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장. 얻어낼 게 많아서(2)
키리에는 귀 밝은 하프엘프다.
엘프들 중에 더러 귀가 밝은 이들이 있어서다. 휘트린도 마찬가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키리에는 하프엘프이기 때문에 귀가 밝다.
히나는 치유력을 가진 하프엘프다.
휘트린처럼, 엘프들 중에 더러 치유력을 지닌 이들이 있어서다. 청력은 일반적인 인간과 다르지 않지만 치유력을 쓸 줄 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하프엘프.
가끔씩 상기시켜 주어야 '아 맞다 나 하프엘프였지'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다 다시 방긋거리며 짖기 시작할 바로 그 하프엘프.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는 무슨 능력을 지녔나.
"글쎄······."
칼리안은 프레이야와 르메인의 아들이다. 그리고 프레이야는 인간의 외모를 가졌던 돌연변이 엘프였다. 그러니 칼리안도 무언가 하프엘프다운 것이 있을 법 했으나. 글쎄.
"······ 모르겠네."
모르겠다.
얼굴이 예쁜 것은 프레이야를 닮은 까닭이고 프레이야는 엘프라서 예쁘다 하기 보다는 그냥 예뻤다. 키리에 만큼은 아니라 해도 귀가 밝은 것과 어둠을 잘 보는 것은 것은 엘프이기 때문이 아니라 소드마스터라서다. 오러를 다시 쓸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청력도 평범했다. 치유력은 당연히 못 쓴다.
안 그래도 잘난 곳 참 많은 인물이니 거기에 뭐 하나가 더해지거나 덜어진다 한들 티도 안 날 칼리안이긴 하다.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또 한없이 이기적이게 마련이지 않나.
"예지력은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예지력인가.
체이스를 다시 마주하게 되었던 날 괜스레 마음이 설렜다거나, 카이리스 왕궁으로 텐실의 신성기사를 불러들였던 란델의 기행을 이유없이 눈치챘다거나, 옛 상급 시종 오르테에 대한 생각이 요즘 들어 많이 떠올랐다거나.
혹은.
"······ 또 무슨 소리를 준비하시는지."
"갑자기 궁금해서요. 아무래도 있는 것 같아서."
"반말."
"같아서 말입니다, 지순하신 플란츠 형님 저하."
앞에 앉은 술주정뱅이의 얼굴이 하나도 붓지 않으리라는 것을 사실은 은연중에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었다거나.
그런 예지력 말이다.
그러니 예지력이 있나, 하고.
방긋방긋 웃으며 말도 안 되는 일을 기대해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굳이 그렇게 도무지 못 다룬다 하시는 마법 말고는 술에도 강하시고 칼도 쓸 줄 아시고 활도 쏠 줄 아시고 싸움도 잘 하시고 알고보니 놀랍게도 욕도 잘 하시는 형님께서는 하실 줄 아는 것이 그렇게나 많은데 그런 형님께 애지중지 아낌을 받는 어여쁜 동생이라면 응당 다방면으로 재능이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눈을 뜨고 지금까지 심도있는 고민을 이어오다 혹시 저에게는 예지력 같은 게 있는 것은 아닐까 짐작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하울링을 했다.
"너."
"네."
"나가."
"제 방입니다, 정순하신 플란츠 형님 저하."
칼리안이 배실배실 웃었다.
그리고 위층 사는 술주정뱅이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술에도 강하시고 칼도 쓸 줄 아시고 활도 쏠 줄 아시고 싸움도 잘 하시고 욕도 정말 잘 하시는 형님께서 하실 줄 아는 것이 참 많다 보니 사소한 것은 잊으실 수 있겠습니다만 어쨌거나 여기는 제 방인데 형님께서 저에게 나가라 하시면 아우 된 이 사람이 얼마나 당혹스럽고 또 난처······."
"야."
"네."
"그만."
"왜요. 재밌는데."
"그만 좀 짖······."
둘만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얀도 있고 레릭도 있었다.
때문에 짖지 말라는 말을 멈춘 플란츠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평소에는 잘 마시지도 않는 얼음 가득한 물을 꽤 오랫동안 마시고 내려놨다.
