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장. 얻어낼 게 많아서(1)
어떻게 잊겠나.
오늘이 두 번째인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은 얼마 전이었다. 알싸한 술 대신 향 없는 꽃이 있었다. 날은 조용하고 해는 기울어갔다. 얼음칼에 베여 생긴 상처에 붕대를 감은 채였음을 기억한다. 완두콩이 제가 흘린 소금물에 불려질 줄 알았는데 하나도 안 불려졌기에 억울했던 기억도 난다.
그날이 처음이다.
그리고 오늘이 두 번째다.
- 달그락.
쌓인 것을 어떻게 풀어야 되는지도 모르고 살던 답답한 완두콩에게 토해놓는 법을 가르치느라 내 상처가 도로 벌어진 날을 말함이다.
완두콩이야, 뭐.
그때 처음 울었든 오늘 두 번째 울었든. 오늘 제 속내를 처음으로 털어냈든 말든. 굳이 수를 따져 볼 필요가 있겠나. 키리에가 뻗어내던 검을 드디어 막았듯 이미 진작부터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을 이제야 하게 되었을 뿐이니 뭐 대단한 일이라고 수를 세고 의미를 따지겠나. 사람이 자랐을 뿐인 것을.
그런 생각에 베른은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잘한다 부추기지도 않고 잘했다 다독이는 말도 더 건네지 않고 자리만 지켰다.
- 달그락.
- 조르륵.
그 덕에 목소리는 오가지 않고 그저 고요히.
한 놈은 고개만 숙인 채로, 다른 한 놈은 벌어졌다 다시 아물어가는 팔로 연신 술잔을 들어올리는 채로, 저절로 숨죽은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달이 어느만큼인가 움직였다.
바람이 조금 더 불다 조금 더 빨리 떠나고 그 결에 짙은 꽃향이 남겨지다 지나갔다. 흰빛이든 붉은빛이든, 꽃의 색과는 상관없이 한 가지일 장미 향이 스치듯 찾아오면 혹시나 그것이 다시 르니에리 향일까 우려한 바람이 잠시 불어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다시 어느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막연한 시간이 묵묵히 흘렀다.
"베른."
텅 빈 술병이 두 개로 늘어날 때까지.
팔에서 올라오던 욱씬거림이 절반 쯤으로 줄어들 때까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다시 들릴 때까지.
"어."
몇 잔 째인지 모를 술을 제 잔에 다시 채워넣던 베른이 대답했다.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놈을 쳐다보지 않은 채로, 알싸한 향을 조륵조륵 흘려내는 새 술병 끝을 가만가만 내려다보면서.
"왜."
무뚝뚝한 건지.
우는 놈을 보는 일에 익숙하지가 않은 건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을 이유로 만들어진 건조한 목소리가 한 번 더 베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자 건네진 대답을 물끄러미 듣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풀어."
"뭘 풀어. 목줄 풀어?"
"말고. 당신 붕대."
그 대답 참 건조하기도 하다.
이런 생각에 베른이 씩 웃었다.
한밤인데도 오래도록 피가 제대로 돌지 못한 손이 파랗게 변한 것이 눈에 띈다. 모습을 바꾼 까닭에 얀이 매 준 붕대가 꽉꽉 조인 까닭이다.
"의외네. 입 험한 너 가고 착하고 예쁜 내 동생 도로 내놔라 할 줄 알았더니."
부러 농담을 하긴 했으나 플란츠의 말이 의외인 건 맞았다. 상처를 조이던 붕대를 풀어두고서까지 계속 있으라는 식의 말을 할 줄은 몰랐으니까.
"짖······ 풀라고. 붕대."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베른이 술잔을 내려놓고 소매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대충 걷어올린 셔츠 소매 밑에서 찾아낸 붕대의 끄트머리를 죽죽 잡아당겨 둘둘 풀어냈다.
얀이 없는 솜씨를 부린 붕대였으니 변장을 풀 때까지 그냥 두려 했지만 어쩌겠나. 그새 많이 아물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평소였다면 상처부터 신경썼을 파릇파릇한 놈이 생소한 고집을 부리는데. 들어줘야지.
- 툭.
대충 감은 붕대를 바닥에 내려 둔 베른이 술잔을 다시 집어들었다.
알싸한 술냄새 사이로 약한 피냄새가 든다.
마지막에 딸려나온 붕대에 묻은 피를 본 플란츠가 물었다.
