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장. 얻어낼 게 많아서(4)
칼리안.
독살된 것이 세간에 알려지지도 않은 전왕비 아이샤와 달리, 독살되었음이 명백했으나 누구도 그 사실을 입에 담지 못한 왕비 프레이야의 아들이다.
아이샤와 프레이야, 혹은 란델과 칼리안 중 어느 쪽이 더 억울할지를 가늠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칼리안에 대해 생각하니 그 시작이 함께 떠올랐을 뿐이다.
어찌됐건 칼리안은 그랬다. 명백히 독살되었으나 병사했다 알려진 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때문에 처음에는 애처로이 여기는 귀족들도 많았으나 그도 잠시. 귀족들의 눈길이란 결국 마땅한 자질과 힘을 지닌 '차기 국왕'에게 닿을 수밖에 없는 터라.
결국은 마르고 볼품없는 곁가지 끝에 핀 장미처럼 속절없이 아스라이 잊혀갔던 막내 왕자.
- 파스슷!
- 후두둑······ 후두둑.
그 막내.
칼리안에게 같은 것을 보이던 날의 기억을 되새기게 되었다.
'치우십시오. 전부, 죽여버리기 전에.'
그레이 브리센을 축출하기 위해서 카이리스 왕궁 안에 신성기사를 들였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 말했었다. 타국 군대의 힘을 빌어 제 정적을 없애려 드는 첫째 형을 향해 살기를 숨기지 않았었다.
어떻게 변하든 결국은 무상하리라 여겼던 붉은 눈빛이 생각났다. 호사스러운 꽃과 지독한 가시를 함께 지녔던 새빨간 눈매와 입매가 여전히 기억난다.
또한 냉염했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선하다.
'카밀론 가서 개 키울 겁니다.'
가축 사육에 대한 포부를 어찌나 사납게 밝히던지.
'항상 궁금하였다. 네가 어떻게 이리 변했을까.'
'덕분입니다.'
자신감이 성성했다 해야 할지.
독기가 넘쳐흘렀다 해야 할지.
'기사들은 돌려 보내마. 대신.'
그 자신감과 독기를 내리누르려 했었다.
란델을 끌어내리든 제가 직접 란델이 있는 곳까지 올라오든, 어떻게든 눈높이를 맞추며 절대로 허리를 굽히지 않을 사람. 제 울타리 안에 얌전히 들어앉아 있으면 얼마든지 품겠으나 만약 란델이 칼을 쥔다면 곧바로 심장을 겨눌 사람.
'너무 그리 자라지도, 벗어나지도 말거라.'
그래서 위협을 건넸다.
그럴 사람임을 그때 알아보았으니까.
'보기에 좋지 않으니.'
그 칼리안에게 위협이라니.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보다 무용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싶지만 그때는 그리했었다.
그때 내보였던 힘을 다시 내밀었다.
그날 처음으로, 그리고 지금 두 번째로.
- 사아아······.
이미 꺾인 꽃에 돌의 힘을 불어넣었다.
주어지는 힘을 받아들이고 감당해 줄 뿌리가 없는 탓에, 한계를 넘어선 생명력을 버텨내지 못한 꽃이 급격히 시들고 메말라 부서진다. 붉은 꽃잎도 날선 가시도 무엇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사그라든 장미가 대리석 바닥 위에 흩어지다 사라져갔다.
점점이 떨어지는 '장미였던 것'의 한없는 가벼움이 진득하고 묵직한 독물처럼 보인다. 그것이 실제로 진득하고 묵직한 까닭이 아니라 만개한 장미가 일순간에 생을 다하는 광경이 주는 스산함 때문이리라.
"독······ 이라니. 아닙니다, 저하."
"그렇다면 방금 보았던 광경은 무어라 설명할 텐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의심을 거두어 주십시오."
플란츠는 검사다.
마법을 익혔음을 아는 이들은 극소수다.
그런데 '마법은 물론이거니와 오러도 다루지 못하는' 플란츠의 손이 장미를 쥔 뒤 붉게 빛났다.