얼른 다가온 레릭이 빈 잔에 물을 채우며 알게모르게 칼리안을 향한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오는 사이, 윗층에 사는 술주정뱅이를 향해 씩 웃어보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게 바로 숙취라는 겁니다, 양순하신 플란츠 형님 저하."
"······ 안다고······."
그러니까 시스파니안이시여.
오늘은 반만 감사하고 반은 안 감사할 겁니다.
"저하. 많이 불편하시면 치유사 베른 경이라도,"
"싫어."
"하지만, 저하."
"히나한테 얘기하지 마."
앞에 앉아 계신 4층 술주정뱅이, 아니. 이렇게 말씀드리면 못 알아들으실 지도 모르니까. 앞에 앉아 계신 저기 저 희멀건한 형님 저하 저 분도 숙취라는 것을 겪고 계시네요. 조상님의 공정한 축복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네.
감사를 드리기는 드리는데.
"그래도 다행입니다. 오늘 할 일도 많은데 딱 봐서는 지난 밤에 세레누스 반 병을 막힘없이 털어 드신 분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겁니다. 평소와 다를 것이 전혀 없네요. 아 이것 참······ 티가하나도안나서정말다행이다그쵸."
그렇게 울고 술도 퍼먹고 고개까지 처박고 잠드신 분 낯이 왜 저렇게 멀끔합니까. 왜 또 저만 대체 왜 저한테만 축복 반만 주셨습니까. 따지고 보면 더 많이 우는 것도 저고 제가 술도 더 많이 퍼먹는데요. 왜 저는 안 챙겨주십니까.
방금 전에 공정하다 말씀드렸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반만 공정하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스파니안님.
"입 좀. 칼리안."
그건 축복이 덜한 것이 아니라 네 놈이 울 때 눈을 비벼대서 그런 거라고.
지극히 위대하고 사려깊은 시스파니안이 이런 대꾸를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는 있는지.
"억울해서 그럽니다."
"뭐가."
체르밀 궁 4층에 사는 술주정뱅이와 그 아랫방에 사는 별 능력 없는 까만 고양이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제가 어제 형님 둘러메고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조심조심 형님 방 창문으로 숨어드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해뜨자마자 동생 방에 쳐들어오셔서는 얌전히 자고 있는 무구한 동생에게 수고했다 한 마디도 없이 또 그런 몹쓸 내기를 거셨으니 하는 말 아닙니까."
"그만."
"얀이 또 기함하는 것 못 보셨습니까. 뿐만아니라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온 힘을 다해 이겼으니 망정이지 못 이겼으면 한 마디 말도 못 하고 평생동안 가슴 속에 못다한 말을 한가득 품은 채로 늙어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형님 정말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형님 동생 아침잠 많은 걸 그렇게 이용해먹는 건 대체 누구한테 배우신 겁니까."
"······ 조용히 좀. 하라고."
"뭘요. 왜요. 체스에서 형님이 이기면 형님 어제 술 드시고 주사부리신 것 가지고 짖지 말라 하셨고 제가 이겼으니까 형님 어제 술 드시고 주사부리신 일에 대해 짖는 중인데, 왜요."
아······ 시스파니안이시여.
제 미친 동생 새끼한테 사람 말 하는 법 좀 가르쳐주시면 안 됩니까. 이 와중에 제가 짖는다 하는 것까지 시종들에게 알아서 다 알려주는 저 망할 동생 새끼한테 사람 말 좀 가르쳐주시면 안 됩니까.
"칼리안."
"네."
"나가."
"제 방입니다, 존경해 마지않는 유순하신 플란츠 형님 저하."
이번 후손들은 하츠아라의 피만 흐르는구나, 신기하게도.
하고.
시스파니안이 제 핏줄을 거부하게 만드는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관자놀이에서 손을 뗀 플란츠가 잔뜩 찌푸린 눈으로 앞을 쳐다봤다.