"많이 다쳤나."
울어서 어색한 모양이다.
괜스런 얘기를 꺼내는 것을 보니.
"괜찮아. 이 정도는."
갑작스레 뻗어나온 드미레아의 오러에 살짝 베였던 팔을 슬쩍 일별한 베른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제야 보게 된 완두콩의 얼굴 덕에 미간을 구겼다.
그래. 저럴 줄 알았다. 역시나 운 티가 하나도 안 나는 희멀건한 얼굴이라니.
질렸다는 듯 실소한 베른이 입을 열었다.
"다 울었어?"
"안 울었어."
"다 울었네."
"안 울었어."
"더 울 거야?"
이번에는 플란츠의 눈꼬리가 찌푸려진다.
말 잘 듣는 내 동생이었으면 이미 '네' 하고 끝났을 것을 계속 물고 늘어지고 있어서다. 겉모습을 하나 바꿨다고 어떻게 저렇게 달라지는지.
쓸데없이 세심해서 동생 말고 친구를 불러다 놓는 것에도 열과 성을 다하는 놈을 보던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안, 울었어."
"괜찮아. 사람이 울기도 해야 살지."
- 조르륵.
"······ 그래."
"다 울었어?"
"다 울었어."
"그럼 됐어."
- 찰랑!
"넌."
"나, 뭐. 나는 울 일 없는데."
"울어서 살았나."
다시 비게 된 잔에 알아서 술을 채운 플란츠가 물었다. 술잔 끝을 입에 댄 채 잠깐 기억을 되짚어보던 베른이 피식 웃었다.
"······ 나는."
잠시 고여있던 별빛이 한동안 출렁인다.
그리 보이는 머리카락을 길게 쓸어넘긴 베른이 말을 이었다.
"못 울어서 못 살았지."
"잘 울던데. 내 동생은."
"못 살다가, 나중에 배워서. 그래서 당신 동생은 이제 잘 울지."
"당신 형이 가르쳐줬나."
"아니. 키리에가."
"어떻게."
질문이 많다.
유난히 많다.
고집을 부린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벌어진 상처를 굳이 풀어놓고서라도 더 머무르다 가라 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 이런."
베른이 웃으며 말했다.
"어쩌나. 난 위로받을 생각 없는데. 플란츠."
"위로할 생각 안 해."
그랬더니 플란츠가 곧장 대꾸를 했다. 대단한 오해라도 받았다는 듯 잔뜩 짜증난 얼굴을 하고서.
제 생각이 틀렸다는 말에 짐짓 의외라는 얼굴이 된 베른이 되물었다.
"안 해?"
"당신 위로하겠다는 멍청한 생각 안 해. 그런 생각은 레넌도 안 해."
놈의 생에 위로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은 그 멍청한 레넌도 하지 않을 것이다. 놈의 생 어느 한 자락에라도 위로를 건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그렇게나 자만한 휘트린도 가지지 않을 터다.
'나는 이렇게. 밀밭 너른 곳에서 원수 같은 친구 새끼랑 좋은 술 훔쳐마시고 있으니 됐지.'
하루하루를 살다 최선을 다해 죽었음을 이미 잘 아는 놈의 생에 칼리안이 아닌 다른 누가 감히 위로 따위를 건네려 들 수 있을까.
"안 한다니 다행이네."
"그래."
"그런데 왜 자꾸 물어봐. 나를."
"들어주려고."
"뭘."
"당신 얘기."
"왜. 재밌어서?"
"별로. 재미없어."
"그럼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는 이유는.
"궁금해서."
알아주려고.
위로할 줄 모르는 베른이 어떻게든 플란츠를 달랬으니. 위로받은 플란츠는 위로받을 일 없는 베른을 알아주려고.
"궁금해?"
"궁금해."
"내 얘기 들어줄 거야? 플란츠."
"들어줄 거야. 전부 다."
데블란의 그림자가 더 길고 짙었던 것을 이제야 알게 되어 속이 아릴 것이 분명한 베른을. 이미 사라진 유령의 발자국을 이제야 알게 된, 이미 사라진 베른을. 취하지도 않을 술을 대신해 어떻게든 알아주려고.
"내 얘기를 들어서 뭘 하려고."
"안 잊어버릴 거야."
"안 잊어버리면 뭘 하려고."
"나중에 기억 찾으면 얘기해주려고."
