을 키리에도 알고 있다.

르메인, 그리고 실리케.

둘의 그림자가 깊고도 짙다.

"그래. 알았다는 이야기를 몇 번을 하느냐."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은 키리에가 란델을 쳐다봤다.

화를 내는 것이 아님을 이제 안다. 말 그대로 이미 다 알아들어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하다 여겨 그렇다 말할 뿐임을 며칠 새 겪어보아 알게 되었다. 란델이 쉬이 화를 내지 않는 사람임을, 깊은 물 속 같을 뿐 아니라 그 수면의 잔잔함까지 담고 있는 사람이었음을 이제야 그렇게 알아가고 있었다.

물론 그 고요한 수면에 드센 물결이 이는 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몇 번을 거듭 말씀드려도 플란츠 왕세자 저하께서는 쉬이 익숙해지지 않으셨습니다. 란델 왕자님께서도 그러하실까, 우려되어 그랬습니다."

"나를 올린 저울의 반대편에 기껍지 않은 추를 놓았구나."

이렇게 말이다.

자신을 플란츠와 비교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죄송합니다."

키리에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제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검의 용도를 떠올리다 왕자님 목숨의 용도를 가늠하신 것 같아 말이 길어졌습니다."

"네가 괜한 것에 신경을 두었다는 것은 가늠되지 않더냐."

"네. 가늠하지 않았습니다."

"네 상관을 많이 닮았구나. 옷자락이 넓은 것을 보니."

란델의 말마따나 오지랖 넓은 짓임을 안다. 칼리안을 만나기 전에는 좀처럼 하지 않던 짓이라는 것도 안다.

앞에 있는 놈에게 무슨 사정이 있든 기를 쓰고 이겨야만 사흘 치 호밀빵 값을 받을 수 있던 삶을 살았으니, 누군가의 생각을 살피는 일 같은 것을 해봤을 리가.

그럼에도 굳이 어울리지 않게 오지랖 넓은 짓을 하고 있었다. 다른 이도 아닌 란델에게.

"칼리안 왕자님을 닮은 것이 아니라 제 동생, 치유사 베른 경 때문입니다. 사람 목숨의 용도는 잘 사는 것 외에는 달리 없다고. 치유사 베른 경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검의 용도를 아신다면 다른 것의 용도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 신경을 쓰도록, 막내가 언질이라도 했더냐."

계속 보이는 란델의 저런 반응도 플란츠와 꼭 닮은 것을 알고는 있을지.

하마터면 왕족의 앞에서 드러내어 한숨을 내쉬는 실수를 할 뻔한 키리에가 곧장 대답했다.

"칼리안 왕자님은 다른 사람의 속내까지 신경써가며 곁을 지키는 다난한 일을 남에게 내맡길 분이 아닙니다."

"허면. 다른 이유가 있더냐."

"말씀드린 치유사 베른 경이 란델 왕자님과 같은 해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그저 히나가 생각나서 그랬다.

만약 란델이 히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다면, 덕분에 히나를 떠올리다 착잡한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저 단검을 제대로 쥘 생각을 했든 거꾸로 쥘 각오를 했든 신경쓰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을 터였다.

"내가 네 동생처럼 보이더냐."

누구에게도 동생인 적 없던 란델이 물었다.

그러자 키리에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아닙니다."

세상을 다 쥐여준다 해도 안 바꿀 우리 히나를 두고 누구를 어떻게 동생처럼 보겠나.

란델 만큼이나 늘 무표정한 막냇동생의 기사가 드물게 보인 표정이 '당신 같으면 당신 같은 사람을 동생처럼 생각할 수 있겠느냐'인 것에, 아주 잠시 침묵했던 란델이 고개를 돌렸다.

란델의 말에 반박하는 날도 없고 저렇게 불경한 얼굴로 쳐다보는 일도 없고 란델과 누군가를 비교하는 말을 입에 올리는 적은 더더욱 없는 덴만 겪어왔던 란델이다. 그런 란델이 여전히 한가득 피어나 있는 창가의 붉은 장미를 쳐다봤다.

