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장. 얻어낼 게 많아서(5)
체르밀 궁에서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소리가 있다.
큰 소리.
세뉴관을 찾아든 귀족들이 만들어낸 다툼 소리도, 아스트리샤 거리로 향하는 길에 들을 수 있던 왁자지껄한 소리도, 지그프리드 관의 연회에 초대된 이들의 웃음소리도, 체르밀에서는 들을 수 없었다.
간혹 어두운 하늘을 조각내듯 찾아드는 천둥과 벼락 소리를 제외한다면 큰 소리를 좀처럼 들을 수 없는 곳이었다. 창가에 조르륵 앉은 새들의 지저귐이 그나마의 큰 소리였으니 다른 말을 더 해 무엇할까.
그런데 그 침묵은, 당연하겠지만 카이리스 왕국의 법전에 적힌 내용이 아니었다. 국왕 르메인이 명하지도 않았고 왕비 실리케가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침묵하였다. 지극히 당연하게 그리하였다.
그런 곳이었다.
그 넓은 궁의 4층과 5층에 사는 두 아이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발뒤꿈치를 들어야 하고 목소리는 낮추어야 했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웃거나 소리치지 않아야 하는.
체르밀 궁은.
체르밀 궁은.
그런 곳이었다.
'으아아아앙!'
그런 곳에서 큰 소리가 났다.
창가에 앉아있던 하얗고 노란 작은 새들이 서둘러 날개를 펼 만큼, 늘 담담한 시종들이 어깨를 움찔거렸을 만큼, 그 어떤 것에도 쉬이 움직이지 않던 눈이 책에서 멀어져 4층의 창 밖을 향했을 만큼. 그만큼 큰 소리가 났다.
그 뒤 어땠더라, 하고.
떠올리려 애쓸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지금은 없는 시종 두 명이 열린 창가로 걸어가 밖을 살피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알아서 이어진 까닭이다.
- 드르륵!
그리고 또 한 번의 큰 소리가 났다.
5층에서 흘러내려온 소리.
열어 두었던 5층의 창문을 닫는 소리였다.
그곳의 시종들이 창 밖의 소란을 일으킨 이들에게 눈치를 주고자 함이리라. 지금 감히 어느 곳에 있는 줄을 알고 그리 큰 소리가 나게 하느냐, 라고.
'오르테. 오르테에. 이거. 이거.'
그렇게 전해진 불편함을 알 리 없을 아이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하여 창 밖을 향한 시선을 되돌리며 책 속의 글자들을 다시 눈에 담았었다.
'······ 경박하기는.'
그러자 이런 소리가 들렸다.
'제 어미를 닮아서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지.'
비슷한 소리가 함께 들렸다.
창가로 가 밖을 살피던 두 시종이 나지막이 주고받는 이야기. 창 밖의 울음소리보다 더 시끄러운 속삭임. 소리를 듣는 어린 귀가 하나 더 있음을 신경쓰지 않는, 그런 말.
그 어미를 본 적은 있을까.
두 시종이 들어온지 이제 막 삼 년이 되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유례없는 큰 비에 세뉴강이 불어나 다리 위까지 차오른 까닭에 입궁이 이틀 미뤄졌다 했던 것까지도 정확히 기억한다. 그러니 그 때에는 이미 세상에 없던 이를 저 시종들이 언제 어떻게 보았기에 그리 말하는지 물어볼까, 하다가.
- 탁!
한 글자도 빠짐없이 이미 모두 다 기억하고 있었으나 굳이 눈으로 훑고 있던 부질없는 책만 덮었다. 물어보아야 대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타박, 타박.
발을 옮겼다.
감옥을 막아두는 것에도 쓰인다 했던 창살에 새하얀 빛을 입히고 고급스럽게 꾸며놓은 테라스 난간의 너머를 내려다봤다. 얼마 전 한 번을 보았던, 서로간에 채 한 살의 차이도 나지 않는다 했던 아이를 다시 보게 되었다.
울고 있었다.
못나고 흉하게도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을 있는대로 내놓은 채 울고 있었다.
'쫓아냈습니다. 그냥 작은 풀벌레였어요. 제가 쫓아냈습니다, 왕자님.'
새빨간 눈과 하얀 얼굴에 가득한 눈물 콧물을 손수건도 없이 제 손으로 닦아주며 이야기한 시종이 팔을 내밀었다. 번쩍 안아올렸다. 그리고 등을 두드리며 계속 같은 말을 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왕족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음을 알 텐데도 안아들고 등을 두드렸다. 5층의 창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4층 시종들의 눈초리를 보았을 텐데도 울지 말라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작은 풀벌레였어요.'