"누구한테 무슨 얘기를."
"당신한테. 당신도 잘 견뎌서 잘 살았다고."
"당신 때문에 죽은 놈한테 잘 살았다 칭찬을 해주겠다고?"
"그래."
"나는 그럼 딱 한 대만 패 줘야지."
"그러던지."
"미친 놈."
"미친 새끼."
지지않고 돌아오는 말에 베른이 킬킬대듯 웃었다.
"키리에가······ 우는 법을 알려준 게 언제더라······."
그리고 가만가만.
자신이 언제 처음 울었는지에 대해 기억을 더듬었다.
체르밀 궁의 3층에서 꾸지 않던 꿈을 꿨던 밤, 체이스의 머리가 본래 짧았음을 떠올리고 울었던 자신의 기억 말고. 체르밀 궁의 호수에 발을 디뎠던 날, 손등에 내려앉은 풀벌레에 놀라서는 상급 시종이었던 오르테의 품에 안겨 눈물 콧물을 쏙 빼놓으며 울었던 자신의 기억 말고.
그보다 좀 더 시끄럽고 얼얼했던 자신의 기억을 꺼내놨다.
"때렸어."
"당신을. 키리에가."
"응. 키리에가 나를."
"맞았나."
"그렇지. 그걸 또 맞았지, 내가."
오른쪽 주먹을 쥐여 보인 베른이 그것을 가리켜보이며 말을 이었다.
"키리에 주먹 봤어? 엄청 커. 그거 아파."
"차여 보기만 했는데."
"그래. 걷어차는 것도 잘 하지."
"······ 어긋난 뼈도."
"맞아."
씩 웃은 베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긋난 뼈도 잘 맞추고. 키리에가 그래. 잘 하는 게 많아."
"맞아서 울었나."
"맞아서 울었지."
"아파서."
"응. 아파서."
"잘했네."
"잘 하지, 나야 당연히."
"말고. 키리에가."
단호하기도 하다.
"잘 했지. 키리에가."
"그래."
"고마웠지. 키리에에게."
"나도."
"당신도 고마웠어, 키리에한테?"
"말고. 당신한테."
"고마워할 사람 다 죽었나······ 엉뚱한 사람을 찾네."
"고맙다고. 당신한테."
"원수 같은 친구 새끼한테 고맙단 말 들어봐야 좋을 것 없는데. 나는."
"좋든 말든. 고맙다고."
한겨울의 모래밭같은 웃음만 뱉은 베른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플란츠가 또 질문을 했다.
"술은 왜 마시는데."
"맛있잖아."
"없어."
"맛있는데."
"별로."
"돌잖아. 빙글빙글. 얼마나 맛있는데, 그게."
빙글빙글.
손가락을 뻗은 베른이 그것을 뱅뱅 돌렸다.
"술을 마시면 전부 다 빙글빙글 돌지. 그래서 마셨어. 나만 돌면 재미없잖아, 세상도 돌아야지. 그럼 나만 돈 놈이 아니게 되니 나는 제자리를 찾고, 똑바로 걷고. 얼마나 좋아."
돌은 놈이 생각할 법한 이유를 댄 베른이 다시 한 잔을 마셨다.
"그래서 마시나. 지금도."
키리에가 그렇게 살게 된 이유가, 그레이 브리센이 남매의 아비에게 칼을 뻗은 그 이유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실리케든 프레이야든 왕궁에 들어갈 일이 생기지 않았을 왕비 아이샤가 죽은 이유가, 란델이 홀로 자라게 된 그 이유가.
프레이야가 왕궁에 들어가고 실리케가 왕비가 되고. 시간이 흘러 칼리안에게 독차가 건네지고.
······ 그 자리에 베른이 들어서고.
그 모든 일의 시작이 결국 데블란이었는데. 나락으로 찾아가 원망을 하지도 못할 데블란인데. 이미 지난 일에도 돌아버릴 것 같아서.
그것이 아려서 술을 가져왔는지.
"아니. 맛있어서 마시지. 지금은."
어깨를 으쓱인 베른이 답을 전했다.
"아버지가 뭘 했든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건데 아버지랑 뭔 상관이야. 당신 내 탓 할 거야?"
"아니."
"그럼 됐지. 키리에도 히나도 란델도 당신도 전부 다 내 탓을 할 놈들이 아닌데, 원망도 안 받으면서 내가 왜 나를 또 아버지랑 엮어놓나."
