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514화 (515/527)

제90장. 얻어낼 게 많아서(3)

자박.

자박. 자박.

자박.

- 우뚝.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소리를 만들어내며 계단을 내려간 발이 조용히 멈췄다. 그러자 문을 지키고 서 있던 두 명의 기사가 정중한 예를 보였다.

"칼리안 왕자님을 뵙습니다."

붉은 눈이 가만히 움직여 그 둘을 바라본다.

빌헬름 관에 자주 가지는 않았던 까닭에 여러 번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낯이 익은 이들이다. 더욱이 그들 중 올리브색의 머리를 지닌 기사는 체르밀 궁의 입구를 경비하는 업무도 맡고 있는 사람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같은 올리브색의 머리카락을 지녔다는 그의 오빠도 얼마 전에 발칸에 들어왔다고, 자신과 키리에 뿐 아니라 또 다른 남매 대원이 생긴 것에 반가워하던 히나의 말이 떠올랐다.

"반갑습니다, 세고비아 경. 그리고······."

덕분에 두 기사를 향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을 수 있었다.

"아직 한 손만 쓰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텐데. 움직여도 괜찮습니까."

히나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와 함께 서 있던 또 다른 한 명의 기사에게 이런 담담한 말을 건네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제 이름을 부르기에 앞서 건네진 우려의 말에 싱긋 웃어 보인 갈색 머리의 기사가 답했다.

"다행히 제가 쓰는 검이 가벼운 편입니다, 칼리안 왕자님. 몇 차례 대련을 했는데 검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헤르츠 부군단장에게 업무 복귀를 허락받고 오늘부터 다시 나왔습니다."

히나 덕에 상처는 다 나았다.

이미 사라진 팔을 되붙일 수는 없었으나 활동에는 지장이 없다 했다. 아직 빈혈기가 남았지만 그 역시 심하지 않다는 말이 웃음과 함께 전해진다.

"······ 그래요."

그러나 칼리안은 다행이라 말하지 못했다.

코코의 목에 매어 둔 리본이 풀릴 때마다 코코가 엄마 말고 플란츠를 찾아간다고, 이게 다 플란츠에게 리본 매 주는 법을 알려준 기사놈 때문이라고, 툴툴거리듯 이야기하던 아르센의 목소리가 생각나서.

그보다 더 오래된 언젠가, 혹은 이제는 오지 않을 미래 어느 날의 언젠가. 새하얀 검에 어린 새파란 오러에도 멈칫거리지 않고 달려들다 그 순백의 검에 팔을 잃고 심장도 꿰뚫리게 되었던 잿빛 갑옷의 갈색 머리 기사가 함께 생각나서.

'제온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대원은 없습니다, 왕자님.'

'부상자도 없지는 않았을 텐데, 헤르츠 경. 중상자가 있습니까.'

'세 명 있었습니다. 두 명은 다행히 앞으로의 생활에 큰 문제가 있지는 않겠습니다만 한 명은 팔이 절단되었습니다.'

'기사입니까.'

'네. 기사입니다.'

'······ 이름은.'

과거의 발칸은 마법사들로만 이루어졌던 까닭에 얼굴을 가린 '하얀 악마들' 역시 모두가 마법사였다. 그러니 발칸에 속했을 리 없을 왕실의 기사들은 잿빛 갑옷을 입고 얼굴을 내어 두고 있었다.

덕분에 세크리티아의 성벽 앞에서 마주쳤던 기사들과 지금의 발칸 대원이 겹치는 적이 이미 많았다.

많았지만.

"왕궁으로 돌아가면. 경의 검술을 봐주도록 하라고, 형님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 하겠다 했고."

이렇게 그 일을 '갚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저를, 제 검술을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목소리로 나지막이 이야기한 칼리안이 기사를 쳐다봤다.

"그러니 그때까지 무리하지 말고 지내요. 괜한 습관이 들기 좋을 때니 그러지 않도록 신경쓰면서."

"왕자님. 저는 기사 베른 경에게 배워도 됩니다. 다른 검술 교관들도 있으니 괜찮습니다. 저 때문에 왕자님께서 귀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셔도······."

송구스러움이 한가득인 말이 돌아왔다.

키리에처럼 칼리안의 전속 기사인 것도 아니면서 언감생심 어떻게 칼리안에게 검을 배울 생각을 하겠나. 히나가 칼리안을 언급하며 걱정하지 말라 했다지만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런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말을 듣던 칼리안이 시선을 내렸다.