그 꽃들을 바라보다가.

그 붉음을 그렇게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그래. 누군가의 동생처럼 여겨질 일은 없어야 할 테지."

이런 말을 했다.

그러자 키리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동생 노릇을 하기는 싫다는 의미일지, 애초부터 형제 같은 건 없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일지, 아니면. 동생이 아닌 형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라는 소리일지.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한 이해나 대답을 바라고 꺼낸 말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 것 같아서.

"앞으로는,"

- 똑똑.

때문에 불필요한 대답 대신 '앞으로는 왕자님의 안위를 좀 더 챙겼으면 좋겠다'라는 말로 일단락을 지으려던 키리에가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들려온 노크 소리 때문이다.

"들어와."

란델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나왔다.

- 스윽······ 툭!

혹시나 변장이 풀렸을까, 자신의 귀가 뾰족하게 돌아간 것은 아닐까. 소드마스터인 자신의 앞에서 이루어지던 키리에의 수업을 묵묵히 듣다 재빨리 손을 올려 제 귀를 확인한 시오나가 란델의 앞으로 와 섰다. 바닥에 떨어졌던 얇은 단검을 제 발로 밟아 가리면서.

란델이 시오나의 검은색 가죽 부츠에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 단검에서 시선을 뗐을 때. 귀빈실의 문이 열리며 이미 익숙한 얼굴이 안으로 들어섰다. 영주 대리인 바르지안이었다.

"플란츠 왕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나에게 독을 보낸 범인이 확인되었나."

인사를 다 받지도 않은 란델이 입을 열었다.

그 성격이 워낙 급해 5층 창문도 마구 깨버렸던 4층 거주자 흉내를 이렇게라도 잘 내봐야 하지 않겠나.

그래. 맞다.

란델의 성격이 깊고 잔잔한 물과 같다 했지 뒤끝이 없다 하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물론 지금의 저 빠른 반응 역시 뒤끝 때문인지, 아니면 예를 차리느라 아래로 내려간 바르지안의 시선이 단검을 밟아 감춘 시오나의 한쪽 발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지. 그것을 알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튀어나온 왕세자의 말에 서둘러 고개를 든 바르지안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예의 그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을 전했다.

"급히 전해드려야 할 소식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무슨 소식."

"파비안의 외성 밖에 군사들이 집결하고 있다 합니다."

"군사라니. 내가 영지전을 앞둔 시기에 걸음을 했나."

맥락을 모르고 단순한 영지전만 떠올리는 척.

그렇게 전해진 말에 바르지안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그리 위험한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저하를 모실 수 없었을 겁니다. 저희 측에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어느 영지의 군사들인데."

"인근의 영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검은 갑옷의 기사들이라는 것 외에는 정확한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정보가 부족하군."

"죄송합니다. 군사들이 발견된 곳부터 이곳까지 하루 이상의 거리가 있어 자세한 사실을 모두 다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서둘러 내성을 봉쇄하고 성 내외의 영지민들을 우선적으로 대피시키도록 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저하께서도 대비를 해두셔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무슨 대비."

란델이 물었다.

바르지안이 고개를 돌렸다.

드미레아 지그프리드와 키리에 베른. 무력이 출중하기로 이미 이름난 이들을 잠시 바라보다 답을 전했다.

"만에 하나 공격이 시작된다면, 저하의 안위를 보전하시는 것에 대비하여······."

"무슨 대비."

란델이 다시 물었다.

동생인지 4층 거주자인지 모를 아무튼 그 사람이 귀족들의 앞에서 내보이곤 하던 비웃음을 완벽하게 재현해 띄운 채로.

"백작이 나의 안위를 지켜내도록 어련히 알아서 준비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나까지 나서야 할 대비가 무엇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두 동행인의 덕을 볼 생각은 말고 나는 너희들이 알아서 보호하라는 말. 형식적인 호위만 보낼 생각이었음을 꿰뚫어본 듯한 그 말에 바르지안이 고개를 숙였다.

"실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해하겠다. 상황이 급박하다 하니."

