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517화 (518/527)

제90장. 얻어낼 게 많아서(6)

균열이 인다.

둥근 와인 잔에 칼리안의 하얀 손끝이 툭 닿은 듯한 모습으로, 맥주 네 잔을 마신 아르센의 마수가 닿은 수정구 같은 모습으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균열이 일었다.

안쪽에서 뻗어나온 날카로운 물의 마력과 바깥쪽에서 쇄도해간 서슬 짙은 검날이 정확히 맞닿은 바로 그 부분이 시작점이 되었다. 거미줄 같기도 하고 얼어붙은 세뉴강에 생긴 긴 흉터 같기도 한 금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러다 우뚝. 황금빛의 보호막을 갈라내며 쭉쭉 뻗어나가던 수많은 금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침묵이 찾아든다.

휘트린의 시선이 칼리안을 향했다.

플란츠의 눈이 칼리안에게 닿았다.

- ······ 우웅······.

발칸의 대원들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아르센이 고개를 돌려 휘트린을 봤다.

- 우웅······ 웅, 우우웅······!

침묵 속의 눈초리가 그렇게 얽힌다.

가만히, 하나, 둘, 셋.

칼리안의 입가에 붉은 호선이 그려진다. 그리고 다시 하나, 둘.

"아무튼 내 형님께선 어찌나 기특하신지."

······ 셋.

- 카아아아아앙!

소리가 난다.

꽃잎에 닿은 바람같은 목소리가 날카로운 파열음에 묻힌다.

깨지지 않을 것만 같던 방어막이 바스라지듯 조각나며 팡, 하고. 먼 하늘로 쏘아진 폭죽의 가장자리처럼 고운 빛으로 흩어지다 사라져갔다.

- 짖지.

- 멍멍. 네.

그 분주한 와중에 기어코 제 목소리를 듣고 전해진 대꾸를 뚝 잘라낸 칼리안이 휘트린을 쳐다봤다.

그러나 그 시선보다 먼저, 무엇보다 빠른 붉은 칼날이 휘트린을 향했다.

- 쌔애애액!

한 번이다.

느긋하게 굴었으나 두 번의 기회는 없음을 안다.

베로니카나 아리안느, 혹은 이제 막 서클을 다룰 줄 알게 되었을 무렵의 칼리안과 비슷한 수준의 마법 능력. 아무리 똑똑하다 한들 마법을 배운 적은 없는 실력의 플란츠가 간신히 만들어낸 타격점이 아닌가. 그곳에 다른 마법사들이 일제 공격을 하고 칼리안이 검을 꽂아넣어 깨진 방어막이다.

그러니 서두르는 것이다.

만약 휘트린이 그것을 다시 세운다면, 어느새 마력을 보내 지하감옥 전체를 실드로 감싸 둔 앨런이 직접 내려와 나서야 할 테니까.

- 서걱!

- 촤아악!

그럼에도 손목은 노리지 않았다.

무엇 하나 잘라내지도 않았다.

- 후두둑!

붉은 검에 깊이 베인 휘트린의 손등에서 피비린내가 확 풍긴다. 쏟아지듯 떨어진 검붉은 핏방울이 플란츠의 새하얀 정복 위를 적신다.

히나를 알고 키리에를 겪고 시오나를 믿게 된 까닭에 만들어진 마지막 이해, 비수를 쥐었던 실리케의 손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잊지 않았을 플란츠에 대한 실낱같은 배려가 휘트린의 손등을 베고 지나갔다.

"휘트린."

그 어떤 것도 함부로 닿지 못할 왕세자의 목에 가져다 댄 방자한 칼날을 그렇게 떨궈냈다.

"나를 얼마나 더 긁을 셈이야."

- ······ 챙그랑!

손등의 힘줄이 잘려 검을 놓친 휘트린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비명 한 자락은 커녕 참는 소리 한 번을 내지 않는 이의 얼굴을 담담히 마주보던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휘트린 말고, 바로 곁에 서 있던 아르센을 향해서였다.

"헤르츠 경."

"······ 네, 왕자님."

"20분. 아직 안 됐습니까."

"아닙니다. 시간 됐습니다."

"가져다 놔요, 그럼."

"알겠습니다."