"그래."
"아버지 일로 나 위로할 생각도 하지 마. 그게 더 싫어."
"안 한다고."
"당신 동생도. 위로하려 들 필요 없어."
"······ 왜."
"당신 동생은, 그냥. 시간이 지나면 돼."
- 조르륵.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된 채로 참 평범한 스물 일곱 번째 생일이 되면. 너 참 잘 살았구나, 앞으로도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 그렇게 잘 살아라. 그런 말이나 해 주면 돼. 그말이 듣고 싶어서 살고 있으니까."
"싫어."
"뭐가. 왜, 또."
"싫어."
"그러니까. 뭐가."
"참견도 하고 다른 말도 할 건데. 얌전히 지켜보다 말 한 마디만 해 줄 생각 없어."
"누가 손 놓고 지켜보랬나. 내 말은 그게 아니라,"
- 휙!
베른의 말을 자르듯 그 손에 들려 있던 술병을 빼앗아 든 플란츠가 제 잔에 술을 따랐다. 마셨다. 그리고 다시 따라 또 마셨다.
그러더니 또, 다시, 또.
빈 속에 그 독한 술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플란츠."
칼리안이 그러하듯 축복이 술기운을 안 걸러주는지를 몸소 확인해보고 싶어하는 건지. 늦었지만 이제라도 망나니의 길에 올라보려는 건지.
"플란츠. 적당히."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한 베른이 술에 절인 완두콩이 되겠다는 심산인 듯한 놈의 손에서 술을 뺏으려 손을 뻗었을 때.
"······ 개새끼."
살기등등한 완두콩의 낮은 목소리가 베른을 막았다.
상황 파악 덜 된 베른의 연보라색 눈이 잠시 꿈뻑였다. 그러자 한 쪽 입꼬리를 쭉 말아올린 완두콩이 나지막이 말했다.
"개같은 새새끼."
아니.
욕을 했다.
"나? 나한테 욕한 거야?"
그러자 놀랍게도, 완두콩이 한심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말고, 미친 새끼야. 새새끼."
"······ 아. 다른 새끼 얘기구나."
아. 다행이네.
"에반보다 옹졸하고, 레넌보다 멍청하고, 그레이보다 거만한 그 새새끼."
"세렌티 얘기야?"
"그래."
"무슨 그런 험한 말을 해."
아니 세상에.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지.
에반에 레넌에 그레이라니. 아무리 세렌티라지만 너무 심하잖아?
"세렌티가 깨어나서 네 말 다 들었다 하면 어쩌려고."
"그 새끼 나도 같이 욕해주고 같이 화내고 같이 싸울 건데, 뭐. 나도 내 동생이랑 같이 욕하겠다는데, 왜."
"아니, 나도. 아니. 당신 동생도 그런 심한 말은 안 했어."
"그래서. 뭐."
"······ 아니. 그냥 그렇다고."
갑자기 플란츠가 왜 저러는지는 별로 안 궁금했다.
저 꼴을 보면서도 상황 파악이 안 된다면 그야말로 다누다. 완두콩이 눈빛은 커녕 낯빛 하나 안 바뀐 얼굴을 하고 있다 해도 저 입에서 나오는 저런 말을 듣고서도 모르면 진짜 다누다.
"플란츠. 내 생각에 당신 지금,"
"너."
"응."
"말고, 너."
"······ 네."
얌전히 돌아온 칼리안이 대답을 전했다.
낯색은 커녕 어디 하나 달라지지도 않은 눈으로 제 동생을 불러내 쳐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나도 칼 쓸 줄 알아."
뜬금없이 제 능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확실하다.
지금 플란츠는, 한 마디로.
"형님. 취하셨습니까."
알콜 수용 한계선을 넘어섰다.
돌았다는, 아니. 취했다는 뜻이다.
"나도 싸울 줄 알아."
"아시겠죠."
"칼도 쓰고 싸움도 하고 화낼 줄도 알아."
"그렇겠죠."
수면제도 잘 듣고 마취제도 잘 듣고.
술이 세기는 하지만 알콜도 듣기는 참 잘 듣나보다.
"나도 알아, 미친 동생 새끼야."
"네. 아십니다."
"칼 쓸 줄 알아. 활도 쓸 줄 알아."