"만약 내가 독을 판별할 것을 대비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참담하군."
만약 이 붉은 빛을 알아본다면 바르지안 백작 역시 제온과 연관됐다는 뜻이 될 테고, 알아보지 못했으나 독이라는 말에 동요한다면 플란츠에게 독을 건넬 생각이나 계획을 지녔다는 뜻이 될 터다. 그 둘 모두가 다 아니라 하더라도 란델의 행방에 대한 의심 때문에 협조하지 않는 바르지안 백작을 좀 더 수월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었다.
한 번의 움직임으로 여러 이득을 노리는 것.
부수는 것을 좋아하고 언제든 사나워지며 싸움을 잘 하고 치미는 화를 참지 않는, 3층 사는 협박 전문가가 늘 그렇게 행동해오지 않았던가.
"게다가 나는 설명하라 했지 부정하라 하지 않았는데. 백작의 귀가 어두운 것인가."
뿐만인가.
칼리안은 사기에도 능숙하다. 실리케를 상대하기 위해 독차를 마셔가며 대대적인 사기극을 벌였던 전적이 있지 않나.
배운 것의 실천과 응용에 있어서는 이미 모범생인 플란츠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란델이 바르지안을 응시했다. 그리고 칼리안이 그러하듯 나지막한 말을 또박또박 덧붙였다.
"지금 내가 백작의 눈앞에서 증거를 보였음에도 의심을 거두라 하나. 내가 그리 해주리라, 일말의 기대감을 가져보는 것인가."
당황하여 경거망동하는 대신 눈을 꾹 감으며 생각하던 바르지안이 란델을 쳐다봤다. 그리고 와닿는 시선조차 짓누르는 듯한 연두색의 눈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저하. 저 장미를 가져다 확인하고 문제가 있다면 범인을 색출하겠습니다. 그때까지만 시간을,"
"내가."
란델이 바르지안의 목소리를 끊어냈다.
- 저벅, 저벅.
다시 발을 옮긴다.
창가에서 멀어진 란델의 긴 그림자가 바르지안을 뒤덮고 그의 뒤에 놓인 책상에까지 가 닿았다.
"곧 증인이며. 내가 본 것이 곧 증거인데."
서두를 것 없다는 듯.
바르지안의 코앞에 선 란델이 느린 말을 이었다.
"무엇을 더 확인하겠다 하나."
"······ 저하."
"전하의 수배령을 받들고 있는 내 시간을 멋대로 낭비했으면서. 이제는 백작의 무죄를 증명하겠다며 나의 시간을 또 요구하나. 나에게 독을 건네고도 백작의 억울함을 호소할 생각이 드는가."
억지다.
왕세자의 이름이 아니었다면 통하지 않을 말임을 안다.
품 속에 숨긴 비수를 드러내 보여주는 마법 물품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바 있으나 독을 분별하는 마법 도구라니. 겪은 적도 본 적도 없다.
만약 있었다면 그동안 체르밀 궁의 왕자들과 시엘라 궁의 왕녀들이 그렇게 많이 죽어나가지는 않았을 터다. 그 많은 왕비와 국서가 헤이시아 궁에서 피를 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덴의 손을 거쳐 전해진 모닝티에 독이 들어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같은 차가 3층으로 향할 일도 없었으리라.
그러니 억지 협박임을 란델도 잘 알고 있었다.
"저하."
"왜."
"란델 왕자님께서 무사하신 것은 맞습니까."
"그렇다 대답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 그렇다면."
그리고 당연히.
"제 영지의 어느 누구도 감히 세자 저하의 안위를 위협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수배 중인 라시드 브리센이 이곳에 숨어들어 참담한 일을 꾸민 것이 아닐지 의심됩니다."
바르지안 역시.
"허락하신다면 지금 당장 사람들을 은밀히 움직여 영내를 샅샅이 수색하고 라시드 브리센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찾아내겠습니다."
앞에 선 왕세자가 진정으로 독을 건네받은 것이 아니라 바르지안의 목을 당장 잘라낼 명분을 손에 쥐었음을 제대로 알아봤다.