'응······.'
'괜찮습니다.'
'······ 응.'
그런 말만 했다.
그런 기억이 난다.
칼리안. 어린 내 동생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날이었다.
* * *
청량한 차 향이 난다.
그렇게나 잘 울고 잘 웃더니 이제는 아예 잘 짖기까지 하는 나이 많은 내 동생 새끼가 숙취라 알려준 답없는 두통이 이제야 조금씩 가시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것을 그렇게 좋아하나.
휘트린을 만나러 지하 감옥으로 향하기 얼마 전, 평소 같았으면 그리 기껍지 않았을 민트 향을 살피듯 찻잔을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고개를 들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도, 다리를 꼬지도 않은 채였다.
"나는 너 의심 안 해."
왕궁에서 나간 이래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었다. 세 형제의 키가 훌쩍 자라고 그 중 둘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지고 다른 한 명은 목소리보다 더 큰 것을 바꾸게 되었지만 기실 시간이 오래 흐른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바뀌었다.
흐르는 시간은 어린 아이의 키를 키우고 나이 든 이의 키를 줄여놓게 마련이라. 남자 아이를 번쩍 들어 한 팔로 받쳐 안던 이의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탁한 금빛의 머리카락에는 은빛이 섞여들어 있었다.
"넌 나를 의심하겠지만 그것도 상관 안 해."
그럼에도 봄 햇살같은 빛의 호박색 눈동자만은 그대로여서, 그 눈 속에서 들려오는 오래된 어느 날 어린 동생의 울음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여보다 그렇게 말을 건넸다.
"술을 그렇게 좋아하신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사는 내내 그리 크게 웃은 날은 또 없었을 겁니다."
그랬더니 이런 얘기가 돌아왔다.
오르테.
칼리안의 상급 시종이었던 늙은 남자에게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왕자님을 보아 온 기간만큼이나 저하를 뵈었는데 무슨 의심을 하겠습니까. 지레 겁을 내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를 믿어주신다 하니 감사하고 기쁠 따름입니다."
제대로 된 말 한 마디 주고받은 적 없던 사이였다. 말은 커녕 눈길 한 번을 오래 마주치지 않았었다. 그랬던 사람, 오르테가 생각지도 못한 믿음을 말하고 있었다.
"왕자님께서는 잘 지내십니까. 바삐 움직이는 날이 많다 들었는데 식사를 거르지는 않는지 늘 걱정을 하였습니다."
"잘 있어. 걱정 안 해도 돼."
세상에서 제일 쓸데 없는 것이 칼리안의 밥 걱정이다. 물론 오르테가 기억하는 시절의 칼리안은 지금과 많이 달랐겠지만 지금은 그렇다.
"그런데 혹······ 저를 만나기 싫다 하십니까."
오르테가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플란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다고 안 했어. 바빠서 내가 먼저 온 건데."
"제가 만나뵈어도 괜찮겠습니까."
오르테가 칼리안을 의심할까 걱정하였으나 오르테를 믿지 못한다 여기지는 않았었다. 그 어린 날, 체르밀 궁의 울음소리 속에 섞여들었던 말들을 기억하는 한 그 생각이 바뀌지는 않을 터였다.
방울 하나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시오나가, 초상화 속의 웃음을 여전히 잊지 않은 칼리안이, 똑같이 아직까지도 휘트린의 밑바닥을 믿고 있듯이. 본인들은 부정하겠지만.
"······ 잠깐이라면."
"감사합니다, 저하. 감사합니다."
그러니 잠깐이라면 칼리안을 눈으로 보게 해 주어도 괜찮겠거니. 지금처럼 긴 말을 나누어야 할 필요가 없을 때라면 칼리안도 들키지 않고 만날 수 있겠거니. 그런 생각에 허락을 했다.
가늘고 긴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뱉은 오르테가 손을 뻗었다. 제 앞에 놓인 차를 들어 향을 맡은 뒤 내려놨다. 그리고 찻잔에 눈을 둔 채 가만가만 입을 열었다.
"이것을 가져다 내어 준 기사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왕자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차라고. 그래서 잠시 놀랐습니다. 칼리안 왕자님께서는 이런 향을 즐겨하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 그랬던가."