노튼을 만난 칼리안이 '20분 뒤에 휘트린을 데려와달라' 했던 말을 잊지 않았으나 플란츠가 먼저 찾아와 잠시간을 지체했던 아르센이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폭음을 듣고 우르르 내려와있던 발칸의 대원들 중 몇몇이 곧바로 달려와 휘트린을 포박했다.

그들에게 다시 저항하는 대신 붙들리기를 택한 휘트린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치유력이 있다 했으면서도 제 손등의 상처는 내버려 둔 채였다.

"왕자님. 제 말을,"

- 번뜩!

- ······ 사락!

붉은 섬광이 인다.

휘트린을 포함한 그 누구도 아무런 움직임을 보지 못했으나 히나의 것을 꼭 닮은 은백색의 머리카락이 한웅큼, 나풀나풀 떨어져내린다.

서느런 붉은 눈보다 더 싸늘한 말이 휘트린을 향했다.

"당신이 살아있어야 당신 말을 내가 듣지."

이 자리에서 한 마디만 더 하면 죽여버리겠다는 말.

휘트린이 혀를 깨물듯 입을 다물었다. 그 뒤 한동안 칼리안을 마주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칼리안과 노튼이 있었던 취조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일별한 칼리안이 눈을 돌렸다.

- 뚜벅.

- 뚜벅, 뚜벅.

왕세자가 시해될 뻔한 것을 목도하게 된 모든 이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지하 감옥의 돌 바닥을 밟는 구두 굽 소리가 고요를 깬다.

하나, 둘, 셋.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 3왕자의 발 소리가 천천히 울린다.

본래 휘트린이 있었던 감옥 앞, 그곳에 서 있던 발칸 기사에게 간 칼리안이 손을 들었다. 그가 주워들어 가지고 있던 시나스타를 말없이 건네받았다.

- 뚜벅, 뚜벅.

시선이 따라붙는 소리까지도 들릴 듯한 적막 사이로 검은 구두 소리가 다시 울린다.

"플란츠, 왕세자······ 저하."

그 걸음의 끝에 생소한 부름이 붙는다.

형님도 아니고 형님 저하도 아닌 말로 부르는 걸 보니 내 동생 저 놈의 인내심이 이제야 비로소 다 깎였구나, 하고. 칼리안이 제 말을 막았을 때부터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플란츠가 연두색 눈을 들었다.

한동안 아무 말없이 서 있던 칼리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벼랑 끝에 핀 새빨간 꽃 같은 목소리를 냈다.

"마법을. 쓸 줄 아는 것도, 아니신 분이. 검을 놓치고 다니십니까. 큰일이 나면 어찌하려고."

"······ 실수였어."

"네. 축하드립니다. 실수로 건네신 목숨을 요행히 돌려받게 되셨으니."

이런 말에 무슨 대답을 더 할까.

가만히 입을 다문 플란츠가 손을 내밀었다.

칼리안에게서 시나스타를 돌려받았다.

그 움직임에 피비린내가 든다. 그것이 플란츠의 목 상처에서 나는 것일지, 정복의 앞섶을 물들인 휘트린의 피에서 나는 것일지. 플란츠는 가늠하지 않았고 칼리안은 신경쓰지 않았다.

- 스윽.

검을 넘긴 칼리안이 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휘트린에게 붙들리느라 구겨진 정복의 목깃을 되세웠다. 천천히, 정중히. 그러나 실례한다는 말은 입에 담지 않은 채로.

그리고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다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가 플란츠만을 향했다.

"팔을 잃은 기사도 제 검을 놓친 적이 없다 하는데 그들의 앞에 서야 할 분께서 검을 놓으셔서야······ 본이 되겠습니까."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떴다.

다듬기를 포기한 칼리안의 날 선 살기가 치밀다 가라앉는 것을 느낀 까닭이다. 향할 곳을 찾지 못해 스스로에게 되돌아가는 살기임을 이미 잘 알았다.

"알았어."

"무엇을요."

"앞으로는 더 주의하겠다고."

"연병장이라도 거닐어 보면서 주의를 해보시는 건 어떨지."

말로 넘어갈 생각 말라는 듯, 칼리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 마나실 군단장이라면 그리 권해드릴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플란츠 왕세자 저하."