란델의 안위를 확인하겠노라 고집을 부리다 목이 잘려나가는 것보다는, 앞에 선 왕세자의 말에 우선 따르며 휘트린 영지의 정황을 파악하는 쪽이 현명한 처사라는 생각도 드디어 하게 된 듯 보인다.
물끄러미.
란델이 저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을 충신같은 바르지안을 쳐다봤다. 그리고 한동안 고민을 이어나가는 척하다 입을 열었다.
"백작."
"네, 저하."
"오해라는 말을 믿고 너그러이 넘어가주는 나에게 다음 독이 전해지기까지 얼만큼의 시간이 남았을 것 같나."
"제 생각에는 사흘입니다, 저하. 사흘 내로 확인하여 더 이상의 암수가 저하를 향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내 생각과 다르군. 그리 되면 내가 죽을 고비를 세 번은 넘기게 될 것 같은데."
"······ 그럼. 내일 아침에 다시 인사를 드릴 때까지는, 저하께서 이곳에서도 안심하고 지내실 수 있도록 반드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내가 하루만 견디면 되겠나."
"네. 저하. 하루입니다."
"그래.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바르지안이 발을 물렸다.
소리죽인 걸음을 천천히 옮겨 귀빈실 밖으로 나가 방문을 닫았다. 문밖을 지키고 서 있던 키리에의 뒷모습이 잠시 보였다.
하루.
영지 안에 머무르고 있을 라시드 브리센, 혹은 남겨져 있을지 모를 라시드 브리센의 흔적을 찾아내기까지 하루의 시간을 줬다.
물론 란델이 그 사이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라시드 브리센과 같은 공기로 숨을 쉬는 일은 란델에게도 달갑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곧 키리에를 내보낼 생각이었다.
- 저벅.
다시 고개를 돌린 란델이 창가로 걸어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또 한 걸음.
거리낄 이유가 없는 장미 다발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티 하나 없이 피어나고 있는 붉은 장미에 손을 가져갔다.
"그것을 왜 또 만지나."
그러자 욕실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열어 둔 욕실 문 뒤에서 기척을 죽인 채 란델과 바르지안의 대치를 지켜본 사람. 드미레아로 변장 중인 시오나였다.
왕세자의 욕실에서 걸어나오는 소공작이라니.
만약 들킨다면 절대로 조용히 넘어가지 못할 소문이 될 모습이겠으나 이 자리의 누구도 그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동안 혹시라도 소문이 더 퍼진다면, 그 덕에 칼리안이 상단의 이름을 넘기는 정도로는 무마되지 않는다면, 그때에는 이 사태를 초래한 체르밀 궁 4층 거주자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런 생각에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한 란델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손대지 못할 이유가 있겠느냐."
"독이 있다면서. 손대자마자 녹아내릴 정도의 독이면 극독인가본데. 왜 또 만지려 드나."
란델이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돌려 시오나를 쳐다봤다.
"그런 독을 쓴 영주 대리인을 살려 돌려보내다니 카이리스의 왕족들은 마음들이 넓군. 물론 3왕자는 빼고. 그나저나 독을 판별하는 마법 물품이 있었던 줄은 몰랐는데 신기한 일이다."
시오나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역시 인간들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것인가. 대단하군."
그래.
시오나는 이 상황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왕자와 백작의 대화를 듣고 내막을 파악하기엔 그들을 겪어본 일이 적었던 터라. 칼 끝에 속내를 담아내는 법만 알았지 혀 속에 진심을 감추는 법은 모르는 소드마스터라서.
"되었다. 가서 쉬거라."
"그럴 생각이다. 가는 길에 그 장미 내가 버려주마. 해를 입을까 걱정되니 손 대지 말도록."
"······ 그냥 두어도 괜찮으니. 쉬거라."
"정말 괜찮겠나?"
"그래."
란델은 그냥 이렇게만 이야기했다.
많은 것을 설명하기엔 입이 번거로워서. 그렇다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건네지는 말에 답답함을 토로할 생각도 들지 않아서.