기사의 허리에 매두는 새하얀 가죽 검대의 고정 끈이 길게 흘러내려 있는 것이 보인다. 풀리지 않도록 묶기는 했으나 길게 남은 끈을 어찌하지 못해 내버려 둔 것이리라.

칼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기사의 허리춤에서 흘러내린 긴 끈을 잡고 천천히, 겉으로 보이는 흉터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움직였다.

"목 대신 팔을 잘린 것인데. 그렇게 해서 이미 운 좋게 한 번을 살아났으면."

사락사락.

나비 매듭을 짓는다.

"다음에는 실력으로 살아야지. 제대로."

사락사락.

가는 끈이 움직이는 소리 사이로 나지막이 흘러나온 미성이 제 기사에게 닿는다.

"······ 안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나하나가 살아야 군대가 살고."

"네. 맞습니다."

"그래야 언제까지고 경들이 나를 살리지."

발칸은 칼리안의 것이다.

스스로를 살리기 위해 칼리안이 만든 칼리안의 군대다.

르메인이 같은 것을 구상했고 앨런이 도왔으며 아르센이 이끌고 플란츠가 키워냈다 한들, 르메인의 명을 받고 앨런을 경외하며 아르센을 따르고 플란츠의 편을 든다 한들. 어찌됐건 발칸은 칼리안의 군대다. 결국 칼리안의 것이다.

"알겠습니다, 왕자님. 쓸데없는 습관 들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지내겠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기사가 답을 했다.

"그래요."

많이 아팠느냐, 상심이 크지는 않느냐, 너무 걱정 말아라, 그래도 의연해 보이니 다행이다.

앨런과 아르센과 플란츠가 해야 할 말을 가로채 건네는 대신 고개만 끄덕인 칼리안이 보기 좋게 매듭지어진 끈을 내려놨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위고 경."

'과거'에는 몰랐으나 이제는 잘 알고 있는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긴 숨을 들이쉬고 내쉬듯이.

- 달칵.

잠시 멈췄던 3왕자의 발이 움직인다.

지하 감옥의 입구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다시 한 번 건네지는 두 기사의 예를 받은 칼리안이 걸음을 옮겼다. 자박, 자박.

한 팔이 없는 또 한 명의 칼잡이.

노튼 라미레즈가 있는 곳을 향해서.

자박.

자박. 자박.

* * *

붉은 장미.

향이 참 좋은 붉은 장미가 꽂혀 있었다.

란델의 영지이기에 영주성 곳곳에 장미 나무가 있었다. 그것이 란델이 머무는 귀빈실에도 장식되어 있었다.

밤 사이 그 장미에서 퍼진 향이 온 방에 가득하다.

그것을 눈여겨 보았었다.

지금 이 순간 파비안을 방문한 것은 란델이 아닌 '플란츠'이기 때문이다.

'플란츠 왕세자가 꽃을 꺼린다.'

이런 사실을 아는 귀족들이 많았다.

플란츠가 자리하는 회의나 연회장에서 꽃 장식이 빠지게 된 일, 곁에 선 이로부터 향기가 짙게 퍼지면 오래지 않아 자리를 비우던 플란츠의 행동들, 체르밀 궁의 4층에서 꽃향기가 나는 향수를 주문한 일이 전혀 없다는 소문, 그런 것들로 말미암아 알음알음 이야기가 퍼졌다.

그러니 알 것이다.

파비안의 영주 대리인이 어지간해서는 수도로 걸음하지 않는다 하나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 한아름이 넘을 듯한 붉은 장미를 방에 꽂아두었다.

서서히 빛을 드리우는 햇살 아래 그 붉음을 더 드러내기 시작한 장미에서 눈을 뗀 란델이 고개를 돌렸다.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었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영주 대리인, 바르지안 백작을 향해서였다.

'부숩니다.'

키리에의 대답이 떠오른다.

칼리안은 어떻게 화를 내는지.

그에 대한 키리에의 첫 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물론 그렇다 하여 도움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란델 역시 화를 내는 칼리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물은 것이 아니지 않나. 그레이 브리센의 허리와 헤이시아 궁이 어떻게 되었는지 란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 당장 치우십시오. 전부, 죽여버리기 전에.

게다가 날을 바짝 세운 칼리안을 가장 많이 대해왔던 이는 분명 란델일 터다. 눈 속의 칼도, 입 속의 칼도, 흘러나오는 기운 속의 칼도, 란델의 앞에서는 숨긴 적 없던 칼리안이 아니던가.