낮은 온도의 물에 오래도록 데워 익힌 뒤 치즈를 올려 살짝 구워낸 닭고기를 입에 넣고 야무지게 씹어 삼킨 칼리안이 보인다. 곧 놈의 손이 사과 소스가 올려진 삶은 소고기에 가 닿는다. 아스파라거스를 얇게 저민 돼지고기로 돌돌 말아 구운 요리, 푹 익힌 감자와 돼지 등뼈를 함께 볶은 요리도 동생 놈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아주 잠시 샐러드로 향하려던 칼리안의 손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다시 닭고기를 향해 가는 것까지 지켜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딸기와 꿀을 넣고 갈아 만든 주스 외에, 빵은 물론이거니와 스프며 샐러드며 어느 한 곳에도 손을 대지 않은 채였다. 속이 울렁거렸으니까.
"너."
탄산수를 집어들던 칼리안의 손이 잠시 멈췄다.
'말고, 너.' 하는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느낌이라서.
때문에 네 라고 해야 할지 왜 라고 해야 할지 살짝 고민하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네."
"내가 어제 뭐라고 했는데."
"욕하셨습니다, 아순하신 플란츠 형님 저하."
"······ 말고."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떻게 우리 꽃같은 왕자님께 욕을 할 수가 있느냐' 외치고 있는 듯한 얀과 '우리 순한 저하께서 험한 말을 하실 리가 없지 않느냐' 반박하는 듯한 레릭 사이의 조용한 신경전을 일별하며 생긋 웃었다.
"되게 심한, 욕이요."
그리고 쐐기를 박았다.
인상을 찌푸리던 플란츠가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 다고."
"잘 안 들립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기억이 안 난다고. 그러니까 얘기를 하라고."
플란츠가 불쾌한 얼굴을 해 보였다.
세렌티의 개입을 제외하고는 제 기억이 사라지는 일을 겪어봤을 리 없을 똑똑한 완두콩의 머릿속에서 밤 사이의 일이 쏙 사라졌으니 기분이 유쾌할 리가 있겠나.
"아무튼 술이 좋긴 좋은 모양입니다. 대단한 일을 했네요, 술이."
세렌티가 나서야 겨우 사라지는 기억이 세레누스 반 병 남짓에 쏙 날아가다니.
"기억도 안 나시는 분이 해도 제대로 안 뜬 시간에 찾아와서 입막음을 하려 드십니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냐."
"별 얘기 안 하셨습니다."
"그럼."
"욕 하셨다니까요. 많이. 엄청 많이. 되게 심한 말을 막 저한테."
서럽고 억울하고 답답해진 칼리안이 반쯤 남아있던 스테이크를 적당히 잘라 입 속에 집어넣고 맛있게 씹었다.
"오르테 기억하십니까."
그러더니 그동안 이어진 말을 싹뚝 자르듯 다른 말을 꺼냈다.
완두콩을 놀리는 것이 끝나기도 했거니와 말을 더 주고 받다가는 술주정뱅이가 무슨 주정을 부렸는지에 대해 낱낱이 얘기를 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그 끝에 '제가 멋대로 형님을 좀 재웠습니다. 너무 시끄러워서요.' 라는 말이 붙어나오면 어떡하나.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게 미리미리 조심을 해야지.
"기억해."
거론되지 않은지 이미 오래인 이름인데도 한 번을 되묻지 않은 플란츠가 짧게 답했다. 그리고 레릭이 다시 내어 준 딸기 주스를 몇 모금 더 마셨다.
어찌됐건 속을 풀어야 얘기를 나눌 수 있을 테니, 플란츠가 그것을 삼키는 동안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얀을 쳐다보며 물었다.
"오르테 말야, 얀."
"네, 왕자님."
"너 왕궁에 오고 얼마 뒤에 지병이 있다며 나갔었잖아."
"네. 맞습니다."
"어디가 아파서 어디로 갔었는지 기억해?"
"정확한 병명은 알리지 않았습니다. 시종들간에 서로 출신을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왕궁에서 나간 뒤에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왜 그러세요?"
"어젯밤에 에일라가 데려왔어."
"브리지트 경이 오르테를요?"
"응."
- 달칵.