"네에. 칼 쓸 줄 아십니다. 활도 쓰십니다. 싸우는 법도 잘 아십니다. 게다가심지어똑똑하신우리형님 마법도 잘 쓰십니다."
"마법은 못 써."
그 와중에 마법은 또 못 쓴단다.
그놈 참 발음 하나 안 꼬이고 주사 한 번 잘 부린다.
칼리안이 흉터가 성성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덮었다.
"아······ 어떡하지."
······ 환장하겠네.
그것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완두콩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마법은 못 쓴다고."
"네. 마법은 못 쓰십니다. 아무렴요."
"당신."
"네."
"말고."
아.
세렌티시여.
"대답. 베른."
슬립 주문이 어떻게 되더라.
써본지 너무 오래라 기억이 안나는데.
그냥 재워버릴까.
"······ 왜."
이런 생각을 애써 훠이훠이 날려 버린 베른이 대답했다.
"당신."
"그래. 나, 또, 왜."
"······ 오지 마."
깜빡, 깜빡.
두어 번 눈을 감았다 뜬 베른의 입꼬리가 천천히 움직였다.
긴 호선을 그렸다.
* * *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찰나와 같은 고민을 했다.
때문에 되묻지 못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나에게 말한 것이 맞는지.
그런 베른을 보던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고. 그게 아니라."
술기운에 입이 말라 소리나지 않았던 말을 더해서, 힘주어 꾹꾹. 한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눌러쓰듯이 또박또박 말을 고쳤다.
"아플 때 오지 마. 아픈데도 오지 마."
느릿느릿.
"괜찮을 때 와."
이런 소리를 했다.
그래서 베른은 물끄러미, 플란츠의 연두색 눈을 쳐다보다가.
"무슨 소리야."
알아듣지 못한 척 되물었다.
짤랑, 짤랑.
손에 쥔 마지막 술을 빙빙 돌려가며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조용조용 말을 전했다.
"나 때문에 상처 벌리면서 오지 말고 기분 좋을 때 와. 아플 때 말고 괜찮을 때 와."
"안 괜찮아 보였어?"
"안 괜찮았잖아. 체스 둘 때도 오고 술 마실 때도 오고 밥 먹을 때도 오고, 대련할 때도 오고. 다 좋으니까. 나 때문에 와서 다시 다치지 말고 당신 때문에 오라고. 당신 괜찮을 때 오라고. 숨 막혀서 숨 쉬러 오는 것도 괜찮으니까. 찾아와서 숨 못쉬는 짓 좀 그만하라고."
연보랏빛의 눈 아래로 새빨간 입술의 사이에서 작은 한숨이 나온다. 그 숨의 끝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나온다.
"그러다 당신 친구 영영 못 보면 어떡하려고."
"싫어."
"싫어?"
"오지 말라는 게 아니고 괜찮을 때 오라고. 답답한 새끼야."
"왜 자꾸 욕을 해?"
"당신이 가르쳤잖아."
"내가 언제?"
"당신이 계속."
"당신한테 욕은 안 가르쳤어."
"그럼 가르쳐주던가."
"그걸 왜 가르쳐? 얘기가 왜 그리 가?"
"계속 와서 계속 가르쳐주던가."
바람이 불었다.
"괜찮을 때 와서. 아플 때 말고. 괜찮을 때."
"괜찮을 때 와서 당신 욕이나 가르쳐주라고?"
"그렇게 하라고."
바람이 불었다.
베른이 웃었다.
"그래."
대답을 전했다.
"그렇게 해볼게. 플란츠."
"응."
"응."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 이제 자라고, 그런 말을 하기 위해 베른이 입을 열려는데 플란츠의 말이 먼저 들려왔다.
"너."
아직 할 말이 남았나보다.
"왜."
"말고."
"하······ 네."
아.
시스파니안이시여.
당신의 후손이 동생 영지 영주성 지붕에서 술처먹고 주사를 부리고 있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칼리안, 너."
"네에. 칼리안 여깄습니다."
뼈가 불거진 손가락 하나가 칼리안을 가리켰다. 계속 계속 잦아드는 메마른 목소리가 칼리안을 향했다.
"나중에 마법 배울 거니까. 너한테."
"네."
"죽지 말고, 다치지 말고······."
"네."
흐려지지도 않은 파릇파릇한 눈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힘들면 얘기 좀 해. 미친 동생 새끼야."
칼리안이 물끄러미 플란츠를 쳐다봤다.