그러니 화를 내는 칼리안이 독을 뿜어대는 것을 몰라 물었을 리가.

때문에 란델은 키리에를 다시 쳐다봤었다.

그리고 키리에의 답을 다시 듣게 되었다.

'득을 보기 위해 화를 낼 때와 버리기 위해 화를 낼 때가 다릅니다. 가르치고자 화를 낼 때와 다스리고자 화를 낼 때가 다릅니다. 살필 생각으로 화를 낼 때와 이길 생각으로 화를 낼 때가 다릅니다. 비단 아랫사람을 대할 때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든 그렇습니다. 란델 왕자님께서도 겪어보셨지 않습니까.'

한 마디로, 화를 내는 모습이 매번 다르다는 뜻이다.

4층 사람은 화가 없어서 문제고.

3층 사람은 화가 많아서 문제고.

플란츠를 옥죄듯 이야기할 때, 라시드를 끌어내려둘 때, 그리고 르메인의 망토에 장미가 꺾여나갔을 때. 그 때를 제외하고는 화를 드러내본 적 없던 란델이 고개를 들었다.

"그레이 브리센 후작이 왕궁에 억류된 사실을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플란츠 왕세자 저하."

"그가 주장한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라시드 브리센이 필요하다. 하루속히 확인하여 체포해야 하니 서둘렀으면 좋겠는데."

플란츠의 낮은 목소리에 바르지안이 잠시 침묵했다. 무언가를 한동안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던 입이 잠시 뒤 열렸다.

"솔직한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인내심을 부리듯 잠시 눈을 감았다 뜬 란델이 말했다.

"그래."

"플란츠 왕세자 저하의 명을 듣는 것이 란델 왕자님께 단비가 될지 폭우가 될지 가늠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는 지금 전하의 수배령을 받쳐들고 찾아왔는데. 전하의 명을 앞에 두고 형님에 대한 득실을 계산하겠다는 것인가."

"란델 왕자님의 안위가 걱정되어 그렇습니다."

"무슨 안위."

"휘트린 영지를 시찰하던 중 확인할 일이 있다며 수도로 향했다 했던 란델 왕자님이 지그프리드 영지로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엘프들의 도시로 찾아갔을 때, 란델은 '카이리시스에 확인할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휘트린 외성을 빠져나왔었다. 그 뒤 다누를 만나고 지그프리드령에서 하루를 쉰 뒤 휘트린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길을 나섰다. 파비안으로, 플란츠의 행세를 하면서.

"그런데."

"그 뒤 휘트린으로 돌아간 란델 왕자님은 곧바로 문을 닫은 채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다 합니다."

"그래서."

"저하. 란델 왕자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휘트린에 란델이 돌아다니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란델이 지금 플란츠의 얼굴을 만들어 붙인 채 이곳 파비안에 와 있으니까.

물론 지금쯤이면 휘트린에 돌아간 플란츠가 란델의 흉내를 내고 있을 터였다. 슈린츠에서 체이스로 변장했던 대사막 늑대의 마법 물품을 챙겨두었다 했으니 말이다. 다만 그 소식이 아직 파비안까지 전해지지는 않았을 테니 란델의 부재를 의심스럽게 여기는 것이리라.

"백작이 아는 바와 같다. 형님께서는 지금 휘트린에 계신다."

"그렇다면, 저하. 이곳 파비안과 휘트린의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란델 왕자님은 왜 동행하지 않았는지를, 왕실의 군대가 왜 전부 다 휘트린에 남아있는지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의심이 섞여있으니 대답해야 할 필요가 없을 듯 한데."

어차피 플란츠도 휘트린으로 돌아갔다 하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변장을 풀까. 그렇게 하면 이런 자잘한 충돌 없이 곧바로 일을 진행할 수 있을 텐데.

잠시 생각하던 란델이 바르지안의 눈을 쳐다봤다.

그 속에 든 것이 정말 충성일지, 정말로 란델의 안위를 걱정하여 이런 무례를 범하면서까지 왕세자와 대치를 벌이는 것일지. 그런 것을 잠시 궁금해하다 입을 열었다.

"나를 취조하겠다는 심산은 아니었으면 좋겠군, 백작."

"취조라니. 아닙니다. 란델 왕자님의 안위를 궁금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어찌 감히 저하께 다른 의도를 두고 질문을 드리겠습니까."