컵을 내려놓는 작은 소리가 플란츠 쪽에서 들렸다. 그와 함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 어머니가."
자연스레 자신을 향하는 동생의 새빨간 눈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말을 이었다.
"내보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끈거리는 머리 덕에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기는 했으나 그 말 끝에 향기가 들지는 않는다. 아마도 처음으로, 르니에리 향기가 배지 않은 실리케의 기억이 플란츠의 입을 통해 나왔다.
숙취가 심해서인지 전날 르니에리가 아닌 장미 향을 맡은 까닭인지 몰라도 다행한 일이다.
"실리케가요."
"그래."
칼리안이 생각지 못한 이름에 잠시 멈칫했던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민트가 가득 든 탄산수를 한 모금 삼킨 뒤 말했다.
"오르테는 실리케가 손을 쓸 정도로 영향력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말고. 그레이 브리센 때문에."
"그레이 브리센이 껴 있는 일입니까."
"그레이 브리센의 하인과 아우님의 예전 상급 시종이 말을 나누는 것을 내 시종이 봤어."
실리케가 사형되기 이전까지 플란츠의 시종은 전부 다 실리케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플란츠의 시종이 무언가를 봤다면 전부 다 실리케에게 전해졌을 터였다.
"그게 처음이 아니라고, 어머니가 얘기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 아."
칼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덩달아 눈꼬리를 찌푸린 플란츠가 관자놀이를 다시 누르며 말을 이었다.
"모르는 일이었나."
'나는 변경백을 만난 기억이 없는데. 혹시 만났던 적이 있었어?'
'제가 왕자님의 시종으로 오기 전에 한 번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기억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요.'
"얀이 오기 전에, 제가 그레이 브리센을 만난 적은 있습니다. 어렸을 때여서인지 기억은 안 납니다만."
기억이 안 난다.
그레이의 허리를 아작내기 얼마 전, 얀에게 그레이 브리센이 어떤 사람인지를 물으며 함께 나눈 대화 덕에 그레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오르테와 연관된 몇몇 기억은 있지만 그 어디에도 그레이 브리센의 기분 나쁜 눈초리를 겪어 본 일은 섞여있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열한 살은 커녕 걸음을 떼기도 전의 일까지 죄다 낱낱이 기억하는 플란츠가 이상한 것이지.
"그레이 브리센이 아우님을 왜 만났고 아우님의 예전 시종에게 뭘 전했는지는 내 어머니도 모르셨던 것 같은데."
"실리케가 모르고 넘어간 일도 있었습니까."
"알아보기 전에 도망갔으니까."
"오르테가요."
"그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떠올려 보면 기억이 나겠죠. 일단 그럼 오르테를 만나보고 와야 되겠습니다."
"있어."
- 드르륵!
짧은 말과 함께 플란츠가 몸을 일으켰다.
레릭이 다가와 의자를 빼주기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로.
깜빡, 깜빡.
플란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새빨간 눈을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말했다.
"아우님의 새 부하가 돌아왔다며."
"네. 그렇죠."
"아우님의 예전 시종만 데리고 온 건 아닐 것 아냐."
"네. 그렇죠. 서류도 있고 하피 시신도 있고 다른 두 명도 있고요."
"그러니까. 그 시종은 내가 본다고."
저벅, 저벅.
레릭에게 걸어간 플란츠가 몇 마디 말을 했다.
이야기를 들은 레릭이 플란츠에게 무언가를 건네주고 재빨리 밖으로 나간 뒤, 마치 제 방인 것처럼 욕실 근처의 휘장 뒤로 걸어간 플란츠는 레릭이 건네줬던 것으로 느긋하게 양치까지 마쳤다.
"······ 여기 제 방인데요."
칼리안이 기가막힌 얼굴을 하는 사이 레릭이 금세 돌아왔다. 그러더니 얇은 케이프를 덧대어 둘러 둔 형태의 새하얀 재킷을 플란츠에게 건넸다.
"정복은 왜······."
발칸 기사의 정복.