"그렇게나 겁이 많던 분께서 어느새 검을 들고 말에 오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오늘 이 차를 보며 더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하를 뵈니 놀란 마음이 가라앉고 이해가 됩니다."
찻잔에서 눈을 뗀 오르테가 플란츠를 쳐다봤다.
"참 많이 자라셨습니다. 아마 첫째 왕자님도, 우리 왕자님도 그렇겠지요. 많이 달라지셨을 겁니다."
"별로. 모르겠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오셨을지 걱정을 하였습니다만, 이렇게 잘 계시는 것을 보게 되니 마음이 놓입니다.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그래.
다행이다.
"······ 하지 마, 다행이라는 말."
칼리안보다 먼저 오르테를 만나게 되어서.
"칼리안에게는."
플란츠의 말에 잠시 의아함을 보이던 오르테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큰 의문을 가지지 않고 수긍하는 것은 아마도 시종으로서의 오랜 습관 때문이리라.
"네. 조심하겠습니다."
차 한 모금을 소리없이 마시고 내려놓은 오르테가 입을 열었다.
"저는 휘트린 영지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붙들려간지는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묻고자 하여 왔을지는 당연한 일이라.
안부 확인이 끝났으니 그 이상의 말 대신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이름만 귀족이었을 뿐 특별한 연고도 영지도 없는 몸이라, 달리 어느 곳에 갈지 결정을 내리지 못해 왕궁을 떠나 곧장 휘트린으로 왔습니다. 이곳만큼 칼리안 왕자님의 소식을 제대로 전해들을 수 있을 곳이 없으리라 여겨 그리했습니다."
"여기 있다는 얘기는 내 아우님도 몰랐던 것 같은데."
"네. 그러실 겁니다. 이곳 영주 대리인에게 제가 누구인지를 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지민 중 한 명에게 돈을 주어 그자의 먼 친척인 척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했습니다."
"왜 숨겼는데."
"제가 누구인지를 안다면 곧바로 브리센의 기사들이 들이닥치리라 여겼습니다."
"이곳에 있는 사실을, 브리센이 어떻게."
"프레이르. 혹시 이런 이름을 아십니까."
"······ 왕비 프레이야의 오빠."
"그 자가 신분을 숨기고 이 영지에 있는 것도 아십니까."
이미 죽었다.
지금 외부에 알려진 프레이르는 그 모습으로 변장했던 휘트린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모를 오르테는 여전히 프레이르가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알아."
프레이르와 휘트린에 대해 알리는 대신 플란츠는 이렇게만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 그자의 정체는."
"엘프라고. 들었는데."
오르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음에 대해서는 그리 놀라워하지 않은 채였다.
"시종들은 왕궁에서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지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곳에서 본래의 이름으로 지내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만 만약 가능했다면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구해 조금 더 안심하는 방법을 택했을 겁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아 그리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신분을 속이는 것이 어렵다.
휘트린의 영주였던 칼리안이 베른 남매와 노튼 라미레즈 부부를 제 영지에 들이는 것에 칼리안이 아닌 르메인의 손을 빌어야 했을 만큼, 각 영지민들에 대한 각국 왕실의 관리가 철저했다.
양신전쟁 때문이었다.
전쟁 당시 인간들의 수가 급격히 줄었지 않나. 그러니 각 나라에서는 제 나라의 인구가 문제없이 다시 잘 불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을 최우선으로 확인해왔다. 덕분에 각 영지의 인명부에 오차가 발생될 수가 없으니 제 영지에 사람 한 명을 마음대로 숨겨두기도 어려울 수밖에.
"그런데 인간도 아닌 엘프가, 어떻게 신분을 속이고 이곳에 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 이상한 점이기는 했다.
심지어 휘트린의 귀족들은 전부 다 엘프였다. 그 많은 이들이 어떻게 신분을 속였을지, 칼리안은 물론이거니와 앨런도 알아내지 못했었다.
"······ 내 어머니인가."
오르테의 말을 들으며 한 가지 가정을 떠올린 플란츠가 말했다. 그러자 다행히도, 그래. 정말 다행히도 오르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누군데."
"그레이 브리센. 브리센 후작이 이곳 휘트린에 엘프들을 숨겨왔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된 뒤 왕궁에 알리고자 하였으나 에반이 죽고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후작위에 오르게 되어 일을 미루고 상황을 살피다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브리센 후작이, 왜."
"자세한 것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프레이야 왕비님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 프레이르가 그레이 브리센을 만났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당시 그 일로 실리케······ 전 왕비께서 그레이 브리센을 왕궁으로 불러 크게 역정을 냈던 일이 있었습니다."