벌이다.

동생인 칼리안의 이름으로도, 발칸과 '관련 없는' 3왕자의 직함으로도, 어떻게도 내리지 못할 벌을 기어코 건네고 있었다.

플란츠가 한 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심기가 뒤틀린 까닭은 아니다. 전날이었으면 툭 튀어나온 베른이 한 소리를 했을 텐데 그러지 않고 앨런의 이름만 팔고 있지 않나. 그 변화를 알아챘는데 기분이 나쁠 리가 있나.

"그래."

무엇보다 휘트린이 위험한 인물인 것을 알면서도 마음을 놓았던 것은 사실이니까.

"그렇게 하지. 칼리안."

"네."

실드부터 덮어놓던 것에서 벗어난 뒤 플란츠 때문에 베른을 꺼내드는 것도 멈추게 된 동생 놈이 건네는 벌에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내가 술 기운에 뭔 소리를 했기에 저 놈이 저렇게 태도를 바꾸나, 어쩐지 확실히 알 것만 같은 정답을 찾아내기를 잠시 미뤄두고서.

- 투둑!

플란츠가 손을 움직였다.

칼리안이 제 손으로 기껏 정돈해 준, 검붉게 물든 정복의 재킷을 홀랑 벗은 뒤 그것을 바닥에 툭 내려놨다.

그와 동시에 플란츠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키가 조금 자라고 어깨가 아주 조금 줄어들더니 플란츠 특유의 파릇파릇함이 색을 달리한다. 옅은 에메랄드 빛의 머리카락에 밝은 금빛이 돌고 연두색의 눈을 대신해 깊이 모를 바다가 들어찼다.

란델의 모습을 다시 취한 것이다.

중요한 증인이 왔다는 말에 잠시 들렀다던 왕세자가 한가롭게 연병장이나 달릴 수는 없는 일 아니겠나. 차라리 장미나 돌보던 1왕자가 달리기를 참 잘 하더라는 소문이 낫지.

방금 돌려받은 시나스타를 칼리안에게 도로 건넨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휘트린의 감옥에 같이 찾아갔다가 내동댕이쳐진 기사와 마법사들을 꼬집어 골라내듯 한 번씩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

"나와."

나만 잘못했나.

윗사람 못 지키고 먼저 나가떨어진 저 놈들도 잘못했다.

완두콩의 꼬리 물기에 피식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헤르츠 경."

"네. 저도 같이 가고 싶습니다."

"굳이?"

"네. 굳이 같이 가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곳에는 내가 있을 테니."

"네. 잠시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왕자님."

사태를 파악한 아르센이 재빨리 답하고 움직였다. 부군단장에게 벌을 내릴 위치가 아닌 칼리안에게 굳이 자진해서 벌을 받겠다면서.

곧 아르센이 새하얗고 길다란 로브를 벗어 조심스레 내려놨다.

이제 신물나게 달릴 텐데 발에 채일 것이 분명한 치렁치렁한 로브를 걸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다른 마법사 둘은 몰라도 아르센은 그 정도의 편의는 당당히 부려도 될 부군단장이 아닌가.

- 저벅, 저벅.

곧 플란츠가 뒤로 돌아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아르센과 여섯 명의 대원들이 따라 나섰다.

- 타박!

1왕자와 내 미친 따까리와 발칸의 대원들.

쉬이 이해하지 못할 조합으로 운동을 나서는 이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칼리안이 뒤로 돌아섰다. 그 뒤 이제는 노튼과 휘트린이 함께 앉아있을 취조실로 발을 옮겼다.

꽤 묵직한 시나스타를 한 손에 꽉 쥔 채로.

* * *

라시드 브리센은 멍청하지 않다.

란델보다 편견이 많고 플란츠보다 인내가 적고 칼리안만큼 자신만만해서 그렇지 멍청한 놈은 아니다.

라시드 브리센을 후하게 평가하는 척하며 깎아내리는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전혀 아니다.

그렇게나 낮춰 보던 란델에게 멸시를 받고, 늘 증오해오던 플란츠가 동생의 그늘 아래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꼴을 보게 되고, 아예 시선조차 두지 않았던 칼리안이 예상 외의 미친놈이었음을 알게 되어 피치 못할 실수들을 하는 것일 뿐.