"감사합니다, 저하."

바르지안이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왕세자에게 보내려 했던 호위 병력의 수를 더 늘려야되겠구나, 하고. 예정했던 병력 수를 조정하면서.

"저하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엇 때문에 내 안위를 걱정하겠나. 내가 형님의 영지에서 몸이 상했다는 소식이라도 알려진다면 전하의 심려가 적지 않을 것이라, 그것을 걱정할 뿐인데."

"······ 네. 전하께서 심려하실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성 안으로는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철저히 대비하겠습니다."

"그리하도록."

"네. 저하."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인 바르지안이 밖으로 나갔다. 그것을 지켜보던 란델의 연두색 눈이 잠시 어두운 물 속처럼 가라앉았다.

장담한대로 내성 안에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될지, 아니면 안에서부터 활짝 열린 내성 안으로 누구든 발을 들일 수 있게 될지. 아직은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 * *

걱정들이 많다.

"부군단장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몇 걸음을 뒤쳐진 마법사들을 대신해 곁으로 온 기사들의 것이었다.

이미 꽤 오랜 시간을 달렸음에도 호흡이 크게 흐트러지지 않은 목소리에, 달리기를 멈추기까지 아직 한참 멀었음을 깨달은 플란츠가 짧게 답했다.

"왜."

낯선 목소리와 짙푸른 눈.

평소 보아 왔던 연두색과는 전혀 다른 빛의 눈초리에 잠시 흠칫하던 기사가 입을 열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발을 맞춰 달리는 속도를 계속 유지한 채였다.

"저희가 알아서 달리겠습니다. 들어가서 쉬십시오."

"왜."

"크게 놀라셨을 것 아닙니까. 저희가 잘못한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부군단장님께서 이런 날까지 이렇게 같이 달려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벌 받고 가겠습니다."

플란츠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칼리안은 플란츠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랬으니 벌을 건네는 말을 들은 이도 플란츠 외에는 없었을 수밖에.

그 덕에 대원들이 제대로 된 사정도 모르고 저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거다.

"내가······."

내가 벌을 주려고 같이 뛰는 게 아니라 나도 같이 벌을 받는 중이라고. 그렇게 말하려던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제 살기도 다 갈무리하지 못하던 놈이, 그 와중에 아무 생각없이 굳이 신경써서 목소리를 낮춰가며 쓴 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다.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검을 가르치는 입장이니 플란츠가 검을 놓친 일에 대해 칼리안이 주의를 주는 것이 마땅함을 다들 알고 있을 텐데도. 그럼에도 명분 좋게 앨런의 이름을 팔아 벌을 건넨 것도 모자라 다른 이들에게는 그런 목소리마저 감춰가면서.

발칸 대원들의 앞에서 아무도 모르게 플란츠의 무책임함을 꼬집었던 오래전 언젠가처럼 말이다.

"······ 하."

제 놈이 무슨 입장이건.

플란츠가 무슨 잘못을 했건.

어찌됐건 플란츠는 칼리안의 형인 왕세자이자 발칸의 부군단장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겠지.

"나도 잘 한 것 없어."

"하지만 부군단장님. 상처도 다 아물지 않았는데······."

"뛰기나 해."

"네, 부군단장님."

아무튼 어찌나 생각이 깊으신지.

또 이렇게 쓸데없이 세심한 동생 덕에 결국 이런 날에조차 솔선수범하는 좋은 부군단장으로 탈바꿈된 플란츠가 묵묵히 발을 냈다.

칼리안의 심기를 살피는 것에는 기가 막힐 정도로 기민해서, 둘 사이의 대화 한 자락을 듣지 않고도 눈치 빠르게 사태를 파악해 잽싸게 따라나와서는 딱 세 바퀴를 달린 뒤 죽겠다며 드러누워 있는 놈. 솔선수범은 커녕 달리는 데 방해만 되는, 원수만도 못한 파란 머리의 저 동종업자를 꾹 밟고 지나가고 싶다는 눈빛을 조금도 숨기지 않으면서.