실리케는 전 왕비가 아니었다.
왕궁 어느 곳에서도 실리케의 이름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실리케를 그리 부르는 것은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플란츠를 생각한 까닭일 터다.
"그레이 브리센과 프레이르가 손을 잡았었다는 말인가."
"정확하지 않으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후에는 그레이가 검의 길에 오르는 것에 대해 프레이르의 큰 도움이 있었다는 소문이 왕궁에 돌았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금세 잦아들었습니다."
"그럼 휘트린이 프레이르를 죽인 건."
이렇게 말하던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방은 조용했고 말을 흘려 듣기에는 내용이 무거웠다.
플란츠의 말을 똑똑히 들은 오르테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 휘트린이라 하셨습니까."
살짝.
고개만 끄덕인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데이른 남작령에는 왜 잡혀있었는데."
일단은, 질문부터.
왕세자의 질문에 제 궁금증을 곧바로 집어넣은 오르테가 대답했다.
"얼마 전 집으로 갑작스럽게 기사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아무 문장이 없던 검과 갑옷을 지닌 이들이었는데 그들의 수면향에 정신을 놓았다 깨니 지하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곳이 데이른인 것은 저를 구해 준 푸른 머리의 기사와 마법사들을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프레이야 왕비님과 프레이르에 대해 아는 것을 낱낱이 말하도록 했습니다. 칼리안 왕자님을 언제부터 모셨는지, 그레이 브리센과 저는 무슨 관계인지, 칼리안 왕자님과 연락을 주고받은 것이 있는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누구인지는."
"라시드 브리센입니다. 얼굴을 처음 보았으나 분명 맞을 겁니다. 전해듣던 인상착의가 같았습니다."
"······ 하."
"아는 바가 없었기에 숨길 내용도 없었습니다. 지금 이 말을 그자에게 똑같이 전했습니다."
"그래."
"입을 열면 풀어주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편하게 죽고 싶어 그리했습니다."
"탓할 생각 없어."
특별히 비밀이 될 말이 없다 여겨 전부 다 전했다 했다. 그레이 브리센과 라시드 브리센 사이에 알력 싸움이 인다면 칼리안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일이니 굳이 버티지 않고 입을 열었다고.
덕분에 고문은 피했으나 예상한대로 살려 내보낼 생각은 없던 모양이다.
취조가 끝나갈 즈음 성 안이 굉장히 소란스러워졌다 했다. 갑옷 소리와 검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했다. 영지전이라도 벌어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팔 대신 새의 날개를 지니고 사람의 다리가 달린 그런 몬스터였습니다."
"하피. 알아."
"감옥에는 그것을 풀어두고 성내에 마력탄을 설치하라는 명령이 오갔습니다. 오래지않아 그 몬스터가 속박에서 풀려났고, 감옥 안에 있던 이들을 한 명씩······."
"그래."
"저와 함께 이곳에 오게 된 외팔이 검사가 저를 살렸습니다."
노튼 라미레즈를 말함이리라.
"같은 감옥에 있던 자인데 상당히 오랫동안 그곳에 갇혀있었다 했습니다. 그 검사가 그의 아내와 저를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숨겨두었던 감옥 열쇠로 문을 열더니 미리 알아두었다던 비밀 통로로 하피를 유인해 넣었습니다. 그리고 터지기 직전의 마력탄들을 통로 속으로 전부 다 집어넣었습니다. 덕분에 하피에게 잡아먹힐 일은 사라졌습니다만 불길이 치솟아서 죽을 뻔한 것을 그 푸른 머리 기사와 마법사들이 구해준 겁니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 브리센의 하인이 널 만나러 왔다고 했었는데. 기억하나."
"왕궁에 있었을 때 말씀이십니까."
"그래."
"칼리안 왕자님께 재능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 무슨 재능."
"왕자님께 몰래 마법을 가르치면 성과가 있겠는지. 그것을 물었습니다."
플란츠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재능이 있다면 그레이 브리센이 왕자님의 뒤를 봐주겠노라고. 그리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칼리안 왕자님께 몰릴 마법사 세력과 그레이 브리센의 기사 세력. 그것으로 에반과 실리케 전 왕비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긴 것 같았습니다."
"······ 그래서."