- 톡, 톡, 톡.

이상하다.

놈에 대해 설명을 붙이면 붙일수록 왜 자꾸 놈을 욕하게 되는 것 같지.

결국 칼리안은 라시드에 대한 자신의 후한 평가를 말로 설명하기를 관뒀다. 어찌됐건 라시드 브리센은 결코 멍청한 놈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거니까.

- 톡.

- 톡······ 톡.

라시드 브리센에 대한 상념을 접은 칼리안이 눈을 떴다. 조금 전부터 한 마디 말도 없이 앉아있는 휘트린을 쳐다봤다.

제 할 말을 모두 마친 노튼 라미레즈는 돌려보낸 뒤였다. 일단은 다시 감옥으로, 에일라가 노튼의 아내를 만나보고 이상이 없다 한다면 그때 감옥에서 꺼내줄 생각이었다.

"오늘 벌인 사고는 묻을 거야. 내가, 내 마음대로."

마법을 쓰는 것도 아니면서 검을 놓치면 어떡하느냐.

칼리안의 그 한 마디에 플란츠에 대한 의문을 이미 다 접어뒀을 발칸이다. 밖에서 달리고 있을 놈들이나 감옥 안을 새로 감시하기 시작했을 놈들이나 전부 다, 그 광경을 봤던 놈들이라면 하나같이 '아무튼 누가 보낸 건지 몰라도 그 물마법 덕에 큰 일을 넘겼다' 하고 있을 발칸임을 안다.

그런 놈들이니 오늘의 사고를 묻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도망칠 겁니다."

손목이 묶이기는 커녕 족쇄 하나 채워지지 않은 왕세자 시해 시도범, 휘트린이 낮게 대답했다.

스윽.

테이블에 올려진 칼리안의 손 끝이 긴 곡선을 그려냈다.

"무슨 재주로."

칼리안이 물었다.

테이블에서 멀어진 새하얀 손가락이 창살 밖을 가리켜보인다. 이미 진작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으나 달리 반응하지 않았던 휘트린이 그곳을 다시 쳐다봤다.

"보이지, 창 밖."

"보았습니다."

붉다.

창 밖이 붉게 보였다. 그 창살에 붉은 빛의 유리를 덧씌워놓은 듯 붉었다.

"해가 뜨는 것도 아니고 지는 것도 아니야. 불이 나서 저 꼴인 것도 아니야."

"네. 앨런 마나실의 힘인 것을 압니다."

앨런이 아직 실드를 거두지 않은 것이다.

대마법사의 허락을 받지 못한 이들은 그 누구도 드나들지 못할 강력한 실드를, 칼리안과 단 한 마디 말을 주고받지도 않았으면서.

"아델리아가 와도 저건 못 뚫어. 어찌저찌 뚫어낸다 해도 넌 못 나가. 한 발만 나서면 내가 당신 죽일 거거든."

'너'와 '당신'이 혼재하는 말.

이제까지의 행동들에 치를 떨다가도, 베른 남매가 똑같이 지닌 따스함과 시오나가 기억하는 상냥함을 외면하지 못할 이의 아둔함이 섞인 말.

그런 말을 알아듣지 못한 척.

휘트린이 답을 전했다.

"이 영지에서 벌인 일을 회피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레이 브리센만 죽일 겁니다."

"당신 자식들에 대해서는 잘만 눈감았으면서 회피를 안하겠다고. 그따위 말이 잘도 나오지, 휘트린."

"······ 관련없는 이야기입니다."

"나한테는 있거든. 어느 때고 언제까지고. 계속."

"시간이 없습니다, 왕자님. 당장 준비를 해야······."

"무슨 준비. 그레이 브리센 목숨줄을 먼저 비틀 준비?"

"그렇습니다."

"데이른 남작령에 휘트린을 공격했던 이들보다 더 많은 군사가 있었고, 그곳이 텅 비었다면 남은 군사들이 갈 곳이라고는 수도밖에 없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네가 없는데 데이른 남작령에 있던 제온을 움직일 사람은 라시드 브리센밖에 없으니까. 그놈이 제온의 남은 일당을 데리고 수도로 갔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 거지, 휘트린."

"그렇습니다."