* * *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비록 행색은 남루하고 상처 없는 곳이 없었음에도 눈빛은 여전했다. 똑바로 눈을 들어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을 뿐더러 조금도 주눅들지 않는 것이 기억 속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둔 듯하다.
노튼 라미레즈.
칼리안이 성인식 로젤리타에 오르고 얼마 되지 않아 만났던 이였다. 신물을 훔쳐간 엘프 한 명을 뒤쫓겠다며 칼리안과 대치하다 칼리안에게 칼을 휘두른 죄로 사형에 처해질 상황에 놓였던 자였다.
'나한테 칼 뽑아든 대가로 그 팔 가져왔으니, 풀어주겠다는 소리야. 다른 영지에서 살 수 있게 조치도 해 주고 적당한 집과 농사지을 땅도 마련해줄 수 있어.'
그런 놈을 살려 도망치도록 도왔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후한 조건이 걸리는 거요?'
'위험할 수 있어서.'
물론 공짜는 아니었지만.
'시키시오. 뭘 하면 되는지.'
아무튼 노튼은 칼리안이 시킨 일을 훌륭히 수행했다. 그리고 칼리안은 그의 죽음을 가장시키고 그가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왔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까지 휘트린에서 새 신분을 얻고 살 수 있도록 조치를 해두었었다.
"오랜만에 뵙소, 왕자님."
감옥 한 구석에 마련된 취조용 테이블 반대편에 앉아있던 노튼이 자리에서 일어나 적당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꼴을 보던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당당한 모습이 그대로다 해야 할지.
그 새끼 참 여전히 버릇없다 해야 할지.
그것을 가늠하지 못하겠어서.
"그래도 인사는 하네."
"원수인지 은인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죽을 고비에서 살려놨으니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소."
노튼 라미레즈가 맞다.
히나가 잠시 들러 변장 여부를 이미 확인했다 하나 그 일이 없었다 해도 이 새끼가 그때 만난 진짜 노튼 라미레즈가 맞다는 것을 단박에 확신했을 것이다.
수도의 지그프리드 공작저에서 만났던 노튼, 당시 하얀 수리가 변장을 했던 노튼과는 확실히 달랐다. 말투는 둘째 치고 예의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는 저 태도부터 차이가 난다.
덕분에 재밌다는 듯 짧은 웃음을 터뜨린 칼리안이 말했다.
"은인이지, 당연히. 네가 칼 들고 설치는 바람에 자초한 거잖아. 그걸 내가 살려줬으니 당연히 고맙다 해야지 모르긴 뭘 몰라."
"그래서 내 팔이 잘린 일은 제쳐두고 인사했잖소."
"그게 끝이야?"
"더 받고 싶으면 떨어진 내 팔이나 찾아오시오. 그럼 고맙다 해드릴 테니."
"그건 못하겠네. 그럴 재주가 있으면 너보다 먼저 찾아다 붙여놓을 놈이 또 있는데 손을 못 썼거든."
"문앞에 서 있던 그 기사 말이오?"
"봤어?"
"봤지. 나를 데려다 놓고는 흘러내린 검대 하나를 못 매서 끙끙거리기에 내가 한손 쓰는 법을 좀 알려줬소."
"오자마자 큰일했네."
"보고있자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준 칼리안이 곁을 쳐다봤다. 이곳까지 칼리안을 안내한 뒤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노튼의 태도에 울그락불그락하는 얼굴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던 마법사를 향해서였다.
"자리 좀 비켜줘요. 나눌 말이 있어서."
"저도 들으면 안 되는 얘기 하실 겁니까?"
"그거야 모르지. 무슨 말이 나올지."
"왕자님 저한테 더는 비밀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서운합니다."
"더 많이 서운해지게 하기 전에, 나가요. 헤르츠 경."
"네. 나가겠습니다."
"참."
곧장 대답하며 자리를 벗어나려는 아르센을 다시 부른 칼리안이 생글 웃었다. 그리고 노튼의 옆자리를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휘트린 좀 불러다 줘요."