"지금 누가 할 소리를."
"나도 들어줄 줄 아니까. 말 좀 해달라고."
"딱히 숨긴 적은 없는데요."
"얘기를 해야 달래줄 것 아냐. 답답한 새끼야."
"······ 하."
"나도. 달래줄 테니까."
"그러니까 제가 딱히,"
"대답. 칼리안."
아.
망할 완두콩.
키리에의 주사는 조용하기나 했지. 내 따까리가 부리는 주사는 웃기기나 했지.
[ 슬립 ]
더는 못 들어 주겠다. 친구 꺼내왔다가 동생으로 돌아갔다가, 내가 도무지 헷갈려서 더는 못 해먹겠다.
- ······ 스륵!
플란츠의 고개가 툭 떨궈졌다.
그렇게 앉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잠든 완두콩을 내버려 둔 칼리안이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완두콩이 반을 비워내고 남은 술병을 도로 가져와 제 잔에 담았다.
"아······."
그러다 결국.
"환장하겠네······."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파도도 향기도 빗방울도 추운 서리도 아닌 그냥 웃음이 터져나왔다.
울고 나서 잠들면 어떻게 되는지 봐라.
아무리 형님이래도 두꺼비가 돼 있을 거다.
이런 생각에.
- 조르륵.
- 탁!
쪼그려 앉아 고개를 파묻고 동글동글 잠든 완두콩을 내버려두고 웃다가, 술잔을 입에 대다가.
다시 웃다가.
다시 술을 마시다가.
"네."
하고.
"알겠습니다."
늦어도 한참 늦은 대답을 전했다.
"뭐를 알겠어요?"
그런데 그 말에 대해 대답이 들려왔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웃었다.
"뭐야. 나 고생하는 동안 또 술 마셨어요?"
언제든 마주할 수 있을 바다같은 목소리가 들려온 까닭에. 바람에 흐트러지는 청은발 사이로 작은 새의 날갯짓같은 걸음걸이가 보인 까닭에.
그래서 웃었다.
"어서 와. 에일라."
"응. 다녀왔어요."
"그래."
소리없이 걸어온 에일라가 재주 좋게 몸을 말고 잠든 플란츠를 보며 실소했다. 그러더니 영주성에 들어오며 벗어 들고 있던 검은 로브를 플란츠의 위에 덮어씌웠다.
덕분에 완두콩 말고 까맣게 태운 개암 열매같은 모양새가 된 플란츠를 그렇게 내버려둔 에일라가 플란츠와 칼리안의 사이로 들어와 앉았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술병을 들어 향을 맡다 입을 열었다.
"세레누스네."
이제껏 칼리안이 마셨던 술. 세크리티아의 것과 색은 좀 다르지만 향은 같은 술. 세레누스였다.
"엘프들이 술 만드는 법을 세크리티아에서 배워 왔나."
"그럴 리가 있나."
"그럼 세레누스가 어디서 났어요?"
"세이렌 경이 따로 구해다 줬어. 영주성에서 아무 거나 훔쳐오랬더니 훔쳐오지는 않고, 재주도 좋지. 어떻게 알고."
"왕자님 비밀 들킨 보람이 있네."
"있지, 그럼. 비밀 들킨 보람이 한 둘이 아니지."
언제든 달가운 향에 기분 좋은 표정을 지어 보인 에일라가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피식 웃으며 자신의 잔에 남은 술을 털어마시고 빈 잔을 건넸다.
에일라의 손 끝에서 짙은 피 냄새가 난다. 에일라의 것은 아니다. 때문에 마법을 부려 피 냄새를 씻어내줄까, 잠시 생각하던 칼리안이 그냥 술병을 들었다. 에일라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세레누스를 양껏 따라주기만 했다.
더운 바람이 불고, 멀리 잔잔히 흔들리는 바다는 온통 연두색이고, 곁에 앉은 3왕자의 머리에는 별빛이 들고. 손에 들린 세레누스의 향은 그저 기껍고.
"좋네."
유일하게 좋아하는 술을 오래도록 마신 에일라가 말했다.
"기분은 풀렸어요?"
그리고 물었다.
"기분 안 좋았던 건 어떻게 알고."
"그 모습을 하고 저하랑 몰래 숨어서 술이나 마시고 있는데, 그럼. 눈치를 못 채나."
"풀렸어. 좋아졌어."
"싹 풀렸어?"