마법사와 치유사가 입는 긴 로브와는 조금 달리 생긴, 기사들을 위한 발칸의 정복이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왕세자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부군단장으로 만나 볼 생각이라는 뜻인 거다.
"형님."
"왜."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형님 지금 란델 형님 노릇 하고 계시는 것 잊으셨습니까."
휘트린의 플란츠는 지금 '플란츠'가 아니지 않나.
"마법사 있잖아. 보고 받고 잠깐 만나러 왔다 할 건데. 왜."
"굳이 그렇게 하면서까지 직접 취조할 생각이십니까."
"그래."
"그럼 저는요."
"또 있다며."
그래. 만날 사람이 많이 있기야 하다.
방금 말한 하피 시신도 그렇지만 외팔이 기사 노튼 라미레즈도 만나봐야 했다. 그런데 평소 같았으면 빨리빨리 같이 가자 할 플란츠가 혼자 나서니 이상하다 여기는 것이었다.
술을 드시더니 사람이 바뀌셨나, 하고.
잠시 생각하던 칼리안이 곧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긴. 볼 사람 빨리 보고 빨리 마무리 짓고 다음 영지도 빨리 돌아보고 가야겠네요. 루시랑 안네 빨리 보려면."
그리고 이렇게, 이 자리에 있는 시종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만한 말을 전했다.
방금 전 칼리안이 그리 말하지 않았나.
그레이 브리센을 만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혹시나 오르테를 마주한 칼리안이 어릴 때의 기억을 다 꺼내놓지 못해 의심을 사게 될까봐 자신이 만나겠다 하는 것일 터다. 어린 날의 기억을 까먹은 칼리안을 대신해서 전날 밤의 기억을 알콜 기운에 훠이훠이 날려먹은 술주정뱅이가.
그래. 틀린 생각은 아니다.
괜한 의심을 살 필요는 없으니까.
- 스윽.
때 잘 맞춰 다가온 얀이 빼주는 의자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킨 칼리안이 말했다.
"그럼 저는 다른 사람들 먼저 만나겠습니다."
"알았어."
"혹시 안 좋은 일이 있더라도 참으시고요. 술도 잘 마시고 싸움도 잘 하는데 입까지 험한 왕세자 저하는 인기 없을 겁니다. 형님 험한 말은 제가 따로 들어드릴 테니까 예쁜 말 쓰고 다니십시오."
"······ 하."
깊은 짜증이 가득 묻은 한숨소리가 방에 남겨졌다.
르니에리 향 말고 한숨만 내뱉은 플란츠가 저벅저벅 밖으로 나갔고 레릭이 그 뒤를 따라 나섰다.
"얀. 형님한테 팔찌 돌려 받았지?"
"아뇨. 안 주셨는데요."
"아직도?"
"네. 아직이요. 그거 제 거 아닌 것 같아요. 저 쓰라고 주시더니 맨날 뺏어가요."
"이런. 내가 그냥 새로 사줄까?"
"네. 그냥 새로 사주세요."
"그래. 돌아가면 사줄게. 새끼 코끼리 그림도 그려 넣어 줄게."
"왕자님 그림 못 그리시잖아요."
"열심히 그려볼게."
"네에."
"그러니까 삐치지 마."
"네에."
넷이 있다 둘이 나가고 둘만 남은 방에 어여쁜 왕자와 새끼 코끼리의 목소리가 맴돈다.
"팔은 어떠세요? 아까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다 나았어."
"많이 아프셨어요? 레아 혼내드릴까요?"
"많이 아팠지, 당연히. 뭐라고 좀 해줘."
"네. 제가 꼭 얘기할게요."
"응. 꼭."
"네. 꼭."
도란도란, 이르게 일어나게 된 김에 잠시 그렇게 여유를 부렸다.
* * *
아침잠이 그리 많지 않았다.
때문에 시종 덴을 늘 고생시키곤 했다.
아주 오래 전, 아직 상급 시종이 되지 않았던 덴이 지금의 칼리안보다도 더 어렸을 때. 억지로 일어나느라 시뻘겋게 된 눈을 갑작스레 번쩍 뜨거나 새어나오는 하품을 참으려 제 허벅지를 꼬집는 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
그런 덴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었다.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 천천히 와도 괜찮다. 그런 말도 하지 않았다.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저하."