"이야기 마치셨던 것 아닙니까? 그 엘프는 왜 또 찾으십니까."
그러자 톡톡, 하고.
내 미친 따까리의 꽉 막힌 귓구멍 대신 죄없는 테이블을 짧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르센이 잽싸게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찾으실 수 있습니다. 남은 이야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바로 데려오겠습니다."
"바로는 말고, 한 이십 분 쯤 뒤에."
"네. 이십 분 뒤에 데려다 놓겠습니다."
"그래요. 나가 봐요."
"네, 왕자님."
달칵, 하고.
취조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천장 바로 아래에 나 있는 작은 창을 통해 스며드는 햇살을 잠시 쳐다보던 칼리안이 마력을 움직였다. 반투명한 사일런트 막이 칼리안과 노튼을 둘러싼다.
"하얀 수리. 언제 만났어."
곧바로 꺼내진 본론에 잠시 생각을 해보던 노튼이 대답했다.
"그게 누구요."
"앞도 못 보고 듣지도 못 하고 말도 못 하던 놈. 세크리티아의 세작인데. 만난 적 없어?"
"아."
짧은 탄성을 낸 노튼이 눈을 부릅떴다.
"그 새끼 어디에 있소. 내가 찢어죽일까 하는데."
"세뉴강 건너편에."
"죽었소?"
"그렇지."
"왕자님이 죽였소?"
"그랬지."
"고맙소."
고맙다는 말이 바로 튀어나온다.
제 목숨 살려 도망치게 만든 것에도 꿈쩍을 안 하던 놈이 하얀 수리가 죽었다는 말에 곧바로 태도가 달라진다.
허탈하게 웃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여기 온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얀 수리는 어떻게 만났는지, 왜 여기가 아니라 옆 동네 감옥에서 불타 죽을 뻔했는지. 빼먹지 말고 낱낱이 말해."
"얘기하면. 풀어줄 거요?"
"문제가 없으면 풀어주겠지."
"문제가 있을지 없을지는 어차피 왕자님 마음 아니오."
죄가 있어도 없다 할 수 있고 죄가 없어도 있다 할 수 있으니. 늘 포식자의 입장일 수밖에 없는 칼리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고."
"내 아내 먼저 풀어주시오. 이 일과 아무 관련이 없소. 풀어주면 말하겠소."
"이 일이라 말하는 그게 뭔지 먼저 말해. 들어보고 문제가 없으면 너도 네 아내도 다 풀어줄 테니까."
"그 말을 어떻게 믿고 입을 열라는 거요? 그놈들처럼 내가 아는 것들만 쏙 빼먹고 내버릴지 어떻게 알고."
"누가 믿어달래? 지금 나를 몰라서 그딴 소리를 해?"
노튼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칼리안이 갈림길의 표지판 한 쪽을 두드리듯 말했다.
"너. 한 손으로 칼 다루는 법 알지."
"익혔소. 똥줄빠지게."
"나한테 덤볐을 때만큼 칼 쓸 수 있어, 없어."
"더 잘 쓰오. 지금 같으면 실수 안 할 거요."
"그러니까 얘기 해. 제대로 도움 될 말이 나오면 저기 밖에 있는 놈들이 입고 있는 하얀 옷, 너한테도 줄 테니까."
한 팔을 잃은 기사에게 한 손으로 검을 다루는 법을 칼리안이 직접 가르친다 한들 그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다 교정해줄 수는 없다. 갑옷을 챙겨 입는 법부터 부츠 끈을 묶는 것까지, 아무리 칼리안이라 해도 그런 것을 해본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팔을 잃고 생활하기 전에 목숨을 놓쳤으니.
그런 것을 직접 가르쳐줄 필요는 없다 해도 곁에서 보고 따라해가며 빨리 익숙해질 수 있을 만한 놈이 옆에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터였다.