"그렇다면 형님에 대한 걱정에 잠시 선을 넘은 정도로 여겨도 되겠나."

바르지안이 입을 다물었다.

내리뜨고 있던 눈을 들어올린 란델이 그런 바르지안의 잿빛 눈을 쳐다봤다.

"······ 네. 그렇습니다, 저하. 란델 왕자님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에 제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

평소 꿰뚫어보는 것을 참 잘 하는 란델이다. 플란츠는 물론이거니와 칼리안 역시 란델의 앞에 무언가를 숨겨 둘 생각을 접어두지 않던가.

칼리안처럼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법은 모른다지만, 앞에 선 이의 속내에 담긴 것이 흙탕물인지 샘물인지를 알아보는 법을 스스로 배운 이가 란델이기 때문이다. 속셈을 감춘 채 다가서는 이들로부터 스스로를 직접 지켜가며 살아와야 했던 까닭에 그리 되었다.

그런 란델이 평소 눈 밖에 벗어난 적이 없던 바르지안을 깊숙이 바라보다 결정을 내렸다. 계획한대로, 변장을 풀지 않고 '플란츠'로서 바르지안을 계속 상대하기로.

"그래."

"감사합니다, 저하."

너무 달라서였다.

평소 란델을 대해왔을 때와 지금 '플란츠'를 향한 바르지안의 눈빛이 아주 많이 달라서였다. 그것이 어쩐지, 자신이 지지하는 왕자의 경쟁자를 보는 눈으로 보이질 않아서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란델이 발을 옮겼다.

- 저벅.

- 저벅, 저벅.

장미 덤불이 피어난 듯한 창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창밑에 놓인, 금박 장식이 둘러진 화병에 손을 뻗으며 생각을 했다.

언제 화를 내는지, 어떻게 화를 내는지.

칼리안의 행동에 대해 키리에가 언급한 그 말을 가만가만 생각해보며 입을 열었다.

"백작이 형님에 대한 걱정에 잠시 선을 넘은 것이 맞다 하였고 나는 알겠다 하였는데. 무엇이 고맙다는 것인지 모르겠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항명이 아닌가. 전하의 명을 수행 중인 나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인정을 하였으니."

란델을 걱정해서 선을 넘은 것으로 여긴다 했지, 그렇게 여기고 기특해하는 마음에 넘어가 주겠다고 말 안 했다.

"게다가 백작의 태도는 라시드 브리센을 내어주기 싫어하는 자의 경계로 보이는군. 밤 사이 조사를 미룬 것이 아니라 이미 그에 대해 낱낱이 알고 있기 때문에 조사가 불필요했던 것인가. 그런 사실을 숨기고자 도리어 나에게 불온한 질문을 건넨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하."

"아니라면. 그 말을 믿게 할 근거를 보여야 하지 않나. 란델 형님의 행방을 두고 계속하여 꼬투리를 잡아가면서 시간을 끌려 들지 말고."

"시간을 끌려 한 적 없습니다. 오해를 하셨습니다, 저하."

"오해라."

조용히 중얼거린 란델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탐스럽게 피어오른 장미 한 송이를 집어들었다.

붉은 꽃을 꺼내드는 손길에 작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린다. 그것을 들은 바르지안이 고개를 들었다.

옅은 에메랄드빛 머리카락 아래로 연두색의 눈동자가 보인다. 그 눈동자에 새빨간 장미가 가득 담긴 것이 보인다. 장미를 든 손에 붉은 기운이 어린 것이······.

붉은 기운.

그것이 왕세자의 손에 어린 것이 보인다.

생각지 못한 광경을 목도하게 된 바르지안의 눈에서 처음으로 침착함이 사라졌다. 날카롭게 빛나던 눈에 곧 경악이 담긴다.

- 파스슷!

붉은 꽃송이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검은 재로 화한 그것이 점점이 바닥으로 떨구어졌다.

후두둑 후두둑, 검은 재가 마치 진득한 독처럼 바닥으로 떨구어진다.

"······ 이곳에 오면 독을 조심하라 하여 준비를 해두었는데."

란델이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을 실제로 겪을 줄을 몰랐군."

란델이 바르지안을 직시했다.

마치 독을 분별할 마법 물품을 준비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것을 이용해 장미에 섞인 독을 찾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노기를 가라앉힌 낮은 목소리가 바르지안을 향한다.

"항명이 아니었다면, 이것이라도 설명하거라."

그래.

칼리안은 화를 잘 낸다.

그런데 사기도 잘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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