"몰래 칼리안 왕자님을 모시고 그레이 브리센을 만났습니다. 함께 있던 마법사가 칼리안 왕자님을 만나뵙고 몇 가지를 따라해보시도록 하였으나, 왕자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셨습니다. 겁을 먹고,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칼리안은 분명 마법을 익혔다. 독학을 했다. 재능이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하셨습니다. 재능이 없는 척.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척. 겁이 많고 유약한 아이인 척. 그리 보이도록 행동하셨습니다. 물론 본래에도 겁이 많으셨습니다만."
"어째서."
그레이의 눈에 들었다면.
실리케를 견제하던 그레이가 칼리안의 뒤를 받쳤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지도 모르는데.
"그리 한다면······ 전하와 다를 것이 있습니까."
오르테가 말했다.
브리센과 손을 잡은 대가로 그들에게 목숨을 붙들리게 된 르메인의 모습과 다를 바 없게 되지 않았겠느냐고.
"왕자님은 영특하셨습니다. 지금도 그러하시다는 것을 곁에서 보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플란츠가 오래도록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사이 오르테의 말이 이어졌다.
"그 일이 실리케 전 왕비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그레이 브리센은 변경백령으로 가게 되었고 저는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실리케 전 왕비의 사람이 칼리안 왕자님의 다음 상급 시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였는데 이상하게도 그리 되지 않았습니다. 얀, 그 아이가 상급 시종이 되었다 들었습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지요."
내막을 알지는 못했겠으나 슬레이만이 손을 썼기 때문일 터다. 나이도 어린 얀의 출신이 보잘 것 없는 귀족 가문의 고아로 완벽히 뒤바뀌어 있었으니, 실리케도 억지로 시종을 바꾸는 대신 그냥 두었을 터였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오르테가 조심스런 말을 꺼냈다.
"휘트린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는데, 영지 휘트린을 말씀하신 겁니까."
"말고. 엘프."
"시스파니안이시여······ 그 자가 살아있었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플란츠가 한 번 더 눈을 찌푸렸다.
그것이 다행이라는 의미인지, 혹은 한탄인지.
똑똑한 머리로도 구분이 잘 되지 않아서였다.
* * *
무엇을 하든 열과 성을 다한다.
세크리티아의 새들을 다루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기사들을 훈련시키고 스스로의 검을 수련하는 것에도 최선을 다했다. 뿐만인가. 온 마음을 다 쏟아내어 데블란을 증오하고 체이스를 위했다.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 평생을 살아오다 죽음을 맞이한 칼리안이다. 그랬으니, 온 생을 홀로 갈무리당한 뒤 외따로 되돌아온 것과 다름 없는 세상 속에서 한 번을 더 살고 있다 하여 그러한 성향이 달라질 리가 없지 않나.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요동치던 더운 심장에 얼음창을 꽂아넣은 아르센을 아직까지 구박하는 것도, 여리디여린 순수한 마음 속에 그 험한 말들을 꽂아넣은 4층 술주정뱅이를 놀려먹는 것도, 모두 다 어쩔 수 없는 일인 거다. 무엇을 하든 열과 성을 다하는 성미였으니 뒤끝을 부리는 것에도 사력을 다할 수밖에.
아, 물론.
그렇다 해서 지금 칼리안이 지난 밤에 벌어진 일에 대한 뒤끝을 부리느라 휘트린의 손아귀에 달랑달랑 붙들린 완두콩을 구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아무렴 칼리안인데 그랬을 리가.
그렇다면 그 이유를 무어라 해야 할까.
- 쌔애애액!
뒤끝이라 하기 보다는 그냥.
나름의 협조를 해 준 것이라 해야 할까.
뭐. 아무튼 그런 거다.
휘트린의 심장을 향해 날아가던 물의 소용돌이가 돌연 방향을 바꾸었다. 생각지 못한 플란츠의 공격을 쳐내기 위해 날아오는 휘트린의 황금빛 기운을 피해서, 정 반대 방향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 쌔액!
- 카아아아앙!
뒤로 돌아선 칼리안이 쏘아보낸 붉은 칼날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에우리아와 칼리안조차 혼자서는 부서뜨리지 못했던 방어막이다. 그것을 외부에 있는 칼리안이든 안에 있던 플란츠든, 어떻게 부수겠나.
- 우웅······ 우웅. 우웅!
돕지 않고 가버릴 것처럼 굴던 칼리안이 칼날을 쏘아보냈다. 방향을 바꾼 플란츠의 마력이 닿을 곳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안팎으로 동시에 공격을 받은 휘트린의 방어막이 순간적으로 휘청였다. 에우리아와 플란츠의 마법을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니 그 한 번의 공격에 방어막이 깨지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대신.