"아니야."

딱 잘라 말하듯 답한 칼리안이 휘트린을 쳐다봤다.

"아니니까. 얌전히 있어."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라시드 브리센과 그레이 브리센의 사이를 모르십니까. 라시드 브리센은 이미 구석에 몰렸습니다. 어머니 나무께서 도움을 거절하셨고 이곳에서 준비하던 일은 그레이 브리센에 의해 모두 허사가 됐습니다. 그레이 브리센의 배신으로 반역자의 낙인까지 찍히게 되었으니 더 이상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 합니다."

빠른 속도로 말을 전한 휘트린이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왕자님과 앨런 마나실, 발칸의 주요 인원과 마법사 협회장까지. 모두 다 수도를 벗어나있는 지금이 라시드 브리센에게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라시드 브리센이 당신인 줄 알지."

붉은 눈이 선연한 빛을 냈다.

"라시드 브리센이 왜, 그레이 브리센 따위를 없애겠다고 목숨을 내놓나. 그 새끼가 고작 그레이 따위를 없애겠다고 왕세자 목에 칼부터 들이대는 당신이랑 똑같은 줄 알아?"

"다릅니까."

"라시드 브리센은 이미 한 번 수도로 쳐들어갔다 실패했어. 며칠 전에는 내 손에 죽을 뻔하다 엄한 손에 간신히 목숨 부지한 새끼야. 그 뒤로 얼마 되지도 않아서 남작령에 있었을 몇 놈을 모아다 수도로 향할 만큼, 그레이 브리센도 죽이고 저도 죽겠다 할 만큼, 라시드 브리센은 그 정도로 멍청한 새끼 아니야. 당신이랑 달라. 완전히."

"그렇다면."

칼리안의 비난에도 안색 하나 바뀌지 않은 휘트린이 입을 열었다.

"라시드 브리센이 수도로 가지 않았다면 어디로 갔겠습니까.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겠다 할 라시드 브리센이 아닙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칼리안이 생긋, 웃음을 보였다.

"글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척.

어깨를 살짝 으쓱이면서.

- 왕자님.

그런 칼리안의 손목에서 반짝, 하고.

통신용 팔찌들 중 하나에 옅은 빛이 돌았다.

- 로난시테 경을 보냈습니다. 이동 마법진을 쓸 테니 늦지 않게 파비안으로 도착할 겁니다.

파비안.

휘트린의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할 지명이 그렇게 전해졌다. 언제든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로.

잠시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말했다.

- 빠르네, 드미레아.

- 통신 장비는 왕자님의 전유물이 아니니까요.

- 그런 게 생겼어?

- 이곳에 올 때 어머니께 받았습니다.

- 잘 했네. 다행히. 전력은 얼마나?

- 기사 이백이 함께 움직입니다. 그런데 마법사 없이 고작 기사들만으로 충분하겠습니까. 라시드 브리센이라면 제온의 힘을 쓸 텐데요.

- 어차피 그놈들이 부리는 마법 차단 때문에 당장은 마법사들이 있어봐야 혼란만 생겨. 게다가 시오나도 있고 키리에도 있고, 5층 사시는 예상 못한 전력도 있잖아. 기사 이백이면 이미 충분해.

걱정 말라는 듯 답한 칼리안이 짧은 숨을 내쉴 짬을 두고 말을 덧붙였다.

- 그런데 고작 기사들만이라니. 지그프리드 기사들을 누가 그렇게 평가해.

- 혹시나 해서 떠 본 겁니다. 부족하다 여기실까봐.

작은 웃음소리가 드미레아를 향했다.

- 그렇게 생각 안 해. 고마워, 드미레아.

- 네. 그러시겠죠.

- 받은 것을 다 갚으려면 내가 정말 성을 바꿔야 하나. 지그프리드로.

드미레아가 실소하는 소리가 났다.

드미레아가 세상의 다른 어떤 놈과 결혼을 하든 놈들이 지그프리드로 성을 바꾸게 되겠지만 왕족만은 불가능하지 않나.

아예 다른 나라인 텐실로 가게 될 란델이라면 모를까. 언젠가의 플란츠가 후작가의 가주나 대공이 된다 해도 그 성이 카이리스가 아닌 다른 것으로 바뀔 수는 없듯이 말이다.