"······ 이를까."

"네? 잘 못 들었습니다."

"아니야. 뛰라고."

"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내 동생 놈에게 그동안 하고 싶어서 꾹꾹 눌러뒀다가 결국 못한 말을 술김에 다 해버린 것 같기는 한데, 나중에 또 술취할 일이 생기면 저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아우님의 앞에서나 성실하고 능력있는 부군단장이지 내 앞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을 좀 해줘야 하나.

- 탁탁탁!

플란츠의 발이 계속 바삐 움직였다. 해야 할 말 목록에 새로운 희망사항을 넣을지 말지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면서.

곧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반 바퀴 가까이 뒤쳐진 마법사들이 보인다.

아무리 용병 생활을 했다 하나 제 발로 뛰어다닐 일이 기사만큼 많을 수는 없는 것이 마법사다. 걷거나 뛸 수 있을 곳에서는 말을 타면 될 일이고 말을 못 탈 곳이라면 사람이 뛸 수도 없으니 말이다. 말을 타는 것 역시 힘이 많이 드는 일임을 잘 알지만 제 발로 뛰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니까.

그래도 마법사들이 기사들보다 한참을 더 뒤쳐졌던 발칸의 초창기에 비해서는 확연히 좋아진 실력들임을 안다. 때문에 속도를 좀 높이라 채근하는 대신 손만 들어올린 플란츠가, 마법사들을 향해 제 앞섶을 푸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 거추장스러운 로브 좀 벗으라는 뜻이었다.

"그냥 걸치고 달려도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멀리서 플란츠의 모습을 본 마법사 둘이 결연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나 플란츠는 넘어가지 않았다.

"풀고. 달려."

"······ 네."

결국 두 마법사는 티나지 않을 한숨을 쉬며 로브를 벗었다. 길가에 나뒹굴다 잠깐 멈춰 선 마른 잡초처럼 널브러져 있던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그것을 보며 피식 피식 웃었다.

옷이 걸리적거리는 것을 핑계로 한 바퀴 쯤이라도 덜 돌아보려는 심산임을 알아본 것이 비단 플란츠만은 아니었으니까.

"꼼수 부리지 말고 뛰게."

때마침 앞으로 지나가는 마법사들에게 아르센이 넉살 좋게 말을 건넸다.

"부군단장님은 왜 안 뛰십니까!"

"나는 자네들보다 잘못이 적네. 내 잘못만큼 이미 뛰었지."

"힘드셔서 못 뛰시는 것 아닙니까!"

"여기를 몇 바퀴 달리든 대사막을 걷는 것보다는 수월하다는 걸 모르나?"

소싯적의 일상을 꺼내들며 '나는 체력이 약해 못 달리는 게 아니다' 주장하는 아르센을 원망 섞인 눈으로 쳐다본 마법사들이 기를 쓰고 속도를 높였다.

"어서 가게. 마법사가 돼서 기사들에게 뜀박질로 져서야 쓰나."

"부군단장님 너무하십니다!"

빙긋 웃은 아르센이 시끄럽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렇게 다시 탁탁탁, 멀어지다 다시 가까워지는 일사불란한 소리를 여유롭게 주워듣던 아르센이 눈앞에 펼쳐진 하늘을 바라봤다. 잠시 뒤부터는 다시 숨가쁜 날이 이어지겠지만 이렇게 느긋하게 누워 쉬기도 해야 사람이 살지 않겠나.

아무렴. 생이 아무리 번잡해도 끝모를 봄 하늘 아래 부는 청명한 바람은 좀 느끼고 살아야지. 가만가만 흘러 들어오는 장미 향기가 얼마나 기분좋으며 새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영주성의 그림자는 또 어찌나 거대하고 웅장한지를 보란 말이다.

아무튼 누가 우리 왕자님의 영지 아니랄까봐 지난 전투로 사방이 부서진 흔적을 지니고도 저렇게나 보기 좋으니. 왕자님께서도 그것이 마음에 들어 저렇게 창 밖을 구경하고 계시는 거겠······.