딱 봐도 칼리안에 대한 정보를 캐내느라 이용당하다 쓸모가 사라졌으니 이제 죽도록 내버려진 놈인 게 뻔한데. 버르장머리도 없고 예의도 없고 한쪽 팔도 없는 저 새끼가 이제 어디로 가서 아내와 같이 제온의 눈을 피해가며 살겠나 싶기도 했고.
"정말이오?"
"구린 것만 안 숨겨놨으면."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누군가를 취조할 때 늘 그러했듯 노튼의 눈동자와 눈썹, 입가와 턱의 근육, 귀의 색깔, 어깨의 움직임을 싹 다 눈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얘기해. 거짓말 할 생각 말고."
노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말을 칼리안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모두 듣는 내내 눈동자 한 번을 돌리지 않은 칼리안이 긴 숨을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말을 하려는데.
- 콰아아앙!
생각지 못한 폭발음이 밖에서 들려왔다.
노튼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고, 칼리안이 그런 노튼의 어깨를 눌러 다시 앉히며 문을 쳐다봤다.
- 칼리안.
그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끼 코끼리의 것을 하도 빼앗아가는 통에 아예 그냥 줘버리기로 했던, 플란츠의 통신용품에서 전해진 소리다.
- 무슨 일입니까.
- 휘트린. 아직 못한 말이 있는 모양인데.
- 네?
- 잡혀서, 지금.
그와 함께 꽤 긴 생각이 칼리안의 머릿속으로 뭉텅 들어온다. 미간을 찌푸린 칼리안이 방금 전해진 것을 열었다.
- 벌컥!
그리고 노튼을 내버려둔 채 취조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지하 감옥의 입구에 선 휘트린이 보인다.
그 앞을 가로막은 휘트린의 방어막이 보인다.
그리고 그 속에, 얌전히 휘트린의 손에 붙들려 있는 완두콩과 완두콩의 목에 닿은 짧은 칼날이 보인다.
플란츠가 오르테를 만났다.
그 뒤 휘트린에게 확인할 일이 있어 내려왔다 했다. 그랬더니 휘트린은 지금 당장 자신을 수도로 데려다달라 요구를 했단다. 플란츠는 당연히 거절했고, 그 뒤 벌어진 것이 지금 상황이다.
왕세자의 시해를 시도한 이를 이런 외진 영지에서 처형하지는 않을 테니까. 칼리안이나 발칸의 손에 목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당장 수도로 압송이 될 테니까.
- 저런 수까지 써 가며 그레이 브리센을 만나려 하는 이유가 대체 뭔지.
- 모르겠는데.
- 아무튼 알겠습니다.
플란츠에게 대답을 전한 칼리안이 휘트린을 잠시 쳐다봤다. 그리고 플란츠를 향해 말을 이었다.
- 저 먼저 가 볼게요. 노튼 라미레즈가 혼자 있어서. 얼른 해결하고 오십시오.
- ······ 야.
플란츠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 연두색 눈에서 시선을 뗀 칼리안이 휘트린을 보며 말했다.
"나를 협박하겠다는 거야, 돕겠다는 거야."
뚝뚝.
완두콩의 모가지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에는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은 채로.
"마음대로 해. 그런데 별로 소용은 없을 거야. 내 형님 저래 봬도 칼도 잘 쓰시고 활도 잘 쓰시고 싸움도 잘 하시는 분이라서."
아. 욕도 잘 하셔.
조용히, 하지만 또박또박 덧붙은 말에 플란츠가 눈꼬리를 확 찌푸린다.
"진짜로. 되게 잘."
찌글찌글해진 완두콩이 인상을 쓰든 말든. 어깨를 으쓱여 보인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그리고 정말로 마음대로 하라는 듯 뒤로 돌아섰다. 그러더니 아예 취조실 쪽으로 한 걸음을 뗐다.
그러자,
- 우웅, 우우웅!
마력이 움직인다.
청량한 물의 마력이 순식간에 모여든다.
찰나의 시간에 집결된 물의 소용돌이가 휘트린의 심장을 향해 치닫는다.
- 쌔애애액!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아니, 세상에.
이건대체누구의마력인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