- 왕족의 성을 어떻게 바꿉니까.

- 아, 참. 그렇겠구나.

- 그리고 제가 드린 빚은 왕자님을 제 뒷마당에 들이는 정도로는 턱도 없을 만큼 불어난지 오래입니다.

- 내가 곱게 커서 팔려가 주면 갚을 수 있나 했는데. 안돼?

- 안 됩니다. 셈도 안 해보셨습니까.

- 이런. 그럼 나중에 코끼리들을 독립하게 해 줄까? 드미레아.

휘트린을 앞에 둔 채로.

라시드 브리센이 있다 했던 파비안에 제온의 군사들이 향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떠올리고선 지그프리드의 군사들을 파비안으로 보내달라 요청했으면서.

그리 급한 상황에서 이렇게나 느긋하게, 지그프리드 공작령을 지그프리드 왕국으로 만들도록 해줄 지를 묻고 있다. 거짓말도 못하면서.

- 글쎄요.

속내에 세크리티아의 왕제를 담아두고 카이리스 땅을 반 나누어 정혼자에게 주겠다는 말을 꺼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느냐 묻는 대신, 무덤덤한 대답이 돌아갔다.

- 그렇게 돼도 계속 제 정혼자 하겠다 하실 겁니까.

- 안 하겠다 할까봐, 아쉬워?

- 아쉬워서 하는 말이겠습니까.

- 그럼. 나 귀찮아? 이제 안 예뻐졌어? 형님이랑 오가는 얘기가 헛소문이 아니었어?

- 기사들 돌리겠습니다. 그동안 즐거웠······.

- 아니야. 농담이야. 미안해, 드미레아.

- 아쉬운 게 아니라 왕자님께 앞으로는 얼마나 더 손이 많이 갈지 벌써부터 걱정되어 하는 말입니다.

- 그때 쯤 돼서 내가 예뻐 보인다 하면. 그럼 정혼자 노릇도 계속 하겠지. 네가 공작이 됐든 남쪽나라 국왕이 됐든.

- 그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때 가서.

- 그래. 그러자. 그때 가서, 정혼자님.

- 네, 그럼.

아무튼 어찌나 단단한지.

이러니 내가 드미레아를 좋아하지.

잠시 숨을 돌리듯 속 깊은 곳에서 웃음을 지어보인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제 팔찌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당신이 안 나서도 충분히 막아."

"······ 왕자님 생각이 틀렸다면. 만약 제 말이 맞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라시드 브리센이 정말 수도로 올라가서 그레이 브리센을 죽여 없앤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별 것 아니라는 듯, 칼리안이 답했다.

"그레이 브리센에게 얻어낼 게 많아서 그렇게는 안 돼. 알아내면 알아낼 수록 그 새끼랑 엮인 재밌는 얘기가 많아져서 아직은 살려두기로 결정했거든, 내가. 그러니 누가 쳐들어가든 그레이 브리센은 못 죽여."

"주요 전력이 다 이곳에 있음을 모르시는 겁니까."

"수뇌부 빠졌다고 감시하던 놈 모가지 잃어버리게 내버려 둘 발칸 아니야. 그따위로 크도록 풀어둔 적 없어."

앨런이 어디에 있든, 칼리안이 나와 있든, 플란츠와 아르센이 자리를 비웠든 말든. 카이리스 왕궁 안에서 그레이 브리센을 감시하고 있는 이들은 언제까지고 발칸이다.

윗사람 몇이 빠졌다고 왕궁을 못 지켜낼 발칸이 아니다.

"그딴 새끼들한테 목숨 내둔 사람 아니야, 나는."

그런 놈들에게 목숨을 맡길 칼리안이 아니다.

그런 놈들에게 목숨을 놓쳤던 베른도 아니다.

"그렇게 대단하다 하시는 발칸과 함께 있던 왕세자의 피가 제 손에 묻은 일은 그새 잊으셨습니까."

"발칸이 대단치 않아서가 아니라 치유사와 내 기사의 어미를 어떻게든 믿어주려 했던 거지, 휘트린. 다른 놈들은 아직 너를 믿어보고 싶어하거든. 나처럼."

칼리안이 웃었다.