- 파지직!
- 쌔애애액, 쌔액!
- ······ 화륵!
푸른 기운을 띤 번개와 얼음창, 그리고 불덩이가 동시에 만들어져 칼리안의 칼날이 박힌 곳으로 날아갔다.
- 쿠궁.
- 쿵······ 콰아아앙!
폭발음이 인다.
휘트린의 방어막이 다시 흔들린다.
- 지난 번이랑 다른 방어막인가보네요. 그 때는 통신이 두절된 대신 제가 해제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통신이 연결되는 대신 마나 흐름이 안 읽힙니다. 아까 누가 어떻게 한 것인지 모를 그 마법으로 안에서 다시 한 번 때려주면 깨질 것도 같은데.
그와 함께 참 느긋한 목소리가 플란츠의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목에 닿아 있는 휘트린의 칼날을 몸소 느끼면서, 긴 숨을 들이쉬고 내쉰 플란츠가 말을 전했다. 마법이 쏘아진 찰나의 순간, 둘의 대화가 그렇게 오갔다.
- 아직. 어려운데.
- 마력 다 쓰신 겁니까. 그것 한 번에.
- 많이 안 모아 뒀으니까.
- 서클은 대체 왜 만드신 건데요.
- 안 쓰려고.
- ······ 무슨 생각으로 휘트린을 혼자 만나신 겁니까. 마법도 못 쓰시면서, 검은 또 어디다 두고.
- 혼자 안 만났어. 놓쳤어.
일순간에 펼쳐진 방어막이었다.
조금 전.
눈부신 방어막에 튕겨지듯 밀려난 발칸의 대원들이 감옥 구석으로 내동댕이쳐지고, 그로 인해 멀뚱히 혼자 남게 된 카이리스의 왕세자가 검을 뽑아들었을 때.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인 휘트린의 방어막이 시나스타를 강하게 쳐냈다.
덕분에 검을 놓쳤다. 그리고 붙들렸다.
손에 피 한 방울도 안 묻히고 대사막의 전사들을 죽여 없앤 휘트린이니, 검을 떨군 완두콩이 뭘 어떻게 하겠나. 달랑달랑 붙잡혀야지.
"혹시나 일부러 잡히신 건 아닌가 했는데. 역시 형님은 참 약하십니다."
- 짖지. 곧 다시 쏠 수 있어.
칼리안의 목소리에 머릿속으로 답이 돌아온다.
이 와중에도 발칸의 대원들 앞에서 내 동생 짖는다 소리는 못 하는 순한 성정이라서.
- 자박.
피식 웃은 칼리안이 다시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선 채 휘트린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차피 수도로 가게 됐을 텐데 왜 이렇게 마음이 급해. 지금 당장 수도로 가고 싶었으면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융통성 없으신 내 형님 저하께 그런 요구를 하면 어떡해."
순간적으로 내리떨어진 칼리안과 마법사들의 연격에도 꿈쩍않는 방어막 안에서, 휘트린이 입을 열었다.
"이 이상 해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그리한다 해도 어차피 사형이 내려지리라는 것을 압니다."
"잘 아네."
"도망칠 생각 없습니다. 앨런 마나실을 불러 당장 카이리시스로 가게 해주십시오."
"왜."
칼리안이 짧게 물었다.
- 얼마나.
- 조금만 더.
- 알겠습니다.
"방금 왕자님께서 만나신 자는 데이른 남작령에 있던 자입니다."
"누구. 노튼 라미레즈?"
"네."
"그래서."
"남작령이 텅텅 비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겠지. 여기로 다 몰려왔으니까."
"다 몰려온 것이 아닙니다."
"휘트린. 똑바로 말해. 그래야 알아들어."
- 아직도?
- 아직.
"데이른 남작령에 있던 제온의 군사들이 이곳으로 전부 다 온 것이 아닙니다. 카이리시스로 갔을 겁니다."
"카이리시스에, 왜."
"그레이 브리센. 제온에서 그를 공격하기 위해 갔을 겁니다."
- 됐어.
"제가 가겠습니다. 제 손으로 죽일 겁니다."
- 쌔애애애액!
- 카아아앙!
휘트린의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푸른 물의 화살이 다시 한 번 쏘아져나갔다.
바로 그곳을 향해, 새빨간 검이 빛을 흩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