······ 응?

- 후다닥!

아르센이 튕겨지듯 몸을 일으켜 섰다.

5층 응접실의 창문에서 연병장의 모습을 가만가만 내려다 보던 어여쁜 왕자가 생긋생긋 고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제가 연병장을 도는 동안 왕자님께서 지하 감옥 지키고 있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왜 벌써 올라가셔서 바깥을 보고 계십니까?

라는 말은 감히 내뱉지도 못할 따까리.

"······ 에이 씨."

그러면서 또 하필이면 저 혼자 3왕자를 발견하게 된 새파랗고 불운하고 불경한 따까리가 터벅터벅. 달리기를 시작했다.

오래도록.

플란츠와 다른 대원들이 돌아간 뒤로도 꽤 오래도록.

* * *

- 형님도 한 마디 쯤은 하셔야죠.

- 어떻게. 같은 부군단장인데.

- 그럼 스승님께 이만 손 떼시고 형님께 군단장 자리 전해드리라 말씀드릴까요?

- 그런 얘기가 아닌 건 아우님이 더 잘 아실 텐데.

- 헤르츠 경을 감당하기 버거워하실 때가 있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같은 직급이라 말을 하기 어렵다 해도 형님은 왕세자시고 헤르츠 경은 백작 아닙니까. 형님이 매번 그렇게 봐주고 넘어가니까 헤르츠 경이 더 신나하는 것 같은데요.

- 알아.

- 아시면서. 백작이 벌을 안 받고 한눈을 팔고 있다고, 그것을 동생에게 일러바쳐서 해결을 하십니까.

-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에게 바로 전달해달라고 한 말 아니야. 헤르츠 경도 잘 뛰고 있냐고 아우님이 먼저 물어봤잖아.

또 억울해진 모양이다.

바람을 내뱉듯 웃은 칼리안이 창가에서 몸을 뗐다.

아르센을 뺀 다른 대원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플란츠도 손을 못 대는 아르센이 칼리안 때문에 다시 달린다는 것을 알려서야. 부군단장들의 위신이 어떻게 서겠나.

- 어쨌거나 한 마디도 못하고 내버려두고 있다 알려주신 건 형님이잖습니까.

- 그렇게 말 안했어.

- 아무튼 어찌나 순하신지. 그런 말 한 번을 못하시니 그렇게 아무한테나 칼도 뺏기고 달랑달랑 붙들려 계시는 것 아닙니까.

- 화가 풀려서 짖으시는 건지. 더 나서 짖으시는 건지.

- ······ 그냥 짖는 겁니다.

- 그래.

- 네.

- 휘트린은.

- 만났습니다. 이제는 조용할 겁니다. 그러기를 바랍니다.

- 오늘 일은 비밀에 부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지금은 어딘데.

- 응접실입니다.

- 감옥은.

- 잠시 스승님께 부탁드렸습니다.

- 응접실은 왜.

- 오르테. 만나려고요. 할 말이 있어서.

발칸의 기사들이 방에 돌아가 있던 오르테를 데리러 나간 사이, 빈 응접실을 둘러보고 있었던 칼리안이 답을 전했다.

플란츠의 대답이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계속 달리느라 힘이 드나.

그 완두콩이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 생각이나 하던 칼리안이 오르테를 왜 만나려는지를 설명하려는데 플란츠의 말이 들려왔다.

- 들키지 마. 칼리안.

하고.

칼리안의 상급 시종이었던 그에게 칼리안의 속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말라는 말. 지금의 칼리안을 잠시 접어놔 달라는, 그런 말을 했다.

- 미안.

그리고 사과를 전했다.

플란츠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얼굴로 웃음을 그려낸 칼리안이 대답했다.

- 네.

서운한 마음이 들어 사과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제 막 햇빛 아래로 머리를 내민 사탕수수 새싹같은 놈이 정말로 사과해야 할 만한 말을 꺼냈다 여겨서 웃은 것도 아니었다.