당장 죽일 것처럼, 혹은 영원히 살려둘 것처럼.

"키리에와, 히나. 그 둘만 빼고."

챙기지 않은 어미 노릇을 비난함이 아니다.

자식을 외면하는 아비에 자식과 권력 싸움이나 하는 아비에 자식을 검처럼 휘두른 아비를 다 만나 본 판에. 제 왕관을 꾸며 줄 가장 향기로운 꽃으로 제 자식의 목을 선택한 어미까지 있던 와중에. 누구에게 뭘 바라겠나. 자식보다 중요한 것도 있겠지. 아무렴 그런 것을 모를까.

그런데 그 어린 핏덩이 앞에서 죽은 척을 하지는 말았어야 했음을. 제 어미가 희생된 것을 애통해하고 나락보다 못한 곳을 전전하며 복수를 입에 담지는 않게 했어야 했음을. 그렇게 자란 둘에게조차 비난받지 않겠다 하지는 말았어야 했음을.

계속 그러했듯 이번에도 여전히.

뼈에 새겨 둘 것처럼 같은 말을 다시 꺼낸 칼리안을 향해 휘트린이 입을 열었다.

"······ 그것은."

"닫아. 내 할 말만 한 거지 그 일에 대해 당신 얘기 들어 줄 생각은 더 없으니까."

톡, 톡.

테이블을 두드린 칼리안이 휘트린의 검은 눈을 응시했다.

"오늘 같은 일 또 벌이지 마. 몇 번을 벌이든 몇 번이고 내가 다 묻을 거야. 당신이 더 이상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도록, 당신에 대한 그 어떤 대단한 소문도 안 나도록, 내가 전부 다 비밀에 부칠 테니까. 그러니까 헛수고 그만 하고 입 닫아. 없는 것처럼, 숨소리도 내지 말고 지내."

드르륵!

칼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그 서늘한 붉은 눈은 여전히 휘트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리없이, 무력하게. 레니시타 위로 가. 휘트린."

진심어린 부탁이 전해진다.

* * *

천천히.

깊은 심연이 움직였다.

실내에서 뒤꿈치를 드는 것이 잠시 지내오던 시종으로서의 버릇일지, 아니면 기사로서의 버릇일지. 앞에 선 이를 습관처럼 버릇처럼 꿰뚫어보려 하던 짙은 푸른 눈이 심연을 거뒀다.

행동의 이유를 찾으려 불필요한 노력을 하는 대신 발소리 없는 기사가 건넬 말만 기다렸다.

"이제 나가셔도 괜찮습니다."

그 기사, 키리에로부터 나지막한 말이 전해졌다.

파비안의 영주 대리인 바르지안을 내보낸 뒤 따로이 조사를 시키려 했던 키리에가 아니던가. 그런데 예정에 없이 잠시 더 키리에를 곁에 두게 된 란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둘째의 변덕이 끝났다 하더냐."

"네. 휘트린에서 다시 모습을 바꾸셨다 합니다."

"그래."

오르테를 만나려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플란츠 덕에 잠시 발이 묶였었다. 마치 급하게 자리를 비운 것처럼, 커튼을 내려두고 방 안에 틀어박혀 두 시간 여를 보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플란츠의 모습을 하는 것도 마뜩지않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던 란델이 팔찌의 힘을 운용했다. 그리고 점점 연두색으로 변해가는 눈으로 키리에를 쳐다보며 말했다.

"다른 목소리는 들린 것이 없더냐."

"없었습니다만."

잠시 말을 끊은 키리에가 품을 뒤적였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그것을 본 란델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준비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여. 이것을 내가 들라는 것이더냐."

"그렇습니다."

"누가 얼마나 오기에."

"제온의 군사들, 사백입니다."

담담하게,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키리에가 건넨 단도를 손에 쥐었다.

그 얼굴에 조금의 동요도 드러나지 않는 것에 짧은 한숨을 쉰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를 한 것 같아서였다.

"붙들렸을 때를 대비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었더냐."

"붙들리지 마십사 드리는 겁니다."

제 목숨값을 지나치게 잘 아는 탓에, 잠시나마 검의 용도를 잘못 생각했던 란델이 작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하마."

그리고 짧게 답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