"응."
"아, 조금만 빨리 올걸."
"왜."
조근조근.
속삭이듯 노래하듯 이어지는 에일라의 목소리가 달갑다.
"나를 봤어도 왕자님 기분은 풀렸을 텐데요."
"어차피 기분은 풀리는 건데 달라질 게 있나."
"그랬으면 술이 더 남았을 것 아냐."
"술이 아쉬워?"
"아쉽죠, 그럼."
"아. 나는 또 내가 아쉬운 줄 알았지."
"왕자님이 아쉽다 하면."
"설레야지, 또."
"아, 아쉽네. 아쉽다 해볼 걸."
"그러게. 아쉽네."
칼리안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다시 조르륵, 마지막 남은 세레누스를 에일라의 빈잔에 다 털어 따라줬다.
그것을 손에 들고 말없이 쳐다보던 에일라가 입을 열었다.
"가서 뭘 봤는지, 뭘 얻어왔는지. 안 물어봐요?"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
휘트린 영지 인근의 또 다른 영지, 데이른 남작령.
제온의 군사들이 그곳에서 왔으리라 여긴 에일라가 몇몇 발칸 대원들과 함께 조사를 나서지 않았던가.
조사를 마치고 돌아왔으니 소득이 있든 없든 궁금증이 있을 텐데 묻질 않으니 하는 말이었다.
날선 연보랏빛 눈을 보다 이유를 가늠한 에일라가 말했다.
"피곤하구나."
"응. 조금."
"괜찮아요. 듣고 나서 당장 뛰어나가야 할 소식 아니야."
"뭔데?"
"남작은 죽었고 남작 가신들도 죽었고 영주성 하인들은 온데간데없이 다 도망쳤고. 지하 감옥에 폭발이 일기에 들어가 봤는데 다 죽어가는 죄수 세 명만 있었어요."
"그래서."
"숨겨뒀던 서류 몇 장 찾아내서 들고 왔고. 비밀통로에 죽어있던 하피 시체 하나, 그리고 그 죄수들 데려왔어요."
"수상한 죄수가 있었어?"
"응. 두 명은 나도 조금 아는 사람. 한 명은 왕자님이 잘 아는 사람."
"누구."
"라트란 영지에서 만난 외팔이 검사요. 하얀 수리가 분장했던."
"노튼 라미레즈?"
"네. 그 사람이랑 그 사람 아내까지 둘."
"살아있었네."
"네. 살아있었네요."
"다른 한 명은 누군데."
"오르티에 로즈난이라는 할아버지였어요."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익숙한 이름이 아니었다.
다만 그 이름이 온전히 낯설지만도 않았던 까닭에.
"······ 혹시 그 사람."
"칼리안 왕자님의 시종이었대요."
상급시종 오르테.
괜스레 요즘 그렇게나 생각이 났던, 얀이 오기 전까지 칼리안을 키웠던 사람. 나이가 들고 지병이 생겨 왕궁을 나갔던 사람.
"왕자님 잘 계시냐고, 그것부터 묻던데요. 기억 나요?"
"아······ 응. 기억 나."
칼리안이 잠시 풀어뒀던 팔의 붕대를 주워들었다.
길었던 머리가 눈을 가리지 않을 만큼만 짧아지고, 별빛 대신 밤하늘을 담았다. 키가 줄어들고 손의 흉터가 하나하나 사라져갔다. 흐린 새벽 같은 빛 대신 바다를 비출 해의 빛을 눈에 담았다.
"당장 만나시려고요? 그 정도로 간당간당한 사람 아니에요. 피곤하다며."
걱정 어린 목소리가 칼리안을 향했다.
그래도 만나봐야지, 하고 대답하려던 칼리안의 붉은 눈이 검고 동그란 것에 가 닿았다.
새록새록 움직이는 걸 보니 죽은 건 아닌 완두콩의 등짝을 잠깐 내려다 보다가.
"쉴게. 내일 만날게."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하지 않았을 말을 했다.
"그래요. 잘 생각했네."
"응."
"쉬세요. 고생했어요."
에일라가 그렇게 좋아하는 세레누스의 마지막 남은 반 잔이 칼리안에게 내밀어졌다. 그것을 받아든 칼리안이 피식 웃으며 남은 술을 입에 넣고 달게 삼켰다.
"그래. 에일라."
사람이 쉴 때도 있어야지.
아무렴.