곧죽어도 베른을 접어두고 살지 말라 했으면서, 아무리 잠시라지만 그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을 해달라 부탁하는 것이니 미안하다 사과라도 해야 안 시들고 계속 파릇파릇하지 않겠나.

그래서 순순히 사과를 받았다.

이미 들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불필요한 말을 하는 대신.

- 저녁까지는 이곳 일을 모두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 그 뒤에 식사 같이 하시겠습니까. 발칸 때문에 바쁘시면 별장에 가서 드미레아랑,

- 끝나. 그 전에는.

- 그럼 식사 같이 하시죠.

- 알았어.

- 네. 열심히 달리십시오.

- 뛰고 있어.

- 네.

플란츠와의 대화를 마쳤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가장 중앙에 놓인 자리에 앉았다.

- 스륵.

손을 움직였다.

목 끝까지 차올라 있던 붉은색 타이를 풀까, 하다가.

기억을 되짚어보며 그냥 조금만 헐겁게 당겨 내렸다. 대신 셔츠의 맨 윗 단추 하나를 풀었다.

- 사락, 사락.

새하얀 손가락을 놀려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카락을 조금쯤 흐트러뜨렸다. 그 손을 펼쳐 손바닥의 흉터가 혹시 두드러지게 보여지는지를 새삼스레 확인했다.

- 툭.

검붉은 자주색의 재킷 안쪽, 검은 셔츠의 소매 끝에 채워져 있던 가넷 커프스를 풀었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은 뒤에는 그 속에 늘 들어있던 회중시계를 잠시 꺼냈다.

- 차르륵!

- 딸깍.

조용한 이야기에 방해가 될 지도 모를 시간을 멈추어 두고서, 긴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기억 속을 잠시 거닐 준비를 그렇게 마쳤다.

- 똑,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한 번 더, 긴 숨을 들이쉬고. 그리고 내쉬고.

"들어와."

목소리를 냈다.

짧은 허락의 말에 응접실의 문이 열린다.

새하얀 옷을 입은 발칸의 마법사가 뒤에 서 있던 노년의 남자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 뒤로 함께 뒤따른 또 한 명의 마법사가 찻잔이 올려진 쟁반을 든 것이 보였다.

향이 든다.

무슨 꽃일지, 무슨 과일일지.

커피도, 민트도 아닌, 기분 좋은 향.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그런 좋은 향이 함께 든다.

찻잔에서 퍼져 나온 향기에,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작은 웃음 소리를 냈다.

"늘 궁금했어."

반갑다는 말 대신.

잘 지냈느냐는 말 대신.

"무엇을 넣은 차였을까."

늙은 시종의 낡지 않은 호박색 눈을 보면서.

정말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기억 속의 그 좋은 차 향을 다시 맡으면서.

저도 모르게 나오는 말을 먼저 건넸다.

차마 한 걸음을 더 들어오지 못해 응접실의 문가에 서 있던, 바로 전날까지 낯선 곳의 감옥에서 죽을 뻔했던 몸으로 기어이 직접 차 한 잔을 마련해 온.

"······ 체리 꽃이 조금, 말린 사과와 딸기가 조금, 레몬 껍질과 꿀이 또 조금 들었습니다."

늙은 시종이 대답을 전했다.

"궁금하다 여기셨습니까······."

"궁금했어. 얀은 차를 정말 못 타거든."

늙은 시종이 웃었다.

"그거나 알려주고 가지 그랬어. 덕분에 맨날 민트차만 마셨잖아."

늘 어리기만 했던 왕자가 말했다.

늙은 시종이 다시 웃었다.

왕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는 늙은 시종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저보다 작아진 늙은 시종의 앞에 섰다.

조용히, 손을 뻗었다.

빼놓지 않고 늘 챙겨오던 손수건 대신 손을 뻗었다.

호박색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봄비 같은 반가움을, 이미 지난 시간 같은 아쉬움을. 그렇게나 맑은 것들을 사락사락 닦았다. 그리고 가만가만. 어르듯 달래듯 입을 열었다.

"고마워, 오르테."

그 말이 늘 하고 싶었어.

내가.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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