그러나 덴은 이렇게 말했던 적 없었다.
어떻게든 제가 모시는 왕자보다 빨리 일어나려고 부지런히 준비를 마치고 5층 방문을 두드렸을 뿐, 단 한 번도 '무슨 꿍꿍이로 벌써 일어나 있느냐'는 의미가 가득 담긴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럼. 안 되나."
"······ 아닙니다, 저하. 죄송합니다."
침착하게 대답하며 허리를 숙여 보이는, 파비안의 영주 대리인 바르지안 백작을 잠자코 내려다보던 란델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둠이 갓 걷힌 창문에 비치는 연두색 눈동자를 마주보듯 쳐다봤다.
'눈을 감으십니다.'
아랫사람에게 화를 낼 때의 플란츠가 어떤 말을 하는지 물었을 때 키리에는 그리 답했다. 플란츠의 일거수일투족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보고 들은 플란츠는 늘 그랬다고.
'참는다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기세좋게 대들다 못해 5층에 쳐들어와 창문까지 깨버리던 성질머리는 다 어디다 버려두고 다닌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4층 사람의 눈에서 시선을 돌린 란델이 입을 열었다.
"어제 얘기한 건."
"어제 말씀이십니까."
"그래. 어제."
"아직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저하."
그레이 브리센이 란델 왕자와 지속하여 접촉 중이라는 이야기는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더해 세르제인이 직접 서한을 보내 란델과의 친목을 다지고 싶다 전했던 일에 대해서도 모두 소문이 났다.
혹시나 란델이 자신이나 플란츠의 세력에 해를 입을까 우려한 칼리안 덕에 널리널리 퍼진 것이었다. 란델 역시 지지기반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파비안에서는 아직 희망을 놓지 않았음이리라.
란델도 아직 늦지 않았다고. 충분히 왕위에 오를 수 있으리라고. 비록 그레이 브리센이 왕궁에 억류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브리센이 휘청일 일은 없을 테고, 오래지않아 란델의 자리도 다시 굳건하게 다져지리라고.
그런 망상 말이다.
"내가 무엇을 지시했는지. 기억은 하나."
언제나 충성스러웠던 파비안의 영주 대리인을 내려다보던 란델이 조용히 물었다. 잠시 고개를 든 바르지안 백작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무엇을 얘기했나."
"라시드 브리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말이 빠르지 않고 목소리의 높낮이가 거의 없다. 가벼운 웃음을 흘리는 대신 눈빛이 날카롭다. 그리고.
싫은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일부러 감춰내고 억지 웃음을 짓지 않는다.
휘트린 영지의 귀족들은 적어도 웃음은 보였다.
그때에는 그곳의 영주인 칼리안이 함께 있어서였을지, 아니면 이곳의 귀족들이 플란츠를 더 싫어해서인지.
"무슨 이야기를."
가늠하는 대신 다시 물었다.
건조하고 차갑고 낮은 음색.
그런 것이 자신을 향했음에도 큰 동요를 보이지 않는 바르지안이 대답했다.
"라시드 브리센이 이곳에 나타난 정황이 있는지 확인하라, 라시드 브리센과 연관된 이가 있는지 찾으라, 그리고."
바르지안이 조금 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던 '왕세자'의 연두색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라시드 브리센을 혹시 숨겨두고 있다면 내놓아라······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무례하지 않을 만큼의 눈빛으로 마주 쳐다보던 바르지안이 말을 맺었다.
"헌데. 확인된 바가 없나."
"없습니다."
"확인은 했나."
"아직 제대로 나서지 못했습니다."
"하룻밤이 짧았나."
"짧았습니다."
"······ 그래."
바르지안을 내려다보는 '플란츠'의 눈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허면. 하나만 더 묻겠다.'
'네. 란델 왕자님.'
'막내가 아랫사람에게 화를 낼 땐, 어떻게 하느냐.'
침착하게, 키리에의 대답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